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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륙조선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진실한사람이여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312021_002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自玆以降, 分爲三韓, 散爲九夷, 及至羅、麗, 始得混一, 而其敎則儒釋相半, 其俗則華戎交雜)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然而地近燕、齊)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되었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314) 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周武)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聲敎)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華制)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番梵)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315) 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과 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세가 밝게 트이면서 아조(我朝)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덕을 합쳐주고 귀신과 사람이 모두 도와주는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시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셨습니다. 이렇게 왕업(王業)을 일으켜 후대에 물려주고 대경(大經) 대법(大法)을 확립하여 시행케 하는 한편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선왕(先王)의 위대한 법도를 펴게 하자 문물제도가 상(商)나라나 주나라 때보다도 빛나게 되면서 그 명성이 온 누리에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316) 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함께 예악(禮樂)이 행해지고 교화가 융성하게 펼쳐져서 집집마다 제사지내는 풍조가 이루어지고 어린 아이들도 시서(詩書)를 암송하는가 하면 말몰이꾼이나 양치기들까지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줄 알고 부엌에서 시중드는 여종이나 밥짓는 아낙네들도 다시 시집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동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기자 성인께서 펼치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행해지게 된 것이니, 아, 정말 성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근본이 없이 된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윗대에서 덕을 쌓아 신령스러운 기운이 길러지고 선한 일을 하여 상서로움이 내려지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반드시 천명을 내려주어 후손을 창성하게 해 주는 것이니 이는 마치 높은 산과 큰 강물에 밑둥이 있고 근원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각각 설(契)과 직(稷)에서 근본 했던 것을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조상으로 말하면 멀리 신라 때의 사공(司空)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빛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계속 자손이 번창 하여 목조(穆祖) 때에 이르러서는 인의(仁義)를 행하여 왕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는 공유(公劉)가 빈(豳) 땅에 거주했던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익왕(翼王)과 도왕(度王)께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면서 부지런히 왕업의 기틀을 더욱 다지셨고, 급기야 우리 환고(桓考) 때에 이르러 선대(先代)의 공적을 크게 드러내시자 민심이 귀의하여 끝내 대업(大業)의 성취를 보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태왕(太王)이 기(岐) 땅으로 옮겼을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경서에 이르기를 ‘나라가 장차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갖가지로 뒤섞여 나타난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들에 대해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돌보고 사방의 민심을 살펴본 데에 기인한 것으로서 산천이 신령스러운 현상을 드러내고 신명(神明)이 말없이 도와 준 까닭에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이렇듯 위대한 사적(事蹟)이 혹 패관(稗官)이나 야승(野乘)에나 보일 뿐 간행된 믿을 만한 서적은 없이 그저 입으로만 서로들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은 나름대로 유감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북방 변경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왕업을 일으킨 고적(古蹟)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답사하였는데, 마치 풍패(豊沛)317) 고을에 가서 대풍가(大風歌)318) 를 직접 듣는 듯 하염없이 감회에 젖어들었으면서도 신의 자질로는 어떻게 표현하여 드날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이어 또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하는 임무를 외람되게 맡게 된 기회에 궁중에 비장(秘藏)된 귀중한 사료(史料)들을 얻어 볼 수가 있었는데, 훌륭한 제도와 문물들은 모두 《보감(寶鑑)》에 실려 있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한 공로 등은 모두가 고려조(高麗朝)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근거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 책만은 즉위하기 이전의 사적을 자세하게 기재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책은 전적으로 공적을 노래로 찬송하는 것을 위주로 해서 대요(大要)와 세목(細目)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항목별로 비유를 들면서 멀리 고사(古史)를 인용하는 등 기사체(記事體)와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또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은 관계로 앞뒤의 순서가 어긋나고 세대를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워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로서 후세에 전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나름대로 《고려사(高麗史)》 및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뽑아 취집한 다음 연대를 분류해서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고, 물러가서는 또 《여지승람(輿地勝覽)》 및 《능전지(陵殿誌)》·《송경지(松京誌)》와 개국 초기의 문집들을 널리 상고한 뒤 왕업을 일으킬 때의 사실을 언급한 부분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저것을 인용하여 이것을 증명하고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여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항목을 달리하면서도 내용을 일관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책으로 완성되어 간행된 것만을 자료로 택하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어설픈 기록들은 감히 뒤섞어 넣지 않음으로써 가능한한 근엄하면서도 정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사체(事體)가 중해지게 하는 동시에 크나큰 업적을 드러내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3편(編)으로 만든 다음에 분명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북쪽 지방의 고적(古蹟)을 덧붙이고 열조(列朝)의 공적을 기술하여 드날리는 말을 각각 기재하는 한편 그 아래에는 사신(詞臣)이 찬양하며 칭송한 말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4편으로 만든 다음에 이름을 《흥왕조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거칠기만 하고 보잘것없이 미천한 신이 어떻게 감히 역사를 기술하는 중대한 일을 의논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관각(館閣)의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옛날로 말하면 태사(太史)의 직책에 해당되기에 어리석고 망령된 것을 헤아리지 않고 문득 찬술하게 되었으니 참람되게 행동한 죄를 실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손을 씻고 정성스럽게 재계한 뒤 차자를 올리며 삼가 책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효성을 다해 선인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덕을 정성껏 추모하여 적도(赤島)에 비(碑)를 건립하고 경흥(慶興)의 저택을 기념케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서당(讀書堂)과 치마대(馳馬臺)와 같은 고적들을 발굴하여 선조의 공적을 선양하는 등 아무리 먼 시대의 것도 모두 드러내 보여 주었으며 심지어는 상산(象山)319) 의 유지(遺址)에까지 모두 비석을 세워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에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아,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신이 올리는 책을 보시고 마음속에 느껴지시는 것이 있거든 한가하실 때에 특별히 살펴보도록 하시고 내각에 보관하여 빠진 역사를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 열조(列祖)께서 계속 쌓아 오신 덕업(德業)과 왕업을 일으킬 때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던가를 그런대로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선대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후손들을 잘살게 해 줄 계책을 꾀함에 있어서도 늘 이를 생각하며 어긋나지 않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만세토록 태평 시대를 누리면서 끝없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상의 공적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는데, 《서경》의 이훈(伊訓)과 무일(無逸) 편은 경계해 주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시경》의 현조(玄鳥)와 생민(生民) 편은 전적으로 칭송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라 하겠다.
