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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글,편집: 묵은지
1930년대의 경성은 과거 경술년의 국치를 겪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20여년이라는 긴세월이 흘러간 일제의 식민 통치가 한창 달아오른 시기였지만 언뜻 겉모양새로는 근대화의 변화를 서두르는 여느 도시의 모습과 별반 다를바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제의 민족적 차별은 점점 심해져갔고 이와함께 숱한 강압적 폭정과 규제는 더욱 노골적이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제는 피할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였는지 익숙하게 무뎌진 대개의 사람들은 차츰 희미해져가는 정체성에 민족과 나라잃은 상실감을 뒤로하고 나름대로 적응력을 키워가며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일제가 우리를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언어와 글, 뒤이어 창씨 개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라를 잃고 미래가 없는 불확실한 시대의 거리에는 오가는 이들 대개가 부득이하게 일제에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경성의 거리는 젊은이들이 새롭게 변화하는 여러가지 문화적 충격을 최대한 느끼고 배워보려는 모습으로 넘쳐나고 있었는데 당시의 젊은이들은 세계적으로 거세게 일었던 모더니즘의 여파로 신 문화의식에 고취되어 전통적인 것 보다는 새로운 변화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경성의 거리에 느닷없이 두 여성의 동반자살 사건이 충격적으로 알려지면서 세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젊고 아리따운 두 여인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동반자살을 한 흔치않은 사건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하였고 신문과 잡지 등에 대서특필로 오르내리며 순식간에 나라 전체로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죽은 두 여인 가운데 한 여인은 홍난파의 형이자 조선 최초의 안과 의사이며 세브란스 의전 교수인 홍석후의 고명딸인 홍옥임이었고 또 한 여인은 종로에서 덕흥서점이라는 대형서점을 운영하는 김동진의 딸인 김용주였는데 그 두 여인은 동덕여고보의 동급생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이 두여인은 자신들의 부유한 가정과는 달리 정신적인 갈등으로 방황을 하고 있었는데 김용주는 나이 17세 때 여자로서 신교육을 받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고지식한 아버지의 강요로 다니던 여학교도 포기하고 동막(지금의 대흥동)의 큰부자인 심정택의 아들 심종익과 강제로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살림한번 못배우고 귀하게 자란덕에 시집살이도 어려웠고 난봉꾼으로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날마다 속절없이 기다리는게 일과였습니다. 또한 홍옥임 역시 의학도 청년과 교제를 하다 뜻하지않게 가슴아픈 이별을 하였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동안 저명한 의사로서 평소에 존경해오던 아버지가 당시 장안에 사치와 허영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화동이라는 딸같은 또래의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과 큰 실망감에 빠져 그역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두여인을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은 이들의 신분상 어려움없이 부유한 생활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거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데 비해 두여인은 자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남들에게 대놓고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임을 비관하며 자신들이야말로 가슴에 상처투성이인 얼룩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가슴앓이로 답답해 하고있던 이들 두 여인은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는 현실을 원망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 만남을 갖게 되면서 서로의 공감대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이들은 이때부터 틈틈히 만나 서로의 처지와 고충을 달래며 시간을 보냈는데 마음이 통한 이들은 더욱 깊은 관계로 진전되어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한순간도 떨어지면 힘든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비밀스런 만남은 엄격한 가정과 개방적이지 못한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현실이었고 어쩔수 없이 남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만나 회포를 풀어야하는 두사람의 애정관계는 항상 조바심 속에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특성상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는 여자의 몸으로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식의 관계를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버겁고 힘든 한계를 느껴야 했고 그렇다고 서로가 관계를 청산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정이 들었기에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몹시 불안하고 두렵게 하였습니다. 1931년 4월 8일 오후, 봄으로 접어든 날씨는 매우 화창하였으며 영등포역에서 제물포 방향으로 향하는 철길위에는 양장으로 멋지고 예쁜 꽃단장을 한 젊은 신여성 둘이 손을 맞잡고 거닐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걷고 있었을까 멀리서 시커먼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두 여성은 서로를 마주보며 입가에 미소만 지을 뿐 아예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신문과 잡지에는 '철로의 이슬된 이륜의 물망초'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려있었고 이들 두여인은 인근 면사무소 한켠에 간신히 수습된 처참한 시신으로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각종 잡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다퉈 이들의 동성연애 행각과 이에 관련한 갖가지 흥미로움을 자극하는 기사를 보도하며 열을 올렸는데 대부분의 기사는 그녀들을 동정하거나 옹호하는 내용으로 동성애를 부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31년 당시의 동성애는 오늘날의 동성애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여성의 순결만을 강요당했던 그 시절의 성문화에서 동성애는 오히려 안전한 것으로 권장되기까지 하였으며 이성에 눈이 뜬 여학생 사이에서도 위험도가 높고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남녀관계와는 달리 친구같이 편하고 동등한 관계로 연애의 감정을 느끼며 지낼수 있는 동성간 연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신문화에 젖어가는 젊은세대들에게 자유연애는 뿌리깊은 봉건적인 가치관과 잦은 충돌을 빗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있는사람'들의 문란한 성문화도 조장하였습니다. 