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신하는 다윗
삼상 22:1-5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 22:1-5 / [유격 대장이 되는 다윗] 다윗은 가드에서 떠나 유다 광야의 높은 산성에 있는 굴이 많은 바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은 아둘람 성읍에서 가까웠다. 마침 다윗의 형들과 그의 온 집안이 사울을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다윗이 아둘람굴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모두 내려와 다윗과 합류하였다. 2) 그들뿐만 아니라 사울의 학정 밑에서 압제받는 사람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윗에게 몰려들었는데, 400명쯤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을 자기들의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3) 모압 족속과 다윗은 친족 관계가 있어서 서로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같이 간청하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서 제게 알려 주실 때까지, 저의 부모님을 이곳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4) 이리하여 다윗은 자기 부모를 모압 왕궁에 모셔다 놓았다. 다윗이 그 험악한 아둘람 산성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의 부모는 모압 왕궁에서 살았다. 5) 어느 날 갓이라는 예언자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산중에 머물지 마시고 유다 땅으로 가십시오!' 그래서 다윗은 그곳을 떠나 헤브론 남쪽의 십 광야에 있던 헤렛 숲으로 들어갔다.
다윗은 블레셋 가드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아둘람 굴로 도망했습니다. 다윗의 소식을 들은 그의 가족들과 추종자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모압에 갔다가 갓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다시 유다 땅 헤렛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1-2)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쫓겨난 다윗은 블레셋 경계로부터 멀지 않은 이스라엘 지경의 아둘람 굴에 피신했습니다. 이 시기에 다윗은 시편 142편(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을 썼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다”(4)고 낙심되어 불평했지만 곧이어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라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의 가족들과 사울의 통치하에서 억압을 받던 자들이 그에게 모여 들었으며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모압 미스베로 가서(3-4) 아둘람 굴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다윗은 근거지를 모압 미스베로 옮겼습니다. 다윗은 모압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 당분간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를 모시고 가서 모압 왕에게 소개했습니다. 모압 왕은 다윗 일행이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을 했으며 이에 다윗의 일행은 모압의 요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5) 다윗이 모압의 요새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선지자 갓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던 다윗은 갓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유다 땅을 벗어나 모압으로 왔는데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통하여 그에게 다시 유다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갓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유다 땅 헤렛으로 갔습니다.
적 용 :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연속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했습니다. 당신도 고난을 받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올바른 관계가 있어야 그 열려진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자 이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다윗의 순종처럼 내 생각과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다짐합시다.
호크마 주석
=====22:1
다윗이...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 '아둘람'(Adullam)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이다. 이곳은 성경 다른 곳에서 가나안 족속의 왕도(王都)중 하나로 언급된다(창 38:1, 2; 수 15:35).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4km 지점으로, 본래는 유다의 영토였으나 그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Hertzberg, Stoebe). 한편 최근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곳을 탐사하던 중 아둘람성(城)의 한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할 듯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Conder, Robinson). 이러한 '아둘람'은 현재 '텔 에쉬 - 세이크 마드쿨'(Tell esh - Sheikh Madhkur)로 추정된다(L. Wood). 그리고 여기의 '도망하매'란 말은 앞장의 사건(21:10-15), 곧 '아기스 왕 앞의 거짓 광인(狂人) 사건'의 결과로, 본장이 앞장과 밀접히 연결되어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그에게 이르렀고 - 역모(逆謀)에 관한한 한 사람의 범죄때문에 온 가족이 처벌당하는 일은 고대의 흔한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사울의 보복을 피하여 다윗의 가족이 이같이 도피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Keil, Smith, Clericus). 한편 '아둘람 굴'은 다윗의 가족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졌다는 점에서, 다윗의 가족들은 적어도 약 네 시간 정도 걸려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내려가서(* , 야라드) - 이 단어는 베들레헴에 비하여 아둘람 지역이 상대적으로 저지대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22:2
환난당한 모든 자 - 여기서 '환난당한'(* , 마초크)은 '억지로 시키다', '강요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추크'(*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추론해 볼 때, '환난을 당한 자'는 그 당시 사울의 학정(虐政)으로 인하여 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사 51:13). 빚진 자 - 이들은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稅政) 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 등으로 인하여 주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Fay, Smith). 마음이 원통한 자 - 이와 같은 성구가 무자(無子)로 인해 브닌나로부터 애매히 고통당했던 한나의 경우에도 적용되었다(1:10). 따라서 아마도 이들은 사울 왕국의 비도덕성 또는 비종교성 등으로 인해 심적.영적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모였고(* , 이트카베추) - 이말은 '모이다'(* , 카바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들 스스로 모여들었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수 9:2; 삿 9:47; 삼하 2:25). 한편, 이처럼 스스로 뜻을 세우고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志士)들이 있었다(5절; 대상 12:1-18).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는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당하기를 기뻐하여 이처럼 모여든 것이다.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 -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으로는 여자와 어린 아이는 항상 계수(計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사백 명'역시 전투에 참여할 만한 용사들만을 의미함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숫자는 얼마 안가서 결국 육백 명으로 불어난다(23:13; 25:13; 27:2; 30:9, 10).
=====22:3
다윗이...모압 미스베로 가서 - 다윗이 '아둘람 굴'<1절>로 간 것은 일시적으로 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추종자가 많아짐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다윗은 보다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모압'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들의 피신처로 모압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으므로(룻 1:22),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으며(룻 4:13-22; 마 1:5, 6), (2)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압민족이 사울 왕의 경쟁자인 다윗 자신을 후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며(14:47). (3)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미스베'(Mizpeh)는 '망대'(watch-tower)란 뜻으로, 현재까지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지명이 갖는 의미로 볼 때, 사해(死海, Dead Sea) 동쪽에 있는 모압 평지 가운데의 비스가 산(신 3:27; 34:1) 근방 혹은 그 인근의 고지대로 추정할 수 있다(Fay, Smith, Keil). 하나님이 나를...어떻게 하실 것을...알기까지 -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사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다윗은 자신의 고난이 결코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능력으로써만 해결된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시 27:10). 나의 부모로...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 다윗은 노쇠한 부모와 함께 자신의 험난하고 고달픈 도피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요청을 한 것이다.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 '다윗의 요새'에 대해서는 (1) 모압이나 이스라엘 땅을 막론하고 다윗이 돌아다녔던 여러 요새라는 견해(Smith), (2) 자신의 앞날을 관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던 모압 땅의 한 요새라는 견해(Keil, Lange)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여기의 '요새'(* , 메추다)가 단수라는 사실 둘째, '갓' 선지자가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했다는 사실<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22:5
선지자 갓 - 성경 주석가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선지자의 출현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을 제시한다. 즉 (1) 갓은 그때 다윗에게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하나님의 뜻만 전했다는 해석(Lange), (2) 갓은 사무엘이 지도하는 선지 학교 출신으로서, 사무엘의 명을 받아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는 해석(Smith, Keil), (3)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때 모여든 사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압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윗에게 전했다는 해석(Wood) 등이다. 그런데 본서가 사무엘을 통한 다윗의 왕국 건설을 대주제로 하는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2)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 '갓'(* )은 '행운'이란 뜻인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지파 즉 갓 지파가 있다는 점에서, 이 선지자는 그 지파 소속의 사람인 듯하다. 향후 이 선지자는 다윗의 도피 생활 중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한 것 같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궁전 선지자로 봉사하면서(대상 21:9)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도 하고(삼하 24:11-19), 다윗의 행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대상 29:29).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 이같은 명령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애굽 땅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불러내셨던 사건과 신학적 동일선상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창 12:1, 10).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지켜야 했듯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도 어떠한 위험과 역경이 기다린다고 하지라도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사실 다윗은 유다로 돌아가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등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백성들로부터 지속적인 인정을 받을수 있었으며(18:7, 28-30), 바로 이같은 일이 왕좌(王座)로 나아가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준비해야 할 일이었다.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 '헤렛'(Hereth)은 오늘날 '카라스'(Kharas)와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Smith, Fay). 그 위치는 '십'(23:15) 남쪽 약 3.2km, 헤브론 남서쪽 약 8-9km지점으로 '그일라'(Keilah, 23:1)와 인접 지역이다(Hertzberg).
< 설 교 >
아둘람의 희망
사무엘상 22:1-2 / 한대근목사
‘오늘의 양식’이라는 월간 말씀 묵상집 7월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헨리포드 박물관에는 세계대전 세대, 아이젠하워 세대, 출산율이 높았던 베이비 부머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 등 각 세대별로 미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던 오락물과 생활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전시관에 붙여진 이름은 [그때의 당신의 역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이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갈 역사의 때를 선택하여 살 수는 없지만 우리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 고 있는 우리 각 사람은 한 시대의 역사 속에서 독특한 가치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주어진 고유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대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든지 그 가운데서 자신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비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생의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로부터 그 인생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광야 학교의 한 과정인 아둘람이라고 하는 곳으로 사울을 피해 숨어 있을 때의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놉 땅으로, 그리고 적진 블레셋의 가드 땅으로 피신하는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학교로 보내셔서 철저하게 보잘것없는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다듬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또다시 가드를 떠나 아둘람으로 피신을 합니다. 고달픈 도망자의 신세, 피곤에 지치고 낙심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대변이라고 하듯이 다윗은 아둘람의 한 굴에서 처량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윗이 아둘람에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던 부모와 형제가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뒤따라서 환난을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400명이나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혼자 도망하기도 어려운 때에 다윗은 400명의 식솔까지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부담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바로 이곳, 아굴람에서 다윗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희망의 장소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둘람의 희망’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아둘람의 희망인가? 몇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아둘람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곳입니다.
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➊ 환난을 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울의 통치 아래서 많은 환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➋ 빚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경제적인 파산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사회구조가 타락하면, 경제구조마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나라의 살림은 돌보지 않고 다윗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사울 왕의 통치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➌ 사람들은 마음이 원통한 자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 원통한 일을 만난 사람들, 고아나 과부 등 경제적인 약자, 또는 사회적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환난을 당하고, 경제적인 파산을 당하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서로 융화가 잘 안 되고 다툼이 많습니다. 분노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금새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놀랍도록 쉽고 빠르게 한 마음이 되어 움직일 수 있었던 비밀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 비밀을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2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화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처럼, 하나의 공동체가 다툼이 일어나거나 나뉘거나 하지 않고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서로에 대한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욱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되어 섬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되심입니다(빌 2:5-10).
우리가 흔히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느끼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하나님의 공감하시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인간적인 모든 아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아픔까지도 다 공감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은혜의 품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인생의 그 어떤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아갈지라도 주님은 무겁다고 거부하지 않으시고 다 받아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했든지, 어떤 신분을 가졌던지, 그 은혜와 사랑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면 언제든지 받아주실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공감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체험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대로 다윗은 ‘상처 입은 치유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경험함으로 그의 아픈 상처를 치유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체 하다가 쫓겨난 다음에 지은 시에서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34: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다윗은 하나님께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자신의 원통함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철저하게 보잘것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심으로 다윗을 위로하시고 그 아픔을 싸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나아온 환난을 당한 자, 파산을 당하고 쫓겨다니는 자, 원통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였습니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치유받은 경험으로 그들을 받아주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그들에게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들과 공감하려는 마음을 품었을 때, 아둘람에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의 찬양이 울려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바로 이렇게 넉넉한 사랑으로 그 어떤 사람들과도 공감할 수 있는 은혜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누구건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 나왔어도 괜찮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나왔어도 괜찮습니다. 장애를 가졌어도, 슬픔을 당하였더라도, 우리 주님의 공감의 사랑을 품고 다 받아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둘람의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둘람은 새 역사의 비전을 보는 곳입니다.
아둘람은 사실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울로부터 피해 숨은 곳입니다. 다윗은 아둘람의 굴속에서 한숨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을 잘 드러난 시가 시편 57장과 142장에 있습니다. 그때 당시 다윗이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 시편 142장 4절에 보면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방 천지를 돌아보아도 자기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외로운 도망자의 아픔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을 찾아 나온 사람들 역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같이 시편 57장 7절과 8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둘람의 비밀입니다.
