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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에 대한 사울의 살해의지
삼상 20:24-34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26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27 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이르되 원하건대 나에게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령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내가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삼상 20:24-33 / [사울에게서 피하게 된 다윗] 다윗은 약속대로 들녘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초하루가 되어 왕은 식사하려고 식탁에 나와 앉았다. 25) 왕은 언제나 앉는 자리에 벽을 등지고 앉았다. 왕의 맞은편에는 요나단이 앉고, 군대장관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았으며,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26) 그러나 사울이 그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윗에게 무슨 부정한 일이라도 있어서 아직은 그 몸으로 이곳에 나올 수 없어 그렇겠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27) 그런데 그 다음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자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었다. `다윗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그가 어제도 오늘도 내가 마련한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28)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다윗이 급히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봐야 되겠다고 제게 휴가를 요청하면서 29)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집안이 베들레헴에서 가문의 제사를 드리는데, 나의 형님께서 직접 찾아와 그 제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였다네. 가서 친척들을 만날 수 있게 휴가를 보내 주게나!'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다윗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어제와 오늘 임금님의 식탁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30) 그러자 사울은 매우 화를 내면서 요나단에게 소리쳤다. `이 반역하는 더러운 놈아, 네가 달아난 놈하고 한패인 줄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은 너 하나만의 수치가 아니라 네 어미까지 부끄럽게 하는 수치이다. 31) 그 놈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네 목숨도 온전하지 못하고, 네가 왕이 될 전망도 전혀 없다. 당장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너라. 그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32) 그러나 요나단이 항의하였다. `다윗이 왜 죽어야 마땅합니까? 도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33) 그 순간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려고 창을 겨누었다. 이로써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줄을 깨닫게 되었다. 34) 요나단은 북받쳐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여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날 온종일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 다윗을 모욕한 것에 대하여 몹시 슬퍼하였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 때문에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을 기회를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과 같은 선택은 오늘날에도 이곳저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24-29) 다윗은 들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 왕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왕과 함께 있습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다윗의 부재가 자신과 함께할 수 없는 어떤 부정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다윗이 불참하자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거론하기를 꺼려합니다. 이것은 사울 왕이 화가 났다는 의미입니다.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감정입니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종종 다윗을 폄하할 때 사용되었습니다(30, 31; 22:7, 8, 13; 25:10; 삼하 20:1). 요나단은 다윗과 세운 계획대로 사울 왕에게 다윗이 자리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윗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베들레헴 집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원래의 계획된 말에 덧붙여 다윗의 형제들이 그가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말하여 다윗의 요청을 더욱 그럴듯하게 꾸몄습니다.
다윗을 위하여(30-34) 사울 왕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사울 왕은 요나단에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고 호통을 칩니다. 사울 왕은 속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피신시키는 일에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분노는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하여 느낄 수 있는 분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미래를 전부 물려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가질 수 없게 된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분노입니다. 다윗을 선택한 요나단을 수치스럽다고 폄하합니다. 사울 왕은 지금까지 앓고 있던 온갖 마음의 상처와 품고 있던 적개심을 한꺼번에 끄집어냅니다. 그는 요나단에게 다윗이 살아있는 한 요나단은 왕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그러나 요나단도 그것을 몰라서 다윗을 도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의 자리에서 망가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직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한 사울 왕은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을 향해서도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합니다. 비극입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마음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좋은 아버지로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슬퍼합니다. 무죄한 자가 죄인으로 도망 다녀야 하는 현실에 대해 슬퍼합니다.
적 용 :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많은 일에 적용될 만한 금언입니다. 나를 잘되고 흥하게 하는 데에 가장 소중한 힘이라 생각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의를 볼 때 어떠한 태도를 보이십니까? 못 본 척 지나가십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함을 얻은 성도는 불의와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하며 죄와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불의로부터 지켜야합니다. 하지만 관행이나 명목이라는 이유로 불법 또는 불의와 손을 붙잡게 하는 세상의 유혹들이 있습니다. 무의식중에 쉽게 범할 수 있는 불의를 생각해보고 그것을 버리도록 오늘도 말씀으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0:25
왕은...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 사울이 이같이 벽 곁 자리에 좌정한 것은 (1) 그 위치가 자신의 몸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이며(Hertzberg), (2) 고대 중근동에서 출입구 반대편의 그곳은 가장 상좌(上座)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Fay, Smith, Keil). 요나단은 섰고 - 여기의 '섰고'(* , 야캄; 원형은 '쿰', * )는 요나단이 그때 식탁을 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1) 여기의 '야캄'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코프'(* )와 '멤'(* )사이에 '달렛'(* )을 삽입시켜 '에카뎀'(* )으로 수정하여 '맞은편에 위치하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LXX, Klein, Ewald, Bunsen, Thenius), (2) 여기 '쿰'의 의미를 '오다'란 말로 이해하여 '요나단이 왔다'란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De Wette, Maurer), (3) 사본을 정확한 것으로 보되, 다만 '(요나단이) 자신의 위치를 잡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Mastin)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여기의 '섰고'(쿰)라는 동사가 단순히 서있는 동작만을 의미하지 않으며(16:12; 창 43:13) 둘째, 히브리 본문을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일반 해석론에서 볼 때 (3)의 견해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곧 처음 요나단이 사울의 곁에 자리 잡았다가, 아브넬이 들어옴으로써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요 숙부인(14:51) 아브넬이 들어오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단순히 잠깐 일어나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앉은 행위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the Vulgate, Keil, Fay).
아브넬...다윗 - 결국 월삭 어전 잔치의 참석자는 왕 사울, 왕자 요나단, 군장 아브넬, 천부장 다윗 등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울 왕을 중심으로 부자(父子) 관계, 사촌 형제 관계, 사위 관계 등 혈연으로 얽혀있었다는 점에서 가족 잔치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4인은 당시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핵심 수뇌부인데, 고대 초창기 왕정의 성격상 이러한 혈연 중심의 통치는 당시 보편적이었다(Leon Wood).
