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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삼상 20:35-42
35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36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37 아이가 요나단이 쏜 화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이르되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38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39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40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읍으로 가라 하니
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다윗의 성공은 요나단에게 이양될 왕권과 사울의 왕조가 부정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입장에서는 다윗을 자신의 궁전 밖으로 쫓아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습니다. 사울은 이성을 잃었으며, 다윗은 더욱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희생이 많이 따르는 선택을 합니다. 그는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35-39) 요나단은 다윗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아버지 사울 왕은 이제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은 선택은 다윗이 왕궁을 떠나 피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과 요나단은 헤어져야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화살을 쏩니다. 그리고 종에게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종이 화살 근처에 다다랐을 때 요나단은 종에게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하고 외침으로 다윗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요나단의 외침을 들은 다윗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입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일말의 희망은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다윗은 이제 길고 긴 도망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40-42)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종에게 준 다음 그것들을 가지고 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 종을 돌려보낸 후 다윗과 요나단은 마주 섰습니다. 다윗은 세 차례에 걸쳐 요나단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요나단에 대한 정중함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요나단은 13절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다윗을 평안히 보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입맞춤은 그들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평안을 빌면서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선언한 평화는 아직 평화로운 상태가 아닌 다윗의 현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이들의 우정과 이들의 계약에 대한 유대감과 신뢰성을 쌓는 것으로서,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또한 빼앗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비통한 슬픔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의 언약 안에서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다윗과 요나단 사이를 연결시키는 분으로만 찬양 받으신 것이 아니라. 또한 다윗의 집(후손)과 요나단의 집(후손) 사이의 관계를 보장하는 보증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는 우정의 아름다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두 사람의 우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가져오기 위하여 위험스럽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또한 희망이 요구되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적 용 :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온전해집니다. 이를 성경은 “주 안에서”, 사랑하고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할 때와 그냥 사랑할 때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을 서로 돌아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지체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피로 세우신 영원한 새 언약 안에 들어와 그 안에 한 몸이 되었음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영원히 한 몸이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들을 향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이 다른 지체들을 향해 사랑과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나를 살펴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0:35
아침에 -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기로 약속한 제 3일(5, 19절) 곧 이틀 동안의 월삭 잔치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을 가리킨다. 작은 아이(* , 나아르) - 차라리 '소년'으로 번역함이 자연스럽다(22절; 14:1)
=====20:36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 요나단은 아이가 달려간 거리보다 더 멀리 활을 쏘았다. 이것은 요나단이 병기 든 소년에게 '살이 네 앞편에 있다'(22절)라고 말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의도적 행동이다. 즉 요나단은 다윗과 사전에 약속하기를, 만일 자신이 소년에게 '살이 네 앞에 있다'라고 말할 경우 사울이 그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알고 도망쳐야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22절).
=====20:37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 아마도 요나단은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을 다윗도 족히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 말을 외쳤을 것인데, 이것은 다윗에게 도망쳐야 될 필요성을 고지(告知)하는 암호(sign)였다.
=====20:38, 39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 요나단이 이처럼 소년을 독촉한 이유는 소년으로 하여금 숲 속에 숨어 있는 다윗을 발견할 여지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Keil, Fay). 그리고 이 의도대로 소년은 살을 주워오기에 바빠 다른 눈치는 전혀 채지 못했다(39절). 살을 주워 가지고 - 히브리 본문에는 여기 '살'(* , 헤치)이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난외주(keri)에는 복수 '살들'(* , 힛침)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요나단이 다윗과 약속할 때 '살 셋'을 쏘기로 했기 때문이다(20절). 아마도 요나단은 화살 셋을 연이어 쏜 것 같다(Bunsen).
=====20:40
병기를...가지고 성으로 가라 - 여기서 '병기'는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은 베냐민 기브아의 사울의 궁성(宮城)을 가리킨다. 한편 요나단의 이 명령은 말할 나위없이 소년을 돌려보낸 후 다윗과 은밀한 작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사실 주인의 마음에 따라 이같은 종류의 명령을 받아 하인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당시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점에서(Pritchard, Hertzberg), 그 소년은 별다른 생각 없이 홀로 성으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20:41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 문자적으로는 '남편쪽으로부터'이다. 따라서 히브리 원문에는 '바위'라는 말이 없지만, 요나단이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한 19절의 말을 고려하여 '바위'라는 말을 첨가한 것 같다. 아무튼 여기의 '바위 남편'은 궁전쪽, 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있던 곳의 반대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 '일어나서'는 몸을 웅크려 숨어있던 자세에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이 행동은 요나단이 다윗 자신에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Hertzberg). 즉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 하는 절을 의미한다(삼하 9:6; 14:33). 그러나 여기 다윗의 절은 그러한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언급에 대하여 '다윗은 요나단을 존경하여 그를 자신의 생명의 주라고 불렀다'라고 의역하였다. 피차 입맞추고 - '입맞춤'은 보통 '만남의 기쁨'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하기 위해 포옹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슬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여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앞날을 서로 걱정해 주면서 우정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창 29:11; 33:4; 45:15; 출 4:27; 18:7; 룻 1:9, 14; 왕상 19:20; 행 20:37).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 이것은 (1) 깊은 사랑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던 친구가 비극적 현실 앞에서 기약없이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2) 그 중 한 친구는 목숨의 보존을 위해 향후 정처없이 방랑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몰려 왕과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갖기는 커녕 친구와 가정과 별리하고, 왕과 원수가 되어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나야 된다는 그 어이없는 현실에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길고 깊은 울음으로 터져나왔으리라!