다윗은 아둘람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어둡고 고독한 굴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빚을 지고 쫓겨다니며,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오합지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절망의 눈빛과 희망의 눈빛은 다릅니다. 절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헌신 속에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비전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 중에, 절망 중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은 내가 알고 있다. 그것은 너희에게 재앙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번영을 주고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계획이다(렘 29:11)” 하나님은 절망의 하나님이 아니라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서도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과 그 비전을 공유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비전은 미래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현실에 절망하거나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너무 집착하고 목적 없는 인생을 살다가 절망하는지 모릅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한 대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 책상 서랍에서 그 학생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만 합격을 하고 난 지금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이루어지면서 삶의 목표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현실적인 목표에만 매달리던 한 젊은 청년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높은 곳에 푯대를 세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비전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항상 밝은 빛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급하고 값싼 목적 안에서 헤매는 사람들의 삶에는 언제나 암울한 굴속의 칙칙함이 있을 뿐입니다. 다윗이 그 어둡고 답답한 아둘람의 굴속에서도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새로운 역사의 새벽을 깨우겠다고 분연히 일어선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암울한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의 꿈을 품고 일어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교회의 희망
다윗이 저 소망 없는 무리들과 칙칙하고 어두운 아둘람의 굴속에서 민족의 새 역사,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깨우리라는 희망을 품었듯이, 저는 오늘 교회에서 이 민족과 세계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국가로 쓰임 받는 꿈을 꾸며 삽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복음이 해가 지는 방향으로 움직여 대한민국에서 꽃을 피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파송된 선교사는 줄잡아 8,000여명, 바로 이들이 이 민족의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주역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받은 축복에 비하면 적은 숫자입니다. 더욱더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열방 오대양 육대주를 터전으로 삼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축복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월드컵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여주신 하나님은, 머지않아 남과 북을 하나가 되게 하셔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옛 영화를 회복하고, 그래서 이 나라 삼천리 방방곳곳에 복음으로 충만하여, 세계의 선교의 역사가 대한 민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우리의 교회에서 자라나는 믿음의 자녀들이, 저와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그 역사의 한복판에 영적 리더로 세워지고,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영적리더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 교회가 마음과 생각과 물질을 투자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둘람의 희망이 되어 이 시대와 역사의 새벽을 여는 축복의 장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삼상 22장 3~5절 / 한대근목사
어제 이하은 선생이 결혼식을 치르고 이제 부모 곁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심방 하면서 저는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로 눈을 적신 적이 있습니다. 이 눈물은 앞으로 그가 걸어갈 사역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앞으로 그가 사역하면서 남 몰래 흘릴 눈물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움으로 흘린 눈물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선택하고 걸어가겠다고 결심한데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서 흐른 눈물이었습니다. 앞으로 그에게는 그가 걸어가는 인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기쁨의 눈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그를 따르는 400인의 용사들과 함께 모압에 잠시 내려가 지내다가 선지자 갓의 명령에 따라 다시 유다 땅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을 피해 쫓기는 신세입니다. 그가 사울을 피해 피신한 곳들이 어디 어디입니까? 놉(21:1-)에서 가드(21:10-)로 그리고 아둘람(22:1-)으로 이제는 이방 땅 모압의 미스베(22:3-)에 이르렀습니다. 그 장소 중에서 다윗이 가장 안전하게 생각했던 곳이 바로 이방 지역 모압 미스베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다윗에 대해 대단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증조 할머니인 룻이 바로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모압 지역은 사울의 손을 피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들의 신변을 부탁하고 그곳에서 몇 날 동안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은 선지가 갓을 통해 다윗에게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고 하셨습니다. 이제 못처럼 좀 쉴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겼는데, 하나님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 왕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모압 땅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오랜만에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좋은 환경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만의 안식을 다윗인들 누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향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의 반응입니다.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그리고 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다윗은 즉시 유다 땅 헤렛 수풀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유다 땅에 나타나자 그 소문이 벌써 사울의 귀에 들렸습니다. 온통 다윗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에게 꽁꽁 숨어있던 다윗이 나타나자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좋아합니다. 반대로 다윗의 입장에서는 위기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사실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저는 참된 신앙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자세는 나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우리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다윗인들 편안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가족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한 다윗의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그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내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맴도는 이유 또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욕망을 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복주의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주의, 또는 미신은 내가 목적하는 바를 위하여 나의 소유나, 나의 달란트로 신을 달래고 얼르는 것입니다. 내 목적만 성취하면 될 뿐, 절대로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복주의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신앙이 기복주의 신앙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한결같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입시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되면, 교회나 산 속의 절에서, 전혀 다르지 않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대입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대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도하는 목적은 똑같습니다. "내 아이 목적하는 대학에 꼭 들어갈 수 있도록 시험 잘 치르게 해 주십시오." 절에서 하는 기도와 교회에서 하는 기도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고도 기독교가 유일한 참된 구원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 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자체를 나쁘다고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나라 부모들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뜨거운 사랑으로 자녀들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를 하는 목적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에 치우쳐 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한 후에 내 아이가 목적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 기도를 왜 합니까? 기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뜻이 하늘에게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은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처분대로 따르고 복종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진정으로 열망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목적과 다르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멀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송악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칠 때, 여러분들은 기꺼이 자신의 욕망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의 삶을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평안과 유익에 안주하지 않고 사울 왕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순종은 왜 하는 것입니까? 순종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순종하면 그에 따르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까? 또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순종한다고 할 때, 믿을 수 있는 대상에게 순종합니까? 믿을 수 없는 대상에게 합니까? 두 가지 질문 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입니다. 왜 순종할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왜 순종합니까? 순종하는 것이 유익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며,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사울 왕에게 잡히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유다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바라는 목적보다 큰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힘과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목적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지금 드리고 있는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유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 약 15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나이는 115세 정도가 되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각을 뜨기 위해 칼을 드는 순간 하나님과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흐르고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입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100%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를 보여주시면서 그 자손들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심 없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6에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하나님 또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습니다. 창세기 18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아끼고 신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리라"고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 말 그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위해 어린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들고 섰을 때,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조용히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15살 혈기 왕성한 청년이 115세나 된 노인 한 사람을 거꾸러뜨릴 힘이 없어서 결박당한 채 있었겠습니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신뢰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실것이다. 내 아들 이삭아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눈으로 말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간절한 음성을 이삭은 듣고 그대로 묶여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간절한 사랑과 신뢰감이 쌓여서 결국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우연히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삶의 순간 순간마다 함께 하시고 힘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며 겸손히 순종하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비굴해지거나 나약해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악하고 패역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유다 땅으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충성된 일꾼을 훈련시키기 위해 삶의 현장에 고난을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과정을 밟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도 다윗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셨으며, 그에게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쉼이 목적이 아니라 유다를 구원할 지도자로 삼기 위한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도피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평안에 안주하기를 바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은 번 미래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장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환상적인 이야기입니까? 세상의 어떤 그 무엇으로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변화된 모습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그 높은 산상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간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지는 변화산상이 아니라 바로 죽어 가는 뭇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있던 세상 한 복판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피안의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도모하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인격을 수양하고 닦는 수도장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구원의 종소리를 계속 울려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만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서도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살다가 장열하게 순교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에게 일었던 일화입니다. 그가 워싱턴 시를 지나가다가 한 흑인 청소부가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내면서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겠나?"하며 등을 두드리며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가 청소를 할 때에는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괴테가 글을 쓰듯이 그렇게 하게나."] 이 말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참된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드리지만,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직장과 사업장에서 농토에서 땀흘려 일하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없다면,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주일 168시간 동안 우리가 교회에 나와 있는 시간은 최대치로 잡아도 12시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잘못하면 일주일 동안 한 시간도 교회에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현장이 될 수 있다면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 최고로 가치 있고 복된 시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악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속의 더러운 때가 끼지 않도록 말씀으로 닦으시기 바랍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하나님이 교회에 달려나올 때마다 오른손에 승리의 깃발을 들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은혜들이 넘쳐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대의 징조
설교자가 겪는 두 가지 큰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자 자신이 설교한대로 살지 못하는데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설교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아직도 그 영적인 요구대로 제대로 살 지 못하는데서 오는데 기인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서 느끼는 아쉬움에서 옵니다.설교자는 설교한 만큼의 결실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삶에서 맺히지 않는데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자체적으로 전쟁을 치를 힘이 없었던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하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앗수르 왕을 찾아가 조공을 바치며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라고 아하스를 설득하면서 임마누엘의 징조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그것마저 믿지 않습니다. 불신하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을 향해 마음에 다급해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로 시대의 징조를 삼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큰 서판을 준비하여 큰 글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써서 저자거리에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어 부르게 했습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란 "노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뜻입니다. 즉 해석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으니 속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대의 징조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고멜과 혼인하게 함으로 음란한 이스라엘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 태어난 두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으신다)'과 '로루하마(더 이상 자비와 긍휼이 없다)'라고 지어 부르게 함으로 그 시대에 하나님의 징조를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시대의 징조와 표적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감추고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되는 것은 우리를 질책하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들을 통해 시대의 징조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자극과 도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삶을 깨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의 희망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징조가 되기보다는 세상의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과 이기심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종교인들의 이익단체 정도로 인식되는 현실에 가슴을 치고 애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고 거룩하게 사는 시대의 징조가 됩시다.
좋은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삼상 22장 1~5절 / 이용효목사
미국 버지니아 공대 캠퍼스에서 32명을 죽인 조승희라는 젊은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젊은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자 살지 않고 함께 공동체 속에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함께 하는 공동체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성장을 원한다면 교회 소그룹, 순모임에 꼭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도 여러 메디컬 저널에서 발표한 내용들을 보면 60세 이상 노인들이 매 주일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소그룹에 참여하여 교제하는 사람이 그렇지 아니한 사람보다 훨씬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우울증에 빠질 확률도 적고, 수명도 5-7년 더 오래 산다는 연구 보고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너와 나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가까이 하면서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부모님일 것입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가문은 수많은 후손들이 미국을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부모님의 신앙과 삶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난폭하고 방탕한 부모님을 둔 사람들은 그 부모님을 닮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역시 부정적인 사람이 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또, 누구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를 가까이 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나쁜 친구들을 사귀면 말과 행동이 나쁜 쪽으로 닮아갑니다. 반면에 좋은 친구들을 사귀면 좋은 쪽으로 닮아갑니다.
잠언 13:20절에는“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 18:24절에는 “해를 끼치는 친구를 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언 27:17절에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릴 때 친구 잘못만나 일생을 망치고,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좋은 친구요, 좋은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1. 다윗에게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다윗은 가드왕(블레셋) 아기스(에비멜렉)를 찾아 자신의 몸을 의탁하려 하였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두려워하여 아기스왕에게 다윗을 조심할 것을 진언하자 다윗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채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그 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삼상 21:10~15절)
그 뒤에 바로 이어서 기록된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기 거지 없습니다. 한 때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찬송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사울의 창과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침을 흘리며 미친 채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가 마르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들과 저들에서 이슬 맞으며 잠이 들었고, 바위에서 바위 뒤로 숨었으며, 굴속에 깊이 들어가 숨을 죽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사울을 피해 다윗의 가족들이 아둘람굴로 찾아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 400여명이 다윗에게로 몰려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이 함께 하였으며, 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 큰 빛을 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인생의 쓰디 쓴 맛을 보고 있는 다윗에게로 동병상린을 느낀 자들이 모여 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어차피 사회에서 매장된 사람들이라 자기 고향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비주류 인생들을 하나님은 다윗에게 붙이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이 병든 것보다 더 큰 병은 없습니다.
내 인생길에 환란을 가져다 준 상대가 있을 때 그 증오와 아픔의 원인자 때문에 내 인생 전체가 병드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우울한 삶,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닫힌 인생이 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 학대나 편애, 그리고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건강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상처의 쓴 뿌리를 사단이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이런 깊은 상처들이 있는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소외당한 자들이 과연 치유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의 통치 기간에 위대한 30인의 용사들이 이들 중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잘 만났기에 이런 자들이 통일왕국의 일등 공신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도망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추방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애매히 미움을 받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피가 마르는 고통을 당하였기에 냉대를 받는 이들에게 아비의 심정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대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현대 심리학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자들이 통일왕국의 주축이 되었고 전쟁에 능한 용사들로 변화되었습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리더였습니다.
다윗은 이슬 맞으며 들에서 숨어 살았고 어두침침한 동굴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류들은 이런 다윗에게 그들의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함께 생활하면서 다윗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 가까이에서 다윗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무엘상24장에 보면 다윗 일행이 아둘람굴에 숨어있을 때 사울왕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다윗일행은 이미 어둠에 적응이 되어 사울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사울은 어두운 동굴 속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중 하나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울을 붙였다고 하면서 명령을 내리면 단칼에 사울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 부하의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윗이 한 번 눈을 감아버리면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도망자의 신세를 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게도 자유를 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심은 이미 다윗에게 기울어져 있었기에 사울을 죽인다면 힘들이지 않고 왕위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부하에게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처리하시도록 주님께 맡겨야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종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절대 금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철천지원수 같은 사람이요, 대적자인 사울인데도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살려줍니다.
이들은 그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주권을 높이는 다윗의 경건을 보고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토록 끈질기게 목숨을 위협하며 고통의 삶을 살게 한 사람이었고, 피를 마르게 하는 도망자의 삶을 살게 한 사울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이기에 죽이지 않는 다윗,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는 다윗의 신앙을 저들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축복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들도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많은 환란과 상처의 문제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복종하는 다윗의 삶이 이들의 환란과 고통을 치유하였고 오히려 건강한 마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을 통해 이들은 인생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죽이고, 복수하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닌 반복되는 다윗의 용서 속에서 그들도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다윗에게서 불같은 복수를 기대했을 것이다.
중국영화 복수혈전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 복수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원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자신들의 상처의 아픔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영화를 본다고 해서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물을 보고난 뒤 그 잔상이 뇌리에 남아있어 나도 모르게 폭력적인 언어가 나오고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예우하는 평안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면서 인생 최고의 평안과 승리는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는 것임을 배운 것입니다. 이들의 깊은 상처와 증오심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3. 다윗은 말씀과 기도, 찬양과 감사의 깊은 영성을 갖춘 리더였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인 하나님께 언제나 물어보고 전쟁에 나갑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다윗을 보면서 비루들이 변화되어갑니다. 기도와 찬미 그리고 감사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들도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기 시작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환란과 원통함이 성령의 은혜로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시편 34편의 제목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였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도 1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하였고, 2절에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찬양하는 다윗을 보면서 곤고한 자들이 함께 찬양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시 57편이 제목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때입니까? 그런데 7절 8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다윗은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목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속의 피난처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영감을 받아[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시편 23편의 위대한 찬미의 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엔게디 황무지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감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최초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시 18편).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지켜보면서 상처받은 그들이 전인적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들도 위대한 용사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비루들 / 슬픈 자들도 귀하게 쓰임 받는 용사들이 되는 것을 볼 때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고슴도치는 추위에 혼자 웅크리고 지냅니다. 왜냐하면 동료들과 함께 하면 가시가 서로를 찌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다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은 아예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상처와 아픔을 잘 알고 받아주시고 싸매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모본이 되신 주님을 성경을 통해 만나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 만나 성령을 통해 교제함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무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빚지고 도망 나온 자들 / 깡패 같은 자들 / 마음에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이를 갈던 자들 / 마음에 미움과 증오심이 가득하였던 자들이 다윗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아 훗날 통일 이스라엘 위대한 용사들이 되었다면, 다윗이 기도하고 찬양하며 찾았던 그 주님과 만나 교제할 때 우리들은 더 큰 변화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주님의 리더십을 배우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정기적인 시간을 가지십시오. 고요한 가운데 주님과 사귐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십시오.
당신도 다윗처럼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
삼상 22장 1~5절 / 이준원목사
[들어가는 말]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합니다. 실제로 2년 정도 지속되고 있는 이 코로나 상황 때문에 다 어렵습니다. 미국도 어렵고 한국도 어렵고 전 세계가 다 어렵습니다. 지금 동계올림픽이 베이징에서 시작되었는데 확진자가 선수들과 임원들 가운데 나오고 있는데, 선수들은 확진이 되면 뛸 수 없기 때문에 4년 동안 준비해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코로나 때문에만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삶은 항상 어려웠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생각해보시면 몇 십 년 전에도 어려웠고, 그 조금 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기가 특별히 어렵다기보다는 가장 어려운 때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악한 자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때, 그 사회는 악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고대사회는 정말 악한 사회였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마음껏 유린하던 악한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 독재정권 아래서 국민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어,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자유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독재정권 시절보다 지금이 더 불평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표현하면 잡혀갔는데, 이제는 표현해도 괜찮으니까 더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원통해 하고,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아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도 억울하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다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SNS를 통한 불만을 폭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1. 아둘람 굴에서 훈련받는 다윗
지난주 본문인 21장에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피하여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는데, 그가 제사장이고 영적 리더였지만 다윗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다시 불안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적국인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갑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윗은 그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왕의 말 한마디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때에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여 위기를 넘기고 다시 그곳을 떠나 도망을 합니다. 그 후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1절)
이제 다윗은 블레셋 가드를 떠나 아무도 없는 유대 광야의 아둘람 굴로 피신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교회들이 공동체 이름을 ‘아둘람 공동체’라고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다윗의 도망자 생활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됩니다. 성경은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안이 다윗 소식을 듣고 그리로 간 것을 보면 그 동안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의 형들과 온 집안이 아둘람 굴에서 다윗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다윗은 막내아들로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 부으러 왔을 때 부르지도 않았고 철저히 무시당하며 소외당했던 천덕꾸러기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온 가족이 함께 왔다는 것은, 무시하던 아들이 의지의 대상이 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왕으로 세움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엄청난 장군으로 존경받으며 성장했기에 이제는 온 가족이 그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몰려듭니다. 다윗이 여기 있다는 소식이 어떻게어떻게 전해졌다는 겁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2절)
다윗이 이들의 우두머리(commander)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의 수가 400명가량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자만 400명이고 사실은 군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 되는 무리가 다윗에게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하면 천 명은 넘는 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이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이 나중에 소위 ‘다윗의 사람들’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들이 훗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생애 내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충성스러운 부하가 됩니다.
그 당시는 사울이 왕이기는 했어도 사사시대 말기였고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였는데, 사사시대 말기와 왕국시대 초기의 어지러운 과도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강한 자들에게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는 사이의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권력이 바뀔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나타난 빈부의 격차와 지방 세력들의 권력 남용으로 자신의 기업으로 받은 땅에서 내쫓긴 난민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정복전쟁 후 땅을 나누어주었는데, 받았던 땅을 강한 자들에게 빼앗겨서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이 여기 모인 겁니다.
다윗은 당시 그렇게 낡고 부패한 사회의 희생자들이 모여들었을 때, 그들의 그러한 원통함을 오히려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바꾸는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다윗을 가만히 보면 그는 정말 놀라운 리더입니다. 이제 그는 단지 박해를 받고 추격당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새 시대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때가 오기 전에 사람들을 미리 준비시키고 이끌어가는 ‘위대한 영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면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아주 아름다운 모습,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했다.’ ‘그래? 그건 별 것 아니다. 나는 이런 걸 당했다.’ ‘그건 진짜 별 것 아니다. 나는 더 힘들었다.’라고 서로 자기가 더 힘들었다고 하며 얼마나 서로 싸웠겠습니까?
아둘람 굴은 온갖 부정적인 시각과 감정들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절망과 원한과 증오와 분노와 자포자기와 무기력함 등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아무 희망을 갖지 못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고, 다윗이 거기 있다니까 모인 겁니다. 특히 떠돌아다니던 군사들이 거기로 모인 겁니다.
사실 다윗은 음침한 동굴에 살면서 자기 자신도 간신히 돌볼까 말까 하는 상태였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어 탄식하고 아우성치며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볼 때 어땠겠습니까? 그는 그런 모습을 보며 두 가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무거운 부담감과 막막함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지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둘째로, 그들의 원망과 아우성과 한탄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가지며 ‘왜 저들은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가? 왜 이 나라는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런 마음이 그를 강하게 단련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마음인 부담감과 막막함과 지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 142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믿음의 결단을 하며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57편입니다.
