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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있는곳 스크랩 세월이 가면 / 박인희
김유리(12회) 추천 0 조회 28 14.07.05 2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월이 가면 / 박인희


세월이 가면 / 박인희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란 시구가 저절로 떠올려지게 하는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을 때, 50년대 전쟁 직후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던 시인 박인환의 시를 노래한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가수 박인희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다보면 반세기를 넘어 1950년대, 세월이 앗아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이 시에 묻어나는 회고와 허무의 정서~~,
폐허의 수도에 어지러웠던 데카당스를 생각하게 된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작(詩作) 활동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목마와 숙녀'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는 전쟁을 통해서 맛본 비운과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좌절감과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삶의 모습이 박인희라는 여가수의 도시적 이미지를 통해 간결하게 드러나고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박인희가 부른 이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1956년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인 것으로 언뜻 전쟁과는 무관한 가을비처럼 아름답고 쓸쓸한 소녀적 감상주의로만 들려올 수도 있는데, 1969년 어느 날 청아한 음색과 시적인 감성으로 음악 펜들을 열광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은 혼성 듀엣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바로 '뚜와 에 무와'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박인희ㆍ이필원이 그들이다.
더욱이 통기타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세대들은 더욱 박인희를 좋아했었다.
당시 숙명여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박인희는 이필원과 팀을 이루어 '약속', '세월이 가면' 등으로 인기를 휘몰아 많은 펜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인기 절정에 다 달았다,



1969년 우리나라 가요 시장의 새 물결을 몰고 온 '뚜와 에 무와'의 박인희와 이필원은 이미 각각의 시집을 두 권씩이나 낸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였다.
포크음악의 선두주자로 출발하여, 번안곡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1집에서 이필원은 '약속'을, 2집에서 박인희는 '그리운 사람끼리'의 자작곡을 각각 발표하여, 문학을 가슴에 품은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였다.
당시 '뚜와 에 무와'의 음악은 여타의 음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품격과 섬세한 감성이 있었고, 박인희의 청아하고 지성미 흐르는 절묘한 음색과 이필원의 우수에 찬 감성어린 음색의 조화로 대중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으며, 이후 지금까지 '뚜와 에 무와'는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완벽한 하모니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듀엣'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박인희는 '그리운 사람끼리', '모닥불' 등을 작곡, '최초의 국내 여성 싱어송 라이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따라서 박인희, 이필원의 '뚜와 에 무와'는 두 사람 모두 문학을 바탕으로 한 음악을 하였기에 고품격의 음악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고, 이들은 한국 음유시인의 대명사로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박인희는 1946년 3월 15일생으로 숙명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엘리트 가수였다.
1970년에 이필원과 '뚜와 에 무와'라는 듀엣을 결성하여 '약속' '그리운 사람끼리' 등의 히트곡을 남기고 1972년 결혼과 함께 1년여 만에 솔로로 독립하게 되는데, 그녀는 솔로로 데뷔 후 1972년에 첫 히트곡으로 '모닥불'을 내놓은 후 '세월이 가면'을 비롯하여 '봄이 오는 길' '세월아' '끝이 없는 길' '눈빛만 보아도' '하얀 조가비' '미루나무' '돌밥' '장미꽃 필 때면' '젊은 날의 우리들' '모래알' '방랑자' 등의 히트곡과 "목마와 숙녀"등 여러 편의 낭송詩도 남겼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압권이었으나 가수 생활은 불과 7년여밖엔 하지 않았다.



국내 최의 여성 '싱어송 라이터'이며 방송 진행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녀를 아끼는 팬들에게 지금도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아무튼 아쉽게도 1972년 박인희의 결혼으로 '뚜와 에 무와'는 해체 되었고, 박인희와 이필원은 각각 솔로로서 독립을 하였는데, 박인희는 1976년까지 6장의 앨범과 시 낭송 음반을 내놓았다.
바로 박인환의 또 다른 시 '목마와 숙녀'였다. 이 음반이 발매 되었을 때에 문학을 꿈꾸던 문학도들은 물론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펜들에게 열렬한 찬사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인희의 앨범 6장에는 물론 중복된 노래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새롭고 참신한 음악으로 많은 펜들에게 어필이 되었다.
특히 소녀 팬들에게는 우상 같은 존재로서 자리매김이 되어 가고 있었으며 시적이며 다분히 감성적이면서도 문학적인 그녀의 음악은 인생과 사랑을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곤 하였다.
그래서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노래는 빛이 바래지 않고서 더욱더 우리가슴에 와 닿는가보다.

