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코타키나발루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여행가이드가 호텔 객실로 다시 찾아왔다.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도착한 여행객을 4개 호텔에 분산 투숙시킨 후 돌아갔던 가이드였다. 그가 다시 찾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날더러 전화를 왜 안 받느냐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는 말까지 했다. 난 전화기가 울린 적이 없던 터라 스마트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폰은 까똑, 까똑 연달아 카카오톡 메시지 도착 소리를 냈고 폰을 열자 가이드가 3차례 전화를 건 기록과 ‘연락 바란다’는 그의 카톡 메시지까지 연달아 떴다.
한국에서 출국 전 공항 이동통신 대리점에 들러 해외로밍을 신청하자 젊은 여직원은 5일 여행이지만 가는 날은 자정 가까워 도착하는데다 돌아오는 날도 자정에 그곳에서 출발하니 로밍은 3일만 하면 된다고 했다. 하루 8천 원인 부담을 이틀 줄여준다는 얘기였다. 결국 날짜 5일을 온전히 채우지 않은 휴대폰 해외로밍이 가이드를 힘들게 한 것이었다. 밤늦게 찾아온 가이드에게 이런 만남도 소중한 추억이 된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성격이 활달해 보이는 가이드를 옆에 세우고 호텔 프런트 근무자더러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카메라 앞에서 밝은 표정까지 지었다. 이런 문제가 생길 줄 알았더라면 통신사에서도 로밍날짜를 빼지 않았을 터인데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난 상품을 보고 여행사에 코타키나발루를 신청하자 담당직원은 여행지 호텔 정보 메시지를 수시로 알려왔다. 여행사가 정한 인원이 차야만 단체로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하던 종전 방식이 아니라 접수되는 순서대로 곧장 현지 숙소로 연결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목표한 모객인원이 미달되어 여행이 취소되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지만 얼마나 이 바닥에 한파가 몰아쳤으면 이렇게 변했나 싶어 여행이 걱정되기도 했다. 오늘 21명 여행객을 4개 호텔에 갈라서 투숙시킨 것도 시작은 그렇게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코타키나발루 시내라지만 숙소 위치가 마지막인 우리 부부는 첫 호텔과 10여km나 떨어져 있어 중간 중간 들르면서 가이드가 낭비하는 시간이 아깝고 불편했다.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이러한 불편을 겪어야할 것을 생각하니 짜증까지 났다.
현직 때인 30여 년 전, 여행을 겸해 가까운 일본의 산들을 자주 찾아가던 절친한 등산애호가가 있었다. 그가 어느 날 키나발루 산을 가자고 제의했었다. 난 그때 함께하지 못했고 그가 산을 올랐던 사진만 받았었다. 그날로부터 얼마 뒤 그가 이승을 등지는 바람에 더 이상 해외명산을 오를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씩 방송이나 신문이 전하는 키나발루 뉴스를 접하면 이 세상에 없는 그가 떠올랐다. 그때마다 꼭 키나발루를 올라보고 가야만 그를 저승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키나발루는 산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에 오르는 인원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미리 신청하여 승인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산이라 뜻을 내고서도 그 기간을 기다리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다 4천 미터가 넘는다는 높이에 놀라서 펄쩍 뛰는 아내를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여행사에선 어쩐 일인지 3박 5일 동안 절반정도 식사를 여행자들이 스스로 해결토록 해놓고 있었다. 가이드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가야거리와 워터프런트를 추천하면서 시내관광을 겸해 바다의 해넘이도 장관이라는 말까지 했다. 외곽에 위치한 호텔은 아예 프런트에다 투숙객들이 자주 찾아가는 몇 군데의 택시요금을 비치해 놓고 있었다. 이용객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로 볼 수 있지만 택시요금으로 자주 시비를 일으켜 그 예방책으로 보였다. 호텔 직원은 도착한 콜택시를 내다보면서 워터프런트라면 우리 돈 1만 원에 해당하는 35링깃만 주면 된다고 했다.
우리 부부를 태우고 호텔을 출발한 택시는 한국 거리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낡은 차였다. 난 미터기가 달리지 않은 택시가 신기해서 달리는 차량 데시보드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뒷좌석에서 자신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기사는 순간 흠칫 놀라는 듯했다. 택시는 생긴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도 용케 목적지에 도착했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기사는 까맣게 탄 얼굴이 나이보다 늙어보였다. 기사가 앉은 좌석은 오른쪽으로 우리와는 반대였다. 그는 100링깃짜리 지폐를 받고도 거스름돈을 주지 않고 꾸물거렸다. 10링깃짜리 지폐를 몇 장 오른쪽 손에 펴들고는 승객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호텔에서 일러준 금액보다는 조금 더 줘야겠다는 생각도 사라지고 말았다.
도심시가지가 깨끗한 일본이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코타키나발루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칙칙한 느낌을 주는 거리였다. 깨끗하든 더럽든 관광은 어쩌면 그런 차이마저도 관심을 가지고 직접 확인하러 찾아나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일몰시각까진 여유가 있어 재래식시장으로 불리는 필리피노마켓부터 찾았다. 우리나라 부산 국제시장이 북조선을 탈출한 실향민들이 호구지책을 위해 만들었다면 이곳 시장은 필리핀 사람들이 만든 시장이라 이름마저도 그렇게 붙였단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이 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명소로도 알려졌다지만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닌 가설시장이었다.
