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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2007/7/11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이탈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하던 그는 도시 생활의 혼란과 방종에 회의를 느끼고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베네딕토의 성덕과 엄격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이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530년경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된 수도원을 건립한 그는 수도회 규칙서를 썼다. 이 규칙서는 올바른 금욕 생활, 기도와 공부, 그리고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생활에 관한 규정이었다. 그가 쓴 수도회 규칙이 널리 알려져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8세기 말부터 여러 지방에서 7월 11일에 그를 기억하며 축일을 지내 왔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베네딕토’를 음역, 곧 한자로 음을 나타낸 것이 ‘분도’(芬道)다. 요셉은 극적인 인물이다. 변방의 이름 없는 목동에서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 대단한 인물이다. 그의 성공은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 낸 결과다.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요셉은 그 시련을 자신의 형제들에게 시험해 본다(제1독서).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출발하였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각각 그 지파에 소속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셨다. 이러한 부르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두신 계획임을 알 수 있다(복음).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55-57; 42,5-7ㄴ.17-24ㄱ 그 무렵 55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모든 이집트인에게 말하였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56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57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6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24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1-7)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회적인 신분의 출신입니다.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어부 출신이요, 제베대오의 아들로 소개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닮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뛰어난 스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수받을 제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거부하는 인물까지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싫어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관리들은 제국에 협조하지 않는 유지들을 세리를 내세워 괴롭혔습니다. 시몬은 열혈당원 출신입니다. 그들은 로마 세력에 폭행을 일삼는 무력 집단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에서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들 제자들이 지녔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함입니다. 단순해야만 진리에 빨리 다가갈 수 있다고 스승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 먼저 열두 제자를 살펴보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마태10,2-4)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이 우리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개인과 기업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뽑습니다. 가장 유능해 보이는 사람을 뽑아 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똑똑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지만 학식이 깊지도 않았고, 집안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인격이 출중하거나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도 없었지요. 대체적으로 무식한 어부들이 제일 많았고, 항간에 소문이 안 좋았던 세리 마태오도 있었으며 혁명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인물이 없었지요. 그런걸 보면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우리의 선택 기준과 참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볼품없는 사람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기준은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이 무엇이냐 하는 것 보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큰 결실을 맺을 수 있고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의 특징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세우는 허풍쟁이도 아니었고, 열등감으로 뒤처져 있는 비굴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그 제자들 중에 낄 수 있다는 용기도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전열 신부(장유성당 주임)
2.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과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주십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요즘 저는 시간이 될 때마다 가정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모든 구역을 다 돌지를 못해서,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꼭 방문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었지요. 어제도 이 약속의 일환으로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지난주에 방문할 구역의 구역장님께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일기예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인해서 전국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방문하기가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은 물론, 방문을 받는 집에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우리 성당에 부제님이 부제실습을 나오는 날이어서 부제님을 맞이해야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했지요. 비 오는 내일은 그만 두고, 비 오지 않는 날에 방문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구역장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비가 많이 온다니까 돌아오는 목요일로 연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어제 아침,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성당의 마당은 빗줄기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도 조금 흐리기는 했지만, 장맛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약간의 이슬비를 보기는 했지만). 심지어 낮에는 햇빛도 볼 수 있었다니까요. 가정방문을 하지 않음이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집에서는 제가 온다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기다렸을 텐데…….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며, 특히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자신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행하지 않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뽑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뽑지 않았습니다. 만약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뽑았다면, 주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 위주로 선발했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필요한 계통으로 가려서 뽑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딱 한 가지 원칙만 적용하셨어요. 바로 사랑의 원칙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바로 사랑의 원칙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단지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면서 기쁨의 복음인 사랑의 원칙만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 원칙을 간과합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원칙만을 나의 원칙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사랑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사랑의 원칙을 가장 먼저 생각하세요. 더불어 살기(홍성중 엮음, '행복을 나르는 배달부'중에서)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라. 텅 빈 공연장에서 혼자 음악을 듣고 있다면 어떨까? 축구장에 오직 당신 혼자 앉아 응원을 한다면? 아마 공연도 축구경기도 재미와 흥분은 반감되어 버릴 것이다. 세상도 그와 같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거나 경험할 때 우리는 재미와 보람을 느낍니다. 그것이 인생을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Mt.10.1)