기술(紀述)하는 체재(體裁)로 쓴 삼대(三代)320) 의 기록으로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이는 훌륭한 사관(史官)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체로 볼 때 그 일이 너무도 공경스럽고 그 의리가 지극히 컸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일 따름이다.
아, 우리 국가에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임금들이 계속 뒤를 이으시어 하늘과 땅처럼 빛나게 된 것은 실로 왕업을 일으킨 고장의 성스러운 사적에 기초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날리는 책 1부(部)를 여태까지 지체시키면서 편찬하지 못한 것은 다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였지 그럴 겨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감》을 찬수할 때에도 삼가 열성(列聖) 19인의 큰 계책과 위대한 업적만을 기록했을 뿐 왕업을 일으키기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기술하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나 소자(小子)는 밤이나 낮이나 선왕(先王)의 마음으로 열조(列朝)의 마음을 추급해 헤아리고 열조의 마음으로 성조(聖祖)321) 의 마음을 체득해 보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하여 옛날에 거하시던 유적지를 기념하고 왕업을 일으킬 때의 상서로움을 드러내어 영원히 자손에게 무궁한 복을 끼쳐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한두 개의 정민(貞珉)322) 에 새겨서 조금이나마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은혜를 갚으려는 정성을 표시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이 《용비어천가》를 근거하고 궁중에 비장된 사료를 뽑아 낸 뒤 연대별로 분류하고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종합적인 책으로 저술해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날 태사(太史)의 직분을 수행한 것이라 하겠다. 경이 올린 《흥왕조승》 2책(冊)을 가져다 경건한 자세로 열람하고 경의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간행하여 보관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보배로 삼게 할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24면
【분류】출판-서책(書冊)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314] 도당씨(陶唐氏) : 요(堯)임금을 말함.
[註 315] 왕씨(王氏) : 고려.
[註 316] 발해(渤澥) : 황해(黃海).
[註 317] 풍패(豊沛) :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으로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일으켰음.
[註 318]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가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고향인 패(沛) 땅을 들러 친족과 옛 친구들을 모아놓고 향연을 베풀며 불렀던 노래임.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註 319] 상산(象山) : 곡산(谷山)의 옛 이름.
[註 320]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321] 성조(聖祖) : 태조(太朝)를 가리킴.
[註 322] 정민(貞珉) : 비석.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洪惟我東方有國, 粤自邃古, 檀君首出, 箕子東來. 自玆以降, 分爲三韓, 散爲九夷, 及至羅、麗, 始得混一, 而其敎則儒釋相半, 其俗則華戎交雜.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然而地近燕、齊)..."
정조 임금님 때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 선생이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지근연제(地近燕、齊)
그림 출처 https://dbsgns2011.blog.me/220963063311
우리 동방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동쪽이었다!
“구이(九夷)
[명사] <역사> 중국에서 이르던 동쪽의 아홉 오랑캐.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를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 선생이 우리 조상이 구이(九夷)라고 말하고 있는데! 1912년에 건국된 중화민국이나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인 중국(中國)에서 이르던 아홉 오랑캐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周武)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聲敎)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華制)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番梵)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蓋其風氣相近, 聲敎攸漸, 衣冠悉遵華制, 文字不用番梵, 或稱小中華, 或稱君子之國, 與夫侏𠌯左袵之俗, 逈然不同.
“그러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세가 밝게 트이면서 아조(我朝)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何幸天開鴻荒, 運屆熙明, 我朝之興。 適會於皇明, 肇造區夏之時, 錫號賜冕, 視同內服.
適會於皇明, 肇造區夏之時, 錫號賜冕, 視同內服.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라는 해석은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다!
태조 임금님의 밝음으로 여름에 면류관을 쓰시고, 천자가 직할하는 사방 천리의 지역을 주관하기 시작했다 라는 내용이 들어가야 맞는 것 같다!
