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특별한 경호원 39. 40.

[초발광츄리닝]

39.

시끌벅적한 오락실.

그 안은 방과후라 그런지 여러 학교의 교복이 섞여 여느학교의 축제를 방불케 했지만

유독 맨 끝쪽에 있는 테트리스 기계 주변에는 무슨 보이지 않는 막이 쳐져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몇명의 여학생을 제외하고는 꽤나 한산하다.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테트리스 기계 앞에 나란히 앉은 동문고등학교 교복차림의 두 남학생은

말 없이, 별 표정도 없이 눈은 스크린에 고정한체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이긴 것 같군요."

오른 쪽 사내의 스크린 앞에 WIN 이라는 글자가 뜨자 그 사내는 그제서야 싱긋 웃어보이며

옆에 앉아 LOSE라고 떠 있는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는 사내에게 말을 건낸다.

"제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저랑 얘기 좀 하시죠 계윤상."

"일본에선 약속도 일방적으로 하나."

방금 테트리스에서 이긴 사내는 준이치였고, 그 옆에 앉아 있는건 계윤이었다.

수혼과 헤어지고나서 부터 무슨생각인지 계윤을 찾아다니던 준이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번에 계윤과 왔었던 오락실에 들어오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계윤을 찾을 수 있었다.

"부탁이있어요."

"별로 부탁들어줄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부탁대신에 제안이라고 하죠."

게임기 위에 올려둔 동전을 다시 게임기에 넣으며 말하던 계윤은 그 다음 이어지는 준이치의

말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준이치에게 시선을 준다.

"저를 천씨가문 경호원으로 고용해 주세요."

"..니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오락실보단 병원이라는 생각 안드냐."

"진지합니다 계윤상."

"진지한 걸 원한다면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 주지. 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런 집안의 사람을 환영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아버지라면 또 모르겠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집안이라는게.."

어느 순간부터 게임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블럭을 아무렇게나 쌓던 계윤은 곧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매곤 오락실 밖으로 나갔고, 준이치 또한 서둘러 계윤의 뒤를 따랐다.

하늘은 이미 반 쯤 밤의 공기에 휩싸여 네온싸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수혼이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보단 장기적인 사기 쪽이 맞나."

"무슨...아.."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앞만 보고 걸어가는 계윤의 옆으로 따라 붙으면서 말을 잇던 준이치가

설마하는 눈으로 계윤을 쳐다보았지만 계윤의 입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수혼이가 원해서 그런게 아니란 거 쯤은.."

"고의로 죽이든 실수로 죽이든 살인은 살인이지."

"..수혼이가 남자로 살아온 게 계윤군에게 있어서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그렇게 해서 그 쪽 가문에

해라도 끼쳤나요 수혼이가..? 성별이 어떻든 간에 임수혼은 임수혼일 뿐이고,

적어도 자신의 직책으로써의 임무는 필요 이상으로 정확히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와서 힘들고 상처받았던 건 수혼이고, 여자아이가 하고 싶던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던 것도 수혼입니다."

준이치의 말이 끝나자 걸음을 멈춰서서 준이치와 눈을 마주하는 계윤.

어느덧 장소는 수혼과 유경이 만났었던 그 놀이터 앞이었고

계윤은 무엇 때문인지 좀 전보다 더 차가워진 얼굴이다.

"..임수혼 대변인이라도 되나."

"저는.."

"내가 임수혼한테 그런 인생을 살라고 강요라도 한 것 처럼 말하는군."

"....."

"니 입에서 임수혼 사정 듣는것도, 일본 대 부호의 후계자로 지목된 니가 왜 이런 걸 원하는지

그런 이유도 듣고 있는 자체가 시간낭비다. 시시콜콜하게 이유 늘어놓으면서 나 설득하는 것 보단

아버지 찾아가서 이력서라도 내 보는건 어때. 그 편이 빨라도 훨씬 빠를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계윤은 차가운 밤 공기에 연회색의 연기를 뿜으며

놀이터 옆 벽에 비스듬이 기대선다.

