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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8,4-7.10-22ㄱ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healing of a paralytic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을 통치할 임금을 세워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제1독서).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복음).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임금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에게 청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라고 이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내려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 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게 ‘정’(淨), 곧 깨끗함을 선물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을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헤치고 자신에게 다다른 그들의 정성과 행동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는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급하고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 모독’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가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는 중풍 병자의 모습은 그의 병이 나았음은 물론,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증명합니다. 이로써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이 질문은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밀접히 관계되며, 둘 다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비된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 죄를 용서하시는 분, 곧 참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중풍 병자의 치유와 용서는 예수님의 ‘권한’과 사람들의 ‘믿음’이 만나 이루어졌습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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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미루어 놓고, 자기들끼리 단죄하기 바빴던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성합니다.
우리 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사회 통합 지수가 늘 꼴찌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로 포용하고 화해하고 보듬는 데 너무 인색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묵상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데리고 와서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과 만나게 한 네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사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를 치유의 사건으로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의 반목과 대립, 그리고 단죄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보여 주셨습니다.“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용서 못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안 볼 거야.”와 같은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죄와 그 때문에 생긴 상처에 짓물러 터진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신앙인은 이를 이겨 내는 내적 힘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무작정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허덕이는 우리네 삶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형제애 안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초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것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 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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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장면은 다른 병자의 치유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병자를 곧바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먼저 선언하십니다. 병이 내 몸을 평소 못 챙긴 탓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병은 죄의 결과’라는 예수님 시대의 생각이 오늘날에는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 학자들 입장에서는 병의 치유에 앞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이 자신의 죄과라고 믿던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시고 치유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신체의 자유를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백성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고자 세속에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칠 때, 사무엘은 그 임금이 얼마나 백성을 수탈하고 억압하며, 불의한 요구를 할지 미리 경고합니다. 권력자가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를 경험해 본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먼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불합리에도 상관없이 꼭 임금을 세워 달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백성의 주인으로 삼지 않고, 인간의 권력욕에 빠진 임금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의 치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이 지닌 교만의 역사를 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진정 나를 치유하시기를 겸손하게 청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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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많은 병이 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에 얽매여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주 오래 전에 잘못한 자신의 죄를 곱씹으면서, 그 일 때문에 자기 집안에 불행한 일들이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는 율법 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미신적인 요소까지 끼어들어 올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도 잘 압니다. 지나간 죄가 자꾸만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에, 그 사슬을 끊어 버리기는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믿음이 분명히 요구됩니다. 다른 사람과 잘못한 점에 대하여 진정으로 화해를 하고, 그것을 더 큰 사랑으로 갚으려는 노력은 좋고 아름다운 일입니다만, 이 경우에도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내가 한 번 잘못했기에 나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은 믿음과 희망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엄습해 올 때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의 주님께 믿음을 더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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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냈던 겁니다.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봤을까요? 더러는 웃었을 것이고,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용기를 받아 주십니다. 그분의 넓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못마땅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죄를 용서해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도 받아 주십니다. 모두에게 애정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용기가 있었습니다. 주변을 의식했더라면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용기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결정입니다.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의 판단에 구애된다면 ‘참된 용기’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선만을 생각해야 참된 용기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지 못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따집니다. 신앙 안에서 따진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까지 따져야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따지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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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면 대개 삼각형 모양입니다. 조류 학자들에 따르면,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삼각형으로 함께 날면 공기 저항을 덜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승 기류 때문에 70퍼센트가량을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삼각 형태의 맨 앞에 나는 새는 공기 저항 때문에 쉽게 지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새가 앞으로 나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은 날아갈 때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는데, 이것은 서로 격려하는 것이며 특히 맨 앞에서 공기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새에게 힘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체력이 떨어지거나 아파서 낙오된 새가 있으면 반드시 동료 새 두 마리가 같이 땅에 내려와서 몸이 회복되도록 도와주고 기운이 회복되면 다시 대열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러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우애가 매우 돈독한 새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집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문 앞을 지나 예수님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할 때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주위에서 받는 작은 도움에 큰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는 작은 도움은 그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기러기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 서로 격려하고 어려울 때에 함께하듯이, 우리도 서로서로 격려와 용기를 주고받으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애 있게 사는 우리 모습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실 것이며, 우리에게는 사람으로 사는 보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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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티나의 기후는 변화가 심합니다. 북쪽은 온대성 기후로 분류되지만, 남쪽은 열대성 식물이 자라며, 봄가을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 년의 절반 이상은 대체로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0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자주자주 비를 뿌린다고 합니다.
복음의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줄에 달아’ 내려보냈습니다. ‘들것에 눕힌 채’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내려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쳐다봤을 것입니다.
복음의 이 장면이 가능한 것은 팔레스티나의 ‘가옥 구조’ 때문입니다. 반년 이상 비가 오지 않기에, 대부분의 지붕은 ‘거적때기’ 같은 것으로 대충 덮어 두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극성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따뜻하게 받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당시는 중풍의 원인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손발을 못 쓰고 말이 어눌해지기에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어겨 그 ‘보속’이 내린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坍 알고 있었기에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원인을 제거하였으니 안심하라는 배려이십니다. 온갖 이론과 지식을 뛰어넘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성경 내용에 의문이 들어서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희랍어 성경을 펼쳐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1년 배운 희랍어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 사전을 펼쳐 들고 찾으면서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희랍어 성경을 보면서 ‘신학생 때 열심히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가 밀려듭니다. 사실 요즘에는 옛날 신학생 때 공부하던 책들을 다시 펼쳐보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면서, 이제는 공부가 아닌 사목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목도 잘 알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신학생 때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다시 신학생이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소학’을 가장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배움의 시작에 펼쳐보는 책이 ‘소학’이지요. 그렇다면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던 정약용 선생은 이 책을 왜 다시 읽으셨을까요? 초심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기에 그 엄청난 저작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처음 만남으로, 내 일을 시작하며 가졌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더 성장하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고, 더 큰 기쁨과 행복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가기가 쉽습니까? 세상의 많은 방해물이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과 이기심 등등 주님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방해물을 피할 길이 없다고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맞을까요?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에 갈 수 없다고 포기했다면 이 중풍 병자는 치유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군중들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어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방해물을 피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곧, 첫 마음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기도와 묵상에 매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라. 체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노력이야말로 잠재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윈스턴 처칠).
‘하찮은 나’가 아닌 ‘당당한 나’.
사람들이 종종 대단하다며 저를 추켜세우십니다.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는 것, 20년째 강의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 성지의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하는 일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대단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쳐야 할 모습들을 바꾸지 못하는 저의 나약함에 스스로 ‘하찮다’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나의 평가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하찮은 나’에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당당한 나’를 구현해 나갈 때, 가쁨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의 인정보다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스스로 인정하는 ‘당당한 나’를 만드는데 오늘도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치유요 정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중풍병은 참 무서운 병입니다. 환자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큰 고통을 안겨주기에 가급적 피하고 싶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의 장애로 인해 생기는 병인데, 주로 중장년이나 노인 남자에게서 많이 발병됩니다.
한번 중풍병을 앓게 되면 꽤나 여파가 큽니다. 신체 전반적인 기능의 마비와 후유증으로 인해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의료 수준이 높아진 요즘에야 잘 치료하고 재활을 하게 되면 증상이 많이 완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그런 호전 상황은 꿈조차 꿀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마비증세와 통증은 심해가고, 결국은 몸 전체가 마비되기에 이릅니다.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루 온종일 똑바로 누워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누군가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갓난 아기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중풍병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상처는 환자의 인생을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갔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가족들에 대한 큰 미안함과 극도의 좌절감, 수치심뿐이었습니다. 기쁨이나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생, 숨은 쉬고 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을 환자는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네명의 착한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만 가면 반드시 새삶을 얻게 되리라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향한 가련한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네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갸륵하고 영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네 사람이 보인 행동,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낸 행동은 비록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네 사람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을 보십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베푸십니다.
고통받은 한 가련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착한 동료 이웃 4사람의 협력도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건강과 구원에 만족해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우리인만큼, 이웃들의 구원에 도움을 주는 착한 4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우선적인 관심이요 최우선적인 목표는 육체의 치유요 건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인 치유와 구원에 관심을 가지졌습니다.
줄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영혼의 치유를 베푸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복음 2장 5절) 그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영혼의 구원, 즉 죄의 용서를 베푸신 다음, 육체의 치유를 베푸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코 복음 2장 11절)
이렇게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에는 나름 순서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치유와 구원이 우선이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기적은 2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대할 때 먼저 그의 영혼과 인간됨을 살폈습니다. 그 뒤에 육체적인 병의 치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주관심사는 병의 치유를 넘어 한 인간 존재의 전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지극히 일회적인 것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한번 치유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기적적 치유는 영원히 계속되고 반복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치유요 정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프랑스 왕국의 한 고관대작은 비밀편지를 미처 치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가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비밀편지라는 것이 들통날까봐 경시청 총감에게 은밀히 편지를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총감은 도둑의 집을 구석구석 다 뒤지고 심지어 천장 속, 벽까지도 조사했지만 찾지 못합니다. 총감은 뒤팡이라는 사립 탐정에게 부탁을 합니다. 뒤팡은 금방 편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았소?”
“편지는 편지 보관함 서랍 안에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설마 비밀편지를 그렇게 허술 하게 놓아두었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편지함은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경감님은 ‘자기 생각’으로 편지를 찾았지만, 저는 일단 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모두 내려놓고 ‘도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편지는 편지함에 넣어두어야겠더군요. 다시 제 생각으로 돌아와 편지함에서 편지를 꺼내왔습니다.”
사람 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자기만 믿게 되고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난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육체적 즐거움과 명예만을 생각하게 시스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원죄는 뱀 때문에 비롯된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생긴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 때문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5항 참조). 또 원조들의 죄로 악마는 인간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 본성이 손상되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교육, 정치, 사회, 그리고 도덕 분야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7항).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과 화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뱀인 것을 모르면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 책에서 자아를 뱀과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죄의 영향이 인간 안에 있어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인간의 생각을 미혹한다고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3)
이런 의미로 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일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사탄과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조심하지 않고 그 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도 사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뱀과 같은 자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존욕구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하느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교만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밟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성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말씀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뱀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는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 창세기에서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또한 “발꿈치를 바라보리라.”, “발꿈치를 보며 입을 벌리리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뱀에게 물리실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뱀을 십자가에 매달고 발로 밟아 이기셔서 죄에 떨어진 적이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1항 참조).
우리는 생각을 미혹하는 우리 안의 뱀과 싸워 이겨야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 뱀에 물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마치 뱀처럼 매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죽이신 모습을 보고 우리도 각자의 뱀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자아는 결국 ‘자신의 뜻’이고 자신의 뜻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분명 내 뜻은 아버지 뜻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뱀의 유혹과 같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몸을 사랑하려면 몸을 괴롭혀야 합니다. 단식해야 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본성대로 방치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싸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항)라고 가르칩니다. “자아 포기”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나가야 하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 요르단으로 성지순례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건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약속의 장소를 보았습니다. 순례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판단, 비판, 시비를 가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청, 희망, 용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렸을 모세를 생각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의 강렬한 눈빛을 봅니다.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는 목동과 동방박사를 생각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로 변한 물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기뻐하는 제자들,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치유되는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순례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관대해지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용기를 가지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겁니다.” 과거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원망하면 지금 주어진 일에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고통 앞에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신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좌절에서 용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용기는 희망의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용기가 없는 겁니다. 지금 용기가 없다면 신앙의 샘이 메마른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중풍 병자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주님을 찾았습니다. 따뜻한 이웃은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가 일어난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난 겁니다. 두려움에서 용기로 일어난 겁니다. 원망과 분노에서 관대함과 자비로 일어난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보지 못하였고, 판단하고 분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자비와 사랑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신앙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형제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변했어!’ 그 형제님은 이제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거절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작은 일에 화를 내기보다는 참았고, 주일에는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하기로 정했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재물과 명예, 욕심과 이기심의 바다를 건너 나눔과 봉사와 사랑과 평화의 세상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도, 나병 환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3-5)”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0ㄴ-12)”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너의 병을 고쳤다.(너의 병은 고쳐졌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나는 너를 구원한다.(너는 구원받았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그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병을 고쳐 달라고 온 것이 분명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병자 자신이 ‘몸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병자가 실제로 죄 속에 있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자기의 죄를 더 의식하게 되고, 몸의 치유를 원하는 만큼 영혼의 치유도 원하게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병이 회개의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특정 질병에 걸린 병자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일률적으로 죄인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병자를 죄인 취급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그런 식으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 회초리를 드실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야만 할 때의 일입니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있어도, 병자가 되고 싶어서 일부러 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병을 가서 “왜 평소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 라고 나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상처만 주는, 참으로 쓸데없는 말, ‘사랑 없는’ 말입니다. 그런 말은 건강한 사람에게나 할 말이고, 또 병이 나은 다음에나 할 말입니다. 병에 걸려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만 주어야 합니다.)
또 “이 병은 하느님의 뜻이니...” 같은 말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용서’에 초점을 맞추면,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그 병자의 회개를 보시고”로 해석됩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다면, 그는 이미 회개했거나 회개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에 초점을 맞추면,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치유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시고”로 해석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는 병자들만을 고쳐 주셨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요한 5,1-9).
그렇지만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서 ‘영혼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지만, 안 믿는 사람은 은총을 주셔도 잘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받은 은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 뒤에, 이 말씀에 시비를 거는 율법학자들의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따로 생각할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과 권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니라, 그 병자에게 그냥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너의 병은 고쳐졌다.)” 라는 말씀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신 말씀이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는 말씀은, 그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병자의 병은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이미 치유되었습니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6-10ㄱ)”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고해성사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한을 집행하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2,7)
곽승룡 비오 신부님
복음의 예수님 시대에 병이든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9)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레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마르2,10)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
이처럼 예수님은 중풍과 죄를 동시에 치유하고 용서하시는 데, 이런 의미에서 중풍치유는 그 시대에 ‘병자가 죄인이다’라는 잘못된 시대적 사고의 뿌리를 제거하시는 상징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런 사고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병자가 죄인이라는 이런 사고방식의 토대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보면, 몸에서 발생하는 병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지은 죄와 같은 기원을 가진다고 고백한다. 이를 우리는 창세기 초기부분에서 나타나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곧 원죄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원죄를 지어서 결국 인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사람들은 물질의 세상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인간에게 병으로 상처를 입혀온 것으로 성경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원죄는 더 이상 아담과 하와의 죄를 뛰어넘어 인간에게 공동으로 점유하게 되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세상의 죄, 사회악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원죄는 단지 아담한테 제한되고 분리된 것만이 아닌 지금도 사회에서 악으로 우리 안에서 병으로 계속 만나게 되는 신비적 현실로 드러난다.
중풍자에게 죄를 용서하고 병을 치유하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거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마르2,9)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사람들이 그를 죄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마음과 몸의 아픔에서 모두 벗어나게 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것이 본래의 마음과 몸으로 사람을 회복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죄 없고 병 없는 본래의 ‘원초순결’ 상태 곧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치유고 용서이다.
그래서일까 온 인류는 모든 인간들의 죄와 역사 안에서 내려오는 아담의 죄로부터 정화되고자,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로 죄와 병으로 단절된 삶에서 떠나가도록,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로 주님은 인도하신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거룩함의 표징들 가운데 하나가 ‘깨끗한 몸’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치유와 용서받은 몸을 의미한다. 곧 성령에 의해 특별한 모양으로 정화된 영혼은 몸에 그 맑고 깨끗함을 전한다.
이것이 몸(병) 그리고 생각과 마음(죄)의 치유인데,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본래 모습처럼 온전하게 되도록 몸과 마음을 회복하신다. 우리도 몸의 치유 그리고 마음과 생각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 모습을 닮는 태초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초대하신다.
봉쇄 수도원의 은수자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산, 바람이 있는 외딴 터는 은수자들의 삶의 장소이다. 안동교구 상주군 모동면 반계리에 위치한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수사님들은 산 속에서 바람과 친구되어 극기와 희생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 2019 성탄특집 3부작으로 KBS1TV에서 다큐 인사이트로 ‘세상 끝의 집’을 방영한바 있다.
세상 끝처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산이 있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보였다. 평소에는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의 야트막한 문이 굳게 닫혀 내방객의 진입을 막고 있다. 주일이면 닫힌 문이 열리고 외부 사람의 방문이 허용된다. 봉쇄 수도원과 좀 떨어진 별개지역이 있다. 입구에는 벽면에 크게 십자가가 걸려있는 경당이 있고 게스트 하우스가 손님을 기다린다.
온전한 침묵이 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되어 크게 들릴 뿐이다. 기도와 고신, 극기, 희생이 그분들의 일상이다. 오늘은 사막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이다. 사막과 바람이 전부인 삶의 장소에서 성인께서 극기와 희생하며 생을 살다 떠났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직접 뵈오려 은수자가 되었다.
‘카르투시오’ 수도자들의 삶을 다큐로 보며 오늘 축일을 맞이한 사막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를 떠올렸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은데도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께 달라기만 청하는 나를 본다. 하느님을 그리워 하지 않는다. 늘 재물욕심만 부리다 부족하다며 또 복을 청하고 들어주지 않는다며 하느님께 불평하다 곁을 떠나는 우리들이다. 성당 강론대에서 자기들 복은 아야기 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이야기한다며 재미 없다고 다들 도망을 간다. 극기, 희생, 봉헌, 나눔, 자기 포기, 하느님의 정의를 이야기하면 듣기 싫다 불평을 하고 세속의 안정된 곳으로 옮겨 다니며 약삭 빠르게 나아갈 뿐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병들고 나이들어 침대 위 신세되어 꼼짝 못할 때, 아무것도 살지 못했던 중풍병자의 비참한 신세가 자기 모습이라고 후회하고 아쉬워 한다. 들 것에 자신이 눕고 다른 사람 넷이서 들 것을 협력해 들어줄 때야 비로서 내 자신이 한번도 남을 위해 사랑을 살지 못했다고 한 숨을 내 쉴 뿐이다. ‘카르투시오’ 은수자들이 고신 극기 희생하며 나 대신 들 것을 들어 주었음을 그제야 알고는 그들의 삶의 진가를 떠올려 보는데 때는 늦어 중풍병자의 신세는 계속되고 허송세월 했음을 한탄할 뿐이다.
그분들의 삶, 묵상하며 하느님께 가까이 갔으면 한다. 사막, 산 속의 끝의 집, 수도자들은 중풍병 걸린 우리를 위해 잘 살라고 들 것을 들어주며 기도를 한다.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에서 정화된 바람이 더러운 세속을 정화하려 깊이 파고든다. 속화된 우리가 깨끗이 정화가 된다. 그제야 우리가 바라는 것이 기복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어떤 사람들이 들것에 뉘여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이웃은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자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내려 보냈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실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운 들 것을 내려 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붕을 누가 그렇게 부셔버린다고 한다면 손해 배상 청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붕까지 사람을 끌어 올려서 들 것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고, 정말 많은 위험이 예상되는 작전이었을 뿐더러 또한 그 곳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 살려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사랑과 믿음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친구인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얼마나 사랑과 믿음의 삶을 함께 이루어왔었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해나가던지 공동체가 함께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존재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람이 걷는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여기에서 저기로 자리를
옮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걷는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고
때로는 뒤로 물러서며
나를 딛고 나를 이루어가며
너를 품어 세상을 보듬어 가는 것
곧 살아감이다
그러니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만이 걷고
걷지 않는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니
사람이 두 다리로만
걷는 것은 아니다
제 한 몸 가누지 못해도
쉼 없이 걷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곁에서
기꺼이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애써 걷는 사람이
더 힘차게 걷도록
더 제대로 걷도록
이미 그렇게 걸음으로써
북돋우는 사람이 있다
너는 걷지 마
너는 걸으면 안 돼
너는 걷게 하지 마
윽박지르며
힘겹게 걷는 사람을 막고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을 막으며
스스로도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
걸어야 함에도 걷지 않고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으며
걷지 않는 나처럼
너조차 걷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힘차게 걷든
힘겹게 걷든
걷고 있다면 살아있는 것이고
걸음으로써 살아있음을 드러낸다
사람이 걷는다
사람이 살아있기에 걷는다
나는 걷고 있는가
하느님의 감동, 예수님의 감동, 우리의 감동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감동과 인간의 감동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감동할 때 예수님도 감동하고 하느님도 감동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감동하거나 감명받을 때 심신의 정화, 그리도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예수님을, 하느님을 감동케 합니까? 믿음과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입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님 세례 축일에 교황청 산하 직원들 아이 30명을 시스틴 성당에서 세례주실 때 즉흥적 설교에 감동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의로움의 행위이다. 우리는 세례에서 그들에게 보물을 주는 데 그것은 인호인, 성령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니 성령의 힘과 더불어 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세례식중 울어도 당황하거나 혼란해 하지 마라. 아이들은 시스틴 성당에 오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처음이다. 그들이 울어도 마음 편히 갖고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아이들은 합창대다. 울기 시작한다면 합창에 참여하는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아이가 교회 안에서 울 때, 그것은 아름다운 설교이다.”
참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담긴 교황님의 아름다운 설교입니다. 아이의 울음이 ‘아름다운 설교(a beautiful homily)’란 표현도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 오늘 복음의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상적 교회의 모습을 보는 느낌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로 가득한 교회 모습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집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미사중 말씀 전례와 흡사합니다. 문제는 다음에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들어올 수 없게 되자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동료들이 예수님이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낸 것입니다.
도대체 이 장면보다 아름다운 강론이 어디있겠습니까? 중풍병자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감동은 그대로 하느님의 감동이요 우리의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그대로 하느님의 감동을 전하는 예수님입니다. 율법의 틀에 갇혀 좁은 시야를 지닌, 이런 감동에 무지한 마음이 무딘 율법학자 몇사람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항의에 개의치 않고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용서의 결정적 표지로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예수님을 감동시킨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과 사랑도 아름답고, 예수님의 죄의 용서와 치유의 과정도 아름답고, 이에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집에 모였던 신자들 역시 중풍병자 동료들의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 예수님의 아름다운 죄의 용서와 치유활동에 크게 감동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아마 이들도 더불어 크게 위로받고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인지요!
이와 똑같은 주님께서 감동스럽게 이 아름다운 미사를 집전하시며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으로 미사에 참여해야 함을 배웁니다. 죄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의 치유제이자 예방제는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 동료들의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에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사무엘상권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느님의 심중을 대변하는 사무엘의 충고를 무시하고 막무가내 임금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예견되는 왕정제도의 폐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이들 이스라엘 백성이 끝내 거부하자 최후통첩성 말씀을 주십니다. 순종의 믿음이 전무한 참으로 완강한 반응을 보이니 참 실망스럽고 추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이들의 완강한 고집스런 청에 하느님도 속수무책 허락하시고 맙니다. 복음의 중풍병자들의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의 감동적 분위기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사무엘에 이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실망스런 모습이 역력합니다. 참으로 끝까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중재하며 그 사명을 다하는 사무엘의 믿음과 사랑의 모습 역시 참 아름답습니다. 사무엘뿐 아니라, 오늘 축일을 지내는 105세까지 장수하시며 시종여일始終如一 끝까지 아름답게 사신 수도생활의 아버지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삶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또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김도완 안토니오 수사의 영명축일이며, 최빠코미오 원장수사와 백찬현 요셉 수사의 감동스런 서원 25주년 은경축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모두 한결같이 수도생활에 정진하는 아름다운 수행자들입니다.
