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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소원
삼상 20:1-11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8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9 요나단이 이르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10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아버지께서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알리겠느냐 하더라
11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삼상 20:1-11 / [다윗을 탈출시키는 요나단] 다윗은 라마에 있는 예언자의 집에서 탈출하여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내가 임금님께 무엇을 잘못하였느냐? 그분이 계속 나를 죽이려고 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이냐?' 2)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아버지께서 자네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언제나 내게 먼저 알려 주신다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일만을 내게 숨기시겠나.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내 말만 믿게.' 3)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반대 의견을 말하였다. `자네가 내게 각별히 대하는 것을 임금님께서도 잘 알고 계셔. 그래서 이 일을 자네가 알게 되면 마음 상할까봐 일부러 알리시지 않은 것이네. 그러나 살아 계신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지만 나의 한 발은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 있네.' 4) 요나단이 다윗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가 자네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말해 보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네' 5) 다윗이 요나단에게 대답하였다. `내일은 초하루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가는 임금님의 식탁에 나가야만 하네. 그러니 나를 성밖으로 내보내 주게. 그러면 내가 모레 저녁까지 들녘에 숨어 있겠네. 6) 만일 임금님께서 나를 찾으시면 `다윗이 고향 베들레헴에서 온 집안을 위하여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되었기 때문에 급히 가봐야 되겠다고 휴가를 요구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해 주게나. 7) 그때에 만일 임금님께서 `잘했어!'라고 말씀하시면 내게 아무 위험도 없다는 표시로 알게. 그러나 만일 임금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면 그분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하신 것으로 알게. 8) 부디 나의 간청을 들어주게.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맺은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나의 간청을 꼭 들어주기 바라네. 그러나 만일 내게 무슨 죄가 있다면, 차라리 자네가 나를 죽이게. 나를 꼭 자네 아버지의 손에 넘겨야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9)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자네에게 죽을 죄가 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만일 나의 부친께서 자네의 생명을 해치려고 결심한 줄을 내가 눈치 채기만 하면 그것을 즉각 알려 주겠네' 10)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물었다. `임금님께서 화를 내시거나 나를 죽여버리라고 명령하시면, 감히 누가 그 소식을 내게 전해 주겠나?' 11) 여기서 요나단이 제안하기를 `우리가 들녘으로 나아가 이야기하자' 하고 다윗을 데리고 나갔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이런 때에 오히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더 깊어집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1-3) 아내인 미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다윗은 사무엘이 있던 라마 나욧을 거쳐 요나단을 만납니다. 요나단을 만난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죄악과 죄는 같은 의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의 단어입니다(1). 죄악의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온’이고, 죄는 ‘핫타아’ 입니다. 아온은 사회적인 부정이나 불법적인 경우에 쓰이는 단어이고, 핫타아는 사람에게도 쓰이지만 주로 종교적인 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인 사울 왕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는 결코 다윗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매우 긴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는 말이 다윗의 절박한 마음을 대변합니다.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4-11) 다윗의 계획은 먼저 사울 왕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순간적인 감정인 것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감정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마음을 알아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왕과 가까운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 외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우정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요나단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요나단이 참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사울 왕에게 설득을 당하거나 협박에 못 이겨 자신과 맺었던 맹세를 저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에는 다윗에게도 더 이상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왕권을 놓고 싸워야 할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친구로 보았습니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다윗은 훗날 요나단의 아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두었습니다.
적 용 :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참된 사랑과 우정을 가지는 영적 비결은 무엇일까요?