그 앞에 정 자세로 서 있던 준이치는 무언갈 망설이는 듯 보였고, 계윤의 담배가 필터 앞까지

짧아졌을 때 쯤 그 조용한 골목에 다시금 준이치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제가 조금만 더 용감했더라면..그 일본 대 부호의 후계자 이름에 임준이 아닌 임수혼이

올라가 있었겠죠."

"니가 들어와야 했던 자리를 임수혼이 책임졌다고 말하는 건가."

이미 어느정도 예상했었다는 듯 별 반응 없이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계윤.

준이치가 입양되었던 것도 알고, 수혼과 남매인것도 아는 계윤으로서는 조금만 추리해보면

도출 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아무리 임수혼이 원했다고 해도 임수혼은 선택받지 못했을거다. 카자마 가문에서도

여자보단 남자 입양아를 원했을테니까. 임수혼은 입양되었어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을

수도 있겠지. 임수혼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더 충실한거다.

어느 쪽에서나 선택받지 못하는 운명이었으니까. 니가 일본으로 입양된 것도, 임수혼이

성별까지 버려가면서 우리 가문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는 임수혼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임수혼의 지난 일들을 보상해 준다거나 니가 대신 짊어지고 간다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임수혼이 느끼기에 진심이라기 보단 니 마음 편하자고 죄값음 하는 행동으로 밖에

안보일지도 모르지. 잘 생각해봐. 니가 임수혼한테 다시 다가가기 위해 어떤 식으로 했는지."

하교시간에 수혼이 한 말과 표정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지켜준다는 그 말에 무언가 부풀어 보였던 그 표정이..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신념이란 틀을 만들었다는 그 말이.

준이치는 불현듯 찾아드는 혼란스러움에 벽에 등을 기대곤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한 쪽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무신경하고 무관심해 보이던 계윤은 자신보다 많은 걸 알고 많은 걸 느끼고 있었다.

작은거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표현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침묵하는 그 속에

커다란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전에 수혼이도 계윤상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난 수혼이의 말을

이해하기 보다는 수혼이가 날 받아 줬다는 그 기쁨만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정말 끝까지

이기적이게도..하아.."

벌써 세 번째 담배를 입에 물며 건조하게 준이치를 내려다 보는 계윤.

"외로움에 완벽하게 익숙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

"난 임수혼이 감정 표정 다 숨기고 철저한 척 연기한다고 생각하거든.

지독한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듣고는 있는 건지 고개를 숙이곤 대답이 없는 준이치.

계윤은 더욱 짙어지는 어둠속에서 가로등불에 의지해 손목에 자리잡은 시계를 확인하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임수혼 혼자 오래 두지 마라. 피는 너랑 섞였을지 몰라도 더 오래 겪은 우리들은 어쩌면

너 보다 더 임수혼을 아끼고 있으니까. 그리고 절대 여기로 다시 돌아오게 하지마.

..임수혼한테 좋을 거 없으니까."

밤의 어둠과 어울리는 계윤의 중저음의 보이스가 멈추고

마지막 담배까지 다 태우곤 저택으로 발걸음 하려던 계윤은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준이치의

너무도 슬프게 젖은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선다.

"...도와.. 주세요.."

.
.
.

"아.. 큰소리는 쳤는데 이제 뭘 어떻게 하지.."

수혼의 방 안.

사용하지 않은지가 꽤 되었는데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수혼의 방 침대 밑에 앉아 핸드폰 플립만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마영.

"그냥 아줌마가 하자는데로..아니지. 그럼 진짜 힘으로..? 아..그건 더 아니야 너무 철없어 보여.

그럼 사과를..아니 뭘 사과를 해? 아..사과는 저번에..했었지...아...쪽팔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마영은 이내 정신없다는 듯 거칠게

헝클어뜨린 머리를 침대시트에 묻어버린다.