◆누구의 반대나 걱정도 듣지 않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결심했던 나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제는 하나뿐인 동생이 대학 진로를 앞두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형 따라서 신학교 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한집안에 사제 한 명 만들기도 힘든데 둘씩이나 왜 이러는지 걱정도 많이 되었고, 자식 교육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뜻도 있어서 집안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동생과 어울렸던 친한 친구들 셋이 갑자기 무슨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한꺼번에 신학교를 지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한테는 성격도 각양각색이고 재능도 각각 다른 사랑스런 동생들이었는데 갑작스런 진로 결정으로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기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녀석은 누나만 넷 있는 집안의 막내둥이 외아들이었고, 한 명은 독자(獨子), 내 동생과 나머지 한 녀석은 형만 한 명씩 있었는데 둘 다 당시 신학생이었다. 열두 사도를 뽑으셨을 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와 동생들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당신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러 가지 묵상을 하도록 나를 초대하시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제가 되었고, 내 동생과 누나들만 있는 막둥이 외아들 녀석은 7월에 부제품을 받는다. 다른 형제가 없는 외아들은 사정상 내년 이맘때 부제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형제는 우리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다시 뽑아주셨다. 형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동생은 천국에서 별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면서 우리 모두를 지켜봐 주도록 택하셨다. 예수께서 우리 6명을 뽑으신 시기나 모습, 그리고 선택받은 우리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한테도 이렇게 분부하셨을 것이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그래서 지금 우리 여섯 사람은 그 분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해 나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성호 신부(수원교구 모산골 천주교회)
< 나만의 감실 하나 >
베네딕토 성인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는 전쟁과 혼란, 그로 인한 민족들의 대이동 시대였습니다. 힘겹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봐야 허사였습니다. 약탈이 수시로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불안정했습니다. 이러한 시대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定住)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시대의 요구에 응답합니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고 웅장한 수도원을 설립합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이 이곳 저 곳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요하게 정진(精進)할 수 있는 관상 수도회의 기틀을 닦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회를 건립하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참된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까지는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때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한 동굴 안에서 3년간이나 홀로 생활했습니다. 그 외로운 나날을 통해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과 대면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맞붙어 힘겹게 싸워나갑니다. 철저한 고독과도 투쟁합니다.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베네딕토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점차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베네딕토의 삶에 매료된 입회자들이 점점 늘어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리원칙주의자였던 베네딕토를 견디다 못한 수도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워낙 대쪽 같던 베네딕토였기에 아직 그들의 나약함과 미성숙함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베네딕토의 열성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수도자들은 독살(毒殺)까지 시도합니다. 이처럼 베네딕토 역시 흔들렸습니다. 난관 앞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런 험난한 여정을 거치면서 베네딕토는 서서히 내공을 쌓아나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영혼의 바탕을 마련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그 누구도 점령할 수 없는 견고한 성채 하나를 건설합니다. 거룩한 감실 하나를 준비합니다. 이제 베네딕토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도 동요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감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만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참 지도자, 참 스승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 참 평화를 확립한 베네딕토에게 있어 주변 환경은 점점 밝고 풍요롭게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평화롭게 되었고, 내적, 외적 사슬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확고하게 마련한 베네딕토에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몰입이 가능해진 베네딕토는 그간 자신을 덮고 있던 막 하나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을 통해 세상과도 하나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존재와 쉽게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니 용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체험은 산더미처럼 쌓인 우리들의 문제와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게 합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을 거친 베네딕토였기에 만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친구로,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쳤습니다. 선채로 열렬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돌이켜보니 수시로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입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심각한 상처를 받습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돌 하나에 죽느니 사느니 난리입니다. 외부 환경적 요인에 너무나 민감합니다.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짜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베네딕토처럼 우리 내면 안에 우리만의 자리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 그분만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그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시는 한, 그 어떤 세상 풍파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아빠스 ◆ (라틴어 : abbas, 영어 :abbot)
대수도원장(大修道院長). 의전(儀典) 사제 수도회와 대수도원의 장에 대한 호칭이자 직함. 동방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영성적 스승을 ‘아빠’(abba)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특히 성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에 의해 서방 수도원에 소개되었다. 이를 분류해 보면, 그 수도원 내에서만 완전한 재치권(裁治權)을 향유하는 일반 아빠스(abbas regularis de regimine), 수도원이 속해 있는 특정 지역 전체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에까지 실제적 재치권을 갖는 면속(免屬) 아빠스(abbas nullius), 한 수족(修族)의 장을 가리키는 총아빠스(archiabbas), 근대에서 베네딕토 연합회의 장을 가리키는 수석 아빠스(abbas primus) 등이 있다. 여성형은 ‘아빠티사’([라] abbatissa, [영] abbess)이다.