나와 함께하는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서로 한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한 몸으로 맺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몸과 같이 여기며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어려운 지체를 외면하고 돕지 않는다면 진정한 한 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0: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 당시 다윗은 자신을 잡으러 라마 나욧까지 온 사울의 사자들 및 사울이 하나님의 신의 불가항력적 임재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때(19:20-24), 그 때를 호기(好機)로 삼아 그곳에서 도망할 수 있었다(Smith, Keil). 와서 - 이것은 다윗이 당시 사무엘의 선지학교가 있던 라마 나욧(19:18)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궁성(宮城)이 있던 기브아로 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그때 사울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해 있는데도 기브아로 돌아온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친구 요나단에게 사울이 자신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2) 그럼으로써 요나단의 도움을 요청하고, 향후의 신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4절). 죄악...죄가 무엇이관대 - 다윗의 이 질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역설적 질문으로서, 곧 자신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의 '죄악'(* , 아온)과 '죄'(* , 핫타트)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인데, 다윗은 이같은 동의어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강력히 호소한다. 내 생명을 찾느뇨 - '내 목숨을 노리는가'란 뜻이다(공동 번역). 특별히 여기서 '찾다'(* , 바카쉬)란 불을 켜고 샅샅이 수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출 4:19).
=====20:2
부친이...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 이 말은 (1) 왕과 왕세자로서 사울과 요나단이 특별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2) 아울러 당시 요나단은 사울의 모든 정책 결정에 깊이 참여할 만큼 중요한 직위에 올라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그런데 요나단의 이같은 말은, 그가 이때 사울이 다윗을 몇 차례 죽이려 했던 것을 다만 일시적 광기(狂氣)의 결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Keil). 따라서 요나단은 자신의 힘으로 다윗을 그러한 부친의 광기적 살인 시도로부터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다윗을 안심시키려 했던 것이다.
=====20:3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 문자적으로는 '내가 너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 줄을'이란 뜻이다. 결국 이것은 왕자 요나단이 목동 다윗을 깊이 사랑하고,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8:1; 19:1).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 반드시 자신에게 알릴 것이라는 요나단의 호언 장담(2절)에 대한 다윗의 반론이다. 즉 사울은, 만일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요나단이 알면 다윗과 두터운 우정 관계에 있는 요나단이 (1) 다윗이 살해되는 것을 매우 슬퍼할 것이며, (2) 따라서 틀림없이 다윗에게 그 음모를 누설할 것을 예측하고, 그러한 사실만은 요나단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 즉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음모를 아들 요나단에게 알릴 경우 그에 관한 비밀이 누설될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므로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결코 그에 관해서는 요나단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 - 이 말은 요나단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사울의 음모에 의해, 다윗 자신의 생명이 마치 사망의 문턱에 도달한 듯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즉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20:4
네 마음의 소원...이루리라 - 본절은 요나단(2절)이 다윗의 논리(3절)에 설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처해있는 긴박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처럼 친구 요나단으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20:5
월삭(* , 호데쉬) - 매월 첫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상번제 외에 속죄제를 드려 지난 한달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새 마음을 다지는 등의 종교적 행사와 아울러 민간 축제가 거행되었다(민 10:10; 28:11-1; 스 3:5; 느 10:33; 느 10:33; 사 1:13). 레위기 서론의 '히브리 절기와 축제'를 참조하라. 내가 마당히 왕을 모시고...식사를 하여야 - 월삭(月朔) 때의 식사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함께 모여 공동 식사를 했던 것 같다(Smith, Fay). 따라서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으므로(18:27).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하여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제 삼 일 저녁까지...숨게 하고 -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같이 요청한 까닭은 관례상 월삭 잔치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므로(27, 34절). 이에 따라 '제 삼일'에야 요나단이 자신에게 사울의 반응(30, 31, 33절)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에 - 문자적으로는 '그 들에'이다. 이처럼 여기에 정관사 '그'가 붙었다는 사실은 여기의 '들'이 다윗이 이미 먼저 번에 숨었던 궁전 근처의 '들'이었음을 시사해 준다(19:2, 3).