"동거를 해? 동거를? 동거를..동거를!!!!!!..아 대박 진짜..미친거 아냐..? 아니지.. 그 동거한다는

사람도 임수혼이 여잔걸 모른다면..그냥...아 그래도 싫어.. 아 진짜 다 큰 기지배가 미친거 아냐

겁도없이.. 혼자 어른인 척 다 하더니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이 병신이.. 아..아아!!!!!!"

결국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정신사납게 왔다 갔다 거리며 손톱을 물어 뜯는 마영.

"..그 동거한다는 남자는 누구지..? 임수혼이 아는 사람이면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아 누구지..

누구지.. 아 어떤 새끼지..아줌마는 알고있..네. 알고있겠네 오피스텔로 같이 들어간 걸 봤으면

어디 사는지는 알겠네."

전에 유경이 한 말이 생각난 마영은 잠시 환해진 얼굴로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멈추고 침대에 주저앉듯 걸터앉는다.

"..알면. 알면 어떡할껀데 병신아..찾아가면 뭐라고 할껀데.. 형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나?

아무리 그래도..아...형은 아직 모르겠지..? 임수혼 여잔거 알면..임수혼이 사실 여자였는데

집 나가서 외간남자랑 동거까지 한다는 걸 알면.. 그래. 형이라면 임수혼하고 좀 레벨이

맞으니까..!!..아..짜증나..아아!!!!!"

아예 침대위에 엎어져서 발버둥치는 마영.

"생각해 보니까 진짜 어이없네 임수혼. 어떻게 나랑 차희안이랑 싸우는데 차희안 편을 들어?

그래 그런 의리없는 놈 따위 동거를 하든..! ..놈.. 놈이 아니지..아..임수혼..."

베게에 얼굴을 깊숙히 묻고는 또 한참을 중얼거리던 마영은 곧 잠잠해 지는가 싶더니

잠이 들었는지 곧 규칙적으로 숨을 뱉어냈다.

한편 방 밖에서 열린 문틈으로 그런 마영을 지켜보고 있던 유경은 왠지 모르게 몸을 휘감아 오는

열등감 비슷한 것에 입술을 깨물다가 오히려 더 잘됐다는 듯 픽 웃어버린다.

"정말..더럽게 부럽네요. 임수혼 당신이란 사람."

40. <카자마 준이치 번외.>

<카자마 준이치 번외.>

길을 잃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미세하게 빛나는 그 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며 한 길만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 빛은 꽤나 멀리 있는 것인지 잡힐 듯 하지도 않았다.

길을 잃는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익숙해져서 무뎌졌지만

언젠간 그 어둠을 뚫고 나갈 수 있게 해 줄 단 하나의 빛을 놓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마지 나사케나이네..보쿠와. [..정말 한심하네.. 나는.]"

준이치로서는 최고였을지 몰라도 임준으로선 최악일것이다 난.

잃어버릴까봐 급급해 하는 꼴이라니..

지켜줄테니까 지켜봐 달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지켜볼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달아난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 줄거냐는 듯이 쳐다보는 수혼이에게서 목까지 조여오는 갑갑함을 느껴서

일까..

아님 정말로 난 여기까지인 사람이라서 말만 그럴 듯 하게 해 놓고 도망을 와 버린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내가 한심해 지지 않기 위해, 혹은 수혼이를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기적인

명분으로 또 다시 수혼이를 위한다는 그런 포장지 안에 나 준이치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

다시 한 번 수혼이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도박과도 같은..

"저기.. 아까 교실에서 봤었는데.. 기억하세요?"

"아 깜짝..뭐..아. 그.. 일본.."

"네. 준이치 입니다. 혹시 계윤군이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아니면 학교 끝나고

자주 가는 곳이나.."

"전화를 해 보시지. 나 천계윤이랑 안친한거 아까 봐서 잘 알지 않니."

"전화를 받지 않아서요. 급해서 그런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의 선택은 천계윤이란 사람이었다.

수혼이가 무의식중에도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 사람이라면

다시 수혼이를 돌려놓아 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까 1학년 여자애들 막 오락실로 몰려가는거 같던데. 그럼 거의 둘 중 하나야.

