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완도출신 이사람]-완도 신지면 출신으로 연재만화 악동이 아홉살인생으로 유명한 이희재씨 만화인생

[쭌사마]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자택에서 만난 '영원한 악동이' 이희재 화백.

악동이와 아이코, 친구, 가족들.

악동이

80년대 어린이만화잡지 보물섬을 애독했던 '왕년의 만화광'이라면 '악동이'를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사악한 사고뭉치면서 때때로 여리고 가냘픈 영혼이기도 했던 작은 소년. 악동이지만 결코 악하지 않은 이 캐릭터가 올해로 딱 탄생 25주년이다. 더욱 반가운 건 '악동이'가 80년대 고전으로만 남지 않고 새 버전의 어린이만화로 거듭나 여전히 팔팔하게 사고치고 다닌다는 점이다. 2005~2007년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서 '아이코 악동이'가 연재됐고, 최근엔 세 권짜리 단행본(보리출판사)으로 묶여 출간되는 등 생명력을 뻗쳐가고 있다.

이 독특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이희재(56) 화백은 리얼리즘 만화로 유명한 한국 만화계의 거장이다. '어린이=동심'의 공식을 벗어나 어린이를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낸 이 화백을 만나 작품세계를 엿보았다. 만화 속 악동이 아빠의 취미처럼 옛날 물건들이 방 안 곳곳에 흩어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자택 작업실이었다.

먼저 "샘이 좀 나더라"는 말을 건넸다. 25년 전 '그 녀석'은 상당히 어둡고 밉살스러웠는데 2008년 어린 독자들은 더 밝아지고 낙천적인 모습의 악동이를 만나는 것 같아서였다. 이 화백은 "그 녀석도 눈치가 있어서 모양새, 언행이 바뀌었다"고 껄껄 웃었다. "80년대 어둡고 우울한 군부시대에 탄생한 악동이는 유쾌한 어린이 캐릭터여야 하는데 작가 자신이 우울한 그림자에 덮여 있으니 도리 없이 어두운 느낌을 줬나봐요. 이젠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된 거죠."

화백은 나이를 먹는데 여전히 초등 3~4학년인 악동이는 점점 더 리얼해지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내 안엔 악동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털어놓는다. "나랑 악동이는 정반대 성격이에요. 전남 완도 섬에서 태어났는데, 늘 주눅 들고 뒷자리에서 얘기 듣는 성격이어서 사고치고 싸우는 다이나믹한 성격이 부럽더라고. 인생에서 휘청휘청 지그재그 갈 때도 있어야 하는데 박진감이 없지. 그래서 악동이 옷을 입고 움직여보는 거예요."

민둥 머리에 머리카락 두 개 뿐인 악동이, 이희재 전매특허인 쭈글쭈글한 선이 어떻게 탄생했는 지도 궁금했다. "그때까지 민둥 머리가 만화 주인공이 된 적이 없더라고. 그리기도 쉽고(웃음). 쭈글쭈글한 선도 반듯한 것보다 개성있고 정감있게 느껴지지 않나요?"

'25주년'을 맞은 악동이 이야기는 청동거울 속에서 나온 친구 '아이코', 학교 친구, 동네 어른들과 함께 펼쳐지는 좌충우돌 소동을 다뤘다. 2008년 악동이의 중요한 특징은 시공간의 확장을 통해 다양한 모험을 펼친다는 데 있다. "황학동까지 흘러들어온 청동거울 속에서 아이코가 튀어나와 악동이와 둘이 듀엣을 이루면서 삼국유사 속 스님도 만나고, 미래에도 가고, 구름비행기도 타죠. 미래에서 온 고양이가 주인공인 일본만화 '도라에몽'처럼 오락적인 동시에 교육적인 만화를 우리도 가졌으면, 했죠. 도라에몽이 공상과학을 들여왔다면, 악동이는 인문학 전반의 신화, 전설을 품고 있어요."

악동이 얘길 들려주던 작가는 어느새 1천300년 전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조형미에 대한 열정적인 찬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인문학과 설화, 옛 유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렇게 깊었다. "갈수록 머리가 딸리니까 어떡하겠어요. 부족한 걸 독서와 자료로 메우고, 삼국유사·한국미술사 특강도 듣고 그래요. 어떨 땐 들은 게 되새김질되면서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해. 골동품 가게처럼 먼지 뒤집어 썼지만 빛나는 것, 잊혀진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한 세대 두 세대 거치며 삶의 족적, 손때 남은 것들은 투박해도 그리운 것들이거든. 그런 관점에서 불 탄 남대문은 600년 걸려 지은 거나 다름없는 거죠."




데뷔한 지 올해로 27년. 어린이 만화를 그리건 성인용 만화를 그리건 그는 우리가 딛고 선 땅과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리얼리즘 만화를 고집해왔다. 도시 서민들의 고단한 삶, 그 맨살을 그린 만화 '간판스타'를 비롯해 '저 하늘에도 슬픔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나 어릴 적에'(2000년 대한민국 만화문화상 수상작)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좋은 만화는 뭘까. "울림의 덩어리를 가슴 안에 던져주는 만화, 그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어떤 것보다 큰 교육이기도 하죠." 그러면서 일본 만화가 판치는 TV만화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드라마는 수십 편씩 만들면서 애니에 대해서는 '일본 것 갖다 쓰면 된다'는 식으로 꾀를 부리면서 완전히 태도를 달리 하니 문제예요. 아줌마들만 중요하나요? 아줌마들의 애기들도 중요하지. 아이들에게 가장 와닿는 만화를 우리 정서로 그려줘야 해요."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는 한·불 작가 만화집 '아미띠에'와 '간판스타'에 멋진 사인을 '그려줬다'. 붓펜을 쥐고 각각 주인공 그림을 커다랗게 그리는 모습에는 인터뷰 때의 소탈함과 달리 카리스마가 배어있었다.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가보면 사람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접이의자'에 앉아 반나절씩 기다려요. 자신의 만화책을 사들고 온 사람들에게 물감으로 색칠까지 해서 최선을 다해 그려주는 모습, 이야기 주고 받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요즘엔 나도 일부러 천천히 사인을 해요." 사람과 인연을 귀하게 바라볼 줄 아는 여유. 작가 이희재가 사람들을 울고 웃기는 힘은 여기서 나오지 않았나 싶었다.

임깁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