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친일 활동
(1) 해방 이전의 김대중 친일 행적
1943년 12월 목포상고를 졸업한 김대중은 1944년 여름 목포상선주식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는 사환)
* 3대 국회의원 선거벽보에는 중졸(목포상고 나온 것도 확실치 않음)
(2) 해방후 좌익으로 위장한 친일파 김대중
8월 전남 목포시 건준 결성. 김대중은 목포 건준 선전부장 임영춘 권유로 건준에 참여하여 선전책. 목포시 인민위원회 가담. 조선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 1947년부터 전향하여 김성수의 한민당에 정식 입당.
서울지검 검사 선우종원 제안으로,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1949년 6월에 세워진 단체이다. 정부가 좌익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묶어서 교양하고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었으므로 어용성을 띠었다. 이들은 한국전 당시 북한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이 학살당했다. 선우종원은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은 50년 초 전남 보도연맹 반공 교육 강사로 추천받았다. 김대중의 유창한 공산주의 비판에 의심이 들어 선우종원은 ‘오늘 강연을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질문하였고 이에 김대중은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하였다.
김대중의 좌익 활동은 짧았다. 해방공간 초기에 건준에 민첩하게 투신하였고 인공 산하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신민당 간부로 활동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우익으로의 전향동기를 자서전에서 기술한 바 있다.
나는 한때 공산주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가 참으로 우리나라 독립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유익한 주의인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공산주의와는 깨끗이 결별하게 되었다.
(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 1985, 45~46쪽에서)
나는 일제 시대에 목포상고를 나와 바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돼서 대기하고 있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해서 스물한살에 너무도 기뻐서 건준이니 인민위원회니 가담을 했습니다. 신민당이라고 하는 - 당시 지방에서는 남북좌우 합작을 하는 정당이었는데 나중에는 좌익정당으로- 에 또, 거기에 조금 가담을 했습니다. 한 10개월 동안 관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6년부터는 당시 전처의 아버지 즉 장인이 한민당 목포시 당부위원장이었는데 저는 거기를 이탈하고 그래서 우익측에 가담을 하고, 6․25 당시에는 해상청년단 목포시 부단장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해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
(3) 50년대의 활동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대중은 목포상선주식회사 사장으로 해운업에 종사. 다음은 김대중이 해운업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글이다.
해방 후 나는 한동안 일본인 社主였던 선박회사에 근무했다. 나는 젊었지만 종업원 단체가 조직한 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돼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에 얼마 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종업원들은 급여 등 대우개선 요구를 나에게 강요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라서 경영상태가 몹시 좋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청이 회사와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서 그곳을 물러 나와 스스로 해운업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 산하출판사, 1997, P62에서)
김대중 추종자 김형문의『金大中, 그는 누구인가』 설명은 다르다.
미군이 진주하자 9월 25일 유명한 군정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종래의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동결되고, 그 재산의 매매취득에 대한 권리행사가 금지되었다. 물론 김대중씨가 근무를 계속하고 있는 목포상선도 귀속재산의 하나였다. 당시 귀속재산-적산-을 둘러싸고 얼마나 추악한 사건이 많았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정한 기준이 없어 적산관리가 무질서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영어가 능통했던 것도 아니었고 미군정청에 외삼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믿을 데라고는 일본인 소유자가 본국으로 철수해 간 후에도, 예의 직장 노조 따위를 결성하여 아무 탈없이 꾸준히 해 온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더욱이 이 회사의 정식사원은 김대중씨와 아우 대의의 늙은 장인뿐이다. 그리하여 조선공사(造船公社)에서는 약관의 김대중에게 목포상선 관리인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여름에 정식 불하를 받아, 회사 명의를 흥국(興國) 해운상사로 고쳐 그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 금문당, 1987, P44~45)
김형문은 김대중이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라 하고 김대중은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적산 불하를 숨기는 것인가, 김형문이 잘못 알고 쓴 것인가. ‘김대중 선생을 20여 년 하루같이 오직 한 길로 모시며 이 분이 누구인가를 알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는’ 김형문이 잘못 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형문 경력으로 보아 김대중이 내용 검토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에 나오는 김형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0년 전남 여천군 돌산면 출생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종신회원
금문당 출판사 대표(現)
유신치하 긴급조치시 투옥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이사(現)
민주인권문제연구회(민권회) 이사(現)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통일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총무분과위원 및 간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총무국장(現)
김대중은 6․25 발발 당일 서울에 사업상 체류 중이었다고 말한다. 자서전이나 토론회 등에서 여러 차례 그 사연을 말했다.
