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항쟁(민중항쟁)의 허구
당시 폭동 주동자 및 북한이나 좌파의 주장은 일관되게 '인민(민중)항쟁설'이지만 필자는 이를 부인한다.
가. 폭동 주동자들의 목표
그들이 당시 폭동을 일으키는 데 명분으로 내건 관료들의 부패와 상식을 초월한 인권침해(고문치사 사건, 참고자료), 서북청년단의 횡포, 3.1절 발포사건(사망 6명, 부상 8명) 등이 폭동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은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희생되거나 곤욕을 치른 사람들의 억울함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수가 1만 명을 넘는다는 데서 통탄할 일이다.
그렇지만 폭동 주동자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이미 수립된 김일성 정권의 노선에 따른 공산통일을 추구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5.10선거를 파탄 내려는 것이었다. 공산전제정치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순박한 도민들을 선전 선동으로 기만하고 이반된 민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한 공산화를 위해 4.3을 일으킨 것이다.
좌파가 일관되게 4.3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경찰과 서청탄압에 대한 항쟁'이라면 그 대상은 경찰이나 서청에 극한되어야 하고, 그들의 주장은 인권침해와 비리척결에 대한 책임추궁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와 전혀 무관한 양민을 살해하고, 적기가를 부르며, 인공기를 게양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4.3주동자들이 경찰과 서청의 탄압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지 근본 의도는 소련과 북한을 등에 업은 북한식 공산통일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 '적', '원쑤'라 칭하고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문'을 광포하고 친소련, 친북한적 삐라를 살포하였다. 제주도 1호 목사이며 기독교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16년간 10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 이도종(李道宗) 목사를 1948년 6월 16일 남제주군 대정읍 신평리 인향동 인근 중산간 도로에서 유격대들이 납치 생매장하였다.(제주일보, '20세기 제주 인명사전' 323~324쪽 )
경찰과 서청 탄압에 항쟁하고 친일파를 배척한다는 사람들이 왜 독립 운동가이며 성직자인 목사를 생매장하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칼 마르크스는 1844년에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말했으며, 박헌영도 1925년에 '적극적인 반종교운동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반기독교대회에서 이를 역설하였으며, 이에 대한 글도 썼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증오하는 기독교 목사이고(당시 유달리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희생되었음) 비협조자였기 때문에 생매장하였다.
그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은 자, 5.10선거에 참여하려는 자, 선거관리위원, 지하선거 비협조자, 그들의 비밀을 아는 자, 식량이나 물건을 지원하지 않은 자나 심지어 이도종 목사처럼 순수 중립적인 인사와 그들 가족이라면 모두 반동으로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지 독립운동가이든, 친족이든, 목사이든, 이웃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764명을 살해했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은 폭동이지 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땅에 살고 있다. 그런데 무력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후에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투를 자행하고, 6.25 때 남침한 북한인민군과 합세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기도했다는 사실은 항쟁이 아니고 반란이라는 것이다.
나. 체험자 증언
제주 미술계에서 활동한 강용택씨는 한때 좌익활동에 직접 참여했던 체험자로서 자서전「꿈을 간직하고 살아온 화가」에 그 성격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필자가 재학하던 제주농업고등학교에는 통칭 P원, M원, 콩클럽 등 3개 조직체가 있었는데, P원은 남조선노동당 정당원 약칭이고, M원은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원이고, 콩클럽은 2학년 이하 공산소년단원의 약칭이다. 둘째 형님은 P원으로 3학년 축산과 위원장이다'라는 점으로 보아,
당시 학원가에 남로당 세력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1947년 8월 15일 정오 사이렌 소리에 맞춰 관덕정 광장에서 소위 '벼락시위'에 직접 참가했던 사실을 밝히면서 4.3사건을 '민주시민항쟁이라고 고집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필자의 결론은 좌.우 이념 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제주읍사무소 국기게양대에도, 어느 송신소 나무 안테나에도 펄럭이는 오각별 인공기를 봤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또한 당시 남로당 대정면책이었던 이운방도 '주도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라고 증언하였다./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