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군에서 비행기를 탑재하는 함, 즉 항공모함을 도입하기로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다이쇼(大正) 3년인 1914
년으로 이전인 1913년 10월에 수송함 와카미야(若宮)가 앙리 페르만식 수상기 3기를 탑재하고 함대연습에 참가했었는데
1914년 4월에 군령부장으로부터 비행기대 모함의 건조 혹은 5, 6천톤급의 기선을 도입 후 이를 개조하여 항모로 만들자
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해군장관과의 상의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문제와 시기가 맞지 않아 계속 연기되어서 결국 와카미야를 수상기 모
함으로준비하여 8월의 칭따오 전선에 출격시켰습니다. 그 후 비행기의 발달이 이루어진 1917년, 다시 기존함선에 비행기
를 싣는 훈련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귀환장치가 있는 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다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1918년이 되자 당시 정비가 진행되고 있던 전함들을 중심으로 88 함대계획의 보조부대로서 항공모함 4척을 2년 안에 건
조하기로 계획하여 먼저 함상비행장치를 갖춘 함의 건조가 진행되어 설계되어진 것이 바로 호쇼 였습니다. 해군이 요구
한 성능은 함상비행장치를 갖추고 함재기 36기, 속도 30노트 이상, 항속력 만리 이상 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개조항모인 <퓨리어스>와 <캄파니아>등이 있었는데, 일본해군은 건조단계부터 항공모함으로 계획하여
세계최초로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계획되어진 호쇼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항모건조의 경험이 전혀 없던 일본
으로서는 영국의 개조항모를 참조하여 건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산 관계상 배수량은 만톤으로 제한을 받았는데, 무엇보다 조기완공이 우선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적합하다
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제 1선에서 무난하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지게 되었다. 처음에 함재기는 모두 수상기로
예정되어 소형기는 함수 전방의 100분의 3도 정도로 각도를 가진 갑판에서 사출될 예정이었습니다.
1919년 12월 16일, 아사노 조선소에서 드디어 착공에 들어갔는데, 착공당시엔 특무함으로 분류되어 함명도 류히(竜飛)로
예정되었었지만 도중에 호쇼로 개명되었습니다. 항모운용 실적이 없던 일본해군은 당시 동맹국인 영국의 항모운용에 지
대한 관심을 가져 영국의 항모기술을 도입하려 했지만 영국해군의 기밀유출 엄금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내에서의 항모건조는 기술적인 곤란을 안게 되었는데 1921년에 기준이 완화되면서 영국은 이 해, 셈필 경
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기술단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 항모건조의 핵심인 항공모함 갑판의 건조기술을 지도했습니다. 동시
에 해군은 미츠비시를 통하여 초빙한 영국공군의 퇴역장교였던 프레드릭 래틀란드를 항공기 설계기사라는 명목으로 고
용하여 항모착함 기술을 일본측 조종사에게 전수했습니다.