어제 설 명절을 앞두고 40년전 초등학교 제자가 편지와 함께 보내 준 지리산 꽃감 선물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이었던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과 사랑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은 당신 교회의 감동스런 믿음을 보시어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영육의 아픔과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의 감동스런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들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어제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고 그를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안에는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내용도, 평소에 독실한 믿음을 지녔다는 표현도 전혀 없습니다. 중풍병자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는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서품을 받은 지 18년이 되어 이제는 신학생들을 양성하고 있는 저에게 이와 같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고 사제로서 미사를 드릴 수 있기까지 제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저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믿음이 있었기에 은혜로운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같이 은혜를 받으며 살아온 것이 제 사제생활의 전반전이었다면,
이제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이들의 삶을 제 사제생활의 후반전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주님께서 저의 겨자씨와도 같은 작은 믿음을 보시고도 다른 이들을 당신 자녀로 받아주시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실 것임을 희망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이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라.”
하느님 가족정신 갖고 사랑 평화 봉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코 3,8~12)”
친구네명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벗겨 방으로 내려 보냈지요.
율법학자들 생각 아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사죄와 치유 뭐가 쉽겠는가.
치유 어렵지만 사죄는 더구나 사람인데, 예수님은 하늘능력 보이셨죠.
의술 위에 기적 있고 헌법위에 신법이 있다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인데 권력 쥔 사람에게 매인다면 잘못된 겁니다.
권력자들이 착각해 하늘까지 오르려 발악하며 세상을 망치고들 있네요.
높은 권력자는 종이 되어야한다고 예수님은 인간관계 진실 말씀하셨죠.
하늘아래 사람들 다 하느님 가족정신 갖고 사랑 평화 봉사하며 삽시다.
'힘을 합치면'(마르코 2장 1~1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문앞까지 꽉 차 있어서 발디딜 틈이 없자 중풍병자를 살리고자 하는 네명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 있을까 궁리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견!
지붕을 뚫고 줄을 메달아 내려오는 환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립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손길을 눈여겨 보시며 감동하고 기특해 하십니다.
때때로 누구 누구 덕분에 살아가는 나를 생각하면 그 누구 누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힘을 합치면 사람도 살릴수 있습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지붕을 벗기고 달아 내린 중풍환자를 치유하시며 하신 말씀과 군중들의 반응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치유하실 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어떤 것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들것은 중풍 환자가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일부로 가지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들것이 필요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가라고 하셨다. 그 사람의 일부이던 들것은 계속 그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 들것을 보는 눈이 변화된 것이다. 나 자신의 들것을 바로 보는 눈이 달라지는 그 순간에 이제는 들것이 들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매개체 임을 알아 본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에 감탄하는 군중의 반응 처럼 나 역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그분의 모습을 삶에서 바라다 볼 것이다.
겨울에 노박 덩굴 나무가 만들어 낸 자태에 감탄하듯 나에게 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에 화들짝 놀라는 순간을 맞이 한다.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최민석 신부님
하루해가 저무는 시간은 고요하다.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들떠 있던 마음도 과장된 언어들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낀다. 어두움을 받아들이고 있는 숲도 고요하다. 하나씩 둘씩 켜지기 시작하는 별을 바라보며 나무들도 선 채로 손을 모아 기도하는 시간이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옷 속으로 스미는 한기가 몸을 부르르 떨게 한다. 마을 길목에 서 있는 나무는 나뭇잎을 다 잃어버린 채 빈 가지만으로 서 있고, 무등산으로 향하는 둘레 길에는 꽃이 없다. 억새풀 몇 개 남아 흔들리니 둘레 길은 더욱 한적하다.
꽃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다. 아름다운 것도 참으로 한 순간이다. 흙, 물, 불, 바람의 기운이 모여 꽃이 되기도 하고 열매가 되기도 하고 생명이 되기도 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면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만다.
여기 자연 생활관 양지 바른 남향집이라서 그런지 빛이 많이 들어온다. 계곡 옆에 지은 집이라 공기가 맑고 신선한 바람이 분다. 흙의 기운, 물의 기운, 불의 기운 바람의 기운이 모여서 생명이 되니 자연 그 자체로 생명을 유지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이대로 나 지금 은총 가운데 있다.
기도하는 시간은 더 없이 고요한 은총의 시간이다. 나를 떠나 온갖 데를 쏘다니던 생각과 감정이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은혜로운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받은 넘치는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무엇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감사의 시간이다.
내가 어디에 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누구를 향해 간절하게 소망하는 바를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주님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내가 진솔한 나와 만난 시간이며 하느님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내가 어디에 있어도 하느님의 자식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며 내가 길을 잃었을 때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인생의 길이 어디인지를 찾게 되는 시간이다.
고요한 기도 시간은 무엇이 진리이며 진리는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는 생명의 시간이다. 잡고 있던 것을 천천히 내려놓는 시간이며 동시에 가장 충만해 지는 시간이다.
모든 축복과 은혜는 외부에 있지 않다. 나 자신이 축복이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이 주시는 바깥의 풍요와 축복을 느끼고 알아차린다. 나를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본다.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꽃가게 앞에 놓인 꽃들의 아름다움, 내 발 걸음마다 삶의 충만함이 있다.
세상 모든 곳에 흘러넘치는 은혜가 가득하다. 깨어나는 순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그 은혜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느끼는 행복이다. 예수님이 선언하는 말씀이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살얼음이 얼면서 아침이면 땅도 얼어붙고 마음도 움츠리는 듯 얼어붙는다.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어깨가 시려온다. 창문 쪽에서 한기가 한 호흡씩 밀려오는 게 보인다. 커튼을 쳤지만 그것만으로 냉기를 막을 수 없다.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게 방안에서도 느껴진다.
추운 계절이 찾아오면 몸도 마음도 긴장하게 되는데 나만 추워 떠는 게 아니라 이불이 얕은 많은 사람들은 다들 시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생각이 드는 순간 한 편이 마음이 시리면서도 따뜻한 몇 평의 방이 있다는 게 고맙고 고맙다.
은빛 달도 고요히 떠 있고 바람도 숨을 가만가만 내쉬고 있다. 차가우면서도 고요한 겨울 풍경이다. 잠시 삭막해지는 풍경 속에서 구름 사이에 별이 뜨듯 다시 몸과 마음이 훈훈해 지는 소리가 있다. 침묵 속에 텅 비어 있는데 가득한 충만이 거기에 있다. 아니 있다 없다 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가 거기에 있다.
고요하고도 충만한 이 시간을 자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존경하는 큰 스승들은 아주 많은 시간을 고요하게 지낸 분들이다. 고요로 충만한 분들이다. 오늘도 그 분들의 고요함에서, 고요함 그 자체에서 만은 것을 배우게 되기를 소망한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 당하시는 하느님(예수님), 그래도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어 응하시는 하느님(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마르 2,3).
중풍 병자는 제 힘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몸이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는 상태니까요. 그의 굳어버린 몸은 예수님을 만나는 데 첫째 걸림돌입니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좋은 이웃이 있어 예수님 계신 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들것에 그를 싣고 나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걸림돌이 가로막습니다. 바로 비슷한 지향으로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몰두하느라 문 앞에 환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혹 알고서도 안 비켜주었다면 그들의 마음은 중풍 병자보다 더 완고히 굳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겠지요.
들것을 들고 지붕까지 올라가 환자를 달아 내려보낸 네 명의 친구들 덕분에 중풍 병자는 예수님 발 앞에 놓여집니다. 그들의 기지와 집념이 대단하지요. 평지에서 막힌 길을 하늘을 뚫어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네 명의 의인은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기에 이런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대견히 보십니다. 그 덕에 중풍 병자는 치유의 선고, 말하자면 완치 판정 선고를 받지요.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발설된 "용서"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이 속으로 발끈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고도 일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당장 뛰쳐 일어나 예수님을 얼싸안고 적극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 그분 인격과 만나고 싶은데, 지금 분위기로는 어렵겠습니다. 셋째 걸림돌은 제도가 공인하는 지식인들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마르 2,8)
'의아하게 생각하다'는 어쩌면 사뭇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한 말씀 같습니다. 소위 성경을 좀 안다는 율법 학자들 내면에서는 의혹과 의심과, 불경에 대한 두려움, 분노 등이 부글부글 엉기는 중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질병이 곧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겨졌지요. 그러니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은 "얘야, 네 병이 나았다"라는 말과 상이하지 않습니다. 용서 자체가 징벌 상태인 병에서 벗어남을 보증하니까요. 오히려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누워있는 환자에게 다짜고짜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것보다 훨씬 전인적이고 친절한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다른 청중이 듣기 편안한 말씀으로 바꾸어 중풍 병자에게 재차 치유 선고를 내리십니다. 눈치만 보던 그는 비로소 예수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마르 2,12) 나갑니다. 들어오기 불가능할 정도로 꽉 막혀있던 군중의 무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마음이 한결 유연해진 것일까요? 그가 걸어나갈 길을 열어준 걸 보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받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신 신정 체제로 이어오던 이스라엘이 사람을 임금으로 섬기는 왕정 체제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의 속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소외되고 배척 받는 창조주 하느님. 차선으로 물러나 달라는 당당한 요구를 듣고 계시는 하느님.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1사무 8,22).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악"도 허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당신이 주신 자유의지가 크고 값진 선물이기에 악을 선택할망정 지켜주고 싶으신 겁니다. 대신 이제부터 하느님은 그 악으로 인해 허덕이게 될 인간을 구원하실 방도를 마련하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손수 지으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존중 방식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니까요. 게다가 이 말씀은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당장 중풍 병자의 치유를 통해 알게 해 주시기도 하겠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앎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를 가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살펴 봅시다. 굳어버린 몸과 마음? 주님 주변을 에워싼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 일일이 자기를 검열하고 단죄하는 내 안의 율법 학자?
반대로 내가 사랑의 치유를 체험하는데 도움이 되는 디딤돌을 떠올려 봅시다. 무거운 나를 끌고 끙끙 땀흘리며 주님께로 가는 이웃들? 당신을 배척하는 요구까지 기꺼이 수용하시는 하느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한 용서를 베푸시는 예수님?
디딤돌을 떠올리면, 오늘 치유받은 중풍 병자처럼 온 존재에 피가 돌고 온기가 차올라 영육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일어나 예수님 말씀대로 걸어 나갑시다. 은총으로 활짝 열리게 된 우리를 보고 세상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네, 주님!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세워 주십시오."
오늘 사무엘기를 읽으면서 드는 첫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은 왜 임금을 세워달라고 할까?
우리가 경험한 임금이나 대통령은 거의 대부분 오늘 사무엘이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얘기했듯이 안 좋은 것뿐이잖습니까?
사실 우리 각자가 다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살면 임금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도 모두가 하느님을 원장으로 모시고 살면 원장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것이며, 원장이 훌륭해도 그만이고 훌륭하지 않아도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지 않고, 오늘 독서의 원로들처럼 하느님을 대신하는 임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족속들에게는 임금이 필요치 않고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지 않는 족속들에게만 하느님을 대신하는 임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법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이전에 수도회들은 수도 규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생각하기에 복음을 제대로 살게 되면 굳이 수도 규칙을 따로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말에 '그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지요, 복음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살지 않는 사람도 두 부류입니다.
복음을 아예 살지 않는 사람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산다고 하는데 그대로 살지 않고 자기식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의 사랑은 살지 않고 복음의 자유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자유가 사실은 복음의 자유가 아닙니다.
복음의 사랑을 살지 않는 복음의 자유는 실은 복음도 살지 않고, 수도 규칙도 살지 않으며 자기 좋을 대로 살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을 살지 않는 복음의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을 살지 않으면 복음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이라는 말조차 입에 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을 떠들어도 복음을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사랑을 살지 않을 때 자기 좋을 대로 욕심을 부리며 살기에 욕심을 통제할 법이 필요하고 법으로 통치할 임금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다행히 임금이라도 공정하고 사랑의 임금이라면 법을 올바로 집행하여 각 사람의 욕심을 올바로 공정하게 통제하지만 임금조차 제 욕심만 차리고 사랑이 없다면 임금이 오히려 법을 자기 손에 넣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폭군이 되거나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키는 난군이 될 것입니다.
사실 폭군도 나쁘지만 난군도 폭군 못지않게 나쁩니다.
난군亂君이란 말 그대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임금이지요.
법과 사랑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는 난군이나 책임자는 공정하지 않음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합니다.
말하자면 전란戰亂을 일으키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무엘기를 읽으면서 나는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우리 대통령 또는 책임자는 하느님 대신 통치하는 사람인지 잘 식별하고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박한 팔요성은 강한 방법을 사용하라<마르코,2/1-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필요에 따라 움직이며 강한 요구는 강하게 하고 액한 것은 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다급한 중풍병자를 치유 받기 위하여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면서 한자를 주님 가까이 내려 놓았다고 합니다.조금 파격적 행위입니다. 자개오도 사람에 가려 주님을 볼 수 없어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서 주님을 뵈웠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다급한데도 용기가 없어 주저앉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고자 하는 일, 해야 되는 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양이에게 쫒기는 쥐도 급하면 벽을 뚫고 아니면 고양이를 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용기와 지혜와 덕망과 하늘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뜻을 운명이라고도 합니다.
용맹이 없는 사람은 적이 쳐들어오면 도망갑니다. 전쟁터에서 밀리면 폐망합니다. 맞서 사우는 용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않은 용맹은 지혜로은 사람에게 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덕망이 없으면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 와 덕을 있다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일은 샹공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운명을 다스리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한 사람은 성령을 힘입은 기도의 생활입니다.
모세가 전쟁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동안은 적이 힘을 못쓰고 기도를 중지하면 적군이 힘을 내어서 모세의 손을 붙들고 주면서 기도의 힘을 받고 전쟁이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용기와 지혜와 덕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교회는 사제품이나 큰일을 앞에놓고 기도합니다. 아무 오래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마귀를 잘 쫓아내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어떻게 마귀를 쫓아냅니까? 하니 여기 오기 전에 금식기도를 하고 마귀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마귀와 대적합니다. 과연 맞는 말씀입니다.
가장 강한 기도는 금식 기도입니다. 정치적 투쟁을 하는 사람이 단식하면서 투쟁하면 힘이 더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적과는 싸울 수 없습니다. 용맹과 지덕을 가추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믿고 바라고 사랑하면서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에게 기도합시다. 이런 기도는 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함승수 신부님
‘용서’하기가 너무 어렵다고들 하십니다. 내 마음과 영혼에 씻지 못할 상처를 준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나에게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속에 천불이 일어서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십니다. 저 놈은 저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죽을 것처럼 힘들고 괴로운 이 상황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하십니다. 그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길은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 뿐이라고, 저 나쁜 놈이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받게 해달라고, 천벌을 받게 해달라고 저주하는 것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거라도 못하게 된다면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용서하셔야한다고, 그러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버티시면 당신의 영혼이 뿌리 깊이 병들게 된다고, 미움과 분노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게 아니라고, 더 이상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불행하게 사시지 말고 이제 그만 미움이라는 감정을 놓아버리시라고 설득해도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지 못하십니다. 저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느냐고, 내가 용서를 못하는 것은 저 사람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분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용서의 ‘권한’만 하느님께 유보한 것이 아니라, 그 ‘책임’과 ‘의무’까지 몽땅 그분께 떠넘겨 버린 율법학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며 딴지를 겁니다. 자신들도 어려워서 못하는, 아니 힘들고 괴로워서 안하는 ‘용서’를 별 볼일 없는 시골 출신 젊은이가 당당하게 선포하는 모습을 아니꼽게 본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용서하기가 더 어려운지 아니면 불치병을 고치기가 더 어려운지를 물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리고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용서보다 훨씬 더 어려운, 불치병을 말 한 마디로 치료하는 기적을 눈 앞에서 보여주심으로써 용서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마음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주체를 ‘나’ 즉 당신 자신으로 한정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보편적인 주체로 넓게 확장하신 것이지요.
물론 율법학자들의 문제 제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세상 종말의 순간 하느님 나라에서 죄를 심판할 권한, 죄인을 용서할지 단죄할지를 결정할 최종권한은 당연히 하느님께 있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상처 준 ‘원수’같은 사람을 용서할 권한은 온전히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권한이 온전히 나에게 있기에, 그것을 실행해야 할 의무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을 때 감당해야 할 책임도 온전히 내가 짊어져야할 몫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용서를 하느님께 떠넘겨서는 안됩니다.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땐,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용서하신 것처럼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용서를 나에게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에서 회복된 이에게 굳이 본인의 ‘들것’을 들고 가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들 각자가 주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용서를 실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구역반모임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구역반모임에 참여하는 신자의 숫자만으로 구역반 모임이 잘 되는지의 여부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신앙생활도 일종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좋고 진실한 길이라면 꾸준하고 성실히 걸어야 하는데, 어느 정도 하다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곧 싫증을 내 버리고, 괜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뭐 새로운 것은 없는가?’ ‘더 좋은 것은 없는가?’ 하며 허황된 것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집으로 들어가시니까,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마르 2,2)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빈자리가 없을 만큼 모여들었을까 궁금합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서 돈버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도 아니요, 입시설명회를 하는 것도 아니요, 모델하우스 공개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모여들었을까? 그들은 무엇에 그렇게 목말라 했을까?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며 모여들었을까? 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비춰주시는 것도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고를 고쳐주시고 그 병고를 대신 짊어지시고 걸어가시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것저것 우리 삶에 유익한 새로운 지식과 방법을 배우려고는 하는데, 막상 실제로 살면서 자구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사는 것은 가끔 잊어버리고, 한 두 번 하다가도 신통치 않다고 여겨서 그런지 머지않아 시들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구역반모임에 참석해서 복음을 나누고 실천하는데 열심이지 않은 이유도 어쩌면 실천하고 나서 생기는 기쁨과 보람을 얻지 못하거나 기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거나 얻은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운동하고 땀 흘리면 건강에도 좋고 기분도 좋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두 번 하다가 마는 이유는 그렇게 시급하지 않거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으며 계속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반모임을 하면서 복음 말씀 안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하고 그 생명의 길을 꾸준하고 성실히 밟아나가야 하는데, 복음 말씀을 깨우치기는 해도 쉽게 실천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깊은 감동과 체험이 없고 그냥 아는 것으로만 그치고 마니, 생생한 삶의 감각이 아니라 단순히 객관화된 지식으로만 남아서, 그냥 ‘좋은 말씀이다.’ 라는 정도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꾸준히 실천해야 나와 가정이 변화되는데, 변화하는지 안 변화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서서히 변화되는 그 기간을 기다리면서 채워나가기 어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가 확실한 체험과 감동으로 변화되어,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실현하고 전파하는데 앞장설 수 있기를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성 안토니오의 소명
성 아타나시오 주교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에서(Cap. 2-4: PG 26,842-846)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안토니오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 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 맡게 되었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도 채 못되어, 늘 하던 대로 주일 날 한 번은 성당에 가던 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즉,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세주를 따랐는가? 또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대로 무엇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나온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는가? 그는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크고 위대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다. 그때 막 다음의 복음 말씀이 봉독되고 있었고, 그는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안토니오는 마치 성인들이 한 것을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상기시켜 주시고 또 그 성서 구절이 특별히 자기를 위해 봉독된 듯, 즉시 성당에서 나와 자기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소유지가 자기 자신과 여동생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 전부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약 37만평 정도의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다. 또한 동산 전부를 처분하여, 거기에서 받은 액수에서 약간만 여동생을 위해 남겨 두고, 상당한 액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복음서에 나오는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고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버렸다.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그들의 집에 들여보내어 교육받도록 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몸바쳐 반성하는 가운데 엄격한 생활을 인내로이 해나갔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는 손수 노동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번 수입 중에서 약간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는 또 “은밀히 기도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기도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성서를 너무도 열심히 읽었으므로 읽는 것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외우다시피 했다. 그래서 훗날 자기가 암기한 것이 책 노릇을 해주었다.
그 지방의 모든 사람들과 그가 전에 사귀었던 좋은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의 벗”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아들처럼, 또 어떤 이들은 형제처럼 사랑해 주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의 실천은
용서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장 필요한 치유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을
인정하는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믿음의 길이며
용서의 길입니다.
우리의 역사안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 또한
용서입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구체적인 일상으로
기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안에서
착한 이웃들의
아름다운 삶을
만납니다.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함께 하는
믿음입니다.
자라나야 할
공동체의
믿음입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믿음을 실천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믿음은 서로를
돌보아주는
용서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용서를 실천합시다.
많은 이들이 죄인은 성당에 다니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저렇게 사는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성당을 나와?”라고 말하는 분을 직접 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쫓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함께 대화를 나눴던 한 청년이 생각납니다. 이 청년은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수감생활도 몇 차례 했었지요. 그런데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점점 전의 자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 많은 자신이 과연 성당에 다녀도 괜찮은 지를 묻더군요. 솔직히 죄에 대해서 이러한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인상 깊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낙원까지 안내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왜 낙원까지 안내하는 것인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면서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만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 부끄러움을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면서 표현합니다. 이 부끄러움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끄러움만으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떠했습니까?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이렇게 부끄러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나의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계속해서 용서하고 계신다는 것, 따라서 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면서 힘차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호세 무히카).
결과보다는 과정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수학자로 대성할 수 없다고 어느 유명한 수학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수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우수한 것이지,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문제풀이보다 문제제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함을 삶 안에서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결과만을 최고로 인정하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내 자신도 모르게 결과중심주의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분명히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결과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 그토록 환호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외면할지, 또 당신이 어떻게 생을 마무리 하실지 그 결과를 미리 다 아셨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셨습니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모습처럼 결과만을 최고로 인정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기억하면서, 지금 한 순간 한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결과가 모든 것이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원수 2 :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직도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나중에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다 천국으로 불러들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바로오가 말하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십자가의 의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해성사 때 내준 보속 안 하면 죄를 용서 받지 못해요”라고 말하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혈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써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선행을 하고 보속을 해서 죄가 용서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 하나가 지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이 없는데 왜 하느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어차피 다 천국으로 간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십자가가 의미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빛이 있으면 당연히 어둠이 있어야 한다는 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건드시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사람까지 억지로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그 사람의 존엄성이기 때문입니다.