=====20:42
본절에서는 (1)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평안(샬롬)의 기원, (2) 이미 맺어졌던 두사람 간의 언약의 재확인에 대해 언급된다. 평안히 가라(* , 레크 레솰롬) -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이 함축된 마지막 작별 인사이다. 다윗과 요나단은 마음놓고 길게 작별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과 그 측근들의 눈초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단은 순간의 격정이 지난 뒤 '평안히 가라'(Go in peace!)란 말로 다윗을 기약없이 떠나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진정 요나단의 작별 인사처럼 깊은 사랑과 우정이 깃든 평안(솰롬)에의 기원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떠나고 요나단은...들어오니라 - 마침내 다윗은 친구와 가족을 등지고 사울의 추적을 피해 사울의 죽는 날까지(31:6) 온갖 고난이 뒤따르는 정처없는 도피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21-31장). 한편 다윗과 요나단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하기 전, 십 황무지 수풀 속에서 잠시 상면한 일(23:16-18)을 제외하고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후일 다윗의 궁가(弓歌) 속에는 요나단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윗의 애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삼하 1:26)
< 설 교 >
아름답고 슬픈 우정 이야기
삼상 20:40-42
여러분의 인생에서 아주 소중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나 또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외로울 때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그런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요나단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거나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처럼 슬픈 사연도 없는 것이지요. 본문의 내용은 다윗과 요나단이 영영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확인하고 다윗이 도망 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아들이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들이 역사상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나라에서 필립 2세라는 왕이 등장하여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필립 2세는 암살을 당하고 겨우 스무 살의 왕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건설한 마케도니아 그리스 왕국을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은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들 요나단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온 백성의 사랑과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젊은이였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기초를 마련하고 물러나면 요나단이 이스라엘 왕국을 강대한 나라로 업그레이드시킬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왕자라는 신분과 지위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나라를 처음 세운 왕이나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들은 왕이 될 준비가 없이 왕이 됩니다. 그러나 왕자는 하는 일이 왕이 되는 준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이 훨씬 좋은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왕자가 왕이 되어서 나라를 말아먹은 경우도 많고, 왕이 될 준비 없이 왕이 되었다가 위대한 왕이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조건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의 사랑과 신임을 받으며 차기 왕이 될 것이 확실한 왕자 요나단의 인생에 다윗이 들어왔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 같았습니다. 왕인 사울도, 왕자인 요나단도 아무런 대책이 없이 그저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라는 소년이 나타나서 천하무적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하여 돌아온 다윗을 처음 보았을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삼상 18:1). 그래서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또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삼상 18:3-4).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아마도 의형제를 맺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에서 결의를 하고 의형제를 맺은 것이 삼국지라는 거대한 스토리의 중심 테마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요나단의 생애에서 그들의 상호관계는 이 언약에 근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또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언약을 깨뜨리거나 그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행동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으면 의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어야 군인이 됩니다. 변호사나 선생님 같은 점잖은 사람들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확 달라지지 않아요? 요나단이 입는 옷은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왕자의 레벨로 대우하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사회에서 다윗은 더 이상 목동의 신분이 아니라 왕자와 같은 신분이 된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왜 그렇게 사랑하고 아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왕국에 꼭 필요한 인재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유능한 부하를 필요로 합니다. 대통령이 일을 잘 하려면 아래서 보좌하는 사람들이 유능해야 합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이 제2인자로 자신을 보필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과 사울 왕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더니, 급기야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까지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삼상 19:1). 우리는 인생 살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도록 강요를 받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런 질문을 받으며 큽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처럼 사실은 못된 질문도 없습니다. 왜 아이가 엄마와 아빠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까? 그냥 둘 다 좋아하면 안 됩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이런 질문으로 어른들은 사실 아이를 고문하는 거예요. 또 이 질문은 아이에게만 못된 질문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에게도 못된 질문입니다. 편 가르기가 되거든요.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하나는 섭섭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두 사람을 이간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단순하기만 한 게 아닙니다. 둘 다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따르자니 우정이 울고, 우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우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요나단이 딱 그런 지경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르자니 친구가 죽게 되겠고, 친구를 따르자니 아버지를 거역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부자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왕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으로서는 친구와 아버지 중에서 아무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둘 다 선택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아버지 편을 들어서 다윗을 죽이든가, 아니면 아버지를 거역하고 다윗을 살리든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합니까? 대체로 우리 선택의 강력한 기준이 되는 것 중의 하나는 혈연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딸 집에 갔는데 사위가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세대 남편은 역시 다르다고 하면서 사위 잘 얻었다고 흐뭇해합니다. 