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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광기를 부리는 다윗
삼상 21:10-15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삼상 21:10-15 / [블레셋 족속에게 망명한 다윗] 다윗은 사울에게서 도망하던 바로 그날에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 11)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가 바로 저쪽 나라의 왕입니다. 저쪽 나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이 사람을 가리켜 `사울이 죽인 원수는 수천이지만 다윗이 죽인 원수는 수만이라네!'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12) 그렇게 다윗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잡혀 죽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13) 그래서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척을 하였다. 그 당시 미친 사람은 종교적으로 죽이지 않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의 몸을 붙들자 그는 문짝을 꽝꽝 치고 수염에 침까지 흘렸다. 14) 그러자 아기스가 자기 신하들에게 호령을 하였다. `보아하니, 저 자는 미치광이가 분명한데, 너희가 어찌해서 내 앞에 끌고 왔느냐? 15) 어디 미친놈이 부족해서 이런 자까지 끌어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내 궁전에는 저러한 자가 있을 곳이 없으니 어서 내쫓아라!'
다윗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놉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는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떡과 칼을 얻었지만 도엑이 밀고할까봐 두려워서 블레셋의 가드로 다시 도망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미친 척하여 위기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10-11) 다윗은 놉의 제사장을 만나 도움을 받는 중에 사울의 목자장 도엑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그 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달아났습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5대 성읍 가운데 하나였으며(수 13:3), 다윗이 죽였던 골리앗의 고향이고(삼상 17:4), 과거 다윗이 공격했던 곳입니다(삼상 17:52). 이처럼 가드는 다윗과는 원수관계에 있었으나 당시로서는 사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가드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보고 그 땅의 왕 다윗이라고 아기스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12-15)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자 아기스 왕을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서 도망치다가 블레셋의 가드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0절에 “사울을 두려워하여”라고 했는데 12절에는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심히’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미친 사람처럼 성문의 문짝에 아무렇게 글자를 긁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를 본 가드 왕은 다윗을 미치광이로 여기고 내쫓았습니다. 다윗은 가드에서 쫓겨난 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시 34:4, 6).
적 용 : 사울이 두려워서 피해 달아났던 다윗은 더 두려운 아기스를 만났습니다. 이 사건이 당신에게 위기에 대한 어떤 교훈이 되었습니까?
마음은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비결은 먼저 마음을 주어야만 합니다.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최대한 낮추고 최대한 섬기는 자세로 겸손히 다가가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할 때 다윗의 방황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 주권에서 하나님 주권으로 바뀌는 영적인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21:10
두려워하여...도망하여 - 여기의 '두려워하여'란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다만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일 뿐이다. 한편 '도망하여'(* , 바라흐)라는 동사는 본서의 19:18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본서 저자는 다윗이 자신의 집을 떠나는 장면을 기술하면서도 계속 반복적으로 이 동사만을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위협이라는 동일한 원인에 의해 계속적으로 도망을 다녀야만 하는 그 비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9:18; 20:1). 그런데 여기 놉(Nob)으로부터의 '도망'은 사울의 신하 도엑으로 말미암은 황급한 도주였을 것이 분명하다(22:22). 가드 왕 아기스 -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5:8)이다. 그 위치는 놉의 남서쪽 약 37km지점이다. 수 11:22 주석 참조, 한편 '왕'(* , 멜렉)이라는 호칭은, 블레셋 족속들에게는 중앙 집권적 왕이 없으며 다만 각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방백만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5:8; 17:8)에서 볼 때, 여기의 '왕'은 가드 지역만을 통할하는 '방백'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기스'(Achish)라는 이름은 B.C.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애굽의 문헌에도 나오는데, 이는 그당시 애굽에 침입했던 '크레 타 인'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아기스'라는 이름이 칠십인역(Septuagint)에서는 '앙쿠스'(* )로 번역되었는데, 이와 거의 비슷한 '앙키세스'(* )라는 이름이 호머(Homer)의 서사시에도 나온다는 사실들은, '아기스'라는 이름이 비셈어계 즉 헬라 계통의 이름임을 잘 증명해 준다(4:1). 한편, 후일 본 사건을 읊은 다윗의 시편 34편의 제목에는 여기 블레셋 왕이 '아비멜렉'(Abimelech)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것은 애굽 왕의 공식 명칭이 '바로'로 통용되듯, '아비멜렉'은 가드 왕의 공식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기스'는 실제 다윗 당시의 가드 왕 곧 아비멜렉의 이름이다(Keil, Smith). 그리고 또한편 다윗이 굳이 '가드'로 도망간 이유는 (1) '가드'는 엘라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블레셋 국경의 첫번째 도시로서, 이방 국가로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고, (2) 다윗은 자신이 가드 출신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후(17:49-51) 벌써 수 년(약 3-4년, Smith)이 경과하였으므로, 그들이 당시와는 많이 변모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으며, (3) 오히려 블레셋 족속의 가장 큰 적인 이스라엘의 사울로부터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처신할 때, 어쩌면 가드의 블레셋 사람들이 보호막이 되었다.