=====20:6,7
여기서 다윗은, 왕의 식탁에 불참한 후 요나단을 통해 사울에게 전달될 변명에 대해 나타날 사울의 반응을 통하여, 사울이 자신을 향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온 가족을 위하여 - 여기의 '가족'(* , 미쉬파하)은 (1) 이새가 속한 유다 지파(Smith), (2) 이새의 가족(Klein) 등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첫째, 왕정(王政) 하에서 한 지파 전체가 왕의 허락없이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둘째,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 전체가 모이기에는 너무 협소하며 셋째, '매년제'(每年祭)는 소가족 단위로 드려진 제사(1:3)였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 이는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지역적으로 드려진 가닭은 실로의 중앙 성소가 파괴된 후(4:10) 새로운 중앙 성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제단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소가족 단위로 각종 제사가 드려질 수 있었다(Keil, Gerlach). 매년제를 드릴때가 됨이니이다 '매년제'(a yearly sacrifice)는 가족 단위로 매년 1차씩 드려지던 제사를 가리킨다(1:3 주석 참조).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는 매년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를 맞이하여 세 차례씩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출 23:14-17; 34:24). 따라서 매년 1차씩만 드리는 여기의 '매년제'는 일종의 편의주의적 편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의 '드릴 때'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출 23:14-16). 즉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절기 중 자신들에게 편한대로 한 절기를 택하여 '매년제'를 드렸던 것같다. 아무튼 이처럼 이 제사는 율법에서 엄중히 명령되는 만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 베푼 월삭 잔치에 불참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때 베들레헴에서 이 매년 제사가 그의 가족에 의해 드려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좋다 하면...노하면 - 요나단을 통해 전달될 다윗의 처사(6절)에 대하여 만일 사울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그가 다윗을 기뻐한다는 증거요, 만일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여전히 증오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사울의 마음을 알기를 원했는데,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신을 접한 이후(19:23, 24)처음 그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다윗은 향후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20:8
그런즉 - 7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주는 상관 접속사이다. 따라서 본 접속사에 뒤따르는 내용은 7절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 이 말은, 다윗이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단의 보고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를 가상해서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다. 사실 사울이 죽이려 할 경우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인자히'(* , 헤세드)는 원래 명사로서 언약적 관계에 따라 베풀어지는 특별한 사랑 및 은총을 가리킨다. 네가...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 다윗이 요나단에게 담대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요나단의 주관하에 맺어진 신실한 언약 때문이었다(18:3, 4). 다윗이 이처럼 단순한 우정이 아닌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해서 도움을 호소한 까닭은 (1) 단순한 우정 관계는 부자(父子)관계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2) 여호와 앞에서 그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죄악이 있거든...친히 나를 죽이라 -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요나단이 부친 사울의 뜻과는 달리 자신을 돕는 일이 하등에 거리낌 없는 옳은 행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20:9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네게로부터 멀리 있다'란 의미를 갖는 감탄문이다. 즉 이것은 (1) 다윗에게 결코 죄가 없다는 의미(Lange, Klein), (2) 다윗에게 결코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Smith)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원문상 본 문구 다음에 나오는 문구가 '왜냐하면'의 의미를 갖는 '키'(* )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즉 요나단은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인다든지, 또는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간다든지 하는 불행한 일이 결코 다윗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Keil).