이 어머니가 아들 집에 갔더니 아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못 돼먹은 며느리가 남의 귀한 아들을 종살이시킨다고 역정을 내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인륜을 파괴한다고 한탄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인지상정의 행태가 얼마나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는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는 동기는 이익입니다. 우리는 주로 나에게 이익 되는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을 이기적 동물로 이해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너무나 큰 부작용을 낳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감옥에 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지요.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옳고 그름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 따른 선택을 했을 때 우리는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 숨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물론 사랑을 따르자니 우정이 울고, 우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 때, 우정을 따르는 것이 옳고 사랑을 따르는 것은 그르다고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경우, 아버지와 다윗 사이에서 누구를 따르는 것이 옳고 그른지는 명백한 일 아닙니까? 인지상정에 의하면 아버지를 따라야 하겠지요. 친구관계는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입니다. 또 권력을 가진 왕을 따르는 것이 당연히 이익 되는 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야 요나단이 나중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그만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부당하게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잘못한 것도 없이 억울하게 죽을 판이었습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다윗을 살려준 것을 알게 된 사울 왕이 대노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 왕이 자신의 가장 유능한 부하였던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다윗에 의해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왕위는 자기 아들 요나단이 물려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너무나 유능하고 인기도 높아서 그대로 있다가는 다윗이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권력을 가진 자의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잇따르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인기 정상에 올랐을 때가 사실은 가장 불안한 상태인 거예요. 그 인기를 잃어버릴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정말로 공허하고 살아갈 힘과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권력이든 인기든 그것에 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가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터인데, 이 아들이라는 놈은 자기 왕위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다윗을 두둔하고 도와준단 말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와 달리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친구가 내 앞길에 장애물이 된다고 해서 그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요나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본 것은 정확한 관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셔서 왕으로 삼으셨지만, 왕이 된 후 사울이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하나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비밀이었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윗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능력과 그가 백성들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보고 사울은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기를 쓰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아버지 사울의 반응과 매우 달랐습니다.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왔을 때 요나단도 함께 왔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숨어 있는 숲속에 들어가 다윗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삼상 23:17). 여기에 요나단의 위대함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다음 왕이 될 사람은 왕자인 자신입니다. 다윗은 그의 친구요 부하일 뿐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왕으로 모시고 충성한다면 얼마든지 그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요나단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에게 왕위를 양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 되어야 한다면, 자기가 왕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다윗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거예요. 세상의 누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다음 왕위는 자기 것인데, 그것을 빼앗아서 남에게 준다고 하는 것을 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설령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순종하기가 쉽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렇게 못하겠다고 반항하지 않겠어요?
이스라엘이 다윗이라는 위대하고 탁월한 왕을 갖게 된 배후에는 요나단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왕이 될 자질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 영웅이었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요나단이 왕이 되었더라도 나라는 부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성공과 생애는 요나단에게 진 빚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나라를 섬기고 그들의 우정을 나누며 인생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운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군요.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다윗을 꼽을 수 있고,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다윗을 말할 때 다윗이 있게 한 요나단의 사랑과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위대한 결과의 배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위대한 희생이 있게 마련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결과에만 환호하기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헌신과 희생에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꽃이 되기보다 거름이 되겠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요나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꽃이 되기를 양보하고 자신은 거름이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 요나단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거름이 없이는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름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거름이 되신 것 아닙니까? 자기를 희생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슬픈 이야기로 끝나지만,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요나단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 서로 섬기며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삼상 20:35-42 / skd1
안녕하세요, 성경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무엘상 20장 35-42절에 기록된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통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려 합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깊은 영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이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볼까요?