먼저, 142편을 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교훈) 곧 기도’라는 표제가 붙었습니다. 그러한 시편 142편은 당시 그의 곤고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42편, 현대어성경>
시 142:1-7 / 나 큰소리로 여호와께 살려 달라 부르짖었다. 소리쳐 여호와께 불쌍히 보아 달라 부르짖었다. 2) 내가 품은 원통함을 모조리 그분께 털어 놓았다. 고통당하고 있는 속사정을 모조리 그분께 말씀드렸다. 3) 이젠 틀렸다 싶어 모든 것 포기해 버리려 할 때에도 주께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고 계십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목마다 원수들은 나를 잡으러 올무를 숨겨 놓았습니다. 4) 내 주위를 둘러보소서. 한번 보소서.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지켜 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돌보아줄 이 그 누구도 없습니다. 5) 여호와여, 이 몸이 주께 부르짖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 몸이 의지할 분인 것을 나는 압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6) 살려 달라 부르짖는 이 소리 들어 보소서. 이 몸은 만신창이가 다 되어 버렸습니다. 나를 죽이려 하는 것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저 원수들과 대적하기에는 힘이 너무나도 부칩니다. 7) 이 고통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어 주님의 백성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서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주께서는 어지시어 이 몸을 후히 대접하시리니 바르게 살려 몸부림 치는 이들이 나를 감싸줄 것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으로 인해 굴속에서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만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통함과 억울함과 힘든 상태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아무 도움도 발견하지 못한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 외에 의지할 분이 없는 비천한 자신에게 몰려든 이 무리들을 보면서, 상하고 깨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부르짖으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그 상황에 화를 내고 사람들을 쫓아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 속에서 자신이 무력하고 비천하다고 생각한 그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윗은 몰려든 이 무리들을 보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모이니까 자기만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끄시는 흐름을 느끼게 되고, 그 흐름을 따라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뜻이 있어서 이 사람들을 보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다윗이 동굴 안에서 자기연민에 빠져 원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기만 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힘들다고 해도 ‘아무리 해야 나보다 힘들까?’ 하며 면박을 주었겠습니까? 동굴 밖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 몰려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가리켜 ‘자신을 감싼 의인들’(시 142:7)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신과 함께 새 역사를 함께 개척해나갈 동역자들로 그들을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무리인데,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붙여주셨고 이들과 함께 뭔가를 이루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나아간 것입니다.
또 시편 57편은 자신의 비천한 아둘람 동굴에 몰려든 4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품고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를 배경으로 지어진 다윗의 시인데, 다윗이 동굴에서 나와 동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면서 노래한 예언자적 시편입니다.
<시편 57편>
시 57:1-11 /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여삐 여기소서. 이 몸 주께 피하렵니다. 이 재난이 지나갈 때까지 그 품에 안겨 피하렵니다. 2) 한없이 높으신 분, 하나님께 살려 달라 부르짖사오니 내게 필요한 것 일일이 다 주시는 주께 울부짖사오니 3) 하늘에서 도움 주시어 이 몸을 건지소서. 나를 못잡아 먹어 안달 부리는 저것들을 웃음거리가 되게 하소서. (셀라)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을 보여주소서. 4) 이 몸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사람 고기라면 환장하는 저 사자같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들은 날카로운 창과 화살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립니다. 저들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혀를 널름거립니다. 5) 하나님, 하늘에서 주님의 위엄 번쩍이게 하소서. 온 누리에 주님의 영광 환히 드리우소서. 6) 저 원수들이 나를 잡아들이려 그물을 쳐놓았습니다. 이것이 옴쭉달싹 못하게 하려고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 속에 빠졌습니다. 거기에 걸려 들었습니다. (셀라) 7) 하나님, 내 마음 이렇듯 편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든든할 수 있을까요! 주께 노래 불러 드리리이다. 주께 찬양바치리이다. 8) ㄱ) 일어나라. 내 영혼아. 거문고야, 잠깨어라. 나 새벽을 깨우리라. (ㄱ. 8-12절은 108:2-6절과 같다) 9) 주님이여, 뭇 백성들 있는 데서 고마워라, 주께 감사드리리이다. 수많은 나라 사람들 모여 있는 데서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10) 한결같이 따스한 주님의 사랑 하늘까지 사무칩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든든한 우리 주님 궁창까지 그 미쁘심이 이르리이다. 11) 하나님, 하늘에서 주님의 위엄 번쩍이게 하소서. 온 누리에 주님의 영광 환히 드리우소서.
조금 전에 부른 <내가 만민 중에>의 가사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또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에서 지난번 불렀던 <모든 상황 속에서> 가사가 따온 겁니다. 그리고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찬양곡도 여기서 나온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편이면 사람들이 여기서 가사를 따서 곡을 지었겠습니까?
다윗은 굴 속에서 어려운 상황인데 이런 노래를 했다는 겁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그렇지만 시편도 그냥 읽을 때 마음에 와 닿고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 시가 나왔다는 것을 알면 더 은혜가 됩니다. 그냥 읽는 것보다 그 배경을 알고 읽으면 ‘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었나!’ 감탄하게 되고 도전을 받고 배우게 되며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자신에게 닥친 곤경을 언급합니다. 그는 창과 칼과 화살과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어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 왕의 악한 계획을 무력하게 만들 군대를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보내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자신이 거기서 나올 때 하나님의 이름이 만민 중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새벽이 올 것을 믿고 새벽을 깨우기로 작정합니다. 새벽기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기 이 말씀을 보며 새벽에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사실 새벽에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항상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뒤덮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깨우기로 결심하고, 동터 오는 새벽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분명히 오게 될 새벽의 시간에 높아지고 존귀하게 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윗은 20대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새벽잠이 없으니까 새벽에 잘 일어나서 기도한 게 아니라, 한창때인 20대 청년 때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토록 고단한 도망자 생활을 견디면서도 치졸한 복수심이나 적개심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었고, 또 사울의 광기를 진정시키고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열어주실 하나님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400명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을 쓰다듬고 보듬어주고 이끌어주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400명의 남자들로 인해 다윗은 사울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의 토대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혼자나 몇 명의 부하로는 엄두도 못내는데, 400명이나 되는 군사가 오니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3-4절)
성경퀴즈에 많이 나오는데, 다윗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오벳입니다. 오벳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보아스입니다.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바로 룻입니다. 구약 룻기에 나오는 그 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입니다. 룻이 어디 출신입니까? 모압 출신입니다.
다윗은 증조할머니 룻의 고향인 모압의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자신이 자리 잡을 때까지 자기 부모를 모압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모는 다윗이 아둘람 요새에 거할 동안 모압 왕의 후원 아래 살게 됩니다.
다윗은 사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했던 아들인데, 놀랍게도 부모를 이렇게 돌보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효자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군사적인 생각도 있는 겁니다. 자기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겁니다. 그리고 이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오는데 뭐라고 합니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5절)
지금 놀랍게도 이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유대 광야 일대를 전전하게 되는 다윗의 본격적인 피난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때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아둘람 요새는 훤히 드러난 곳이라서 사울 군대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었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이 유다 땅으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2. 치유와 회복이 있는 아둘람 공동체
우리가 오늘 조금 더 살펴볼 것은 바로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다윗은 뭔가 더 준비된 곳,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아둘람이라는 동굴로 가게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가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알지 못한 채로 갔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지시하시니까 거기 가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고 갔을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사울을 대항하여 원대한 쿠데타 계획을 가지고 아둘람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면 거기서 군사작전을 펼치겠다고 한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앞길을 그대로 촥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합니다. 그러면 불안해하지 않고 그 길로 죽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항상 바로 앞에만 보여주십니다. 거기까지 가면 또 그 다음 앞을 보여주십니다.
캄캄한 밤에 손전등을 들고 갈 때 멀리 비추면 잘 안 보입니다. 바로 발 앞을 비추면 보이고 거기까지 가면 또 그 앞이 보이는 것처럼, 좍 다 보여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도 우리 바로 앞을 보여주시고, 거기까지 가면 또 보여주시고 거기까지 가면 또 보여주시면서 인도해십니다. 마지막 결론까지 다 알고 따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가라고 하시니까 우리는 순종해서 갈 뿐입니다. 그냥 따라갑니다. 그게 믿음생활입니다. 가라고 하시니까 따라가는 겁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이르자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의 부모 형제들과 친지들이 모이고, 이어서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괴로웠던 것은 환경 탓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00여 명의 사람들을 붙여 주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들에게, 특히 사울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오래 전 읽었던 <공동체 101>(Community 101)이라는 책이 있는데, 저자는 길버트 빌레지키안(Gilbert Bilezikian)이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시카고 인근에 있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교수였던 분입니다. 그분이 원래는 프랑스 출신입니다. 요즘에는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미국 교회 트렌드를 이끌었던 윌로우크릭교회의 장로이고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멘토였습니다. 그분이 쓴 책인데, 공동체에 대한 아주 탁월한 책입니다. 그 책 서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답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공동체이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시편의 아름다운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며 쓴 시편 133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것이 바로 이 아둘람 공동체의 경험을 기초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집에서도 무시당하는 막내였고, 별로 사랑과 가족의 따뜻함을 모르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는 노래를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뭔가 공동체 경험이 있는 것인데, 그게 바로 아둘람 공동체의 경험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가지셨던 공동체에 대한 꿈, 이스라엘을 택하시면서 가지셨던 공동체의 꿈, 예수님이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과 교회 공동체의 기초를 놓으셨던 것,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 공동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토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비극의 출발입니다. 공동체가 없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게 된 것도 공동체가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둘람 공동체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아둘람 공동체가 완벽한 공동체인 것은 아닙니다. 형편없는 모습도 많고 온갖 문제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꿈이 거기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때문입니다. 아둘람은 아주 특별한 상황이었고 주로 억울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아둘람 공동체가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실 때 그냥 위에서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리더로 세우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둘람 공동체를 통해서 다윗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도 훈련시키셨지만, 특히 도망자 생활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다윗을 키우셨습니다.
사울은 그런 공동체 경험이 없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될 수 없었고, 왕이 되자마자 바로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양들을 치는 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을 어린 나이 때부터 배웠고, 또 아둘람 공동체를 이끄는 목자이자 리더로서 굉장히 힘든 사람들을 데리고 이끄는 공동체의 리더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보다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이 아둘람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경험과 훈련을 충분히 하도록 이끄신 다음에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정확합니다. 괜히 도망자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된 크리스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로 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둘람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습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면 대략 알 수가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2절 상)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인 공동체가 아둘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환난 당한 사람들(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한다면, 교회가 무슨 낙오자나 패배자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올 수 없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거나 빚진 것이 없거나 원통함이나 억울함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겉으로 멋지게 보이고 다 웃고 있지만, 실제로 속은 썩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숨기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싫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몸과 정신이 힘들어 약을 먹고 견디는 것이지, 속으로는 정말 힘든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냥 속이고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실제 모습은 다 감추고 그저 밝고 편안한 모습만 보이면서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다면 어떻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어떻게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가지고 있는 아픈 상처는 다 감춘 채 겉으로 화려하고 멋진 모습만 보이며 실제 모습을 감춘다면, 자신도 치유될 수 없고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무조건 다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양면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있지만, 속마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와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그저 화려하고 멋지고 성공한 모습입니까, 아니면 속에 있는 아픔과 고통입니까?
물론 무조건 힘든 것만 말하고 일부러 괴로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이 있을 때는 그것을 숨기지 말고 내어놓자는 것이고, 그럴 때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며 세워주는 것입니다. 솔직한 나눔을 했을 때 그것을 판단하고 조언하는 게 아니라, 같이 아파하고 기도해줄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공동체를 통해 일어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장하고 숨겨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안은 썩고 곪아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바로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해주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서 자신의 기쁨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그런 중에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을 나누고, 자신의 삶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될 때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아둘람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빚진 자가 되고 마음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된 것은, 사실 자신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강한 자의 횡포와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빚진 자는 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빚진 자라는 것은 요즘처럼 급해서 돈을 빌려서 빚쟁이들에게 쫓겨서 아둘람에 도망 온 게 아니라, 힘 있는 자에게 자신의 기업을 강탈당한 경우를 말합니다. 돈을 빌려서 빚진 게 아닙니다.
아둘람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다윗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였으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다른 성도 때문에, 또는 직장이나 주변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형제자매들과 솔직히 나누고 기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을 말한 것만으로도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꾸 이런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꾸 남을 ‘고발’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고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고백할수록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가는 말]
정확히 4년 전 이맘때 가정교회 집회를 했는데 강사로 오신 최영기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실은 오래 전 이곳 OSU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집회 때문에 오셨을 때 오래 전 살았던 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캠퍼스에 가서 사셨던 기숙사와 집에 가보았습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오시기 바로 그 전 주쯤에 이번에 온 것보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차들이 눈을 치웠는데 제 키보다 더 높게 쌓인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방문하셨던 그날은 온도가 화씨 70도까지 올라갔습니다. 2월에 70도이면 이상기온인데, 걸어가면서 보니까 길이나 잔디밭에 있던 눈들은 날씨가 더워서 다 녹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산처럼 쌓여 있는 눈덩이들은 전혀 녹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딱 보고서 ‘야, 이게 공동체다!’라고 느꼈습니다. 그게 공동체의 파워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 된 파워입니다.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원에 가서 숯불로 고기 구워먹을 때 활활 타는 불도 흩어놓으면 꺼집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함께 뭉치고 하나가 되어 서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세워주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거기에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없이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시던 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여 교회에 안 나가는 케이스들이 생겨서 안타깝습니다. ‘교회를 꼭 나가야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까?’라고 할 때 이론적으로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또 성경적으로 보아도, 교회를 나가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안 나가고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해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시는 분들은 꼭 교회를 잘 정해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의 상한 것과 깨진 것과 아픈 것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아둘람과 같은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아픔을 나누며 위로해주고, 기쁨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모임들이 많은데, 순간적으로 재미는 있지만 끝나고 나면 허무함 밖에 안 남습니다.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유치해 보일 수도 있고 나이브(naive)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 되어서 서로 들어주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기도고 그럴 때 거기에 따뜻함이 있고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특히 이런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함께 나가서 그들도 주님의 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돕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문제는 정말 많은데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려주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며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밖으로 나가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 때 그것이 나 자신을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주변을 살리고 더 나아가 사회를 살리고 이 땅의 역사까지 바꾸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공동체를 통해 성숙해졌던 것처럼,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져갔던 것처럼, 그가 준비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그러한 풍성한 역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련은 또 하나의 은혜
양인국목사 / 삼상 22:1-23.
1. 본문의 내용 중에서 전반부는 다윗이 사울로부터 시련을 당하고 있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사울의 악행에 대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이 내용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해 주신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시련조차도 유익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형통함도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모든 환경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로마서8장 28절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이 직면한 시련들조차 디딤돌이 되게 해 주심으로 시련을 통하여 그들에게 향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어떤 사람도 삶의 여정에서 시련 당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함으로 세워지기 위하여 반드시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시련이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1-5절의 내용이다.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에게 쫓겨난 후 그곳을 떠나 아둘람굴로 도망하였다. 여기 아둘람굴은 베들레헴 부근(삼하23:13,14), 또는 유다의 저지, 산 아래 아둘람 성 가까이 있을 한 지역 이름이다(수15:35). 본문은 다윗이 그곳으로 도망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때 다윗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말해 준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였지만 지금은 자기 땅에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 다윗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던 그의 가족들조차 사울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이 아둘람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을 떠나 다윗에게로 간 것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모습은 주님께서 구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영접치 아니한 것과도 비교된다(요1:11).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의 여정에는 형통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자로서 살아야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윗을 최선의 길(Best way)로 인도해 주셨다. 즉 다윗에게 형통함이 필요했을 때에는 형통함을 허락해 주셨고, 고난이 필요할 때는 고난을 허용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방식을 안다면 어떤 환경을 허락해 주실지라도 그것을 은혜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이 사울의 위협으로 인하여 도망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었을지는 모르나 이스라엘의 왕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어 있다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사람들은 다윗에게 모였고 그 수는 대략 사백 명이었다.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됨으로 장차 왕이 되기 위한 준비로서 자신의 군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허락해 주심으로 얻은 결과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는 고난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다윗처럼 시련의 길을 걷을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소망 가운데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다윗은 그들을 데리고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를 의탁하였고 그는 요새에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도록 권고했다. 여기 다윗이 머물고 있는 “요새”란 유다 땅 밖 모압의 어느 곳일 것이다. 선지자가 다윗에게 이렇게 권고한 것은 그가 이방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거나 또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오래 떠나 있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잊어진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언제까지나 안전한 곳만을 찾아다닐 수 없다. 그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셨지만 직접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할 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해 주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산 다윗은 시편23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하나님은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롬8:28).