=====20:26
부정한가보다 - 모세 율법의 정결 의식법상 시체를 만지거나(레 7:20, 21; 15:16-18), 혹은 잠을 자다가 몽설(夢泄)을 하는(신 23:10) 등의 사유로 인하여 의식적(儀式的) 부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모세 율법은 이같은 상태에 이른 자가 제사, 축제 등의 성별된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20:27
이새의 아들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다윗의 대적들에 의해서 주로 부벙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30, 31; 22:7, 8; 25:10; 삼하 20:1). 당시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심경을 보여 주는 말이다(Klein). 어찌하여...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 사울의 이 말은 여러 사유 등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당일에는 부정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깨끗케 된다는 율법 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레 15:1-27). 바로 이같은 율법 규정을 아는 사울은, 다윗의 첫날 식사 불참은 그가 부정하게 됐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용납할 수 있었으나(26절). 그 다음 날에도 불참한 것은 첫날의 불참과는 달리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20:28,29
다윗의 행방을 묻는 사울의 질문에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이틀 전 다윗과 이미 약조한대로(6절) 다윗의 불참 사유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던 것이 아니라, 에셀 바위가 있는 들에 숨어 있었다(19, 24절). 나의 형(* , 아히) - 70인역(LXX)은 '형제들'로 이해하나, 히브리 원문은 단수이다. 아마도 다윗의 맏형으로서 가족의 제사를 주관하는 형을 가리키는 듯하다(Keil, Fay).
=====20:30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가리킨다. 이같은 반응은 결국 사울이 월삭 잔치를 기회로 다윗을 사로잡고자 한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여 주는 증표였다.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 여기서 '패역'(* , 나아와트)은 '구부러지다'(* , 아와)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극도로 사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잠 12:8). 그리고 '부도'(* , 마르두트)는 '반역하다', '거역하다' (* , 마라드)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반항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창 14:4; 수 22:16; 왕하 18:20). 또한 여기의 '계집'은 사울 자신의 아내 곧 요나단의 생모(生母) '아히노암'(14:50)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 아히노암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언급은 그녀가 그같은 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사울은 요나단의 어머니를 나쁜 여자로 몰아버림으로써, 즉 요나단을 처음 출생부터 잘못된 인물로 선언함으로써 그 아들 요나단의 '패역 부도'(悖逆不道)함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너 사악하고 반역적인(계집의) 아들아!"(you son of a perverse and rebellious woman!; NIV, RSV)란 뜻인데, 이처럼 어머니까지 들먹여 욕하는 이런 행위는 특히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는 극도의 증오와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격렬한 감정의 표시였다. 결국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아들마저 아들로 인정치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는 악한 감정은 결국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시키고 만다.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 - 여기서 '택하다'(* , 바하르)란 말은 사랑과 신의(信義)로써 사랑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곧 요나단이 다윗과 친구가 되어 그 편을 들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여기 '이새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네 수치 -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경우 마땅히 사울의 왕권을 이양받을 권한이 있던 왕자 요나단이 당할 여러가지 부끄러움을 가리킨다.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 이 말은 다윗에게 사울의 왕권이 넘어감으로써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요나단으로 인하여 요나단의 어미가 그를 낳은 일 자체를 부끄러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말은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20:31
너와 네 나라가...서지 못하리라 - 사울 자신의 왕권이 다윗으로 인하여 요나단에게 양위(讓位)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일찍이 사울은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그 왕위(王位)가 단절될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바 있었고(13:13, 14), 이제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차기의 왕으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18:12; 23:17)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신을 소유치 않은 비합법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6:14).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는 사망의 자식이니라'이다.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곧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정면 도전하는 선전 포고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의 악한 감정은 이제 그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자로까지 발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자의 결국은 멸망 뿐이다(31:4, 5; 나 1:2).
=====20:32
요나단이...가로되...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부친 사울 왕의 격심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변치않는 신의(信義)로써 친구 다윗을 위해 변호함으로써 부친의 마음을 바로 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19:4-7). 그러나 당시 사울은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20:33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 여기의 '던져'는 '창을 뻗다'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8:11). 그리고 '치려'(* , 나카)는 죽이거나 혹은 치명상을 입힐 목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37:21; 출 2:12; 신 13:15; 삼하 1:15). 그런데 이같은 행동은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을 때 나타났다는 점에서 볼 때(18:11; 19:10). 이때도 사울은 극력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인하여 마치 악신에 사로잡힌 바 된 상태와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20:34
심히 노하여 - 이같은 요나단의 분노는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 사실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에 의하여 차기의 왕으로 특별히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기 요나단의 노(怒)는 불의를 참지 못하여 일어난 의분(義憤)으로서 사울의 불의한 분노(30절)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즉 요나단의 분노는 사랑과 신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사울의 분노는 증오와 시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달의 제 이 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월삭 잔치 둘째날의 음식(27절)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 이는 매년제를 드리러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다윗을 부친 사울이 정당한 이유없이 반역자로 몰아, 반드시 '죽일 자'(31, 33절)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설 교 >
이렇게 다를 수가
사무엘상 20:24-42 / 이용효목사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요나단은 부자지간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아버지는 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죄에 물든 사람이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입니다.
반면 아들인 요나단은 사랑이 충만하고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원로영화배우 강신성일 씨가 자신의 자서전 출판기념식에서 결혼생활 중 모 여배우와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한 사실을 밝히면서 그녀는 오래 전에 죽었지만 지금은 젊은 애인이 있다고 말하여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부인인 엄앵란씨는 마음이 넓어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죄의식이 라고는 전혀 없고 영웅담을 늘어놓는 것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죄는 이처럼 사람을 후안무치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죄는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키고 인격을 파괴시키고 가정과 삶을 파괴시켜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1. 사울은 이성과 양심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초하루에 사울과 총사령관 아브넬이 음식을 먹는 자리에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요나단은 아버지 곁에 서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첫날 다윗이 불참하여도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부정하여 참석을 하지 못하였는가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도 여전히 다윗의 자리가 비어있자 사울은 왜 다윗이 식사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느냐고 요나단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베들레헴에 제사할 일이 있어 다녀와야겠으니 허락하여 달라고 하여 허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이미 다윗과 언약한대로 한 말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불과 같이 화를 내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그의 속내를 드러냅니다.(30절)
31절에는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단은 그가 무슨 죽을 짓을 했는지 물었고 사울은 이성을 잃고 아들인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습니다.(32,33절)
이제 아버지의 본심을 알고 난 요나단은 화를 내며 식사자리에서 물러나옵니다.(34절)
투기가 일어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결국 아들까지 죽이려합니다.