『6 ․ 25 때 난 서울에 있었어요. 大田 이남은 유엔군이 지킨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난 서울 천안 장항을 거쳐 목포로 내려갔어요. 목포는 이미 공산당에 점령된 상태였어요. 난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으므로, 이틀만에 공산당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9 ․ 28 서울 수복이 되니까 포로 2백20명 중 1백40명을 배에 실어다가 학살해 버렸어요. 나머지 80명은 탈옥해 살아왔어요. 그 기록이 목포 경찰서에 전부 있어요.』(96년 월간조선 4월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의 參戰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몇 사람들은 괜한 트집을 부리며 내 군 경력에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했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의 보조기관이었다.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한 것이 임무였다. 육상이든 해상이든, 방위대 소집에 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공산당 치하를 겪어보고 스스로 애국심에 불타서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방위대 정체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1951년 3월 ‘국민 방위군 사건’을 떠올리면 된다. 해상 방위대에서 나는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까지 올랐다. 어쩌면 그 무렵에 내가 비록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선이든 화물선이든 당시는 그게 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3~74에서)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여,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내가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 보조기관으로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부대의 소탕이 그 임무였다. 그 당시 여기저기 숨어 있는 게릴라가 전선 후방에서 출몰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해상 방위대’ 실체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많다.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 부사령관 경력을 전에는 말하지 않다가 70년대부터 말하고 있다. 위 두 책의 설명이 차이가 나는데, 하나는 처음부터 부사령관이었고 또 다른 이야기는 부사령관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승진은 공훈이 있어야 하는데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 부사령관으로 승진이 되는지 모르겠다. 우선 ‘해상 방위대’의 실존이 입증된 후에 논할 일이다.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었을 때 자필 진술서를 썼는데 여기에도 “해상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93년에 발간된「후광김대중대전집」15권 말미에 나오는 김대중 연보에는 해상 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김대중이 말하는 해상 방위대는 무엇이고 대한청년단 해상단은 또 무엇인가. 어지럽기만 하다. 대한청년단은 서북청년단과 더불어 대표적인 우익단체였다. 김대중은 늘 좌경용공이라고 모함을 당했다고 떠드는데 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다고 변호하지 않았을까. 김대중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징집기피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71년 대선 때 박정희와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김대중은 나는 돼지띠요, 박정희씨는 뱀띠라 뱀이 돼지한테는 꼼짝 못한다, 그래서 이 선거는 필연코 내가 승리한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돼지띠라면 1923년생이며 86세이다.
1988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동호 위원 : 증인께서는 출생신고시에 최초 생년월일인 1924년 1월 16일을 43년도에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하였습니다. 그 후 TV 기자회견시에는 생년월일을 1923년 1월 6일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3개의 생년월일 중 정확한 것은 어느 것이고, 생년월일을 두 번씩이나 수정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 세 번은 아니고 한번 고쳤는데, 정확히 얘기하면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 호적은 1923년 12월 3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는데, 고친 때를 보면 알지만 그때 일본 군대에 걸려가지고 제가 1기생으로 군대에 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24년 12월로 하면 한 기가 늘어지고 25년 12월로 하면 또 한 기가 늘어져요. 그래서 바꾼 것입니다.
김대중은 1997년 10월 8일에 있었던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말했다.
김대중 : 태어난 것은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 달이에요. 그런데 호적은 1925년 12월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일제시대 때 징병제도가 취해져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군으로 끌어갔어요. … 나는 호적이 잘못되었지 나이는 더 많습니다. … 그래서 나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호적신청을 했더니 다행히 제 것만 통과가 되었어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 달이에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1923년 1월이 양력 생일이고 음력으로는 생일이 1922년 12월로 해석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 띠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김대중은 개띠가 된다.
김대중 비서실에서 펴낸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뒷날 그의 호를 후광이라 붙인 것도 동네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출생은 1925년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나이는 1923년생이며, 돼지띠로 지금 우리 나이로 쳐서 67세이다. 대부분 그 무렵 시골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자기가 난 지 몇 년 뒤에 호적에 올렸기 때문.
(김진배 지음, 『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김대중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아 호적정정을 찬성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머리를 짜낸 끝에 태어난 생년월일을 일년 늦춰서 1925년 12월 3일로 했다. 정확히는 처음 신고한 대로 양력 1924년 1월 6일, 음력 1923년 12월 3일이었는데 그것을 바꾼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하게 호적에 넣는 일이 거의 없었다. 몇 년이나 신고를 하지 않기도 하고 종종 형과 아우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호적을 정정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본래대로 해놓으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1925년 12월 3일 생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정식으로 신청한 생년월일은 호적대로 1925년생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호적상 스무살이 되던 1945년 봄에 나는 징병검사를 받았다. 본적지에서 검사받는 것이 규정이어서 어머니와 고향인 하의도로 갔다. 장소는 옛날에 다니던 초등학교였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38~39)
김대중이 말한 생년월일 중 1923년 1월 6일이 있는데, 한국전 당시 정부는 1924년 출생 이후부터 징집을 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생일 중 1923년 1월 6일 생일은 군 징집기피용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한국전 당시 군 복역 기피여부는 많은 이들을 괴롭힌 문제이다. 나이를 올려 기피했다가 이른 나이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군복무를 했다고 해서 또는 한국전 당시 사관학교를 다녔다 해서 모두 떳떳한 것은 아니다. 묘한 재주를 부려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만 머문 자도 상당수다.
