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비계 타는
이향지
25층 지붕에 유리 청소부 밧줄 걸렸다
달 높이로 올라간 유리창들
몽롱한 잠 깨워서 물로 씻어주는 날
하늘 가운데 로프를 걸고 자유자재 조종할 수 있는 사람
하늘 속 그네 의자에 앉았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그림이더니
한 겹 버티컬 블라인드 날 사이로 보니
가장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밥그릇
건너편 지붕에서 왔다 갔다 하던 모자가
마침내 우리 유리창까지 왔다
눈을 주고 손을 주고 발을 줄 수 있는 도구들
빠짐없이 허리에 둘렀다
매달고,
매달렸다,
끝이 끝을 붙잡고 있다,
행동반경 이삼 미터,
내려다보는 깊이는 아득하다,
땅에 발을 디딜 때까지
흔들리며 내려가야 할
로프
한 사람의 서커스
한 사람의 외로움까지
달비계를 타고 있다
달비계에 달린 물줄기가 유리창을 훑고 지나간다
더께 앉은 얼룩 씻어내리기에는 역부족인 물줄기
모자의 전면은 거울이다
유리창 이면의 얼룩까지 어른어른 겹치는 순간
문득문득 자기 얼룩까지 떠올라
더 먼 구석까지 밀고 다니는 거품 방울들
모양 칼라 높낮이 모서리 같아도
같은 흠집 같은 얼룩은 없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 때
우리 유리창은 우리 손으로 닦았다
흐르는 물을 끌고 다니며 질퍽질퍽
봄맞이할 수 있었다
세상 안 모든 얼룩은 무엇과 스치며 얽힌 흔적들이다
희미하거나 모를 때는 그냥 지나가지만
이미 한 덩어리 되었을 때는
독한 세제와 거친 마찰과 충분한 물이 필요해진다
가진 계란을 한 바구니에 모아 담지 말라지만
사람들은 점 점 더
달비계 타는 유리 크레바스 그늘로 모여든다
이향지 l
198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소리』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내 눈앞의 전선』 『햇살 통조림』 『야생』, 에세이 『산아, 산아』 등, 편저 『윤극영 전집 Ι ∙ ΙΙ』가 있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3·202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