=====20:10
네 부친이 혹 엄하게...대답하면 - 여기의 '대답하면'은 요나단이 다윗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또한 다윗에 관한 사울의 음모를 알아내려고 사울에게 질문했을 경우 사울이 요나단에게 보일 전반적인 반응을 가리킨다. 따라서 '엄하게...대답하면'은 다윗의 행동(6절)에 대해 사울이 격노하고, 아울러 사울이 자신의 음모가 다윗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 이것은 사울로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요나단이 입수했다고 해도, 사울의 방해.협박 때문에 요나단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20:11
본절에서 요나단과 다윗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신호를 만들기 위해 들로 나갔다. 들 - 문자적으로는 '그 들'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궁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킨다(5절; 19:3)=====20: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러한 신(神) 명칭은 서원이나 맹세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 여기서 요나단은 자신의 맹세의 신실성을 확증키 위해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언급된다(2:30; 25:32, 34; 삼하 7:27; 왕상 1:30, 48). 증거하시거니와 -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의미를 강화키 위한 번역자의 적절한 삽입구이다. 내일이나 모레 - 월삭(月朔) 잔치가 벌어지는 이틀 동안을 가리킨다 <5절>. 내 부친을 살펴서 - 이것은 다윗이 매년제에 참석하러 베들레헴에 갔다는 얘기를 사울에게 하고, 또 그 얘기를 들은 사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6, 7절). 보내어 - 이것은 요나단이 직접 전달하지 아니하고, 사자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부친 사울의 의향이 선하게 나타날 경우 요나단이 사자를 보내겠다고 한 까닭은, 그러한 경우에는 분명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일것이므로 사자를 보내도 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 설 교 >
생명 같은 사랑
사무엘상 20:1-23절 / 이용호목사
다윗은 라마나욧을 떠났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선지생도들과 사무엘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나이 많은 사무엘이 계속 자기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난 후 자신을 정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 악신이 든 상태에서 일종의 정신병적 발작인지, 아니면 사울의 마음중심에 자기를 죽이려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삼권을 거머쥔 왕이 죽이려 하니 신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장인이 사위를 죽이려하니 어디 가서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마음이 변함이 없다면 가정과 직분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외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하는지,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는지, 떠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인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요나단을 찾았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월삭 즉 초하룻날부터 셋째 날까지 왕이 측근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다윗이 요나단의 허락을 받고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매년 드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러 갔다고 말할 때 사울이 노하면 죽이기로 작정한 것으로 알고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5~7절).
요나단은 정의로운 사람이요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1. 요나단은 다윗을 피 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신과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우정은 혈연을 뛰어넘었습니다. 아니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우정이 피보다 더 진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정말 그 이름 그대로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요나단은 다윗이 결단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절에 보면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이 너와 나의 관계를 알고 너에게는 속마음을 알리지 않는다고 하였고(3절), 이에 요나단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확실히 알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9,12,13절)
요나단이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다윗 편을 들겠다는 뜻입니다.
핏줄의 인연을 끊고서라도 우정을 택하겠다는 요나단의 결연한 사랑고백입니다.
우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슬픈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호동(好童)은 고구려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왕자입니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낙랑공주는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의 딸로서 그 당시 한나라에까지 소문 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공주였습니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호동왕자가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가 호동을 알아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호동왕자를 자신의 사위 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공주를 본 호동은 낙랑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 뒤, 호동왕자는 고구려에 돌아와 대무신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대무신왕은 공주를 이용해 낙랑을 정복하라고 하였습니다. 호동은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고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을 몰래 찢어버리시오. 그리하면 낙랑을 정복한 다음 당신 아버지를 태수로 봉하여 계속 낙랑을 다스리도록 약속하겠소.” 그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호동왕자는 공주로부터 약속을 받고 그 시간에 낙랑을 공격했습니다. 낙랑왕은 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북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범인이 딸이라는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낙랑공주를 잊지 못하고 슬픔에 젖어 있던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에게 문후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원비는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호동이 반역을 꾸민다고 상신하여 결국 원비의 계략에 빠져 왕은 호동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호동은 낙랑의 묘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국도 부모도 버린 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이보다 더욱 고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후에 길보아 산 전투에서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애통하며 지은 조시에 기록한 그대로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남녀 간의 애정보다, 피를 나눈 형제간의 사랑보다 더욱 기이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친구 사이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 가슴 뭉클한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권력자 아버지보다 다윗을 더 위했고, 왕의 권세를 가진 아버지보다 도망자가 되어 칼을 피해 다녀야만 하는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 되기보다 다윗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요나단과 같은 사랑이 있어, 내 이웃에게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2. 요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4절에 보면“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성결한 인품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열정에 반하여 다윗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마음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런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012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 재미한국학교협의회가“청소년 한글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미국, 캐나다, 남미의 지역 예선에서 뽑혀온 300 여명의 한국인 2세 젊은이들이 참가했습니다. 6명이 최종 결선에 올랐는데, 그 중에 2등으로 뽑힌 고등학생은 놀랍게도 백인여자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엘리사 도노반>이라는 여학생이었습니다. “나의 꿈 말하기”에서 한인 2세가 아닌 미국 여학생이 그렇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게 된 이유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한민아>라는 한국 이름을 본인이 직접 지었다는 그 여학생은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인 남자 친구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는데 대화가 중요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가르쳐주거나 누구한테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힘이 들고 어려웠지만 스스로 배운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의 마음에 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겠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마음뿐이지 상대의 소원을 다 이루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온 인류의 절실한 소원이요, 죄인들의 소원을 이루신 분이 있습니다.