존엄성을 꺾으며 동물취급 하면서 질질 끌고 하늘나라로 가시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자유가 있는 존엄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집에 가두어놓고 도망갈까 두려워 손과 발을 묶어놨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자유도 구속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레비티’란 영화에서 우주에서 일하던 여 주인공이 한없는 우주로 던져집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계속 지구에서 멀어집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언가의 노예가 되면 그 자유를 빼앗기고 맙니다. 예를 들어 돈의 노예가 되면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속 불륜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고착화되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그 상태가 지옥의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우주로 떠내려갈 때 더 이상 쫓아가 데려올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 이후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귀가 자꾸 낭떠러지로 떨어지려 해서 주인이 재빠르게 꼬리를 잡았는데 꼬리가 아프다고 계속 낭떠러지로 가니 주인이 함께 떨어질 수 없어 꼬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도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배반한 그리스도께 가서 용서를 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무릎을 꿇느니 그냥 그 미운 분을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아집의 경지까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자유를 건들 수 없기에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라도 회개하면 구해주실 것입니다. 지옥은 전혀 회개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간 이들의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인들의 완고함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보내시어 죄의 땅에서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에덴동산, 즉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불만하고 하느님을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그들의 완고함을 보고 절대 안식에 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진정 우리들은 완고함을 버려야 합니다. 완고함을 버리고 믿어야 합니다. 믿고 말씀대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끝까지 십일조도 내지 않는다면 그 완고함 때문에 구원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성모님의 모범대로 그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실천하는 이들만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끝까지 하느님을 시험하다가 결국 그 완고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유일하게 시험하라고 한 것이 ‘십일조’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시험해 보라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들었다면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그 들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단체의 대표를 맡아 본 것은 신학교에 입학해서입니다. 학사대표를 하였습니다. 학사대표가 하는 일은 교무처에서 출석부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과제물을 정리해서 신부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교실의 마이크 상태를 살피고, 칠판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받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노란봉투(재시험을 보라는 통지)를 주는 것입니다. 학사대표는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일찍 학교에 가고, 좀 더 늦게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동창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학사대표를 2번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뒤로 동창회장을 맡았습니다. 동창회장이 하는 일은 장례가 나면 운구할 친구들을 정하는 것입니다. 매월 동창회가 있다는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제가 보냈던 예쁜 엽서를 기억합니다. 본당의 청년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글 솜씨가 있던 청년은 엽서에 그림과 글을 넣었고, 동창회의 장소와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예쁜 엽서가 좋았다고 하면서 동창모임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축일이면 선물을 챙겨서 주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로 동창회장도 몇 번 더 하였습니다. 저도 열심히 한다고 하였지만 다른 친구는 제가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아픈 친구가 있으면 꼭 찾아가서 위문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의 축일에는 친구의 성격과 비슷한 화분을 준비해서 직접 갖다 주었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하여도 마음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회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 조직은 책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델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은 신앙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삶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원칙입니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기에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희망의 불이 켜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결과를 생각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요, 선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셋째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풍병자를 들것에 옮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알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이웃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풍병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소중한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실 때도 먼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꽃동네와 작은 예수회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나누는 작은 사랑과 희생은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2018년 1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결심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구급차를 타고, 신앙에 목마른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안내하는 따뜻한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신정神政이냐 왕정王政이냐? -제3의 길; 하느님의 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어느 형제와 카톡을 통해 나눈 평범한 대화에 감동했습니다. 15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제 강론을 인터넷에 퍼 나르는 봉사를 하는 ‘말씀봉사자’ 형제입니다. 저녁강론중 정정할 곳이 발생해 연락드렸을 때 답신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식사중인데 끝나고 해놓겠습니다.”
“예, 식사 잘 하세요.”
‘식사중’이란 평범한 말마디에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식구食口와 함께 밥을 나누는 기본적 행복이 보장되어야 비로소 구체적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깊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결정적 공헌을 하는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상권이 매우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정이냐 왕정이냐?’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 대패한 기억도 있고 사무엘 판관이후가 걱정된 백성들이 신정에서 왕정을 원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재차 왕정의 폐단을 백성들에게 소상히 밝혀 줍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 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를 만들게 할 것이오.----여러분의 양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오.”
사무엘상8,11-18절 까지 구구절절 나열되는 왕정의 폐단은 한 둘이 아닙니다. 결국은 백성의 노예화로 이끄는 왕정의 폐단입니다. 인류 역사상은 물론 작금도 무수히 입증되는 왕정이나 국가권력의 횡포가 아닙니까? 다윗이나 세종대왕 같은 성군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부도덕하고 무능하거나 사악한 지도자들입니다.
참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하느님이 임금이 되어 다스리는 신정이 이상적입니다만 현실은 왕정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법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에 ‘법없으면 살 수 없는 착하고 약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무엘의 설득에도 백성들은 요지부동 막무가내 완강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치 명분론자와 실용주의자,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간의 대결같습니다. 이상은 ‘하느님’이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 나라의 ‘임금’입니다. 이상은 ‘하느님’이지만 현실에서는 ‘돈’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사무엘의 최종 보고에 하느님도 마침내 백성이 원하는 대로 왕정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신정이냐 왕정이냐의 갈림길에서 제3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 이것이 정답입니다. 왕정이나 국가제도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제3의 길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하느님 나라 비전의 실현이 아닙니까? 저에겐 오늘 복음도 미사장면을 압축한 듯 보입니다.
“문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미사중 말씀전례를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고 이렇게 오늘 지금 여기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려 듣고 실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 백성의 모범이 우리 수도자들이고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를 치유로 이끈 믿음 돈독한 그의 동료들입니다. 이런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제3의 길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저는 감히 기도와 노동이 균형을 이룬 수도원 일과표를 '하느님 나라의 시스템'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음의 병인 죄를 용서받아야 몸도 치유됩니다. 하여 미사가 시작되면서 참회예식이 있고 이어 자비송이 뒤따릅니다. 죄를 용서받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육신의 치유은총입니다. 죄를 용서함으로 영혼을 치유하신 주님의 최종 전인적 치유선언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치유받은 중풍병자와 그의 믿음 좋은 동료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영육의 치유의 구원이 일어나는 성체성사의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그대로 미사장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치유를 목격한 회중들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의 치유 체험의 고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나라의 일꾼이 되어 제3의 길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시편 첫 구절이 참 좋습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 축제의 기쁨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영적 중풍 병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병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걱정을, 인생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2,1-12(연중 1 금)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 이사 43,25; 44,22).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들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시는 걸까? 중풍이 나았으면 당연히 들것은 버리고 가면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마치, 루르드에 가면, 치유 받은 이들이 두고 간 목발이나 휠체어가 소복이 쌓여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된 상처를 치유의 표지, 축복의 표지, 구원의 표지로 받았습니다. 아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일이 종종 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치유되기가 힘들다.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주님께 대한 신앙이 이처럼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정인준 신부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는 그 자체가 무리수입니다.
거기에는 때로 부당함이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는 강압과 폭력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분열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궤를 중심으로 또 모세와 같은 영도자로 거칠고 황막한 사막에서 사십 여년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하느님 신앙과 서로의 연대감으로 12지파는 하나가 될 수 있어서 비록 한계는 안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떤 적도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께서 축복과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 열두 지파를 갈라놓게 하여 결국 남북으로 갈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했던 지난 선조들의 날들을 잊어버리고 영토 경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부분적으로 판관들이 활동하던 시절이 지나고 인접 국가들에게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막강한 통치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막과는 달리 가나안은 생각보다 산악지대이고 지파의 경계가 되고 구분이 서로를 갈라 놓는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장 위협과 위기의 나라들은 코 앞의 필리스티아 인들이고 미디안,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등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하다가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체제의 이웃나라들의 위협에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백성은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종교 지도자이면서도 왕이 없던 시절, 판관이나 아니면 사회적 영도자의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막강한 구속력을 갖고 나라를 이끌어 갈 생각에 잡혀 있었기에 사무엘도 그들의 추세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리를 은근히 뒤로 밀어 넣는 백성들이 섭섭하기는 하셔도 집요하게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뜻을 들어 주라고 사무엘에게 종용하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그래도 사무엘은 백성들이 왕의 폐단이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철없는 백성들을 한 번 더 설득해 봅니다.
임금에게 무한한 권한을 주게 되면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다루는 일, 군대조직의 사람들을 만들고, 딸들은 데려다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며 포도원과 올리브 밭까지 빼앗고 남종과 여종까지 끌어다 전쟁의 희생으로 그리고 나귀들까지 끌어 갈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도 백성은 사무엘의 만류의 말도 들은 채 하지 않고 계속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19-20절)라고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2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염려했던 대로 왕들의 행패는 컸고 결국 나라는 둘로 나누어지더니 멸망의 길로 치닫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가셔서 한 집에 들어 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 들었습니다.
마침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헤쳐서 주님께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그 집 옥상에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너의 병은 나았다.’라는 말씀이 기대되지만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은 사실 생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니 다를까 그곳에 있던 율법학자들은 입빠르게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죄를 용서 받았다.’라는 말과 ‘들 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말에서 어는 것이 쉬우냐?고 질문하십니다.
물론 그들은 둘 다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용서’하는 것도 또 불치의 병인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9절)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 병자를 치유를 하시며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광경을 보던 군중은 모두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12절)고 말합니다.
생명의 물꼬를 트는 믿음과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시몬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2,2).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분께서 그 어떤 조건도 차별도 없이 모두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2,2),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려갑니다(2,3). 중풍병자는 집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한 채 고통과 절망 속에 지냈을 것입니다. 그는 몸만 마비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마저 무디어짐을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나아가 가족들의 분위기도 무거웠음이 분명합니다. 집안에 누워만 있다보니 외부와 단절되고 모든 관계도 소원해져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과 영혼의 마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그를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그분 곁으로 가서 관계를 맺음으로써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풀림을 알아보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2,4) 생명의 샘이신 예수께서는 모든 이를 살리고자 하시나 사람들이 생명의 물길을 막은 것이지요.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생명을 갈구하면서도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고와 마음이 영혼의 중풍을 일으킵니다. 고정관념과 편견, 폐쇄적인 태도, 과거지향적 삶, 무의식의 작동에 내맡기는 자세는 영혼을 마비시킵니다. 냉정과 무관심, 맹목적인 신념과 돈에 끌려다니는 신앙생활, 교회지도자들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는 인간과 사회를 마비시켜버립니다.
관계를 단절하고 소원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막는 암초들입니다. 서로를 살리고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이 우리를 마비시켜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온갖 마비를 풀어내려면 달리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다가간 사람들의 태도는 놀랍습니다. 그들은 온 존재가 마비되어 생명에서 멀어져 있는 중풍병환자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자신들 안에 계신 생명의 힘으로 꺼져가는 생명에게 손을 내민 것입니다. 작은 생명이 더 크고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려고 죽음을 향해가는 희미한 생명과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명이신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냅니다(2,4). 생명으로 가는 장애물을 만나자 하느님과 더 가까운 지붕위로 올라가 '희망과 사랑의 물꼬'를 틉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2,5-11)
우리도 편견과 아집, 냉정과 무관심, 관계단절과 폐쇄적인 태도를 버리고 생명의 샘이신 주님을 찾아나서야겠습니다. 절망과 어둠의 집을 떠나 희망이신 주님의 손을 잡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어나라’고 하시며 굳어진 우리 몸과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시는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나와 우리 사회와 교회를 마비시키는 들것을 떠나보내고 생명의 물길을 막는 지붕을 벗겨내는데 헌신해야겠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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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커다란 화두일 수밖에 없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주님의 기도 중 한 대목이다.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고마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힘은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 힘은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늘 용서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청해야 할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앞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용서하지 못할 누군가가 아니라,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아니라, 용서받아왔고 앞으로도 용서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일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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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을 용서하고 잊어라.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절대로 잊지 말라.”
(“Forgive and forget what has hurt you in the past, but never forget what it has taught you.”)
홀로가 아니라 함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내기 수사님들도 우리 지난 역사를 소상히 알 필요가 있겠다 싶어, 영화 ‘1987’을 단체로 관람하고 왔습니다. 영화 배경과 동시대를 살아온 저는 참혹하고 가슴아픈 당시 상황 하나 하나가 복기되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30년전 일이라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부당한 정권의 연장 의지와 맹목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만나, 채 피어나지도 않은 우리 청춘들을 무참히 짓밟는 과정을 다시금 돌아보며 다시 한번 치를 떨어야했습니다. 그 가해자들과 끄나풀들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저리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서글펐습니다.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단어들이-땡전뉴스, 보도지침, 언론탄압, 대공수사, 최류탄, 남영동, 구타, 협박, 전기고문, 물고문-아스라히 떠올랐습니다. 여차하면 끌려가고, 여차하면 고문당하던 서슬퍼런 독재 시대, 사람답게 사는 세상, 민주화 시대를 열기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던 많은 사람들, 특히 소시민들의 노력이 영화 안에 잘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특별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주인공인가 하면, 또 다른 인물이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결국 제작자가 의도하는 바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한 두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익명의 주인공들, 이 땅의 수많은 깨어 있던 청춘들과 소시민들이 함께 거대한 물줄기에 합류해 이루어낸 멋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있고 양심있는 검사, 기자, 교도관, 종교인,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이뤄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1987’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건재한 세를 이어가는 등,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 위에 전세계가 놀랄만큼 성숙한 민주시민사회가 세워진 것은 순전히 그분들 덕분입니다. 청춘과 젊음, 사랑도 목숨도 남김없이 바친 그분들 말입니다.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한 집에 들어가 앉으시고, 그 소문이 퍼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던지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소문을 듣고 중풍 병자 가족들도 환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만, 도저히 몰려든 군중들로 인해 도저히 그분께 가까이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를 맞댄 가족들은 묘안을 하나 짜냈습니다. 일단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분께서 앉아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겨 냈습니다. 이어서 구멍을 내고 조심조심 중풍병자를 예수님 앉아계신 자리로 내려보냈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발상이요, 어찌 생각해보면 예의가 아닌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 가족의 그 간절함과 지극정성, 병자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높이 평가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홀로 집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풍 병자의 처지를 가련히 여긴 식구들의 마음, 그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만나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심정, 그를 살리고 싶은 열정이 즉각적인 치유와 구원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이땅의 민주화를 이뤄냈듯이, 구원에 있어서도 홀로가 아니라 함께가 중요합니다. 네 사람이 합심해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결과가 한 존재의 전격적인 치유요 구원이었습니다.
<들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들것은 믿음의 성사입니다.
실린 이는 든 이에게 자신을 맡깁니다.
든 이는 실린 이의 모든 것이 됩니다.
서로를 향한 간절하고 애틋한
믿음이 들것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들것은 희망의 성사입니다.
실린 이와 든 이가 하나입니다.
갈기갈기 찢긴 사람 사는 세상에서
너나없이 우리 되는 살 맛 우려내는
희망이 들것에 곱게 새겨져있습니다.
들것은 사랑의 성사입니다.
실린 이와 든 이는 서로에게서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납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 들것에 아름답게 스며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보이는 들것보다
보이지 않는 들것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실리기도 하고
때로는 들기도 합니다.
실리든 들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것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들것을 통해서
나와 벗이 만나 우리가 되어
한마음 한몸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병과 죄,<미르코, 2/1-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죄로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고통은 어미니 젖을 먹던 아이에게서 젖을 띠게 하려고 젖에 쓴 약을 발라 어제 까지 맛있게 먹던 젖을 못먹게 하면서 아이는 고뇌가 시작하여 세상의 쓴맛을 보기 시작한다 합니다. 병과 고통은 육에서 오고 육은 모든 죄의 근본이 됩니다. 그럼으로 욱에서 오는 장애를 제거 하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데 해결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육의 모든 기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욕망에서 니오는 것입니다.
과식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육류를 마구 섭취하면 혈관 병 당뇨병을 일키며 욕심이 과하면 무리를 일으켜 온갖 병을 만드러 냅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가 우선 되어야 병을 치유 받d을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낭비와 사ㅣ와 성적 물란으로 가지것을 다 잃고 건강마저 다 잃고 죄의 용소오 살기위하여 아버지를 만나서 치유를 받고 더 사랑스러운 아들르 새롭게 태여 낳습니다. 아버지 “죽은 아들이 돌아왔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 하시며 용서와 사람으로 죽음 아들을 다시 살렸습니다.
병이들면 왜 주님은 저에게 이 가혹한 병을 주셨습니까. ? 불평하지 말고 지금것 생명을 지신 주님께 감사들이고 찬미를 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공기를 버리고 숨을 쉬지 않게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죽음의 고통을 만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고서야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더 좋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병은 마음을 잘못 쓰는데서 옵니다. 마음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자신의 무게를 내려놓지 않고 들고 있으면 짐이 무거워 병을 질며지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기 죄를 누우치고 주님에게 돌아가는 회두의 참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코.2,3-5)
김종오 신부님
사는 동안 우리는 제각기 무거운 들것 하나씩을 마음에 지니고 걸어갑니다. 그 들것에는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나 후회하는 과거도 누워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래의 걱정이 중풍병자처럼 누워있기도 합니다.
스스로 풀기 힘든 마음의 중풍은 주님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린다 할지라도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 중풍병자를 '달아 내려보내야' 합니다.
마음의 중풍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중풍은 우리가 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치유해주시도록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위로하여 마음의 들것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나 상황 혹은 걱정되는 미래를 두 손 위에 올려 봅니다.
두 손에 올려놓은 우리 마음의 중풍병자에 대하여 주님께 아주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말씀드리십시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충분히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두 손에 있는 중풍병자를 가슴에 끌어안으십시오. 그리고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온 마음으로 정성껏 마음속으로 크게 믿는 마음으로 외쳐보십시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 추우시죠? 오늘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고 또 오늘은 환우 봉성체도 하는 날이라, 어제 저녁에 얼른 밖에 나가 내복을 사서 입었습니다. 추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당에 오신 여러분들의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서 사서 여러분이 비는 기도를 다 들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중풍 병자가 낳기를 바랐지만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 친구인지 가족인지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다가갈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앉아계신 방의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고 그 환우를 고쳐주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리하여 그 환우가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 복음의 구절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제4단 ‘마리아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묵상합니다’를 연상하게 해 줍니다. 오늘 병자의 동반자 네 분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모셔가는 모습은 우리의 아쉬움을 다 모아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는 모습을 연상케 해줍니다.
예수님 친히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수호천사들 같은 네 사람처럼 우리도 우리 가족과 주변의 아쉬운 이들을 주님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모셔가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합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오셨습니다.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용서에서
다시 찾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고마운 용서입니다.
주님과 우리사이엔
용서의 바탕이 되는
눈물겨운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소중한 존재임을
뜨겁게 일깨워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법을 믿음은 수시로
가르쳐줍니다.
믿음은 다시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회복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십니다.
일어나 용서와 함께
믿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믿음과 용서로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어느 재벌총수는 자신의 측근이나 직원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어렵다고 이야기하거나,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이봐, 해봤어?”
사실 많은 이들이 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쉽게 안 된다고 판단하고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에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존 A.셰드의 명언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배의 존재 이유가 단순히 안전하게 항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존재 이유 역시 편안하고 쉬운 것만 행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쩌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며칠 전에 제가 있는 성지 사무장님이 봉사자들에게 줄 축일 축하 카드를 써달라면서 빈 카드를 주시더군요. 제 전임 신부가 봉사자 축일 카드를 직접 써서 주셨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이 카드를 받자마자 “꼭 제가 직접 카드를 써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카드 내용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워낙 악필이라서 직접 글 쓰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실 학창시절에는 늘 반의 서기를 도맡아 했었습니다.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글 쓰는 것은 모두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점점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제 글은 어느 순간 저 조차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 악필이 되었던 것이지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악필이 된 것이지, 원래부터 악필은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친구를 데리고 온 오늘 복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중풍을 앓고 있는 친구를 데려가고자 했지만, 사방에서 밀려 대는 군중 때문에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곧잘 일어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육적인 게으름으로 기도를 멀리하는 모습들, 주님 것보다는 세상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들, 사랑 대신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마음들...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쉽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중풍을 앓고 있었던 친구들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친구들은 예수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 사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또한 그냥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리고 그 지붕을 과감하게 뜯어버리는 용기도 필요함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포기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한 자가 패배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장파울).
지는 것.
저는 어렸을 때 바둑 두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형님들이 바둑을 즐겨 두었지요. 저 역시 바둑을 배우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때 형님께서는 바둑판 위에 검은 돌 48개를 먼저 깔아주고서는 바둑을 두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엄청나게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저의 모든 집을 빼앗겨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바둑을 포기했습니다.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형님은 무조건 두 집만 나면 사니까 어떻게든 살도록 해보라고 했지만, 두 집을 못 냈던 저는 그 이후로 바둑알을 만지지도 또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거의 초단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형에게 처음 바둑알을 만져본 사람이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비참하게 졌다는 이유로 아예 포기했던 것이지요.
지는 것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지 않기 위해 다시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발전된 내 모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어떠한 삶이든 내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장님을 모시고 30일 피정 지도 신부님 방문을 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가 되기 전에 30일 피정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을 사랑하는 열정과 30일 피정의 소중함을 아시는 선배 신부님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기꺼이 한 달 동안 피정지도를 해 주십니다. 이는 서울교구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저도 성소국으로 오기 전에 10년 동안 30일 피정지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영적인 성전을 세우려는 신학생들과 피정 지도신부님들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방문을 하셨고, 새벽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30일 피정은 ‘기도 연습’입니다. 매일 5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도 신부님은 피정자의 기도 내용을 들어주고, 피정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피정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줍니다. 30일 피정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합니다. 둘째 주간은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을 묵상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개의 깃발, 겸손의 3단계,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셋째 주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 권력을 이용해서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빌라도, 헤로데, 대사제, 율법학자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넷째 주간은 주님의 부활을 묵상합니다. 빈 무덤, 막달라 여자 마리아,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을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다짐하면서 피정을 마치게 됩니다.
지난 25년 사제생활의 가장 큰 힘은 30일 피정을 함께 하면서였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는 신학생들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습니다. 피정지도를 하는 신부님들은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착한 이웃들과 같아 보였습니다. 영적으로 지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주님께로 안내해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치유와 기쁨은 주님을 만나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세워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분쟁을 해결해 주고, 이끌어 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그런 왕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만 왕이 또한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땅도 빼앗길 수 있고,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기도 해야 하고, 왕을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럼에도 왕을 원했고,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갈 ‘왕’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왕’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봉사자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마귀에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바라거나,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모시고 온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중풍병자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함께 사는 이웃이기에 중풍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예수님께 모시고 왔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관계의 설정입니다.
우리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형성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거래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필요한 것들이 있지만, 삶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민 연대, 국경없는 의사회, 아름다운 가게, 무료 법률 상당, 무료 급식소’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종교인들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바로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법과 원칙에 따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봉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 받았고 직책상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이 행위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 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 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神의 한 수手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많은 이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시대의 어른’, 김종인(76) 전 경제수석이 14일 '더불어 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전격 영입됨을 알리는 기사 댓글들에는 ’신의 한 수’라는 찬사가 빗발쳤습니다.
여기서 영감받아 오늘 강론 제목은 ’신의 한 수’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치 야구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갈 무렵 마지막 9회말쯤해서 선수 투입을 잘 해 만루 홈런쯤 날려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신의 한 수’라는 어감 자체도 참 통쾌, 유쾌, 상쾌합니다.