본문이 주는 교훈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떠난 사람에게는 형통함도 걸림돌이 되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를 사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누구보다도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떠나 탐욕에 이끌려 살았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을 떠나 탐욕에 이끌려 살고 있을 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악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파멸로 행하게 하였다. 다음은 6절의 말씀이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이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울의 모습은 백성들의 샬롬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었고 지배자로서 왕의 모습이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왕권을 “섬김을 위한 수단”으로 알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지배자” 또는 “다스리는 자”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그 자체가 그에게 불행이 되었다. 왜냐하면 왕권에 대한 이와 같은 그릇된 인식은 그로 하여금 백성들 가운데 샬롬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오히려 분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초래했고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울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자신의 계보인 베냐민 지파만을 택함으로 다른 지파와 구별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22:7,8)” 이처럼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이 너희에게 밭과 포도주를 줄 수 없고, 천부장이나 백부장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만 충성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공동체를 분열 시키는 행위였고 또한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공동체를 사유한 행위였다.
또한 사울은 이스라엘의 샬롬을 위하여 주신 왕권을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을 위해 사용했다.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으로부터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는 말을 듣고 그와 그의 온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윗을 도와준 죄를 물었다. 아히멜렉은 사울에게 자신이 다윗에게 행한 일을 말하며 그를 도와준 것이 왕을 위한 것임을 말했다. 실제로 아히멜렉의 말은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을 왕의 사위로 알고 있고 있었고, 또한 당시 자신을 찾아온 다윗으로부터 왕이 급히 명한 은밀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준비 없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가 요구하는 필요를 채워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은 제사장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그에게 속한 제사장 팔십오인과 그 땅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이까지 모두 죽였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공정한 판단을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공의를 행하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탐욕으로 인하여 판단이 흐려져서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린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울은 이처럼 제사장들을 죽임으로 그 자신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지 물을 사람을 없게 했다. 특별히 왕은 직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그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따라 행하였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왕이 자신의 직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에봇을 입힌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인도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손에 의하여 제사장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그 시대 사울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해도 그것을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사울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형통함조차 탐욕에 이끌려 악을 행할 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를 넘어지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모든 환경은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허락해 주신 환경들이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멀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환경들은 선을 이루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동일한 환경에서 다윗은 자신을 세워갈 수 있었고 사울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만이 복된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오직 주의 뜻에 따라 삶으로 스스로를 세우고 모든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해 주옵소서.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삼상 22장 1~5절 / 전승문목사
살다보면 두려움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또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당황스러운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려움이 밀려올 때, 당혹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성도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그럴 때 가장 먼저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급하면 급할수록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믿어져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지혜롭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나 혼자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로 혼자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더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렵다고 허둥지둥 대다가는 더 두려운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힘들다고 당혹스럽다고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하다가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맙니다.
무릎이 떨릴 때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이 떨리는데도 돌아다니다가는 끝내 쓰러지고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만 허락하신 가장 큰 특권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십시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해결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해결됩니다.
요나단을 통해 사울의 마음을 알게 된 다윗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임금인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누군가요? 사울의 맏아들이며 세자입니다. 또한 다윗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의 마음을 알려주는 것이니 틀림없이 사실일 겁니다. 정말로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 정신적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의 감정이 가라앉으면 오해가 풀리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겁니다. 이건 사울이 오해를 한 것도 일시적인 감정의 문제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극도의 공포심이 밀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을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사무엘에게 갔더니 사울이 그곳 라마 나욧까지 군사를 보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흘 동안이나 정신없이 도망쳤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작정 도망친 겁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던 다윗이 삼일 만에 놉에 도착했습니다. 놉은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제사장의 동네였습니다. 엘리의 증손자인 아히멜렉이 대제사장으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엘리 시대에 무너진 성막이 다시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는 대제사장의 에봇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거룩한 곳이었던 겁니다. 또한 그곳에는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함께 85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다윗이 도착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한밤중에 그곳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맞이하며 물었습니다. 왜 혼자냐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솔직히 대답했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날 엉뚱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비밀업무를 수행하는 중이라고 한 겁니다. 또한 지금은 혼자지만 곧 부하들이 도착할 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한 겁니다. 물론 두려워서 그랬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제사장을 속인 겁니다. 결국 이 일이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옵니다. 사울이 이 일로 놉의 모든 제사장들과 가족들을 다 살해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제사장에게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한 겁니다. 혹시라도 아히멜렉이 사울에게 다윗을 고발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거짓말로 둘러대고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이라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 제사장이 성막에 올렸던 진설병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성막에는 안식일마다 올리는 진설병 12개가 있습니다. 때마침 새로운 진설병으로 바꾸던 차라 먼저 올려져있었던 진설병이 있다고 한 겁니다. 그러나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올렸던 빵이라 오직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히멜렉은 괜찮다면 그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임금의 사위이며 이스라엘의 장군인 다윗이 배가 고프다니 그렇게라도 먹을 것을 주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도엑이라는 에돔사람이 보고 있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장이었습니다. 도엑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고하고 그 결과 놉의 제사장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끔직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날 다윗의 방문으로 인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겁니다. 85명이나 되는 제사장들과 그 가족 수백 명이 한꺼번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왜 이러는 것일까요? 다윗이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그 날 다윗이 성막에서 칼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칼까지 요구한 겁니다 :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21:8~9)”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받았습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던 칼을 다윗이 들게 된 겁니다. 심지어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그만한 칼이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좋은 칼이 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이 골리앗의 칼이 좋다고 하는 겁니다.
그럴까요? 정말 그만한 것이 또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건 골리앗의 칼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이 물러가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우니까 거짓말을 하고 두려우니까 칼을 의지하는 겁니다. 다윗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 겁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겁니다.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놉의 제사장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무기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제사장들과 그 가족을 몰살시킨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전의 다윗은 이러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믿음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때는 칼이 없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그래서 칼을 의지하고, 그래서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혹시 이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요? 믿음을 잃어버리고 두려워 떨고 있는 다윗의 이 모습이 혹시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요?
참 불안한 세상입니다. 말세지말이라 대환난의 시대라 하루하루가 정말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불안합니까? 그래서 많이 두려우신가요? 그래서 여러분도 뭐라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까? 다윗처럼 손에 골리앗의 칼이라도 있어야 안심이 되겠습니까? 수중에 돈이라도 좀 있어야, 뭐든 좀 붙잡을 게 있어야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안심시켜줄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까? 그래서 다윗처럼 골리앗의 칼이라도 반가우십니까? 그래서 이제는 그것처럼 좋은 게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돈처럼 좋은 게 없고 돈만큼 믿을만한 게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패하고 방황하는 겁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도 불안해서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그래서 골리앗의 칼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블레셋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블레셋이 더 안전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보다 블레셋을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다윗이 끝내 블레셋으로 도망간 겁니다. 사울이 무서워서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을 간 겁니다. 하지만 블레셋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정말은 블레셋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21:10~11)”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분을 감추고 몰래 투항한 겁니다. 하지만 오산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 눈에 다윗을 알아본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중요한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땅의 왕이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나라였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다윗은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망가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다윗이 미친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21:12~13)” 참 비참한 모습입니다. 다윗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런 행동을 다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그림자에도 놀라고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도망치고 맙니다. 아무에게도 맞설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된 겁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블레셋 앞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겁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고 마는 겁니다. 결국 블레셋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있는 도성에는 얼씬도 못하고 깊은 산 속 동굴로 숨어들었습니다 :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22:1~2)” 다윗이 아둘람 굴로 숨어들었습니다. 아둘람은 많은 동굴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곳입니다. 다윗이 그곳에 숨자 다윗의 가족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역모자로 몰려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것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숫자가 400명이나 되었던 겁니다.
아둘람은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번에는 모압으로 도망쳤습니다. 천 명이 넘는 식솔을 거느리고 모압에 망명을 요청한 겁니다. 다행히 모압 왕이 요새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압에도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 갓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22:5)” 그렇습니다. 다윗은 모압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거룩한 주님의 사람이 이방 땅 모압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도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두려움에 사로잡혀 블레셋에서 떠돌고 모압에서 떠돌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안 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돌아오십시오. 세상은 그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방황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블레셋에 갔다 모압에 갔다 그러는 것일까요? 어째서 거짓말을 하고 미친 척을 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사울이 죽이려고 하니까, 임금이 죽이려고 하니까, 그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절대로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겁니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이 믿음을 잃어버린 겁니다.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방황하는 겁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어디든 다 불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토록 용맹하던 다윗이 어쩌다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아무리 살펴봐도 다윗이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하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랬습니다. 다윗이 이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안 한 겁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래서 방황한 겁니다. 그래서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 풍랑이 일렁이는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 14:31)” 그렇습니다. 믿음이 작은 겁니다. 그래서 물속에 빠지는 겁니다. 그게 문제인 겁니다. 기도 안 하면 누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다윗이라도 제 아무리 베드로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에는 골리앗을 때려눕혔을 지라도, 전에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지라도, 전에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을 지라도, 지금 기도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십시오. 무릎이 떨리면 무릎을 꿇으십시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해결됩니다.
다윗의 환란
삼상 22장 1~2절 / 박지온목사
'예수님은 내게 그리스도이십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를 살릴 선교사입니다. 첫 번째 2004년도의 첫 번째 고백이 예수님은 내게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도 그리스도십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은 지금 내게 그리스도로 오셨고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의 종들이 마음문을 열고 오늘도 우리의 부족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받으시고 영원한 멸망에서 승리케 하신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오늘도 주시는 메시지가 2004년도에도 승리의 메시지로 개인과 삶에 성취되게 하옵소서. 생각과 감정이 성취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됨을 믿습니다. 주께서 이 한해에 개인과 가정에 축복이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이시간도 높임을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신년 첫시간을 모인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하면 신앙의 고백이다. 12시가 되었다고 해서 2004년 첫시간이라고 해서 아무리 봐도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요 여전히 그렇지만 마음이 달라진다. 고백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
그래서 이시간을 하나님앞에 드리게 된다.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헌금을 한다 그 말이 다른 말이 아니다. 마음만을 드린다. 생각드린다고 해도 여러분의 중심속에 이땅에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것이 돈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돈에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앞에 내가 헌금하고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은 이것은 내 인생전체를 하나님앞에 드린다는 고백이다. 많이 드리고 적게 드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마음중심으로 인생드리고 믿음을 드린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소원을 담는 것은 다른것 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없기에 하나님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소원대로 살아가도록 응답해 달라는 배경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가정을 물론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방문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 사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제게는 기도소원을 아뢰는 그 봉투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 밖에 시간이 없다. 일이 안되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는 기회가 된다. 소원을 많이 적는 것 보다도 아무게 가정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도록 세가지정도 쓰면 좋겠다. 그렇게 주시면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앞에 여러분의 가정과 교제하는 그런 순간이다. 여러분이 중심을 담고 이시간에 기도하고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처음에는 뭘 느꼈는가하면 설교제목대로 쓰고 성령충만하게 하옵소서.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데 될 수 있으면 기도를 담을때에 사실적인것과 실제적인 소원을 담아쓰기 바란다. 성령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말고 성령충만 근본소원이지만 사실이 이루어지는 이런 내용을 쓰는것도 중요하다. 쓸때에 시시한게 아닌게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에 적은것도 시시한게 아니다. 적은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체험되게 되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뭔가 허왕되게 하지 말고 한번 예배드리고 기도했다고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상이요 기복신앙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요 시작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일년간 성령으로 매순간 붙잡혀져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04년도는 우리교회는 중요한 건축의 해요 내 가정이 죽느냐 사느냐 가정교회의 건축의 해요,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는 중요한 기로이다. 정치행정을 보면서 2004년도 굉장히 중요하다. 영원히 낙후가 되느냐 일어서느냐는 우리나라의 상당히 중요한 해이다.
이런 해에 2004년도 시작하게 하나님이 하셨다. 이시작의 고백이 고백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사실대로 이루어주실 줄로 믿는다.
오늘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이 구절이 생각나서 몇일동안 굉장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도 서울갔다가 내려오면서 시간이 5시 30분에 비행기표를 예약했는데 너무 촉박해서 내려올려고 보니 앞길 옆길이 막혀서 자동차가 가지를 않았다. 마음에 조급한 마음이 생겨서 이런것을 놓고 하나님앞에 기도하였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6시 30분에 비행기를 맞추어보라니까 없다고 했다. 그 뒤에는 없다고 했다. 하나님 이 메시지가 성도와 내게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하게 하실것인데 하나님이 결정해서 하나님이 하실줄 믿는다고 기도하니 평안했다. 등을 대고 인도받았다. 말씀이 성취되리라.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이 성취되지 내가 아무리 뛰어도 안된다. 막힌길을 엉금엉금 기어가기에는 너무 답답했었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이 하시는데 올림픽대로가 막혔는데 어느순간 뚤려서 얼마나 빨리달려서 1시간 30분정도 일찍 도착했다. 세상에 이런일이! 감정이나 느낌이 성취되는게 아니다.
한해 감정과 느낌이 성취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
오늘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앞의 내용이 다윗이 도망하다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서 공궤를 받고 아비멜렉의 집에가서 공궤를 받고 사울의 쫓김을 받아서 다윗이 굴로 도망을 간다. 이제 사울이 다윗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 뭔가 다윗과 연관된 사람들을 정치가 그런데 다 잡아죽이는 그런 숙청의 시간이 왔다. 그러니까 다윗의 형제들이 전부 다윗을 찾아온다.
그 다음에 사울의 악정밑에서 원한가진자들 환란가진자, 빚진자들이 다윗을 찾아가게 되어서 그들의 장관이 되었다. 좋은 의미에서 장관이 된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의 장관이 되었다.
제 마음속에 주여! 우리교회도 이런 자들의 장관이 되고 나도 이런 자들의 장관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마음이 생겼다. 올해에 하나님앞에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육적으로만 생각이 아니라 메시야의 왕국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 이때에 다윗의 모인 형제들이 이때에 다윗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다윗의 좌우, 우리나라말로 하면 좌의정,영의정, 장군들이 거기서 다 나온다. 이때에 억울한 사람들이 다윗의 신실한 신복이 되어서 다윗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역대에 없는 메시야왕국의 중요한 모형으로 놓아지는 축복의 나라를 건축하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그런 왕으로 등장한다.
신약에 보면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왕국과 연결시켜 놓았다.
육적으로 뭔가 억울하고 힘들고 원통하다. 이걸 푸는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진짜 원통한자, 환란당한자, 빚진자가 되는 길이 근본문제를 깨닫게 될 때부터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억울하다. 좀 고통스럽다. 빚졌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심에 원한을 가지고 억울하다. 빚졌다. 원한을 가진자가 되는것은 근본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한 오지 않는다.
근본문제는 태어나자마자 사단에게 속아서 우리는 원통한 자가 되었고 빚진자가 되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 아니면 우리는 평생동안 영적인 눈이 안 열리면 이 사실이 이해된다. 얼마나 억울하게 살것이다. 흑암세력에게 눌려서 눈뜨면 사단에게 눌려서 죽음과 멸망과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고 나만아니라 자손만대까지 계속 물러주는 억울한 일이 일어난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깨닫게 되는 일은 예수님은 내게 내 가정에 그리스도시다라는 일에 눈이 열려야 오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왕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들어온 것이지만 전도하는것과 제자가 되는것과 그리고, 마6:33에 말씀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원통한것과 빚진것과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요삼1:2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서 건강하고 부요하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더 큰 문제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금년한해에 여러분의 모든 현장속에서 다윗의 환란을 거칠 필요라기보다도 이것이 과정이다. 하나님이 그 과정을 이루어가실때에 하나님의 뜻을 붙잡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위로할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문제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문제나 무슨 사건이나 무슨 일이나 억울하다 원통하다 빚졌다 그것가지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계속메시지를 들었지만 이 한해에 붙잡으라. 이때에는 근본문제로 들어가야 한다.
여러분들이 감정과 느낌으로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하지말라. 그럴수록 사단은 더욱 더 여러분을 힘들게 한다. 피차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걸로 인해서 근본문제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내게 그리스도시다. 그러면서 뭘 원하시는가?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오셨다. 내가 여기서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근본적으로 내 안에 와계시다는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은 오래믿었다고 예수님이 계시고 금방믿었다고 예수님이 안계시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깊은 고통속에서 내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신가? 염려가 오게 되었다.