사형수의 소원은 좋은 옷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도 아닌 형을 면죄 받고 풀려나는 것입니다. 말기 암환자의 소원은 큰집이나 권력이 아니라 생명연장일 것입니다. 죄에 빠져 멸망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소원이 무엇 이어야합니까?
오직 구원이요, 오직 생명일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유일한 분입니다.
요 14:14절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당신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최상급 사랑하셔야만 합니다.
3. 요나단은 자기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17절에 보면“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우정을 굳게 맹세하였고, 그들의 사랑이 자손 대대로 이어지길 바라며 영원한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유다지파와 함께 남 유다에 남아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한 것 보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이 더 숭고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말씀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닮았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딸과 결혼하기 원한다면 7년간 머슴으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야곱은 칠년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랑하였기에 7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드디어 결혼 첫날밤을 지내고 눈을 떠 보니 옆에 누운 여인이 사랑하던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라반에게 속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따지는 야곱에게 라반은 그 지방 풍습이 언니 보다 동생을 먼저 보낼 수 없기에 레아를 들여보냈다고 하면서 라헬을 위해 7년 더 일하면 라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7년간 섬겼습니다. 사랑하니 세월 지나가는 것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힘들어도, 사기를 당해도 라반의 집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랑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야곱은 끝까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요즘 이런 사랑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힘든 세상에서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고 살아갑니다. 사랑은 우주 최고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입으로 고백만 해도 웬만한 영양제보다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김재엽 교수팀은 지난해 노인 남성을 대상으로 7주간 배우자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표현을 매일 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매일 이 말을 반복한 그룹은 혈액 내 산화성 스트레스지수가 50% 감소하고, 항산화 능력지수는 30% 증가했습니다. 또 우울증이 개선되고 심장 박동도 안정화됐습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만으로도 암·고혈압·당뇨병·파킨슨씨병 등의 발생 위험이 낮아지고 노화 속도도 늦춰질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재엽 교수는 사람이 사랑을 하면 심장병·고혈압·당뇨병 등에도 덜 걸리고 감기나 배탈 같은 가벼운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다 쏟아주셨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이 놀라운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주 최대의 러브 스토리이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며,
성경은 사랑의 편지이고,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또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三一性) 속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예수가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 예수가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들 마음에는 이런 사랑이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고 지속적으로 불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능력과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내안에 사랑이 불같이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힘들어도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집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을 통해 세상을 천국같이 만들어주는 힘이 나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정보력과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상이 더 나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식어가고,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은 줄어들었습니다. 요즘 설문조사를 해보면 사람들의 마음에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리 주변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마음과 삶이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안으로 부터 사랑운동이 일어나야하고, 우리 안에서부터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만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요 능력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이 시대 사랑결핍증에 걸려 신음하는 우리 이웃에게 요나단과 같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다.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삼상 20장 5~23절 / 박노열목사
◎ 서론
: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사울의 심중을 알아내기 위한 다윗과 요나단의 논의가 소개되고 있다.
1. 다윗이 월싹에 빠짐. (5~8)
2. 요나단의 약속. (9~17)
3. 사울의 의중을 알려줄 방안을 의논함. (18~23)
1. 다윗이 월싹에 빠짐. (5~8)
※ 다윗을 죽이려는 일련의 사태가 있었다. (삼상 19:1~24) 이 후에 처음으로 대면하는 월싹 잔치에 의도적 으로 빠짐으로써 사울의 의중을 확인하려했다.
※ 월싹은 매월 첫째날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는 절기로서 아마도 가족이나 친족단위로 함께 식사를 한 것 같다.
※ 다윗은 사위로서 이 자리에 참석해야 했으나 사울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 빠지겠다는 것이다.