죽은 홍옥임의 아버지인 홍석후 역시 엄연히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면서 장안의 모던 걸로 명성을 날린 김화동과 찐한 스캔들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 당시 사회에서는 흔히있는 그저 그런일로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최초의 안과 의사인 홍석후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이 자자하였지만 자신의 딸 홍옥임과 같은 또래인 김화동과의 열애설은 결국 사랑스런 딸의 목숨까지 잃게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당시의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들에게는 적어도 가진자의 불륜에 관대한 풍조가 있었는데 유부남으로서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고 바람을 피우는 짓을 일삼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활동을 하는 당시의 사회적 인식과 용인,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모순 투성이의 사연과 사건들이 비일비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의 흐름 탓이었는지 장안에 숱한 염문을 뿌렸던 김후동과 김화동 두 자매 역시 자신들의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의 욕심과 신분상승을 위한 상류사회로의 진출을 위하여 젊은이로서 소중히 여겨야할 사랑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그릇된 사회풍조에 편승하며 수많은 남성들과 어울린 대표적인 황금만능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김화동은 스스로를 부유하고 교양있는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으며 외출시에는 반드시 한 손에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녔었는데 이런 그녀들의 멋진 신여성스런 모습에 주변에는 항상 호기심어린 뭇 남성들의 눈길이 끊이질 않았고 두 자매의 주변에는 그녀들에게 사랑고백을 하려는 큐피트의 화살을 든 사내들과 애간장을 태우며 안달하는 모습의 사내들로 넘쳐났습니다. 두자매는 이렇게 장안의 남자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자신들에게 홀려 빠진듯이 다가오는 모습들을 즐겼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조금도 열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들의 꿈을 충족시켜줄 돈많고 능력있는 남자를 찾는데만 애를 썼습니다. 언니 김후동은 당시 인천에서 곡물거래로 졸지에 거부가 된 반복창이라는 동갑내기 청년을 선택하였는데 여학교를 나온 자신에 비해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반복창을 단지 돈이 많다는 것이 매력이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921년 봄에 서둘러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거부 반복창과 절세미인 김후동의 결혼식은 스케일도 어마어마하여 세기의 결혼식으로 장안의 화제거리였으나 김후동이 한창 신혼의 달콤함을 누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다가진듯 행복해 하고 있을즈음,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반복동의 투자는 어찌된일인지 실패를 맛보기 시작하였고 거듭된 실패에 벌어 들였던 그많은 전재산을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자신이 동경했던 부유한 생활은 물건너 갔으며 궁핍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결국 아이 셋을 놔두고 냉정히 이혼을 결심, 또다른 사치와 허영의 세계를 향해가버렸습니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반복창은 자신에게 부를 만들어 주었던 과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인천의 미두시장가를 배회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중풍까지 덥쳐 더욱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반복창은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1939년 10월의 어느날 인천 송림동의 변두리 낡고 허름한 집에서 중풍의 후유증으로 화려했던 지난날의 영광을 뒤로한채 홀로 초라하게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동생 김화동은 평소부터 상류사회 진출을 위해서는 일본유학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중매쟁이로부터 정읍의 갑부로 알려진 이혼남인 박석규가 일본에서 혼인 제의를 해왔다는 전갈을 듣고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김화동은 하루라도 빨리 일본유학을 마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우선이었던지라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돈많은 박석규의 제의는 자신의 꿈을 이룰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쉽게 자기 뜻대로 되기만 하겠습니까. 일본으로 화동을 불러들인 박석규는 혼인은 커녕 공부도 시켜줄 생각은 하지않고 오로지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바뻤습니다. 실컷 자기 마음대로 갖고 놀던 박석규는 차츰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화동을 내버려두고 또다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곳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크게 실망을 한 김화동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그녀의 뱃속에는 박석규와의 관계로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김화동은 주변의 눈총을 의식하여서인지 자연 유산이 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분명 뱃속의 아이는 키우기 힘든 자신의 형편에 낙태를 시킨 것으로 추측되며 그동안 유학을 마치고 신분 상승하려했던 자신의 꿈 마저 날아가버버린 김화동은 몇년 후 언니 김후동의 이혼까지 겪으며 이들 자매는 쓰디쓴 인생의 아린 맛과 함께 나머지 삶을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야 하는 구겨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한창 장안을 들썩이고 있을 때에는 분명 일제의 강압적 통치로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 국민들에게는 그리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자주 오르내리며 관심을 받았던 대부분의 부류들은 일제 치하에서도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어 말그대로 먹고 살만한 여유로운 계층들입니다. 부모의 강요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 것이 후회 된다던지 존경하던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의 이성교제 실패로 비롯된 두 여성의 동성애와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택한 것은 단순히 감상적 허무주의로 보거나 아니면 권위주의로 경직된 사회가 받아주지 못해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으로 내다 보기도 하는데 항간에는 부유층 젊은이들의 나약한 정신력에서 저지른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젊은 것들의 배부른 짓거리라는 비난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어떤 능력과 복을 받아서인지 일제 치하에서도 부족함없이 살다 감당하지 못할 스스로의 정신적인 문제에 죽음을 택한 비극의 두 여성이나 시종일관 사치와 허영에 들떠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보려던 동생 김화동과 그저 돈많은 사람 만나 호강하며 부유하게 살아보려는 언니 김후동의 재물에 대한 맹신같은 것은 일제 치하라는 아픈 역사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또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였을까 싶기도하고 그나마 다른 사람들에 비해 편했던 자신들의 처지를 좀더 지혜롭게 넘어서지 못한 잘못된 청춘들의 말로는 묵은지조차도 이 글을 쓰고있는 내내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교차 하였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갑니다 그리고 느낌이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