어떤면에서 오래믿은 사람이 장로님이 돌아가시면서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랐다고 했다. 어려운 문제가 올때마다 예수님은 내게 그리스도시오 그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궁극적으로 영원한 멸망인 원죄를 해결하시고 그것 때문에 오는 저주와 재앙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그 속에 서야 한다. 그다음문제는 말씀이 성취되고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어떤 문제가 왔을때에 그 문제 자체에 메이지 말고 근본문제로 들어가야 이 해결이 모든 해결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하기 위해 금년도에 이 축복과 역사를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누려야 할 것인가?
그 축복을 제일 먼저 진행될 것은 다락방이다.
다락방은 개인이 응답받는 길이다. 처음에 전도그럴때에 다락방이 들어오면 무조건 하라고 했다. 지금 안하고 있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내게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저절로 열리게 된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제는 그 말할 마음이 없다. 약속을 믿고 뛰어들어가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한다안한다 간단한것 같지만 응답받는 길이 엄청난 문이다.
중직자라고 하는것이 아니다. 초신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이 한해에 섰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는 응답의 길이요 축복의 길을 말하지만 안하고 있다. 우리가 뭘로 하나님앞에 고백하는가?
처음 다락방하라고 할때에 못한다 용기없다고 할때에 제일 먼저 할 것은 내 가정부터 다락방을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건축한다고 할때에 내가 하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내 자식이 하나님앞에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전도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면서 후손이 세계복음화의 후손이 된다고 할때에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식이 되어야 한다.
멀리 뛰어가서 할려고 하지말고 가정에 복음이 회복되고 전도가 회복되고 가정의 자녀들이 전도제자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이루어지면 다른것은 따라오고 응답의 모든 것이 따라오게 되어있다.
서울에 몇일 있는 동안에 손자를 보면서 교육환경이 손자가 머리를 얼마나 잔머리를 굴리는지모른다. 둘째가 손녀인데 난지 얼마 안되는 그것조차 잔머리를 굴렸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들을 복음으로 제대로 키우는것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실때에 다락방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실제주신 내 자신의 현장과 가정의 현장과 자식을 제자화할 눈을 열어주옵소서. 금년도에 이 사실이 이루어지길 약속잡고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 다음에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것이다. 마6:33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 먼저 나를 축복하시고 가정을 축복하시고 자녀를 제자삼기를 원하신다. 이 약속잡고 이 한해에 승리하시고 인도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빛진 것을 내가 갚으리라
삼상 22장 1~2절 / 이성희목사
오늘이 말복이랍니다. 복날이면 보신탕들 하러 가시지요?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는 보신탕을 하지 않는 손님을 위하여 삼계탕을 합디다. 이런 집에 가면 손님들에게 주인이 주문을 받으면서 대뜸 “개 아닌 분 손들어보세요”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전부 개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 하면서 자신을 개로 인정합니다.
여기에 죄인 아닌 분 손들어보세요. 빚지지 않은 분 계세요? 전부 죄인이지요? 전부 빚지고 살지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을 인정하고 빚진 자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스티븐 아터번이 쓴 ‘누가 변화를 꿈꾸는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남자와 바위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당에 있는 덩치 큰 바윗덩어리를 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남자는 몇 주 동안 바위와 씨름하였습니다. 끙끙거리면서 열심히 밀었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주님,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일을 시켰습니까? 밀라고 하셔서 몇 주 동안 밀고 있는데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는 천둥 같은 큰 소리가 그 남자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로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에게 돌을 밀라고 했지 움직이라고 하진 않았다. 그 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 네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움직이마. 자 이제 네 손을 봐라”. 양 손 모두가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있었습니다. 팔에는 근육이 생겼습니다. 그 동안 헛수고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는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좀 더 지혜로워지기 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준비되면 하나님이 변화시키십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 같지만 서서히 변화가 나타납니다. 내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변화는 힘이 생기고, 모습이 바뀌는 것입니다.
종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종이 없어져도 누구하나 서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면 변화합니다. 힘이 생깁니다. 근육이 생깁니다.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준비만 되면 하나님은 유익한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쓸모 있고, 유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많지만 특히 빚을 갚는 것입니다. 누구나 빚은 삶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빚이 있으면 항상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사업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빚은 있어야 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합디다. 저는 사업을 잘 모르지만 빚은 누구에게나 볼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빚이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넘어갑니다. 그 어마어마한 덩치의 대우그룹도 하루아침에 넘어가고 지금은 초라하게 감옥과 병원을 오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장로님은 자그마한 제조업을 하십니다. 그 장로님의 생활수칙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분은 절대로 남의 빚은 안 쓰겠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크질 못하지만 그 분은 얼마나 편하게 사시는지 모릅니다. 사장인 장로님과 공장장과 월급이 같습니다. 교회에 많은 선교비를 봉헌합니다. 봉사할 때가 있으면 아무 때나 전화한 하면 시간을 냅니다. 그리고 가정이 평안합니다. 제가 볼 때는 너무 행복하게 사시는 분입니다. 빚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영적 빚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에게 빚진 자였습니다. 죄의 빚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야할 빚입니다. 이 빚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빌레몬에게 대한 빚을 갚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빌레몬의 자신에 대한 빚을 갚겠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 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결코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상태에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결코 자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빚을 해결해주어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합니다. 빌레몬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탕감 받아 자유를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탕감해주어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빚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첫째, 남이 진 빚을 내가 갚아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갔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에 까지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노예는 소유가 없었습니다. 로마까지 가는 여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훔쳐야 했습니다. 또 도망하므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컸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로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아들이 진 빚을 아버지가 갚아 주는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아버지로서 법적 책임은 없을지 모르지만 도덕적 책임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아들과 같은 오네시모의 빚을 갚아주려고 합니다.
바울은 부친으로부터 상속을 받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돈을 얻고자 하였습니다(행 24:26). 사도행전의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세를 주고 2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행 28:30). 바울은 이 돈으로 빚을 갚아주려고 합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의미를 아시지요? 땅을 쉬게 하고,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빚의 탕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빚이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과부의 형편을 도와주는 글이 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들들이 빚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들은 엘리사는 과부에게 동네에 다니면서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집에 있는 작은 한 병의 기름을 그릇마다 붓게 하여 모든 그릇이 다 차게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과부에게 말합니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빚을 갚아 아들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면하고 자유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빚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가 빚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의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데려와서 빚진 것이 얼마인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에게 오십이라 쓰라고 합니다. 밀 백석을 빚진 자에게 팔십이라고 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하였다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빚을 탕감하는 청지기의 마음을 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교부 안셀름은 신학에 중요한 틀을 놓은 사람입니다. 이 분은 ‘Cur deus homo’라는 책을 썼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나’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아들의 생명을 보상으로 주고 인간이 지는 죄의 빚을 갚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보상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빚을 갚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는 “은밀하게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여러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6:4에는 구제를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6에는 기도를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18에는 금식을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은밀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갚으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을 갚으십니다.
사무엘상 22:2에는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 때에 빚진 자들의 모든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주었기에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빚을 갚아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이 갚아야 할 돈이 있어 안절부절하며 잠을 못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왜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빚을 갚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당신 참 멍청하네요. 내일 당신이 돈을 못 갚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잘 사람은 바로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어찌 당신이 잠을 자지 못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빚진 자는 이래저래 편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빚을 다 갚으셨는데 빚을 갚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불안하여 하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다 갚으셨으니 평안하게 잡시다. 더 이상 빚이 없으니 평안하게 삽시다.
로마서 8:12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빚진 자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빚도 예수님이 다 갚으셨습니다. 이제는 빚이 없는 자로서 자유하게, 평안하게 삽시다.
둘째, 남이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빚진”이란 말은 ‘프로스페일레이스’란 말입니다. 이 말은 ‘오페일로’(빚지다)는 말과 ‘프로스’(더하여)라는 말이 합하여진 말입니다. 더 큰 빚을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보다 더 큰 빚을 빌레몬은 바울에게 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까지도 탕감해주겠다고 합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믿음을 가진 것 즉 마음의 빚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큰 빚입니다. 바울은 이것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주기도문에는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십니다. 원문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남이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하는 자가 탕감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비유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받고 나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지 못하여 다시 잡혀온 말씀이 있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있는 빚은 용서받았으면서 갚을 수 있는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잘못 때문입니다.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하는 자가 자신의 빚을 탕감 받습니다. 이것이 용서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시절에 국방장관이었던 에드윈 스탠턴이 있습니다. 이 분은 육군장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한 번은 대통령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링컨은 “따끔한 편지를 쓰게”라고 하였습니다. 스탠튼은 편지를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다 읽은 링컨은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할건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보내야죠”. 링컨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네는 보내고 싶지 않을걸세. 난로에 집어넣게. 나는 화가 나면 편지를 써서 난로에 넣어 태워버리지. 딱 적절한 때에 편지를 잘 썼네. 기분이 한결 나아졌을걸세. 그러니 이제 태워버리고 다른 편지를 쓰도록 하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가 용서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할 다리를 스스로 부서뜨린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속여서 거둬들인 돈은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 않으시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돈을 사용하고,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지고 용서하고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용서는 곧 빚을 탕감하는 일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깨끗한 영혼으로의 초대’라는 그의 책에서 용서의 다섯 가지 단계를 설명합니다. 1단계는 나 자신이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2단계는 내게 진 빚을 용서하십시오. 3단계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4단계는 다른 사람을 성장의 도구로 바라보십시오. 5단계는 화해하십시오. 엄청난 사랑으로 빚을 탕감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작은 빚을 탕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지 맙시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도무지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요즘 돌아가는 이야기 가운데 우리나라의 정권을 김치에 빗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보쌈김치랍니다. 전두환정치는 깍두기입니다. 노태우정권은 물김치입니다. 김영삼정권은 파김치입니다. 김대중정권은 나박김치입니다. 그럼 노무현정권은 무슨 김치일까요? 겉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겉도는 정권이랍니다. 왜 이렇게 겉도는 것 같습니까? 이해와 용서의 부족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싸지 못합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겉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내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이해입니다. 자신이 조금 억울하고, 팽 당했고 자신이 영원히 묻어 두어야 할 일들을 모두 들춰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은 그래도 누구보다 국가의 권력과 이익을 한 때나마 누린 사람들입니다. 이것만 해도 고마워하고 서민들에게 미안해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서민을 불안하게 하고, 나라를 걱정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모두 빚진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채권자 같이 살고 있습니다. 채권자 의식은 국가의 망조입니다. 그리고 빚을 같아주고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가 빚을 졌으니 내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까? 내가 갚아줄 여유를 가집시다. 내게 빚진 자가 있습니까? 나도 탕감 받고, 용서받고 은혜로 사는데 탕감해주고,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에 베푼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빚을 탕감 받은 자유자의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
삼상 22장 1~2절 / 이성우목사
오늘은 금년도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본래 이 맥추감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게 된 이후에 그 땅에서 농사를 하여 첫 이삭을 거두어들이게 되었던 초실절과 이 초실절로부터 49일이 지나서 50일째가 되는 날에 지켰던 칠칠절과 관련되어 있는 절기입니다.
이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땅에서 그 해에 농사를 지어서 첫 수확을 거두어들이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지키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신명기 16장 16절-1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이 말씀 가운데 칠칠절이 오늘의 맥추감사절의 유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각각의 절기를 지키면서 그 절기와 관련된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 날의 감격과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면서 오늘과 내일을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을 하는 의미도 있지만 더 깊은 뜻이 있다고 한다면 단순한 과거 역사의 회고가 아니라 그 절기와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하심에 대한 회고와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고백하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켰던 모든 절기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과거의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면서 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섬길 것을 결단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삶을 결단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맥추절과 더불어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말씀하고 있는 신명기 16장 16-17절 이후에 이어지고 있는 말씀인 18-2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의를 행하며 우상 숭배를 금하는 권면과 명령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오늘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힘써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곧 진정한 절기를 지키는 의미이며 정신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묶어주고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무엘상 22장 1-2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의 병적인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던 다윗이 힘겹게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 있었던 역사의 한 면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으로, 그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일차적으로는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시작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있었던 다윗의 맹활약을 통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가 더 한층 사울 왕의 시기심을 자극하게 되어서 사울 왕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고자 시도하고 있음이 사무엘상 18장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사울 왕의 살기가 갈수록 더 강해지게 되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죽음의 위협 가운데 쫓겨 다니며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다윗이었지만 사실은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위험천만한 상황 가운데서 다윗의 생명을 지키시고 계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생명을 지키시고 그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하게 개입하셨으며, 사람들을 다윗에게 붙여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가장 먼저 다윗을 돕는 자요 위로 자가 되었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기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윗에게 있어서 요나단은 더 없는 도움이요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돕고 다윗을 위로하며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사명인 이스라엘 나라의 왕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을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하게 붙여주심으로 다윗과 더불어 동역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방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와 함께 일하시는 것이었음을 믿습니다.
다윗을 도와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사무엘상 21장을 보면,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놉 땅에 살고 있었던 제사장 아히멜렉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윗의 지지자가 되었으며, 다윗의 위로자가 되어줌으로써 다윗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힘입어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향해서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땅 어디에도 숨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블레셋 땅 가드에까지 피신했다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다윗이 아둘람 굴을 자신의 은신처로 삼아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지내고 있었지만 인간적인 극심한 두려움과 홀로 있음에 대해서 인간적인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하나님은 400명가량의 지지자들을 아둘람 굴 다윗 곁으로 모이게 해서 그를 지키게 하였으며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용기와 사명을 향한 열정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을 따라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우선 1절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그의 가족들이 사울 왕을 피하여 그 곳으로 모여들었으며, 2절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환난을 당한 자들, 그리고 빚진 자들과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이 숨어있는 아둘람 굴에 모여왔는데, 그 숫자가 사백 명 가량이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로 백성들이 이런 저런 이유와 문제들로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 왕의 통치를 도우실리 없었을 것이며, 더군다나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어서 그가 충실하게 국정을 돌봤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새로운 왕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 혹독한 연단과 훈련의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다윗 곁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인간 다윗에게 있어서는 더 없는 용기와 위로와 힘을 얻게 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하나님의 기적적인 돌보심과 인도하심, 보호하심을 몸소 체험해왔던 다윗이었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지쳐있고 좌절감에 빠져있었을 때 그를 찾아 그의 곁으로 모여 들었던 400명가량의 지지자들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다시금 깨닫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본문에 나오는 그들이 왜 아둘람 굴, 다윗 곁으로 모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은 이미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그를 도와 일하시고 장차 그를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우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다윗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과 함께 있다가는 죽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윗 곁으로 모여들었던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들의 지지와 도움, 협력, 함께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었던 위험스런 상황에 있었으면서도 그런 환경을 탓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을 받아서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서 그들을 구원해낸 사실이 사무엘상 23장의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용기를 갖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 때문이었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여러분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또한 지금 이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인 제 자신도 사실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나 저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그동안도 하나님은 그때그때마다 도우시며 역사해 오셨기 때문에 지금도, 앞으로도 도우시며 역사하실 것을 믿지만 지금 하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목숨걸고 헌신하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저 자신 또한 요나단처럼, 그리고 아히멜렉처럼,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둘람 굴 다윗 곁으로 모였던 사람들처럼 이 중요한 때에 저와 같은 믿음과 목표의식, 사명감을 가지고 저와 함께함으로 위로와 용기와 사명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부어넣어 줄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물론 이 일은 일차적으로는 제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지극히 거룩한 일인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간곡히 부탁하며 권면하기는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자신의 입장들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앞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저에게 더 없이 귀한 동역자요 지지자요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귀한 성도들 모두가 되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함께 감당해 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의 노래
삼상 22장 1~2절 / 이익환목사(욥바교회)
우리는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게 되길 바란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은 한순간에 이스라엘의 스타가 되었다. 그는 사울의 신임을 얻어 짧은 시간에 군대장관이 된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 많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거리에 나와 그를 환호했다.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는 요즘으로 하면 아이돌급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다윗은 이 날 이후 사울왕의 시기를 받게 된다. 그를 죽이려는 사울로 인해 다윗은 도망자가 되어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다윗은 하루 아침에 “I’m something”에서 “I’m nothing”의 시기를 맞게 된다.