천계윤마마님께서 행차를 하셨거나 이청후 선배님이 나타셨거나. 밑져야 본 전 이니까

한 번 가봐 그렇게 급하면."

시내 한복판에서 무작정적으로 계윤상을 찾다가 만난 계윤상의 반 학생을 붙잡고 묻던 나는

곧장 계윤군과 갔었던 그 오락실로 향했다.

그 남학생의 말처럼 오락실은 입구서 부터 사람들 소리로 가득했고,

남학생보단 여학생의 수가 확연히 많다는 건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찾았다."

맨 구석쪽에 있는 테트리스 기계 앞에 앉아서 별 재미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조이스틱만 움직이고 있는 계윤상과 그 주위를 대놓고 빙 둘러 싸고 있는 학생들 틈을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옆에 비어있는 자리에 앉고는 가만히 스크린만 쳐다보았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든 옆에 누가 앉든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무신경하게 스크린만

쳐다보던 계윤상은 게임이 끝나고 나서야 나에게 시선을 주었고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며 웃어보였다.

"소원 들어주기로 한 판 할래요? 나 테트리스는 좀 하는데."



여전히 별 흥미 없다는 듯 하던 계윤상은 가만히 앉아서 동전을 던졌다가 잡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별 말 없이 기계에 동전을 넣었다.

물론 이 게임에서 이긴다고 해서 정말로 계윤상이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거나

한 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고 시작한 게임이다.

어쩌면 난 내가 먼저 말한 것이지만 오히려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윤상 입에서 나올 그 소원이라는 것이.. 계윤상은 들어 줄 수 없지만 나는 들어줘야만 하는

알 수 없는 법칙 속에 존재하는 그 룰의 존재를 감지하는 순간이었다.


압도적으로 이겨가던 계윤상이 중간쯤 가서 아예 손을 멈춰 버렸다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정지했던 그 순간이 승리의 반환점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반환점에는 또 임수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조이스틱 옆에 올려 둔 핸드폰이 액정에 '이름없음' 을 띄우며 진동을 보내왔던 순간부터였다.

한 통의 전화로 계윤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름없음' 이라면,

애석하게도 그건 아마 수혼이일 것이다.

지금은 왜 수혼이가 계윤상에게 전화를 했는지 생각 안하기로 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자 또 별 일 없었다는 듯 먼저 나가는 계윤상을 따라 열심히 걸었다.

이미 수혼이가 여자인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더 불안하게 만드는 이 사람을.

어느덧 저번엔가 한 번 지나와 본 듯한 놀이터 앞 공터에 이르러서야 계윤상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같이 다 내가 하는 말을 핑계로 만들었고

작아지게 만들었고,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수혼이의 말들을 이 사람은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작아지고 무너지던 나의 입에선

이제 '거래' 나 '내기' 따위를 말하던 그 목소리가 아닌

정말 벼랑 끝에 선 사람의 턱 막혀버린 듯한 가슴에서 나오는 듯한 그런 목소리가

내 이성보다 본능적으로 뱉어졌다.

"...도와.. 주세요.."

주저 앉아버린, 더 이상 주저 앉을 곳이 없는 낮은 곳의 나를 그늘진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계윤상.



"뭘."

"..계윤상."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천천히 다가온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계윤상은 빛을 등지고 있어서 인지 더 어두워 보였다.



"안들어도 알 것 같은 그런 쓰레기 같은 계획 짜고 있을 시간에 옆에서 지켜."

"..어떻게요."

"어떻게든."

"..어떻게요."

"..두 번 말하게 하.."

"백번 천번이라도 부탁할 거에요. 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걸 알았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한테 무조건 고개숙이는 것도 방식이라면 방식이잖아요.

저는 수혼이처럼 똑똑하지도 착하지도 강하지도 않고 계윤상처럼 냉철하지도 못해요.

가장 낮은 곳으로 갈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인지 모르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닥을 더 검게 칠해나갔고

때 이른 겨울비는 나의 마음속 까지 적시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빗줄기 사이로도 자유롭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담배는 꼭 얼마후의 나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꽁초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버려졌다.



