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 불투명한 미래와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요즘 청년들은 '웃픈 자학'을 선택했다.
웃기지도 재밌지도 않은 이 자학을 통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헬조선' '망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요즘 청년들의 '웃픈 자학' 트렌드를 소개한다. 구성=뉴스큐레이션팀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위의 글은 지난 5월 출간돼 20~30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3개월 만에 1만부 팔린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다. '헬조선 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웃픈 자학'을 통해 불투명한 미래와 좌절을 달랜다. 청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최근에 이슈가 됐던 청년들의 자학 트렌드를 모아봤다.
서울 역삼동에서 여성 전용 피트니스 공간 ‘살롱드핏’을 운영하고 있는 트레이너 박지은(30)씨(왼).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에서 지난 9월부터 방영한 ‘하우투핏’은 여성에게 맞는 운동법을 가르쳐준다./출처=박지은,CJ E&M
유승옥·이연 등 피트니스 대회 '머슬 마니아' 수상자들이 요즘 TV에 자주 나온다. 인순이·낸시랭 등의 연예인들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 그야말로 근력(筋力)에 열광하는 시대다.
근력 운동을 하는 이 중에서도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20·30대 여성들이다. 몸에 근육이 생길까봐 근력 운동을 피했던 이들이다. 과거에 비해 육체노동이 줄었지만 근육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더 커졌다.
운동을 하는 이들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 마음대로 되는 건 결국 내 몸"이라고 한다. 일류대에 진학하거나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들어가기도 힘들고, 직장을 가진 뒤에도 원하는 삶을 살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에 비해 근육은 인간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이다.
근육은 근섬유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생긴다. 육체의 고통은 가장 뚜렷한 감각이다. 김종갑 교수는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 힘든 현대인들이 근육의 움직임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변희원 기자
“월급이 적을수록 업무량이 많다.”“일을 빨리 하는데 퇴근은 늦어진다.”페이스북에서 연재 중인 '사축(社畜)일기'의 한 대목이다. 아무리 소처럼 열심히 일해도 좀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한국의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사축', 회사에서 기르는 동물에 빗대 자조한다.
가축(家畜)이 아니라 사축(社畜)이다. 집이 아니라 회사에서 기르는 동물이란 뜻이다.
진짜 회사에서 사육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박봉, 지위 불안, 긴 노동 시간, 빡빡한 조직 문화 등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양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직장인들을 사축에 빗대는 것이다. 일본에서 먼저 쓴 말이다. 처음에는 가정이나 사생활도 없이 회사 일에 매진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러던 것이 직장인들이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을 표출할 때 사축에 빗대 자학하는 의미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사축이란 말이 알려진 것은 올해 4월쯤부터다. 일본에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사축동화'를 한국 네티즌들이 번역해 퍼나르기 시작했다. 사축동화는 기존의 동화 내용을 사축 코드에 맞춰 패러디한 것이다. 이를테면 사축동화의 '성냥팔이 소녀' 버전. "소녀는 성냥을 팔았습니다. 월급은 세전 130만원. 월 200시간이 넘는 수당 없는 추가 근무. 영하를 넘나드는 가혹한 노동 환경. 소녀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성냥을 피우자, 회사는 상품을 무단 사용한 소녀를 고소했습니다." /권승준 기자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자신이 속한 계층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수저론'이 떠오르고 있다. 수저로 출신 환경을 빗대는 표현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mouth·부유한 가정 출신이다)는 영어 숙어에서 비롯됐다.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흙 묻은 수저)다. SNS에서 떠도는 수저 기준표에 따르면 흙수저는 대학 입학 후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부모 자산이 5000만원 이하인 경우. 흙수저의 조건을 생활 밀착형 '자학 코드'로 풀어낸 게 흙수저 빙고 게임이다.
취직·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의 '삼포 세대'가 자조 끝에 만들어냈다며 수저론을 무시할 건 아니다. 수저론은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가 아니라 흙수저를 한번 물면 그걸로는 영영 밥을 퍼먹기 어려운 상황을 원망하고 있다. 금·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걸음마를 떼자마자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사교육을 받은 뒤 명문대에 입학하고 어학연수까지 다녀온다.
금수저 중에서도 부모의 부나 지위를 이용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혜택까지 치자면, 입에 문 흙수저는 툭 치면 산산이 부서지는 모래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희원 기자,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