그녀의 많은 노래들 중에서 '세월이 가면', '다리 위에서', '끝이 없는 길',  '겨울 바다', '미루나무', '햇님 달님', '나는 너 너는 나', '그리운 사람끼리', '눈빛만 보아도', '얼굴', '이사도라' 등 많은 노래가 우리 마음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 하겠다.

 

국내 최초의 혼성포크듀오 박인희ㆍ이필원의 '뚜와 에 무와'

그럼 여기서 잠시 국내 최초의 혼성포크듀오 박인희ㆍ이필원의 '뚜와 에 무와'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1971년 김민기 출현 이전은 국내에서 포크의 개념조차 불명확했던 시기였다. 한대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포크 가수들이 대부분 우리 정서에 친숙한 멜로디의 외국 팝송을 번안해 부르기에 급급했던 게 현실이었다.
그런 시절에 나타난 박인희ㆍ이필원의 '뚜와 에 무아'라는 남녀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음과 함께 당시로서는 드물게 창작곡을 발표한 싱어송 라이터였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하겠다.



따라서 '뚜와 에 무와'의 탄생에는 남성 멤버였던 이필원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인데, 이필원이 일본 아끼다시(市) 민단 단장이였던 부친 이희도 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고1때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말이 서툴러 늘 외톨이였던 이필원은 일본대부속고교 시절 외로움을 잊기 위해 클래식 기타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 음악은 늘 푸근한 친구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의 모든 노래가 애수어린, 짙은 고독감으로 일관된 것은 이 같은 청소년기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이필원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인 1968년 초, 흑인들과 혼성그룹 '미키즈'를 결성해 이태원 007클럽에서 건반을 치며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록밴드 '타이거즈'는 그의 우상이었다고 하는데, 스스로 그 이름을 빌려 첫 5인조 록그룹 '타이거즈'를 결성했다고 한다.
명동의 미도파 살롱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이듬해 플레이보이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쌓은 이필원은 후에 동물농장, 얼간이 짝사랑 등으로 유명해진 '쉐그린'의 이태원, 전언수를 영입해 5인조 밴드 '미도파스'를 결성했는데, 이미 제법 인기그룹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에게 필생의 음악배필인 박인희와의 만남은 '타이거즈' 리더로 활동하면서 이뤄졌다고 한다.



박인희는 당시 미도파 살롱의 인기 MC였는데, 우연히 에브리 브라더스의 'Let it be me'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다고 한다. 우수어린 짙은 고독감이 배여 있는 이필원의 음색과 시적 감성이 묻어나는 박인희가 빚어내는, 처연하면서 달콤한 하모니는 평론가 이백천의 귀를 의심케 했다.
마음을 뺏긴 그는 방송출연을 주선하고 조경수는 듀엣 결성을 적극적으로 제의했다.
상상외의 반응을 접한 두 사람은 마땅한 연습장소가 없어 미도파 살롱 주방이나 인적이 드문 경복궁 야외에서 국내 최초의 포크혼성듀엣 탄생을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박인희가 작명한 '뚜와 에 무와'는 불어로 '너와 나'라는 뜻으로,
첫 음반은 1960년대 말 자비 30만원을 들여 신세기레코드에서 발표를 했는데,
중국가수 국중주도 참여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요계의 기인 '황우루'와 손을 잡으면서 비로소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 수 있었다.
1970년에 줄줄이 발표된 '뚜와 에 무와 1, 2, 3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단번에 재판을 찍어낼 정도로 공전의 인기몰이를 했다.
1971년에는 중앙일보, 동양방송 등 언론사에서 주는 가요대상까지 휩쓸었다.
10곡이 수록된 1집의 대표곡은 이필원의 창작곡인 '약속', 나머지 9곡은 박인희 작사의 번안곡 '썸머 와인' 등 모두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2집과 3집에서도 박인희 작곡의 '그리운 사람끼리', 이필원 작곡의 '추억'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문학소녀 시절인 여중 때, 이해인(왼쪽에 두 번째)과 박인희(오른쪽 끝)