"..니네 집에 우산은 있냐."

"..네?"



그리고 난 그 순간 또 다시 뼛속까지 시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어느 때에나 내가 가장 아낀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이 사소한 빗방울 하나에도 우산부터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이 순간에도 의지하려고만 하는 나와는 다르게..

조그만 일을 해도 겉으로 표시가 나는 나와는 다르게..



"일단 내 말부터 하지. 니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임수혼 다시 안돌아와.

돌아온다고 해도 그 이유가 너 때문이라면 이 쪽에서 사양이다.

그러니까 너를 경호원으로 받아달라느니 하는 그런 쓰레기는 내 귀 말고 쓰레기 통에

버리지 그래."

"....."

"더 할 말 있나."

"....."

"애초에 없던 임수혼을 잃어버린 임수혼이라고 착각해서 단정짓고 전혀 임수혼 답지 않은

그런거 만들 생각이면 그냥 떠나라. 너 있던 곳으로."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지만 날카롭게 살을 파고드는 듯 하다.

도저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애초에 없던 임수혼을.. 잃어버린 임수혼이라고 착각해서 단정짓고..

어쩌면 난 계윤상의 말 처럼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그 짧은 기억으로 그 모습이 수혼이의 전부인냥,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을거라는

그 가정으로 내가 더 수혼이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계윤상."



어느새 머리부터 신발까지 다 젖어서 물기가 흐르는 얼굴을 쓸어내리면서도

제촉하거나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 계윤상을 올려다 보다가

힘을 내어 일어섰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이 쓰레기만 아니라면."

"..계윤상이 가지고 있는 수혼이에 대한 감정이.. 정말 오랜시간을 같이 한 사람으로써의

우정일 뿐인가요..?"



계윤상은 꽤나 진지하게 물은 내 질문에 잠시 멈칫하는 듯 하다가 이내 그 특유의 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한국말을 못알아 듣는 건가. 쓰레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우정도 아니면 위에 있었던 사람으로써의 의리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하나 묻지. 니가 아는 임수혼은 여자인 적이 있었냐."

"..네..?"

"내가 아는 임수혼은 항상 남자였거든. 근데 난 임수혼을 남자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어.

그렇다고 여자도 아니었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싸이보그 같은 존재쯤으로나 생각했나.."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세하게 웃어 보이는 계윤상.

그러다가 이내 다시 웃음을 지우곤 비와 잘 어울리는 그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탁은."

"..대답은."

"부탁이 절실하지 않은가 보네."



수혼이 만큼이나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또 말려 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찾기 위해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그리고는 생각이 더 정리될 시간도 없이 내 이성보다 앞선 본능이 대신 목소리를 냈다.



"수혼이를.. 부탁합니다."



내 입에서 나온 거지만 나조차도 앞 뒤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난해한 말이었지만

난해한 그 말이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불빛에 부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니가 임수혼 보호자라도 되는 줄 아나."

"하지만.."

"임수혼이 원치 않을 그 부탁은 또 너를 위해 하는 부탁으로 들리는데."

"..수혼이가 없으면 정말 안될 사람은... 저에요. 수혼이한텐 저 같은 건 없어도 될지 몰라도

저는 수혼이 없으면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거든요. 수혼이가 천씨가문에 충성하면서

하나만 보고 성장한 것 처럼, 저도 수혼이만 꿈꾸면서 자라왔거든요.

그런 제 꿈이..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전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수혼이가 아는 그 '하나' 가 천씨가문인데 한 순간에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면

행복해도 행복하지가 않을거에요. 저도.. 제 꿈인 수혼인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 옆에서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수혼이 없인 웃어도 웃는게 아니니까.

수혼이도 그럴꺼에요. 내가 수혼이한테 그러듯이 수혼이도 계윤상이나 마영군한테

그런 걸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요."



보고싶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뛴다.