아가서 8:6에는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넘본다고 생각하여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일어나는 탐심을 물리치지 못하여 결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처럼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는 그대로 두면 발육합니다. 죄는 에이즈 암 보다 더 무서운 저주의 병입니다.
사람이 왜 타락합니까?
첫째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도 초기에 발견하면 수술하여 제거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짓고 즉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둘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말씀을 묵상하였다는 기록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반면 다윗은 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았고, 자라면서 성경공부도 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3명의 성악가중 한 명으로 뽑혀 예배시간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드빌리시 신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정치에 참여하여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버려 결국 악한 사람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도 오스트리아 람보아에 살 때 베네딕트수도원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찬양단원으로 봉사하면서 한 때 성직자가 되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사람도 결국 악마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종교적 감흥을 받아 성경도 읽고 신학도 하였지만 말씀이 없는 자들은 시험이 오면 곧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갈등이 많고 다툼이 많고 불행하고 힘든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든지 눈물 한숨 아픔 슬픔 고통 괴로움 질병 이별과 죽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모든 불행의 열매는 죄라는 뿌리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요나단의 우정은 다윗을 향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주는 사랑입니다.
그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여야한다고 하자 그는 그가 죽을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라고 하였고, 사울은 단창으로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34절에는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합니다. 다윗을 변호하여 아버지요 왕인 사울에게 심히 노하며 무죄를 주장하였고, 다윗을 사랑하여 금식하며 슬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자리를 떠난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려 줍니다.
다윗과 언약한 시간에, 언약의 장소에 나가 활을 쏘며 사환에게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라고 소리쳐 다윗에게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 본심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 겉옷과 칼과 활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윗에게 다 주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 며칠 전 어느 목사님과 식사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어느 국민당 간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두 아들만은 피신시켜 살아남기를 원했습니다. 그 사람에겐 두 사람의 친구가 있는데 한 친구는 자신에게 항상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지주는 두 아들을 각각 두 친구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죽었고, 한 아들은 살았습니다. 어느 친구에게 맡긴 아들이 죽었을까요? 자신이 도움을 준 친구는 친구의 아들을 맡았다가 자신과 가문이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밀고를 하여 친구의 아들을 잡혀가게 하여 죽게 만들었고, 자신에게 항상 베풀어 주었던 친구는 아들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주는 사람, 베푸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이고 주는 사랑이 더 숭고한 사랑이요 진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도로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서 안겨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주고 이해해 주고 친절함을 주고 물질을 나누어 주면 하나님이 나에게 더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수년 동안 매 주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인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5달러의 돈이 송금되어 왔습니다. 편지에는 “부탁합니다. 우리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주세요”라는 내용과 함께 무덤의 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관리인은 몇 년 동안 그 부인의 소원대로 꽃을 사서 그 아들의 무덤을 찾아 꽃을 갖다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공동묘지에 한 부인이 병약한 몸으로 차안에 앉아 있다가 기사의 부축을 받고 나오는데 몸이 아주 쇠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에는 큰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관리인에게 다가와 “제가 편지와 함께 우편함으로 5달러씩 돈을 보낸 [아담스]부인입니다. 제가 오늘 직접 오게 된 것은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몇 주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의 무덤에 손수 꽃다발을 갖다 놓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인은 “저는 꽃을 사서 무덤 앞에 갖다 놓을 때 마다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해왔습니다.” 부인이 깜짝 놀라며 “뭐가 그렇게 유감이었습니까?” 하고 묻자 관리인은 “이 꽃은 불과 몇 시간도 안돼서 다 시들어 버리고 이 공동묘지에 누구 한 사람 꽃의 향기를 맡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꽃 냄새를 못 맡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인데 시립 병원에 입원한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런 꽃을 사다 준 일이 있습니다. 꽃을 그들에게 갖다 주면 환하게 웃고 냄새도 맞고 기뻐하는 모습을 봅니다. 부인께서도 이제 소외된 사람들에게 꽃을 갖다 줘보십시오.”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부인이 직접 운전을 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공동묘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 제가 병들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찾아 꽃과 선물을 드렸더니 너무 너무 좋아하더군요. 좋아하는 그들의 얼굴표정을 바라볼 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면서 제 신경성 질환도 떠나가고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이웃에게 사랑을 줄 때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변함없이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마음을 주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의 진실한 우정을 보면서 우리도 이처럼 변함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은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41절에는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여 동성연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눈 것을 보면 동성연애자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자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입맞춤은 그 당시 사회에 통상적 인사법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데살로니가전서5:26절에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이 두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후손들까지 이 우정을 이어가자고 맹세한 분들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는 장면을 동성애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의 우정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2012년 영국의 의회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부부로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PCUSA 즉 장로교에서 동성연애자의 목사안수를 허락하였고, 미국성공회에서도 역시 동성연애자의 주교서품을 허락하였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미 동성애자 부부를 합법화 시켰습니다. 한국에도 이미 동성애자 전용교회가 있고 <크리스천 이반>이라는 한국 동성애 성향 교인들의 인터넷 모임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가증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9장에는 소돔성의 죄악 중에 동성애가 포함되어 있고, 사사기 19장에는 동성연애로 기브아 사람들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레위기18:22절과 20:13절은 동성애를 죽어 마땅한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신약 고린도전서6:9-10절과 디모데전서1:8-11절에는 동성연애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1:27-28절에 동성애를 “역리이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주의학자들은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이고 유전적인 요인들이 동성애를 하도록 어떤 영향을 끼쳐 동성애자들이 되게 하였으므로 동성애는 죄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동성애가 사회적 심리적 생리적 조건에 의하여 허용된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동성애라는 죄악의 누룩이 교회에 스며들어 부풀어져 가고 있기에 이제는 동성애 문제를 더 이상 한국교회와 거리가 먼 것으로 간과하거나 미루어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동성애 죄는 밉지만 동성애자들을 향해서는 문을 열어야할 것입니다.