싱싱한 해산물과 열대과일이 한가득 진열되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류매장 쪽 통로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시민들로 꽉 들어차 진행이 어려웠다. 시장에선 우리나라처럼 강매하기 위해 사람을 붙잡는다든가 상품을 손에 들고 호객행위를 하는 걸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정찰제로만 상행위를 하다 보니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물건 값을 깎겠다고 덤비는 손님이 나타나면 상인들이 오히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순박해 보이는 상인들의 눈빛엔 믿음이 갔다. 상품마다 무게로 가격을 표시한 것이 합리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과일상은 상당수가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신조어를 한글로 써붙여 놓았으니 여기가 가락시장인가 싶기도 했다. "잡숴봐요. 맛 끝내줘요. 그야말로 죽여줘요" 기발한 판매구호가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만들었다. 시장에선 바나나 한 손 가격이 키나발루 산자락 가게의 30% 수준으로 싸면서도 아주 싱싱했다.
식사장소를 겸한 관광명소로 가이드가 추천하던 워터프런트였다. 워터프런트란 도시가 큰 강이나 바다 호수 등과 접하고 있는 공간을 말하지만 인적이 없는 한적한 해안이나 수변은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단다. 결국 도시의 일부로 존재하는 도시속의 자연을 말하는데 코타키나발루에서 밤 문화가 가장 활발하다는 이곳 식당가가 그런 풍광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양인들 중엔 나이가 지긋한 중장년들도 보이지만 한국인은 단체든 개인이든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아마도 해변에 유럽풍으로 길게 들어선 음식점과 술집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널리 알려지면서 관광명소가 되었으리라. 바다는 가야항과 가까워 항구를 찾은 선박들의 묘박지기도 했다. 상선과 화물선이 정박했고 그 때문인지 바닷물이 청정하기로 소문난 툰구압둘라만 해양국립공원에 가까운데도 물은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워터프런트에선 식사와 술을 함께하면서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어 낭만적이라 광고하지만 방향은 북쪽으로 앉았고 멀리 서쪽 끝으론 수평선이 아닌 선박들 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음식점들은 몇 집 건너 하나 꼴로 작은 무대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손님을 만날 순 없었다. 규모가 큰 한국인식당 부가富家에도 무대는 마련되어 있었고 말레이 현지인으로 보이는 여종업원들은 친절했다. 된장찌개를 주문했는데 이 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추느라 그랬는지 찌개는 국보다도 더 싱거워 우리 부부는 한 술씩 뜰 때마다 서로 마주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첫날 해넘이는 해무 때문인지 붉게 물든 노을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컴컴해지고 말았다.
워터프런트 둘째 날은 중간쯤에 위치한 '레스토랑 MAI YAI'에서 식사를 겸해 맥주안주로 닭도리탕을 주문했다. 그 맛은 우리 입에도 잘 맞았다. 이틀째 워터프런트를 다시 찾은 보람은 헛되지 않아 비록 선박 위로 떨어지는 해지만 붉게 타는 강렬함으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레스토랑의 핸섬하게 생긴 청년 종업원은 우리 부부가 요청한 콜택시를 불러주느라 큰길 복판까지 달려나가 차량들이 오가는데도 휴대폰을 통해 도착하고 있는 택시를 잡아오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며칠 후 부산에 올 거라기에 꼭 연락하라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도착한 택시는 우리의 경차보다 약간 컸고 운전사는 까만 히잡에 마스크까지 까맣게 덮어 눈만 초롱초롱한 소녀였다. 차량은 신차로 깨끗했지만 미터기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음악감상이 취미인지 라디오를 음악채널에 맞추어 운전하면서도 계속 음악을 듣고 있었다. 말레이 민요를 좀 들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웃는 눈빛만 백미러에 담아 조용히 보낼 뿐 대답이 없었다. 목적지인 호텔에 도착하여 택시기사가 요구한 요금은 90링깃이었다. 호텔이 알려준 요금의 거의 3배를 부른 것이다. 택시요금은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바가지를 씌운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일행이 코타키나발루를 떠나오던 자정 무렵, 공항엔 인천과 부산으로 가는 항공편만 남아 그야말로 한국인 세상이었다. 항공권 발권과 짐을 부치느라 늘어선 줄은 부산이 인천의 2배로 길었다. 공항직원들의 업무처리속도가 한국보다 엄청 느려터져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다. 사흘 동안 일행을 돌봐주던 가이드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끝까지 배웅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는 우리나라 여권이 세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데 고무된 듯했다. 미국이 8위인데 독일과 함께 공동 3위인 한국이 왜 자랑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는 너무 흥분했던지 우리 일행에게 한국 여권이 2위라고 했었다. 하지만 2위는 따로 있었다. 바로 싱가포르였다.
가이드는 첫날 만난대로 심야까지 동분서주하며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해내는 버거운 일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마음이 친자식만큼이나 짠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집필한 책이 곧 나올 거라며 많은 응원 바란다는 마지막 인사말이 항공기 트랩을 오를 때까지 여운으로 남았다. 코타키나발루는 여행하기 좋은 때가 3월부터라니 바로 다음 달이다. 여행에서 한두 곳 빠트려 놓아야 다시 찾게 된다는 말도 있지만 못 오른 키나발루 산을 오르기 위해서라도 다시 코타키나발루를 찾아야 한다. 인생 황혼에도 자신이 희망하는 곳을 두고 날짜를 재는 것은 여전히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