오늘 사무엘 상권의 내용이 참 흥미진진합니다.
사무엘 예언자와 하느님의 처지가 말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갖게 해달라는 왕정제도에 대한 요구가 워낙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무엘 상권 8장에서 12장까지는 왕정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와 긍정적인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7,8,12장은 왕정제도에 비판적이나, 9,10,11장은 왕정제도에 호의적입니다.
통치할 임금을 정해달라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청에 마음이 몹시 얹짢아진 사무엘은 주님께 기도했고,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주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사무엘뿐 아니라 하느님의 내심도 많이 서운했음을 감지합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람을 왕으로 한 왕정제도냐 하느님을 왕으로 한 신정제도냐 참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상으로 보면 신정제도 같고 현실로 보면 왕정제도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정제도에 예견되는 폐해를 낱낱이 열거합니다.
1.왕은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2.그는 너희들은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 할 것이다.
3.그는 너희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다.
4.그는 너희들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5.그는 너희들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6.그는 너희들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너희들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다.
7.그는 너희들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너희들마자 그의 종이 될 것이다.
그대로 독재자들이나 전제국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실증이 된 사실이 아닙니까?
이런 독재자 왕의 횡포와 폐해가 이렇게 예견되는 데도 스스로 왕의 노예가 되겠는가 사무엘은 물었지만 백성의 반응은 요지부동, 완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간청 역시 현실입니다.
필리스티안들에게 뼈아픈 패배가 결정적이었던 같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백성들의 청을 들어줬지만 주님이나 사무엘은 백성들이 장차 독재자 왕에 의해 겪을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은 몹시 아프고 씁쓸했을 것입니다.
일단 야구로 하면 백성들이 하느님께 승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9회말 신의 한 수, 예수님을 예비하셨고 마침내 만루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하느님의 회심會心의 일착一着, 신의 한 수입니다.
문제는 왕정제도나 신정제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신의 한 수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시작함으로 왕정제도와 신정제도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한 수 예수님으로 인한 하느님 나라가 영원한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영육이 치유 받아 새로난 중풍병자가 상징하는바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와 이어 육신의 치유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으로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중풍병자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말했다니 그 파급 효과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아마 이 치유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체험이었을 것이고 역시 놀라운 내적변화가 뒤따랐을 것입니다.
신의 한 수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신의 한 수로 놀라운 치유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모든 성인들 역시 신의 한 수며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역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 주신 꼭 필요한 신의 한 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의 한 수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키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리이다.”(시편89,2ㄱ참조). 아멘.
빛과 그림자를 안고 돌아가는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중풍병자의 움직임과 예수님의 관계를 중심으로 묵상해봅니다. 잘 알다시피 중풍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서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의식이 흐릿해지기도 하며, 발병하면 대부분 완치가 어렵고 후유증이 남아 고통스런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2,2),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려갑니다(2,3).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간 것을 보면 중풍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집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한 채 고통과 절망 속에 누어 지냈을 것입니다. 돌보는 가족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예수님께 치유, 구마(驅魔), 죄 사함, 민족 해방, 현세 복락 등을 기대하고 찾아간 이들과 달리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망의 이불’과 ‘고통의 집’에서 빠져나옵니다. 자신의 뜻이었는지 권유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예수님 때문에' 집을 떠난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자신이 머물던 집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진 것은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찾아가는 ‘생명의 순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몸과 마음이 아프고 외롭고 힘들 때, 세상 불의와 구조적 악이 판칠 때 포기하고 체념하며 손놓고 집안에 있을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하고, 그런 상태에 있는 이들을 주님께 데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5) 하시며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집을 떠나온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생명력을 되찾고 절망을 떠나 희망을 만났으며, 어둠을 떠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들 때, 권력과 자본의 폐해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 연대하여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2,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시며 병들어 굳어진 그의 몸과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그 결과 창조가 일어나고 관계가 발생하며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들것을 들고’ 가라 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들것은 아픈 몸을 눕히고 기댄 고통의 자리이자 떨쳐버리고 싶은 과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생명을 되찾도록 예수님께 데려다준 ‘하느님의 성사’이며 자신의 고통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담긴 선물입니다. 우리도 내 삶의 들것 곧, 좋은 것뿐 아니라 아픔과 상처, 고통과 어둠도 끌어안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냥 ‘가라’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집은 고통스럽게 지냈던 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원점이요 가족들의 걱정과 슬픔이 서린 곳입니다. 성해진 그가 돌아감으로써 가족들은 걱정과 시름을 놓고 활기를 되찾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되돌아감은 병이 치유된 사람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렇게 가정이나 수도공동체, 사회도 예수님을 품어야 화해와 쇄신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요, 우리가 그분을 찾아 떠나고 그분과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순례를 계속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근본적인 치유
박민우 신부님
예전엔 피부 좋다는 말을 꽤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얼굴이 푸석푸석해지고 윤기가 없어졌습니다. 이를 본 본당 신자
한 분이 수분크림을 선물해 주셔서 생전 처음으로 수분크림을 쓰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얼굴도 촉촉해지고 환해지
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크림을 바를 때만 반짝반짝 촉촉하고, 한두 시간 지나면 다시 푸석푸석해지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얼굴이 촉촉해지기 위해선 물을
자주 마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물을 잘 마시지 않았는데 그게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수분크림은
일시적인 증상만 없애줄 뿐 근본적인 치유법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한 사람에게 “어서 낫거라.” 하지 않으시고 죄부터 용서하십니다. 아마도 몸의 병이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깊은 곳의 치유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삶의 갖가지 어려움들로 몸살을 앓습니다. 그럴 때 다른 치료법을 사용하기보다 먼저 고해소에 들러 하느님께 죄의 용서와 마음의 치유를 청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주일미사 빠진 죄’와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외에 진정 하느님 앞에서 나의 잘못을 고백한 적 있나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박윤식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3-5)’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관계적 존재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할 때 조금씩 자란다. 우리는 살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주위의 작은 도움으로 큰 힘을 얻는다.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 수많은 이가 모여들었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환자를 데리고 왔다. 너무 많은 이가 모였기에 그분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붕을 벗기고 그를 내려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다. 마치 기러기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 서로 격려하고 어려울 때에 함께하듯이.
사실 가을 하늘을 떼 지어 나는 기러기들의 모양은 대개가 삼각형이다. 혼자 나는 것보다 삼각형이 공기 저항을 덜 받는다나. 또 상승 기류로 그리 힘을 덜 드리고 더 난단다. 더군다나 맨 앞의 새는 공기저항에 쉽게 지쳐 시간을 두고 다른 새와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 그들은 가면서 울음소리를 내는데, 이는 서로 격려하며 특히 맨 앞 새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라나. 물론 힘이 떨어져 처지는 새에게는 반드시 동료 두 마리가 함께 내려와 몸이 회복되도록 도와주고 기운이 회복되면 다시 전 대열에 합류한단다. 이렇게 기러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우애가 매우 돈독한 새다.
중풍 병자를 들것으로 데려온 이들, 그들이 그 환자의 친척인지 이웃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지붕을 뚫고라도 그 고통 받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비록 남의 건물을 파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를 도울 줄 아는 이런 작은 향기들을 삶 속에서 내고 살아야 할 게다.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치유는 병자 스스로는 얻을 수 없었던 은총이었다. 그를 도우려는 그 이웃이 없었다면 아마도 치유 받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진정한 치유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한 이들은 어쩌면 그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더욱 본질적이기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데려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다. 네 사람의 정성스런 믿음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사는 것은 결코 아니리라.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했던 것일 게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사제가 로마 시내에서 허름한 한 거지를 만났다. 알고 보니 거지는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 동료였는데, 그가 성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신부님은 다음 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친구 거지의 상황을 전했단다. 교황님은 그 거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식사가 끝날 때 두 분만 남게 되자 교황님은 그에게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청하였다. 거지는 환속한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교황님이 대답하였다. “나는 로마의 주교입니다. 이제 잃어버린 당신의 사제 권한을 다시 수여합니다.” 그는 교황님께 고해성사를 주었고, 그 역시 교황님께 고해성사를 청했단다.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리라.
교황님은 회개한 그를 그 거리의 걸인들을 돌보는 일을 주셨다. 그가 죄를 용서받기까지 스스로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을 게다. 오직 동료 사제와 교황님의 도움만이 있었을 따름이리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주위의 선한 마음을 소중히 여기시어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다. 마치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갔던 네 사람의 정성스러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 자신이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사는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하기에 그러리라.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1사무 8,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신권통치 국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뜻을 전달해 주는 선각자들을 그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하였었지요.
그러나 그러한 카리스마를 지닌 하느님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면서 임금을 세워 통치하는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카리스마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봉사자일 뿐 권력지향적은 아니었는데 임금들은 카리스마보다는 권력과 힘이 센 사람들이었기에 그 통치를 받는 백성은 그 권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을 선출하든 국회의윈을 선출하든 아니면 교회 안에서 장상을 선출하든 카리스마틱한 인물을 선택하느냐 권력지향적인 사람을 선택하느냐가 항상 관건입니다.
카리스마에 의존하면 자유는 더 얻게 되지만 무질서와 혼돈도 경험하게 되고, 권력에 의존하게 되면 외적 안정은 얻을지는 몰라도 종살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시나요?
하느님 자녀는 하느님을 유일한 아버지요 통치자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과 부와 안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의 은사를 받았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군가 잘못하거나 실수하여
죄책감에 부끄러워하고
뭇시선이 두려워
애써 숨을 곳 찾으며
다시 밝은 날을 간절히 바란다면
괜찮아 힘내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잖아
우리는 모두
다시 올 수 없는 어제가 아닌
내일을 향한 오늘을 사는 거야
그러니 다시 시작하렴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그 사람
희망 품은 격려로 마음 열어주고
숨죽여 흐느끼는 몸 따뜻하게 안아
다시 곧게 일으켜주어요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닮아
화해와 용서의 은사를 받은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두 형제의 축성과 축복 <마태 14, 28-3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축성과 축복은 같은 어원이며 깊은 말같이 느껴져도 그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축복은 하는 일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을 빌어주는 말이며 축성은 온전히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축성을 통하여 세속적인 것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변화되고 하느님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입니다. 수도자나 성직자가 축성되면 세속적 목적이나 용도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늘 축성되는 두 형제는 수도원 입회 후 7년이란 양성 기간과 수련 기간을 통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것으로 축성되기에 합당하여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 모인 가족, 친지, 우인들은 축복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날을 두 분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 찬미, 찬송을 드리며 오늘 축성이 죽기까지 완성되기를 기도하고 어떤 시련이나 난관이 있어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봉헌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손에 들어간 것은 더욱 성스러운 것이 되어 우리에게 돌려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위하여 세상의 사람이 되신 것같이 수도 공동체 안의 형제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에 파견하시어 주님의 삶을 살도록 하시어 하느님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셨듯이 이 공동체 안의 형제들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오늘 전례가 어떤 형식을 취하여 일을 치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 안에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께 순결하고 깨끗한 재물이 되어 봉헌됩니다.
꼴배 성인이 한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슴을 바치신 것같이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듯이 공동체를 위하여 공동체 안에 미소한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고 일하며 자기를 내어 놓는 삶은 바로 축성자의 큰 의무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축성된 자로 살고 있지만 형제들을 위하여 축성의 삶을 살지 않으면 올바른 충성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살기 위하여 형제들 안에 사는 것이 참 행복이 되기를 기도하고 오늘 두 형제 꼴베 수사님와 요엘 수사님의 축성을 축복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자신의 역사를
진정 용서할 수 있는
은총과 자비를 주님앞에
겸손되이 청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될 때
시작되는 선물입니다.
놀라운 선물은
이미 우리 역사안에
우리의 관계들안에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속에만 갇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쁜 시간입니다.
용서는 믿음처럼
먼저 인간이 되는
자기성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용서의 거울을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되비쳐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중풍병자에게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의 위치로
우리자신을 들어올려
주십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더 높은 차원을
만나게 됩니다.
행복해야 할 오늘을
왜곡시키는 것은
어제의 상처입니다.
죄와 상처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자신을
알게하십니다.
아픔과 상처로
가야할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건
우리의 믿음이고
아픔을 치유하는 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듬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예수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일어나
믿음이라는 들 것을 들고
본연의 나로 이제 돌아갑니다.
사랑을 다시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우리의 죄이며 아픔입니다.
우선 1박 2일 동안의 짧은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음을 새벽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저의 여행 소식을 들으신 많은 분들이 제게 참 많은 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더군요. 또한 카페 묵상 글 댓글과 SNS를 통해서도 많은 내용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네요. 가족이 없는 매이지 않은 몸이라 훌쩍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말씀, 여행 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부럽다는 말씀 등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올린 몇 장의 좋은 풍경 사진을 보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여행이라기보다는 피정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오래 걷고 오래 뛰는 것을 싫어합니다.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제일 싫었던 것이 행군이었고, 학창시절에 제일 못하는 운동이 오래 달리기나 마라톤이었습니다. 또 여행을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함께 다니는 여행을 선호합니다. 그러한 제가 이번 여행에서 혼자 40Km 이상을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에 알이 배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지방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위 맛집 기행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에 1~2끼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음식들만 먹었지요. 자장면, 국밥(돼지국밥이 아닌 콩나물국밥이었습니다), 밀면(유익한 부산 지방의 대표음식이네요).
결국 이번 여행은 즐기기 위한 단순한 여행이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한 무작정 걷기였지요. 계속 걷다보면 머릿속이 단순해지거든요. 그리고 그 단순함을 통해서 앞으로 일들도 걱정 없이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글을 보면서 마치 제가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더군요. 어쩌면 ‘여행은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선입견과 의심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종종 쓰시는 말씀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선입견과 의심으로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들 것에 달아서 내려 보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만이 이 중풍 병자를 고쳐줄 수 있다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그 어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내자신이 가지고 있는 각종 의심과 굳은 선입견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는 굳은 선입견,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계속된 의심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내는 사람들처럼 모든 의심과 선입견들을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는 자유롭게 당신의 구원 활동을 펼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맥스 에흐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십시오.
어제 걷고자 했던 길의 딱 중간쯤 왔을 때였습니다. 전날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점점 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분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고, 그분께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푸념식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 문자에 곧바로 이러한 답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네가 선택한 고생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제 여행의 결론을 내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복잡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는데, 사실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인데, 어렵다고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걸으면서 그 해결점을 보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삶 전체가 이렇지 않을까요? 즐기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요. 즐기지 못해서 불평과 원망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고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 더군다나 남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겠지요.
즐기며 사는 하루, 기쁘게 살아가는 오늘이 될 것을 생각하니 이 새벽부터 설렙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커다란 화두일 수밖에 없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주님의 기도 중 한 대목이다.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고마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힘은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 힘은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늘 용서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청해야 할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앞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용서하지 못할 누군가가 아니라,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아니라, 용서받아왔고 앞으로도 용서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일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과거에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을 용서하고 잊어라.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절대로 잊지 말라.”
(“Forgive and forget what has hurt you in the past, but never forget what it has taught you.”)
뭉치면 강하다? 뭉쳐야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남극의 펭귄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여자 펭귄은 아기 펭귄을 낳고 남자 펭귄들에게 아기를 맡기고는 모두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떠나버립니다. 남극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기 펭귄들을 데리고 각자가 살아남으려고 먹을 것도 없이 몇 달 동안 계속되는 어두운 겨울을 단 한 마리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기 펭귄을 다리 사이에 끼고 서로 몸을 최대한 밀착시켜 추위와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봄이 찾아오고 그 때 암컷들과 교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뭉치면 강하고 흩어지면 약해진다는 것을 많이도 듣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물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절대 절명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기러기는 또 어떻습니까? 몸집이 커서 혼자서는 절대로 이동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약 3만 km)를 함께 이동하여 얼어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V자 형태로 나는데 맨 앞에 한 마리가 앞장섭니다. 그렇게 나는 이유는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면 뒤에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약 1/3정도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의 기러기가 힘을 내도록 뒤에서 소리를 질러주고 또 앞의 기러기가 지치면 뒤에서 차례로 교대를 해 줍니다. 이들 또한 생존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법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뭉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혼자서는 절대로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늑대인간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은 함께 살아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함께 뭉칠 필요는 있을까요?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뜻으로 모여야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살기를 그렇게도 원해서 결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둘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어떤 때는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큰 유대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이혼 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뭉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제가 교구청에서 관심 가져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소공동체’ 활성화입니다. 그러나 잠깐 본당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소공동체가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어려움입니다. 서로 직장도 연령도 학식도 관심도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 모여서 함께 한다는 것이 저로서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더 개인적인 성향이 두드러져 서로 집을 개방하려 하지 않으려 하고 마음에 조금만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공동체가 활성화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뭉치면 강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명이 한 명을 들것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가 아닌 같은 뜻을 지닌 그 네 명의 믿음을 보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이 그 병자를 데려오려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들것을 끌고 올 수는 있었겠지만 지붕까지 나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내는 일은 둘의 힘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 명이 최소 인원인 것입니다.
결국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그 ‘뜻’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네 사람은 ‘같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 뜻이 함께 모이게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함께 모여야 할까요? 바로 복음전파가 아닐까요? 그 뜻이 퇴색되고 다른 목적들이 들어오면 가장 중요한 뜻이 사라져버려 함께 하려는 힘이 약화됩니다.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이를 힘을 합쳐서 그분께 데려오려는 이유여야 합니다. 결국 모임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복음 선포이고 그 복음 선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는 죽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을 위해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펭귄이나 기러기들이 살기 위해서 뭉치는 것처럼 우리도 강하기 위해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뭉쳐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들도 오늘 복음의 4명처럼 예수님께 오지 못하는 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착각에 빠지지 말지니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중풍 병자를 주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구원의 협력자>, 이 사람들은 구원의 협력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도 구원의 협력자일까? 혹시 구원의 방해자는 아닐까?
제가 구원의 방해자는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부러 훼방을 놓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구원의 방해자가 아니라고, 더 나아가서 구원의 협력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무던히도 애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사랑을 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도 구원의 협력자이고, 방해자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오늘 복음의 협력자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력자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협력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사랑을 하는데 너와 나의 사랑을 한다면 다시 말해서 나의 사랑을 너에게 하고 너의 사랑을 나에게 향하게 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그를 나에게 오게 하고 결국 하느님께는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고, 우리의 사랑이 같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사랑이 아니면 우리의 사랑은 얼마든지 이런 우상적인 사랑이 되고 맙니다.
아, 지금까지 얼마나 이런 사랑을 많이 하였고, 지금도 저는 이런 사랑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이런 사랑을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우리는 이런 사랑의 착각과 환상에 빠져 살다가 나이를 먹어서야 차츰 모든 사랑이 다 좋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기만 하면 다 좋다는 것, 이것이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은 다행입니다.
지금 제가 피정 지도를 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 있으면 사제가 될 텐데 이분들이 저처럼 사랑의 환상과 착각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원의 협력자들처럼 이웃을 하느님께로 데려가는, 참 목자, 참 사제가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자신의 역사를
진정 용서할 수 있는
은총과 자비를 주님앞에
겸손되이 청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될 때
시작되는 선물입니다.
놀라운 선물은
이미 우리 역사안에
우리의 관계들안에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속에만 갇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쁜 시간입니다.
용서는 믿음처럼
먼저 인간이 되는
자기성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용서의 거울을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되비쳐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중풍병자에게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의 위치로
우리자신을 들어올려
주십니다.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더 높은 차원을
만나게 됩니다.
행복해야 할 오늘을
왜곡시키는 것은
어제의 상처입니다.
죄와 상처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자신을
알게하십니다.
아픔과 상처로
가야할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건
우리의 믿음이고
아픔을 치유하는 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듬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예수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일어나
믿음이라는 들 것을 들고
본연의 나로 이제 돌아갑니다.
사랑을 다시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우리의 죄이며 아픔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왜 이곳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을 나누는 일이란
우리의 아픔을 돌보는 것입니다.
아픔을 돌보는 거기에서
주님을 향한 믿음은
더한층 성장해나갑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
고통이나 상처를 껴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개인이기 이전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고통과 상처는
공동체안에 계시는 주님을 통해
극복되고 치유되어야합니다.
고통과 상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통은
사랑해야할 자기 자신조차
거절하고 미워하고 외면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공동체를 주시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용서가 이루어져야합니다.
모든 용서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모든 치유의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참된 치유는
용서와 함께 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통해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공동체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용서가 빠진 치유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생명의 축복과 치유는 용서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오늘 이하루는
우리 또한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는
용서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용서,
치유는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께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는 믿음과 용서,
치유를 주십니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용서에 이르게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전에 어떤 청년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직장 다니기 너무 힘들어요. 저 그냥 때려치우고 신부나 될까요?”
웬만하면 “그래 잘 생각했다. 신부님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애인도 있고 또한 신앙적으로 많이 부족한 이 친구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차마 말을 못했지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신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기도도 많이 해야지, 사람들 만나서 상담도 해야지, 매일 강론도 써야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독신을 지키면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러자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자식, 마누라 걱정은 하지 않잖아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세상 안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남들보다 자신이 더 어렵고 힘들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즉, 남의 일은 쉬워 보이고 자기 일은 힘들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사소한 괴로움이 더 큰 법입니다.
바로 이렇게 비교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던 ‘행복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여기서 이 중풍 병자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만약 자신이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해서 친구를 모두 내쫓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오늘 복음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병의 치유와 함께 죄를 용서받는 커다란 축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순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주님께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은혜로운 삶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 소중히 여기는 데에서 발견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레프 톨스토이).
내가 행복한 이유를 찾자.
예전에 스크랩 해 놓은 신문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 원문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중학 시절 일어난 말다툼에 대한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데 상처를 입었던 20대 여성이 6년 만에 그 친구를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서울 서부경찰서는 24일 중학교 동창 이모씨(20·여·대학2년)를 흉기로 찔러 전치4주의 상처를 입힌 최모씨(20·여·무직)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최씨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단짝 이씨와 말다툼 끝에 헤어졌다. 며칠 뒤 최씨는 먼저 화해를 청했으나 이씨가 냉대했으며, 이후 최씨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씨를 만나지 않았다. 그 사이 이씨는 대학에 진학한 반면 최씨는 두 차례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고 우울증도 생겨 최근까지 치료를 받기도 했다.
지난 21일 이씨를 만나 지난 일을 사과한 최씨는 “보여줄 게 있다”며 이씨를 집 근처 야산으로 데려가 “눈을 감으라”고 한 뒤 미리 준비한 흉기로 이씨의 목과 등, 팔 등을 찔렀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중학교 때 이씨가 같은 반 다른 친구와 더 가깝게 지내자 배신감을 느껴 심하게 싸웠다”면서 “대학입시 실패와 우울증 모두가 친구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03.07.23. 경향신문)
6년 동안 계속해서 품었던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이루었던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이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는 옳고 남의 문제 때문에 내가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불행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요.