(⇒) 고위성직자
- 베네딕토 = 분도(芬道)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 베네딕도" 아무리 세월 흘러도 더욱 그리워지는 분이, 대하면 대할수록 좋아지는 분이,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창 같은 분이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성 베네딕도 없는 오늘의 유럽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유럽의 야만인들을 문명인들로, 황야의 유럽을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만든 이들, 바로 성 베네딕도의 수도승들이었습니다. 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0월 24일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고, 현재의 교황님도 베네딕도 16세로 명명한 것을 보면 성인에 대한 교황님들의 존경심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축복받은 이’라는 베네딕도 이름의 뜻이 참 좋습니다.
어제 창세기의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라는 이스라엘 이름 뜻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진정 성 베네딕도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승들이나 평신도들 모두 이스라엘이자 베네딕도입니다. 하느님과 겨루어 이겨낸 축복 받은 이를 목표로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과 베네딕도를,
즉 하느님과 겨루어 이겨낸 축복받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마침 어제 독서 중
인도의 성자라 일컫는 간디의 참 좋은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제 죽은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
바로 이런 사람이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신록의 아름다운 나뭇잎처럼, 세월의 흐름 중에도 늘 청순한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아침 독서기도 시 에페소서의 말씀이 지칭하는 바도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게 살기위해서
어제 죽은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하느님을 공부해야 합니다. 새 인간을 입는다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오늘 2독서 에페소서에도 ‘입으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하느님을 찾는 공부에 매진할 때 저절로 입혀지는 이런 덕의 옷입니다.
새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 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똑 같은 대지의 땅에 뿌리 내린 초목들이지만 다 제각기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도 지향은 하느님 두고 살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모인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중심’의 베네딕도 수도공동체라 정의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일,
바로 슬기를 찾는 것과 직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주님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네가 은을 구하듯 슬기를 구하고
보물을 찾듯 슬기를 찾는다면 그 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오늘 잠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자들, 자연스럽게 슬기를 얻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난 이들의 최종 귀착 지는 공동체의 형제들입니다. 불교의 이상인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믿는 이들은 위로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 제도한다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을 통해서도 분명히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진정 높은 사람,
천진한 어린이 같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요, 진정 훌륭한 지도자, 형제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천진과 섬김의 사랑, 참 영성을 분별하는 시금석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지배하고 다스리고 군림하는 미숙한 사람들, 결코 높은 사람도 바람직한 지도자도 아닙니다. 다음의 주님의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섬김의 영성 하나뿐임을 천명하십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공동체의 중심에 섬기는 분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 섬김의 영성을 고스란히 전수받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이십니다. 공동체의 대헌장 이라 할 수 있는 성규72장이 성 베네딕도의 섬김의 영성을 활짝 꽃피어내고 있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다.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비단 성 베네딕도 수도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중심의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하늘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활짝 열린 창 같은 분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로마제국 말엽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에
파멸로 치닫던 유럽을 구한 성 베네딕도, 혼돈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하느님 찾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섬기시며, 섬김의 공동체를 새롭게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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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