주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으니 동성애 성향을 가진 자들도 우리 구주 앞에 나와야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기에 앞서 서로 입 맞추고 울었습니다. 이들의 눈물은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이요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여 흘리는 눈물이요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간구와 소원을 아버지께 올렸습니다.(히5:6절) 주님의 그 눈물은 나를 향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우리도 눈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의 마음을 눈물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삶에 대한 만족도는 5000달러 안팎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페루 등과 비슷합니다. 경제가 숨 가쁘게 성장하는 동안 이면에는 한국인의 정신건강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와 이혼 건수가 급증하는 우리에게 해답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에 온갖 갈등과 다툼과 비난이 생깁니다. 사랑이 없기에 우울하고 가정이 어둡고 답답합니다.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 사랑이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삭막하고 답답한 세상이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자
삼상 20장 24~31절 / 이근수목사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합니다.
삼국지
옛날 얘기지만 배울 것이 있습니다. 삼국지에는 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유비와 조조입니다.
유비는 일을 혼자 하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그와함께 일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능력 있는 제갈 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씩이나 방문하여 자기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삼고초려(三顧草廬)라고 합니다. 삼고(三顧)란 임금님이 특별히 신임하는 자를 방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유비 주변에는 제갈공명, 조자룡, 장비, 관우 등 탁월한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똑똑한 조조는 혼자 일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워낙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조는 주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하면 된다고 오만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조조 주변에는 탁월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비는 주변 사람을 귀히 여겨 시너지 효과를 내어 승리하는 사람이었고, 조조는 혼자서 하는 독불장군이었습니다.
1. 주변 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 사울
사울 왕은 주변 사람을 아낄 줄 몰랐습니다.
국가적 위기에 용감히 나서서 적장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을 사울은 라이벌로 생각해 미워하였습니다. 왜요? 사울의 컴플랙스 때문이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여인들이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천천”이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애국 공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을 구해주는 요나단 [12,13]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아들 요나단이 나섰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주변 사람을 아낄 줄 몰랐는데 요나단은 주변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사울은 주변 사람을 볼 줄 줄 몰랐는데 요나단은 주변 사람을 볼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변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까? 무시하십니까?
주변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오.
부모님은 자녀를 금 쪽 같이 여기시고, 자녀는 부모님을 생명같이 여기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하늘 같이 여기시고, 남편은 아내를 땅 같이 여기십시오.
직장에서는 상사 동료 부하 없이는 나도 없다고 알고 귀히 여기십시오.
목사 전도사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사랑으로 먹이십시오
장로님은 성도들을 가족같이 사랑하십시오,
집사님은 성도들을 형제자매 같이 사랑하십시오,
부서장님은 부원을 동역자로 알고 귀히 여기십시오.
모든 직분자는 어린 성도들을 사랑으로 붙들어 주고 격려하고 귀히 여기십시오. 우리 모두가 이맇게 할 때 홍성교회는 좋은 교회가 됩니다.
사랑하는 홍성교회 성도 여러분! 이 목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편애하지 않고 모두 똑 같이 사랑합니다.
때로 목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목회를 어렵게 하고, 경우 없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으로 여기고, 아직 신앙이 미숙해서 그런 줄로 이해하고, 신앙이 성숙할 날을 기대하고 늘 달게 받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어서 신앙이 자라기를 기도하고 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님들도 주변 사람을 사랑하세요.
옆 사람과 인사 합시다. “주 안에서 사랑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귀히 여겨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살리려고 애썼습니다.
요나단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진실한 친구였습니다.
진실은 가장 순수한 금보다 더 순수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영원히 빛나는 태양이며
약속의 보증이고 모든 거짓을 발로 밟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거짓되었지만 아들 요나단은 진실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했고 친구 다윗에게 진실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다윗을 구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믿음도 잃고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망합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진실해야 합니다.
도움을 주는 친구(잠27:10)
친구는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주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후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세요.
그래야 후에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병들어 고생하는 성도에게 무명으로 구제하여 돕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미 여러번 봉사를 하셨습니다. 제가 받아 전달을 하고 부목사님들도 전달을 했는데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책에 봉사를 적어놓으시고 집사님과 사업과 자녀들에게 만복으로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윗에게 자기 가족을 부탁한 요나단 [15]
요나단은 다윗이 차기 이스라엘 왕이 될 것으로 믿고 요나단에게 자기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실 요나단은 왕자이기 때문에 차기 왕의 자리는 자기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기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식구를 부탁하였습니다.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7]
그러면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의 다윗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요일3:18)
일부 사람들은 말로만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가까운 주변 사람에게 말부터 부드럽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하세요. 인격을 무시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를 높여주는 말을 하세요. 그러면 나도 존경 받고 사랑받습니다.
요나단의 다윗 사랑은
1) 차기 왕권을 포기한 사랑
2) 부끄러운 왕관을 얻기보다 다윗과의 진실한 우정을 더 소중히 여긴 사랑
3) 요나단은 다윗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
주변 사람을 귀히 여긴 요나단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주변 사람을 사랑합시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동료를 사랑합시다.
내 교회 목사님 전도사님을 사랑합시다.
내 교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구역장님 권찰님 선생님을 사랑합시다.
공연히 뒤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헐뜯고 비난하지 맙시다.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마세요.
다 들립니다. 다 듣습니다. 다 압니다. 비밀은 없습니다.
사울이 아들도 죽이려고 함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할 때 사울은 화가 났습니다.
