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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한반도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치열했던 시대.
어린 시절 즉위해서 오랫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진평왕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왕위를 이을 왕자, 즉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끝내 아들을 얻진 못했지만, 그에게는 역사에 기록된 세 딸이 있었다.
바로 덕만, 천명, 선화가 그들이다.
덕만(德曼)
진평왕의 큰 딸이자 신라의 27대왕인 선덕여왕.
그녀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여성이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평왕의 큰 딸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632년 1월, 선덕여왕은 국가 중대사를 정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른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말은 성스러운 조상을 가진 황실여성이라는 뜻으로
성골, 즉 성스러운 조상을 가지고 있는 혈통으로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의 어린 시절 뛰어난 예지력을 모란꽃 일화로 전한다.
진평왕이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여주자
덕만은 벌과 나비가 함께 있지 않으니 모란꽃의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이 직접 확인해보자 덕만의 말과 같았다는 이야기는 총명했던 공주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종류가 굉장히 많으며 그에 따라 향기의 강도도 제각기 다르다.
또 향기가 없는 꽃에 곤충이 들지 않는다는 추측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선덕여왕의 모란도 일화는 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 향기없는 꽃그림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당시 당태종이 신라에 이를 선물한 것은 왕의 부귀를 축원하는 의미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림과 함께 씨앗을 함께 보낸 것은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닌 중국에서 모란꽃을 선물하는 풍속에 따랐음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는 최초 여왕이 남성들과는 다른 특별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4대 임금 탈해이사금과 13대 미추 이사금과 같이 신라에는 왕의 사위가 왕위를 잇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평왕은 왜 사위가 아닌 딸에게 왕위를 잇게 했을까?
삼국유사 왕력편은 성골남진, 즉 성골에 더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는 왕족과 육두품의 신분 구별에 따라 사회생활 전반이 규제되었다.
왕족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성골과 그렇지 않은 진골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명확치 않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성골로 한정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신의 삼촌과 혼인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불륜이 아닌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음갈문왕을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하여간 다들 친족 관계인건 변함없죠.)
성골은 출생과 더불어 고정되는 신분은 아니었다.
성골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진지왕의 폐위로 진골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춘추도 진골이 되었다.
여왕 즉위 당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다는 건 자신만의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던 진평왕이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명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왜 이렇게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신라 왕실 사람들의 불교적 이름
신라 국토를 석가의 국토인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 왕실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석가모니만큼 강력한 왕이 태어나길 바랐던 것이다.
진평왕은 비록 아들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혈육이 석가모니와 같은 신성한 왕이 될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덕만공주는 전쟁의 시대에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여왕으로서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진평왕 재위 53년, 귀족인 이천 칠숙과 아천 석품이 왕실을 향해 반란을 시도한다.
왕권을 향한 귀족의 반란, 이는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평왕은 여왕 즉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단호했다. 칠숙과 석품의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이후로도 여왕의 지세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백제 침공이 잦아지면서 수세에 몰린 여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당태종은 신라의 사신에게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우니 신하를 보내주겠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쟁에 직접 나가지 못했던 선덕여왕은 내부 귀족들의 반발과 대외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여왕은 수십여개의 사찰과 대규모 불사로 국력을 모았다.
그리고 신라 최대 규모인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높이가 82m에 달해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다는 황룡사 9층목탑은 국토 수호에 대한 여왕의 굳은 의지를 온 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는 겨울철에 나타난 개구리떼를 본 여왕이
백제군 매복을 직감해 알천 장군을 여근곡으로 보냈다는 작전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은 알천은 이곳에 잠복해 있던 백제군 수백명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행간에서도 역시 여왕의 약점을 읽을 수 있다.
경주의 아주 가까운 지역까지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방력과 군사 체계가 허물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왕은 폭넓게 인재를 등용해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전통 귀족 알천과 멸망한 가야계 귀족 유신을, 외교적인 면에서는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등용한다.
특히 귀족사회의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전쟁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는 여왕에게 큰 버팀목이 된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642년 백제의 젊은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 대야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선덕여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당시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끝까지 싸우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해버린 것이다.
대야성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요충지로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땅이었다.
귀족들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죽죽에게 벼슬을 내려 그의 공적을 높이 샀지만
거꾸로 그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김춘추를 비롯한 여왕의 지지 세력은 크게 힘을 잃어갔다.
대야성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비담은 여왕의 반대 세력.
상대등 비담은 선덕여왕 16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 명분은 여주불능선리.
즉, 여성 군주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47년 정월, 비담의 난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됐다.
그만큼 여왕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강경해졌던 것이다.
왕실을 방어하던 명활산성은 왕실 반대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월성 신라 왕궁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담은 힘을 얻어갔다.
하지만 이를 반전시킨 것은 김유신.
연에 불을 붙여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비담의 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선덕여왕. 우연이었을까?
여왕은 비담이 난을 일으킨 다음 날 승하한다.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선덕여왕은 반란의 와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칠숙의 난을 겪고 즉위한 후,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공을 들였던 선덕여왕에게
최고 지위인 상대등의 반란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갈등, 자식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했던 여왕은 많은 사찰을 지으며 불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수습코자 했다.
포항의 천곡사.