남에게 자신의 문제를 떠넘기지 마십시오.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보십시오.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보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을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형제님의 기분이 너무나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나보죠?”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형제님께서는 웃으며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 아들이 곧 아기 아빠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너는 네 아기에게 어떤 아빠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아들놈이 이렇게 말하네요. ‘아빠 같은 아빠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그렇게 못살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아빠 같은 아빠로 살고 싶다는 이 말. 어쩌면 가장 기분 좋은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인정의 말이니까요. 하긴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저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쏟아 부으면 그냥 인사 치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날 수 있는 한 마디인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보다는 힘을 뺏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이해해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가까이 있어서 편한 마음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행동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고 상대방은 안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서슴없이 행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실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배려입니다. 이 사랑과 배려를 잃어버릴 때, 우리들은 주님의 뜻에 맞게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만을 급하게 쫓아 살아가는 불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십니다. 특히 환자들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이 모습을 직접 보았고, 힘과 위로를 얻는 따뜻한 말씀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바로 옆에서 체험했음에도 믿지 않습니다. 즉,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자,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말을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지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을까요? 또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 역시 예수님께 큰 실망을 드리며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뜻대로 살려는 이기적인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이제 주님께 더 이상의 실망을 안겨드리지 맙시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들이 우리의 삶 안에서 더욱 더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이제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때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할까 항상 귀 기울이는 사람은 결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법입니다.(톨스토이)
40 이전에 풍 맞습니다.
전에 새벽을 열며 묵상 글에도 쓴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제가 30대 초반에 어떤 분에게 진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식 한의사는 아니지만, 맥도 보시고 침도 놓는 분으로 꽤 유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저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이대로 나가시면 40 이전에 풍 맞습니다.”
‘설마’라는 생각을 했지요. 더군다나 우리 집안에는 풍 맞은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이 지금까지도 제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40이 넘었는데도 풍 맞지 않았으니, 분명히 틀린 말인데도 말이지요.
저의 이 경우를 보면서, 미래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미리 알게 된 그 미래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나의 영혼을 두렵고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점쟁이들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쟁이들은 거짓이든 진실이든 미래를 말하며 그 사람을 오싹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영혼을 두렵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절대로 희망과 용기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미래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 이유를 이제 깨닫게 됩니다. 미래를 미리 알면 희망과 용기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현재. 이 현재를 기쁘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CF로 만들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즉, 뇌종양으로 방사능 치료를 받아 머리카락이 몽땅 빠진 친구를 위해 같은 반 학생들 모두가 삭발을 한 것이지요. 머리카락이 없어 부끄러워할 친구를 위해서 보여준 그들의 우정에 전 세계 사람들은 감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친구를 위해 삭발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내 이웃의 아픔을 나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아픔을 진실로 나누겠다는 의지와 사랑을 간직하지 못합니다. 물론 입으로는 사랑을 나누자고 목청을 높이기는 하지만, 정작 아픔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는 뒤로 물러섭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는 앞선 아이들이 삭발한 것과 같은 커다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용기와 희생이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모습들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기와 희생으로 함께함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랑을 혼자 할 수 있을까요?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으면 어떨까요? 또 아름답고 멋진 옷을 입었는데 봐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어떨까요? 또한 재미있는 영화라 할지라도 혼자 외롭게 본다면 어떨까요?
이처럼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위한 용기와 희생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 용기와 희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한들 중풍병자를 내려 보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중풍병자를 위한 용기였고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기와 희생이 중풍병자를 낫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만약 용기와 희생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거부했다면 오늘의 이 말씀을 우리는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을 위한 진정한 사랑을 간직했기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도 인정받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용기와 희생을 나의 이웃에게 보여야 합니다. 이 용기와 희생을 통해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희생 안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박완서)
바다를 사랑한 여인(‘좋은생각’ 중에서)
‘바다의 여왕’으로 불리는 저명한 여성 해양학자 실비아 얼은 자연과 바다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소설보다 백과사전을 더 재미있어 하던 그는 대학에서 해양생물학을 공부하고 스킨 스쿠버를 배워 바닷속을 탐험했다.
‘여성은 어차피 가정주부가 될 것이니 투자할 가치가 없다’라는 냉혹한 현실과 편견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열정은 더욱 활활 타올랐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인도양 탐사에 참여하는가 하면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도 잠수정을 타고 해저를 누볐다.
결국 그는 1979년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인류 사상 최초로 해저 381미터에서 2시간 30여 분을 걷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가 입은 1인용 잠수복은 튼튼했지만 300미터 이하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모험을 감행했다. 온갖 위험과 돌발 사태를 뒤로하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엄청난 수압을 견디며 미짇의 바다 세계를 탐험한 것이다.
그는 꿈에 그리던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닐 암스트롱이 처음 달에서 걸을 때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바다 밑은 달처럼 생물이 살지 못하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가 아니었어요.”
이후 그가 바다 생태계를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바닷속에서 보낸 시간은 무려 6천 시간. 이 모든 것은 바다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말한다. “알게 되면 돌보게 되고, 돌보게 되면 희망이 생긴다.”
사랑은 ‘다’ 주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한 번 더 되새겨봅시다.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귀여운 한 작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그 나무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열심히 주워 모아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 속의 왕 놀이를 즐겼고, 나뭇가지를 타고 그네를 타기도 하고,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도 자고, 그렇게 나무와 소년은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자꾸 흘러 소년도 나이가 들어 나무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고 나무는 때때로 고독하기도 했습니다.
나무는 소년과 함께 옛날처럼 놀고 싶었는데 소년은 나이가 들면서 나무와 노는 것보다 돈이 필요했고 나무는 사과 열매를 주었습니다. 소년은 열매를 따 가지고 멀리 떠났지만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소년과 옛날처럼 놀고 싶은 나무에게 소년은 보금자리의 필요를 요구하고 나무는 자기의 가지를 베어가라고 하여 소년은 나뭇가지를 베어갔지만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소년이 늙어 돌아왔을 때 나무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하자 소년은 필요한 것이 쉴 곳이라고 합니다. 나무가 베어진 자신의 나무 밑동에 앉으라고 하자 노인이 된 소년은 그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그저 행복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마냥 행복했습니다.
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율법학자들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하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하시며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당시에는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이 곧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낸다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모든 권한은 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 주셨습니다.” (요한 3, 35)
나무까지도 모든 것을 줄 줄 아는 사랑을 하는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야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께 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랑을 줄 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는 것은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사람에게 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주었을지라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인간에게 주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주다 말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조금은 모자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의 증표로 무엇을 주실 때, 그 일부분만 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은 사랑 자체는 아니신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치유나 예언의 은사 등만 주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당신께서 끝까지 꿰차고 계신다면 하느님께서 교회를 온전히 사랑하셨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그러나 사도들이 성경 어디서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한 기록이 없다고 하며,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사도들이 직접 죄를 용서해 주는 직접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수로 성령님을 전해주는 내용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불어넣어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하는 이유는 성령님이 그 권위이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안수 등을 통해 성령님을 전해주는 행위는 성령님의 한 일부분을 전해주는 것입니까? 성령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나눠질 수 없는 한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준다는 것은 하느님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 모든 권위, 즉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아버지와 같이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줍니다. 그 모습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고, 그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이 교회에 주시는 ‘모든 것, 즉 성령님’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오늘 복음을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9, 8)
즉 병자를 치유해 주시면서 동시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어서, 예수님만을 칭하려고 했다면 “‘사람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이라고 썼겠지만,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복수를 씀으로써 그 권한이 예수님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졌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란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죄 때문에 하늘나라서 쫓겨났기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하늘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릴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두 문장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하늘나라의 열쇠’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늘나라의 열쇠는 ‘땅’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들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지만 다른 사도들도 그와 일치한다면 그 권한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든 사도들이 일치하시기를 원하셨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중풍 병자가 치유되고 죄가 사해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이러한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듯이, 우리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가톨릭교회 안으로 불러주신 하느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은혜로운 파스카 체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혜롭게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사랑의 파스카 체험’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파스카’란 말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넘어가다’ ‘지나가다’ ‘건너가다’란 의미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에 힘입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죄의 상태에서 용서로, 지긋지긋한 병고에서 치유에로 건너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파스카를 체험한 원조는 아무래도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설주와 상인방에 가축의 피를 발랐는데, 파괴자는 이스라엘 집안을 건너뛰게 되었습니다. 파라오를 비롯한 그의 신하들과 이집트인의 모든 가정에서는 졸지에 맏아들을 잃게 되어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의 파괴자가 건너감(파스카)으로 인해 하느님의 재앙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탈출기 12장 참조)
뿐만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인해 갈라진 홍해바다를 건넘을 통해 출애굽 사건이 완결됩니다. 이집트 군사들은 홍해바다에서 떼죽음을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자상한 배려에 의해 안전하게 갈라진 홍해바다를 건너감(파스카)을 통해 생명의 땅으로 올라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정점은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파스카 신비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온전한 순명을 통한 이 세상의 구원이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간의 깊은 바닥 체험,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 모든 인류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선물 한 가지가 주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건너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 모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심으로 인해 그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 역시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은혜로운 파스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누워 지낸 세월이 어언 수십 년이었습니다. 일어나지조차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가족들에게 그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다뿐이지 죽은 목숨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기나긴 죽음, 수십 년에 걸친 바닥체험을 해온 그에게 예수님은 파스카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말씀을 통해 오랜 세월 죽어있던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만듭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는 자신 안에서 펼쳐진 파스카의 은총으로 인해 드디어 제대로 된 인생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 되어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 파스카 체험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의 삶 안에도 파스카 체험을 통해 생명의 땅을 향한 건너감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의 파스카 체험이 중요합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된 죽음과 부활 체험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에 따른 하느님의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가 우리 내면을 한번 훑고 지나가게 되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나면 삶은 또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칠 작은 것들, 따스한 햇살, 신선한 공기, 한줄기 바람, 작은 풀꽃 한 송이가 그에게는 다 기적이요 축복이요 감사꺼리입니다.
치유의 용서
-김수환 신부님-
세상에선 교활하고 악한 자들이 더 잘사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행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그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악행 자체가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간됨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악행을 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일부에만 해악을 입게 되지만,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악하게 변하므로 안팎으로 해악을 자초합니다. 이렇게 보면 정의는 늘 구현됩니다. 악행을 한 사람은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자기 파괴의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중요한 면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치유’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응징의 포기나 받을 것의 탕감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그 죄의 굴레에서 꺼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 용서받으면 그는 자신의 악함을 치유받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용서란 참으로 거룩한 일이요 신적인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이 품은 의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어찌 사람이 용서를 통해 악행을 행한자의 악함까지 치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심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당신을 따라 용서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세례받은 우리는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거기에 있었느냐
-한상갑-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시몬의 집은 그분을 뵙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또한 예수님께 그를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벗기고 그를 들것에 달아서 내려보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한 말씀으로 그를 낫게 하십니다. 중풍 병자와 그를 도와주는 주위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열정과 사랑이 참 아름답게 돋보입니다.
전주 인근에는 능선이 길고 그 고도가 높게 유지되어 산세가 아름다운 ‘모악산’이라는 이름난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주 시내에는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 일가(동정부부와 가족) 일곱 분이 함께 묻힌 무덤이 자리한 ‘치명자산’이 있습니다. 해발 8백 미터쯤 되는 모악산은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그 절반 높이도 안 되는 치명자산은 순교자들의 삶을 기리는 순례자들 몇이서 조용히 찾을 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자매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에 보조기를 해서 무릎이 굽혀지지 않기에 걸음걸이가 많이 뒤뚱거립니다. 그 자매가 지난 사순절에 치명자산을 올랐다고 합니다. 몹시도 가고 싶었는데 신자들 중에 같이 오르자는 사람이 없어서, 신자가 아닌 후배 두 명의 도움을 받아서 산에 올라 미사에 참례했다고 합니다. 제 힘으로는 산을 오를 수 없는 자매와 함께한 사람들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크고 많은 은총의 양동이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 치유 얘기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우미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내 치유 받게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이들의 행위가 지성일까, 아니면 극성일까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치유 받고픈 사람이 많은데 그들을 제치고 자기만 치유 받으려 하는 이기주의적인 극성 같기도 하고, 은총을 받으려면 이 정도의 지성은 드려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년 포르치운쿨라 축일 행사를 주관하면서 저는 <지성-정화-은혜>의 개념을 가지고 계획을 짜고 진행했습니다.
설명을 하자면,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성을 드려야 하고 죄를 씻는 정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지성을 드리는 마음으로 며칠 또는 적어도 몇 시간을 걸어 행사장까지 오게 했고, 밤새도록 기도하며 고백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좋던 날씨가 하필이면 그날부터 바뀌어 1박 2일 행사 내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였습니다.
천 여 명을 모두 수용할 실내 공간이 없기도 했지만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과 정성을 있어야 한다는 맘으로 원래 계획대로 강행을 하였습니다.
제가 너무도 감동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야말로 비에 밥을 말아 먹고, 강의도 듣고, 고백성사도 보고, 찬양도 한 것입니다.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대단히 감동들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비가 오는데도 아무도 피하지 않고 비를 맞는 옆 사람들을 보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감동을 한 것이지요.
아마 혼자 그렇게 하라면 그러 하지 못했을 겁니다.
같이 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감동도 훨씬 컸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음날 폐막 미사를 할 때는 비도 걷히면서 모두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지성이 하늘을 감동케 하기 전에 사람을 감동케 한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는 우리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은총을 주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꿔 은총을 주실 거라는 생각도 있지요.
그러나 은총이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 때문에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우리의 지성이 은총을 이끌어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의 지성은 하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은총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라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우리의 자세가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의 지성이란 비가 올 때 양동이를 갖다 놓는 행위와 같습니다.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데 어떤 사람은 양동이를 갖다 놓고, 어떤 사람은 사발을 갖다 놓을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양동이도 몇 개나 갖다 놓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갖다 놓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와 도우미들처럼 은총의 양동이를 큰 것으로 준비하고 많이 준비합시다.
하느님의 은총은 한량없어서 그것을 다 채우시고도 남을 겁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는 것
- 황지원 신부님-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유가족 가운데 신자들은 많지 않지만, 주변에 믿음이 좋은 신자 분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언제나 성당 일에 열심인 며느리나, 어려운 집을 방문하고 신앙을 전하는 구역반장과 오랜 시간 외짝교우로 힘겹게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 이 모든 분의 기도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돌아가신 분의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할지라도, 이처럼 가족과 이웃의 믿음과 신앙이 돌아가신 고인을 하느님께 이르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그분께 다가설 수 없자,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그분께 병자를 달아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믿음뿐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인도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총도 성인들의 믿음을 통해서, 또한 우리 가족과 주변의 희생과 믿음을 통해 누리는 선물임을 기억하고 우리도 이웃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하는 삶으로 그분께 다가설 수 있도록 합시다.
1997년 12월, 저는 부제서품을 앞두고 한 달 피정에 들어갔었습니다. 피정에 들어가며, 저는 비장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과연 내가 성직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평신도로 살아가는 것이 더 옳을까?’를 결정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정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과연 피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피정의 집 옆에 고속도로가 있는데, 차 지나가는 소리도 무척 컸지만 차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울림은 저를 피정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 것 같았습니다.
첫날밤부터 시작해서 며칠 동안 저는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차량의 소리와 울림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곤히 잠들어도 오밤중에 차량의 소리와 울림이 커지는 순간 깜짝 놀라면서 잠에서 깨곤 했지요.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저는 차의 소리와 울림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자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밤새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지요.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인 줄 알았는데, 단 며칠 만에 적응을 하다니요. 그러면서 최고의 피정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창들과 이런 말도 했지요.
“정말로 최고의 피정의 집이었어.”
이렇게 최고의 피정의 집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정적인 생각들을 자꾸 무시하면서 점점 부정적인 생각들을 지울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들을 무시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노력을 통해 분명히 무시할 수 있으며 대신 긍정적인 생각들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앞에 한 중풍병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등장의 모습이 조금 신기합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지붕을 뜯는 행동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지붕에 까지 올라가면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 모습을 보고서 우리를 쫓아내는 것이 아닐까? 지붕을 뜯어냈다고 집주인이 신고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부정적 생각들을 품지 않고, 그저 친구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만을 가지고 이 모든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중풍병자는 자신이 직접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불평해도 우리 신앙인들만큼은 모든 상황에서 좋은 면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늘 우리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인간이 진정한 삶은 사랑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스큐데리양)
가짜 토끼(‘좋은생각’ 중에서)
그레이하운드는 시속 70Km까지 달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개로 통한다. 처음에는 사슴이나 토끼 등을 주로 사냥했지만 요즘에는 경주견으로 사랑받고 있다. 트랙 안쪽에 경주견이 좋아하는 토끼 인형이 있는데, 인형이 빠르게 내달리면 6~8마리의 그레이하운드도 인형을 따라 엄청난 속도로 뛴다.
이 그레이하운드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경주를 하지 않는 늙은 그레이하운드에게 물었다.
“요즘 왜 경주에 참가하지 않니?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니요, 지금도 얼마든지 뛸 수 있어요.”
“그러면 경주 성적이 안 좋아서?”
“제 덕분에 주인은 100만 달러도 넘게 벌었는걸요.”
“혹시 주인이 잘 대해 주지 않니?”
“아니에요. 경주 기간에는 더 잘해 줘요.”
“어디 다쳤니?”
“아니요.”
“그럼 대체 이유가 뭐야?”
그러자 그레이하운드가 말했다.
“내가 그만뒀어요.”
“스스로 그만뒀다고? 왜?”
“토끼를 쫓아 수없이 달렸는데, 알고 보니 내가 쫓던 토끼는 가짜였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자신이 쫓는 토끼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달리기를 멈춘 그레이하운드처럼, 우리도 때때로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 내가 쫓는 토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 진정 가치 있는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한 백인 병사(남군)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곧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수술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흑인 피는 절대로 수혈하기 싫다며 완강히 고집 부리다가 치료시간을 놓쳤기 때문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독일 병사가 부상을 입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야전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군의 피는 수혈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고 끝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인 병사 그리고 독일 병사의 행동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흑인의 피라서 받을 수 없고, 적군의 피라는 이유로 수혈할 수 없다는 행동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일까요?
이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고, 원하지 않는 것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마치 자신의 생각이 하느님의 뜻인 양 착각하면서 더불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법칙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사실 더불어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웃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만약 혼자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이웃을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라고, 서로 사랑하며 살라면서 이웃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웃이 함께 살 수 없는 적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중풍 병자는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네 사람이 들것에 중풍병자를 들고 오지요. 그런데 군중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그 병자를 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가 용서받은 것은 중풍 병자가 특별히 무엇인가를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중풍 병자가 자신의 몸을 질질 끌고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니었고, 예수님께 특별한 신앙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고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했다고 구원받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바로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내가 용서받으며, 내가 구원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만한 가정은 상호간의 희생 없이는 절대 영위(營爲)되지 못한다. 이 희생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을 위대하게 하며 아름답게 한다.(앙드레 지드)
좋아하며 사랑하며(‘좋은생각’ 중에서)
집에 열 살짜리 손녀딸이 있다. 외동딸이다. 태어날 적엔 한심할 정도로 못생겼다. 아이 아빠가 할머니를 닮아서 그러니 이다음에 손녀딸 개발비를 대 주어야 한다고 항의성 청구를 했다. 곱슬머리에 볼우물이 틀림없는 할머니 2세라는 거다. 여기까지는 항의를 받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코와 눈에 있다. 손녀딸이 할머니 코를 닮아 오뚝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은 쌍꺼풀이 없고 쪽 째졌다.
“얘는 크면 코가 살아날 테니 걱정 마라.”
나의 예언은 적중했다. 손녀딸은 일곱 살이 넘으면서 콧날이 오똑해졌다. 그뿐 아니라 쌍꺼풀이 없고 쪽 째진 작은 눈이 요즘 매력 포인트란다. 사람들은 김연아를 닮았다고 한다. 그 매력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말이다.
나는 손녀딸에게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을 부릴 만도 했다. 두 돌이 되면서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완벽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아이가 천재인 줄 알고 흥분한 나는 하루에 한 시간씩 아이를 앉혀 놓고 닦달했다. 삼 년이 지나자 아이는 피아노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피아노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아이와 놀아 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손녀딸은 할머니와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피아노를 치지 않은 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다. 나는 재능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중 한 가지만 있어도 매혹당한다. 나는 손녀딸을 내 스타일의 아이로 만들려고 작정했던 모앙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을 돌아보니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십년 이상 우정을 쌓아 온 친구들이며 지인들, 가족까지 신통하게도 내 스타일인 사람은 거의 없다. 재능과 매력이 있으면 성격이 좋지 않아 죽도록 미운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는 더 어렵다. 나는 풀이 죽었고, 세상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사람들을 좋아하며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은 매혹당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이고 노력이어야 한다. 재미없는 친구들을 사랑하고 개성이 강한 가족을 사랑하며 특히 내 손녀딸을 사랑한다. 그들을 좋아하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구원의 들것
김광태
복음에서 치유 이야기는 대개 예수님께서 환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거나 환자의 강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온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은 이례적입니다.
이번에는 병자 자신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 결과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물고 있던 중풍병자가 치유의 은혜를 입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비록 누군가의 믿음이 약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만 머물면 다른 이들의 믿음 덕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에 매인다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불편함이 자기를 구원합니다. 내가 인기 있고 잘 나갈 때는 교회 공동체의 일들이 귀찮고 하찮게 여겨지겠지만, 그래도 힘 있을 때 열심히 봉사합시다. 그래야만 내가 약해졌을 때,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처럼 다른 사람이 나를 들것에 태워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은총의 조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극 정성을 기울이면 하늘을 감동케 해 하늘이 마음을 바꿔 인간을 돕는다는 말이지요.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의 사람들도 이런 지성을 보여 예수님의 치유를 얻어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입니까?
예수님은 치유해 줄 마음이 없었는데 인간들의 정성이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뭔가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저께 어떤 자매님들을 만났습니다.
자녀들이 입시 중이었는데 하느님께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붙게 해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참 아름다운 마음을 느낍니다.
은총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영성체 전 기도에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자세이지요.
그 자매님이 분명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그리 말씀하신 거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 편, 그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분이 자녀를 위해 교회에 헌금도 많이 바치고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렸다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을 갖추기 전에는 은총을 주시지 않으려다가 자격을 갖춤으로써 하느님은 은총을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이지만 설사 자격을 갖출 수 있다 하더라도 자격을 갖추면 은총을 베푸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은총은 인간 공로의 대가, 보상이 아닙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즉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공로가 마치 뇌물과 같이 아니 주시려든 하느님의 마음을 바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을 많이 했건 아니 했건, 우리가 치성을 드렸건 아니 드렸건, 하느님 은총에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지성을 다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력과 지성과 상관없이 주시고자 하시면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다만 주시는 은총에 대한 황공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 때문에 나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인간의 정성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치유 받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조건은 지성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네 사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전에 제가 신학생 때 함께 공부했던 수녀님이 성지순례 단을 이끌고 다녀가셨습니다. 그 수녀님의 부탁으로 며칠 로마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은 프란치스코회 삼회 회원들로 대부분이 교사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명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스페인 광장 쪽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한 자매님이 저만 따로 옆으로 끌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오기로 된 사람들이 못 와서 몇 명 원하는 신자들과 함께 왔는데 그 중에 마리아라는 선생님이 계셔요. 그 분은 20년 동안 냉담을 했답니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잘 해서 냉담을 풀고 고해를 받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스스로는 고해를 볼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 신부님께서 혹시 기회를 봐서 그 자매에게 고해성사를 주실 수 없나요?”