요나단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주위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요나단과 사위 다윗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주를 받고 한 날 한시 4부자가 전사하고 나라도 망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도피시킴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악한 마음을 안 요나단은 다윗을 살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과 약속한 장소에 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도주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사울을 피해 다윗은 도망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우리들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시려고 당하신 멸시 천대 그리고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입니다.
세종대왕의 무례한 신하 사랑
세종대왕이 장원급제한 젊은 인재들을 궁중으로 불러 성대하게 축하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급제한 사람들의 ‘가정 배경, 부모, 출신지, 학문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지막 성삼문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성삼문은 세종대왕에게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인물의 됨됨이를 먼저 보지 않으시고, 그가 어떤 명문가의 자제 인지, 그의 아비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에 대해 하문 하시니 오늘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소생은 지리산 촌 동네의 이름 없는 쇠락한 선비 집 가문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죽도록 일할 준비가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되어있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답변이었습니다. 대전 내시가 이를 듣다못해 중간에 “쉬이” 하며 성삼문에게 눈치를 주었습니다.
이에 삼문은 오히려 내시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이런 발칙한 일이 있나. 대전 내시 주제에 감히 신하된 자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는데 중간에 나서다니!
축하연이 아주 머쓱해졌습니다. 그때 세종은 성삼문에게 말했습니다. ”바른 말이고 옳은 말이다.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나를 많이 도와 달라“
세종이 신하에 대한 예우를 갖추자 삼문은 크게 절하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했습니다.
말년에 삼문은 세종에게 옛일을 추억하여 당시 자신의 과도한 혈기를 두둔해준 임금님의 따뜻함에 머리를 숙였고 이런 군왕이라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대왕이었습니다.
세종은 주변 사람 특히 젊은 엘리뜨 신하를 귀하게 여겨 많은 충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집현전을 만들어 학문을 연구하게 하여 한글을 위시해서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많은 과학기기를 발명하여 조선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젊은 신하 성삼문의 방자함을 너그럽게 받아준 세종대왕에게 매료되었었습니다. 저도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울며 헤어짐[41]
요나단은 다윗을 귀히 여겨 그가 숨어 있는 수풀로 가서 절을 하고 입을 맞추고 눈물로 헤어졌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기원함[42]
요나단은 다윗과 헤어지면서 평안을 빌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요나단은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기를 기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만이 험한 세상에서 온갖 시련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변을 귀하게 여기세요.
고난당하는 주변 사람을 귀하게 여기세요.
그럴 때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 국가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결론
주변 사람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다윗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10년의 도망자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다윗에게 축복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혼자 도망을 다니던 다윗은 400명 아둘람 공동체를 얻고 그 뒤 600명을 얻었고 마침내 10년의 고난학교를 마치고 다윗은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왕관을 받아썼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온 평화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을 찾아 재산을 찾아주고 궁중에서 자기와 함께 먹고 살게 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합시다(새가정십계6)
삼상 20장 30~34절 / 백구영목사
1889년에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는데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사촌 동생과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성격이 난폭했고 어머니는 가정보다 사교활동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고아가 된 이 아이는 알콜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겨졌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는 이리 저리 전전하다가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1차 대전 후, 그는 정계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시는 정치 활동을 안 하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옥 후 더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1933년에 독일의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계는 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그의 광기에 수천만명의 인류가 희생됐습니다.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다른 아이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는데 경건한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캔사스 농촌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의 신앙 생활에 유익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경건히 무릎꿇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주었습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 습관을 지켰습니다. 이 소년도 군에 흥미를 가지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고 명예롭게 졸업을 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이 두 동갑네기들은 전쟁터에서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11개월간 이들 동갑네는 한 사람은 독일 총통으로 다른 한 사람은 연합군 사령관으로 싸웠습니다. 그가 바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입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그의 지하 방카에서 스스로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는 환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세계의 애도를 받았습니다. 이 두 동갑네기의 파란만장한 생애 얘기는 부모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아이와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부모 자식간의 얘기입니다.
사무엘상 20:30-34절의 말씀은 사울왕과 요나단의 얘기입니다. 다윗의 덕망 때문에 왕좌의 불안을 느낀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충성심을 믿고 사랑하는 왕자 요나단은 다윗을 피신시킵니다.
이 사실을 안 사울왕은 요나단에게 대노하여 욕을 하면서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변호해 보려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하자 노한 사울왕은 아들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아버지의 의중을 확인한 요나단은 상심하여 음식을 전폐하고 슬퍼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6:4절의 말씀은 부모의 책임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때로는 부모의 생각보다 자녀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으며 부모의 권위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교훈 안에서만 권위가 인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존중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 자녀존중입니다.
에베소서 6:4 전반절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부모의 권위로 무리하게 자녀들을 억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권위는 보호와 양육의 권위이지 지배의 권위가 아닙니다.
성경은 자녀가 "여호와의 주신 것"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내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방인의 생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부끄러운 일 인줄 알지만 자녀들에게 불친절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모릅니다.
화는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만듭니다. 친구에게 화를 내면 친구가 멀어지고, 상사에게 화를 내면 해고를 당합니다. 동료에게 화를 내면 동료가 곁을 떠나고, 고객에게 화를 내면 고객을 잃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녀에게 화를 내면 자녀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적은 예로 우리는 두 장면을 상상해 볼수 있습니다. 한 장면은, 아이들 방을 노크를 하고 "나 들어가도 되니 ?"하고 허락이 있은 후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교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장면은 "뭘 하고 있어?" 하면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부모입니다. 이것은 세속적 권위요, 이방인의 권위입니다. 기독교적 교양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것이 자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를 낙심케 하지 않는 것이 자녀 존중입니다.
골로새서 3:21절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6:4절의 말씀과 함께 부모의 책임을 강조한 유일한 말씀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꿈과 포부가 있습니다. 만일 학교에서 30년 후의 자기 명함을 찍어오라는 숙제를 내 준다면 모두 대통령 아무개, 대기업 회장 아무개, 대장 아무개, 대학 총장 아무개라고 명함을 찍어 올 것입니다.