=====21:11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 당시 다윗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식한 까닭은 다윗이 사울과 대등한 위치로서 백성들에 의하여 칭송되었기 때문이다(18:7).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블레셋의 신하들은 다윗을 마치 자신들의 방백처럼 여러 명의 왕중의 한 사람, 즉 지역적 군주(local prince)로 봤음이 분명하다(McCarter; 수 12:1, 7). 결국 이것은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와 그 전승가(18:7)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윗의 그늘에 묻히고, 다윗은 이방의 적들에 의해 그 땅의 영웅으로 부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Thenius). 사울...천천이요 다윗...만만이로다 - 이 노래는 다윗의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아 블레셋에 대해 대승을 거두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전승가(戰勝歌)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널리 유행했던 이 노래는 이방 국가에까지 퍼져, 그들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18:7 주석 참조.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 '이말'은 아기스의 신하가, 다윗이 자신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던 영웅적 인물임을 알고, 이 사실을 자신의 왕에게 상기시켰던 것을 가리킨다(11절).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가 자신을 몰라 볼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피신해온 다윗에게는 심히 두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21:13
그 행동을 변하여 - 여기의 '행동'은 '판단력' 혹은 '미각'(味覺)이란 의미이다(25:33). 따라서 이것은 상대를 제대로 분간도 못하는 사람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Smith, Thenius). 미친 체하고 -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 뒤에 '그들의 손 안에서'(* , 베야담)라는 말이 있다. 즉 이것은 다윗의 거짓 미친 짓을 아기스의 신하들이 강력하게 제지시키려 애썼음을 뜻한다. 한편 여기의 '미친 체하고'는 문자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헤매다'란 의미이다(Lange, Smith).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 여기서 '그적거리다'(* , 타와)는 '휘갈겨쓰다'(scribble)란 의미로서, 곧 뜻도 없는 글자를 되는대로 마구 낙서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78:41; 겔 9:4). 그런데 혹자는 본 단어의 원래 의미가 '타우(* ,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벱) 자(字)를 쓰다'임을 의식하여, 다윗이 대문에 실제로 '타우' 자(字)를 썼을 것이라고 본다(Smith).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에게는 부합되지 않는 행동임으로 타당한 해석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한편 여기의 '대문'(* , 텔레트)은 성경에서 '성문'(삿 16:3; 느 6:1). '방문'(왕하 4:4, 5; 대하 29:7)등 모든 문(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과연 어떤 문을 말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급된 상황을 통해서 볼 때 왕과 신하가 함께 정사(政事)를 의논하던 방의 문으로 추정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한편 70인역(the Septuagint)은 이 말을 '대문짝을 쿵쿵 때리다'로 번역했는데, 벌겟역(the Vulgate)도 이를 따랐다. 아무튼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을 최대한 미친 자로 가장하여, 손가락으로 낙서를 휘갈기며 주먹으로 대문짝을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Keil). 또한 다윗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친 자 행세는 아마도 악신(惡神)들린 사울의 행동에서 보고 배웠을 것이다(Lange, Smith, Klein). 이로 볼 때 성도에게 임하는 선악간의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합력하여 마침내 선(善)이 됨을 알 수있다(롬 8:28). 침을 수염에 흘리매 - '침'은 끈적끈적하여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분비물인데(Klein), 이러한 침을 수염에 질질 흘리는 행위는 미친 자의 행위로는 가장 적합한 행동이었다(Keil). 한편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지켜 주신다.
=====21:14
본절은 아기스 왕에게 자신을 전혀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미친 인물로 인식시키려 했던 다윗의 의도가 일차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 고대 중근동에서는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감으로써 미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Smith, Fay), 사람들은 미친 사람과의 상종(相從)을 적극적으로 기피하였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다윗은 그 위태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 아마도 아기스는 가드의 백성들 중 미친 자들을 이전에도 종종 보았던 것 같다(Fay). 한편 유대 전승은 이 말에 근거하여 당시 아기스의 집안중에 미친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Philippson). 내 앞에서(* , 알라이) - 문자적으로는 '나를 대적하여', '내 위에서'란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미친 사람 행세가 주로 아기스 왕을 겨냥하여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아기스 왕은 매우 당황했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 여기의 이 단어(* , 솨가)는 때때로 황홀경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선지자의 괴기한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왕하 9:11; 렘 29:26; 호 9:7). 따라서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 왕이 자신의 민족 중에서 황홀경에 빠져들어가 이교적(異敎的) 예언을 하곤 하는 예언자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더욱이 이같은 추측은 본절 초반부의 '내게 마치광이가 부족하여서'라는 아기스 왕의 언급에 의해서도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 "그래 감히 이런 자를 나의 궁에 들일 작정이냐?" (공동번역)란 뜻으로, 곧 당장 이 궁에서 그를 쫓아내라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다윗의 미친 자 행세가 성공 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다윗은 이때 아기스의 궁을 도망쳐 나와 그 길로 아둘람 굴로 피신했다.
< 설 교 >
왜 다윗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쓰임받았는가?
삼상 21:10-15, 시 34편
이 세상에 실수 없는 사람은 없다. 수십 년간 주방에서 칼질하던 생활의 달인도 때로 손을 벨 수 있다. 오죽하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성경에는 좋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들 중에서도 다윗이라는 인물에게서 좀 더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도 우리들이 범하는 유사한 실수들을 종종 범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여러 번 실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상 21장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에 쫒겨다니게 되는 그야말로 광야 고난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 혹독한 광야생활은 훗날 하나님만 의지하는 왕으로서 담금질되는 기간이었다. 특히 오늘 본문 10절 서두에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그 날”은 사울 왕으로 피하여 유랑생활이 시작되는 바로 그 날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피생활을 시작하던 첫 날 그는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잠시 들렀다가 가드왕 아기스에게 내려갔다. 가드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본다면 적대국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한 샘이다. 아마도 다윗은 나름대로 정치적인 머리를 쓴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자충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뭘까? 언뜻 보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것이 중요한 실수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도 당연히 실수한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결정적인 실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묻지 않은 것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라. 다윗이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물었거나 하나님이 그곳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한 흔적이 없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때로 어떤 사업에 투자를 하고, 어딘가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지원한 것이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행동부터 개시 하는 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일을 저절러 놓은 후에 계산서를 주님께 내미는가? 내 깜냥에는 머리를 쓰면서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뒷전이었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죄 없는 가족까지 극한시련의 파도 속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은가? 일을 저질러 놓은 후에 계산서 내미는 기도와 일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는 기도 중에 어떤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당연히 후자다. 영적으로 이 점을 우리는 교정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자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이 있다. 다윗이 지금 그런 상황을 만났다.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을 때, 아기스의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죽일 방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삼상21:11)
그랬더니 이 말을 들은 다윗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아차! 앗 뜨거라!’ 싶었을 것이다(12절).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삼상21:12)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 그냥 두려움이 아니다. “심히” 두려워했다. 그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급했던지 그때부터 미치광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간신히 가드에서 빠져오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시편 34편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편34편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소제목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보면 가드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 순간부터 다윗이 겉으로는 미친 체 했지만, 속으로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34편 4절, 6절, 18절을 보라.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34: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그 전에는 사울왕으로 인한 두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조차 망각하는 실수를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구하고, 부르짖었다. 중심(中心)에 통회했다는 말은 진심으로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히 회개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미친 체하라는 지혜를 주셨고, 미친 체할 때 아기스와 신하들로 하여금 믿어지게 만드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영적인 자세가 다윗이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께 쓰임 받는 중요한 이유다.