전시 중 모집했던 정규육사 1기(11기) 2기 3기 생도들은 4년이 보장되므로 한국전 도피 차원에서 입교한 자가 많다. 11기 멤버 중 하나회 핵심인 친일지주 후손 김복동 노태우 등은 징집을 피해 김복동 집에 숨어 있다가 정규육사 모집에 응했던 자들이다. 대한민국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 전선에서는 매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불구가 되는 판에 최후방 진해에서 세월을 보낸 자들이 남들 보고 군대 안 갔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가증스럽다.
김대중은 한국전 당시 군복무한 적이 없고 돈벌이에 바빴다.
1951년 부산으로 사업근거지를 옮긴 김대중은 정부산하기관인 금융조합연합회(현재 농협)와 비료․구호양곡 전국해상운송계약체결에 성공하여 거액을 벌었다. 대부분 미국 원조물자였으므로 미국 덕에 부를 쌓은 것이다. 김대중이 1980년 5월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쓴 자필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 창립하여 목포상선(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흥국해운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해남 출신 국회의원(2대) 윤영선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농공은행 본점에서 1억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성공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흥국해운 군산출장소장인 '○成烈'(원본불량으로 확인불가)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해운업에서 손 뗌.
정경유착 잘하는 기업은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출신을 영입 회사 대표 자리 주기를 잘 한다고 하는데 김대중은 이 분야에서 선구자요 개척자인 듯하다. 김대중이 국영기업과 대규모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고 하여 뇌물 등의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당시 해운공사, 조선공사, 조선운수주식회사 등 3개 국영기업체는 가장 부패하여 3대 국회의 54년 국정감사에서 큰 문제가 되기는 했다.
김대중 비서실의 주장에는 번창하는 사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육상 교통은 복구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 엉망인데다 공비 출몰을 우려하여 상대적으로 해상 교통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 상황은 해운에 대해 웬만한 식견이 있는데다, 한 번 손을 대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왕성한 투지를 가진 청년 실업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청년 실업가로 그는 6․25 그 이듬해 봄 재빨리 목포해운회사를 일으켜 사장 자리에 앉는가 하면 전남해운조합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조선조합 이사 자리도 곁들여 굴러 왔다. 거기에다 목포 지구 해상 방위대 부대장이라는 자리는 해군 또는 해안 경찰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거기에다 목포 형무소에서 처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것은 그의 반공 사상을 보증하고 있었다. 당시 금융 조합(오늘의 농협) 연합회와 전국의 비료 및 양곡의 운송 대행 업무를 맡음으로써 임시 수도인 부산 출장이 잦아지고 그의 당좌 거래 통장에는 몰라보게 많은 동그라미가 그어졌다.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 P56~57)
젊은 사장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돈벌이에 나섰다. 요새 돈으로 수십억은 벌었을 것이다. 흥국해운은 당시 금융조합연합회(농협의 전신)와 구호양곡이나 비료 따위의 전국 해상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그 일을 도맡아 했으니 돈벌이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것이다. 목포 유지들이, 일취월장하는 이 풋내기 부르조아에 주목한 것도 이 무렵이다. 6․25후, 김대중에게 목포일보 운영 요청이 들어온다. 원래 일본인이 경영하던 것을 김모씨가 불하받아 그동안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이 경영자는 정미업에 종사하는 부자이기는 했으나, 언론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편집국 기자들 쥐꼬리만한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그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수 청을 쾌히 승낙한다. 돈과 시간이 넉넉해진 김대중씨는 곧장 스스로 사설을 갈겨쓰곤 했다. 또 돈과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겐 감투를 씌워주기를 좋아하는 계층이 있는 법으로 해운상사의 사장이자 신문사 사장인 그에게 이번에는 쟁쟁한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직함을 주겠다고 간청해 왔다. 이 감투에 무슨 꿍꿍이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양하는 법 없이 받아들였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5~46)
김대중 말로는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다는데 실제로는 6․25 종전 후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감투를 쓴 것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다. 김대중 생애를 다룬 책은 본인과 추종자들이 쓴 것만도 수십 권이 된다. 정치 입문전 김대중 행적에 대해 조금씩 그 기술에 차이가 있다. 특히 쟁점이 되는 행적에 대해 그러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조심하면서...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5월 20일 3대 국회의원 선거
김대중은 재력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다. 목포에 무소속 출마했다. 그 설명이다.