저는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명품거리를 구경하는 사이에 저는 그 자매에게 다가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고해성사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보였습니다. 저는 다른 자매들이 그 자매를 억지로 고해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선 둘이 앉아서 이야기라도 좀 하자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자매가 고해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고해를 하고 싶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주님께 다가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떠나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이 여행에서 자신이 제일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하면서 계속 감사해 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믿음이었습니다.
주위의 열심한 자매들의 극성(?)에 못 이겨 고해를 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어도 새로운 신앙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네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중풍 병자란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영적인 병자를 의미합니다. 그를 들것에 들고 온 네 사람은 그리스도께만 데려가면 그를 치유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를 들고 예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들것과 함께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 육체적 병도 죄로 인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기에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그의 병을 치유해주심으로써 당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 그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라도 주님은 그 사람을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전 본당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사목을 하실 때도 마귀 들린 사람이 있다고 본당 신자들이 쫓아왔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은 자신이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이끌려 마귀 들린 사람에게 가서 구마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부님을 비웃기만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신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그 사람을 가운데 눕혀 놓은 다음에 빙 둘러서 묵주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시키는 대로 그 병자를 중앙에 놓고 둥글게 앉아서 묵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비웃기만 하던 그 병자는 조금씩 목소리도 약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결국엔 아무 힘도 없이 그 사람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액션영화에서 보면 주인공 혼자 맨손으로 수십 명을 날려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 두 사람만 함께 악을 쓰고 달려들면 아무리 잘 싸우는 사람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쓰러지는 이유는 한명씩 덤비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들고 온 사람 수가 정확히 ‘네 명’이라고 나옵니다.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완전한 숫자이고 그 사람들이 혼자는 일어설 힘도 없는 사람을 지붕 위까지 끌고 올라가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협동을 하면 못할 일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선 냉담 하는 이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스스로 나아올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써주는 모습이 오늘 병자를 낫게 해 준 네 명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가 안 된다면 합심해서 힘없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잘못까지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가나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왕이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주변의 나라와는 달리 왕이 없는 부족사회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셨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자주 패배하게 되자, 그 까닭이 자신들에게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도 필리스티아(블레셋) 사람들처럼 왕이 다스리는 국가체제를 갖춘다면 왕의 인도 하에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예언자 사무엘은 늙었고, 판관으로 내세운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 친히 왕으로 계시면서 예언자나 판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왕에게 의지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하느님을 배척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청한다.
이러한 백성들의 생각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왕정제도가 지닌 여러 가지 모순점을 백성에게 설명하며, 왕을 내세웠을 때 그들이 당할 여러 가지 고초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렇지만 이미 왕을 모시겠다는 그들의 완고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1사무 8,19-20) 하고 완고한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완고한 고집대로 해주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우상숭배란 꼭 어떤 신상(神像)이나 고목나무 앞에서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내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 대신 다른 어떤 사람이나, 재물, 권력 등을 그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느님 앞에 서있기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다른 사람처럼 행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 그들이 우상숭배자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상숭배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의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르기보다 설사 원수일지라도 그 원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자신이 곧 우상숭배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바라보시며, 우리의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옛말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져주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행복한 이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율사들의 항의에도 굴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덕분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는 죄를 용서받기 이전에도 이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발이 되어준 네 사람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기는커녕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을 텐데. 네 사람의 친구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절한 소망이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한 믿음이 소중하게 그리고 가치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네 사람의 친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믿음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친구를 제 몸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무모함을 감수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율사들의 치기어린 시선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아름다운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의 친구들...
집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다섯 사람이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단 한 사람으로 품에 안으셨습니다.
하나의 마음, 하나의 몸,
하나의 믿음, 하나의 소망을 가진 갈라질 수 없는 단 한 사람.
갈라진 이들이 하나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로 향하는 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하나인 다섯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안의 하느님 나라를, 당신과의 참된 일치를 모든 이에게 선포하십니다.
치유를 통해서, 중풍병자의 새로운 삶을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이땅에 온 이유를 통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요한 5,4)
<하느님의 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음, 가장 눈물겹도록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을 쓰자면 "연민"일 것입니다. 연민은 가련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불쌍한 우리 처지 때문에 가슴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이자 연민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연민 빼면 시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한 인간이 겪어온 처절한 고통 앞에 같이 눈물 흘릴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이었습니다.
다들 제 한 몸 챙기기에 바쁜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이웃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지 않았던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아주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예수님 앞에 전개된 상황은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몰상식하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입을 다물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다가는 날 다 세겠구나. 이러고 있다가는 말짱 황이겠구나"는 생각과 함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한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편법을 사용하기로 작당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치기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 새치기는 어느 정도의 새치기가 아니라 해도 해도 너무한 새치기, 상상을 초월한 새치기였습니다.
집 안 거실에서 한참 말씀을 나누시던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붕이 열리더니 강한 햇살이 내리쏟아졌습니다. 그뿐이었겠습니까? 지붕을 벗겨내면서 켜켜이 쌓여있던 묵은 먼지와 함께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이 예수님의 머리위로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것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천천히 예수님 앞으로 내려졌습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 행동, 해도 해도 너무한 몰상식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느 정도야지. 이거 너무한 것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 친구들의 마음, 인간미, 이웃의 고통을 그냥 못 지나치는 연민의 마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 치유활동의 동기를 제공합니다.
기도드릴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체험이 한가지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 내 지극히 이기적인 바램의 성취만을 위한 기도는 성공률이 극히 저조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웃을 위한 기도, 특히 고통받는 이웃의 치유, 억압된 이웃의 해방을 위한 기도는 90% 이상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부족함, 이웃의 뒷모습, 이웃의 불치병에 함께 가슴아파하고 이웃의 고통에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주신 더 큰 마음
- 조정희 수녀님-
학교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아주머니의 두 딸이 아버지의 볼에 손을 부비며 “아빠, 어제 아빠가 우릴 알아봐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전엔 우리를 몰라보시는 것 같아 슬펐는데 어제저녁엔 우리 식구들이 모두 행복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찡해 왔다. 아주머니께서도 “당신이 나으면 인제 업어줄 거야, 더 잘해 줄 거야.” 하며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나는 그 가족이 평소 가난함 속에서도 얼마나 서로 위하며 사랑 표현을 잘하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 복음에서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네 사람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 병자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하고, 그래서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닌가? 반면에 율법학자는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그는 하느님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더 큰 자기의 모습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록 몸은 마비되어 있어도 당신을 믿고 찾는 병자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자유와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고, 몸은 건강하지만 용서하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율법학자에게는 눈을 뜨고 믿도록 초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작은 자존심에 매여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자존심보다 더 귀중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도록 부르시는 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다.
어떤 형제님께서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던 도중 난데없는 괴한의 습격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얻어맞고 칼에 찔렸던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지요. 간신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까지 업혀 온 그는 자기 형에게 사정했습니다.
“형, 난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어. 차라리 날 죽게 놔두는 것이 이 엄청난 고통을 덜어주는 거야…….”
그는 절박하게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를 나눈 형으로서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머뭇거리는 형에게 동생은 계속해서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습니다.
마침내 형이 결심을 굳혔습니다. 동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어요. 그의 손에 서슬 퍼런 일본도가 쥐어졌고, 그는 온 힘을 칼끝에 모아 힘껏 동생의 목을 향해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 얘야!”
바로 그 순간 곁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동생의 몸을 덮었고, 결국 그는 어머니의 애절한 부탁 때문에 아우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의사들의 정성어린 치료와 어머니의 간호 덕분에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일본 근대화를 앞당긴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일본 외무대신을 지내기도 한 이노우에 가오루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두 가지 모습이 나오지요. 형님의 사랑은 포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랑을 간직해야 할까요? 분명히 형님도 동생을 사랑했었지요.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생을 안락사 시켰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나옵니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은 상태이기에 자신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중풍이라는 병으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친구가 예수님을 통해서 과연 낫게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즉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예수님을 감동시킬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사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수고했소, 이젠 돌아가도 좋소(최인호, ‘꽃밭’ 중에서)
하루 종일 집안 청소를 끝내고 나더니 파김치가 된 아내는 손을 씻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운구, 수고했소. 이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참 뜻밖의 소리였다. 그러나 낯익은 말이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아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초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온 문장이에요.”
순간 나는 국어교과서의 문장이 떠올랐다. 아마도 5,6학년 때 교과서 같은데, 학교 청소를 다 끝낸 후 선생님이 강운구란 학생에게 했던 말이었던 것이다. 누구든 초등학교 때 힘들게 학교 청소를 끝낸 후 선생님의 검열을 받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갑자기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내는 왠지 힘든 일이 끝내고 나면 그 문장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모든 일을 학교 숙제하듯 한다. 마치 선생님으로부터 변소나 교실 청소를 명령 받고 이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처럼 매사를 숙제하듯이 꼼꼼히 해치운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나는 아내가 힘든 일을 끝내면 국어책 읽듯이 이렇게 낭독하곤 한다.
“황정숙, 수고했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따지고 보면 우리 나날의 삶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인 것 같다. 매순간 그 숙제에 충실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선생님 앞에서 검열을 받듯이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의 숙제를 검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최인호, 수고했소. 이젠 천국(?)에 들어가도 좋소.”
어제 아침,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한참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자명종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따라서 일어나자마자 머리맡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시간을 보았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지각입니다. 저의 이 새벽 묵상 글을 받으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새벽 메일을 보내는 시간은 5시. 그리고 5시 30분에는 인터넷 방송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씻지도 않고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방송 준비를 합니다. 전날 미리 선곡해 두었던 곡을 뽑고, 동시에 새벽 묵상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시간이 조금 있어서 미리 묵상 글을 쓰고, 방송 노래를 미리 선곡해서 그래도 다행이었지요.
그런데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 새벽, 여유 있게 하루를 시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이렇게 정신없이 시작하는 것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전날에 늦게 잠을 잤던 것도 괜히 화가 나고, 알람 소리를 내지 않았던 시계에 대해서도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요즘 계속 늘어나는 일의 양에 대해서도 화가 나네요.
아무튼 조금 늦기는 했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새벽 묵상 글을 올렸고 동시에 인터넷 방송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리고 방 정리에서부터 차근차근 일을 시작하는데, 문득 늦게 일어난 것도 하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계속 밤늦게 잘 수밖에 없어서 항상 피곤했었거든요. 하루에 3~4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침 시간에 괜히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는 그러한 현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더 많은 시간을 잤기 때문이었지요. 늦게 일어났다고 화가 났지만, 이것 역시 저에게는 커다란 은총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휴식으로 힘차게 하루를 살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이나 시련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게 다가오는 그 고통과 시련 때문에 화도 나고 원망도 하게 되지만, 사실 나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며 은총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시며 하시는 말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떨까요? 그런 말을 도저히 할 수 없겠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의 행동 자체가 축복이며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어디에서나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깨닫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축복과 은총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의심과 불신으로 은총이 없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충분한 휴식을 취합시다. 좋더라구여.
수첩, 혹은 우정에 관하여(문창갑)
오래 가지고 다니던 수첩 하나 분실한 지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바쁜 세상을 굴러다니다 보면 수첩 하나쯤 분실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수첩 하나의 비중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오늘처럼 무작정 사람이 그리운 날 상처 많은 내 돌머리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을 끙끙거렸지만 수첩 속에 가두어 두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큰일입니다. 이제 나의 주소와 전화번호 그들이 기억해 주지 않으면 이승에서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아, 소중하고 소중한 그들과 나의 우정을 낡은 수첩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니....
고통의 회상이 감사의 삶이다.
박기호 신부님
건강했는데 암이라 진단받고 치료받는 이웃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내 몸에도 어떤 암이 붙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운동하고 적절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피해야 하고 즐겁고 긍정적 태도로 살아야 하고…. 그렇지만 산다는 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요? 그럭저럭 사는 게지요. 그렇지만 정작 나와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비로소 생활습관을 후회하면서 생명의 고비 앞에 긴장합니다. 다행스럽게 치료되어 퇴원하게 된다면 이제 용서받은 각성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인생의 지평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건강한 삶이란 지나간 고통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잊어서는 아니 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봉헌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의 상징인 들것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 손으로 들고 제 발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들것을 들고 간다 함은 이제 인생의 관조가 더욱 성숙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 상처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박영대-
나는 기적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마 내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본 적도, 기적에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했던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에 내가 가장 절실하게 기도했던 건 큰딸 혜진이가 급성후두염에 걸렸을 때다. 그러나 그때도 기적에 기대야 할 만큼 위급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최근 기적을 바란다. 착하디착한 두 여자 때문이다. 한 명은 후배이고 또 한 명은 선배다. 둘 다 암에 걸렸다. 선배는 이민을 떠난 상태라 만날 수도 없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아 오래오래 살면서 가끔은 내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내게 그 기적을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것이다. ‘예, 그럼요. 간절하다마다요. 내 목숨을 바쳐도 좋아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서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 그만큼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간절함이 있다. 지붕이 아니라 하늘에라도 구멍을 내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건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그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 간절함은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치유를 대가로 돈을 주고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 놀랍고 마음 아프다. 그 상혼이 질리게 무섭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기로 소문난 한 효자가 한적한 바닷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온 종일 맥없이 자리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겠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최근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어부셨기에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태풍이 불어 고깃배가 뜨지 못하는 날조차 방파제로 나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던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아들은 우선 아버지와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담이 있던 자리에 예쁜 꽃들을 줄줄이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님은 담 허무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힘겹게 마루로 나오셨습니다. 고개를 바다로 향했습니다. 굳게 잠겨 침울했던 그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도 마루로 나와 앉은 아버님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아버님께서는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보였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자녀분들 계실 텐데,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들,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부모님들 모시느라 정말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인에 앞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까?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행복을 이제는 우리가 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몰론 점점 연로해져만 가시는 부모님들 바라보는 시선이 꼭 곱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때 그렇게 위풍당당하셨던 분, 태산 같은 분이셨는데, 이제 완전히 노쇠해지시고, 저리 쫀쫀해지시고, 저리 구차스러워지시고, 마음으로부터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노화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영혼도 시듭니다. 그저 부족하고 안쓰러운 한 존재, 측은한 한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할뿐더러, 인생의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는 자녀들께서는 부모님과의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 이제는 우리가 보호해드리고, 동반해드리고, 기도해드리고, 감싸 안아드려야 할 연약하고 측은한 존재인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약자인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즉시 다가오는 감정이 서운함입니다. 허전함입니다. 무대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쓸쓸함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은 위로자요, 치유자, 동반자요 격려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가족들의 지극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이 오늘 보여준 행동은 상식을 크게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어야지요.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이게 뭡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열린 지붕 사이로 끈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병해왔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그 적극성, 능동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많이 배려하길 바랍니다.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자를 공동체의 중심이 놓길 바랍니다. 끝까지 약한 사람을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의 행복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중풍병자 치유기사는 공관복음 세 곳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지붕까지 열어제치고 중풍환자를 예수앞에 내렸다는 이야기는 빼고 있지만, 세 복음서 모두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예수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내용은 중풍병자와 그의 절친한 동료 4명의 이야기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숫자가 몇명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수도생활 안에서 공동체라 한다면 3명이상을 이야기하고 보통은 전통적으로 4명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수도생활 체험 안에서 본다면 가능하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정상적인 구조 안에서는 4명이면 되겠지만 비상사태 등을 염두에 둔다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 복음에 등장하듯이 한 구성원이 중풍에 걸렸다든가, 불가피하게 쉬어야만 하는 경우라든가를 생각한다면 필수적이다.
나는 오늘 중풍병자의 행복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짐 아닌 짐이 됨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가 빨리 죽는 것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삶의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란 말인가?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신바람나게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작스런 중풍으로 인해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깊은 낙심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는 참으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삶이 참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식구들이(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 못난 환자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 환자를 치유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상한 노력 덕분에 그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다시 성한 몸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함께 살 때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때문에 맘에 안드는 것도 많았었는데...
이 형제들이 나를 그토록 사랑했었다니...
그들 덕분에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니 오, 형제들이여, 너무도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가정공동체도 수도공동체도 적어도 5명은 되어야 한다.
우리네 가정이 핵가족화하면서 이렇게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이 힘써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도 많이 박탈되었다.
식구가 적다 보니 그 중 누가 환자(영, 육)가 되어도 부축해줄 식구들이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
가끔 병든 시어머니를 수십년간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고백을 듣기도 한다.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어보인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부축한다면 그 할머니는 오늘 중풍병자가 누리는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참으로 건강한 성가정이 될 것이다.
우리네 가정생활, 수도생활에는 항상 영육간에 힘드는 식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식구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그 환자일 수도 있다면 나는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건강한 식구들은 환자식구를 귀찮아해서는 안된다.
그 환자식구를 위해서는 힘을 모아(이것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를 주님 앞에까지 데려놓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주님께서는 기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식구들을 주신 이유, 우리 형제들을 함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가끔은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수도공동체에 이렇게 영육간에 아픈 형제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형제애, 가족애는 주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들을 위해,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그런 가족과 형제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이런 일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
-이상일 신부님-
가끔은 1999년에 방영됐던 드라마 허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허준이 명의로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했을 때 그의 무덤에 예진아씨가 조그마한 꼬마아이 하나와 찾아옵니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무덤을 바라보고, 무덤을 쓰다듬으며, 허준과의 오랜 인연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회한에 찬 얼굴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산등성이의 꾸불꾸불한 산길을 걷는 대목에서 꼬마아이가 이렇게 묻습니다. “누구의 무덤이냐?, 뭐하셨던 분입니까?”라는 물음에 “내가 평생을 가슴에 두고 존경한 분이란다. 그분은 땅속을 흐르는 물같은 분이셨지..”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분도 내의녀님을 사랑하셨습니까?”라는 물음에 “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내가 죽어 땅속에 묻히고 흐르는 물이 되어 만난다면 그땐 꼭 여쭈어 봐야겠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마지막 장면이 두고두고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지리산의 전경이 펼쳐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허준과 예진아씨의 그 애틋한 영적인 사랑이 주는 여운이 컸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적인 삶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대입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평생을 가슴에 두고 존경에 존경을 더해도 손해보지 않는 그런분이라는 사실...그리고 언제나 우리 삶의 한켠에서 땅속을 흐르는 물같은 존재로 함께 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애틋한 사랑을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나가는건 어떨런지요?
예수님과의 애틋한 사랑이라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와 고쳐주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더더욱 많아지리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병자임을 좋은신 주님께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다 정상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도 내면은 병들어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치유해주십사, 내면을 고쳐주십사 간절히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바라고 원하는 것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께서는 더 잘 들어주시는 분이시니까요!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지금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끝없는 기도 안에서 현재의 삶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힘내어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안에서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는 오늘의 성경말씀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실수 있다면 확고한 믿음과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근처에 달아 내려 보낸 주위 사람들의 열정처럼 신앙안에서도 노력하셔야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용서하는 마음
-이철구 신부님-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잘못이 사소한 일이라 해도 용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는 잘못을 했다면 용서란 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상에 누워 있는 병자를 부르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병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합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 대한 모든 편견과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죄의 멍에를 지우지 말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용서는 화해이고 그 화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유 루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방법에 대해 묵상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훌륭한 과학자·의사들이 많은 환자를 고쳤습니다. 전기를 발명한 뉴턴, 방사선을 발명한 뢴트겐 박사 그리고 노벨 과학상을 받은 과학자들도 많습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환자의 의식을 바꾸어서 온전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오늘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자기 병을 한탄하면서 앉아 있지 말고 그 들것을 걷어가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들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너는 네 병을 나와 같이 치유할 수 있다”고 촉구하십니다. 나도 의사지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환자들은 치유의 속도도 다르고,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옛날의 자기(들것)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박광훈 신부님-
새삼스런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성당 왜 다니시는 거죠?
무엇 때문에 이 추운 날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물론 대답은 불보듯 당연한 것,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유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위해, 남편위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또 아니면 나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등등...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해본 적은 몇 번이 있는지요?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 이론적으로는 저 세상, 저 하느님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보면 이 세상,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쁨, 이 세상의 가치들을 위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아마도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병이 낫기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지 예수님이 하느님이라서,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심정 그것 때문에, 다시 말해 하느님 때문에 찾는 것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율법학자들처럼 되어버립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병고치는 용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하니까 율법학자는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예수를 신성모독의 범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하느님 말고는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이 하느님하고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그러한 등돌린 삶을 반성하고 하느님께 되돌아 온다면 용서라는 것이 하느님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당연하고 올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잘못한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가치들, 우리의 판단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대로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내가 요구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게 있어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푸념섞인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게 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다가오시는데 우리가 그런 하느님을 나의 기준대로만 바라보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신앙은 내 것과 하느님 것을 따져보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나를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또한 살아가면서 종종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그 장애물을 통과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혀 한 참을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을 빠져 나오기까지 잃은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참 많은 것을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는 꼭 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장애물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신념을 더 굳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중풍병자처럼 말입니다.
그의 첫 번째 장애는 '자신이 겪고 있는 중풍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서 겨우 예수님께서 계신 문 앞까지 당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디딜 틈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 가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지붕을 통해 예수님께로 그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생겨납니다.
이번에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졌는가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편견을 깨뜨리고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결국 중풍병자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잠시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만일 그에게 병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힘들게 예수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결국엔 그에게 장애물이었던 '중풍병'이 예수님을 찾게 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가끔은 나한테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고 돌아서기보다는 주님께 나의 어려움을 봉헌하고 더욱 더 주님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나한테 놓여있는 그 장애물이 버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요즘 내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신앙의 눈으로 한 번 바라봅시다.
과거의 죄는 극복되는 것
- 이중섭 신부님-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5-11) 하며
용서와 해방을 설파하십니다. 지나간 죄와 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지워버리지 않고 용서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전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해방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몇 가지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중대한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유머감각을 잃지 마십시오. 셋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용서하고 언젠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넷째, 정신적으로 격려와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실패담을 나누십시오. 다섯째,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실패한 후에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이차룡 신부님
얼마 전, T.V프로에 의사가 암을 손님처럼 맞이하라는 신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병(病)이라는 글자와 암(癌)이라는 글자를 비교해 보면 입구 세 개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암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식습관이 암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과음, 과식, 폭음, 폭식이 그런 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소식이야말로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암을 불청객으로만 여겨 거부하고 화를 내고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친절로서 손님처럼 대할 때 언젠가는 물러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많이 웃는 것이 암 예방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웃을 떼도 배가 땡길만큼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100미터 달리기보다 더 큰 효과를가져 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에너지가 팍팍 생성된다는 말입니다. 많이 웃습시다. 생활리듬을 잃지 말고, 좋은 생각과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매일 하며 소식을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낫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기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 다시 말해 말씀의 능력을 믿은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만 찾아가면 중풍 걸린 친구의 병은 절로 고칠 줄 알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포기하고 다른 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친구에 대한 사랑이 적으면 일은 간단합니다. 힘들지만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할 만큼 다 했다고 위로하면서 ... 그러나 친구를 고쳐주고픈 마음이 크기에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기만 하면 고칠 수 있는데 어떻게든 궁리를 해야 했는데 결국 네 친구는 한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바라보셨고,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네 사람은 누구입니까?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갈 네 사람의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둘째,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최고의 행적은 죄의 용서요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이르신 말씀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라는 말마디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에 병든 인간을 위해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의사에게는 필요하다며 나는 의인을 위해 오지 않고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넘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가 중풍을 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죄였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을 앓고 들것에 누워 지내는 병자들이 많습니다.