우리 인생에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던 시간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괴롭고 힘든 시간이다. 다윗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고 싶었다. 그는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진다. 다윗은 더이상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간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를 경계하자 다윗은 왕 앞에서 미친 척하는 연기까지 한다. 연기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미쳤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와 아둘람 굴에 숨는다.
아둘람 굴 속에 누워 있는 다윗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는 슬프고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소고치며 환영하던 여인들의 환호 소리가 아직도 다윗의 귓전에 쟁쟁했을 것이다. 그가 거둔 승리로 인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던 그가 지금은 사울왕에게 쫒기는 신세로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 지 기약도 없이 그의 인생은 아둘람 굴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인생수업을 통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가 굴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있다. 아마도 아둘람 굴이 아닐까 한다. 시 142:1,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아둘람 굴은 그가 원통함을 토해 놓는 곳이 된다. 2-4절,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피난처로 알고 아둘람 굴에 들어왔지만 이 곳이 언제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하면서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다. 5-6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삶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다윗은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인생이 닫힌 곳에서 그는 피난처 되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열어 보인다. 아둘람은 이처럼 다윗이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더 깊은 의존을 배운 곳이다. 하나님께서 피난처되신 인생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왕의 직분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탄식과 호소를 마치고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7절,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일까?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한다.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러나 다윗을 찾아 온 자들은 별로 의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윗의 상황을 역전 시켜줄 만한 위인들이 오지 않았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모두 사울을 피해서 다윗에게로 온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400명의 사회적 추방자들.. 다윗은 과연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들은 후에 다윗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 실제 주역들이 된다. 자신을 받아 준 다윗을 위해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용사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굴에서 지은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시편 57편이다. 1-2절,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7-8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생이 갇힌 듯한 캄캄한 동굴 속.. 그러나 그곳은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한 곳이 된다. 다윗은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선포했다. 새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오는 시간이다. 다윗은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통해 그의 인생에 여명이 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아둘람은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비전이 잉태된 곳이다. 그리고 이 비전은 그곳에 함께 있던 400명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그리하여 그들도 후에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 역사의 여명을 밝히는 사람들이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가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자신을 내려 놓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권위자를 그 위에 두셨다. 만약 사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다윗은 이후 엔게디 광야로 피한다. 그는 거기서 동굴로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의 측근들은 흥분했다. ‘여호와께서도 원수를 당신 손에 넘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라고 그들은 다윗을 재촉했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자신의 고난을 당장에 끝낼 수 있는 일생일대의 순간이 다윗에게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그는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다. 사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자로 피해 다니는 시간이 연장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 인생이 동굴에 갇혀 버린 것 같을 때 그 원인 제공자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그 인간들을 향해 원망하며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그 동굴이 복수의 칼을 가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혹 그러한 동굴에 갇혀 있다면 그곳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해 노래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철저히 주님께 피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탁월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권위에도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단순히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꽉 막힌 굴에서 나오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십 여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허비되고 낭비되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데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캄캄한 동굴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자녀의 문제로, 나랑 통하지 않는 배우자를 통해서, 직장과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관계나 진로의 문제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슬프고 불안한 밤을 맞이하게 된다. 허둥지둥 쫓겨 도망했던 다윗처럼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을 유일한 나의 피난처로 노래할 수 있는 아둘람이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시간에 순종하며 철저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엔게디의 광야가 된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I’m nothing’처럼 여겨지는 그 시기는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가장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여겨지는 시간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절망스런 아둘람과 엔게디 광야를 허락하실 때,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선포하면서 나의 피난처되신 주님 때문에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새벽의 여명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다윗의 효도
삼상 22장 1~4절 / 김진호목사
여러 해 전에 몇몇 목사님들과 러시아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스코바에 있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아주 감동적인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대형의 그림인데 그 그림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젊은 딸이 늙은 아버지에게 젖을 빨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이제 가이드가 그 그림에 배경을 설명해 주는데 우리 일행 목사님들은 큰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큰 죄를 범하고 감옥에 갇혔는데 형벌은 그 아버지를 서서히 굶겨 죽이는 벌입니다. 장년 아버지인 범인에게 어린 아이가 먹는 것만큼 먹을 것을 줍니다. 아버지는 영양실조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딸이 면회를 옵니다. 물론 밖으로부터 먹을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배고파 견디기 어려운 아버지를 보자 이 딸이 자기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몸에 젖 밖에는 없으니깐 아버지에게 면회올 때마다 아버지로 하여금 젖을 빨게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굶어 죽기 직전에 가끔씩 면회 오는 딸의 젖을 먹고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년을 계속하는 동안 이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딸의 효심에 감복하여 범인인 그 아버지를 특별 사면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감동 깊은 이야기를 들은 화가가 이 그림을 그려서 러시아의 박물관에 진열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모두 일행 목사님들도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저 유명한 다윗의 효도내용입니다.
청년 다윗이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왕의 칼날을 피하여 여기저기 숨어서 살고 있던 때의 말씀입니다. 어느 날 다윗의 아둘람 굴에 숨어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곳까지도 사울 왕이 찾아오니까 다시 모압땅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을 만나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젊은이로써 모든 자존심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도 내 코가 석잔데 누굴 돌봐 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3절에서 다윗은 모압왕에게 자신의 부모를 위험에서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니까 모압 왕이 이스라엘 청년 다윗의 효심에 감복하여 다윗의 부모를 위기에서 보호하고 지켜 드린 내용의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좋은 환경이나 넉넉한 생활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자신의 문제로 어렵고 위험한 처지에서 자신의 부모를 자기 이상으로 돌봐드린다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 유명한 룻기를 보면서 우리가 늘 감동을 받는 것도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돌아와서는 긴 흉년 동안에 며느리가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다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효도하는 내용은 늘 들어도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이 평균 1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작년 통계보고인데 OECD 가입한 28개국 나라중에 다섯 번째로 우리 나라가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세계에서 제일 자살자가 많다고 했는데 현재는 우리 나라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원인 중에 첫째가 단순히 사업의 실패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충격으로 자살한다는 것이 첫번째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이 무너집니까? 물론 가정을 지키는 부부관계가 깨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부관계가 쉽게 깨지는 원인도 따지고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들은 부부관계가 쉽게 깨질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어찌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이혼을 어찌 쉽게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을 튼튼하게 지켜 나가는 것은 바로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여기 저기 무너져 가는 가정들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은 다시 부모에 대한 효도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인천에 있는 어느 교회는 아주 큰 교회인데 이 교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효도대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착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생각하며 은헤 받으십시다.
첫째로,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자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효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부관계도 서로 남녀 자신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친한 친구도 서로 자신들이 선택하여 우정을 나눕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를 선택해서 아버지로 모시고 어머니로 모신 분들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수십억의 자녀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부모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선택전 만남이기에 헤어질 수도 있으나 부모와 자식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그래서 부모자식간을 천륜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런말 많이 하지요? "보이는 제 부모에게 효도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부모의 은혜는 3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나를 낳아주신 은혜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생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한 어머니의 희생으로 자식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두번째 은혜는 그 자녀를 양육하신 은혜입니다. 그 자녀 낳아서 그 자녀가 사람 구실하기까지 계속적으로 돌봐주시는 은혜야말로 말로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세번째 은혜는 그 부모는 죽을 때까지 자녀를 위해 기도해주고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한 마음은 끝도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부모 사랑밖엔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배워야 합니다.
두번째로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해야 될 이유는 효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알고 있는 엡 6:1-2을 보세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명령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황따라 처지따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효도는 반드시 해야 될 하나님의 명령이란 말씀입니다.
기독교만큼 효도를 강조하고 실천케 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종종 우리 주위에서 기독교는 불효의 종교라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잘못 알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돌아간 다음에 제사 잘 지내고 묘지 잘 쓰는 형식적인 효도보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바른 효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추도식 잘하고 묘지 잘 써야 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와 효도관이 다른 것입니다.
목사인 저는 성도들의 부모님 장레식을 자주자주 집례하면서 살아계실 때 불효하고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후회하며 통곡하는 자녀들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렇게 후회할껄 왜 부모님 살아게실 때 잘하지 못했는가를 지적해 주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믿음 좋은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사람들입니다.
창세기에는 요셉의 효도가 있습니다. 룻기에는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성군 다윗도 부모님에게 효도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도 마지막까지 인생들에게 효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효도의 말씀을 여러 곳에서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처럼 부모공경도 언제나 해야 합니다. 이 효도의 도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효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효도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성경에는 효도하는 자에게 "네가 잘되고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가 아버지 야곱에게 효도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효도함으로 그의 자손중에 다윗 임금이 나왔습니다. 그 다윗이 효도함으로 그는 위대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불효한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만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효하더니 그들은 저주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불효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에게 가정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자식들이 잘되고 사회와 국가도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조 숙종왕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숙종대왕은 종종 민가에 내려와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순찰을 하였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얼은 강바닥에서 밤새도록 고기 잡는 사람을 왕이 만나 그 이유를 묻자 자기 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몇일째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는다고 하니까 숙종왕이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큰 상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 동네에서 아주 불효 막심한 자가 자기도 임금에게 상금 받기 위해 밤마다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고 있는데 왕이 다시 그 곳에 와보니 고기 잡는 사람이 있어서 묻게 됩니다. 그래서 임금이 이 사람이 평소에 효도한 자인가 알아보라고.. 신하가 알아보니 아주 불효자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신하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 했습니다. '이 놈은 아주 파렴치한 놈입니다. 거짓 효도를 하는 자라고 혼내 주셔야 합니다'고... 그때 숙종이 신하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거짓 효도는 괘씸하기는 하나 효도를 흉내내기라도 했으니 그 사람도 상금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선한 일은 흉내만 내도 좋은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에는 80%가 대가족제도였고 20%만이 핵가족으로 살던 시대에는 그래도 효도가 살아있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80%가 핵가족이요 20%정도만 부모 모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사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점점 효도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거 노인들이 자꾸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여선교회에서 독거 노인들을 몇 분이라도 돌봐드리는 일은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이땅에 세워진 교회마다 독거 노인들을 내 부모처럼 생각하고 찾아가서 돌봐 드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이런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아들 하나 둔 부모는 뒷방에서 죽고 아들 둘 둔 보모는 길바닥에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 길바닥에서 죽는가 했더니 큰 아들 작은 아들 집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교통사고 만나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들 셋 둔 부모는 어찌 되는지는 아직 그 말은 안나왔습니다.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끝으로 제가 몇 년전에 부모님 주일 설교할 때 효자효부는 부모가 만든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된 우리들이 자식에게만 효도를 강요하거나 바라기만해서도 안됩니다.
사실 한국의 자녀들은 부모 효도에 대한 책임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자식들이 때로 부모를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하고 불효 아닌 불효자가 되고 있음에 대해 자식들도 스트레스를 받고 가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된 우리가 알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 회갑이며 칠순 잔치에 가보면 대부분 어머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들 자식들이 다 웁니다. 맘은 안그런대 뜻대로 효도가 안되니까 괴로워서 우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다같이 부모님 노래를 부릅시다.(부모님 노래♪)
그러기에 부모들은 자녀들만 잘못한다고 섭섭해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도 이해하면서 부모님들이 너그럽게 참아줄 때 그런 부모 밑에 효자가 나오고 효녀가 나오고 효부도 나오는 법입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며 다윗처럼 위기 상황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들 다하며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다 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난 날의 효도
삼상 22장 1~4절 / 이중표목사
사람이 사람됨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자세입니다. 사람이 그 일생에 가장 고상한 소원은 효자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 됨은 그 소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무슨 소원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의 인격도, 그 사람의 성품도 결정이 됩니다. '내가 부모에게 효자가 되리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효자가 되어서 복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효자들에게 주는 축복이 있는데 효자들에게 주는 최고의 축복이 '너는 내 마음에 맞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부모에게 효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효자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효자라는 것은 부모님의 마음에 맞는 자식입니다. 부모님 마음에 안맞는 자식은 효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꼭 들 들게 된 첫 번째 비밀이 그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자가 받는 첫 번째 축복은 아버지 마음에 꼭 맞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 아둘람 굴로 피난을 갔다가 거기에서도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모압 지방으로 가는데 자기 부모님을 데리고 갑니다. 가서 모압 왕에게 무릎을 꿇고 부모님을 부탁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모압 사람들을 짐승처럼 여기기 때문에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쟁과 시련 속에서 자기 부모님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닥칠까 해서 자기의 모든 수치를 감내하면서 부모님을 모압 왕에게 의탁을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도, 인간적인 수모도 다 감당하면서 시련 중에 부모님을 공양하는 위대한 효자됨을 보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효자됨을 통해서 받은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에 맞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사랑받고 인정받은 다윗이 어디에서 근거하고 있느냐? 부모님을 공경한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님의 마음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사무엘 선지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노라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가 베들레헴에 갑니다. 이새의 집에 가서 "이 집에 하나님께서 세울 왕이 있으니 아들들을 불러오라" 할 때 첫째 아들 엘리압이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이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용모가 준수하니까 그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아비나답, 셋째 아들 삼마를 데리고 왔는데 이도 안된다고 해서 일곱명의 아들을 다 사무엘 앞으로 데리고 왔으나 다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이새에게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새가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째 아들을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다윗이 왔을 때 성령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웠습니다.
다윗은 막내 아들입니다. 인물 좋고, 똑똑하고, 잘생긴 아들들을 다 제쳐놓고 막내 아들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왜 그랬느냐? 효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효자에게 갑니다. 재산 상속은 큰 아들에게 가는데 하나님의 축복은 부모를 섬기는 효자에게 갑니다.
땅에서 잘되는 자식들은 그 집안의 장자가 잘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면에서는 효자가 잘 됩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은 큰 자식이 잘 됩니다. 젊어서는 부모님이 힘있으니까 큰 아들에게 투자를 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식에게 모든 권세를 다 주니까 잘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큰 축복은 효자에게 갑니다.
예수를 만나는 축복을 받습니다.
다윗이 효자 됨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 만왕의 그리스도가 그에게서 태어나는 족보에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좁은 나라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전 인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축복인데 부모님을 공경하므로 예수를 만나는 축복을 다윗이 받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가문을 이루고, 하나님 공경하는 복을 받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업을 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인물이 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지식이 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찬양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예배입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때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저주는 비방하고, 헐뜯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부모도 몰라보는 자식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 섬겨야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을 잘 공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인데 청상과부가 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가 항상 어머니에게 대들고 불순종해요. 이 어머니는 자식 하나 믿고 사는데 어머니가 종종 눈물을 흘리고 교회를 와요. 그런데 그 아이가 교회는 잘 나옵니다. 교회에서 퉁탕거리면서 노는 재미로 나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는 잘 드리는데 대들어요. 한번은 그 아이가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 왔기에 제가 그 아이를 불러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면서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 믿지?" "예, 예수님 믿어요." "너는 이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믿지?" "예, 믿어요." "성경에 부모에게 대드는 자식은 죽이라고 했는데 너 그 말씀 아니?" "모르는데요." 제가 그 아이에게 출애굽기 21장 17절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네가 믿는다면 말씀대로 네가 죽기를 원하느냐 살기를 원하느냐" "안죽기를 원합니다." "네가 어머니에게 대들면 이 말씀대로 너를 죽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거냐" "목사님, 안대들께요." "너 한번만 어머니에게 대들면 이 말씀대로 죽는다." "예"
그 다음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저를 보더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묻지 마세요. 성경대로 했으니까" "완전히 아이가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서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부모 공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만 하나님 공경이 나옵니다. 부모 마음에 맞아야 하나님 마음에 맞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로 자기에게 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다 은혜가 됩니다.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천하에 불효자입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생명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격도, 재능도, 인물도 다 부모로부터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못된 성격을 받아가지고 내 인생살이가 힘들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불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자기 부모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는 그 죄지은 것을 어머니로 끌고 와서 어머니까지 죄인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죄인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로워지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부모님이 죄인된 것에 대하여 한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부모님이 죄인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모님의 죄인됨까지도 은혜로 받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수치스러운 것을 통해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 수치스러움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은혜로 받을 수 있는 효자가 될 때 하늘은 모든 축복을 그에게 부어 주십니다.
혹시 부모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나에게 좋은 것, 나쁜 것 다 우리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나쁜 것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은혜로 받아야 합니다. 이때 효자가 되는데 이 효자는 약점과, 상처와, 굴절된 자아상까지도 하나님은 높이 들어서 영광스럽게 바꾸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모로부터 받은 가난과, 연약함과, 모든 것 전체를 다 "하나님 아버지, 내 부모를 통해서 이 은혜를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이 사람은 모든 축복이 다 자기 것이 됩니다.
