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47칙 운문의 법신
“육근육식 인식을 초월한 깨달음의 지혜작용”
〈벽암록〉 제47칙은 운문화상이 독창적인 법신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법신은 어떤 것입니까?”
운문화상은 말했다.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
擧. 僧問雲門, 如何是法身. 門云, 六不收.
무형무상 ‘불상의 본체’를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곳에서 느껴야
운문화상은 문언(文偃: 864~949)선사로 〈벽암록〉 제5칙과 14, 15칙 등 여러 차례 등장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어록〉 중권(中卷)에 전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언제나 함축된 의미의 짧은 한마디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선사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도대체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고 있다. 사실 불교의 교학에서 부처의 몸을 삼신(三身)으로 나누고,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으로 몸(身)을 모양(相)으로 분별하는 것으로 鎌末構� 생각하였다.
따라서 몸(身)이라는 번역 때문에 법신도 형상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구마라집은 “천축에서는 다만 가야(歌耶: kaya)라고 말하는데, 한역하면서 신(身), 중(衆), 부(部), 법(法)의 체상(體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신(身)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불교학자도 부처의 삼신을 잘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법신의 이해는 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솔직히 운문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인 법을 인격화하여 법신이라고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화엄철학에서 비로자나불, 밀교에서는 대일여래,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 등으로 칭하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법신은 시방세계에 두루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법계(周邊法界)라고 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함께하고 있다.
〈화엄경〉 성기품에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는 곳이나, 모양이 없는 곳이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체가 없고, 색깔도 없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장소나, 국토나 일체의 법이나 중생에게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금강명경〉에서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했다.
〈대승기신론〉에도 “깨달음의 의미는 마음의 본체가 번뇌 망념을 여읜 것이며,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에 법계의 한 모양(一相)이니, 즉 이것이 여래 평등 법신”이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법신은 깨달음의 지혜작용이다.
마조의 〈어록〉에도 “번뇌에 얽혀있을 때(衆生心)는 여래장이며, 번뇌 망념을 벗어나(佛心)면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법신은 한계가 없고, 법신의 본체는 증감(增減)도 없지만, 크게 되고 작게도 되며, 사각형도 되고, 둥근 원형도 되며,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일체의 모든 곳에 도도하게 운용하지만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하고 있는 교학적인 법신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의 참된 법신을 체득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법신을 체득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운문선사에게 질문하고 있다. 원오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법신을 체득하지 못하고 법신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원오는 또 “일천 성인이라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법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항상하며, 시방에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이 법신 가운데 생존하고 있다. 아침에는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밤에는 부처를 껴안고 잠자고 있기 때문에 울 때도 웃을 때도, 화를 낼 때도 법신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법신을 보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법신에 대한 질문에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 라고 대답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라는 말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육근(六根)과 욱식(六識)과 육진(六塵)이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육근(六根)으로 법신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량 분별과 망정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전연 관계없는 말이며, 나아가 운문화상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 보려면 곧바로 보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했는가? 〈법화경〉에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서 헤아려 알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운문화상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학으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원오의 비판이다.
사실 운문화상이 말한 ‘육불수(六不收)’의 육(六)은 불교의 교학에서 말하자면, 육근(六根)과 육식(六識), 육경(六境: 塵), 육대(六大), 육합(六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불수(不收)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없고, 혀로 맛 볼 수가 없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수가 없고, 의식(意)으로 생각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도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로 성립하고 있지만, 법신은 이러한 육대(六大)의 어떠한 주변에도 해당되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육합(六合)이라면 하늘과 땅(天地)과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인 전 우주를 말하는데, 법신은 전 우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법신이 전 우주를 거두어들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신은 형체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기구나 물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측량 할 수가 없고, 파악 할 수가 없는 무한하게도 큰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영원한 법신 그 자체의 전모를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라는 한마디로 말하고 있기에 이 말을 곧바로 체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문이 말한 육(六)을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의미로 해석하여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인식과 중생심의 사량 분별로는 파악 할 수 없으며, 육근 육식의 인식을 초월한 불심(佛性)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문자로 해석한 이론이기 때문에 일체의 언설을 초월하여 곧바로 지금 여기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은 아니다. 전 우주와 자기와 하나가 된 지혜작용이 활발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을 스님은 어떻게 체득해야 할까?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운문이 “육불수(六不收)”라고 한 말은 무한의 공간을 표현한 것에 대하여 설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숫자로 무한의 시간으로 법신을 설하고 있다. 법신은 모양이 없고, 공간적인 한계와 시간적인 수량을 초월했기 때문에, “푸른 눈 달마대사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라.” “소림에서 신광에게 법을 부촉했다고 부질없이 말하네.” 달마대사가 소림에서 혜가에게 불법을 부촉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법신은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제시하고 부촉 할 수가 있는가?
“옷을 걷어 부치고 또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달마대사는 옷을 걷어 올리고 한 손에 짚신을 들고서 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설을 가지고 사실로 믿게 하고 있네. 현사는 “달마는 동토(東土)에 오지 않았고, 혜가도 천축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사가 말하는 달마는 참된 법신의 당체를 말하는데, 참된 달마[법신]는 천축에서 왔거나 중국에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만약 달마가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다.’ 넒은 천축을 찾아봐도 달마를 찾을 수가 없는 것처럼, 천축과 중국의 국경을 왔다갔다할지라도 참된 달마를 찾을 수가 없다. 달마는 행방불명인가? ‘간밤부터 설두[乳峰]의 집에 와서 묵고 있네’ 설두의 처소에 와서 묵고 있는 달마는 법신인가?
성본 스님/ 동국대 교수
[출처] [벽암록] 제47칙 운문의 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