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관한 진리(眞理)
(Christ loved the Church by William Mc Donald)
하나님의 교회의 많은 진리 가운데 지역교회가 살아있는 증인으로서 보여 주어야 할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일곱가지의 진리에 대하여 간단히 서술한다.
1)교회는 한 몸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엡4:4)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말씀한다. 그럼으로 한 몸의 진리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의 최선의 방법은 다른 성도들의 무리와 구별(區別)하는 어떠한 명칭(名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1:12-13)"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4)
종파(宗派)나 교파(敎派)는 사단의 궤계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며, 우리 인간의 영적인 교만과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 만족과 죄에서 유래한 것이다Marcus Rainsford)
우리가 진리를 고수(固守)한다는 구실로 테두리를 좁혀가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젖혀 놓으면 결국 우리는 일방통행이 되어버리고, 우리가 전하는 진리도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진리를 희생시켜서 은혜를 보여주려 한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쓸모없는 자유방임(自由放任)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C.H.Mackintosh)
그러나 보이는 몸으로서의 지역교회의 연합이 소위(所爲) 교회 연합 운동(Ecumenical movement)을 통하여 진리와 비진리가 적당히 타협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연합함에 있어서 참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그 말씀에 한 가지로 헌신하는 데 있다.
2)그리스도만이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5: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골1:18)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기에 교회의 머리가 되려는 어떠한 지도자도 용납(容納)해서는 않된다.
이러한 진리를 입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으로 시인하는 것은 다르다. 실제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하면서도 교회를 제멋대로 운영(運營)하거나 보이지 않게 교회를 지배함으로써 이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요삼9,10 의 디오드레베가 그런 사람이었다).
각 교회는 머리되시는 주님께 대해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으로 이 진리를 고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3)모든 성도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순간에, 그는 몸의 지체로서 교회에 더해지게 된다. 이 지체 하나 하나는 인종이나 피부의 색갈이 다르고, 국적(國籍)과 기질이 다르며, 교양과 사회적 지위가 다르며, 언어와 교파(敎派)가 다르고 빈부(貧富)의 차이가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초월(超越)하여 한 몸에 속하여 있다(고전12:12-26의 지체의 원리를 읽을 것).
c 어떤 성도를 지역교회에 영접하게 될때의 원칙
a.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지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접한 모든 자들을 영접하여 교회의 지체됨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몇가지 예외의 상황이 있다.
1)영접된 사람의 생활이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하다는 진리를 보여주어야 한다.(고전5:11;10:21)
2)다른 지역 교회에서 징계(懲戒)를 받은 사람도 교회 교제(交際)에 영접할 수 없다(고전5:13). 출교된 사람은 주님과의 교제, 그리고 주의 자녀들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까지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취급을 받게 된다(마18:17).
3)그리스도에 관하여(주님의 인격과 하신일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 올바른 분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요이 10).
b. 지역교회의 영접에 관한 성경에서의 교훈
1)믿음이 약한 자라도 영접하라.(롬14:1)
2)신분 여하(如何)를 막론하고 영접하라.(약2:1-5)
3)성경 지식에 관계없이 참으로 생명이 있는가를 근거로 해서 영접하라(행9:26-28).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아니고 알고 있는 분이 누구냐에 따라 교제 할 수 있다.
4)예식(禮式)에 구애받지 말고 생명을 근거로 영접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마땅히 침례를 받아야 하지만 교회에 영접되기 위하여 침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할 때는 기록된 말씀을 이탈하는 것이다.
5)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를 개념치 말고 생명을 근거로 영접해야 한다. 즉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역 교회에서의 교제에서 그를 거절 할 수는 없다.(눅9:53에서 거절은 당파적인 사고방식이다)
6)구원 받기 전의 상태에 관계없이 영접하라.(행9:27,28의 바울, 몬12,15의 오네시모)
7)주님을 영접하듯 기쁨으로 영접하라(빌2:29). 가장 연약한 지체에게 대우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과 같다.
c. 지역교회가 어떻게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교회의 교제에 합당한가를 분별할 수 있을까?