제가 그것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소원이 부모님에게 효자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저 자신의 모든 것을 복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제 인생 전체가 다 그것 때문에 받은 복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받은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에게 열등적 자아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은 부모님을 한 번도 원망을 안한 그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신비한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지만 왕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 속에 담습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자손 대대에 그 축복이 이어가기를 원한다면 부모를 원망하거나, 부모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은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관광지에 가면 효자손이라는 것을 판매하는데 이 효자손이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두피가 건조해지니까 몸이 가렵습니다.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이 유난히 몸을 긁어대는 것이 그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날 나이 드신 아버지가 등 긁는 것을 보던 아들이 아버지 등 긁는 모습이 딱해 보여서 대나무를 가져다가 구부려서 효자손을 만들어드렸습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효자손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이것은 당대의 축복이 아니라 자자손손 축복인데 최고의 축복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자식이 보므로 그 자식이 효도를 배웁니다. 최고의 영광스러운 가문은 효도의 가문입니다.
자자손손 효자 됨의 가문을 이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축복과 세속적인 모든 영광이 그를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정신없을 때도 가져야 할 정신
삼상 22장 1~4절 / 강문호목사
조그만 이스라엘 옆에 강대국 블레셋이 있었습니다. 불레셋은 틈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강대국 블레셋과 도저히 대결할 수가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블레셋에게는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거인이었습니다. 어느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고양이 앞에 쥐처럼, 뱀앞에 개구리처럼,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워 이긴 자를 사위로 삼겠다고 공포 하였습니다. 누구나 왕의 사위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싸우러 나간는 이는 없었습니다. 이 때 열일곱 살된 다윗이 용감하게 싸우러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보고 보고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온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쏠렸습니다. 사울은 시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으로 피하여 다닐 수 밖에 없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로 전 장인 사무엘상 21장에서는 라기스로 도망간 이야기입니다. 라기스 나라로 피하였더니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 보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골리앗을 이긴 사람이다.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다윗은 잡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문짝에 몸을 끍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침을 질질 흘렸습니다. 그랬더니 라기스왕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미친놈을 내게 데리고 왔느냐?" 그리고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이 아둘람이라는 굴로 도망하여 피하였습니다. 다윗이 그 곳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집안 식구들이 다윗을 보러 그 곳으로 갔습니다. 부모, 형제 모두가 함께 모였습니다. 그 때 아주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2) 생명의 위험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윗은 모압으로 같습니다. 그리고 왕을 만났습니다. 그는 왕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 그리고 부모를 왕이 보호하여 주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다윗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쫓기는 몸이었습니다. 잡히면 언제 주을 지 몰랐습니다. 다윗의 생애중에 가장 정신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1. 애국심 2. 신앙심 3. 효심 이 세가지입니다.
1. 애국심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잡히면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 환란당한 자, 빚진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 세 종류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윗이 그 곳에 깊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 가요? 한 마디로 말합니다. 알렸기에 알린 것입니다. 알리지도 않았는 데 알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사울밑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무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모이는 법입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끼리 모이게 마련입니다. 깡패는 깡패끼리 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였다는 것은 다윗이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여 주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여 주지 않는 데 모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400명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왕이 되는 데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군사들을 모집하여 사울 왕과 대결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사랑하였습니다. 군사를 모집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블레셋을 물리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은 블레셋을 물리치고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애국심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외침은 정말 진리입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있습니다.
(1) 예의 옛날에는 우리 나라를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 특별히 선진국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예의가 없는 민족인지를 금방 알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전철이나 버스를 타게 되면 남에게 방해가 될 가봐 80%가 핸드폰을 끈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켜는 사람은 반드시 진동을 하여 놓고 말은 하지 않고 들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기차나 버스에서 잘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무한할 정도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집안에서도 결코 자기 마음대로 TV 채널을 돌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양해룰 하고 돌립니다. 어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자기 보고 싶은 프로로 가지 않습니다. 한국 부부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독일에 갔습니다. 어느 가정에 들어 갔을 때 아이들이 TV앞으로 가더니 보고 싶은 대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 그 집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서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들로서는 상상도 못 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스트리아에 갔다가 전차에서 유치원 생들을 데리고 실제 교육을 시키는 선생님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전철 의자에 앉힙니다. 그러면 다리가 짧으니까 다리가 뜹니다. 그러면 신발로 남의 옷을 건드리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이면서 의자에 앉으면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반드시 신발을 벗고 앉는 것이라고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생각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큰 일입니다.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월드컵 행사는 가장 큰 행사라고 합니다. 손님들이 일본과 우리나라를 오고 갈 텐데 금방 비교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필리핀하고 우리하고 공동 주최하였으면 우리가 올라 갈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문제는 예의입니다.
(2) 사상 우리 민족을 생각하는 이들이 염려하는 것중에 첫째는 예의이고 둘때는 사상입니다. 5월 월간 조선에 우리나라에 좌익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이 400만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산 사상은 지금 허물어졌습니다. 공산사상의 원조인 쏘련이 붕괴되었습니다. 중국도 무너졌습니다. 루마니아도 이제는 민주화되었습니다. 유독 이북만 공산주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없어져야 할 유물론적인 사상입니다. 다같이 잘 살자고 하는 사상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곳이 이북입니다. 공산사상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내세를 부인하는 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제일의 적은 공산주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공산화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1,200만명, 43,000 교회가 있는 한 결코 우리나라는 공산화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만 그러나 너무나 공산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염려스럽습니다. 최근 탈북자 소식을 저는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이 잡히게 되면 과거에는 코에 철사를 꿰어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니까 코를 베어 버리고 도망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코없이 사는 것이 차라리 잡혀가서 죽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입으로 철사를 넣어서 목으로 빼어 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북에 가서 장작을 쌓아 놓습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위에 탈북자를 묶어 올려 놓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불을 붙이게 합니다. 그 때 만일 부모 표정이 이상하면 끌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리고 어떤 광장에는 탈북자를 종이 말 듯이 돌돌 말아서 사과 상자에 넣어 광장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어느 관광객이 글을 써서 공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북은 미치광이들이 사는 집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지난 번 독일 기자가 이북에서 쓴 일기를 출판하면서 그 제목을 <미친 곳에서 쓴 일기>라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을 막는 길은 오직 복음화 전도밖에 없습니다. 염려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3) 집단 이기주의 우리 민족을 놓고 기도할 때 세 번째로 염려스러운 것은 집단이기 주의입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안 하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미군은 우리나라에 주둔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지역은 안 된다고 지금 우리 송파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땅이 좁아서 화장하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면서 화장터가 강남구에 들어 와서는 안 된다고 우리 옆에서 데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집단이기 주의입니다. 손해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점이 예의, 공산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이런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정신없이 쫓겨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중에도 나라를 살려 보겠다고 군사를 모집하고 힘을 기르는 모습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2. 신앙심 다윗은 이리 저리 정신없이 피해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음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압 왕에게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 라고 말한 것을 보아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애국심 그리고 신앙심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극심한 전쟁중에서도 기도를 잊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싸우면서도, 정신없이 전쟁하면서도 시간을 정하여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텐트에 손수건이 걸려 있으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도 들어 갈 수가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정신없어도 신앙심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호서대학교 총장님이신 정 근모 장로님이 최근 책 한 권을 썼습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진실한 크리스챤이 되고 싶다>라는 책입니다. 정 근모 장로님은 글자 그대로 천재입니다. 경기고등학교를 일등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서울 대학교 문리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미시간대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석사를 할 필요가 없어서 직접 박사 코스로 들어 갔습니다. 6개월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4살에 대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천재입니다. 그가 미국 생활을 하던 중에 생긴 일입니다. 10살 된 아들이 신부전증에 걸렸습니다. 정 장로님은 아들에게 자기 신장을 한 개 빼주었습니다. 그런데 콩팥이 맞지 않아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주사를 놓으려고 하니 다른 곳에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주사를 놓을 수도 안 놓을 수도 없어서 의사들은 갈팡지팡, 안절부절하였습니다. 아들이 이제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두가 새파랗게 질려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교회 기도할 일이 있으니 기도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의 사정을 알고 있을 터인데 야속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아내가 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아들이 지금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가는 데,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데 어떻게 이 자리를 떠나요?" 아내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아들이 낫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아들 옆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둘이는 같이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깨끗이 나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신앙심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정신없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신앙심만은 잃지 않았던 다윗을 오늘 만나야 합니다.
3. 효심 다윗은 생명의 위험속에서도 부모를 돌보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이 곳 저 곳으로 정신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효심만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모압 왕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 부모가 다윗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부모를 돌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편안할 때 효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효도한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조 숙종은 민정시찰을 밤에 잘 하는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하를 데리고 나가지 않고 혼자 민정을 살피러 자주 나가곤 하였습니다. 숙종 시대 효자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민정을 시찰하고 있는 한 소녀가 얼음이 꽁꽁 언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여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있는 데 물고기를 잡수시고 싶다고 하여 얼음을 깨고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숙종은 그 소녀의 효심에 감동을 받고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마을에 불효자 아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때리기까지 하는 극심한 불효자였습니다. 그 불효자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낚시질을 나갔습니다. 그 날도 숙종이 민정을 시찰하다가 그 아들을 만나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 계신 데 물고기를 잡수시고 싶다고 하여서 낚시질을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숙종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신하에게 조사하여 보라고 말했습니다. 신하가 그 집에 가서 보니 아들이 물고기를 갖다 어머니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그 물고기를 받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놈아! 밤낮 때리기만 하고도 이렇게 상받으려고 흉내를 내면 되냐?" 신하가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몹쓸 놈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 때 숙종이 말했습니다. "효도란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다. 상주어라" 그래서 그에게도 상을 내렸습니다. 나는 모스코바 박물관에서 인상깊은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그림앞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머문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은 선정적인 그림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쇠창살 틈으로 한 아름다운 여인의 젖을 빠는 모습의 그림이었습니다. 안내자는 이 그림의 뒷이야기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반역죄로 굶어 죽이는 형을 받았습니다. 가장 잔인한 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굶어 죽을 때가 되었는 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몰래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매일 면회와서 아버지에게 자기 젖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자기 젖먹는 아이에게는 우유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었고, 딸의 지극한 사랑의 감동으로 아버지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효도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허 은 목사는 허 석현 장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허 은은 신학교에 들어갈 만한 실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컨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피어선 신학교에 시험을 치루면서 남의 것을 보면서 시험을 치루다가 선교사에게 걸렸습니다. 허 은은 말했습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나를 목사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신데 실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효도하려고 하다가 그랬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교사는 입학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는 실력은 없었지만 설교에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첫 임지인 평북 철산군 백양면 풍천리 풍천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세가지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세 가지를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모형이 된 신자
삼상 22:1~5 / 김창인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 신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그림자가 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5년 전 성지 순례 때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두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문화 예술 4천년 전'이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예술이 4천년 동안 어떻게 내려왔느냐! 그림도 있고 조상들이 만든 온갖 기구들이 다 있어, 한국 문화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죠. 그런데 한국의 4천년 전시회라고 하는데는 사람이 한산합니다. 좀 쓸쓸하더군요. 그런가 하면 이집트, 즉 '애굽 문화 전시회'도 있었습니다. 애굽의 문화 전시회에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그 넓은 광장에 줄을 지어 누워서 그 자리에 담요 쓰고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 그렇다고 밤을 거기서 잘 수는 없겠고, 그렇지 않으면 애굽에 갈 것이니 거기 가서 볼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 갔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은가 했더니 세계 인류 문화를 말할 때 애굽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가보니 박물관에 기가 막힌 수 천년 된 유물들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 전 전시회하기 전에 애굽 왕 터튼의 무덤을 발견하고 관과 온갖 유물을 다 끄집어냈었습니다. 그것을 전시하는데 대단한 인기입니다. 터튼 왕은 19살에 죽었습니다. 그의 관은 3중으로 봉합되어 있었는데 맨 겉과 중간은 금으로 입혀 있고 마지막 속의 것은 순금으로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사람 모습을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시신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걸 발견해 낸 것이죠. 진짜 그렇게 해놓았다가 도둑 맞으면 안되니까, 진짜는 잘 보관해 두고 전부 그대로 본 떠서 모조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는 이 모조품을 보면 진품 보는 것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다윗을 보게 되면 예수님과 매우 많이 닮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이래야 되겠다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I. 가정적인 신자 (1절)
1절에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상당히 신성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신성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하나님이 짝을 지어서 가정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신성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존 프랑소와 밀레가 그린 '만종'에 지금 막 해가 넘어가는데 넓고 넓은 들판 저 건너편에는 예배당이 있고 두 내외가 밭에서 일하다가 조그만 리어카에 열매를 따놓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있죠. 기도하는 것 종교는 신성하다는 뜻이고, 일하는 것 노동은 참 신성하며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다 일하는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놀고 먹는 것이 부끄럽지 일하고 먹는 것이 왜 부끄럽습니까. 노동은 신성합니다. 가정은 신성합니다. 집에 밀레의 그림이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내 위치를 지켜야 하며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그렇다고 해서 기도도 하지말고 교회도 등한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회 생활은 그 나름대로 충실히 하면서 가정에 들어가서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 가서는 가정에 충실합시다. 성경 배우는 시간에는 성경 배우고 집에 돌아가서는 가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30년 동안 얼마나 가정에 충실했습니까? 참 충실했던 분입니다. 가정이라는 곳은 어느 단체에서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평화와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희망, 이것이 뭉쳐서 이루어진 곳이 가정입니다. 바로 가정의 한 구성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한평생 가정을 갖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깨져 나가는 것,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자기 위치에 충실하고 부모와 자식이 자기 위치에 충실할 때에 참 신자요, 바로 믿는 신자요, 예수님을 닮은 신자입니다.
어느 부흥회에 갔더니 우리 교회에서 자라 제가 주례를 했던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예배 마친 다음에 강사 방에 와서 참 반가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저 아무 아무개의 아들입니다. 저 광성교회에서 세례 받았습니다 하고 찾아오면 얼마나 반가운지요. 그 내외와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그는 " 목사님 우리 집사람한테 불만이 많습니다. 보통 불만이 아닙니다." 그래요.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때려 줘요, 여자는 때리며 살아야 부드러워지는 거요!" 했더니 " 아니 목사님 그것도 아니구요" 하더군요 (제가 때리란다고 진짜로 가서 때리란 말 아닙니다.) 자기 아내 화장 안 한 얼굴 좀 보고 싶은데 다 뒤집어 씌워 놓은 것만 보여 준대요. "오로지, 순수한 것 그것 좀 보고 싶은데 이걸 좀처럼 보여 줘야죠" 합니다. " 그것이 무슨 소리요?" 했더니 아침에 자기 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 다 차려 놓고 벌써 화장대 앞에 간답니다. 화장을 다 하고 옷 갈아입고 깨운답니다. 매일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나갈 때에는 손 흔들어 주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남편 돌아올 시간 되면 또 한번 화장하는 겁니다. 옷 갈아입고 마중 나오고, 얼마나 남편에게 정성인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회사에 나가서 옆에 앉은 미스 리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상관없습니다. 바람나라고 해도 안 납니다. 한국의 남자들 바람 피우는 것은 여자가 90퍼센트 책임져야 됩니다. 남편이 바람나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나 자기 탓으로 시험에든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잘해야 됩니다. 남편한테 충실하라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 분이 다시, "우리 누님 알지요? 우리 매형 바람 난 것도 목사님 아시죠?" 합니다. "속 썩는 것도 압니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내 누님이지만 나 같아도 바람납니다. 머리는 광주리같이 해 가지고, 항상 옷은 제일 떨어진 것만 입고 세수를 제대로 하나...." 회사에 나가 옆에 앉은 미스 김이 아양떨면 안 넘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분 나름대로 이야기한 것 조금 웃음 섞어서 이야기했지만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정에 충실하십시오. 가정에 충실한 신자, 참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둘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1절). 다윗은 쫓기는 몸입니다. 지금 자기의 생명도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아둘람 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도 가족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항상 쫓겨다니는 신세,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늘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 내 가정을 버려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절대 그 이유를 허락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가정과 함께 동고 동락하는 그런 신자, 이것이 예수님의 모형된 신자인 줄 믿습니다.
