남한산성의 비극과 산성 안에 닭백숙 집이 유명한 사연,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 어느 때에 가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인조반정으로 임금에 오른 인조는 무능하고, 그 당시의 지식인이자 벼슬아치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만 몰두했던 대부분의 벼슬아치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 여기저기 보이는 닭 백숙집, 왜 이곳에 백숙집이 많을까? 원교 이광사의 아들로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의 책에 그 답이 있었다.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은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고, 도중에 만나는 성은 공격하지도 않았다. 질풍처럼 내달려온 청나라 군사는 3일 만에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그 당시 난을 피하여 지킬 만한 곳은 강화도와 남한산성뿐이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김상용과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에게 종묘(宗廟)․사직(社稷)의 신주를 모시고 원손, 봉림대군(鳳林大君), 세자빈과 함께 강화도로 난을 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1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진을 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었는데, 겨우 50여 일을 견디어낼 수 있는 식량에 불과하였고, 날이 갈수록 성안의 상황은 어렵기만 했다.
“성중의 온갖 것이 군색해지고,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 있는 것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었다.(...)
이때 임금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못하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더니, 전교하여 이르기를, “처음 입성하였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절무絶無하고 어쩌다 겨우 있으니, 이것은 나에게만 바치는 까닭이니,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라.”
<연려실기술>에 실린 글이다.
큰 싸움은 없었지만 40여 일이 지나자 성 안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외세의 침략을 죽음으로 막아내자는 척화파의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히 맞서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주화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 하고 삼전도(三田渡)에 내려가 항복하고 만다.
그때가 1637년 1월 30일 아침이었다.
용골대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이 성 밖에서 임금이 내려오기를 재촉했고, 임금은 곤룡포 대신 남색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서문을 거쳐서 내려왔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치욕이 어디 그것뿐이랴. 결국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그리고 봉림 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종일토록 행군하여 큰 길에 세 행렬을 짓고,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이 앞서 가고, 한 두 오랑캐가 뒤따라갔다. 후일에 심양에서 속바치고 돌아온 사람이 60만이나 되는데, 몽고 군사에게 붙잡힌 자는 이 숫자에 들지 않는다. 임금이 차마 이것을 볼 수가 없어 환궁 할 때에 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서산西山과 송천松川을 거쳐 산을 따라 신문新門 필시筆市에 들어가니, 산 위에 노파가 있다가, 손바닥을 치면서 말하였다.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修築하여 놓았는데, 검찰사檢察使 이하가 날마다 술잔 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랴. 나의 네 아들과 남편은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다만 이 한 몸만 남았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그 말을 들은 사람 중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글로 그 당시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 문제 또한 심각했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싼 경우가 1인당 25내지 30냥이었고 대개는 150내지 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는 1500냥에 이르기 때문에 대부분 끌려간 사람들이 빈민 출신이라 속贖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때 그렇게 속가가 비싸게 되었던 이유가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류가 그 첩의 딸이 청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을 용골대와 마 및, 역관 정에게 심히 구차스럽게 청탁하니, 임금에게까지 알려져서 임금이 또한 용호龍胡에게 말하였으나, 용호가 잠자코 대답을 안하고나오자, 김류가 또 말하기를, ”만일 속바치고 돌아오게 하여 주면 마땅히 천금을 주겠소,“ 하였다.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의 값이 오르게 된 것은 진실로 김류의 말 한마디에 말미암은 것이다.“
고금古今이나 지금只今이나 기득권층들은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의 힘을 빌려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날뛰었는데, 그 당시에도 그러한 폐단이 어김없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되돌아온 ‘환향녀還鄕女’(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함)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비록 두 달 남짓한 짧은 전쟁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미증유의 국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었고 조선왕조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이때 임금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못하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더니.”
아하, 그렇구나, 병자호란이 끝 난 뒤 인조가 그 닭다리의 애환을 잊지 못해 산성 안에 닭을 기르게 했고, 그 닭을 가지고 만든 백숙이 지금도 남한산성의 별미로 자리 잡았구나,
슬프고 슬픈 역사여, 맛있는 닭백숙이여!
2021년 9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