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소비자는 어떤 상품이든지 최신 제품을 원한다. 해당 상품이 새 제품이라 해도 출시된지 1~2년 된 제품이라면 뭔가 속고 구매한 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 판매자가 아무런 설명없이 ‘신상’으로 팔았다면 더욱 그렇다.
PC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그래픽카드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충격적이다. 이름만 보면 최신 제품인데, 알고 보면 이전 세대에서 이름을 바꿔 ‘리네이밍’한 제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PC는 기본 성능이 좋아진데다 CPU에 내장된 그래픽도 충분히 쓸만해져서 그래픽카드도 필수가 아닌 선택하는 부품이 됐다. 하지만 거침없이 빠르고 부드러우면서 화려한 그래픽효과를 만끽하려는 게이머들에게는 여전히 그래픽카드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사진이나 영상편집, 3D 디자인이나 설계 등의 전문 작업을 ‘가속’하기 위해 그래픽카드가 필요하다.
그래픽카드는 세대와 성능에 따라 다양한 모델로 나뉘어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제조사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대개 숫자로 제품의 등급을 표시한다. 맨 첫 자리 숫자는 그 제품의 ‘세대’를 나타내며, 그 뒤에 붙는 숫자들은 ‘등급’을 나타내는 식이다. 즉 앞자리 숫자가 클수록 최신 제품을 뜻하고, 그 뒷자리 숫자들이 높을수록 고성능의 제품을 뜻한다.
▲ 엔비디아가 최근 출시한 지포스 GT740은 기존 GTX650의 리네이밍 제품이다. (사진=제이씨현)
현재 그래픽카드 시장은 CPU 내장 그래픽을 제외하면 엔비디아와 AMD가 양분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700번대 번호를 가지고 있는 ‘지포스 700시리즈’(모바일은 800시리즈)가 최신 제품이며, AMD는 맨 앞에 ‘R’이 붙는 ‘R 시리즈’가 최신 제품으로 200번대의 번호가 붙어있다.
위에 언급한 대략적인 ‘네이밍 규칙’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지포스 700시리즈는 600시리즈에 비해 최신 세대 제품이고, AMD의 R시리즈는 기존의 HD 7000 시리즈에서 이름부터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제품으로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엔비디아의 경우 700시리즈 제품 중 차세대 ‘맥스웰(Maxwell)’ 아키텍처가 적용된 GTX 750/750Ti만 빼고는 기존 600시리즈와 동일한 ‘케플러(Kepler)’ 아키텍처를 사용하고 있다. 즉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같은 세대의 제품인데, 이름은 차세대 제품인 것처럼 바꾼 셈이다.
AMD도 마찬가지다. 기존 HD 7000 시리즈에서 ‘R 시리즈’로 이름 자체가 바뀌었지만, 사용된 아키텍처는 GCN(Graphics Core Next)으로 동일하다. 구조도 거의 동일해 R시리즈 일부 제품은 이전 HD 7000대 제품과 ‘크로스파이어(Crossfire)’ 구성도 가능하다.
다중그래픽기술인 크로스파이어는 동종의 그래픽카드를 2개 이상 묶어서 사용하는 기술로, 다른 제품끼리는 사용할 수 없다. 즉 AMD의 R시리즈 역시 기존 HD 7000시리즈와 같은 뿌리를 두고 이름만 다른 제품인 셈이다. 오로지 최상급 라인업인 R9 290, R9 290X만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하와이(Hawaii)’ GPU를 쓸 뿐이다. 최고 성능 제품인 R9 295 X2도 하와이 계열 GPU를 2개 쓴 제품이다.
▲ AMD의 R 시리즈도 대부분 HD 7000시리즈를 이름을 바꿔 재활용했다.(사진=이엠텍)
그래픽카드(GPU) 제조사들이 이러한 ‘리네이밍(이름 바꾸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핵심인 GPU가 겉모양만으로는 기존 세대와 다음 세대 제품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류나 자동차와 같이 눈에 보이는 상품들은 디자인이나 연식 등으로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지만 반도체 칩인 GPU는 아무런 표기가 없으면 전문가라도 구분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AMD나 엔비디아가 공식적으로 “이 제품은 기존 세대의 리네이밍 제품이다”라고 밝히는 경우는 더더욱 없기 때문에 따로 알려주지 않으면 일반 소비자들은 아예 모르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의 행태가 소비자를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AMD나 엔비디아 같은 세계적인 그래픽카드업체들이 소비자들에게 정확한 ‘리네이밍’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것은 상도의는 물론 기업의 윤리의식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다만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의 ‘리네이밍’ 의도 자체가 악의적인 것이 아니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가 아닌 점은 참작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면 엔비디아가 최근 출시한 ‘지포스 GT740’ 시리즈는 실질적으로 기존 ‘GTX650’의 리네이밍 제품이다. 메인스트림급 성능을 가진 ‘GTX’ 브랜드에서 보급형인 ‘GT’브랜드로 나온 만큼 성능은 거의 그대로이지만 가격은 훨씬 저렴하게 책정됐다. 가성비 자체는 오히려 좋아진 셈이니 소비자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다.
AMD의 R시리즈 역시 태반은 HD 7000 시리즈를 그대로 재활용한 제품이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쓰는 만큼 좋아진 부분도 있다. 같은 GPU를 개선된 공정으로 만듦으로써 소비전력과 성능은 개선되고 생산 단가, 즉 가격은 오히려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AMD는 기존 HD 7000 시리즈를 R 시리즈로 바꿔 내놓으면서 등급을 한 단계씩 낮춰 출시했다. 즉 기존의 하이엔드급 제품을 메인스트림급으로, 메인스트림급을 보급형으로 내놓은 것이다. 성능은 기존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향상된 제품도 있다. 그 결과 뛰어난 가성비를 가지게 된 AMD의 R9, R7 시리즈 그래픽카드는 한때 그래픽카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사실 그래픽카드의 ‘리네이밍’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엔비디아의 ‘지포스 8 시리즈’를 시작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것이 지금까지 쭉 이어져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래픽카드사의 ‘리네이밍’ 관행은 소비자 입장에서 당연히 알아야 할 부분이다.
소비자가 손해볼 일이 없더라도 실상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차이가 있다. 소비자가 이러한 관행을 알고 있으면 제조사도 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