그러나 보수적인 당시 사회분위기에 혼성 듀엣의 풍경은 늘 색안경의 대상이었다.
영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함께 보러 갔다가 이를 오해한 모 주간지의 '이필원ㆍ박인희 스캔들' 기사는 잘 나가던 이들 듀엣을 일거에 파경으로 몰고 갔다.
때마침 방송에서 DJ 제의를 받았던 박인희는 동아방송의 '3시의 다이얼' DJ로 활동하면서 1972년 결혼을 하였고, 이필원은 역시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나서며
두 사람은 각각 솔로로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뚜와 에 무와'는 아쉽게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슴엔 촉촉한 감성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인생과 사랑을 고운 멜로디와 시적 감성으로 노래한 대표적 여성 포크싱어인 박인희는 여고시절엔 문학에 심취한 소녀였고, 숙대 불문과 재학 때는 초대 교내방송국장을 역임한 다재다능한 재원이었다.



솔로 시절 발표한 '모닥불', '목마와 숙녀' 등 무수한 히트곡들은 문학적 낭만을 속삭이는 젊은이들의 밀어였다.
그녀는 결혼 전까지 광화문에서 '뚜와 에 무와' 상호의 레코드 샵을 열어 타의에 의한 해체의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이필원은 지금도 박인희와 빚어낸 달콤한 화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불발탄으로 끝난 '얼굴'의 윤연선과 시도했던 색다른 화음도, 한인경과 2기 '뚜와 에 무와' 재결성도 그런 아쉬움은 달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미국에서 한인방송사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박인희와는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었을 때 함께 노래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의 히트곡 '약속'처럼 한번만이라도 재결합 공연 약속이 이루어질 날을 올드 팬들은 지금도 열망하고 있다.



끝으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이란 시와 노래가 탄생한 것은 1956년 전란 이후 막 서울로 환도한, 아직도 쌀쌀한 봄 어느 날의 일이었는데, 을지로 입구 은성주점에 둘러앉았던 시인 김규동, 김광주, 송지영, 조병화 그리고 박인환, 가수 나애심, 작곡가 이진섭 등이 주흥이 좀 시무룩해지자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마땅한 노래가 없다면서 계속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때 박인환이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를 꺼내 즉석에서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써 내려갔고, 이를 본 작곡가 이진섭은 흥얼거리며 역시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진섭이 나애심에게 악보를 건넸을 때, 당대 최고의 가수의 입에서 서늘한 노랫말과 군더더기 없는 곡조가 울려 퍼지기 시작, 마지막의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은 노랫말의 여운을 위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즉흥의 3박자는 낭만적인 한 편의 시와 노래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또한 '세월이 가면'에는 또 다른 설도 있는데,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미남 시인이었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고 한다.
술집 '은성'에서 외상값 때문에 '세월이 가면'을 작사, 노래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9·28 수복 이후에 피란을 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박인환 등을 비롯한 한 떼의 친구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폐허가 된 명동에도 하나 둘 술집이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나게 되었다.
당시 모 탤런트의 모친께서 '은성'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도 않은 채 계속 술을 요구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은성' 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고 한다.
작품이 완성되자 박인환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노래를 듣던 '은성' 주인은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는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른바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의 단편 '명동'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 이란 시어를 발굴해 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고,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고 한다.

 

詩가 노래가 된 '세월이 가면'의 詩 人 박인환

또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도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던 것이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있었던 그 날 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명동백작' 박인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만 30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죽어가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 가슴이 답답해"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하는데,  더불어 죽기 며칠 전, 그가 외 사랑한 벗, 시인 김수영을 찾아가 펜 한 자루(김수영이 '모나리자'에 술값 대신 맡긴 만년필)만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뒤돌아 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아무튼 이렇게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너무도 유명한 이 '세월이 가면'이다.
격동기의 예술가들은 그토록 참담했던 전쟁의 상처와 어두운 시대의 상실과 고통을 마치 떠나가는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듯 낭만적으로 표현하였고 스스로를 치유하였던 것이다.

 
김수영 시인과 박인환 시인


박인환 시인은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 두고는 <자유신문>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인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 '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에 지었다는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박인희에 의해 널리 불리고 있다.




세월이 가면 - 박인희 노래

      세월이 가면 / 박인환 詩, 김진섭 曲,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2009년 09월 14(월) 방송 내용 중~~

매주 월요일 밤, 22:05분~23:00시까지 방송되고 있는 광주 MBC 라디오의 '추억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별하님께서 '고형숙의 뮤직 타임머신' 코너를 맡아 출연하고 있습니다. 추억의 음악과 함께 모두 향기로운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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