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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 욥 19,1.23-27ㄴ
제2독서 : 로마 5,5-11
복 음 :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연옥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
-온유와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죽어서가 아닌 이미 지금 여기 현세에서 시작되는 천국이요 연옥이자 지옥입니다.
이미 현세에서 마치 확고부동한 계급제도처럼 천국과 연옥과 지옥이 나뉜 것처럼 보입니다.
장소나 환경을 보면 정말 천국 같은 곳에 사는 이들도 있고, 연옥이나 지옥 같은 곳에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All souls)’입니다.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들,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어제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All saints)’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날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제는 천상영혼들을 위해 기도했고 오늘은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제 저녁 늦게 아주 멀리서 수도원을 찾았던 자매를 잊지 못합니다.
갖가지 질병에 불우한 환경에서 오로지 믿음으로 기적처럼 살아 온 분입니다.
20여년 이상 보아 온 분이기에 그분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 왔고 살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언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지 끝이 보이지 않는 갈수록 힘들게 느껴지는 그 자매의 삶입니다.
“자매님은 살아서 연옥 고통을 겪으며 정화되셨기 때문에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자매의 시련과 고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심에서 우러난 위로의 말에 자매는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연옥 같은, 아니 지옥 같은 환경에서 천국을 사는 자매라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수사들에게 선물하고자
손수 손으로 뜬 겨울 목도리 12개를 들고 그 먼 거리를 병든 남편과 함께 온 것입니다.
그러니 위령의 날은 연옥영혼뿐 아니라 연옥 같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연옥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이런 분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오로 사도,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의 현세 삶의 환경 역시 연옥이나 지옥과도 흡사했지만
이분들은 모두 열악한 환경 중에도 천국을 사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천국이나 연옥, 지옥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의 관계 속에 연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늘 기도하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며 이웃과 평화로이 공존 공생할 때 바로 천국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지혜서에서 소개되는 의인들의 삶이 이렇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연옥 같은, 지옥 같은 환경 중에서 천국을 사는 의인들에 대한 마지막 묘사가 더 은혜롭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을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한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하시기에 아무도 이런 의인들을 다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천국을 사는 믿음의 의인들입니다. 오
늘 로마서의 불순종의 아담과 순종의 그리스도의 대조도 의미심장합니다.
주님께 불순종으로 천국에서 연옥 같은 삶으로 추락한 아담과는 대조적으로
주님께 철저히 순종함으로 연옥 같은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천국을 사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위령의 날,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연옥 같은 현세의 삶 중에도
우리 모두 성인다운 천국의 삶을 살도록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연옥 같은, 지옥 같은 환경에서 천국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이 복음 말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 말씀처럼 늘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옥 같은,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인간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성인다운 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연옥에서, 지옥에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인생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학교이고 우리는 평생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입니다.
점차 주님을 닮아가면서 우리의 불편한 짐은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뀌고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연옥 같은 환경 중에도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편116,9).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안타까운 분과 종종 이야기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 지를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일이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은지, 나쁜 일들은 모두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 같다면서 왜 이렇게 삶이 꼬이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특별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러한 아픔을 주시냐고 하시지요.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분의 삶에 어떤 하느님의 뜻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이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면서 힘차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왜 사람들마다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요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분명히 과거보다 더 나은 조건이 되었어도, 오히려 힘들다고 또 불행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현대의 과학 발전으로, 특히 대중 매체와 인터넷 발달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사람을 너무나 쉽게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이와 비교를 하다 보니 자신은 너무나도 불행의 조건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답니다.
그러나 행복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과거의 나와 비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잘 나가고 건강하다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분이 있을 수가 있지요.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못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역시 염려하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니까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희망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잘 나가는 미래의 나를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고인을 위해서,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분들을 기억하면서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역시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만을 떠올리면서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내 자신을 떠올리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고인을 위해서
또 나의 이웃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참 행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교구에서는 용인 성직자 묘지와 용산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합니다.
저는 오늘은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정성껏 기도를 하면 전대사가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본당에 있을 때 장례가 나면 연도를 가곤 했습니다.
유족들께서도 고마워하셨고,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천안에도 갔었고, 멀리 갔을 때는 안동에도 다녀왔습니다.
어릴 때는 연도가 길기도 하고, 리듬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지만
어릴 때 함께 했던 연도가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도는 성서말씀, 시편, 성인호칭기도, 찬미가, 주님의 기도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죽음은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죽음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끝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하루 감사할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바쁜 일상 중에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면 감사할 일, 고마운 일, 행복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받는 것들이 많았는데 주는데 인색한 적도 많았습니다.