이 꿈과 포부는 부모님들에 의해 잘 존중될 때 실현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대로 소멸됩니다. 그 이유는 부모님들에 의해 존중되지 못할 때 낙심하고, 낙심할 때 소멸되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왜 어머니를 위대하다고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한 학생이 대답하기를 "우리 집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이는 어머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요 존중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벨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말을 잘 듣는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육의 귀로 듣는 것이 존중이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이 사랑이요, 영의 귀로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듣는 귀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신뢰감을 가지고 자랍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라는 것입니다.
킹 덩컨(King Dancan)이란 사회 심리학자는 "듣는 것은 예술이며 사역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 들을 때 나에게 말하는 자녀들에게 신뢰감과 자신감과 위로와 치료와 변화와 새 창조와 새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양육의 지식과 훌륭한 비법을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잘 듣는 것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말의 무시, 의견의 무시는 자녀들을 낙심하게 하고 부정적이게 하고 말의 존중, 의견의 존중은 자녀들이 긍지를 갖게 하고 긍정적이게 합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자녀들의 의견을 묻고 결정에 동참하게 하는 것은 일을 결정하고 책임감을 갖게 하는 산 교육이요 신뢰와 자신감을 갖게 하는 훈련이요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자녀 존중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에베소서 6:4 하반절에 보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잠언서를 제외하고서는 부모의 책임을 가르치신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바울 사도는 부모의 책임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교훈이 대부분 "자녀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고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교훈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자녀의 도리보다 부모의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도리는 구약의 계명을 소개할 뿐이지만 부모의 책임은 새롭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노엽게 말라, 낙심할까 하노라"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미래의 끼치는 영향이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보다 더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행, 불행과 천당과 지옥을 가는 것은 부모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야 합니다. "하늘 아래 부모노릇 못하는 부모는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옛말은 세속적인 속담이요, 성서적 교훈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부모 노릇 못하는 부모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교양이 무엇입니까? 경건의 모범입니다.
요한복음 17:19절에 보면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의 책임이 가장 성공적인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본을 보이고, 정직의 본을 보이고, 성실의 본을 보이고, 근면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렇게 변해 갈 때 자녀들도 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녀들의 잘못을 고쳐주는 애정입니다. 자녀에 대한 과보호나 무조건의 사랑은 학대나 무관심 못지 않게 자녀들에게 해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폐해를 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부모, 좋은 부부, 좋은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좋은 교인도, 좋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가정을 만들어 좋은 교인,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요나단의 믿음: 참된 우정의 길
사무엘상 20:24-34에 나타난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성경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 중 하나로 꼽히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 특히 사무엘상 20장 24-34절에 나타난 요나단의 믿음과 헌신에 대해 함께 나누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진정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그 약속, 목숨을 걸고 지키다
사무엘상 20장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 왕의 죽음의 위협 속에서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입니다. 사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요나단은 자신의 친구 다윗을 돕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함께 계획을 세우고,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버지 사울의 진짜 의도를 알아내어 전해주기로 약속합니다.
"그 이튿날 곧 초하루에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삼상 20:24-25)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의 식탁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빈자리는 마치 무언의 시험대처럼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첫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무슨 이유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둘째 날, 다윗의 자리가 또다시 비어 있자 사울은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순간이 요나단에게는 중대한 결정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윗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왕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과 다윗 사이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다윗이 베들레헴 가족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허락을 구했다고 사울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함께 세운 계획의 일부였고, 요나단은 그 약속을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 친구를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다
요나단의 설명을 들은 사울의 반응은 격렬했습니다. 사울은 분노로 가득 차 요나단을 저주하며 모욕합니다.
"패역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가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삼상 20:30-31)
이 부분은 요나단이 친구를 위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사울은 자신의 아들을 "패역한 계집의 소생"이라고 부르며 모욕했습니다. 게다가 요나단에게 다윗을 선택한 것이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수치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가장 민감한 부분을 공격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은 다윗이 살아 있는 한 요나단과 그의 왕국이 견고히 서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는 요나단에게 왕위 계승자로서의 미래를 다윗 때문에 잃게 될 것이라는 직접적인 경고였습니다. 사울은 마지막으로 다윗을 데려와 죽이라고 명령함으로써 그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요나단은 이 순간 엄청난 압박과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왕인 아버지의 명령, 자신의 왕위 계승권,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모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보다 다윗과의 우정과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변함없는 사랑, 끝까지 지켜낸 우정
요나단의 반응은 그의 진정한 품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섭니다.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니" (삼상 20:32)
요나단은 다윗이 죽을 만한 일이 무엇인지 물으며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는 권력과 지위보다 공의와 진실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답변은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는 폭력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삼상 20:33)
이 순간 요나단은 아버지의 진정한 의도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다윗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창이 요나단을 향해 날아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균열을 상징했습니다.
"요나단이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일어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수치롭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삼상 20:34)
요나단은 분노와 슬픔으로 식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아버지의 불의한 행동에 대한 항의를 표현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슬퍼한 이유가 자신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을 위하여" 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요나단의 사랑이 얼마나 이타적이고 깊었는지를 보여줍니다.
🌟 요나단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요나단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우정은 희생을 동반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권리, 지위,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윗을 위해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친구의 안전과 행복을 우선시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인 사울과 직접적으로 대립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셋째, 진실된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요나단은 단순히 다윗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함으로써 그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요나단이 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요나단과 같은 믿음과 헌신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진실하고 깊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정직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지했습니다.
둘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말에 책임을 지고,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때로는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불의한 의도에 맞서 다윗을 위해 변호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불의를 볼 때 침묵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단은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다윗을 지지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계획과 야망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마치며: 참된 우정의 유산
요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우정과 헌신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상 20장 24-34절에 나타난 요나단의 믿음은 단순한 성경 이야기가 아닌,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교훈입니다.기독교
여러분은 어떤 '요나단'이 되고 싶으신가요? 또는 여러분의 삶에 어떤 '요나단'이 있나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진실된 사랑과 헌신으로 이웃을 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요나단과 같은 참된 친구를 보내주시고, 또한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합니다. 다음 번에도 귀한 성경의 이야기로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의로운 항변과 미움받을 용기
삼상 20:24-34 / 행복한 말씀
다윗을 찾는 사울(삼상 20:24-29)
24 이리하여 다윗은 들녘에 숨어 있었다. 초하루가 되었을 때에, 왕이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았다.