이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수한 이후에 우리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소년 목동에서 일순간에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왕의 사위에서 한 순간에 미치광이 같은 처지로 떨어지는 수도 있다. 잘나가던 사업과 직장,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 거만하고 도도했던 부잣집 마나님이나 귀한 신분에서 한 순간에 거지처럼 생활하게 되고 심지어 다윗처럼 모든 자존심을 접고 바보인 척해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나락에 떨어질 때도 있다. 바로 이때 우리들은 그 어려운 환경이나 처지를 보면서 사람 앞에 눈물 흘리기 전에 먼저 십자가 앞에 두 손 들고 울어야 한다.
“아! 내가 그동안 주님을 망각했구나! 내가 주님보다 앞서갔구나! 내가 믿음이 좀 있을 줄 알고 교만하게 눈에 힘주며 다녔는데 이제보니 나에게 믿음이 없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중심에 통회’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미래와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을 살린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심으로 통회하는 다윗에게 천사를 보내어 둘러 진치고 건져 주셨다. 7절을 보라.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체험하고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고백하면서, 사자의 입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권면했다. 이것이 이 시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뭘까?
다 같이 시편 34:8-10절을 읽자.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8-15)
가장 먼저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다. 우리들에게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체험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 일부러 실수하면서 죄악 가운데 빠지면서 어려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항상 주님께 피하고, 주님을 경외하고, 찾는 것이다.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로 도망갔다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께 피하고, 주님만 경외하고 찾자. 그래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아 알아가자.
마지막으로 다윗은 12-13절에서 혀에 악을 금하고, 입술에서 궤사한 말(거짓말)을 금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로 그런 실수들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는 말이나, 성도로서 합당치 않은 악한 말들(폭언, 의심, 뒷담화, 이간질, 욕설, 가시처럼 콕콕 찌르는 독한 말들 등)을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 눈을 의인에게 향하시고, 그 귀를 저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혈기가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긴박한 때라도 주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말고, 중심에 통회하는 기도의 손을 들자. 지금 생활과 마음이 어렵다고해서 사람에게 피하다 낭패 보지말고, 십자가 그늘 아래로 피하자. 그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천군천사로 둘러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도 맛보아 체험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삼상 21장 10-22장 5절 / 석기현목사
어느 격언에“당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최악의 불행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안심하라. 이제 당신의 인생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존재한다면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 ‘최악의’ 불행은 아니니까 위로 받을 수 있는 셈이고, 정말 지금 최악의 불행을 당하고 있다면 위의 격언이 맞는 셈이니까 그 또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자기 인생이 더 이상 내려가려야 내려갈 수 없는 최악에 도달했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밑바닥 인생이야말로 이제는 올라갈 방향밖에 없는, 더 나아질 길밖에 없는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회생의 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다윗은 바로 자기 인생 최저, 최악의 밑바닥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히 기어 다니는 꼴에 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바로 거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쓰실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그런 비천함 중에서 오히려 더 성숙시키고 강하게 만들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런 밑바닥 인생을 통하여 체험한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들을 그 처해 있는 가장 낮은 자리를 통해 연단해 주시는 오묘한 경륜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더 의지하는 신앙을 붙잡게 됩니다.
21장 10절부터 15절에 기록하기를 “10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대로,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얻은 다윗은 이제 블레셋의 성읍인 “가드”로 도망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도 적군 이스라엘의 고위 장군이 자기편으로 전향해 오는 것이니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다고 계산하고 자기를 환대해 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기네들에게 실제로는 사울 왕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인물인 것을 알아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스 왕에게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라고 간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실을 그들이 알았던 까닭에 한 말이 아니라,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정치적 실세’라고, 즉 ‘이 사람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런 조언을 아기스 왕에게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 역시 자기에게 대하여 의심과 경계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는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 발로 찾아와서 독안에 든 쥐의 꼴이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최후의 비상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는 다급한 카드를 던져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 “대문짝에 그적거리다”라는 말은 ‘문짝 같은 데에 뜻도 없는 글자를 긁적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멍한 표정을 짓는 등, 그야말로 영락없이 미친 사람의 행세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기스 왕으로 하여금 다윗이란 존재가 무슨 위협적인 인물이기는커녕 죽일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그와 같은 연극은 잘 들어맞았고, 아기스 왕은 다윗을 죽이는 대신에 그냥 내쫓아 보내게 됩니다.
‘창피해서라도 빌어먹지는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일부러 미친 체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모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미친 흉내를 내는 와중에 다윗이 속으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겠습니까? 얼마나 자기 인생에 대하여 진절머리 나도록 혐오감에 사로잡혔겠습니까?
다윗은 자기라는 존재를 그야말로 내려갈 수 있는 최하의 위치에까지 스스로 끌어내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처지에서 다윗의 심령은 실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34편은 그 표제에 있는 대로 “다윗이 아비멜렉(블레셋 왕을 통칭하는 이름)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8절)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미친 체하여 겨우 목숨 건진 것을 두고도 다윗은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된’ 체험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구사일생이었지만, 다윗은 그것이 곧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를 자랑’할만한 사건이었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입니까?
