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신> 가장 능률적인 시의 제목은 어떤 것인가 / 임보
로메다 님,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상품만 보더라도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사람의 이름을 짓는 데 성명 철학이 동원될 만도 합니다.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달 것인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인기 없는 소설책의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했더니 잘 팔리더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목을 선택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의 제목을 붙이는 일의 중요함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시도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을 단다면 보다 많은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얘기하려는 시의 능률적인 제목이란 독자 반응과는 무관한,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제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시의 제목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이상의 역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 역동적 역할이 무엇인지 다음의 글을 읽노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시와 제목
글에서의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맨 처음 붙들어 글 속으로 안내하는 간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개의 제목들은 독자로 하여금 글의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논리적인 내용의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학 작품인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다루고자 하는 주된 소재를 제목으로 삼거나 말하고자 하는 주된 생각을
제목으로 설정하여 글의 내용을 넌지시 짐작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문학 작품의 제목들은 대체로 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암시 혹은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특히 시(詩)인 경우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에서의 제목은 점포의 간판처럼 선명한 것이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드리워진 반투명의 장막과도 같다.
그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빨리 풀어 주는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궁금증을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흥미로운 갈등을 맛보게 하는 미적 장치로 설정된다.
시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시의 제목이 시를 읽어보기도 전에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붙여졌다면
그것처럼 싱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의 제목은 내용을 설명하는 간판이어서는 곤란하다.
시의 제목은 시행(詩行)과 마찬가지로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의 제목도 시의 다른 요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절대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
그 제목이 아니면 그 작품의 그러한 구조는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이상적인 제목은 독자가 그 시의 마지막 행을 읽을 때까지 독자의 의식 속에
계속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에 왕유(王維)의 「녹시(鹿柴)」라는 절구를 예로 보도록 하자.
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 맑은 산 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려 올 뿐
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 저녁볕은 깊은 숲에 스며들어
復照靑苔上(부조청태상)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고 있네.
거금 천이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자가 처음부터 이 작품에 제목을 달았는지 아니면 후세의 어떤 이가 그렇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작품은 '鹿柴(녹시)'라는 그 제목으로 하여 의부진(意不盡)의 깊이를 간직하게 된다.
'鹿柴'를 '녹채'라는 고유명사[地名]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되면 이 시의 맛은 반감이 되고 만다.
'鹿柴'는 '녹시, 곧 글자 그대로 '사슴 울타리'의 의미로 보아야 멋이 살아난다.
도대체 이 시의 제목을 어찌해서 '사슴 울타리'로 붙였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깊은 숲 속의 맑고 조용한 저녁나절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사슴은커녕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웬 사슴 울타리란 말인가.
제목이 시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기대하는 이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도 시의 한 행처럼 시의 내용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깊은 산 숲 속에 햇볕이 든 작은 공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 빈터에 몇 이랑의 조그만 채마밭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무나 배추 등속의 채소를 심었던 곳인가 보다.
그 채소밭가에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엮어 만든 기울어진 울타리가 있다.
주인도 먹기 전에 사슴이 자주 찾아와 뜯어먹으니 이를 말려 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저 밭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마 이 근처 산 속 어딘가에 움막이라도 치고 살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는 지금 약초라도 캐면서 혼자 시를 읊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 '鹿柴(녹시)'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鹿柴(녹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면
이 작품은 한갓 깊은 산 속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제목으로 인하여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은자(隱者)의 깨끗한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크게 달라진다.
제목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지 알 일이다.
―(중략)―
그동안의 사정들을 살펴보건대 시에 제목을 붙이는 양상도 다양하다.
소재를, 배경을, 주제를 혹은 작품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경우도 있으리라.
그러나 생각이 깊은 시인들은 그냥 쉽게 제목을 달지 않는다.
그 제목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능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시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상품에 꼬리표를 다는 일과는 다르다.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적당히 할 일이 아니다.
시는 가장 정제된 문학 양식이지 않는가.
― 『엄살의 시학』(태학사)pp.40-43
로메다 님,
제목이 어떻게 작품 전체에 역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인지 아직 납득이 안 되나요?
그렇다면 김종삼의 다음 작품 하나를 더 보도록 할까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로메다 님,
이 작품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진눈개비라는
세 개의 비유만을 나열해 놓고 있는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본문에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비유들의 원관념(주지)이 무엇인지 본문의 글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 원관념―'북 치는 소년'을 제목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북 치는 소년'에게서 느낀 세 개의 이미지들을 병치해 놓고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의 제목은 작품의 뼈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의 제목은 본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제목도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제목이 그 작품의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것은 없어도 무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가끔 '무제'라는 이름의 제목을 보기도 하는데 이것처럼 불성실·무책임한 제목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도 내가 하는 시의 얘기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시의 길이 도(道)를 찾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한 공력도 쏟지 않고 좋은 시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욕심일 것입니다.
건필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