25 왕이 언제나 하듯이 벽을 등진 자리에 앉자, 요나단이 왕의 맞은쪽에 앉았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았다.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26 그런데도 그 날은,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울은 다윗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몸이 부정을 타서 아직 깨끗하여지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27 그런데 초하루가 지난 다음날 곧 그 이튿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사울이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새의 아들이 어제도 오늘도 식사하러 나오지 않느냐?"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다윗이 저에게 베들레헴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였습니다.
29 자기 집안이 베들레헴 성읍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자기 형이 다녀가라고 했다고 하면서, 제가 자기를 아낀다면 자기 형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저에게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임금님의 식탁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분노하는 사울(삼상 20:30-34)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녀석과 단짝이 되다니, 너에게도 부끄러운 일이고 너를 낳은 네 어미를 발가벗기는 망신이 될 뿐이다.
31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너의 나라도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아라. 빨리 가서 그 녀석을 당장에 끌어 오너라. 그 녀석은 죽어야 마땅하다."
32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그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기에 죽어야 합니까?" 하고 항의하니,
33 그 순간, 사울이 요나단을 찔러 죽이려고 창을 뽑아 겨냥하였다. 그제서야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4 요나단도 화가 치밀어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모욕한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달의 이틀째가 되던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말씀묵상>
사울이 다윗의 빈자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울의 본심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되었습니다. 초하루 잔칫날에 다윗은 계획대로 참석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자리를 의식하며 그가 부정해서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초하루 잔치는 제사를 동반했기에 시체 등 부정한 것을 만져 부정해진 사람은 하루 동안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초하루 잔치는 보통 3일간 열리는데, 다윗이 둘째 날도 참석하지 않자 불안감을 느낀 사울이 다윗의 행방을 묻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간절히 원해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베들레헴 가족에게 보내 주었다고 대답합니다. 다윗과 약속한 대로 말한 요나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동태를 살핍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갈등할 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평화’(빌 4:7)와 ‘평화의 하나님’(빌 4:9) 모두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읽으며 갈등을 해결하는 그리스도인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을 일일이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로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적수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그분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동행할 가족이자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평화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행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 편을 드는 요나단에게 사울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나요?
다윗을 편드는 요나단에게 사울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자식'(30절)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반역을 일삼는 비뚤어진 여자의 아들'입니다. 이는 요나단을 더는 자기 아들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다윗을 택한 일이 요나단과 그의 어머니에게 수치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순간, 사울 가문의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정황을 알고 있음에도 요나단을 다윗이 죽을죄를 짖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이성을 잃은 채 창을 던져 아들인 자신을 죽이려 드는 아버지의 모습에 요나단은 깊은 배신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그는 다윗에 대한 연민으로 먹지도 않고 고통의 밤을 보냅니다. 이는 친구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요나단처럼 기꺼이 미움받을 용기가 있나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사는 사람은 누군가가 밉고 싫고 죽이고 싶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를 향해 증오를 품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약 4:1).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는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감싸게 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반성하게 됩니다(마 5:44). 나 자신을 돌아볼때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공동체를 돌아볼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서로를 살리고 있습니까? 서로를 살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서로를 죽이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불순종하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를 살리는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사로잡힌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게 됩니다. 날마다 정결하게 하시는 말씀의 샘으로 나아가 차오르는 욕심과 분노를 씻게 하소서. 삶을 세밀히 도우시는 하나님 약속을 의지하며, 외면당하고 손해 보더라도 당당히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요나단의 진미(眞美)
삼상 20:24-34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윗이 사울의 손에 들게 되면 죽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첫 날에 식사 자리에 나가지 않았지만 사울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25절에 “ 왕은 평시와 같이 ”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다윗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잔치 자리에 다윗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는 의무를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결석하지 않았더면 틀림없이 그의 생명은 매우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구책을 위해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잔치 첫 날에 다윗을 놓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28절에 “ 그가 정녕 부정한가 보다 ” 어떤 사고로 부정이 생겼으면 옷을 빨고 맑은 물로 몸을 씻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못하고 저녁까지 못 나오는 율법을 사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둘째 날에도 물었습니다. “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식사에 나오지 않느냐? ” 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습니다. 그러나 멸시조로 “ 이새의 아들 ”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변명을 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자리에 참석치 못함은 결코 잘못이 아니며 지금 맏형의 부름을 받고 가족들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우의를 지속하며 친척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종이 그런 곳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또 다윗이 겸손히 허락받고 갔으며, 나는 상관으로써 허락했고 다윗은 결코 정부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울은 매우 감정이 격해서 먹이를 놓친 사자와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그의 분노를 요나단에게 쏟아부었습니다. “ 패역부도한계집의 소생 ” 이라 하여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매춘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패역부도하다 하였으니 반역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야만적인 사람임에 몹시 슬펐고 극도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짐승같은 사람에 슬펐고 하나님의 벗으로 알고 있는 다윗이 그렇게 학대받는 것에 슬펐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괴로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인다는 데는 요나단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32절에 “ 그가 죽일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라고 물었습니다. 관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당하는 모욕에는 잘 참을 수가 있으나, 친구가 모욕을 당할 때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요나단은 죽음의 위험에 빠질 뻔 하였습니다. 지금 사울은 너무 난폭해서 요나단을 향해 33절에 “ 단창을 던졌다 ” 고 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왕국은 요나단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은 요나단의 생명을 노린 것입니다. 노여움은 인간을 극도로 어리석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에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틀림없이 결정된 줄을 실지로 확인하자 즉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이 과녁이 된 것을 생각하며 좋은 기회로 알고 자리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슬픔 중에 있을 때는 거룩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손님은 불안에 떨게 되고 그 잔치는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잔인한 자는 자기 몸을 해롭게 합니다. 