감기가 찾아왔었는데 저에게 휴식의 필요함을 알려주고 떠났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며칠 아프셨습니다. 가족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파란하늘, 고운 단풍, 흘러가는 구름, 귀에 스치는 바람을 보고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다.
제가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사람들을 보내 주셨고,
말하고, 읽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현재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고통을 씻어 주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현실에서의 삶만이 있다면 고통과 아픔 앞에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가난한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 이런 이들은 참된 행복을 만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현재는 천상에서의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위령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은 유난히도 단풍의 아름다움에 대해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같습니다.
단풍은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더 매료당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어떤 매료당함입니다. 분명,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사실, 잎은 새싹일 때부터 단풍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잎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짐의 아름다움입니다. 퇴색의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이미 새싹일 때부터 품어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의 단풍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나날이 죽어가는 우리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우리는 단풍의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때문에 끄달림 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인생의 처지를 단풍에서 보면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까닭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성숙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성장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며,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미치면, 사실 죽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애착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죽는 법을 배워야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남을 위한 죽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
간은 살아있는 죽음을 통해 이기적인 자아의 지옥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니 부활은 인간이 살아있는 죽음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활은 자신의 몸 안에 본래부터 살아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는 사건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한가운데 생명이 있고, 죽음 한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 없는 생명도, 죽음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4,10)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벌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자매님이 같은 신자인데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괴롭힌다고 합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벌이라고 받게 하고 싶지만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참고참고 하다가 병이 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의가 빠진 자비는 비겁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지옥이고, 또 그래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연옥입니다.
왜냐하면 평생 나쁜 짓만 하다고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아무런 보속도 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주어도 항상 벌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봅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갖은 첫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고 그 죄도 용서를 받았지만,
하느님의 다윗의 집안에 평생 칼바람이 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또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며
자신의 소실들이 겁탈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병적조사를 해서 나중에 뉘우치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세 가지 벌을 준비하십니다.
삼년 동안의 가뭄, 석 달 동안 칼에 쫓기는 것, 그리고 사흘 동안의 전염병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짧은 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날 동안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을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같은 죄의 벌을 위해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양의 보속을 내놓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결코 사흘의 전염병이 다른 고통보다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막심 퓌상의 연옥실화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성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회개한 한 죄인이 하느님께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죽어서 3일간 연옥에 있든지 또는 2년간 이 병을 참아 받고 바로 천국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병자는 주저하지 않고 연옥을 원했습니다. 얼마 후에 천사가 연옥에 갔는데 그 환자가 천사를 보며 말했습니다.
“사흘만 있으면 될 이곳에 나는 벌써 몇 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여기 온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청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인간 세계에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거기서 가장 괴로운 병을 몇 해라도 즐거이 참아 받겠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병자는 연옥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하고
그저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쁨으로 먼저의 병을 잘 참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치릴로는 연옥의 아주 잠시의 고통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했고,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에서 당한 라우렌시오의 고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이 크다보니 연옥에서의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보다 훨씬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보속의 시간이 짧다고 결코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위 세 가지 제시된 벌을 다 거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죗값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이고 이는 참으로 죄를 뉘우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죄가 용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벌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합니다.
혹은 우물쭈물 하다가 그 벌을 받기 전에 죽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라도 죗값을 치르고 깨끗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죄에는 반드시 죗값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면, 어떻게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죗값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에서 키레네사람 시몬이 져야 했던 고통이 있는 것처럼,
내 죄에 대한 나의 보속도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분이 해 주시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분에게 전가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청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옥은 결국 우리가 남은 죗값을 청산할 수 있는 은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보속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로마에서 한 방탕한 부인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영혼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나 다만 때때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갑작스레 그 천한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범한 죄가 무서워져 통회하고 고백하여 올바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연옥 영혼이 은인을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감탄할 만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영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는 영혼들은 하느님 앞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백성 7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죽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백성이 아닌 자신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의 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항상 비르짓다의 기도를 추천해줍니다.
1년 동안 바치는 주님수난 15기도는 15명의 연옥영혼을 구해준다는 약속이 있고,
12년 동안 바치는 주님성혈 7기도는 자신 또한 연옥에 가지 않게 해 준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굳이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나 1년간의 금식보다 더 낫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나의 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큰 보속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보속을 다 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잊혀진 연옥영혼들을 위해서도 공로를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사랑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기억을
아프게 떠올려봅니다.
이별의 아픔 또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은총임을 믿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삶이 있기에
죽음 또한
우리와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사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삶속에서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사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관문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죽음 앞에서
찾게 되는 유일한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죽음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겸손한 순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는
죽음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뜨겁게 깨닫습니다.
죽음을 위해
모든 작별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