이곳의 비석에는 선덕여왕이 천곡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평소 피부병이 심했던 선덕여왕이 천곡연의 물로 목욕을 하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낫지 않았던 병세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진 첨성대.
첨성대를 이루고 있는 27단의 층은 달의 공전주기기와 같으면서 동시에 제27대 선덕왕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여왕의 천문대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과 같은 모양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나 그의 비인 알영은 각각 나정과 알영정에서 탄생했다.
신라의 우물이라는 것은 거룩한 인물이 탄생하는 곳이며,
다른 세계와 신라를 연결해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 것이다.
신라 왕궁인 월성을 바라보며 우물과 같은 모양을 가진 첨성대.
천상의 세계인 도리천에서 강력한 왕으로 환생하고 싶은 선덕여왕의 바람이 가득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천명(天明)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에 대해 이름은 춘추요,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명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이 머리가 좋고 지도력있는 미인이었다고 하니
천명공주도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삼촌으로 즉위한 지 4년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한다.
왜 천명공주는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폐위된 전왕의 아들을 사위삼아 왕권을 물려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사료가치에 있어 논란이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천명의 남편인 용춘 또는 용수가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등장한다.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용수는 진평왕에 의해 거두어져 월성궁에서 공주들과 함께 자랐다.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을 흠모하게 되고,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자신은 용숙(龍叔-용 삼촌)이 좋다고 마음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마야부인은 용춘을 의미했던 용숙을 용수로 오해하여
천명공주를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시킨다.
당시에도 장자를 선호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하지만 용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어머니 마야부인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용춘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찌됐든 진평왕이 과거의 선례처럼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천명공주는 왕비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평왕은 사위보다는 자신의 딸에게 왕권을 이어줄 결심을 한다.
진평왕은 선덕을 왕위계승자로 선정하고 용수와 천명공주를 출궁시킨다.
천명공주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남편을 왕위에 올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순순히 왕궁을 떠난다.
천명공주는 604년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춘추라고 짓는다.
신라왕실이 철저히 불교식으로 이름을 지어주던 것과는 달리, 공자의 저서 춘추(春秋)와 같은 유교식 이름이었다.
이 아이는 커서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이후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에 즉위하게 된다.
춘추는 즉위 후 어머니인 천명공주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한 천명공주는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선화(善花)
백제 청년 서동과 신라 공주 선화의 만남 이야기는 천년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백제의 무왕과 결혼해 왕비가 된다는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편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서동요를 퍼뜨린 서동은 쫓겨난 선화공주를 만나 결혼한 후 훗날 백제 무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무왕은 연못에서 미륵삼존의 출현을 본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서동이 말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룡지.
어린 시절 백제의 수도 부여가 아니라 이곳 익산 지역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통해
무왕은 왕실의 적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자인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신라 선화공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이 건설한 왕궁의 터로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고자 했던 무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신라를 떠나 백제의 왕비가 되었던 선화공주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이면에는 가혹한 역사적 현실이 이어진다.
서동은 무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거세게 공격한다.
고구려의 견제에 무왕의 공격이 더해져 신라는 사면초가의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무왕에겐 분열되어 있는 귀족사회를 통합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축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신라만큼 적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처가인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지배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남편인 무왕과 아버지인 진평왕이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상황에 처한 선화공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결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리자 백제와 신라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이후 양국은 적대국이지만 전쟁 상황에 따라 종종 왕실간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도 국가간의 이익을 고려한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창건된 미륵사지의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탑은
일제강점기 보수를 거치면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석탑을 해체 복원하던 중 놀라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사리호와 더불어 사리호를 모신 내력이 쓰인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다.
이 사리봉안기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귀족 사택적덕녀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확인되는 무왕의 왕비는 3~4명 정도로 거론된다.
선화공주의 존재 여부는 현재 학계에서도 큰 쟁점이 되고 있다.
서동요 속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그 실존여부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익산의 무왕릉 인근에 자그마한 능이 자리잡고 있다.
익산 주민들은 이 능을 선화공주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는 사랑 이야기는
삼국전쟁 시기 평화를 갈구했던 백성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른다.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자매로 자랐지만
최초의 여왕으로,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로, 또 적국의 왕비로
서로 각기 다른 운명을 걸었던 세 여인의 삶.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 사회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보다 정치적 결정을 따라야만 했던
왕실 여인의 숙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이 누구인가,
용수와 용춘은 동일인물인가 각기 다른 형제인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역사스페셜에서는 음갈문왕을 삼촌 백반으로 보고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용춘으로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음을 덧붙입니다.
배경음악은 양방언의 Tears & Arrow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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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이 모든 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을만큼 로맨스 한 스푼 넣어서 기깔나게 서사 만든 드라마가 신기햐.. 어떻게 이걸 보고 그런 얘기를 만들엇을까
선화공주 얘기는 어릴때 이거 봐서 알고있었음ㅋㅋㅋㅋ
원랜 실화인가 아닌가 긴가민가 하다 최근에 유적 발견하고 찐이라고 결론낫던가..
진짜 짱잼,, 글써쥰 여시 고마워,,!!
재밌다~~~ 선덕여왕 정주행하다가 연어왔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