1951년 가을!
나는 거주지를 옮겨 이제 막 부산으로 이사를 해온 터였다. 사업을 크게 한번 일으켜 보고 싶었다.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기 때문에 모든 정부기관이 모여 있었다.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사업상 가장 큰 고객이다. 그래서 아예 거주지를 옮겨 이사했다. 부산에서 국영기업의 하나인 금융조합연합회와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는 계약에 의해 곡물과 비료 그리고 농약 따위를 독점적으로 운송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회사는 기존 두 척 이외에 은행 융자를 받아 세 척의 일본 중고선, 그리고 다른 회사로부터 세를 낸 배들이 있어 화물선 10여 척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목포에 신문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목포일보사’였다. 형무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내가 민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것은 1954년 목포에서였다. 해방 후 세 번째 치러진 민의원 선거였다. 내가 아직은 만 서른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당선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근거는 물론 있었다. 당시는 노동조합 동향이 목포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전 총선에서도 노조 출신이 당선됐다. 다행히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모두 내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노조는 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또 조직의 이름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제시한 조건이 있다면 당시 보수 야당인 민주국민당에 가입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었다. 나로서도 민주 국민당에 입당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론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는 것도 싫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반대해서 정치가가 된 이상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무소속을 선택했다.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조 힘을 등에 업고 선거를 치른다면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이 경찰에 압력을 가해 노조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면 국가 기간단체인데 여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게 그 죄목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노조간부들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 나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조합원들을 모아 집회를 열고 다니면서 조합 방침이 바뀌어 자유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소가 자다 깨어나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얼토당토 않는 부정선거는 그 뒤 오래 끈질기게 계속됐다. 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기록은 한국 부정선거 약사(略史)나 부정선거 피해자 기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최초의 선거에서 졌다. 8명의 입후보자 중에서 4위였는지 5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참담한 패배였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5~80에서)
노조를 믿고 출마한 것이 아니라 재력과 신문사 사장을 믿고 나왔다는 것이 상식에 맞다. 대중이가 떠드는 대로라면 김대중이 낙선한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야당세를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온 정계 중진 정중섭(제1야당 민주국민당)씨가 8,710표를 얻어 당선, 차점자는 자유당 유정두였다(5,806). 김대중은 3,392표를 얻어 5위였다.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면 유정두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부정선거도 여러 종류인데 금품공세 등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부정과 투개표 단계에서의 부정이 있다. 자유당 후보가 낙선한 것을 보아 투개표 부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대중의 부정선거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1. 자유당의 부정선거 전략은 자유당 후보 표를 많이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대중이 표 깎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네가티브였다. 자유당은 현역 의원인 민국당 정중섭 후보보다 무소속으로 처음 출마하는 대중이 당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판단하여(이유는 대중이의 엄청난 재력과 언론사) 대중이를 집중 목표로 하여 부정선거를 했다. 그래서 대중이는 5위로 낙선시켰지만 정중섭 등 다른 후보에 대한 부정선거를 소홀히 하여 정중섭의 당선은 막지 못했다.
2. 자유당도 부정선거를 했지만 정중섭측이 더 심한 부정선거를 하여 당선했다.
3.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정당한 선거운동을 한 정중섭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4. 부정선거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였다.
1954년 총선 때 목포 지역구에서 여당이 부정선거했다는 것은 김대중의 주장이고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객관 사실이다(김대중이 말하는 양심을 ‘良心’이 아니라 ‘兩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 반대자들은 모두 해석을 잘못해 쓸데없이 김대중을 경멸한다고 한다).
1999년 초에 도서출판 인동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자서전은 일본 독자를 상대로 일본에서 먼저 나온 것을 번역한 것이다.(김대중 서적은 언제나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이다. 아마 또라이 한국을 염원하는 마음일게다.) 한국인이면 자유당 유정두 후보가 낙선했다는 것을 중앙선관위 자료나 당시 신문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 독자는 오해할 것이다. 일본어 개정판에서는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제 1야당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부가설명을 꼭해서 일본인들이 기본적 사실이 아닌 왜곡된 지식을 갖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독자들이 왜곡된 사실을 접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이 쓴 모든 글에는 제대로 된 주석을 많이 달아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김대중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출판한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
김대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정선거’로 떨어졌어도 나라 체면을 위해 왜놈들에게 책으로 알리는 것은 삼가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제주학살의 원흉, 인간백정 조병옥이 같은 자도 해외에 나가면 이승만 정권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최소한의 민족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은 애당초 민족애는 존재하지 않고, 민족을 증오하는 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 해방 이전의 김대중 친일 행적
1943년 12월 목포상고를 졸업한 김대중은 1944년 여름 목포상선주식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는 사환)
* 3대 국회의원 선거벽보에는 중졸(목포상고 나온 것도 확실치 않음)
(2) 해방후 좌익으로 위장한 친일파 김대중
8월 전남 목포시 건준 결성. 김대중은 목포 건준 선전부장 임영춘 권유로 건준에 참여하여 선전책. 목포시 인민위원회 가담. 조선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 1947년부터 전향하여 김성수의 한민당에 정식 입당.