※ 다윗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로 하나님께 매년제를 드리기 위하 것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냈다는 사실 에 주목하라.
* 이 사실을 요나단에게 부탁하고 있다.
※ 다윗의 절박한 호소에 할 수 잇는 일은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요나단은 이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 결국 미갈에 이어 요나단도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2. 요나단의 약속. (9~17)
※ 다윗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한 요나단은 만일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는 결심을 하였다면 반드시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 다윗은 혹시라도 요나단이 전해줄 수 없는 환경에 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하여 요나단에게 질문한다.
※ 요나단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직접 사울의 의중을 알아서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아울러 다윗을 편안히 가게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벌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맹세를 하였다.
※ 요나단은 다윗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한다.(14~15)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 다윗은 현실적인 문제로 요나단에게 인자를 베풀 것을 구하였다면 (8)
요나단은 미래의 일과 관련하여 다윗에게 인자를 베풀 것을 구하였다.
*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끊어버릴 것을 확신했다. 따라서 자신의 가문에 인자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 실제로 다윗은 후에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자를 베풀었다. 오늘의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이리라. (삼하 9:6~8; 21:7)
3. 사울의 의중을 알려줄 방안을 의논함. (18~23)
※ 요나단은 사울의 의중을 파악한 후에 다윗에게 알려줄 방법에 대해 말한다.
※ 요나단은 다윗에게 직접적으로 사울의 의중을 알려줄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이런 방법을 생각했을 수 있다.
※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 여기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경우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할것이니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시는 것 이니 너는 네 길을 가라고 한다.
* 요나단이 다윗이 어떤 길을 가든 그것은 형편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요나단은 서로간의 언약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강조하고 그 불변성을 확신한다.
사람의 마음
삼상 20:1–11 / 장석환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1. 요나단의 마음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러 갔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삼상 20: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을 찾아왔을 때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무아지경에서 예언함으로 잡히지 않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시 도망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있는 기브아에서 멀리 도망간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있는 기브아로 갔습니다. 왜 도망자가 오히려 더 가까이 갔을까요?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마음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는지 묻기 위해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요나단이 대답하였습니다.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삼상 20:2)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결코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이 죄가 없다고 확인하고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사울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삼상 20:3)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주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하고 요나단이 살아 있음이 분명한 것처럼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어 자신이 지금 죽음 직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경험하였으니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의견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해 다윗이 강하게 확신한다고 말하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삼상 20:4)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지금 위험을 느끼고 있으니 자신이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물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알기 위해 요나단을 만났습니다. 사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에 요나단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지 않고 바로 도망자가 되었다면 요나단은 다윗을 오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대화를 통해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고 진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것이 이후에 서로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2. 사울의 마음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사울의 마음이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까지 몇 번을 죽이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도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누군가 나를 향하여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확정하기 보다는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단정하지 않고 위험을 부릅쓰고 또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삼상 20:5)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라고 말합니다. 월삭에 해당하는 초하루에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오늘날 시간 개념으로 하면 해가 지면 다음 날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날 저녁일 것입니다.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둘째 날이 아니라 셋째 날까지 숨는 이유는 아마 날짜 상으로의 초하루날에 초승달이 뜨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날에 초승달이 뜨지 않으면 잔치를 하루 더 연장하여 다음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마치고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혹시 셋째 날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초승달이 뜰지 뜨지 않을지 애매함은 사람의 애매한 마음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삼상 20:9)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뜻을 살펴 그것을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다윗의 뜻을 따라 사울의 뜻을 살피고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이후 다윗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나단에게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전에 사울을 설득하였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 앞에서 맹세까지 하였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단이 사울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배려하여 요나단이 사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요나단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부정적인 마음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다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것도 한 마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모릅니다. 스스로도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100%는 아니어도 주로 어떤 마음인지는 알아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단정지을 때는 다윗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생각하고 멋대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아픔들이 마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다행히 다윗은 요나단의 신뢰의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커다란 수확입니다. 사울의 마음에 대해서도 이제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것 또한 다윗이 신중을 기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의견이 다른 요나단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좋은 관계 가운데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선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요나단을 찾아간 다윗
삼상 20:1-11 / agaape
묵상하기
1, 다윗은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나와서 누구를 찾아 갔으며 무엇을 호소 했습니까?
