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이 드라마에 대해 굳이 글을 남겨 두진 않으려 했다. 지난 한 달간 워낙 많은 평들이 쏟아져 나왔고, 표절 논란에 대해서도 양측의 주장이 나름의 논리로 정리되어 가는 양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러 매체와 방송에서 이 표절 의혹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거나 장르적 특성에 따른 유사한 구성 정도로 다루는 걸 보게 되었다. 또 다수의 대중이 왜 이런 표절 논란이 생겼는지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 나도 개인적인 감상평을 기록해 두려 한다.
평소 이런 걸 챙겨보는 유형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9월 17일 당일에 우연히 8편을 연달아 보게 됐는데, 내가 1화를 보던 중 처음 꺼낸 말은 “이거 완전 카이진데?”였다. 표절 논란이 생기기도 전에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1) ‘대도시에서 도박에 빠져 살아가는 주인공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배에 타고 게임에 참가하기 시작한다’는 설정이 너무 유사했고, 2) 이정재가 연기한 ‘성기훈’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없고 가족보다 타인(제3자)에게 더 인정이 많은 ‘카이지’라는 캐릭터와 판박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6화 깐부 에피소드가 끝난 후에는 같이 보던 이에게 “이제 게임으로 유리 다리가 나오진 않겠지?”라는 말을 건넸고, 설마는 금방 피식이 됐다.
* 물론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와는 또 다른 작가의 작품인 후지무라 아케지의 <신이 말하는 대로>도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오징어 게임>이 일부 차용을 했거나, 장르적 유사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신이 말하는 대로>에서 ‘다루마 씨가 넘어졌습니다’(일본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탈락자를 거대 인형이 죽인다는 설정은 <오징어 게임>이 그대로 답습한다. 그러나 그 두 작품의 인물과 배경과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그 장면만 유사할 뿐, 전체 서사와 구조가 다르고, 참가자들의 자발적 게임 참여 여부, 배경이 학교인 점과 섬인 부분이 다르다. 등장인물들이 학생과 성인인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캐릭터와 작품의 메시지가 겹치지 않는다.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 내에서 전개 방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단순히 장면이나 게임이 유사하다고 해서 트레이싱이라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오징어 게임>의 주최 측이 쓰고 있는 가면과 과거의 마을을 복구한 가상의 장소를 보다 보면,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 강하게 연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티프를 얻었다 정도면 모를까 표절의 기준은 시각적인 요소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 <아일랜드>도 마찬가지고.)
최재헌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 글은 이 논란에 대해 표절의 기준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양해를 구하고 전문을 요약해 두었다. "누군가가 멋있거나 아름다워서 그가 입은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따라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말투나 성격, 가치관까지 따라하면 그건 기이한 것이다. 누구도 배트맨이 슈퍼맨을 표절했다거나, 인빈시블이 슈퍼맨의 표절작이라 하지 않는다. 똑같은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나와 사람들을 구하더라도 히어로의 스토리와 숙명, 그 배경이나 동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외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슈퍼맨과 드래곤볼의 손오공을 같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히어로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은 동일하지만 고유의 캐릭터성이 중요하고, 그게 어떤 작품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내야 할 핵심이자 코어다. <오징어 게임>이 표절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생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제대로 본 사람이냐 아니냐에서 나눠진다고 본다. 표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카이지를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이 작가 작품을 슬램덩크나 드래곤볼보다 더 좋아하고 더 많이 본 사람이다. 그래서 알 수 있다. 마지막 공항씬에서 이정재가 맡은 역할의 선택조차도 카이지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베껴왔다는 것을." 나는 <오징어 게임> 표절 논란을 두고 이 정도로 핵심을 짚어낸 글을 또 보지 못했다.
반면, <오징어 게임>이 남긴 의의는 없을까. 우원재 작가님은 “오징어게임과 킹덤 등의 작품들이 한국 드라마의 전형을 깼고 이 영향으로 다음 벽을 넘게 될 작품이 나올 걸 기대한다”고 하신 바 있다. 또 “일본 데스 게임 장르의 작품들이 동양권을 벗어나서 범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징어 게임의 성공 원인은 뭘까” 하는 질문을 던져 주시기도 했다.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플랫폼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는 답변을 드렸다. 만화(그 중에도 마이너한 데스 게임 장르)라는 매체의 한계가 있고, 오징어 게임은 애초에 세계인이 모두 접할 수 있는 넷플릭스라는 매체를 통해 막대한 홍보비를 지출하며 시작한 드라마라는 차이가 가장 큰 성공의 요인이었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넷플릭스를 통해 수준 있고 짜임새 있게 카이지가 드라마화 되었다면, 그 서사의 몰입감과 독창적인 전개 방식, 입체적인 캐릭터들로 인해 오징어 게임보다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자체가 무의미한 가정이고, 능력의 차이인 거겠지만. (오징어 게임 작품 내의 메시지는 손경모 선생님의 평론을 참고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나는 카이지의 전권을 소장 중인 독자로서(편들겠단 게 아니고 카이지라는 작품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오징어 게임이 저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연출이나 장면, 게임만 유사한 게 아니라 캐릭터의 설정과 전체 구도까지 빼다 닮은 구석이 너무 많기에, 차라리 카이지 판권을 사 와서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제작했다면 어땠을까 한다. 또 <도박묵시록 카이지>라는 만화책을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하루 날 잡아 적어도 '유리 다리' 에피소드까진 독서해 보시길 권해 드리고 싶다.
<자유영 페북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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