서울지검 검사 선우종원 제안으로,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1949년 6월에 세워진 단체이다. 정부가 좌익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묶어서 교양하고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었으므로 어용성을 띠었다. 이들은 한국전 당시 북한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이 학살당했다. 선우종원은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은 50년 초 전남 보도연맹 반공 교육 강사로 추천받았다. 김대중의 유창한 공산주의 비판에 의심이 들어 선우종원은 ‘오늘 강연을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질문하였고 이에 김대중은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하였다.
김대중의 좌익 활동은 짧았다. 해방공간 초기에 건준에 민첩하게 투신하였고 인공 산하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신민당 간부로 활동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우익으로의 전향동기를 자서전에서 기술한 바 있다.
나는 한때 공산주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가 참으로 우리나라 독립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유익한 주의인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공산주의와는 깨끗이 결별하게 되었다.
(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 1985, 45~46쪽에서)
나는 일제 시대에 목포상고를 나와 바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돼서 대기하고 있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해서 스물한살에 너무도 기뻐서 건준이니 인민위원회니 가담을 했습니다. 신민당이라고 하는 - 당시 지방에서는 남북좌우 합작을 하는 정당이었는데 나중에는 좌익정당으로- 에 또, 거기에 조금 가담을 했습니다. 한 10개월 동안 관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6년부터는 당시 전처의 아버지 즉 장인이 한민당 목포시 당부위원장이었는데 저는 거기를 이탈하고 그래서 우익측에 가담을 하고, 6․25 당시에는 해상청년단 목포시 부단장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해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
(3) 50년대의 활동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대중은 목포상선주식회사 사장으로 해운업에 종사. 다음은 김대중이 해운업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글이다.
해방 후 나는 한동안 일본인 社主였던 선박회사에 근무했다. 나는 젊었지만 종업원 단체가 조직한 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돼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에 얼마 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종업원들은 급여 등 대우개선 요구를 나에게 강요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라서 경영상태가 몹시 좋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청이 회사와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서 그곳을 물러 나와 스스로 해운업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 산하출판사, 1997, P62에서)
김대중 추종자 김형문의『金大中, 그는 누구인가』 설명은 다르다.
미군이 진주하자 9월 25일 유명한 군정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종래의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동결되고, 그 재산의 매매취득에 대한 권리행사가 금지되었다. 물론 김대중씨가 근무를 계속하고 있는 목포상선도 귀속재산의 하나였다. 당시 귀속재산-적산-을 둘러싸고 얼마나 추악한 사건이 많았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정한 기준이 없어 적산관리가 무질서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영어가 능통했던 것도 아니었고 미군정청에 외삼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믿을 데라고는 일본인 소유자가 본국으로 철수해 간 후에도, 예의 직장 노조 따위를 결성하여 아무 탈없이 꾸준히 해 온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더욱이 이 회사의 정식사원은 김대중씨와 아우 대의의 늙은 장인뿐이다. 그리하여 조선공사(造船公社)에서는 약관의 김대중에게 목포상선 관리인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여름에 정식 불하를 받아, 회사 명의를 흥국(興國) 해운상사로 고쳐 그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 금문당, 1987, P44~45)
김형문은 김대중이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라 하고 김대중은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적산 불하를 숨기는 것인가, 김형문이 잘못 알고 쓴 것인가. ‘김대중 선생을 20여 년 하루같이 오직 한 길로 모시며 이 분이 누구인가를 알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는’ 김형문이 잘못 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형문 경력으로 보아 김대중이 내용 검토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에 나오는 김형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0년 전남 여천군 돌산면 출생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종신회원
금문당 출판사 대표(現)
유신치하 긴급조치시 투옥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이사(現)
민주인권문제연구회(민권회) 이사(現)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통일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총무분과위원 및 간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총무국장(現)
김대중은 6․25 발발 당일 서울에 사업상 체류 중이었다고 말한다. 자서전이나 토론회 등에서 여러 차례 그 사연을 말했다.