죄는 육신의 마비를 가져옵니다. 스트레스, 과로와 불안과 두려움, 용서하지 못한 마음, 원한에 쌓여 살아갈 때 어느 날인가 우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으리라. 용서받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도 알 것입니다. 늘 반복되는 잘못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악습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단골메뉴에 들어가는 그것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비법은 고해성사를 끊임없이 보는 것뿐입니다. 수없이 많이 고해성사를 받을 때 언젠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염증, 혐오감에 떨어지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 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네 사람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임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요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여기 주님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그 믿음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저의 믿음을 보시고 들어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용서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 성만 신부-
네 사람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고 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에 율법 학자들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군. 하느님 한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립니다.
그것을 알아채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원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별떡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
벌떡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가는 치유받은 이 사람,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사람에 의해 들려 왔던 준풍 병자였습니다. 이 환자에게 투여된 약은 오직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중풍 병자가 치유된 근원적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곧바로 건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건강으로 이어집니다.
죄의 용서는 위로와 평화로 이어집니다.
이와 반대?죄는 우리를 절름발이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죄에는 사물을 올바로 보지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한느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주님만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믿는 우리들, 주님의 용서에 자주 '나'의 마음을 보여 드립시다. 잦은 고해성사로 영혼과 육체에 건강을 회복하여 주어진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오늘도 또 내일도 말입니다.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 가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도구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과 용서이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도 속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배령하기보다 불편한 몸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중풍병자(마르2,1-12)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워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
얼마 전, 벽에 못질을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망치로 못을 박으면 되겠지만, 세멘 벽에 못질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랍니다. 우선 세멘 못이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정확한 망치질이 요구됩니다. 그래야 하얀 벽에 흠집이 생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더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드릴을 이용해서 벽에 구멍을 넣고, 그 안에 앙카를 박아서 나사못을 끼어 놓으면 아주 깔끔하게 벽에 못을 박을 수가 있답니다.
저는 드릴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드릴을 이용해서 벽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벽을 뚫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드릴의 끝만 닳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벽이 무척이나 단단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곳에 구멍을 내야하기 때문에 저는 있는 힘을 다했고, 결국 그 단단한 벽에 나사못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에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글쎄 제가 이용했던 드릴은 세멘 벽을 뚫을 수 있는 드릴이 아니라, 나무를 뚫는 드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이 들었던 것이지요.
만약 제게 세멘용 드릴이 있었다면 분명히 편하게 벽을 뚫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힘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원하던 것조차 얻지 못했을 뻔 했지요. 도구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 일을 더 쉽게 그리고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적당한 도구를 써야지,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저처럼 더 고생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무를 뚫는 드릴을 가지고도 벽을 뚫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벽을 뚫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강한 원의를 가지고 있는 4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기대하면서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왔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구를 이용합니다. 지붕을 뜯어낸 뒤에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던 것이지요. 바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강한 의지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강한 의지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되었으며, 덤으로 치유의 은사를 받게 됩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었나요? 혹시 나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그 누구도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강한 의지를 가지고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사람.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맙시다.
거짓말은 안한다('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캐나다 총리 장 크레티앙은 가난한 집안의 19형제 가운데 열여덟 째로 태어났다. 그는 선천적으로 한쪽 귀가 들을수 없고, 안면 근육 마비로 입이 비뚤어져 발음이 어눌했다.
그런 그가 신체장애를 딛고 1993년 총리가 된 이래 세 번이나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총리의 신체장애는 때론 정치만화가의 풍자 대상이 되었고, 작은 사건도 크게 부풀려져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선거유세를 다닐 때의 일이다.
"여러분, 저는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진 언어장애 때문에 제 생각과 의지를 전부 전하지 못할까 봐 고통스럽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저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저의 어눌한 발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저의 생각과 의지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반대파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에게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입니다."
그러자 크레티앙은 어눌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은 잘 못하지만 거짓말은 안 합니다."
한 마리의 어린 숭어가 수평선을 차지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꿈꾸는 듯 뭉게뭉게 이는 수평선 위의 흰 구름, 사과 빛으로 물들어 가는 수평선에 보이는 저녁놀.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숭어는 아득한 서쪽 지평선에는 인어들이 노니는 동화의 나라, 산호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석 달이 넘는 기나긴 여행에도 불구하고 어린 숭어와 수평선간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린 숭어는 점점 절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수평선은 또 그만큼 더 멀어져 가는 것 같았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숭어는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힘차게 헤엄쳐 오는 젊은 다랑어 한 마리를 만납니다. 특히 그 젊은 다랑어의 눈빛은 희망과 동경에 촉촉이 젖어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숭어는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지요.
“서쪽 수평선에서 오시는 분! 그 파라다이스에는 무슨 아름다운 것들이 있나요?”
“뭐라고?”
숭어의 질문에 다랑어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습니다.
“네가 떠나온 동쪽 수평선에는 어떤 아름다운 것들이 있느냐고 내가 막 물어보려던 참인데...”
숭어나 다랑어나 상대가 살고 있었던 수평선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다를 것이 없지요. 왜냐하면 똑같은 바다일 뿐이니까요.
우리 역시 이 숭어나 다랑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저쪽으로 가야만 진리가 있다고, 그곳에 가면 행복이 펼쳐질 것이라고 우리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또한 그러한 판단으로 커다란 절망감에 빠집니다. 결국 잘못된 판단 하나가 우리들을 불행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는 이러한 부분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하지만 그때 하신 말씀, 즉 “네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요?
‘네가 뭔데 하느님께서 하시는 용서를 네가 할 수 있다는 거야? 이 놈 사기꾼 아냐?’
사람들은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생각, 하느님이 유한하고 부족한 사람이 되어 오실 수 없다는 그들의 고정관념. 그것이 바로 감히 하느님을 판단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크신 분이고, 이 세상 곳곳에 당신의 모습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만 주님을 찾는 어리석은 나는 아니었나를 반성하게 됩니다.
어느 곳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깊은 하느님 체험과 더불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남의 떡과 내 떡의 크기는 똑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맙시다.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이해인)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했듯이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일수록 말이 적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주고
드러나지 않게 선을 베푸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십시오
변명하지 말고
행여 마음이 상하더라도 맞서지 말며
그대의 마음을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섬세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사람들이 그대를 멀리할 때에도
도움을 거부할 때에도
오해를 받을 때에도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대의 사랑이 무시당하여
마음이 슬플 때에도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대 주위에 기쁨을 뿌리며
행복을 심도록 마음을 쓰십시오
사람들의 말이나 태도가 그대를 괴롭히더라도
말없이 사랑하며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행여 그대의 마음에
원한이나 격한 분노와 판단이
끼어 들 틈을 주지 말고
언제나 이웃을 귀하게 여기며
묵묵히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인의 장막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복음 말씀을 전하실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로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고쳐 주시는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에 대해 율법학자들과 논쟁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든 병자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려고 병자를 데리고 오고, 지붕에 구멍을 내는 그 네 사람의 모습은 이웃 사랑의 모범이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차갑고 냉정하기만 합니다. 아니, 병자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약간의 통로도 못 만들어주나? 조금씩만 비켜주면 되었을 텐데 지붕에 구멍을 내는 모습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율법학자들도 그렇고, 그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웃 사랑과는 너무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그들이 듣고 있었던 것은 복음 말씀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어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복음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리코에서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만난 이야기를 보면,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마르 10,48).
그의 처지나 상황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시끄럽다고 짜증내는 모습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사실은 몸만 따라가고 마음으로는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자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꾸짖습니다(마르 10,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할 때 제자들은 시끄러우니 그 여자를 돌려보내자고(쫓아버리자고) 합니다(마태 15,23). 그 여자의 처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무자비한 모습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예수님 주위에 '인의 장막'을 친 모습들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명분은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쉬고 계시니까...
예수님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예수님 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것밖에 안 됩니다.
다시 중풍 병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에 구멍을 낸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도 없고, 딱한 처지에 있는 병자를 위해 양보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지붕에 구멍이라도 내서 그 병자를 나에게 데리고 와라.' 하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쳐놓은 이기심의 인의 장막을 특별한 방법으로 뛰어넘으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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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가 제도나 율법이나 조직의 문제로 막혀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커녕 오히려 막고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모습들 때문에 신앙을 잃고 냉담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그렇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이런저런 교회법 규정 때문에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생기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만일에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의 어떤 모습이나 행동 때문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도 성직자나 수도자가 인의 장막을 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 지붕에 구멍을 뚫으실 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저명한 상담 전문가 필 박사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박사님, 저는 직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희망도 없습니다.”
필 박사는 그의 신세 한탄을 듣고 청년에게 물었지요.
“잠은 잘 잡니까? 가정은 있습니까? 친구는 있습니까?”
청년이 그 질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자네는 왜 있는 것과 좋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과 나쁜 것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더 많을까요? 그렇다면 내 자신은 행복한 사람일까요? 불행한 사람일까요?
사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물건을 갖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산술적으로 또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행복의 기준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열 살의 나이에 대학 교수도 잘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천재 소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지요.
이런 아들이 걱정된 부모는 긴장도 풀고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소년이 좋아하는 같은 반 여학생과 함께 영화를 보도록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이 여학생이 소년에게 말합니다.
“난 주인공이 흐느낄 때 나도 따라 울 뻔 했어.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였어. 넌 어땠니?”
이에 소년은 이렇게 무심하게 대답했다고 하지요.
“이 영화에는 정확하게 22,369개의 문장이 나왔고, 그 문장은 98,332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더라.”
계산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 가운데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중풍 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 병자가 중풍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정상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지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바쁘니까 그냥 가자.”하면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못하는 중풍이라는 병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병의 치유와 함께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였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스스로 걸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 곁으로 데리고 온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인장을 받은 우리들은 모두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행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사명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늘이 치료하지 못할 상처는 없다.(토마스 모어)
일어나 들것을 들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세례를 준 70대 중반의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너무 늦게 세례를 받아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가야 하느냐고 저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발이 불편하여 성당에 나가시기 힘들기 때문에 방에서 시간 될 때 성경 필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사 출신이시라 글을 쓰면서 성경의 내용을 묵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습니다.
다리도 아프시고 몸도 좋지 않으신 그 할머니는 신, 구약을 일 년 반 만에 완필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들을 모아서 책을 내시겠다고 야단입니다. 정말 늦게나마 주님의 사랑에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처음부터 그렇게 열성적인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평생 산부인과 의사를 해오시며 수 없이 낙태를 하셨습니다. 낙태를 장려하던 시절, 하루에 60명도 해 보셨다고 합니다. 평생 얼마나 많은 수의 아기들이 그 할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채 꺼내졌겠습니까?
종교가 없었던 그분에게도 그런 삶은 큰 양심의 가책을 안겨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얼굴이 비뚤어져 집 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삼 년 동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인생이 마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밑에 층에 성당에 다니던 두 자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분이었고 또 한 분은 그 분의 시누이였는데 두 분 다 열심히 다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위층의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공략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시는 죄는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움직이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그 자매님들이 교리를 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엔 교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세례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상의하고 그냥 세례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이야기를 들어보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는 날 그 할머니는 절뚝절뚝 걸으시며 성당으로 나오셨고 세례식 때에도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지금 그분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병자’는 걸을 힘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다가오지 못할 처지’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심한 병에 걸린 경우에는 주위사람들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 갈 힘도, 용서를 청할 용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 앞에 병자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네 명의 믿음에 보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본인의 믿음을 가장 크게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위사람들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도 여러 번 있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누워있을 때 장모가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지만 주위사람들의 간청과 베드로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직접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이 심한 병으로 누워있는데 백인대장이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하였을 때 그의 믿음이 어떤 유다인들보다 큰 것을 보시고 그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다인들은 기적을 행할 때에도 손을 얹어 고쳐달라고 하든지, 찾아와서 고쳐 달라고 했는데 그는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도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계속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포기하지 않고 쫓아와 청을 드려 딸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야이로의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죽은 아이가 무슨 믿음을 그리스도께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살아난 것은 부모의 믿음 덕택입니다.
사실 구원 받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형수도 저에게 이 진리를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청부살인으로 잡혀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옥살이 하는 가운데서 교정사목을 하는 신부님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다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개신교나 불교 신자가 된 사형수들은 죽기 싫어서 사형장 앞에서 모두 울며 저항을 했는데 천주교 신자가 된 이 사형수는 어머님께 죄송하다 말하고 신부님께 담배를 줄이고 운전 조심할 것을, 울고 있는 수녀님과 가족들에겐 좋은 데 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으며 사형장으로 당당히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며칠 지나서 해 주시는 어머님도 편안한 얼굴이셨습니다. 사실 사형수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고 사회에서도 이미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오른 쪽에 같이 못 박혀 있던 죄인을 구원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마지막 기회의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네 명의 사람들의 이름은 비록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마음에는 영원히 기억되어 있고 합당한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하는 것과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하는 것과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물론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하시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죄까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없는지 사람들이 깨닫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병을 고쳐준다’는 것을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돌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병의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죄도 용서받고 기적도 행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더 쉽게 보여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도 용서하고 병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자리’란 바로 그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한 가지에 집착하다보면 그 자리에 붙어서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상태까지 가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제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죄의 나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집착하여 온갖 거짓말과 죄를 짓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인기에 집착하여 그것을 잃기 전에 목숨을 끊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권력에 집착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애정에 집착하여 그것을 잃고 자살하기도 하며, 육체적 쾌락에 집착하여 결국 강간이나 살인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질력이 나서 벗어나려 해도 오랫동안 집착해 온 것들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삶이 허황될 뿐만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종으로 만들어버렸음을 깨닫고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있었는데 그 신자도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며 고해보기를 꺼렸습니다. 그런데 주위 신자들이 그 분을 성당으로 데려왔고 고해를 보게 하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고해를 보던 그 분은 신부님께 아주 적은 보속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를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속을 조금 주는 이유는 자매님께서 이미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 충분히 보속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교회를 완전히 떠난 것 같아도, 그 자신 안에서는 이런 이길 수 없는 투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을 예수님 앞에까지 데려다놔야 하는 것은 건강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선을 악으로 만드는 죄악의 치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간의 죄는 많고도 큽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큰 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 중에 하느님께 짓는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웃에게 짓는 죄일지라도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지만 하느님께 직접 짓는 죄도 있습니다.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는 죄.
하느님을 원망하는 죄.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죄 등 많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 직접 짓는 죄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떤 죄를 가장 싫어하실까요?
제 생각에 당신을 싫어하는 죄를 하느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실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하면 하느님께 ‘완전 비호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당신을 비호감이라고 하는 백성에게 서운함을 표시하십니다.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싫증을 내었다. 너는 도리어 너의 죄로 나를 괴롭히고, 너의 죄악으로 나를 싫증나게 만들었다.”
싫증이란 표현을 이사야서는 쓰고 있는데 싫증이란 하나의 병입니다.
싫어하는 症勢인 것이지요.
실증을 잘 내는 사람은 좋은 것을 쉽게 비호감 또는 나쁜 것, 악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고약한 병증입니다.
어찌 좋은 것을 그리도 쉽게 나쁜 것으로 만드니 말입니다.
그런데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은 하느님도 나쁜 것으로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쁜 분이 아닌데도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너의 죄악으로 나를 싫증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죄악이란 악 중에서 죄로 인한 악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악 중에서 至上善이신 하느님을 악으로 만드는 죄악이 가장 나쁜 죄악일 것입니다.
이렇게 선이신 하느님을 악으로 만드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누가 더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을까요?
이에 대해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하느님은 인간의 죄악에 의해 그슬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선은 인간의 죄악에 의해 악이 되지 않습니다.
죄악을 저지른 그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악이 되겠지만하느님 자신은 선 그대로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결핍이 없으신 선이시고 선의 결핍이 없으신 완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더럽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죄악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선의 결핍이 있는 인간은 결핍을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선을 악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은 새 냉장고를 보는 순간, 욕심 때문에 지금까지 잘 사용하던 좋은 냉장고에 싫증을 내 나쁜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는 쓰레기로 버려버립니다.
아이로 치면 새 장난감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싫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선을 악으로 만들고 그 악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악과 같이 사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영육간의 모든 병은 이렇게 악과 같이 사는 스트레스에 의한 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도 이런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병으로 가난해 져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좋으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을 믿는 이에게는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와 같이 악이 선으로 회복되는 치유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용서할 때 하느님도 용서하신다.
배광하 신부님
연중 제7주일 (마르 2, 1~12) 영과 육의 자유
내 안의 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잘못을 추궁할 때 한 손가락을 상대방에게 가리키게 됩니다. 이른바 삿대질을 할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섯 손가락 모두 용서 못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모두 안으로 들어와 나를 가리킵니다.
이 같은 작은 행동 안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이 하나라면 나의 잘못은 넷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절대로 나의 잘못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 교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 41)
우리가 자주 타인의 죄를 용서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내게는 결코 잘못이 없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 중이나 미사 때에 수 없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삶에서는 늘 남의 탓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우선 내 안에는 잘못이 없었는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그리고 참다운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입니다. 먼저 내가 용서해야 하느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새겨듣고 용서의 큰 경각심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용서의 위대한 교훈을 남기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가 결코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용서의 주체라는 교만과 오만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용서를 통한 자유
영미 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이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 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 기운을 잃은 한 마리의 개똥지빠귀를 / 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 /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용서의 하느님 마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습니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 25).
참으로 감격스럽고 은총이 넘치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늘 크고 작은 죄에 노출되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떨어져 차마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는 못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서는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함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용서는 용서 받아야 할 상대방 보다는 자신을 위하여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심과 복수의 앙칼진 갈린 마음으로는 내 자신이 진정 기쁨의 자유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물론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자신 안에서도 용서와 화해의 사랑이 물결칠 때, 하느님의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안고 있었던 타인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가슴 한켠에 꽉 막혔던 미움의 응어리가 씻기어지고 비로소 자유의 날개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큰 죄책감에 억눌려 나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타인의 슬픈 눈동자, 서로의 상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면 거창한 인류애를 넘어 우리 자신의 삶은 결코 헛되이 산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영혼도 살고 용서받은 타인의 영혼도 살게 된 것, 그것은 진실로 위대한 삶이었고 위대한 영웅적 결단이었노라고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몰랐던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당대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지혜와 판단은 용서가 불가능하여도 하느님 사랑에는 용서 못할 일이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 2, 9).
믿는 이들 안에 일어나는 기적
이기양 신부님
막 시작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온 갈릴래아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뒤덮였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민간 지도자인 율법학자들이 이에 무관심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란 자가 어떤 인물인지,그리고 누구 편인지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일은 카파르나움에서 터졌습니다. 누군가가 지붕을 뚫어 병자를 들것에 달아내려 보냈는데 예수님께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선언을 하시며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하며 신성모독죄를 놓고 예수님을 당장 없애 버려야할 인물로 낙인찍지만 대부분 군중은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전합니다.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이 자리에서 병자는 믿음으로 치유되고 군중들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율법학자들은 냉랭함을 넘어서 없애 버려야할 체제의 도전자로 깊은 적개심을 드러냅니다.하느님 권능을 보고서도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이유는 율법 학자들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면 어떤 것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됩니다.
아주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물 한 방울이 아쉬운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은총의 비가 퍼붓듯이 내립니다. 이때 양동이를 뒤집어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얼른 양동이를 뒤집어 놓고 받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고 불평만 합니다. 마음이 닫혀 있거나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뒤집힌 양동이와 같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신자 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매 주일 복음 말씀과 강론을 통해 하느님 은총의 단비가 내리는데 마음이 닫혀 있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미사 참례 중에도 세상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은총을 맛보기는커녕 그 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 가득히 은총을 담고 마음의 옥토를 가꿔 신앙과 사랑의 씨앗을 키워갑니다. 이런 분들은 주일이 즐겁기만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7년께부터 유토피아 사회주의 집단에 참여해 49년 4월 동료 33인과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한 편지를 낭독하다가 체포돼 12월 총살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그때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사형수 몸이 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최후 5분이 주어졌습니다. 28년을 살아오면서 5분이 이처럼 소중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각합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옆에 있는 사형수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을 정리해 보는데 2분, 나머지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둘러보는데 쓰기로 하자.'
눈에 고인 눈물을 삼키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들을 잠깐 생각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버렸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에 대해 돌이켜 보려는 순간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장이구나!'하는 생각으로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습니다. 지난 28년이란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말할 수 없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순간순간을 아껴 쓰련만, 이제 죽는구나!'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려는 바로 그 순간 황제의 특명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풀려나게 됩니다.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그때 느꼈던 '시간의 소중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해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주변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그러나 율법 학자들처럼 아집과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히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처럼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고 병자가 치유되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주형 신부님
진교에 있는 한 사제의 봄 이야기
봄 이야기, 하나.
“제가 장사를 하느라 성당 미사를 참여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저희 구역 내에 반장님과 구역장님이 주일마다 쉬지 않고 주보를 가져다주시더군요. 미안하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자신이 시간을 내어서 주일 새벽미사를 다니게 되더군요. 끊임없이 보이는 주님의 관심과 이끄심에 이제는 성체도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미사에 다니게 되었고요.”
어느 장사하시는 자매님이 쓴 글입니다.
오랫동안 장사를 이유로 냉담하던 한 자매님을 성당으로 이끈 이들은 반장과 구역장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에 나온 중풍 병에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간 네 사람과 비슷하네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아래로 내려 보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정성입니다. 이런 노고만큼이나 위 이야기의 주인공을 성당으로 이끈 반장과 구역장의 노고도 참으로 대단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정성이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을 구원에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복음에 나오는 중풍병자나 이야기 속의 자매님은 참 인복(人福)도 많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친구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나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겠습니다.
봄 이야기, 둘
어느 날 아침,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죽을 꺼내었습니다. 정말 맛깔스럽게 보이는 호박죽입니다.
‘조금 있으면 맛있게 먹어 줄 테니 참아’
이렇게 밤새 주린 배를 달래가며 전자레인지에 넣어두고 빨리 데워지길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3분이 30분처럼 느껴집니다.
