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팬들을 원망할 일인가. 독일월드컵 특수를 기대했던 K리그 관중 수가 예상 밖으로 저조하자 축구 관계자들의 입에선 은연중 팬들을 원망하는 말들이 나온다.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월드컵 때는 밤을 새면서 열광하던 팬들이 막상 한국축구의 젖줄인 K리그가 시작되자 마치 언제 우리가 축구에 열광했느냐는 듯이 외면하는 것이 못내 서운한 모양이다.
사실 K리그가 재개된 지난 5일 울산-전북전의 4278명의 관중은 여러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기대치를 밑돌았다. 실제 유료관중은 1000여명에 불과할 정도라고 하니 프로축구 관계자들이 받았을 충격도 일면 이해가 간다. 이후 벌어진 경기도 독일월드컵 이전에 보여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월드컵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 10시, 새벽 4시를 가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경기장을 찾던 팬들이 잠재적 고객으로 보였을 프로축구 관계자들에겐 월드컵 대표선수들이 출전하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관중석은 자괴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프로축구단의 마케팅 관계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월드컵 열기와 프로축구 관중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만도 하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1000명도 좋고, 4000명도 좋다. 일단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에게 다음에 또 경기장을 찾을 수 있도록 구단 관계자나 그라운드의 선수들이 어떤 서비스를 제공했는지를 자문해보라. 텅 빈 관중석에 실망하기 보다는 그 어려운 애국(?)적 결단을 내린 관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선택에 충분한 만족을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프로축구를 홍보하고, 주위 사람을 축구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축구팬들은 사회복지가도 아니며,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모처럼의 여가생활을 극장이나 야외로 가는 대신 축구란 상품을 찾는 고객인 것이다. 축구장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요할 대상이 아니다. 관중이 많아야 신나는 경기를 한다는, 본말이 전도된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손님이 많아야 음식을 잘 만들겠다는 말과 똑 같다. 재미있는 경기를 해야 관중이 온다.
고객만족의 마인드로 프로축구란 상품을 팔아야 한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할 때다. 프로축구가 위기라는 하소연만 하지 말고, 월드컵과 국가대표팀 경기에만 열광하는 팬들을 원망하지 말고, 프로축구를 구성하는 있는 제반 요소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지를 원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마인드를 바꾸면 길은 있다. 그 길을 한번 진단해 보자.
◇재미있는 경기가 먼저다
지난달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삼성하우젠컵2006 7차전. FC서울과 포항이 난타전을 펼친끝에 서울이 4-3로 역전패하자 FC서울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질책 대신 격려의 글이 이어졌다. 비록 졌지만 이처럼 재미있는 경기만 해준다면 앞으로도 계속 경기장을 찾겠다는 팬들도 많았다. 앞서고 있으면서도 ‘잠그지 않는’ 포항 파리아스 감독에 대한 감사의 글도 보였다. 프로축구가 어떻게 하면 팬들의 사랑을 받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경기였다.
한국 프로축구가 조기축구보다 재미없다는 조롱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한 골이라도 먼저 넣으면 ‘잠그기’에 들어간다. 공격적인 모험을 하다가 뒤집히는 것보다는 최소한 비길 확률이 높은 수비축구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기기 위해선 반칙으로라도 상대 공격을 끊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며, 상대 기량이 출중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심지어는 정상태클을 빙자한 공격으로 상대의 다리를 망가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나마 기량이 출중한 외국인 선수가 국내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모두 다 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다. 팬을 위한 축구가 아니라, 감독과 선수, 프런트를 위한 축구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 14개구단이 모두 우승을 하겠다고 덤비는 풍토가 이같은 한국 프로축구의 기형적 구조를 낳았다. 그들의 눈에는 관중보다 승점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계약기간을 연장하고 수당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보다는 관중을 더 많이 불러 모으는 감독을 높이 평가하는 구단 최고위층 마인드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단주가 나서라
국내 프로축구가 출범 24년째를 맞고 있지만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구단주회의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와 달리 프로축구는 구단을 운영하는 실질적 오너인 구단주 회의체가 없다. 모든 의사결정은 고용된 구단 임원들이 하다보니 프로축구가 주말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지 못하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겉돌 수밖에 없다.
구단주 회의가 적어도 1년에 한번이라도 필요한 것은 프로축구의 현안들이 단장이나 프로연맹 사무총장 수준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축구의 장기적 비전을 세우는 일이라든가, 만성적 적자구조의 프로축구 회생 방안 등은 당장의 이익과 성적보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구단주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금처럼 프로구단 단장들로 이뤄진 프로축구연맹 이사회로는 프로축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지난 23년의 세월이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 지상주의를 타파하는데는 구단주의 결심이 필요하다. 구단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단장으로선 성적으로 구단 운영의 성과를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 성적이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 단장이나 감독이 성적보다는 팬들을 위한 축구를 하겠는가. 성적에 신경을 쓰다보니 좋은 선수 영입을 위해 거액을 투자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규모에 맞지않게 선수 몸값만 올려 적자를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프로축구 출범 이후 단 한 구단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연간 1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고 있는 데도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의 구단주가 프로축구 운영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언론도 문제다
요즘 인터넷에선 K리그에 ‘이경규가 간다’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축구팬들 사이에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독특한 시각으로 월드컵을 재구성함으로써 폭발적 인기를 모은 ‘이경규가 간다’ 프로그램을 K리그를 배경으로 제작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축구팬들의 절박한 바람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로축구가 재개된 지난 5일 경기는 케이블 TV조차 중계되지 않았다. 독일월드컵 기간 대부분의 시간을 월드컵에 ‘올인’했던 방송사들은 월드컵이 끝나자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뉴스에서는 K리그 발전만이 한국축구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보도를 하면서 실제로는 K리그 발전에 전혀 기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K리그는 방송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지도 못한 상태다.
월드컵을 통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 방송이 대표팀의 토대인 프로축구 중계를 외면하는 것은 ‘단물만 빨아 먹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목이다. 특정 방송사에 대한 축구팬들의 안티가 강한 이유도 씨를 뿌리는 노력은 하지 않고 월드컵 때만 되면 철새처럼 나타나서 축구의 과실을 채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방송의 막강한 영향력과 공영성을 고려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축구발전에 앞장서야 한다. 성적보다는 좋은 경기, 팬을 위한 축구를 펼치는 팀과 선수, 감독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일반 팬들이 자주 축구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한국 축구도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방송사는 월드컵 때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팬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좌표 설정이 없는 축구 행정
월드컵 기간 중 프로축구를 재개한 프로축구연맹의 행정은 ‘소탐대실’의 표본이다. 월드컵 시즌의 공백을 알면서도 경기 수를 늘리기 위해 컵대회를 만든 것이나, 월드컵 이후 자연스럽게 K리그로 관심을 돌리는 준비 과정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프로축구를 재개함으로써 팬들의 외면을 초래한 행정은 흥행마인드를 의심케 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종격투기는 불과 10여초만에 끝날 수도 있는 승부를 몇달 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를 함으로써 관심을 제고한다. 일본 J리그는 ‘100년 구상’을 마련해 놓고 흔들림없는 전진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또다시 4년 뒤인 2010년 월드컵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어도, 2030년 월드컵 정상권 진입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없다. 한국축구는 마치 오너없는 기업처럼 단기 목표에만 급급하다가 24년을 보냈다.
첫댓글 정말 틀린말 한개없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