사울 왕의 질투와 분노로 인해 다윗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왕자 요나단은 자신의 친구 다윗을 돕기로 결심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결과를 다윗에게 전달하기 위해 화살 쏘기를 신호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계획 속에서 한 어린 소년이 등장하는데, 그는 단순히 화살을 줍는 역할을 할 뿐,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사건의 중대함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모르는 자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약속한 곳으로 나가서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삼상 20:35-36)
요나단이 데리고 나온 작은 아이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에 따라 화살을 줍는 임무만 수행했습니다. 그는:
상황의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 그 화살이 단순한 활쏘기 연습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신호임을 몰랐습니다.
역사적 순간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미래 왕을 구하는 중대한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화살이 네 뒤쪽에 있다"라는 말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수행하는 행동의 더 큰 의미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단지 눈에 보이는 현실만 인식했습니다. 그는 물리적으로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나 상황적으로는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 아는 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요나단이 그 아이에게 외쳐 이르되 화살이 네 뒤쪽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이 아이에게 외쳐 이르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삼상 20:37-39)
반면, 요나단과 다윗은 같은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경험했습니다:
전체 그림을 보았습니다 - 그들은 화살 신호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상황의 영적,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했습니다 - 이것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생명과 이스라엘의 미래가 걸린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깊은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 서로에 대한 사랑과 언약적 헌신으로 인해 이 순간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에게 이 만남은 단순한 화살 주고받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소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 다윗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이가 가매 다윗이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그들이 서로 입맞추고 함께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였더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한 것이 있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서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삼상 20:41-42)
이 감동적인 순간에서 다윗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습니다 - 사울의 궁중에서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진정한 우정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 요나단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통해 언약적 관계의 깊이를 배웠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이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계획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다윗은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준비되고 보호받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적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영적 지각의 중요성 -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단순히 물리적 사건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로 볼 것인지는 우리의 영적 민감성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그 소년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고, 다윗과 요나단처럼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의 깊이 -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단순한 친분을 넘어선 언약적 관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는 어떤 수준에 머물러 있나요? 서로의 삶에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의 자기 이해 -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시는지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삶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소명과 목적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앎'의 책임 - '아는 자'로서 우리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있다면, 그에 합당한 행동과 결단이 요구됩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 오늘의 묵상과 적용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아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매일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모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삶의 모든 순간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있는 사건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발견하는 '아는 자'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성장하는 시간 되세요!
사랑의 관계
삼상 20:35-42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대개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말을 할 뿐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사랑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받았다는 것으로 좋아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에 의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염두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껏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자는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는 단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단지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사람을 좋게 해야 하고 친절을 베풀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할 때 마다 꼭 마음 한구석에는 조그만 염려가 남습니다. 그것은 제 의도와는 전혀 어긋나는 다른 해석을 하는 분이 있지는 않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때 ‘그러면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것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친절 자체가 곧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무슨 행사장의 도우미들도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까? 행사장에 가면 도우미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이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들의 직업의식에서 몸에 배인 친절이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친절 자체를 사랑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는데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친절,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의 수준일 따름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말하는 세상은 인간의 착함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합니다. 친절을 베풀며 남을 돕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고, 이러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하게 산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받은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고 다른 사랑을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신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이 보여 질 때 사랑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0절에 보면 월삭에 있는 식사 자리에 참석해야 할 다윗을 요나단이 빼돌린 것을 안 사울이 분노 하면서 요나단을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이라고까지 욕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끌어 오라는 사울에게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32절)라고 하면서 다윗의 죽이려고 하는 것이 부당한 행위임을 항변 합니다. 이로 인해 사울이 창을 들어 요나단을 치려고까지 하는 것을 보고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기까지 하는 것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과의 혈육이라는 관계까지 벗어나서 다윗을 사랑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위험이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데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장차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애서 끊어버리실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게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언약을 맺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인간적인 요소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관계에서의 친분이 아니라 생명과 언약이 개입된 관계이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 역시 생명과 언약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계획한 대로 행동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18-22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한가지 계획을 세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화살을 차기 위해서 아이를 보내고 요나단이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외칩니다. 