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미륵산 마애불 원주 미륵산 마래불은 원주시 남쪽 충주시 소태면과 경계를 맞댄 귀래면의 미륵산(해발689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상은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주포리다. 미륵산이 있는 귀래면(歸來面)이란 명칭의 유래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머물렀다고 하여 귀할 ‘貴’와 올 ‘來’를 써서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으로 귀래(貴來)라고 불렸다고 한다. 경순왕은 56대 왕으로 927년 왕위에 올랐지만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양위한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양위 후 용화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용화산이 지금의 미륵산이다. 경순왕은 이곳 미륵산에서 학수사와 고대암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었는데 학수사는 황산사(黃山寺)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경순왕이 머물렀다고 해서 임금 <황(皇)>자를 썼지만 이미 서인으로 강등된 상태라 임금을 뜻하는 <황(皇)>자를 쓰지 못하고 황산사(黃山寺)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고대암의 자리에 경순왕의 영전을 모신 경천묘가 조성되어 있다. 황산사가 있는 주포1리 마을은 황산사가 있다고 해서 그 후로도 계속 절안 마을로 불리게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황산사는 모두 불타 없어지고 부도 2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산사) 미륵산 마애불 가는 길 미륵산 들머리의 텃밭을 지나면 남루하게 보이는 절이 있다. 이절이 앞에서 말한 황산사라는 절이다. 종파를 조사해보니 법륜종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황산사는 경순왕영전을 모신 경천묘 아래에 있지만 예전에는 도로에서 약 1km 떨어진 마애불상이 새겨진 미륵봉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황산사는 신라 신라 말 경순왕(927년-935년)때 서웅대사와 학수대사라는 분이 미륵산 기슭에 세운 절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폐사된 채 있던 것을 근래에 중창되었다. (대웅전법당) 신비한 돌할매 돌할배라는 이 돌이 궁금하여 찾는데 마침 밭에서 일하던 아낙네가 있어 믈어보았더니 이 절의 공양주라면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법당앞 편편한 바위 위에 돌맹이 두개를 올려 놓은 이돌이 돌할매돌할배라고 한다. 농삼아 이곳에도 보시 해야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보시는 기본>이라고 한다. ...??? (돌할매 돌할배) 지금은 이 절터에는 유일하게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2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도 경내에 흐트러진 탑재석(塔材石)들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인데, 기단(基壇)은 없어지고 3층의 탑신부만 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탑신은 양우주(兩隅柱)를 표현하였고 이 탑신 위에 두꺼운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는데 옥개석받침은 3단이다. 낙수면(落水面)이 급경사를 이루고 탑신받침이 약화되었으며 옥개석에 비해서 탑신이 세장(細長)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황산사 절터에서 마애불로 올라가다보면 등산로 옆으로 돌 울타리 안에 부도 2기가 자리하고 있다. 부도에 암각된 글을 보면 학서당(鶴西堂)과 서응당(西應堂)이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이곳에 옛 황산사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학서당부도) (서응당부도) @문화유적총람자료에 의하면 황산사 안에는 고려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석탑1기와 석등대석인 연화대와 팔각 간석편 2석이 있다. 황산사지는 고려시대 절터이고 석등부재도 고려시대의 조성품이다. 1970년 3월에 시작된 중건공사 도중에 <天下一松村因幡守(천하일번송인번수)> 라는 銘(명)이 있는 有柄鏡(유병경) 1점과 1971년에 소형 활석불상(滑石佛像) 5좌가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는 동불상(銅佛像) 1좌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천묘> 절안마을에서 미륵산 쪽으로 차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면 경순왕 경천묘가 나온다. 경천묘 앞은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강원도청 홈피>에 의하면 「귀래면의 귀래(歸來)는 귀한 사람이 오셨다는 뜻으로 원주시에서 경천묘를 복원 할 때 귀래면 지명의 뜻에 따라 이곳을 복원하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재위 927~935)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다. 2008년 3월 발족한 원주시 향토유적보호위원회가 원주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였다. 경순왕은 신라를 태조 왕건에게 넘기고, 원주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으로 들어가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 그때 한 화승이 그린 경순왕의 영정을 고자암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이 영정각의 시초였고, 영조13년에 이르러 경천묘라 이름 붙였다 한다. 원주시는 18세기 말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경순왕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제작하고, 경천묘를 복원시켰다.」 원 경천묘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에 있다. 기록으로는 경순왕은 고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와 결혼 한 후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평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이기록으로 유추한다면 경순왕이 미륵산에 머문 때는 아마도 낙랑공주와 결혼 전이 아닌가 사료된다. (마애불로 올라가는 계단) 3층 석탑을 지나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미륵불이 보인다. 마애불은 미륵산 정상(689m)으로 부터 15.6m 절벽 아래에 동쪽을 향해 있으며 절벽 암벽에 조성해 놓은 불상이다. 높이는 48척이다. 미륵산은 통일신라 말기에 경순왕이 이곳에 들렀다고 해서 <대왕산> 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경천묘 화장실에 걸려 있는 마애불사진인데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 미륵산 마애불은 고려초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마애불의 대명사로 꼽히는 서산 마애불과 비교하면 서산 마애불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반면 고려의 마애석불은 대체로 냉랭한 표정에 기형적으로 거대화한 신체 세부를 통해 정신적인 위압감을 주는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원주 미륵산 마애불 역시 그 규모가 만만치 않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국보 제215호로 지정된 북한산 구기리 승가사(僧迦寺)에 있는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다. 승가사 마애불은 그런대로 평지에 있다면 미륵산 마애불은 가파른 암벽에 새겨진 것이 경이롭다. @미륵산 마애불(磨崖佛)은 네모진 얼굴에 눈, 코, 입, 귀와 어깨까지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옆 동네 아저씨처럼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얼굴이다. 얼굴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법의와 몸체가 흐릿하게 선만 남아 있다. 커다란 눈·코·입·귀과, 낮은 육계(肉?)에 소발(素髮)머리,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등을 얕게 부조(浮彫)한 점, 머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네모진 체구(體軀), 희미하지만 팔이나 손의 형태 등은 토속적이며 도식화(圖式化)된 면이 고려석불(高麗石佛)의 지방화(地方化)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미륵불과 그에 얽힌 전설 원주, 충주 등 이 지역은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왕자와 공주들과 얽힌 마애불에 관한 전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충주 미륵대원지와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의 전설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을 만들자, 마의태자는 북향의 석굴(미륵대원지)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산 미륵불에는 이와 비슷한 전설도 전한다. 경순왕의 공주가 아버지를 위해 부왕의 초상을 이 산 정상 석벽에 조각하고 나중에 경순왕이 직접 보았다고 전해진다. 미륵불의 튀어나온 코를 만지면 소원이 성취되고 자식을 갖게 된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는 몰라도 지금은 자식 갖기에 한(恨)맺힌 아낙네가 아니라면 높은 암벽이라 바라볼 수는 있어도 올라가 코를 만지기는 쉽지 않다. @사족으로 하나 더붙이자면 야사(野史)에 회자하는 낙랑공주와 마의태자가 바로 신라 경순왕의 자식들이다. 경순왕은 모두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김일(金鎰)과 김굉은 전 왕비의 소생이고 나머지 7명은 고려의 유화정책으로 결혼한 태조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의 소생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양위하는 것을 극구반대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한 장남 김일이 바로 마의태자이다. 마애불이 있는 암봉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마애불을 몇군데 봤지만 저렇게 코가 오똑한 마애불은 처음 친견합니다.. 저리 오똑한 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을까요..조상님들의 크신 원력이 다시 한번 느껴집니다..감사히 잘 봤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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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