2. 요나단은 다윗을 어떻게 위로했으며, 다윗의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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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중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다윗(1-3)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라마 나욧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거듭되는 위험속에서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라마 나욧을 빠져나와서 친구 요나단을 찾아 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괴로움을 털어 놓았습니다. 1b절에 “ 내가 자네의 아버지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이 이토록 나의 목숨을 노리시나?” 2절에 요나단은 아버지가 무슨 일이든지 자기와 상의를 하시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3절에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생명과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의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2. 다윗을 위로하는 요나단(4-11)
4절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의 소원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나단에게 마음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5-8절에 그것은 다윗을 사흘 숨겨준 후에 부친의 반응을 살펴서 자기를 해치려는 것인지 아닞니 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1절에 그 결과를 알려 주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윗을 데리고 들로 나갔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위기를 만나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적용
참된 친구는 누구이며, 참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참된 친구는 비밀이 없고 서로에 대해 신뢰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다윗처럼 친구를 찾아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참된 친구는 비밀이 없고 서로에 대해 신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울때는 친구를 찾아가게 됩니다. 사울의 속내를 알아낼 방책을 알려주며 사울의 손에 죽지 않도록 ‘인자’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삼상 18:3,4)을 충실하게 지켜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다윗처럼 괴로움을 털어 놓을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음. 참 사랑이란 아김없이 내어 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또 친구의 소원이 무엇인지 들어주고 위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들어주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몸에 쓸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실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약2:15,16절에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입으로만 따뜻하게 하라, 배불리 하라고 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한 요나단은 다윗을 돕기로 맹세합니다. 요나단처럼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과 충정은 원인 모를 오해와 배척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다윗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큰 위안이고 인자였습니다. 참 사랑이란 아낌없이 내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자존심이 깊어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솔질하게 털어놓고 서로 격려하며 우정을 키워나가기를 소원합니다.
시련이 주는 선물
삼상 20:1-11
어? 나만 힘든가? 싶을 때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왔을까?' 원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죠. 성경 속 인물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힘겨운 시간을 통과해야 했는데요. 오늘은 시련이라는 불청객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눠보려 합니다. 특히 다윗의 경험을 통해 시련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을 살펴보겠습니다.도서 및 문학
시련, 그 불청객은 왜 찾아올까?
사실 성경은 시련이 오는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연단을 위해, 때로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계획 속에서 시련이 허락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농부가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를 치듯,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우리 안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더 순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시련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겸손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왕의 사위에서 도망자로: 다윗의 절박함 (삼상 20:1-11)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는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이자 왕의 사위였지만, 사울 왕의 극심한 질투와 위협으로 인해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사무엘상 20장 1절에서 다윗은 친구 요나단을 찾아가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삼상 20:1). 그의 말 속에는 극심한 두려움과 억울함, 그리고 절망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한때는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죠. 3절에서는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라고 말하며 생명의 위협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토로합니다. 이처럼 극심한 시련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의 화려했던 과거와 비참한 현실의 간극은 그를 더욱 깊은 고독과 불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어둠 속 한 줄기 빛: 친구 그리고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은 친구 요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다윗을 돕기로 약속하며, 그의 도피를 돕습니다 (삼상 20:4-1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을 통해, 때로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다윗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시련의 유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련은 진정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어려운 시기에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요나단과의 우정은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둘째,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0x81><0xAC>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 속에서 수많은 시편을 쓰며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시련은 그의 믿음을 더욱 깊고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시련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연단되어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훗날 위대한 왕이 된 다윗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시련을 통과하며 얻은 지혜와 겸손, 그리고 백성을 이해하는 마음이 녹아있습니다.
혹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다윗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기억하십시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시간을 통해 당신을 더욱 빛나게 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길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