그처럼 미친 체하면서도 다윗은 자신의 연극 재주가 자기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이 자기와 함께 해 주실 것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했으며, 결국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때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극도로 비참하고 낮은 곳에 처하게 하십니까?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맛을 보아 알도록’, 그 영혼에 깊이 체험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자랑할 거리가 생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되고 있을 때에는 남 앞에서 자기 얼굴을 스스로 나타내고 자랑하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피한 꼴을 당하게 되면 누군가 자기의 얼굴을 가려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 때에 도와주는 사람, 그처럼 난감할 때 남 앞에서 자기 대신 변명해 주고 자기 체면을 세워주는 사람, 정말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낮고 천한 처지에 떨어져서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우리의 얼굴을 들어 주시며, 어디 당장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당황해하는 우리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바로 이런 맛이구나.’ 하고 제대로 그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사람 앞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비참한 지경을 당할 때 오히려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즐거움을 체험하고 그 선하신 은혜를 자랑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함으로써 다른 약한 성도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알게 됩니다.
22장 1절과 2절에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블레셋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다윗은 베들레헴 근처에 위치한 “아둘람 굴”로 은신처를 옮겼습니다.
이 지역은 석회암 천연동굴들이 많아서 은신처로서 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해서 다윗 밑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우선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즉 다윗의 가족들이 다 다윗을 찾아와서 그와 합류하게 됩니다.
이미 사울 왕 앞에서 역적 집안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다윗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본문에 이들을 가리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윗처럼 정치적으로 탄압을 당하여 집안이 결딴나거나, 사업이 망하고 채무를 갚을 길이 없어 쫓기게 되거나, 혹은 온갖 사회적인 부정부패 때문에 이리저리 뜯기는 억울할 일을 당함으로써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도태된 자들을 뜻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다윗이 베들레헴 부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줄줄이 찾아와서 그의 부하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작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왕이 못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외롭고 괴로운 사람들이 의지하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을 찾아 온 사람들이 약 “사백 명 가량”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을 본격적으로 인수하기에 앞서 이미 여기서부터 ‘지도자’로서의 실습이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이 좋아 ‘우두머리’요 ‘리더’요 ‘두목’이지, 그 어디 해 먹을 맛 나는 자리였겠습니까?
뭐 쓸 만한 인재나 유력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다 사회생활에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져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으니, 처음에야 뭐가 제대로 돌아갔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그 ‘사백 명의 공동체’에서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연이어 터졌을 것이며, 무슨 위원회나 반상회 따위로 모일 때마다 다들 시끄러운 목소리만 높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아들을 이끌고 다윗은 참된 리더십을 익혀 나가게 됩니다.
다윗은 바로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키워서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 중신들과 명장들을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지도력은 다윗이 그렇게 스스로 인생 밑바닥을 체험하는 가운데 진정 백성들의 약한 것, 슬픈 것, 억울한 것을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게 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무력한 한 평민의 처지란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무능한 통치자 밑에 사는 백성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아니 부당하게 착복당하고 구금당하게 되는 약자의 억울함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윗은 자기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는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정말 백성을 위한 바른 정치, 민생을 돌보는 참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남에게 동정이나 도움을 베풀 때 자기도 그와 똑같은 처지에 있어 본 사람이 해 주는 것이 받는 쪽에서도 훨씬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당시 서울 시장께서 우리 교회 주일 밤예배에 오셔서 간증하신 내용 가운데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분은 청계천 시장 바닥에서 이른 새벽부터 청소부 일을 하시면서 대학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런 시장이시니까 그 청계천 시장 길가에서 장사하던 행상인들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고, 그래서 청계천 복구공사를 할 때에도 그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세움으로써 큰 호응을 받고 그 어려운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었던 것입니다.
목사도 결혼을 하고 인생을 살아 보아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 때문입니다.
목사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그저 어디 절이나 수도원 같은 데에 틀어박혀 살면서 자기 혼자 도를 닦고 자기 스스로 거룩해짐으로써 신도들 앞에서 뭔가 ‘신선’이나 ‘성인’처럼 보이려고 하는 승려나 사제가 아닙니다.
부부싸움도 하고 화해도 해 보아야 교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면서 지도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도 해 보아야 교회 교육에 더욱 큰 관심과 정성을 쏟아 넣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쌀 살 돈도 떨어지고 해 보아야 교인들이 헌금하기 위해서 엿새 동안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고 있는지를 절감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자기 집안에서 큰 사고나 어려운 병도 겪어 봄으로써 교인들의 슬픔과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를 극도로 약하게 만드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십니까?
바로 ‘나보다 더 곤고한 자’를 이해할 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슬픈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할 줄 아는 심령을 배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약한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언제든지 찾아와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신앙 인격이 자리 잡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458장)라는 찬송 가사 그대로, 자신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될 때 그로 인하여 오히려 다른 약한 성도들, 나보다 훨씬 더 외롭고 괴로운 형제자매들을 더 잘 위로하고 더 힘써 도울 수 있는 법을 꼭 배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도는 인생의 최악의 환난을 당할 때에도 더더욱 철저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로써 이를 극복해 내고 맙니다.
22장 3절 이하 5절에 “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이제 “미스베”에 있는 “모압 왕”에게 찾아갔는데, 그 주된 목적은 자기 부모의 거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이 모압 왕에게 그런 청을 하게 된 배경에는, 다윗의 증조모 룻이 바로 모압 여인이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지 모릅니다.
