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1월 29일 주일 오전 예배 |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27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65편 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91편 1,2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편 4,5,6 성찬식 찬송 – 시 92편 6,7 (고정)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미 6:1-8; 마 5:1-12 본문 : 행 16:16-34 제목 : “종교 장사” |
종교 장사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만난 세 사람 중 두 번째 사람은 한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16절에 보면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퓌톤’ 혹은 ‘파이톤’은 아폴로가 델피 근처에서 죽인 엄청나게 큰 암컷 용으로, “점치는 귀신”을 지칭하게 된 말입니다. 아마도 이 여종은 이 파이톤에게 사로잡힌 사람, 신탁을 말하는 여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여자는 점을 치니까 “주인의 집에 크게 이하는 자”(16절), 즉 돈을 벌어다주는 돈줄이었습니다. 신탁이 있고 영험하니까 사람들이 찾아왔을테고, 그로 인한 수입이 쏠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일행들이 기도처를 향해 갈 때마다 이 여종이 나타나서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17절에 소리지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왜 귀신들린 여종이 이런 말을 외쳤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일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도 가다라 지역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하고 소리쳤고, 예수님은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명하셨고,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들어가서 몰살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흡사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귀신 들린 여종도 바울과 일행들을 알아보고 말합니다. “이들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들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다!”
종교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
오늘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통해서 두 가지 정도 생각할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바울이 이 여종에게 권능을 행했을 때의 주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요약하면 “종교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이 여종은 바울 일행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방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아마 이 여종의 외침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면, 바울은 이를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외침이 복음 사역에 유익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비록 그녀가 외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외침이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귀신들린 사람들이 나아와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쳐도 그대로 두시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바울도 비슷하게 이런 일을 합니다. 18절에 보니까 “이렇게 여러 날을 하니까 바울이 심히 괴로워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잘은 몰라도 숙고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왠만하면 참으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측컨대 참았던 이유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마도 더 유력한 이유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일어나게 될 이 다음의 사건(오늘 본문의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울은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19절, “종의 주인들에게 이익의 소망 또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여종을 통해 주인들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신탁을 받아 예언을 하고 사람들에게 길흉을 점쳐 주니까 돈을 많이 벌었었죠. 그런데 어디서 이방인들이 몰려와서 이상한 종교를 전하더니 갑자기 자기 돈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죠.
일상의 사람들에게 실제로 무엇이 중요한가?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여종의 사건과 같은 일은 소위 ‘종교적 일’입니다. 신탁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사업이 ‘종교 사업’이라고 할만 합니다. 이 여종의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여종으로 인해 큰 수입을 얻고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죠. 오늘날 우리로 치자면, 메인이 되는 방에 이 여종이 앉아 있고, 바깥쪽 방에 복채를 받는 직원이 있어서 “들어가세요” 하면 안으로 들어가서, 여종에게 신탁을 받고, 점을 치고 하는 일들이 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소위 말하자면 이 여종의 주인은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 우리는 합리적 돈벌이를 하고 있어”
이렇게 말할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아폴로 신의 대리인들이다.”
“우리 여종 아무개는 아폴로 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은 위대한 사람이다.”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쳐 주는 것은 그들의 삶의 아픔을 보고 액을 미리 피하고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종교 장사는 보통 이렇습니다. 무당이 굿을 해 주면서 복채를 안 받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무당이 굿을 해 주면서 “이것은 정말로 당신의 영적 생활을 위한 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공짜로 해 주는 일은 없습니다. 왜 절에서는 석가탄신일이나 신년이 되면 그렇게도 많은 한지 등불을 만들어서, 겨우 이름 몇 자 적어주고 수만원에서 수십만원을 받을까요? 종교가 정말로 사람의 운명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면, 왜 그냥 주지 않습니까? 왜 돈을 받고, 종교를 상품으로 해서 팔고, 사람들에게 종교적 조언을 주고 그로 인한 이득을 얻을까요? 왜 공짜로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한 번도 이런 일을 생각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참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가진 가장 커다란 차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쓸 때, 그 논제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82조 그들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교황은 사랑(가장 거룩한 것)과 그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해서 연옥에서 모든 영혼들을 해방하지 않는가? 이것은 도덕적으로 모든 이유들 가운데 최고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다는 아주 사소한 목적으로 인하여 가장 썩어지기 쉬운 것인 돈을 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루터 말은 아주 합리적입니다. 면죄부를 팔 때, 교황과 하수인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저기 연옥에서 당신들의 조상이 이토록 고통받고 있다!
당신이 동전을 땡그랑 하고 떨어뜨릴 때! 그 조상들이 연옥으로부터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하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루터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영혼이 걸린 중대한 문제면,
왜 그 직권을 갖고 있는 교황은 지금 즉시 그 영혼들을 다 사면하지 않는가?
왜 그토록 사소해보이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 같은 것을 위해서 돈을 받고 이 귀중한 일을 팔고 있는가?
84조에서도 말합니다.