이처럼 호쇼는 건조 및 운용에서 영국과 영국인들의 조력이 컸습니다. 그리하여 1921년 11월 13일에 진수식이 이뤄진 후
1922년 12월 27일에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완공된 호쇼의 취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호쇼는 건조초기에 직립식의 연돌 3개와 안정성 강화를 위해 당시 신기술이던 자이로 스타빌리저를 채용했습니다. 그리
고 전통형(全通形) 비행갑판으로 인해 8cm 고각포 2문은 갑판 내에 흡입식으로 갖추었으며 아일랜드 구조의 전투지휘소
도 만들어 우현에 함교와 연돌을 집중배치해 초기부터 근대적인 항모의 전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함체가 작았기 때문에 아일랜드식 함교와 연돌은 운용상에 장해가 되어 1924년에 개장시 연돌은 눕힌 형태로
고정되었으며 아일랜드는 철거되어 플라잉 덱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그 후 선체 각 부분의 보강을 통하여 항
공기 착함시에 사용하는 제동장치도 제동력이 낮아 갑판상 작업이 어려웠던 영국식에서 프랑스식의 횡책(横策)식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또 복원성의 유지를 위해 흡입식의 8cm 고각포를 철거하고 기관방식도 변경하는 등 여러가지 개수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원래 함형이 소형이었고, 아직 일본해군에선 함재기용 캐터펠트도 개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의 발발
후에 당시 최신예 함재기를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항공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복엽의 경량항공기에서 금속단엽의 대형기가 양산되면서 항공기의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량이 있는 항공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비행갑판이 필요했습니다.1936년에 함장으로 근무했
던 쿠사카 류노스케에 의하면 당시 호쇼에는 항공용 가솔린 탱크가 없어서 항공용 가솔린을 드럼통에 담아 함내에 보관
했기에 호쇼의 함내에서는 수병들의 담배나 성냥, 라이터의 소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호쇼는 1932년 2월에 상해사변에 출격했는데 이 때 탑재기가 일본의 항공기로서는 첫 격추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935년 9월에 훈련도중 조우한 태풍으로 인해 함수부의 비행갑판이 손상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수리를 마친 호쇼는 1937년 8월에 중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대륙으로 이동해 현지에서 활동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때 이미 구식화된 호쇼는 최전선에서 물러나 후방에서 운용되었는데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
시 96식 함상공격기 6기를 탑재해 호위 경계함으로서 전함과 행동을 함께 하는 미드웨이 섬 공략부대의 일원으로 편입되
었지만 교전은 없었습니다. 당시 대파되어 불타오르던 항모 히류의 사진은 호쇼의 함재기가 촬영한 것입니다.
그 후 신예기에 대응하기 위해 비행갑판과 엘리베이터를 확장하긴 했으나 이것은 외양항해에 지장을 초래하여 결국 호쇼
는 훈련용 항모로서 내해에서만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종전까지 살아남은 항모가 몇 척 있긴 했지만 개전시 일본해군에
존재했던 함정들 가운데 완전한 무탈한 모습으로 종전을 맞이한 것은 호쇼뿐 이었습니다.
전후 호쇼는 연장했던 비행갑판을 철거한 후 일본군 귀환병의 수송함으로 사용되어 1946년 8월까지 일본과 남방군도를
오가며 약 4만명의 장병과 민간인을 실어날랐습니다. 그 후 1946년 8월 31일부터 1947년 5월 1일에 오사카의 히타치조
선 사쿠라지마 공장에서 해체되어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사쿠라지마 공장은 마지막 항모인 카사기도 해체했었는데 최초
에 만들어진 항공모함과 최후의 항공모함이 같은 공장에서 해체된 것도 우연이 겹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제원 - 개장후 >
전장 : 179.5m
전폭 : 22.7m
높이 : 5.3m
기준배수량 : 7,470t
최대출력 : 30,000hp
최대속력 : 25kt
항속력 : 14kt로 10,000해리
무장 : 25mm 3연장기총 2기, 25mm 연장기총 2기
탑재기 수 : 상용 15기, 보조 6기
승원 : 550명
동형함 : 없음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B%B0%B1%EA%B3%BC:%EB%8C%80%EB%AC%B8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mirejet
첫댓글감합니다...
영국이 과연도움주면서 자신들의 적이됬을지를 미리 알았다면 재미있었겠군요 하
사실 영국해군과 일본해군의 직접 전투는 말레이해 전투가 유일한데다가 항모탑재기가 아닌 일식육공에 의한 공격이었기에 주던 안주던 영국해군에는 결과적으로 무리가 없긴 없었는데.......대신 미국이 좀 많이 얻어터졌죠 ㅎㅎ
개인적으로 전 아카키, 가가 중심으로 일본 함공모함 제일 좋아함...
뭐랄까 함공모함 치고는 참 독특한 갑판구조라서 ㅋㅋ 매력있음
아 그렇신군여 다음의 아카키 아님 카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