이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돌아오지 말고 떠나라는 신호였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활을 쏜 것은 다윗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요나단의 생각을 모른 사람들은 요나단이 다만 활을 쏘며 즐기는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이는 화살을 주우러 갔던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38-39절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니는 아무런지 耖라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화살이 요나단의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 어떤 의미의 화살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사랑이 담긴 화살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화살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다만 들고 달음질을 하는 아이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장차 자신에게 주어질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을 치실 때 함께 멸망당할 사울의 가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다윗은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에 의해서 끊어짐을 당한다는 것을 지금의 현실로 여기고 그에 대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멸망이라는 현실에서 다윗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택한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존재 의미를 모릅니다. 요나단처럼 장차 주어질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의 생명과 언약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과 언약의 관계에서 표출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언약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화살을 들고 달리기만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는 도외시 한 채 다만 십자가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자와 예수님은 생명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망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멸망을 현실로 여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나의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이나 베풀어 주고, 하는 일이나 잘되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다만 서로에게 잘해주면 된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잘해주고(복주고, 일이 잘되게 해주시는 것) 나 역시 예수님에게 잘하면(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사랑이 성립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교회로 모였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모였습니까? 편함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풍조 속에서 그나마 주일 하루 편히 쉬지 않고 교회로 모였다는 것도 잘한 일이지만, 그러나 왜 무엇 때문에 교회로 모이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요나단의 사랑의 의미가 있는 화살을 아무것도 모른 채 들고 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머무를 수도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만 그 의미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다만 세상 죄를 위해 죽은 착한 예수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신의 죄도 모른 채 막연하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만 남발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1-42절을 보면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고 말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 헤어질 때 서로 울면서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리라고 합니다. 친하던 친구와 헤어질 때 ‘잘가라’는 한마디면 될 것인데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신다는 맹세는 왜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맹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지 축복의 말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나와 너 사이에 여호와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을 왜 맹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까지 해야 할 문제이겠습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처음부터 인간의 우정과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멸망에서 다윗을 바라보았고,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릴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다윗이고 하나님이 다윗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인자를 다윗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여호와의 심판과 인자하심이 함께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계실 것이라는 맹세를 하는 것은 자손대대로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관계가 되어 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도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여호와가 계시는 관계가 되어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바로 이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멸망당할 죄인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독생자를 통해 여호와의 인자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 신자가 있다면 신자 역시 여호와의 인자가 베풀어짐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자신의 존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고, 이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신자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복을 원하거나 편함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와 신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죄인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관계이며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제해 버린 채 만나는 관계라면 그것은 세상의 인간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으로 전락될 다름입니다. 아무리 친하게 함께 어울리고 밥먹고 웃고 노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친하게 잘 어울린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관계에는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나게 되면,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낮은 자를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비판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되기 때문에 신자의 관계에서도 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을 여러분의 상식에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베풀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보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신자를 만나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서로가 낮아지는 모습일 것이고,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화살을 들고 그저 뛰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화살에 담겨 있는 요나단의 마음을 알고 달려가는 아이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같이 울었다
삼상 20:35-42, 롬 13:11-14, 막 1:12-13 / 김오동 목사
1. 교회력으로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이 성회 수요일로 사순절의 시작인데 그때로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일컬어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니만큼 그 부활의 영광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고 했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고난과 시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노아 때 40일 40야에 걸쳐 홍수가 내렸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일을 금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40일 40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40일간 금식기도하시고 사역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의 40일은 동시에 구원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노아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때 의인 노아의 8식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의 광야 방랑을 끝내고서야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엘리야는 40일을 달려 하나님의 산에 가서 비로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확신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40일 금식기도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주님은 3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거뜬히 이기고 승리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40일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연단과 함께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은총의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 믿음으로 이 40일 절기 즉 사순절 보내기에 동참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금보다 더 귀하게 연단되어 질뿐 아니라 신앙과 삶의 놀라운 발전과 승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가 정한 절기를 잘 지키면서 신앙생활 할 때 우리 신앙은 상당히 업그레이드 되어지게 됩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은 “40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먼저 주님은 기도하기 위하여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계시면서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기간에 개인적으로도 목적을 정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가정의 온전한 구원(부부, 부모자녀, 형제 등)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적으로도 우리가 추진하여 이제 준공을 앞두고 있는 새 성전 건축과 봉헌, 그리고 새 성전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한 끼씩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특히 이 기간동안에 새벽기도에 참석하도록 노력하시고 그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가 부활절에 열매 맺도록 목적과 기간을 정하여 기도하시면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할 줄 믿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주님이 광야로 가실 때 “성령에게 이끌리셔서 가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서에는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우리는 더욱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갈5:25에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섬길 때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정말 마음을 비우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령님께 민감하면 성령께서 우리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의 범사를 형통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의 검을 가지고 공격할 때 여지없이 패하여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씀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깊이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말씀 들으세요”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그 말씀을 통하여 정말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금년이 2006년이요 내년이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있었던 100주년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Again 1907!”