84조. 또 이렇게 묻는다: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벗인 경건한 영혼을 돈을 지불하여 연옥으로부터 구하도록 허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경건한 영혼이 구원의 필요성과 사랑을 위하여 돈의 지불 없이 연옥에서 구원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녕 하나님과 교황의 새로운 유의 자비인가?
86조에서도 말합니다.
86조. 또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교황의 수입은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부자의 수입보다도 더 많은데 왜 교황은 가난한 신자들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 같은 성당 하나를 세우지 않는가?
이게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거든요.
왜 ‘종교적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면서, 왜 ‘사소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 다들 종교 장사를 할까요? 정말로 석가탄신일에 20만원짜리 연등을 사서 절 천장에다가 달면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면, 정말로 석가가 그토록 중생을 사랑한다면, 왜 그 20만원짜리 등을 팔지 않고 그 넝쿨째 복을 주지는 않는 걸까요?
그래서 여기,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중요한 기준이 가름됩니다. 사실은 목적이 ‘돈’인 것이죠. ‘종교’는 ‘돈’을 위한 수단일 뿐인 것입니다. 겉으로 고상한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 종교 장사에서는 핵심이 ‘돈’이고 ‘종교’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19절과 그 이하의 내용을 잘 보십시오.
이 여종의 주인들은 분명히 그 이전에도 바울과 일행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수입에 지장이 없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나빴을 수는 있겠죠. 좋아하지 않는 종교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다가, 어떤 때에 발칵 뒤집혔습니까? 자기 수입이 없어졌을 때입니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적 관념이 달라 발생하는 논쟁은 참을만 했지만,
그 논쟁이 시장으로 진입하는 순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진짜 적대감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습니다.
진짜 목적은 ‘돈’에 있습니다. 종교 장사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 목적이 ‘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자비와 온갖 복들을 자신들이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공짜로는 안 줍니다. 돈을 원합니다. 웃기는 일이잖아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줍니다. 돈을 내야 합니다.
종교가 중요하다고 해요. 그런데 종교가 침해 받을 때는 별반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들쑤시고 일어납니까? 이익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입니다! 이것이 종교 장사들의 정체입니다.
얼마 전에 목사님들을 만나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점의 해답을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속, 상가 건물에 예배당이 들어가면 상인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를 ‘교회 이미지가 나빠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교회가 들어갈려고 하니까 상인들이 이렇게 싫어하는 건, 교회가 너무 잘못한 게 많아서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해답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순진했던 겁니다. 사실은 상인들은 훨씬 더 기능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는데, 제가 몰랐던 겁니다. 답이 무언가 하면, 자기 상가가 들어 있는 건물에 스타벅스가 들어오거나 병원이 들어오면 상가 가치가 올라가는데, 교회가 들어오면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철저한 자본 논리지요! 교회가 감정적으로 좋고 나쁘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스타벅스가 입점하면 건물 가치가 몇 억에서 몇십 억씩 오른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렇지 않으니까, 교회는 들어와봤자 상가 가치만 떨어지니까,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종교 장사는 돈에 민감한 상인들과 궤를 같이 합니다.
숭고한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우리 여종 아무개는 아폴로 님의 신탁을 받아 위대한 가르침을 줘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들에게 “위대한 가르침”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제가 아까 95개조 논제를 말씀드렸지요? 그건 ‘교회가 이 종교 장사가 될 때의 모습’을 예를 들어 말씀들니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 교회들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들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숭고한 복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사실 저 장사꾼들과 똑같은 마인드는 아닙니까? 교인의 머릿수를 단순히 헌금의 액수와 병치시키지는 않습니까? 돈을 많이 모아서 더 커다란 건물을 짓는 것을 기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여기는 교회는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종교 장사’가 됩니다. 예배당 들어오지 말라고 시위하는 상인들과 마인드가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돈이 필요합니다. 왜요? 사람이 모이니까요. 기구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그냥 “유지를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교회라는 곳도 목사님 생활비도 드려야 하고, 교회 안에 가난한 이들도 돌봐야 하고, 성찬 빵과 포도주도 사야 하고, 교회 비품들도 구입해야 하고, 그래서 돈이 듭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교회의 성도가 된다는 건 그런 거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동참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합니다. 하나님을 자꾸 팔아요. 종교 장사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없습니다. 사람이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돈이 필요없습니다. 교회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필요하니까 돈을 모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자꾸 종교 장사를 하는 교회들이 많아집니다. 결국 연등을 팔아서 착복하는 스님들이나, 종이 쪼가리에 이상한 그림 하나 그려주고 수백만원을 받는 점쟁이들과, 교회가 동급이 되는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의 태도를 통하여, ‘종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가?
다음으로, “사람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사용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여종의 주인들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한다
로마인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이 사람들의 주장이 아주 묘한 것은, 그들이 ‘실제 화가난 것’과 여기 관원들에게 말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지만, 여종의 주인들은 왜 화가 났습니까? “이익의 소망이 끊어져서”입니다. 돈벌이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잘 참을 수 있었는데, 돈주머니가 비게 생기니까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런데 관원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이유를 듭니다. 설득 가능한 이유를 듭니다. 개인적이지 않아보이는 이유를 듭니다.
