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3)
이념의 성장기: 1980년 ~ 1983년, 下編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방화사건
5.18 이후에도 이어진 운동권 지도부 간의 사상투쟁 등 무기력한 행태에 대해 불만을 느끼던 문부식은 5.18의 책임은 美國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경고성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5.18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을 원주에서 만나 1980년 12월에 있었던 光州 美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문부식은 美國에게는 이와 같은 방식의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 여자친구 김은숙, 후배 등과 함께 모의,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건물을 방화하고 유나 백화점 등 도심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동아大 장덕술이 중화상을 입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장(무직, 사형), 문부식(고신大 3 제적, 사형), 김은숙(고신大 3 제적,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유승열(부산大 공대 3, 징역 자격정지 7년), 박원식(고신大 의예과 2, 징자 7년), 최충언(고신大 의예과 2, 장7년 단5년 자7년), 이미옥(고신大 의예 2, 징10년 자7년), 최인순(부산大 약대 3, 징10년 자7년), 김지희(釜山여대 3, 징10년 자7년), 박정미(釜山여대 3, 징자 3년 집유 4년), 최기식(신부, 징 3년, 자 2년), 문길환(원주교구 성당관리인, 징자 3년 집유 4년), 김영애(치악산 서점 경영, 징자 3년, 집유 4년), 허진수(기장청년회부회장, 징2년), 김화석(부산大 공대 제적, 징3년), 이창복(교회사회선교협 회계, 징자 1년 집유 2년) 가 검거되었다.
현재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사건의 핵심인 문부식은 당대비평의 주간 겸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후회와 함께 죄책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혀 운동권들에게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충언, 이미옥은 의사가 되었고, 최인순은 약사가 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은숙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고, 김지희와 박정미는 평범한 가정 주부로 생활하고 있다.
김영애와 김현장은 1984년 결혼해 光州에서 케터링 사업을 하며 살고 있고, 박원석은 개인 사업을, 류승열은 무역업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최기식 신부와 문길환은 원주에서 천주교사회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허진수는 경남도의원을 지냈고,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관련자들 대부분은 민주화를 지향한다면서, 방화로 무고한 사람의 인명을 빼앗은 점 등으로 인해 당시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사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民靑聯)은 1983년 9월 30일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民靑聯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선전 활동을 했다. 1984년 6월말 民靑聯을 비롯한 운동권 단체들은「민중민주운동협의회(民民協)」를 결성했다. 民民協은 이후 민주·통일국민회의와 통합하여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을 창립하게 되었다. 1985년 5월 9일 종로2가에서 民靑聯은 청년단체,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 서울大 총학생회장)과 함께 「光州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주최했다. 이에 당국은 民靑聯을 학생운동과 민추위사건(「깃발)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간부들을 구속▪수사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로는 김근태(民靑聯 전의장), 이을호(民靑聯 상임위부위원장), 김희상(民靑聯 대변인), 김종복(民靑聯 청년부장), 최민화(民靑聯 부의장), 권형택(民靑聯 사회부장), 연성수(民靑聯 상임위 부위원장), 한경남(民靑聯 의장), 김희택(民靑聯 부의장), 천영초(民靑聯 상임위 위원장), 이범영(民靑聯 집행국장), 박우섭(民靑聯 운영위원장), 윤여연(民靑聯 사무국장), 서원기(民靑聯 집행국장) 등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화 실천가족 운동협의회(민가협)이 생겨나게 된다.
사건의 관련자 중 金槿泰(김근태. 58) 보건복지부 장관은 출소 후 1990년 全民聯 정책기획실장 및 집행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자당 창당반대 시위 주도, 全民聯 결성선언문 작성으로 다시 한 번 국가 보안법,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정계에 입문한 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 민주당 지도위원, 열린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入閣 前 국가 보안법 폐지운동을 주도했고, 韓總聯 합법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라크 파병반대에도 서명했다.
2003년 10월에는 『宋斗律(송두율)에 대한 공격은 舊시대적 매카시즘』이라며,『본인의 소원대로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金 장관의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숙부 등이 월북했다. 崔圭成(최규성) 열린당 의원도 1986년 서울 民統聯 부의장 시절, 국가 보안법 상 범죄은닉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서울민족민주운동 협의회 공동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 全國聯合 제도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열린당 사무처장, 국민정치연구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국가 보안법 폐지를 지지하고 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민청련이 사라진 현재, 민청련 동지회를 통해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민청련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張永達(장영달) 열우당 의원도 있는데, 장 의원은 국민대 행정학과 출신으로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民統聯 총무국 국장, 사무국 차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인천 5.3 사건 관련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평민당 부대변인, 신민당 대회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국민회의 국회의원,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및 간사,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천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21 세기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의원,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현재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6월, 북한의 NLL 침범과 관련,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이외에도 이해찬 국무총리, 이회창 총재 20만달러 수수설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은 설훈 前 의원,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한 박선숙,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냈던 최경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장준영,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김희택, 송두율 초청으로 조사를 받았던 나병식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조성우 민화협 대표 등이 이 민청련 회원 출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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