『6 ․ 25 때 난 서울에 있었어요. 大田 이남은 유엔군이 지킨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난 서울 천안 장항을 거쳐 목포로 내려갔어요. 목포는 이미 공산당에 점령된 상태였어요. 난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으므로, 이틀만에 공산당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9 ․ 28 서울 수복이 되니까 포로 2백20명 중 1백40명을 배에 실어다가 학살해 버렸어요. 나머지 80명은 탈옥해 살아왔어요. 그 기록이 목포 경찰서에 전부 있어요.』(96년 월간조선 4월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의 參戰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몇 사람들은 괜한 트집을 부리며 내 군 경력에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했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의 보조기관이었다.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한 것이 임무였다. 육상이든 해상이든, 방위대 소집에 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공산당 치하를 겪어보고 스스로 애국심에 불타서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방위대 정체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1951년 3월 ‘국민 방위군 사건’을 떠올리면 된다. 해상 방위대에서 나는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까지 올랐다. 어쩌면 그 무렵에 내가 비록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선이든 화물선이든 당시는 그게 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3~74에서)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여,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내가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 보조기관으로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부대의 소탕이 그 임무였다. 그 당시 여기저기 숨어 있는 게릴라가 전선 후방에서 출몰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해상 방위대’ 실체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많다.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 부사령관 경력을 전에는 말하지 않다가 70년대부터 말하고 있다. 위 두 책의 설명이 차이가 나는데, 하나는 처음부터 부사령관이었고 또 다른 이야기는 부사령관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승진은 공훈이 있어야 하는데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 부사령관으로 승진이 되는지 모르겠다. 우선 ‘해상 방위대’의 실존이 입증된 후에 논할 일이다.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었을 때 자필 진술서를 썼는데 여기에도 “해상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93년에 발간된「후광김대중대전집」15권 말미에 나오는 김대중 연보에는 해상 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김대중이 말하는 해상 방위대는 무엇이고 대한청년단 해상단은 또 무엇인가. 어지럽기만 하다. 대한청년단은 서북청년단과 더불어 대표적인 우익단체였다. 김대중은 늘 좌경용공이라고 모함을 당했다고 떠드는데 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다고 변호하지 않았을까. 김대중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징집기피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71년 대선 때 박정희와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김대중은 나는 돼지띠요, 박정희씨는 뱀띠라 뱀이 돼지한테는 꼼짝 못한다, 그래서 이 선거는 필연코 내가 승리한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돼지띠라면 1923년생이며 86세이다.
1988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동호 위원 : 증인께서는 출생신고시에 최초 생년월일인 1924년 1월 16일을 43년도에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하였습니다. 그 후 TV 기자회견시에는 생년월일을 1923년 1월 6일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3개의 생년월일 중 정확한 것은 어느 것이고, 생년월일을 두 번씩이나 수정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 세 번은 아니고 한번 고쳤는데, 정확히 얘기하면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 호적은 1923년 12월 3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는데, 고친 때를 보면 알지만 그때 일본 군대에 걸려가지고 제가 1기생으로 군대에 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24년 12월로 하면 한 기가 늘어지고 25년 12월로 하면 또 한 기가 늘어져요. 그래서 바꾼 것입니다.
김대중은 1997년 10월 8일에 있었던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말했다.
김대중 : 태어난 것은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 달이에요. 그런데 호적은 1925년 12월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일제시대 때 징병제도가 취해져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군으로 끌어갔어요. … 나는 호적이 잘못되었지 나이는 더 많습니다. … 그래서 나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호적신청을 했더니 다행히 제 것만 통과가 되었어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 달이에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1923년 1월이 양력 생일이고 음력으로는 생일이 1922년 12월로 해석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 띠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김대중은 개띠가 된다.
김대중 비서실에서 펴낸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뒷날 그의 호를 후광이라 붙인 것도 동네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출생은 1925년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나이는 1923년생이며, 돼지띠로 지금 우리 나이로 쳐서 67세이다. 대부분 그 무렵 시골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자기가 난 지 몇 년 뒤에 호적에 올렸기 때문.
(김진배 지음, 『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김대중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아 호적정정을 찬성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머리를 짜낸 끝에 태어난 생년월일을 일년 늦춰서 1925년 12월 3일로 했다. 정확히는 처음 신고한 대로 양력 1924년 1월 6일, 음력 1923년 12월 3일이었는데 그것을 바꾼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하게 호적에 넣는 일이 거의 없었다. 몇 년이나 신고를 하지 않기도 하고 종종 형과 아우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호적을 정정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본래대로 해놓으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1925년 12월 3일 생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정식으로 신청한 생년월일은 호적대로 1925년생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호적상 스무살이 되던 1945년 봄에 나는 징병검사를 받았다. 본적지에서 검사받는 것이 규정이어서 어머니와 고향인 하의도로 갔다. 장소는 옛날에 다니던 초등학교였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38~39)
김대중이 말한 생년월일 중 1923년 1월 6일이 있는데, 한국전 당시 정부는 1924년 출생 이후부터 징집을 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생일 중 1923년 1월 6일 생일은 군 징집기피용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한국전 당시 군 복역 기피여부는 많은 이들을 괴롭힌 문제이다. 나이를 올려 기피했다가 이른 나이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군복무를 했다고 해서 또는 한국전 당시 사관학교를 다녔다 해서 모두 떳떳한 것은 아니다. 묘한 재주를 부려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만 머문 자도 상당수다.