이라는 구호로 100년 전의 그 부흥을 오늘 이 땅에 재현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양 대 부흥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 말씀, 그리고 성령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에 우리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성령님과 동행하면 반드시 주께서 우리에게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3. 오늘 구약 사무엘서를 보십시오. 지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왕자 요나단이 다윗의 구원을 위하여 은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 심부름을 하는 종도 모르게 다윗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한 방법으로 다윗에게 은밀한 정보를 알려 줍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제약이 큽니다. 이런 다윗을 돕고, 그를 위기에서 구원하려고 나선 사람이 왕자 요나단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요나단은 이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로소 사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노아 때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하나님은 이 비밀을 노아에게는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벧후2:5에 보면 “의를 전파한 노아”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에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임하는 그날까지 저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습니다. 그러다 순식간에 멸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성에 유황불의 심판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야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먼저 소돔 성 특히 조카 롯과 그 가정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알았던 롯의 사위들은 망했습니다. 말씀을 불순종한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비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물론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또 무시해 버리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대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순절은 복음을 전하는 기간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아모스서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 비밀을 반드시 먼저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여기 이 강단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를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처럼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워 설교자를 향하여 이를 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 만날 준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신앙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 도저히 그 앞에 설 수 없어서 가슴 치며 통곡하면서 “산아 가리워라 바위야 가리워라”고 우왕좌왕 하게 될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자기 신앙이 확립된 사람들이라면 사명을 감당하십니까? 어떻게 교회를 섬기십니까? 얼마나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혹 한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항상 이런저런 핑계만 앞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이런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하므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붙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순절에 접어들면서 우리도 함께 울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옛날에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통곡하시던 주님이 오늘도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시는 그 통곡에 동참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사순절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절기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 기간만은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 절기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총을 충만하게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신앙 안에서 세워진 우정
삼상 20:35-42; 찬송: 426장. / 서울산정현교회
오늘도 아침 첫 시간을 주님께 바치며 새벽기도회로 모인 모든 성도님들 가정과 주님께서 세우신 서울산정현교회 위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악령까지 자주 들게 되면서 점점 더 완악해졌습니다. 사울은 악한 욕심에 빠져 여러 번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놀라운 은혜로 다윗을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이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인 사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줬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사울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있는 게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왕과 함께 하는 초하루 식사에 다윗이 참석하지 않고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마음을 알게 되면 다윗에게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이 초하루 식사에 불참한 이유가 베들레헴에 간 것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심지어 다윗을 변호하는 요나단을 죽이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단도 사울의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약속대로 다윗에게 이것을 알리기 위해 들로 나갔습니다. 요나단은 화살을 쐈는데 일부러 화살을 찾으러 달려가는 아이를 지나쳐 멀리 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화살이 네 앞쪽에 있으니까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요나단은 이미 다윗과 약속하기를 화살이 앞쪽에 있다고 말하면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분명히 알려준 것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요나단은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다윗을 평안히 보내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샬롬을 빌어주는 것인데 축복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지켜주시고 평안 주시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말에는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축복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단과 다윗이 한 맹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어떤 맹세입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적을 물리치게 해주실 때 다윗이 요나단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과 다윗이 왕이 된 후 요나단의 자손에게 인자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 맹세가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고, 하나님이 다윗 가문과 요나단 가문 사이에 계시며 그 맹세가 지켜지는지 보실 것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 맹세를 지켜 다윗을 보호해주고 평안 속에 도망가게 도와줍니다. 이제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실 때 다윗이 그 맹세를 잊지 않고 요나단과 그 자손들을 잘 보살펴줘야 합니다. 요나단이 그 맹세를 되새기는 것을 보면 요나단은 진심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안전하게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정말 자기가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윗이 왕이 되도록 도와주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요나단은 올바른 사랑과 지혜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정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우정은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의 우정이 아닙니다. 그 우정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처음 사랑하게 된 것도 다윗이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신앙 안에서 다윗을 사랑한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이유도 요나단이 인간적으로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윗을 인정하는 믿음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우정은 이렇게 믿음 안에서 서로 존중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서로 돕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혼자 살지 못합니다. 이웃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과 생각만으로 사랑하면 좋은 우정이 되지 못합니다. 함께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진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권에 따라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고 함께 발전하는 우정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목적으로 하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우정은 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배신도 없고 악행도 없고 하나님의 징벌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우정을 가질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뜻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나가며 서로 협력하는 참된 우정의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성도의 도움을 받아 더 행복하고 좋은 열매가 풍성한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
사무엘상 20장 17~23, 35~42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 오직성경~ 오직 믿음~
‘예수님은 나의 좋은 친구이십니다.’, ‘나는 너의 좋은 친구야’
오늘도 우리의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들의 삶에 풍성히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청소년 시기에는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소년 시기에 친구가 필요하고 또 친구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서적 지원 – 친구는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거나 이야기할 대상이 필요할 때 우리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의 공감은 우리의 감정을 처리하도록 도와주고 큰 위안을 줍니다.