즉 좀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으니 그 정도의 부탁은 할 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모압 왕은 그 청을 들어 주었고 다윗의 부모는 “모압 왕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윗도 “요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은 ‘산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뒤이어 나오는 선지자 갓이 한 말의 문맥을 따르면 지금까지 있었던 ‘아둘람 굴’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모압 왕이 다윗의 부모를 맡아 주면서, 다윗에게도 거할만한 은신처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요새는 다윗이 유다 땅 내에서 도망치면서 은신하던 굴 같은 곳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좋은 거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그 요새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새 장가를 들려고 오나라에 갔다가 거기서 화려한 궁전을 지어주고 초호화판 유흥으로 대접해 주니까 촉나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신혼의 단꿈에 빠져 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비의 경우에는 조자룡 장군이 일깨워 주었지만, 다윗에게는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이 갓이란 선지자는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다윗의 선견자’ 즉 다윗의 ‘어전 선지자’가 되었던 사람인데, 이때에는 아마도 사무엘의 선지학교에서 파송되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갓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충고해 준다는 말이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편안한 곳에서 잘 대접 받고 있는데, 제대로 된 잠자리 하나 찾을 수 없는 위험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가라니, 상식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갓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모압의 요새를 떠나 유다 땅에 있는 “헤렛 수풀”로 돌아갔습니다.
즉 다시 숨어 도망 다니는 신세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울 왕이 여전히 살기등등하고 자기를 밀고하려는 눈들이 도처에서 번득이고 있는 땅으로 제 발로 찾아간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 갓은 다윗에게 그런 어려운 명령을 전해 주었고 다윗은 또 순종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은 어차피 유다 땅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조금 편하다 해도 모압 땅이나 블레셋 땅이 자기가 영주하고 자신의 왕권을 펼치게 될 땅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환난이 있고 문제가 남아 있지만, 결국 다윗은 바로 유다 땅 안에서 그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기가 떠나지 말아야 할 땅이 있습니다.
학생이 아무리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자퇴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정치가들이 아무리 정적으로부터 탄압을 받아도 자기 나라에 머물러 있어야만 결국 자기도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땅은 어디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물론 여러 가지 시험들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일이 잘 안 되는 시험도 들고, 때로는 교회생활 그 자체에서 시험거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예수 믿어 보았자 잘되는 것 하나도 없으니, 아예 그만 두자.’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잘 안 되던 일에 무슨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던 사업도 망하고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우니 이 기회에 교회 다니는 것도 좀 쉬고 다시 시작해 보자.’라고, 교회생활이 마치 자기가 재기하는 데에 큰 방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같은 구역에서 저 기분 나쁜 교인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만나야 하니 차라리 교회에 안 나가고 그 꼴 안 보는 게 속 편하지.’라고, 문제 그 자체를 신앙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저 교회 출입을 중단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애 학교 성적이 자꾸 떨어지고 있으니 주일에 교회에 가게 하는 대신 학원에 보내어서 일단 대학에 붙여 놓고 보자.’라고, 자식을 교회에서 멀리 떼어 놓고 더 잘 키우겠다고 하는 기가 막히는 발상을 하는 부모들도 수두룩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떠나지 않고 살아야 할 ‘유다 땅’을 버리고 툭하면 ‘블레셋 땅’으로 혹은 ‘모압 땅’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까?
잠시 편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른 자세도, 정답도 아닙니다.
교회 밖은 신자가 안주할 수 있는 땅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피’에 불과하지 결코 ‘해결’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하고 있는 적군의 땅으로 스스로 항복하고 들어가는 비굴한 짓이며, 자기 생명을 원수 마귀의 손에 갖다 맡기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반드시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더욱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생기면 더욱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생활 중에 교인들 사이에서 무슨 시험이 생기면 바로 그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형제와 화목’하는 해결책을 반드시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더욱 교회중심으로 신앙교육을 시켜서 그 아이의 마음자세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진정 소망이 있는 것을 부모부터 먼저 똑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다윗은 유다 땅에 돌아와야 하고 신자는 교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 불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배역의 길이며 사탄의 책략에 그대로 걸려드는 망조의 걸음입니다.
인생의 환난이 극심해지고 최악에 이를수록 더욱 철저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로써 그것을 능히 극복해 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을 낮추신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 것이었습니까?
그는 일국의 왕이라는 최고의 명예를 얻기 전에 미치광이 행세까지 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내려감으로써, 자기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누리기 전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애환을 자기 몸으로 이해해 주고 위로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이양받기 전에 그는 비록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부터가 그 나라 안에서 사는 법을, 왕이 될 사람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 유다에 속한 백성이 되는 법부터 익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한때 좋아했던 ‘이안’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서 ‘아리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는데, 국악이 섞인 신나는 멜로디도 그렇지만 가사가 참 좋았습니다.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 인생사 힘들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 움추린 어깨 펴고 달려가면 꿈꾸던 인생역전 시작되지” -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두가 일등하면 무슨 재미 워 절망도 뒤집으면 희망이야 / 맞아요 이 세상은 그런 재미 워 일프로의 가능성에 인생역전 /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아리랑 허 아리아리요.” - 그런 노래입니다.
‘인생사 힘들다고 말하지만 절망도 뒤집으면 희망이 된다. 일프로 가능성에 도전해서 인생 역전의 재미를 맛보자’ - 참 얼마나 멋있는 가사인지 모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극적인 인생 역전의 재미를 누린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한 때 그처럼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왕위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정금의 연단 과정이 되었습니다.
매일을 공포와 고통과 눈물로 지새우면서 암혈과 토굴들을 여기저기 전전했지만, 그 곳들이 오히려 그의 미래의 왕권과 통치를 더욱 충실하게 해 주는 경건의 도장으로 탈바꿈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청년 시절에 당한 환난은 결코 인생의 손해나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최저, 최악의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그 때부터 그의 인생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고 오직 올라가기만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위치에서 그 성도에게 놀라운 회생의 탄력, 인생 역전의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보다 더 어려울 수는 없다.’라는 처지에 몰리게 될 때, 성도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이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오묘한 섭리를 똑같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악의 시험을 당하고 인생의 밑바닥에 처할지라도, 그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고, 그 때문에 형제자매를 더욱 사랑하게 되며, 바로 그 때문에 더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환난과 곤고를 너끈히 극복하고 끝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왜 다윗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쓰임받았는가?