다윗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은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고 도와주기 시작했고,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둘이 다윗을 미워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은 나라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자기 자손에게 계승시켜 영원히 복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있어서 만만치 않은 적였습니다. 골리앗을 때려 눕히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민심이 다윗에게로 기울어지자 사울 왕은 왕위 계승권을 두고 생각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당장 자기 지위마저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울은 요나단과 신하들을 불러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 우리아버지가 너를 죽이려 하니 너는 은밀한 곳에 숨어 있거라 내가 우리 아버지의 동정을 봐서 네게 영접하마 ”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항의했습니다. “부왕이시여 다윗에게 범죄하지마소서 그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그가 행한 것은 선한 것 뿐이니이다. 그는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과 나라를 구한 충신입니다. 어찌하여 왕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려 하나이까? 왕이여 다윗을 해하지 마소서 ”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울의 마음이 너그러워졌습니다. “ 내가 왜 다윗을 해하려고 했던가 다윗은 충신이요 공신이며 내게는 은인이요 또 내 사위가 아닌가? 요나단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다윗을 해하지 않으리다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노니 다윗이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라 ” 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안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너그러운 마음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싸우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다윗에게 사울은 창을 던졌습니다.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벽에 박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그 밤에 몸을 피해 라마로 가서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내죄과를 대어라 지가 있거든 네 손으로 죽여라 네 아버지 손에 죽기는 싫다 ” 요나단은 변명을 했습니다. “ 우리 아버지가 절대로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 고 하자, 다윗은 “ 그렇다면 지난 밤에 나에게 창을 던진 것은 무엇이냐 ” 고 물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진정시켰습니다. “ 내 아버지가 큰 일이든 적은 일이든 내게 알리지 않고는 행하는 법이 없으니 기회를 보아 왕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 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월삭입니다. 왕과 신하가 한자리에 앉아 만찬을 먹는 날이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불참하였습니다. 사울 곁에는 왕자 요나단과 군대장관 아브넬이 앉았고, 다음 자리인 다윗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첫 날에 다윗이 보이지 아니하자 사울은 생각하기를 무슨 변고가 있으려니 여겼습니다. 이튼날도 보이지 않자, 사울이 요나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요나단이 대답하기를 “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내려가기를 간청함으로 허락하였나이다 ” 그 말이 떨어지자 사울의 입에서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 이 패역부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너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가 되는 줄 깨닫지 못하느냐 이새의 아들의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와 네 나라가 평안치 못하리라 당장 다윗을 불러오너라 그는 죽여야한다 ” 고 하자 요나단이 “ 다윗이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 라며 항의 했습니다. 이제 사울은 대드는 아들 요나단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은 그 날 입에 음식을 대지 않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들로 나갔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다윗과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에셀 바위 아래 숨어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화살을 쏘아 데리고 간 소년에게 “ 아이야 화살이 네 앞에 있지 않으냐 빨리 주워오너라 ” 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는 다윗에게 절망을 알리는 비보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확실하다는 약속입니다. 소년은 영문도 모르고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돌아갔습니다. 다윗이 바위 남쪽에서 나와 요나단에게 세 번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부둥켜 안고 서로 입을 맞추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보다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내 자손과 내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일어나 방랑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하라는대로 순종만 하면 왕위는 자기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의를 짓밟아 가며 왕관을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 가면서라도 정도를 걷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왕위가 탐나서 요나단을 친구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장차 자기가 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다든가, 요나단을 거세하고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불타는 정열은 사람이 사람의 본분을 지켜 정도를 걸어갈 뿐이지 명예를 탐한다든가, 권세를 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과 요나단은 뜻이 같고 마음이 같았습니다. 계승문제로 큰 이해관계가 있었음에도 다윗과 요나단이 한치의 탐욕도 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려면 이런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효자였습니다. 아버지의 술책과 정책은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불의는 미워하고, 아버지의 불행은 대신 짊어졌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불명예를 만분의 일이라도 덮어 드리려는 마음에서 아버지에게 바른 소리를 했고 아버지와 함께 최후를 마쳤습니다. 부모의 가르침과 뜻에 자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 주 안에서 ” 라는 전제 밑에서 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될 경우에는 맹종만이 효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요나단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부왕의 뜻에 단연 반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을 처형해야 할 죄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은 언제나 선이고, 악은 언제나 악입니다. 내 이해와 결부해서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는 둔갑은 용서할 수 없는 사특한 것입니다. 힘이 정의라고 믿고 날뛰는 사람에게 정의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요나단의 공의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에게는 이런 공의도 우직으로만 보여지기 때문에 존경은 커녕 도리어 매도하려 듭니다. 그를 살려 두는 것이 너와 네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큰 손해가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고 사울은 노발대발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냉담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왕이 되도록 되어 있다면 구태어 다윗을 살해할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만일 다윗이 왕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일이 과연 성사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일에 도전하는 것처럼 무지몽매한 인간은 없습니다. 말로는 주의 뜻을 외우면서도 권모술수로 이 뜻을 꺾으려는 행위를 자행하지 말고 믿는 자 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 너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감찰하신다 ” 는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배신행위가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요나단은 다윗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켰으며 그것은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와 교역자 사이에, 교회와 교회 사이에, 그리고 목사와 목사 사이에 신의가 있어야겠습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 신앙이 살고, 신앙이 꽃피는 곳에 신의가 결실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주처럼 아롱질 때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우정이 조성됩니다. 진실한 참 친구인 예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하나가 된 것처럼 예수님과 우리도 하나가 됩시다. 나와 예수가 하나 되기를 요나단과 다윗같고, 그래서 나와 너 사이의 우정이 요나단과 다윗같이 되면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이 우의와 사랑은 반석같이 굳어질 것입니다. 우정은 강합니다. 우정은 깨뜨릴 수 없습니다. 우정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환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수록 우정은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도들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 요나단과 다윗 사이같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우리 사이에 계시고, 여호와께서 우리 자손과 우리 자손 사이에 영원히 계시는 진실로 아름다운 우정이 맺어지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