이 사람 때문에, 내 돈벌이 수단이 날아갔어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로마인인 우리가 받지 못할 풍속을 가르치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인간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사악함’을 다시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사익을 위하여’ 혹은 ‘내가 기분이 나빠서’ 어떤 때는 ‘말하기 곤란한 이유이지만 어쨌던 저 사람이 싫어서’ 나쁜 평판을 내거나, 비난을 하거나, 싸움을 하고 싶을 때, ‘매우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상대를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 돈벌이 수단이 날아갔어요!”는 너무 없어 보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커다란 해악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를까요? “나는 네가 싫어!” 이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저 사람은 이런 저런 점에서 신앙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신앙 고백적인 면에서 이것은 잘못되었어”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기분이 나쁜 것이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여기 이 여종의 주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도 자주 그렇게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낮아지고, 꺾이고, 숙이고, 포기하고, 용서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핍박을 겪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라고, 그렇게 배우지 않습니까? 좋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가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상대를 짓밟고 싶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더 고상해 보이는 이유’를 드는 것은 지극히 사악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세속적인, 여기 극도로 세속적인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바울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문맥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의 주인들이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모함했는데, 가만히 있습니다. 22절을 보니까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했습니다. 주석을 살펴보니까 이런 종류의 매질은 살살 몇 대 때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극심한 매질’입니다. 막대기나 몽둥이로 때린 형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아마도 바울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로 맞았을 것인데, 이는 “죄수들에게 극도의 치욕감을 주려는 고대의 징벌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33절에 보면 나중에 회심한 간수가 그들을 씻겼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약을 바르고 했을 것입니다. 심히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21절을 보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송사하는 이유를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3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옥에서 풀려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바울이 자기도 로마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할”이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바로 로마 사람입니다!
이상하지요! 왜 이 이야기를 맞기 전에 안 했을까요? 왜 이 이야기를 매를 맞고 감옥에까지 갇히고 난 이후에 할까요?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시비를 걸 때 “나는 날때부터 로마 시민권자다”라고 했으면 깜짝 놀라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전하는 복음에 해가 될까 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로마사람이요!”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더 부자, 더 지위높은 자, 더 사업에 성공한 자가 전하는 복음이 더 세련돼 보일까요? 그건 ‘번영신학’에서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로마 사람인 것을 말함으로 위기를 빠져나가면 그것이 복음에 해가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로마인으로서의 권위를 사용한다는 것은 빌립보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마인의 모습에 자동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복음을 전하면서, 어떻게 그 권위를 사용하여 위기를 빠저나가겠습니까? 한 주석의 내용입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온 인류의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사역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로마 시민권에 대한 바울의 침묵은......심사숙고 끝에 내린 선택을 반영한다. 바울이 필요에 따라 일부러 자신의 모든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 말을 합니다.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결국 우리가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이 여종들의 주인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와 정반대편에 서 있는 태도입니다.
1)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상한 이야기를 차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고상한 이야기들은 도구이고, 목적은 자신의 이익입니다.
2) 반면 바울은 ‘고상한 이야기인 복음을 위해’ 자신의 이익 따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상한 이야기인 복음이 목적이고, 자기의 이익은 포기될 수 있는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첫째 주제와 둘째 주제 모두를 관통하는 한 주제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인생은 본질적으로 배를 위한다”
는 것입니다.
롬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세상에는 두 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참 종교’와 ‘거짓 종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도 두 개의 기독교가 있습니다. ‘참 기독교’와 ‘거짓 기독교’입니다.
당연히 이 기독교 안에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참 성도’와 ‘거짓 성도’입니다.
거짓 종교, 거짓 기독교, 거짓 성도의 공통된 특성은 이것입니다.
자기 배가 궁극적인 목적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부수적인 수단이라는 것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고, 겉으로는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속사람을 들여다보면, 자기애만 가득한 사람, 성공을 향한 욕망만 가득한 교회, 이름을 내는 데만 기를 쓰고 있는 종교......그것이 교회 안에도 만연한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번영’을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괴물 기독교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기독교는 핍박받는 종교였습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이 종교를 선택하는 자체가 핍박을 감수해야 할 것, 목숨을 내 걸어야 할 것과 동의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최고급 대형 건물에서 가장 좋은 설비 가운데 앉아서 세련된 예배를 드리고, 풍성하게 넘쳐 흐르는 재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를 얻을까를 가르치는 멋드러진 설교를 들으면서 살아가는 교회......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닙니까?
왜 주변에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을까요? 교회가 번영만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핍박받고 죽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종교 장사꾼들이 가르치는 성공의 종교들이 범람했기 때문에, 성도들도 모두 성공하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타인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하는 그리스도인들 대신, 남을 죽여서라도 내가 올라서야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만난 두 번째 사람인 이 여종을 통해서 호된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본연의 추악한 민낯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성령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이런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낮아질 수 있는 사람, 죽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십니다. 종교의 핵심, 인간 본연의 핵심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런 악함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