삼상 21:10-15, 시34편 / 김상수목사
이 세상에 실수 없는 사람은 없다. 수십 년간 주방에서 칼질하던 생활의 달인도 때로 손을 벨 수 있다. 오죽하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성경에는 좋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들 중에서도 다윗이라는 인물에게서 좀 더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도 우리들이 범하는 유사한 실수들을 종종 범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여러 번 실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상 21장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에 쫒겨다니게 되는 그야말로 광야 고난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 혹독한 광야생활은 훗날 하나님만 의지하는 왕으로서 담금질되는 기간이었다. 특히 오늘 본문 10절 서두에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그 날”은 사울 왕으로 피하여 유랑생활이 시작되는 바로 그 날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피생활을 시작하던 첫 날 그는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잠시 들렀다가 가드왕 아기스에게 내려갔다. 가드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본다면 적대국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한 샘이다. 아마도 다윗은 나름대로 정치적인 머리를 쓴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자충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뭘까? 언뜻 보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것이 중요한 실수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도 당연히 실수한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결정적인 실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묻지 않은 것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라. 다윗이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물었거나 하나님이 그곳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한 흔적이 없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때로 어떤 사업에 투자를 하고, 어딘가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지원한 것이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행동부터 개시 하는 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일을 저절러 놓은 후에 계산서를 주님께 내미는가? 내 깜냥에는 머리를 쓰면서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뒷전이었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죄 없는 가족까지 극한시련의 파도 속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은가? 일을 저질러 놓은 후에 계산서 내미는 기도와 일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는 기도 중에 어떤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당연히 후자다. 영적으로 이 점을 우리는 교정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자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이 있다. 다윗이 지금 그런 상황을 만났다.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을 때, 아기스의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죽일 방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11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삼상21:11)
그랬더니 이 말을 들은 다윗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아차! 앗 뜨거라!’ 싶었을 것이다(12절).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삼상21:12)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 그냥 두려움이 아니다. “심히” 두려워했다. 그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급했던지 그때부터 미치광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간신히 가드에서 빠져오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시편 34편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편34편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소제목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보면 가드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 순간부터 다윗이 겉으로는 미친 체 했지만, 속으로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34편 4절, 6절, 18절을 보라.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34: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그 전에는 사울왕으로 인한 두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조차 망각하는 실수를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구하고, 부르짖었다. 중심(中心)에 통회했다는 말은 진심으로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히 회개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미친 체하라는 지혜를 주셨고, 미친 체할 때 아기스와 신하들로 하여금 믿어지게 만드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영적인 자세가 다윗이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께 쓰임 받는 중요한 이유다.
이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수한 이후에 우리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소년 목동에서 일순간에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왕의 사위에서 한 순간에 미치광이 같은 처지로 떨어지는 수도 있다. 잘나가던 사업과 직장,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 거만하고 도도했던 부잣집 마나님이나 귀한 신분에서 한 순간에 거지처럼 생활하게 되고 심지어 다윗처럼 모든 자존심을 접고 바보인 척해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나락에 떨어질 때도 있다. 바로 이때 우리들은 그 어려운 환경이나 처지를 보면서 사람 앞에 눈물 흘리기 전에 먼저 십자가 앞에 두 손 들고 울어야 한다.
“아! 내가 그동안 주님을 망각했구나! 내가 주님보다 앞서갔구나! 내가 믿음이 좀 있을 줄 알고 교만하게 눈에 힘주며 다녔는데 이제보니 나에게 믿음이 없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중심에 통회’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미래와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을 살린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심으로 통회하는 다윗에게 천사를 보내어 둘러 진치고 건져 주셨다. 7절을 보라.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34:7)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체험하고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고백하면서, 사자의 입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권면했다. 이것이 이 시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뭘까?
다 같이 시편 34:8-10절을 읽자.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8-15)
가장 먼저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다. 우리들에게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체험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 일부러 실수하면서 죄악 가운데 빠지면서 어려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항상 주님께 피하고, 주님을 경외하고, 찾는 것이다. 다윗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로 도망갔다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께 피하고, 주님만 경외하고 찾자. 그래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아 알아가자.
마지막으로 다윗은 12-13절에서 혀에 악을 금하고, 입술에서 궤사한 말(거짓말)을 금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로 그런 실수들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는 말이나, 성도로서 합당치 않은 악한 말들(폭언, 의심, 뒷담화, 이간질, 욕설, 가시처럼 콕콕 찌르는 독한 말들 등)을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 눈을 의인에게 향하시고, 그 귀를 저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혈기가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긴박한 때라도 주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말고, 중심에 통회하는 기도의 손을 들자. 지금 생활과 마음이 어렵다고해서 사람에게 피하다 낭패 보지말고, 십자가 그늘 아래로 피하자. 그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천군천사로 둘러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도 맛보아 체험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헐리우드 액션과 신앙의 액션
삼상 21장 12~15절 / 백구영목사
마태복음 6:16-18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이 땅을 열광하게 했던 월드컵이 오늘로서 끝이 납니다.
월드컵 사상 새로운 기록이 많았던 기간이었지만 뭐니뭐니 해도 2002년 월드컵의 화두는 "헐리우드 액션"이었습니다.
이 헐리우드 액션의 공식명칭은 시뮬레이션(Simulation) 이라고 합니다.
골 문전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내려고 수비의 반칙으로 보이도록 걸려 넘어진 것처럼 뒹굴며 아픈 척 시늉을 하는 것이 대표적 헐리우드 액션입니다.