전시 중 모집했던 정규육사 1기(11기) 2기 3기 생도들은 4년이 보장되므로 한국전 도피 차원에서 입교한 자가 많다. 11기 멤버 중 하나회 핵심인 친일지주 후손 김복동 노태우 등은 징집을 피해 김복동 집에 숨어 있다가 정규육사 모집에 응했던 자들이다. 대한민국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 전선에서는 매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불구가 되는 판에 최후방 진해에서 세월을 보낸 자들이 남들 보고 군대 안 갔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가증스럽다.
김대중은 한국전 당시 군복무한 적이 없고 돈벌이에 바빴다.
1951년 부산으로 사업근거지를 옮긴 김대중은 정부산하기관인 금융조합연합회(현재 농협)와 비료․구호양곡 전국해상운송계약체결에 성공하여 거액을 벌었다. 대부분 미국 원조물자였으므로 미국 덕에 부를 쌓은 것이다. 김대중이 1980년 5월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쓴 자필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 창립하여 목포상선(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흥국해운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해남 출신 국회의원(2대) 윤영선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농공은행 본점에서 1억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성공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흥국해운 군산출장소장인 '○成烈'(원본불량으로 확인불가)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해운업에서 손 뗌.
정경유착 잘하는 기업은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출신을 영입 회사 대표 자리 주기를 잘 한다고 하는데 김대중은 이 분야에서 선구자요 개척자인 듯하다. 김대중이 국영기업과 대규모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고 하여 뇌물 등의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당시 해운공사, 조선공사, 조선운수주식회사 등 3개 국영기업체는 가장 부패하여 3대 국회의 54년 국정감사에서 큰 문제가 되기는 했다.
김대중 비서실의 주장에는 번창하는 사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육상 교통은 복구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 엉망인데다 공비 출몰을 우려하여 상대적으로 해상 교통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 상황은 해운에 대해 웬만한 식견이 있는데다, 한 번 손을 대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왕성한 투지를 가진 청년 실업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청년 실업가로 그는 6․25 그 이듬해 봄 재빨리 목포해운회사를 일으켜 사장 자리에 앉는가 하면 전남해운조합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조선조합 이사 자리도 곁들여 굴러 왔다. 거기에다 목포 지구 해상 방위대 부대장이라는 자리는 해군 또는 해안 경찰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거기에다 목포 형무소에서 처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것은 그의 반공 사상을 보증하고 있었다. 당시 금융 조합(오늘의 농협) 연합회와 전국의 비료 및 양곡의 운송 대행 업무를 맡음으로써 임시 수도인 부산 출장이 잦아지고 그의 당좌 거래 통장에는 몰라보게 많은 동그라미가 그어졌다.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 P56~57)
젊은 사장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돈벌이에 나섰다. 요새 돈으로 수십억은 벌었을 것이다. 흥국해운은 당시 금융조합연합회(농협의 전신)와 구호양곡이나 비료 따위의 전국 해상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그 일을 도맡아 했으니 돈벌이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것이다. 목포 유지들이, 일취월장하는 이 풋내기 부르조아에 주목한 것도 이 무렵이다. 6․25후, 김대중에게 목포일보 운영 요청이 들어온다. 원래 일본인이 경영하던 것을 김모씨가 불하받아 그동안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이 경영자는 정미업에 종사하는 부자이기는 했으나, 언론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편집국 기자들 쥐꼬리만한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그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수 청을 쾌히 승낙한다. 돈과 시간이 넉넉해진 김대중씨는 곧장 스스로 사설을 갈겨쓰곤 했다. 또 돈과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겐 감투를 씌워주기를 좋아하는 계층이 있는 법으로 해운상사의 사장이자 신문사 사장인 그에게 이번에는 쟁쟁한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직함을 주겠다고 간청해 왔다. 이 감투에 무슨 꿍꿍이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양하는 법 없이 받아들였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5~46)
김대중 말로는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다는데 실제로는 6․25 종전 후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감투를 쓴 것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다. 김대중 생애를 다룬 책은 본인과 추종자들이 쓴 것만도 수십 권이 된다. 정치 입문전 김대중 행적에 대해 조금씩 그 기술에 차이가 있다. 특히 쟁점이 되는 행적에 대해 그러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조심하면서...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5월 20일 3대 국회의원 선거
김대중은 재력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다. 목포에 무소속 출마했다. 그 설명이다.