사회적 연결 – 친구는 사회적 관계를 연결하고 유지시켜 주고, 새로운 경험과 사람을 만나게 되고 지평을 넓혀 성장하는 것을 도와 줍니다.
건강 혜택 – 친구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울증이나 만성질환의 위험을 낮춰줍니다.
공유 경험 – 친구들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서 인생의 질을 높일뿐만 아니라 평생의 추억과 우정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5. 다양한 관점 – 다양한 배경, 경험, 관점을 가진 친구를 사귐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넓히고 성장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다양함을 경험함으로써 더 열린 마음과 공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친구는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붙은 수식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도 좋은 친구 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인 요나단이 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의 남편, 곧 사울의 사위인 다윗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 – 현재 왕, 첫 번째 왕, 다윗을 죽이려는 자(원수)
요나단 – 왕의 아들, 사울이 정한 후계자, 다윗을 살리려는 자, 다윗의 처남
다윗 – 왕의 사위, 하나님이 세운 후계자, 요나단의 매부, 친구
아버지 사울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고 아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아들 요나단은 비록 자신이 왕위를 물려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윗을 귀히 여기고 사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마음을 확실히 알고 피신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을 위해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의중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아버지의 의중을 확인한 후에 다윗에게 그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요나단이 알려주는 정보에 의해 다윗의 생사가 달라집니다.
사울의 의중은 이러했습니다. 30~34절입니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사울이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릅니다. 끝내 다윗의 편을 드는 아들에게 단창을 던집니다. 33절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깨닫고 노하여 음식도 못 먹고 다윗을 위하여 슬퍼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 같이 사랑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생명의 원어는 ‘영혼’이라는 말인데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가 되고, 반역이 될지라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 다윗을 사랑하고 그의 생명을 아꼈습니다. 다윗이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보를 전달합니다.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유진피터슨)”에서는 요나단은 자신의 미래보다는 다윗의 현재를 더욱 염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버지와 너무도 달랐던 요나단은 다윗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보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위험과 어려움을 이해했으며, 그와 우정의 언약을 맺었다. 요나단의 우정은 다윗의 영혼을 점령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요나단은 목숨을 걸고 정보를 전하고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의 약속을 믿습니다.
서로가 외형적으로는 정적이 되고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지만 그러한 관계보다 더 깊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를 위해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진실한 우정은 다윗의 생명을 살리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섬김이 됩니다.
유진 피터슨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나단이 되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은 자신의 소명을 포기하고 단순한 목동 생활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자신의 선의를 짓밟은 자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었을 위험이 크다. 그러나 다윗은 두 길 모두에 빠져들지 않았다.”
1.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약속을 지키는 우정입니다.
우정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 였습니다. 약속을 지킴으로서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에게 약속을 지킴으로서 서로에게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만들고 중요한 순간에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또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우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때도 그 친구의 가정형편이나 성적이나 조건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건들을 보고 친구를 사귄다면, 그 조건들이 사라질 때 우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의 사랑은 보여진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이고, 이제는 아버지의 원수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그것보다 다윗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에 사랑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 가운데서도 요나단은 매 대화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속하고 축복합니다. 다윗과 대화할 때 하나님의 중심의 대화가 통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그 하나님을 다윗을 통해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영원한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다윗도, 요나단도 서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진실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11~15)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지킬 때 주님의 친구라고 말씀 하시고,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모두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셔서 이미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며 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서 친구는 아주 중요합니다.
조건으로 친구를 사귀면 그 우정은 조건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친구는 다윗과 요나단처럼 약속을 지키는 우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로,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진심으로 아껴주고 축복하는 친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함께 믿음 안에서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우정을 세워 갈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히 서게 됨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이 더 많이 울었다...
삼상 20:35-42
약속대로 요나단이 들로 나온다. 다윗은 숨어 있다. 멀리 활을 쏜다. 소년에게 앞으로 달려가 화살을 찾으라 외친다. 다윗에게 도망치라는 신호이다. 소년을 성으로 돌려보내고 요나단은 다윗을 만난다.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다윗이 더 많이 울었다. 그의 슬픔을 생각한다.