슬쩍 스치거나 건드리기만 해도 팔꿈치로 얻어맞고 발길에 차이고 걸린 듯 나가 뒹굴며 엄살을 떨어 심판의 오판을 유도해 유리한 지점에서 프리킥을 얻어내려는 속임수요, 배우들의 연기 같은 것이기에 헐리우드 액션이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의 쏠트레이트시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 오노가 자기를 앞질러 나가는 한국의 김동성 선수가 진로를 방해한 듯 놀라는 몸짓을 해 1등을 하고도 심판의 오심으로 실격을 당하게 하고 지신이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 헐리우드 액션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슬로베니아의 치미로 티치 선수가 FIFA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부상을 가장한 헐리우드 액션으로 스위스 프랑으로 2000프랑(16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됐습니다.
울산 문수구장에서 열린 터키와 브라질의 대전에서도 코너킥을 준비하던 브라질의 축구 스타 히바우드가 터키선수가 찬 볼이 다리에 맞았는데 얼굴에 맞은 듯 얼굴을 감싸고 넘어져 헐리우드 액션을 하다가 벌금을 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대전한 이태리의 토티도 이 헐리우드 액션으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 당했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비신사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인간 만사가 진실이 아닌 이 헐리우드 액션에 승패가 바뀌고 우열이 바뀌고 진위가 바뀌는 경우가 허다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 헐리우드 액션이 주제입니다.
사무엘상 21:12-15절의 말씀은 다윗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친척 헐리우드 액션을 했다는 기사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블레셋 땅, 가드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이 죽인 블레셋 군사가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고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미친 척 대문짝에 몸을 비비며 침을 흘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가드왕 아기스는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이 미치광이까지 데려왔느냐? 하고 내쫓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1-4절의 말씀은 허식적인 의를 행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에 5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범성"을 가르치시고, 6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밀성"을 가르치시고, 7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매맺는 생활"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도 거리에서 나팔을 불어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이미 그것으로 상을 받은 것이고 은밀히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허식을 배척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위의 두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행동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신앙의 액션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신앙의 행동 원리는 은밀성입니다.
마태복음 6:1 상반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하였고 마태복음 6:3절에는 "너희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하였습니다.
다윗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친척 한 것이나 바리새인들이 네거리에 서서 나팔을 불며 구제한 것이나 결국 자기 보호나 자기 자랑이란 면에서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천적이 나타나면 죽은 척하는 곤충들도 많고 다른 동물들에게 힘을 과시 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동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생존에 있어서 최대의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은밀한 힘입니다.
태양 광선은 온종일 온 세상에 비칩니다. 사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없지만 태양 광선 속에는 놀라우리 만치 강렬한 에너지가 있어 생명체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을 공급합니다.
인간의 힘은 보잘 것 없고 인체속에 고동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역사를 만들어가기에 넉넉한 힘이 있습니다.
이슬은 모든 만물이 잠든 밤에 소리 없이 내리지만 그것이 대지 위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자연계에도 진정한 힘은 정숙한데 있고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소리없이 움직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제자도 아니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장담을 하지 않았고 주님의 우편에 앉겠다고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운명하시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아리마데 요셉은 조용히 빌라도를 찾아가 주님의 시체를 장사 지낼 테니 내 놓으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이 행동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동류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산헤드린 의회의 의장인 가야바의 미움을 사 의원직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유대 민중들에게 돌에 맞을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믿고 존경하는 스승의 시신을 정중히 거두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밀성에서 나오는 진정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은밀성은 신앙의 액션이고 영적 능력입니다.
둘째, 신앙 행동의 원리는 사랑의 동기입니다.
마태복음 6:2 상반절에 보면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세가지 대사요, 세가지 선한 생활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특히 구제는 유대교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와 "의"는 때로 "체다카" 라는 같은 말을 썼습니다. 구제가 곧 의를 행하는 것이란 말이요, 구제가 곧 죄를 없이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식"이란 본래 "배우"라는 뜻으로 "하는 체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헐리우드 액션"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건"과 "자랑"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행동은 그것이 사랑의 동기 일 때만 진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책임감이 동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위신을 세우기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도덕적 요구의 충족이 동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동기가 아닌 것이 허식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그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동기가 없는 정의의 행동은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논할 때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 사랑" 이란 것도 잘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희생적 사랑을 일상에서 늘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생각할 때 그 사랑은 이미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 신앙행동의 원리로 하나님의 상급에 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 하반절에 보면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셨고 6:2 하반절에는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셨으며, 6:4 하반절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에서만 상급에 관한 말씀을 세 번이나 거듭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라면 그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흔히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목적은 그 선행 자체이지 상을 받거나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주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아무 목표가 없는 활동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목적이 없는 선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신앙적 관념에서 상벌의 관념이 없어진다면 악인이나 선인이나 결국 다 같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악에 무관심하시며 하나님에게는 공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역사와 개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수없이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받을 궁극적인 상급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찬사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고, 좀먹고 동녹이 나고 도둑이 구멍을 뚫는 현재의 상급이 아니라, 미래의 영원한 상급이고, 세속적인 기쁨이 아니라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평안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삶을 영예롭고 형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급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일시적 승리를 위해 헐리우드 액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구한 승리를 위해 신앙의 액션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상급을 위해 사랑의 동기를 따라 은밀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을 위해 신앙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헐리우드 액션으로 하나님께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 당하는 성도가 아니라 신앙의 액션으로 하나님께 썩지 아니할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삼상 21:10-15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블레셋 성읍 가드를 다스리던 ‘아기스 왕’에게로 피신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하필이면 블레셋 땅인 가드로 피신하였을까요?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적국의 장수인 자신이 정치적인 망명을 요청할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환영할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가드는 블레셋 주요 다섯 성읍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가드를 도피처로 삼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블레셋 성읍 가드는 다윗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13절에 미친 척해야 하는 수모까지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곳이나 함부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시편 84:10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라 자손의 신앙고백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또 히브리서 11:24-25에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계신 곳, 함께하시는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곳이 고난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입니까? 