“딩동”
다 데워졌으니 꺼내가라는 소리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반가운 소리인지, 그릇이 뜨거운 줄 모르고 얼른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식사 전 기도와 함께 숟가락이 죽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멘을 할 때는 죽이 벌써 입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맛있게 보였던 죽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뱉어버렸습니다.
맛이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괜찮겠지’ 하며 며칠간 두었던 것이 문제였나 봅니다.
사실 냉장고를 너무 신뢰했던 게 잘못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방심하면 안되겠습니다.
믿음이 오염되는 건 한 순간입니다.
몇 대를 이어온 신앙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주어진 직책에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랜 기도 수련은 믿음의 유통기간을 길게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믿음은 오직 사랑만이 신선도를 지켜준다는 사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네 사람의 사랑이 그 병자를 낫게 했습니다.
봄입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에 따스한 기운이 붑니다.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올 봄엔,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예수님께서 다시 카파르나움이라는 마을에 머물러 계시던 날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배고팠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목말랐던 사람들입니다.어찌나 사람이 많이 왔던지 그 집 문 앞에까지 빈틈이 없습니다(마르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중풍에 걸려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그저 누워 지내며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분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병도 고쳐주실 것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누워만 지내며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은 누워 있으나 마음은 벌써 그분에게 달려갑니다.
다행히도 그 마음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보고 친구 넷이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데려왔습니다(2,3). 그러나 들것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이미 그곳에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 처지입니다.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서야 할 판입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발길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꼭 치유받고 싶다는‘간절함’과 거기 계신 그분께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그와 그의 친구들을 붙잡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ㄴ-23)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믿음이 그들에게 좋은 생각을 끌어냅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예수님 계신 곳 바로 위에 덮었던 곳을 벗겨 구멍을 내고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밑으로 내려보냅니다.그렇게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물리적인 장애물과 공간을 제거시킵니다. 막혔던 벽이 제거되고 거리가 사라집니다. 중풍 병자는 ‘아래로 내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시편30,11) 예수님께서 그와 그들을 보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이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사람들 가운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율법에 단단히 구속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죄의 용서는 하느님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9-10)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 10,43).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사도 13,38-39)
히브리어로 ‘죄’는 ‘과녁을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상태에서 벗어난 것, 빗나간 삶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마비되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한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중풍 병자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는 용서받았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온전한 상태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던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마르 2,12).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라 3,20)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 43,18-19.21)
주님, 오늘 제 몸을 일으킵니다. 제 두 발로 굳건히 일어섭니다. 예전의 얽매임을 훌훌 털어버리고 묶여 있음에서 자유롭게 벗어납니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당신께서 하시는 새 일을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제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께 노래하오리다.”(시편 13,6)
어느 날 국왕이 자신의 이빨이 모두 빠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불안했지요. 과연 자신의 이 꿈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해몽가를 불러서 자신의 꿈을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한 해몽가가 국왕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흉조입니다. 전하의 가족들이 한 분씩 전하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입니다.”
국왕은 크게 노하여 그 해몽가를 감옥에 처넣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다른 해몽가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징조입니다. 전하께서 가족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사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국왕은 매우 기뻐하며 이 해몽가에게 상금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가족이 국왕보다 먼저 세상에 뜬다는 말과, 국왕이 가족 가운데 가장 오래 산다는 말과 다른 뜻인가요? 아니지요. 분명히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이 해몽가에게 말했어요.
“당신이 말한 것은 앞서 감옥에 간 해몽가의 풀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소. 그런데 이렇게 대우가 다르다니…….”그러자 상금을 받은 해몽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와 나의 해몽은 똑같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 말이 상당히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어떻게’라는 부분에서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라는 목표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지요.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 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군중으로 인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예수님 앞으로 내리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사실 이렇게 엉뚱한 방법을 쓰는 것을 그 당시의 군중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자기 차례를 지키지 않는 그들이 무척이나 미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치유를 거부하셨던 적이 있었나요? 진득하게 기다리면 어떻게든 치유를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말하면 새치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을 쓰는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성서에서는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줄을 설 때 새치기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당신 앞에 나아오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즉,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때요? 과연 그런 노력을 하고 있나요? 당연히 해야 할 기도조차도 바쁘다는 이유로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우리 삶의 목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목표로 나아갈 것인가를 잊어먹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어떻게’라는 항목을 오늘 채워보았으면 합니다.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갈 지 생각해봅시다.
주님을 향한 믿음
이철구 신부님
늘 반복되는 잘못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악습. 고해성사를 볼 때 단골 메뉴에 들어가는 그것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악습을 반복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해 버립니다. 뭔가 답답한 것이 한쪽 구석에 남아 있는 것들이 합리화한다고 해서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양심에서 울리는 신호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울리는 양심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주님에 대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을 오늘 예수님은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늘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살아가는 변변치 못한 우리라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붕을 벗기고
정 세라피아 수녀님(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병실에 환자 방문을 갔다. 연세가 드신 신심 깊은 신자셨다. 수술을 하셨는데 얼마나 통증이 심하고 아픈지 아무리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려고 애써도 저절로 ‘아이고’란 소리만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신앙이 이것밖에 안 되니 참 한심합니다”라고 하셨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때야말로 옆에서 함께 기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오늘 중풍병자는 전신마비였나 보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언어장애까지 온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그를 낫게 하고자 난리를 피웠다. 지붕을 뜯는 기발함을 발휘하였다. 사물·사건·사람을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다. 정면에서 볼 수도 있고, 뒤에서, 측면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그리고 속알맹이만을 볼 수도 있다.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보는 면이 다르지만 조금만 사고의 틀을 바꾸면 참으로 큰 변화를 이룰 수도 있음을 친구들이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 앞에 발디딜 틈도 없이 모인 군중은 수평적 차원에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위쪽 방향에서도 예수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큰일이 일어났다. 믿는 대로 된 것이다. 아니, 덤으로 죄의 용서까지 받았다.
스치다 다케시란 분은 일본 교토대학 금속공학부의 교수로 있었다. 1970년대 초, 석유 쇼크 이후 재생 불가능한 지하 광물자원에 의존하는 현대 공업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깨닫고 그 필연적 붕괴를 예견하면서 금속공학자로서의 길을 버리고 넝마주이가 되어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설립하여 일본의 환경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공업, 과학 문명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맹목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죄라는 사고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주체적 선택을 하였고, 자연에 순종하며 즐겁게 사는 삶, 공생공영이 아니라 공생공빈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참 용감한 분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시기하는 사람의 질문에, 대답 대신 그는 달걀을 들고 한쪽 끝으로 세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모두 애를 썼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콜럼버스는 달걀 한쪽 끝을 깨뜨려서 달걀을 세웠다. 일단 보고 나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도 깨뜨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 앞에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중에도 분명 치유받고자 온 환자가 있었을 것이다. 지붕을 뚫고 설교를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 의외로 그들을 칭찬하셨다. 인간의 품위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에 예수님 머리 위에 있는 지붕도 감히 뜯을 수가 있는 것이다.
풍요로운 주님 자비의 손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꼼짝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저를 검진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큰일 났다'며 즉시 입원시켰습니다. 그리고 '절대안정'이란 팻말을 제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았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어느새 간호사 선생님들이 달려와서 혼냈습니다. 멀쩡하게 잘 돌아다니다가 꼼짝 없이 갇힌 신세가 되니 정말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발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산다는 것, 정녕 큰 감사거리이자 큰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경우 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말기 중풍병자였습니다. 병세가 어지간했으면 부축이라도 받아서 예수님께로 왔을텐데, 들것에 실려 온 것을 봤을 때 거의 식물인간에 가까운 병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중풍병자는 그 누군가가 도와줘야만 겨우 밥 한 숟가락 뜰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크게 선심 써야만 겨우 '볼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일이 오랜 세월 중풍병자가 해왔던 전부였습니다. 그저 환자의 목숨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것이 환자 가족의 바람이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거두고 있던 가족들의 고초도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환자 못지않게 답답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중풍병자 가족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전해집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가족들은 '혹시나'하는 희망을 안고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가족들은 큰 기대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앞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치유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로 주변은 인산인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자니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희망했기에 가족들은 무리인 줄 알면서도,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한 가지 묘안을 짜냅니다. 집 바깥에 나있는 계단으로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조심스럽게 뜯어냈습니다. 들것에 줄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방 한 가운데로 천천히 내려 보냈습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 해도 해도 너무한 일, 도무지 예의가 아닌 일,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눈여겨보십니다.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팀플레이'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끝까지 병자를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의 지극정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치유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 구원받고자 하는 그들의 능동성,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마음 앞에 예수님의 마음 또한 움직입니다.
오늘 제 안에 들어있는 중풍병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을 바라봅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본인의 적극적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자비, 연민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저 역시 침상에 누운 채 예수님 자비의 손길만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런 말씀을 던져주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냥 '네 병을 치유시켜주마'가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난 병에 대한 치유뿐만 아니라 내적 치유까지 동시에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환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인파에 지레 겁을 먹고 집으로 발길을 되돌린 환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결과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치유와 구원을 받은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만남, 그분과 만남을 통한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적극적 의지와 노력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죄보다 크다
김영수 신부님
자비의 집
영국의 어느 주교좌성당 옆에는 ‘자비의 집’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이 집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성당을 짓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한 여인이 주교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 “하느님께서 이 성당 옆에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집을 하나 꼭 지으라는 말씀을 주교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주교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알았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후, 그 여인은 또 다시 주교님을 찾아와 똑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주교님은 그 여인에게 “그러면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내 죄가 하나 있는데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달라고 하시오. 그 죄를 알아오면 부인의 말을 믿겠소”라고 하시고는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이른 아침, 주교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그 여인이 급하게 주교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부인에게 “그래, 하느님께서 내 죄를 알려 주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주교님께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벌써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셨답니다.” 그리하여 그 주교좌성당에는 ‘자비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이 함께 지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 못지않게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지붕을 뜯어내고서 있는 힘을 다해 당신 앞에 나온 중풍병자를 향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선문답(禪門答)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끈을 잡아 보려는 병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신 치유의 기적들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예수님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동기로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하신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 다가온 중풍병자를 향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은 사랑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진정한 치유를 낳으며 진정한 치유는 온전한 회복을 이루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40일 피정을 하면서 체험한 일이 생각납니다. 피정을 시작하면서 동반자 수녀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길잡이를 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흐트러진 신앙생활도 추스르고, 그동안 범한 모든 죄를 용서받고 다시 깨끗한 삶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시작한 피정이어서 잔뜩 긴장해 있는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묵상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내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탓에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일은 무언가 순서가 뒤바뀐 듯하고, 하느님 앞에 염치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반자 수녀님은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용서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랍니다”고 하시며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40일 피정의 첫 주간을 하느님 사랑에 대한 묵상과 기도 안에 머무르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내 마음 안에 차오르는 평화와 위안을 느끼게 되었고 내 자신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정기간동안 나는 덕지덕지 때가 낀 영혼을 하느님께 내 맡길 수 있었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내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결심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이 놀라운 체험이 나를 이끌고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 보다 훨씬 크다’는 영적 진실을 믿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깨끗해져서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 속에 머무르게 되면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이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삶을 중풍병자와 같이 뒤틀리게 만듭니다.
온몸이 마비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지붕을 뜯어내고서라도 예수님께 다가갔던 중풍병자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며 그를 치유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보다 죄에 대한 집착으로 옴싹 달싹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라.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나아가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 안에 새 일을 시작하시리라.”
서공석 신부님
복음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을 알리는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를 기록하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 아니라,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들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 채로 떠메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집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내려 보냅니다. 그 시대 유대인 집 구조로 보아 지붕은 쉽게 벗겨진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어렵게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넋을 잃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일을 예수님이 하셨고, 사람들은 그 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최소한의 생존을 누리는, 위축된 생명의 소유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치기 전에 ‘그대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병을 인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용서를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신 것은 그 병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생각하며 위축되어 사는 사람을 그 선입견에서 해방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병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주장하는 그 시대 유대교를 반박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이 닥치면 즉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르면 하느님이 주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업이 실패했을 때,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선고받았을 때, 신앙인들은 흔히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합니다. 우리 죄의 대가로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동네 성황당(城隍堂)에서 빌던 옛날 사람들의 것과도 비슷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지니고 삽니다. 세상의 생명체이기에 지닌 한계가 있습니다. 병고, 신체적 장애, 죽음 등입니다.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기에 발생하는 한계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쟁과 실패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는 수작이 아닙니다. 그런 한계를 겪으면서도,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율사도 아니고 제관도 아닌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 죽음의 한계 앞에 예수님은 죽음을 치워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죽음의 한계 앞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그분의 뜻이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도 과연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분이라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기적적으로 뛰어넘어 독야청청(獨也靑靑)하게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한 인간으로 지닌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감춰진 가능성과 힘을 계발하여 발휘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생명이 위축되고,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병을 고쳐서, 그 환자를 위축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상 생활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 도움을 조금 받으면, 그 위축에서 벗어나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런 가능성과 힘이 감춰지고 계발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우리 자신이 너무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얽매여 사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은 우리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찾지도 염려하지도 마시오. 그런 것은 모두 세상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시오”(루가 12,29-31).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일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주변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비로소 감춰져 있던 우리의 가능성과 힘이 계발된다는 말씀입니다. 위축되어 살던 우리 주변의 생명이 충만한 삶에로 돌아올 것이고,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차별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 병든 이와 건강한 이, 의인과 죄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차별과 갈등을 없애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신 곳에 그런 차별과 갈등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생명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감춰져 있는 가능성과 힘을 계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하느님의 일은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고 배워서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핵심은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여주며,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여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43,18-19.21-22.24b-25: 네 죄를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성서상의 역사는 원조들로부터 시작하여 온통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과 배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다. 바로 이러한 불충실과 용서의 주제가 1독서에 표현되고 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키실 때 새롭게 보여주실 당신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백성들의 영적인 냉담을 지적하고 계신다.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오늘 복음은 나자렛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나라의 승리가 죄의 용서를 통해 가장 크게 드러남을 보여주고 계시다. 그러나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불편한' 인물이 되심을 복음사가는 강조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계셨던 것 같다. 사람들이 너무 문 앞에 너무 많아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가 잔 가지와 마른 흙으로 덮인 지붕을 벗겨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 보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5절).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시기 전에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감히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성서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여 이렇게 말한 것은 잘못은 아니다. 그들의 잘못은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확인도하지 않은 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억측을 못하도록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생각을 들추어내시고 하느님의 능력이 당신을 통해 드러나심을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신다.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8-11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죄를 용서하는 것'을 '치료를 하는 것'보다 쉽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은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이 참된 사실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그 행위들은 모두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 기적행위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의 의미, 즉 그 불쌍한 중풍병자의 치유가 병든 육체의 치유일 뿐 아니라 병든 영혼의 치유이기도 하다는 두 의미를 서로 밀접히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적행위는 그 중풍병자가 바로 하느님께서 항상 새롭게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셔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다. 육체만 혹은 정신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병이 든 것은 인간 전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더 중한 병은 외적으로 나타난 병보다도 정신 속에 뿌리박고 있는 내적인 병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적치유부터 시작하신다. 진정으로 사악한 것은 '인간의 내면, 즉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마르 7,21-23 참조)을 망각하고 신앙의 외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잘못된 모습들이 있다. 인간의 구원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 나타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10절).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사죄권이 당신에게 있음을 주장하신다.
이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름을 타고 영광에 싸여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마르 13,26; 14,62)도 의미하고, 또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마르 8,31; 9,9.31; 10,33.45; 14,21.41 참조)의 모습도 의미한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보면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으로 보면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풍병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은총과 자유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그 '용서하는 권한'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랑의 커다란 시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사랑하실 줄 알기 때문에 용서하실 줄도 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희망을 주며 당시의 군중들이 느꼈던 경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2절).
제2독서: 2고린 1,18-22: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이 용서의 힘을 통해 그리스도와 같이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죄를 멀리할 때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다시 받아들이신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삶이 비난을 받지만 항상 변함없이 한 마음 한 뜻이었다고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강조한다. 하느님의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진실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가야할 여정인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 당신 앞에 올바로 서있는 삶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였음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분을 닮아가는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구요비 신부님
얼마 전에 제가 속해 있는 프라도회의 신부님 한 분이 많은 나이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종신서약 형제들이 조촐하게 환송연을 마련했습니다. 유학을 갈 신부님이 “당신들 덕분에 제가 사람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려간 친구들과 같습니다…”라고 감사를 표하자, 함께 있던 신부님 한 분이 “그런데 말이야 내가 당신을 들 것에 실어 나르면서 사실은 내 병이 나은 것 같아…”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오랜만에 깊은 우정을 확인하며 석별의 정을 아쉬움을 나누었습니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서 치유를 받은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요인은 친구들입니다. 이 병자는 주님께 죄를 뉘우치거나, 병을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자유 의지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도 구원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오늘 “예”라고 대답하십니다(2코린 1,19).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실락원’이 가져온 ‘죄의 연대성’에 대응하는 ‘선(善)’의 연대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중풍병자도 친구들의 극성과 열성에 감동하여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깊이 뉘우치지 않았을까요? 이런 의미로 지금 여기에서 성인(聖人)들과 통공(通功)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이냐시오 로욜라).
예수님은 환자를 만나실 때 단지 외적인 상처나 증상만을 보지 않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병들고 파괴하는 깊은 뿌리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사실 죄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키에르 케고르).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어린 아기’(teknon)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품는 친밀감과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와 구원 경륜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도록 가르치고, 각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계획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마르 2,2).
그래서 이 중풍병자를 하느님 안에서 지니고 있는 본래모습인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마르 2,5). 이 회복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지기에 예수님의 치유는 늘 인간의 신앙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심연, 곧 죄로 상처 입은 인간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마르 1,27.34).
이혁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으면서 동시에 중풍까지 치유 받았다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언뜻 보면 중풍병의 치유가 주제이며 핵심인 듯 여겨지지만 실상 그 주제와 핵심은 예수님의 "사죄권"입니다. 즉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에게 "너의 병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의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구세주, 인간의 내적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치유의 봉사자로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물론 병자들의 육체적 질병도 낫게 해 주셨지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들어내시기 위하여 행하신 부수적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픈 이들을 만나실 때, 그들을 단순히 물리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돌아온 '잃었던 아들들'로,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인들로 받아들이시고 그들의 영적인 치유와 함께 신체적 치료의 청까지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온 사람은 넷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아마 들것에 병자를 눕혀서 들고 왔을 듯 싶습니다. 그들은 그 병자를 예수께 데려가면 틀림없이 낫게 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믿음으로 협동 작업을 하여 병자를 예수님 계신 곳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는 데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덮개를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함을 나무라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러한 정성과 극성스런 행위를 하게 한 그들의 믿음에 감복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고통 중에 있던 중풍병자에게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데려갔고 만나 뵙도록 하기 위해 열정적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연 믿음은 기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놀라운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십니다. 한편 우리는 성령께로부터 상처를 치유 받으면서 동시에 성령의 도구로서 다른 이들의 상처 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진정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사회가 점점 이기주의적이고 비인간화되면서 널리 퍼져 가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더욱 고독하게 하는 태도는 미움보다 오히려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고통과 곤궁 중에 있는 이에 대한 우리의 조그마한 관심, 주의 깊게 들어주는 친절, 힘 북돋아 주는 한 마디의 말, 부드러운 미소, 정겨운 악수가 그들의 상처 치유의 효력 있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은 바로 사랑 자체이시며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유영봉 신부님
묵상길잡이 : 순리를 거스르면 무리가 오고, 그것이 가중되면 병이 된다. 죄(罪)와 병(病)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모든 질병(疾病)이 다 죄에서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죄에 짓눌리고, 증오와 원한이 깊어지면 병이 오게 마련이다. 죄에서의 해방이 곧 치유일 수도 있다.
1. 지붕을 벗기는 열성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는 문 앞에까지 꽉 찬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벗기고 그 구멍으로 환자를 예수 앞에 달아내려 치유를 받게 하고 있다. 대단한 열성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치유사실을 알리는 루가복음 병행구절을 보면,“기왓장을 벗기고”라고 나온다. 아마도 이방인이었던 루가 복음 사가는 이스라엘의 가옥구조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봄부터 11월까지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건기(乾期)이다. 그 때는 지붕 위의 굴뚝 부분을 거적이나 큰 나뭇잎으로 덮어놓는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는 그 굴뚝을 덮었던 거적을 벗기고 달아 내렸을 것이다. 그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낫게 해주셨다.
2. 죄(罪)와 병(病)의 관계
현대 의학은 모든 질병의 80%는 마음에서 온다고들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靈)과 육(肉)의 관계는 실로 오묘한 관계이다. 어디까지가 육(肉)이고, 어디까지가 영(靈)이라고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야단을 맞으면 지금까지 잘 나오든 위액(胃液)이 딱 멈추어버리면서 소화가 되질 않는다. 정신적 충격이 육체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를 내거나 미워하며 원한을 갖거나, 놀라거나 억울한 경우를 당하게 되면 그것은 육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라는 것도 성취욕(成就慾)이 지나쳐 뭔가 잘못되거나 게임에서 지게되면 참을 수 없는 사람, 남 앞에서 실수를 하게되면 스스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사람, 남이 잘되는 것을 봐도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은 항상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항상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사람들은 조금만 제대로 되지 않아도 견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한다.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겸손되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지고는 못사는 교만함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것들이 겹치면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호소한다. 이것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스트레스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리를 거스르는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나 억지로 하면 무리하게 되고 그것은 곧 화(禍)를 자초하는 것이다. 운동도 지나치면 근육통을 일으키고, 술이 지나치면 간장을 버린다. 항상 “지나친 것은 못 미친것만 못하다.”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크게 보면 다 죄(罪)와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죄와 병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3. 죄인을 사랑하시며 병고를 가볍게 해주시는 하느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죄(罪)나 재난은 다 죄의 벌(罰)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환자는 다 죄인취급을 받았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런 멸시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예수님은 “네 죄는 용서를 받았다”하시며 “하느님께서는 너를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하시며 당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토록 고생하던 중풍병자가 낫는 그 황홀한 은총의 순간에도 율법을 내세우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는다.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흠 잡힐 데 없이 반듯하게 살고, 열심하고 경건한 이들이다. 그런데 주위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뒤틀리는 이들이다. 율법을 내세워 항상 따지는 이들이다. '머리카락에 홈을 파는, 면도날 같은' 사람들이다. 가차없이 단죄하는, 다들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포용과 용서와 아량을 모르는 이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법대로'를 주창하는 율법주의자는, '멋대로'를 살고자하는 무법자(無法者) 보다 더 위험할 때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주의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죄(罪)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낫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가끔 면담 성사를 주다 보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응어리진 죄의 짐을 틀어버림으로, 천근 만근 가슴을 누르고 있던 죄의 무게를 벗어 던짐으로, 병도 씻은 듯이 낫게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과 육으로 된 이간이기에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와 건강의 길임을 알아야 하겠다. 진정한 웰빙은 마음의 평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 화답송의 말씀처럼 이 미사 중에 우리도 “주님, 저를 고쳐주소서. 당신께 죄를 얻었나이다.”하며 주님께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