1)천거서(薦擧書)를 사용함으로(롬16:1)
;여러 교회를 방문할 때에 이를 지참함으로 교제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
2)두 세 증인의 증거로(마18:16)
; 그 사람에 대하여 두 사람 이상이 알고 있다면 그들의 추천에 따라 영접된다.
3)그 교회에서 신뢰할 만한 단 한 사람의 증거로(롬16:1,빌2:28-30)
4)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명성으로(고후3:1-3)
5)지역 교회의 자체 조사나 확인으로. 이에 대하여 교회의 장로들이 그의 믿음에 관한 것을 물어보고(벧전3:5)
*교회에서의 교제란 교회 생활에 함께 참여하여 책임을 분담하고 교회에 관련된 모든 일을 함께 하는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 주일에 예배만 참석한다고 하면, 이는 교제 가운데 있다고 말 할 수 없다. 또 영접된 후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는 일차적으로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신령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보내어 권면(勸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후에는 순종(順從)의 의무(義務)가 본인에게 있다. 영접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음으로 항상 기도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4)성령님은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신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16,26)
승천하신 후에 에수님께서는 주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이 성령님께서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역사(役事)하신다.
1그리스도인들을 예배하도록 인도한다."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
2기도하도록 감화 감동하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3전도하도록 힘을 주신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
4가부간(可不間) 인도하신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13:2)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성령께서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인도하시거나 부정적으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5교회를 위하여 감독자(監督者)를 세우신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행20:28)
6은사(恩賜)를 주셔서 자라게 하시고 잘 일하도록 해주신다.
"그가..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엡4:11)
7모든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이와같이 교회는 모든 일에 성령님의 주권(主權)을 인정해야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똑 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아니 하시지만 결코 말씀에 어긋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 그럼으로 성경에는 성령님을 불이나 물이나 기름이나 바람으로 비유(比喩)하여 유동적(流動的)이고 예측할 수 없는 활 동을 묘사하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교회적으로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가 허락되었으나 곧 제약(制約)이 더하여 져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로 변질되어 버렸다.
성령을 소멸(消滅)치 말라하신 말씀에 미루어 볼 때에, 성령님은 소멸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불이 붙기 시작할 때는 연기가 많이 난다. 그러나 그 연기를 없애자고 그 불에 물을 끼얹을 수는 없다.당분간은 연기가 나서 눈이 좀 아프겠지만 얼마 안가서 연기는 사라질 것이다. 또 너무 뜨거워서 고통스러울지라도 잠시 동안 참아 주는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도 선한 일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의 열정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교훈(敎訓) 하였다.
이러한 열심히 지식에 미숙할 수도, 경험에 미숙할 수도, 열심히 실수를 범할 수도 있으며,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어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열심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주님의 일을 발전 시키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으로, 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운 방법보다 더욱 영적인 힘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주의 영(靈)이 있는 곳에는 자유(自由)가 있다(고후3:17)고 하셨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그에 따른 위험도 있음으로서 다소 선의(善意)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성령님의 자유가 점차 제약(制約)을 받게 된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다스리는 은사가 다른 은사들을 삼켜버리게 되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른 지체들과는 구분되는 특권 계급이 되어 버렸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 신령한 은사들이 이 특권 계급에 의하여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전수(傳授)할 수 있고 복음에 나타난 은혜와 진리를 수호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하여야 만이 성령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커다란 소화기가 형제들의 심령에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꺼버렸다."(James Denny)
집회(集會)의 이상적인 모습을 메킨토쉬(C.H.Mackintosh)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각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바라 보고 모여야 한다. 집회에서 본성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버릇, 예를 들어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形式的)으로 기도한다든가, 말하기 위해 말한다든가, 침묵을 메꾸기 위해 찬송을 택하는 등등으로 거룩한 예배가 침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대하여 뵙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대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각자의 시선(視線)은 주님을 향하고 주님께 심령이 사로잡힌 바 되어야 한다. 성경 한 구절을 읽게 될 때에 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한 말씀 한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심령에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성도가 기도하게 될 때에는 그 기도가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대하여 뵈올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찬송을 부르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주님께 올라가서 하늘나라에 있는 비파(琵琶)를 연주하듯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하늘 나라에서 예배드릴 그 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첫댓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경교재 "신앙생활의 a.b.c"중 - "교회의 관한 진리"가운데서 발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