다윗의 실수를 가슴 깊이 새기고 머물러야 할 곳에 바로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절에, 가드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자, 12절에 다윗이 “심히 두려워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이 두려워 가드로 피한 다윗은 이제 가드 사람에게서까지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다윗이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혈혈단신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인물입니다. 블레셋과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가드 사람들의 말한 대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용사 중의 용사입니다. 심지어 가드 사람들은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다윗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계속해서 두려움에 빠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혜롭고 용맹한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으실 때 그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삼상 16:13, 18:14). 그는 지금껏 하나님의 은혜로 승승장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게 되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박해가 계속되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마저 위태롭게 되자 사울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가드 왕 아기스마저 심히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도 이러한데 어찌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연약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와 세상 사람들이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넘어지면 도움의 손길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들지만, 우리 성도들은 믿음이 있는 한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고 새 힘을 계속해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많은 실수를 거듭했음에도 이스라엘의 최고 성군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도 계속해서 부어주시기에 우리도 매일 넘어지지만 신실한 복음의 일꾼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롭고 용맹한 다윗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했을 때 실족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했을 때 점점 더 깊은 실패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가 하나님 대신 사람을 두려워할 때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성도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성도일지라도 반드시 실패의 늪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13절에, 점점 더 깊은 실패의 늪에 빠져들던 다윗은 미친 척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14-15절에 아기스는 다윗을 실제로 미치광이 취급을 하기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대문짝에 그적거리며’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성문 앞에서 공개적으로 미친 척을 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수염에 침을 흘리는 행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 다윗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한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다윗은 훗날 시편 51:10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결단하고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에 머물러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곳이 고난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임을 고백합니다. 다윗의 실패를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순수하고 정직한 심령을 간구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난 속에서 모든 일이 다 막힐 때...
삼상 21:10-15
1. 교회란 무엇인가?
(1)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
① 사42:6-7
-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② 사49:6,8
-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6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8절)
(2) 이 예언은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
①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 행13:46-48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② 고린도 교회에서 - 고후6:2
-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2. 다윗은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준비되는 것이다.
(1) 백성의 언약
① 교회는 십자가 보혈로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임
-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언약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백성의 언약이다. 백성의 언약을 가시화 한 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가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구원을 얻게 한다.
(2) 이방의 빛
①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함으로 차별없이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함
-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구원은 모든 민족이 차별없이 동등하게 얻게 된다. 혈통적 유대인의 우월성은 없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적용>고난 속에서 모든 일이 다 막힐 때...
(1)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간의 얕은 방법을 쓰지 말라.(삼상21:1-9)
① 다윗이 먹을 것과 무기를 구하기 위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감.
- 왕궁에서 도망친 다윗은 음식과 무기를 얻게 위해 성막이 있던 놉으로 가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난다. 아히멜렉이 다윗을 떨며 맞이했다는 것을 보면,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알고 다윗이 도망중임을 알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때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자신은 지금 사울왕의 명령으로 어떤 일을 수행중이라고 말하며 먹을 것과 무기를 구한다.
② 이 일로 모든 제사장 85인과 그 가족이 진멸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옴
- 놉 제사장에게 가서 거짓말로 무기와 먹을 것을 구하는 다윗의 방법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자기로 인해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죽게 된 사실은 두고 두고 다윗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③ 고난 속에서 비굴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행동할 것.
-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이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신다. 고난은 이길만한 것만 허락하셨다. 비굴한 방법을 쓰려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행동하자. 일부러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지만, 당해야 하는 고난이 라면 피하지 말고 맞이하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잊지 말자.
(2) 이전 보다 더 큰 위기를 만나도 두려워 말라.(삼상21:10-15)
① 사울왕의 대적 블레셋 가드왕에게로 피함
-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왕의 추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 가드왕에게 도피하였다. 블레셋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 패배시켰던 나라인데 이때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어서 블레셋 사람이 자신을 모를 것으로 생각하였거나 아니면 자신은 사울왕의 대적이므로 블레셋이 자신을 장군으로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② 블레셋으로 간 다윗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됨.
- 블레셋왕에게 간 다윗의 행동은 더 큰 위기를 가져왔다. 마치 독수리가 새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이는 기근을 피하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애굽과 블레셋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의 잘못과 같다.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함을 잊지 말자.
③ 고난 속에 만난 더 큰 위기도 넘어가게 하심.
- 다윗은 가드왕 앞에서 미친체함으로 절대위기를 모면하였다. 다윗이 미친척 연기를 잘한 것보다도 그런 연기를 보고 넘어간 블레셋이 더 놀랍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볼 수밖에 없다. 블레셋은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훗날 블레셋은 다윗왕에게 패배하고 역사 속에서 그 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최대위기 속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3) 하나님께서 내게 하실 일을 생각하며 소망을 갖고 견뎌내라.(삼상22:1-5)
① 다윗은 모압왕에게 가서 고난을 회피하려 함.
- 모압은 블레셋과 달리 다윗과 원한 관계가 없다. 오히려 모압은 다윗의 증조모 룻이 모압 출신이기에 인척관계라 할 수 있다. 다윗은 자기 부모와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도피한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압왕에게 가서 고난을 회피하려 하였다.
②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심
- 모압에서 다윗은 위험이 없었다. 모압왕의 도움으로 다윗은 요새에 거하며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다윗이 모압왕에게 피하고 있는 한 사울의 위협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모압을 떠나라고 하신다. 선지자 갓을 통해서 사울의 핍박이 기다리는 유다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③ 고난은 다윗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준비시키는 것이었음.
- 다윗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고난은 다윗을 그냥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함임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고난을 회피한다면 이스라엘 왕으로서 준비되지 못한다. 유다 땅에서 사울왕에게 고난당하던 5-10년의 세월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다윗왕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