"..그러니까. 수혼이는 나 처럼 되지 않게.. 행복한 수혼이를 볼 수 있게..

수혼이 옆에 있어주세요."

"....."

"계윤상도 아실거에요. 수혼이 절대 먼저 못다가가요. 계윤상이 먼저.."

"내 눈이 쫒고 있는 꿈이 임수혼이 아니라면. 그렇게 까지 해야 할 의무가 있는건가."

"..계윤상."



여전히 건조한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그런 표정으로 무언갈 생각하는 듯

보이던 계윤상은 곧 나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임수혼이 남자라는거."

"무슨.."

"아까 니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니 부탁은 생각해 보도록 하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멍하게 만드는 사람.

계윤상이 멀어져 가는 동안에도 꼼짝 못하고 서 있는 내 귀로

빗소리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파고든다.



"비 그만 맞고 들어가라. ..그 새끼 걱정많은 걸로는 기네스감이니까."

무심코 올려다본 밤 하늘이 아득히도 높다.

이른 겨울비를 뿌리고 있는 이 검다 못해 시리게 까지 보이는 이런 하늘은

일본 그 어디에선가도 많이 봐 왔던 하늘이다.

왠지 외로움이란 냄세가 나는 그 하늘아래 바람은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난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결승점은 아득히 멀다.

나는 지금 어느 기로에 서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지만 항상 꿈꿔오고 마음속에 간직해오던

나의 나침반이 되어 줄 단 하나의 사람은 알고 있다.

"키오츠케테 잇테이랏샤이. 준이치상. [조심히 다녀오세요.]"

"..잇테키마스. 카라다오 오다이지니. [다녀오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준이치상."

"..하이. [네.]"

이별은 항상 슬프다. 아니.. 서글프다.

보수적인 새 아버지의 밑에서 나를 많이도 보호해 주셨던 나의 새 어머니는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걸 예감이라도 한다는 듯이 애처로운 눈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한참이나 망설이던 어머니는 끝내 뒷모습을 보이셨고 마지막까지 뒷모습만을

보인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마지막이 될 듯한 음성을 남기곤 저택 안으로 멀어져갔다.

"..이쯔모 씨아와세니 낫데 구다사이. [..항상 행복해지세요.]"

이 곳에 와서 성공하는 법 보다는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정情' 보다는 '인忍' 을 배웠다.

어쩌면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하나였으니까.

임수혼 너. 나의 나침반이 되어 줄 유일한 빛. 별을 닮은 그 임수혼이란 빛.

이제야 정말로 너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환영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손에 잡히지도 않네.

두려움으로 물러서 있던 나약한 준이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이번에 너에게 돌아가면 함께 이 하늘 아래에 있고 싶다고 꿈꿔 왔었는데..

막연하게 '어느 같은 하늘' 말고, 내 바로 옆에서 숨쉬고 있는. 나도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그런 하늘아래를 꿈꿔 왔었는데 역시 아직은 멀었나 보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아님 또 나 혼자만의 너를 만들어가며
열심히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수혼아.

"..이쯔모 씨아와세니 낫데 구다사이. "

..나의 욕심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며.

<카자마 준이치 번외. -end->

[쥐포귀신]

원톱 여주성장기인가요... 남주는 없나요.. 계윤이 남주라 하기엔 불량너무없고.. 마영은 너무 어리바리하고.. 죄다.. 여주바라기고..훗

[발라드7]

내가 아닌 다른사람을 바라본다는거, 내가 아닌 다른사람을 사랑한다는거, 참으로 어렵네요.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늘 기대하면서 때로 설레이면서 기다리고있습니다.

[돼랑이맘]

속내를보여주지않는 계윤
다큰남자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향기를 풍기는 모습이 참든든해지는거요
그래요그래~~^^흐흐흐
계윤이 사랑하게해주세요~~~~~~~~~

[내이름은 뚱땡이]

잼잇게잘읽엇습니다~계윤이는알수가없어요~베일에쌓인계윤인가요? ㅋ

[아힝뽀뽀a]

준이치 우짜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