1951년 가을!
나는 거주지를 옮겨 이제 막 부산으로 이사를 해온 터였다. 사업을 크게 한번 일으켜 보고 싶었다.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기 때문에 모든 정부기관이 모여 있었다.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사업상 가장 큰 고객이다. 그래서 아예 거주지를 옮겨 이사했다. 부산에서 국영기업의 하나인 금융조합연합회와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는 계약에 의해 곡물과 비료 그리고 농약 따위를 독점적으로 운송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회사는 기존 두 척 이외에 은행 융자를 받아 세 척의 일본 중고선, 그리고 다른 회사로부터 세를 낸 배들이 있어 화물선 10여 척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목포에 신문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목포일보사’였다. 형무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내가 민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것은 1954년 목포에서였다. 해방 후 세 번째 치러진 민의원 선거였다. 내가 아직은 만 서른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당선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근거는 물론 있었다. 당시는 노동조합 동향이 목포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전 총선에서도 노조 출신이 당선됐다. 다행히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모두 내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노조는 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또 조직의 이름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제시한 조건이 있다면 당시 보수 야당인 민주국민당에 가입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었다. 나로서도 민주 국민당에 입당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론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는 것도 싫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반대해서 정치가가 된 이상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무소속을 선택했다.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조 힘을 등에 업고 선거를 치른다면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이 경찰에 압력을 가해 노조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면 국가 기간단체인데 여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게 그 죄목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노조간부들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 나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조합원들을 모아 집회를 열고 다니면서 조합 방침이 바뀌어 자유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소가 자다 깨어나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얼토당토 않는 부정선거는 그 뒤 오래 끈질기게 계속됐다. 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기록은 한국 부정선거 약사(略史)나 부정선거 피해자 기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최초의 선거에서 졌다. 8명의 입후보자 중에서 4위였는지 5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참담한 패배였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5~80에서)
노조를 믿고 출마한 것이 아니라 재력과 신문사 사장을 믿고 나왔다는 것이 상식에 맞다. 대중이가 떠드는 대로라면 김대중이 낙선한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야당세를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온 정계 중진 정중섭(제1야당 민주국민당)씨가 8,710표를 얻어 당선, 차점자는 자유당 유정두였다(5,806). 김대중은 3,392표를 얻어 5위였다.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면 유정두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부정선거도 여러 종류인데 금품공세 등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부정과 투개표 단계에서의 부정이 있다. 자유당 후보가 낙선한 것을 보아 투개표 부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대중의 부정선거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1. 자유당의 부정선거 전략은 자유당 후보 표를 많이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대중이 표 깎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네가티브였다. 자유당은 현역 의원인 민국당 정중섭 후보보다 무소속으로 처음 출마하는 대중이 당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판단하여(이유는 대중이의 엄청난 재력과 언론사) 대중이를 집중 목표로 하여 부정선거를 했다. 그래서 대중이는 5위로 낙선시켰지만 정중섭 등 다른 후보에 대한 부정선거를 소홀히 하여 정중섭의 당선은 막지 못했다.
2. 자유당도 부정선거를 했지만 정중섭측이 더 심한 부정선거를 하여 당선했다.
3.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정당한 선거운동을 한 정중섭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4. 부정선거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였다.
1954년 총선 때 목포 지역구에서 여당이 부정선거했다는 것은 김대중의 주장이고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객관 사실이다(김대중이 말하는 양심을 ‘良心’이 아니라 ‘兩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 반대자들은 모두 해석을 잘못해 쓸데없이 김대중을 경멸한다고 한다).
1999년 초에 도서출판 인동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자서전은 일본 독자를 상대로 일본에서 먼저 나온 것을 번역한 것이다.(김대중 서적은 언제나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이다. 아마 또라이 한국을 염원하는 마음일게다.) 한국인이면 자유당 유정두 후보가 낙선했다는 것을 중앙선관위 자료나 당시 신문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 독자는 오해할 것이다. 일본어 개정판에서는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제 1야당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부가설명을 꼭해서 일본인들이 기본적 사실이 아닌 왜곡된 지식을 갖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독자들이 왜곡된 사실을 접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이 쓴 모든 글에는 제대로 된 주석을 많이 달아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김대중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출판한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
김대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정선거’로 떨어졌어도 나라 체면을 위해 왜놈들에게 책으로 알리는 것은 삼가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제주학살의 원흉, 인간백정 조병옥이 같은 자도 해외에 나가면 이승만 정권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최소한의 민족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은 애당초 민족애는 존재하지 않고, 민족을 증오하는 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