“내복(內服)
천자가 직할하는 사방 천리의 지역. 복(服)이란 천자의 일에 복무한다는 의미로써, 내복은 사방 천리의 왕기(王畿) 이내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하고, 왕기 이외의 지역은 외복(外服)이라 함. [반대말] 외복(外服).“
[네이버 지식백과] 내복 [內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시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셨습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숙종실록 56권, 숙종 41년 7월 1일 갑오 2번째기사
1715년 청 강희(康熙) 54년
http://sillok.history.go.kr/id/ksa_14107001_002
북병사 조상주가 북방 국경 지역의 호인(胡人)의 일에 대해 논하다
북병사(北兵使) 조상주(趙相周)가 치계(馳啓)하기를,
"마침 강변으로 나오는 호인(胡人)이 있기에 불러서 묻기를 ‘오라(烏羅)·영고탑(寧固塔) 두 곳의 호인이 앞으로 후춘(後春)지역으로 옮겨 살려고 한다는데, 그런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그렇다. 강변 근처의 땅이 비록 비옥하다 하나,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하여 이미 집을 헐어 버린 일이 있었으니, 감히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후춘의 묵혀서 황폐해진 곳과 슬해(瑟海) 가의 빈 땅을 개간(開墾)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슬해는 어디에 있는 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후춘의 동해(東海) 가에서 하룻길의 거리이며 땅이 또한 매우 비옥하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슬해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는데,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는데, 어떤 때는 육로(陸路)를 따라 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으므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피인(彼人)들이 슬해를 차지하여 살려고 한다는 말이 과연 실상(實狀)이라면 나중의 우환이 진실로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9권, 정조 4년 3월 9일 무자 2번째기사
1780년 청 건륭(乾隆) 45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403009_002
북도에서 해로로 범월한 죄인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북백(北伯)의 장계(狀啓)에 범월(犯越)한 죄인 중에서 한 사람은 승복(承服)하였으나 네 사람은 변사(變辭)128) 하였다 하였습니다. 변사한다 하여 끝까지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네 사람도 아울러 핵실(覈實)하여 반드시 승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채(漁採)하는 백성이 이익을 좇아 바다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면 계한(界限)이 지엄(至嚴)한 줄 알더라도 풍세(風勢)에 몰려서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 드디어 표한(標限) 밖으로 나가도 멈출 수 없으니, 이것은 육지 백성이 짐짓 범월한 것과 조금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슬해(瑟海)로 물려서 경계를 정한다면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적을 듯하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저들의 지경으로 범월하는 것은 본디 당률(當律)이 있으므로 망설일 수 없다마는, 북도(北道)의 경원(慶源) 땅에서 범월한 사람의 죄는 용서할 꼬투리가 없지 않다. 해로의 경계는 육로와 다르니, 어채할 즈음에 저들의 땅에 표류하여 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표류한 것에 붙이더라도 실형(失刑)이라 할 수 없으니, 범월한 일로 갇혀 있는 죄인들은 모두 사형(死刑)을 감면하고 참작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슬해(瑟海)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고!
“또 바이칼(Baikal. 배달)호는 남북의 길이 636km, 동서(東西) 길이 48km이며, 최고 큰 폭이 79.4km. 또 둘레는 2,100km나 됩니다.[사서(史書)에는 북해(北海), 천해(天海)이며, <전한서(前漢書)>엔 패가이호(貝加爾湖. 문명을 일구는 땅 · 호수) ) 또는 백해(白海)로 기록. <조선실록>엔 슬해(瑟海. 엄숙하고 곱디고운 호수). <고구리 초략>에 월해(月海)로 묘사해 기록되어 있다. 모두의 뜻은 배달(倍達)로서 조선(朝鮮) · 한(韓)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출처] 사얀산맥 원주민 학생돕기...|작성자 항산문화원
https://blog.naver.com/hss5647/221317395486
한민족의 시원
https://blog.naver.com/kctjpark/221328734040
슬해(瑟海)를 바이칼 호수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바이칼 호수
조선왕조실록 원본
다른 글자와 달리 連渤澥, 東盡瑟海는 흐리게 인쇄되어 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옛이름. 중국 대륙에서는 예부터 타이완(臺灣)을 류큐(琉球)라고 불러오다가, 명나라 태조(太祖) 때 와서는 오늘날처럼 오키나와를 류큐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타이완을 ‘소류큐’, 오키나와를 ‘대류큐’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타이완보다 오키나와가 해상교역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교역의 요로에 자리한 오키나와는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교차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일찍이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진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류큐 [琉球]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창비)
“섬라(暹羅)
현재의 타이로 점성(占城) 서남쪽에 있다. 순풍으로 10일이면 갈 수 있다. 즉 수·당시대의 적토국(赤士國)이다. 후에 나곡(羅斛)·섬(暹)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원대에 섬이 항상 조공하였고, 명 태조 홍무4년 명나라에 처음으로 조공하였다. (『명사』 권324, 외국열전 5).“
[네이버 지식백과] 섬라 [暹羅]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위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조선은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고,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왔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화융(華戎)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였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태국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고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동방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동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