그들은 원치 않는 이별로 인해 슬퍼한다. 요나단을 생각하며 다윗은 마음이 더 아프다. 그가 감당할 앞으로의 일들 때문이다. 만날 것이면서 굳이 활을 쏘는 신호로 아버지의 살의를 전한 것은, 그것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저주의 길을 간다. 선민들에게 가장 두렵고 슬픈 일은 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사울이 그 길을 간다. 결국 아버지는 저주 가운데 죽을 것이다. 요나단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끝까지 옆에 있으며 아버지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떠날 수 없는 것은, 사울을 그의 아버지로 정하신 것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의 그 아픔을 안다. 그의 고통을 마음 깊이 느끼며 다윗은 더 많이 울고 있다. 이제 그와 다시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후에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다윗은 통곡하며 애도한다. 부패한 세상 속에서 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선민들의 아픔과 슬픔이 아닐까? 그 슬픔과 고통을 나는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주를 대적하며 저주와 심판의 길을 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죄와 죽음에 갇힌 인류를 위해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와 주님의 기쁨에 연합하며, 하늘에서 정하신 그 뜻과 주권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 에덴을 떠나 부패한 땅, 죄와 죽음에 매인 자녀들을 감찰하시며 구원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대 혼돈과 공허, 어둠과 고통의 풍랑 속에 흔들리는 자녀들에게도 빛과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 복음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땅에서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영생의 소망과 하늘의 평강을 얻기 원합니다. 복음의 가족들과 함께 담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육신의 고난과 아픔을 이기며 찬양하게 하소서. 하늘의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버지의 주권과 뜻이 우리 모든 삶의 현장에서도 드러나며 성취되기 원합니다,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영원히 너와 나 사이에 계시고
삼상20:35~42 / 큐티
사무엘상 20:35~42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님 계시니 평안합니다.
말씀요약: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화살을 쏜다.
요나단이 화살을 위로 지나치게 쏘고는 화살이 네 앞에 있다고 소리친다.
요나단과 다윗만이 아는 신호이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돌아 왔을때 가지고 성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다윗이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3번 절한 후 입맞추고 같이 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 인사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여 떠나 보낸다.
말씀묵상:
3일 전에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이 있었다.
초하룻날 축제가 열릴 때에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다윗이 빠졌을 때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지 분명한지 알아서 알려 주기로 했다.
알려 주는 방법이 다윗이 숨어 있는 바위 쪽을 향하여 요나단이 화살을 쏘는데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면 평안히 돌아와도 되는 상황이고
만일 네 앞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고 미리 약속을 했다.
초하루 축제때에 다윗이 2일 연속으로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자초지종을 확인한 후
사울이 요나단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왜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죽이려고 합니까?라고 대답했다가
요나단도 사울의 단창에 죽을뻔 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간다.(35)
요난단은 약속을 잘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다.
너는 달려가서 내가 쏜 화살을 찾아오너라(36)라고 명했다.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위로 지나치게 쏘았다.(36)
화살이 네 앞편에 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37)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돌아 왔을 때 (38) 가지고 성으로 돌아가라고 한다.(40)
다윗과 요나단만이 아는 암호였기 때문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을 알려 준 것이다.
요나단은 왜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려 주었을까? 친구였기 때문에 알려 주었다.
전에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언약을 했기 때문에 알려 주었다.
어떻게 왕자 요나단과 시골 목동 다윗이 언약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서로에게 매력이 이끌렸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있는 놀라운 믿음을 서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친구로 만들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기 권리 포기와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과도 등지는 행동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이런 권리포기 내려놓음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자도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아멘.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가지고 성으로 돌아가자
다윗이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3번 절한 후 입맞추고 같이 운다.(41)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같이 울었는데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41)
다윗이 요나단에게 3번이나 절을 한 이유는? 너무 감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사울왕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놓았는데 아들 요나단이 알고도 알려주기 때문이요
현직 왕자에 대한 예우도 포함해서 너무나 감사의 마음이 있어서 3번이나 엎드려 절한다.
이별에 대한 슬픔을 눈물로 서로 표현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질 때 마치 이산 가족들의 면회 장면이 상상되는 것 같다.
서로 더 크게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더 크게 우는 것 같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 인사하고(42)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여 떠나 보낸다. (42)
샬롬!!! 이라는 단어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가장 평안이 필요한 때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다윗이 요나단에게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내 내면에 이런 샬롬이 있기를 기도한다.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너와 내 사이에 계시기를
또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기를 축복하며 맹세하며 간구한다.
하나님 아버지
요난단과 다윗의 이별을 봅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사울왕의 본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하는 요나단의 사랑을 봅니다.
때때로 손해를 보더라도 우정과 신의를 배신 하지 않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요나단은 왕자의 권리도 포기하고 가족을 등져야하는 아픔에도
신실한 약속을 이행하는 모습을 봅니다. 나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다윗이 그랬던것 처럼 작별의 상황에서도 샬롬을 노래하게 하옵소서.
내 내면에 이런 샬롬이 있게 하옵소서.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