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나타날 때까지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구겨질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될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될 때까지
핏속에는 도덕이 없고
나는 조금 슬픈 것 같아
나는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아
양에게 넘치는 것은 하얀색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나는
색깔이 부족해진다
부족한 것은 내게 잘 어울려
나는 조금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아
아무렇게나 양을 세도 언제나 양은 그럴듯해지네
풀을 쓸면 쉽게 손가락이 베이는 것이 좋아
풀을 쓸면 대지는 오래도록 엎드려 있는
어린 포유류 같아, 기도의 자세니 슬픔을 길들이는 자세니 아가야
풀밭에서 얼굴은 건초 자루가 될 때까지
풀밭에서 양들은 입구가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도덕이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윤곽이 될 때까지
목이 보호하는 목소리처럼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양을 세다가 양을 잃다가
- 시집〈로라와 로라〉민음사 -
사진 〈Pinterest〉
로라와 로라
심 지 아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의자의 이름처럼
의자에 앉은 쌍둥이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같은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다른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긴 이름의 외계인처럼
의자에 앉은 오후 다섯 시의 햇빛처럼
의자가 많은 기차처럼
한 개의 의자가 정지한 밤처럼
한 개의 의자가 사라진 낮처럼
사색하는 코끼리처럼
사색을 중단한 사제처럼
사색에 놓인 시체처럼
로라와 로라,
사랑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미워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개처럼 짖는 사람처럼
개처럼 조용해진 사람처럼
이름이 지워진 묘비명처럼
로라와 로라,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로라와 로라,
책상 위로 팔을 올리는 감정처럼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