II. 친구 되는 신자(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4백명 가량이었더라"(2절)
여기 보니까 그렇게 쫓겨다니고 도망 다니는 다윗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몰려오는 사람들의 내용을 보니 세 가지입니다.
① 환난 당한 사람 : 사울이 얼마나 학대를 하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다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② 빚진 사람 : 빚지고는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③ 마음이 원통한 사람 : 이가 갈리고 원통한 일이 있지만 갚을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가게 되면 다윗이 친구가 돼 준다는 것입니다. 환난 당한 사람, 빚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풀 길이 없는 약자, 옆에 있던 친구도 다 멀리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소외당해서 외로움에 울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가면 다 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전국 각 처에서 몰려드는데 4백명 가량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공한 사람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는 것, 내가 출세한 사람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는 것, 내가 한 그릇 사 주니 너도 한 그릇 사준다. 끼리끼리만 모이는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 음식을 차리거든 전혀 갚을 길 없는 사람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갚을 길 없는 사람을 청하여 대접하면 돌아갈 때 얼마나 진정으로 축복하겠느냐 그것입니다. 그럴 때 돌아오는 것은 밥 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게 문안하는 사람을 문안할 때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게 무엇입니까? 세리와 죄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합니다. 믿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니까 다윗에게 몰려오긴 몰려오는데 주면 줬지 받을 것이란 하나도 없는 사람들, 약자, 곤궁한 자, 그리고 궁지에 몰린 사람, 이런 사람에게 다윗은 친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동네마다 가게 되면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죄인들이라 해서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세리가 지나가면 침을 뱉고 욕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은 친구가 되어 줍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인 신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벨기에 출신 가톨릭 신부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다미엔입니다. 이 사람이 젊어 신부가 되어 소명감에 불타 선교부를 찾아가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냐 했더니 미국 땅 하와이로 선교하라고 보냈습니다. 선교차 하와이로 가봤더니 하와이 섬 바로 옆에 몰로카이 섬이 있습니다. 이 몰로카이 섬은 그때 당시 문둥이들만 보낸 곳입니다. 백년 전 이야기인데 그때 문둥병은 약으로 못 고쳤습니다. 문둥이들이 전국을 다니며 병을 옮기니까 걸렸다 하면 그리로 보냈습니다. 의료 시설이 제대로 없는 이곳에 가면 죽어서 송장도 못 돌아오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절망, 좌절에 빠져서 싸움질하고 원망 불평, 한마디로 문둥이 지옥입니다. 가보니까 옆에 있는 몰로카이 섬이 바로 그 지경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하와이가 아니고 거기로구나, 자원해서 갔습니다. 선교부의 승인을 얻어 가지고 갔습니다. 가서 예수를 전했는데 예수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나에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 같이 건강한 사람, 호화로운 사람, 당신같이 복 받은 사람에게 필요하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예수가 왜 필요하냐고 하면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일년 이년 지나도 헛수고입니다. 그럴 때에 안되겠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 나에게 문둥병을 주십시오'입니다. 문둥병을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 한 번은 일어나 보니 문둥병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같으면 상상도 어렵다 하겠지만 그 사람은 할렐루야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내가 문둥병이 걸렸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니, 그때에는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바로 살아 보자, 남은 생애지만 바로 살아 보자, 우리도 문둥이지만 참되게 살자, 우리에게는 이 땅 위의 소망뿐 아니라 영원한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여튼 지옥인 줄 알고 들어왔던 사람들, 문둥이의 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둥이라고 하면 이제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럴 정도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미엔이 문둥이 지옥을 문둥이 낙원으로 만든 것은 왜 그렇습니까?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먹어도 같이 먹자는 것입니다. 싸워도 같이 싸우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나라를 세워도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형 된 신자입니다.
III. 효도하는 신자(3 - 4절)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3 - 4절).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가르쳐 주려고 할 때에 자기가 직접 가르쳐 주셨고 또 우리들의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과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은 한창 뜨겁고, 좋을 때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틀려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온갖 욕이란 욕을 몽땅 주워 모아다가 다 부어 버립니다. 제 자식이 조금 나하고 틀렸다고 욕하는 부모 보았습니까. 온갖 욕 주워다가 벼락치듯하는 부모 봤습니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근사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어머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에 자기의 생명으로 여깁니다. 네 살은 내 살이다, 네 피는 내 피다, 너는 나를 나누어 가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소망을 네게 다 걸었다는 것입니다. 네 성공이 내 성공이고 네 실패가 내 실패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다르게 베풀어지는 사랑, 이렇게 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전해 주신 부모님께 효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공경할 줄 모릅니다. 부모님을 몰라보면서 박사 학위를 붙이고 다닌들 그 사람이 사람이냐 그 말입니다. 박사 학위 열 두 개나 받았다고 자랑하며 으시대지만 부모님의 노고를 모르고 부모님께 효도할 줄 모른다면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라고 하면 첫째 계명이 부모님께 순종하라, 보이는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겠느냐, 보이는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느냐, 그런 신앙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부모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모님께 순종하라고 하면서 조건을 붙이길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하십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식된 도리로 할 일이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반영이 바로 부모님께 대한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형이 된 신자입니다.
예수님도 30년 동안 부모님을 잘 모셨습니다. 동생들 잘 거느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을 때도 "어머니여 제가 아들입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이제부터는 네 어머니다, 네가 좀 모셔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의 어머니를 염려하시며 제자에게 부탁하시던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도 다윗이 자기 부모님을 모셨습니다. 지금 모압 땅에 들어갔지만 모실 재간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모압 임금님을 찾아갔습니다. 모압 땅은 자기 증조 할머니 되는 룻의 모국입니다, 고향입니다. 왕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하여 어떻게 하실 것은 내가 알기까지 부모님을 여기 모시도록 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안전하게, 전쟁터에서도 안전하게 먼저 생각하고 먼저 모시는 효성, 십자가의 그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어머님 생각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IV. 순종하는 신자 (5절)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5절).
본분은 선지자 갓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다윗에게 전해 주고 다윗은 그 말씀을 받아서 순종하며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고 다른 곳에 보게 되면 항상 갓이라는 선지자가 나올 때에는 '다윗의 선견자 갓'이라 나옵니다. 이 말은 다윗은 어디로 피난 다니며 어디로 망명 생활하든지 간에 꼭 선지자 갓을 모시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싶은 말은 꼭 선지자를 통해서 묻고 하나님의 말씀 듣고 싶은 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듣습니다. 선지자는 그 말씀 받아서 전해줍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모압 땅에 있지 말라,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 있는데 네 생명이 위험하다고 해서 그곳을 벗어나서 모압 땅에서 신세질 이유가 뭐냐 이것입니다. 유대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에 모압 땅은 안전합니다. 사울의 통치가 미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해할 자가 없습니다. 안전하다고 피난 나온 곳입니다. 그런데도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위협과 고난이 미칩니다. 누구의 밀고를 받아 칼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네가 살 땅은 위험해도 거기라는 것입니다. 괴로워도, 고생스러워도,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가라시면 가겠습니다. 죽을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과 뜻이 있을테니 내가 믿고 순종하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 죽음을 놓고 얼마나 고민합니까? 나는 십자가 지기 싫고 죽기 싫은데 하나님은 지라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십자가 지고서 가셨습니다. 죽으러 가라고 합니다. 십자가 지러 가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굉장한 계획, 엄청난 의도가 계셨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 죽음의 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는 하나님께 믿고 순종하는 우리가 돼야 할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정에 충실하였고, 불행한 자에게 친구가 되었고,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을 닮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예수님을 보여주는 편지 또는 그림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위기-정면으로 승부하라
삼상 22장 1~5절 / 안효관목사 벧전 5:8-9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에 보면 이랜드 그룹 박성수 회장의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0년도에 이화여대 앞에서 2평 남짓한 작은 옷가게에서 시작한 그는 2004년 총 매출이 3조원을 예상하고, 1년에 1300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국내 최고의 의류산업을 이룬 대기업의 회장입니다. 이랜드가 기업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기업이 되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세상에 모범이 되고 빛과 소금이 되는 기업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박성수 회장의 경영철학입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중장부를 만들고 정치권에 로비를 하고,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기업을 유지하려 할 때에, 철저하게 정직이라는 신념 하나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기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려는 이랜드 기업에도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우리나라에 IMF라는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였습니다. IMF가 시작되자 은행에서는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각 기업에 대출해 주었던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랜드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IMF를 맞으면서 매출이 떨어진데다 은행에서는 돈을 회수해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세워졌던 매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보증금을 돌려주어야 하고, 일부 회사를 정리하면서 직원들의 퇴직금을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회사에 돈이 말라서 부도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박성수 회장의 표현으로 한다면 IMF가 터진 다음해인 1998년 4월부터는 ‘사막’과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 때 박성수 회장과 이랜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 줄기를 내 주시겠다”는 이사야 43장의 말씀을 붙잡고 지금의 광야와 같은 상황에 길을 내 주시고, 사막과 같은 여기에 강을 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은행에서는 부도가 나기 전에 박성수 회장을 피신시키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은행에서는 그래도 정직하게 기업을 해온 박성수 회장을 배려해서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갇히느니, 지금 몸을 피신한 후에 후일의 기회를 기다리라고 충고를 해 준 것입니다. 회사 내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피신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안 됩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부도를 내고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웠지만, 더욱 두려웠던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경영하는 회사라고 알려진 이랜드 기업의 회장이 부도를 맞고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도망쳤다는 부끄러운 소리를 듣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망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망신을 당하거나 이랜드라고 하는 회사가 망신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하나님께서 망신을 당한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부도를 피해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앞문이 막히고 옆문이 막히고 뒷문이 막히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신다”는 헬렌 켈러의 말을 생각하고는 도망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부도나기 직전에 외국인 투자자가 찾아온 것입니다. 은행에서는 빌릴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을 이랜드를 위해서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 회사는 5억불이라는 어마어마한 현금을 들고 와서 10분의 1인 5천만 불을 이랜드에 투자한 것입니다. 당시 5천만 불이면 이랜드 기업 전부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그런 돈을 자기 회사에 투자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랜드 기업에 투자한 5천만 불을 제외한 나머지 4억 5천만 불을 그 어떤 곳에도 투자하지 않고 1년 동안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회사들을 사면 헐값에 살 수 있는데, 왜 사지 않습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랬더니 그 외국인 투자가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사고 싶습니다. 사고 싶은데, 막상 사려고 하면 장부가 두 개여서 믿을 수 없습니다.” 그 외국인 투자가가 이랜드에 선뜻 5천만 불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장부가 하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회사를 경영하니까 하나님께서 외국인 투자가를 통해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 정말 어려웠을 때 내가 피신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창피한 노릇입니다.”
박성수 회장의 이랜드 기업은 그렇게 해서 IMF를 이길 수 있었고, 지금은 8개의 법인 기업체에 50여개의 브랜드와 2500여개의 매장을 가진 한국 최고의 의류산업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숱한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은 커다란 위기 앞에서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별로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작은 위기를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 강도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숱한 위기의 길을 걸어왔고, 또 위기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위기 앞에서 마음 졸이며 기도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 문제 때문에, 가정이나 자식의 문제 때문에 힘들어 신음하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날로 어려운 때에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 문제를 이렇게도 외면하시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회피해버린다면 문제가 쉽게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회피한다고 그게 정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겠습니까?
기독교신앙을 가진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그걸 피해 가려 하지 마라. 피해 가려 하면 그것은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것이지만, 정면으로 뚫고 가려 하면 그것은 우리 앞에서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려움을 만나면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어려운 문제 앞에서는 뒷걸음질치게 되고, 심지어는 어려움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문제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를 믿음으로 이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골리앗 장수 앞에서 오금이 저려 절절 매고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에 용감하다고 하는 장수들 모두 그 골리앗 앞에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골리앗과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 2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의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그 골리앗을 가만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그렇게 용맹스럽고 믿음 좋은 다윗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힘든 문제가 그를 괴롭히자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이 당한 문제를 피회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는 신세입니다. 갈수록 다윗에게는 두려움이 엄습을 하고 힘든 일들이 겹겹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22장의 바로 앞인 21장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미움을 사서 도망치던 다윗이 ‘놉’이라고 하는 고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급히 피신하느라 피곤하고 허기진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피곤하고 허기진 다윗에게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기운을 차린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찾아낼 것같은 두려움 때문에 거기에 계속 머물 수 없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했습니다. 가드로 도망한 다윗은 거기에서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가드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다윗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몸을 비틀고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해서 급히 가드를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1절에 나온 것처럼 아둘람 굴로 도망쳐 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가족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본문 2절에 보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사울이 통치하는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 다윗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이 무려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도망자 생활을 해야 하는 다윗에게 든든한 후원자와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이 있다고 해서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사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 주변에 몰려 있다는 것은 사울왕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압 왕을 찾아가서 망명을 요청합니다. 모압 왕이 다윗의 망명을 받아들이자 자기 부모를 모시고 모압 지역으로 옮겨갑니다.
여러분, 왜 다윗이 이방 땅인 모압으로 부모와 함께 망명해 갔겠습니까? 왜 자신이 자라온 고국을 버리고 이방 나라로 망명을 가야 했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더 이상 붙어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400여명의 장정들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 사울 왕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험난한 상황을 극복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압으로 망명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갓 선지자는 지금 다윗이 머물고 있는 그 모압 땅을 “요새”라고 말합니다. “요새”라는 말은 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만들어 놓은 피난처를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모압이 자신의 요새와 같았습니다. 사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 모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18: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의 요새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으로 요새를 삼지 않고 모압으로 요새를 삼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그 아름답던 믿음은 사라지고 모압이라는 세상을 의지하여 모압으로 자신의 피난처요 요새를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서 ‘네가 피난처요 요새를 삼고 있는 이 모압 땅을 떠나 유다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다는 어떤 곳입니까? 사울 왕이 자신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입니다. 사울 왕궁이 가까이에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다윗에게 그 유다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로 올라가는 것이 어쩌면 더 위험한 일일 것입니다. 사울 왕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신해 왔는데, 다시금 사울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사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모압을 떠나 유다로 갑니다. “다윗이 (모압을)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라고 본문 마지막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유다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절인 6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사울은 다윗을 죽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모압을 떠나 고향 유다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 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예견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평안하게 생활하는 모압을 떠나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다윗이 모압 땅에서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압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피난처와 요새를 삼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좋았던 다윗도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모압을 의지했습니다. 세상을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해서 어려움을 이겨보려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어려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눈앞이 큰 위기와 어려움을 당하면 평소 가졌던 믿음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거나 믿음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데 때로는 그 인도하시는 길이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이 겹겹이 우리의 삶에 연속되고 있다면, 우리는 가만히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가? 내가 한 행동이나 나의 생각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가?’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유다로 보내신 것은 위기를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위기를 피함으로 위기가 사그러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피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풀어지는 문제가 아니라면 정면돌파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사울 왕을 대신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에 요새를 틀고 자리를 잡는다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그게 다윗에게는 커다란 정치적인 오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서둘러 선지자 갓을 보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직접 가서 맞서 싸우라고 되돌려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맞서 싸운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권력이 없지만, 다윗의 생명을 찾고 있는 사울은 ‘왕’이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400명의 용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아히멜렉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칼 한 자루 뿐이었습니다. 다윗이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바로 그 칼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잘 훈련받은 정예부대가 있습니다.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입니다. 그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로 몰아넣어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이미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도 다윗에게는 골리앗과 싸울 힘이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나가 싸웠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가졌던 그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 앞에서 회피하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정면 돌파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정면 돌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겼습니다.
지금도 그런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최선의 길이요, 그렇게 해야만 다윗의 앞날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면한 문제 가운데,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 회피하고 싶은 것이 있을지라도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면 피하지 말고 맞서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영적인 싸움에서는 회피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우리의 영적인 싸움 상대인 마귀는 결코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마치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으며 먹이를 찾아나서는 것같이, 마귀도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마귀를 피해 숨는다 해서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안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숨든지 마귀는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맞서 싸우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반석이시요 능력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게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위기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날마다 천정부지처럼 치솟는 국제유가가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이 시대에 하시는 일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으십니까? 가정이나 자녀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앞에 있는 그 어떤 위기나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믿음으로 맞서 싸우면 우리가 당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압이라는 세상의 요새에 머물러 문제를 회피하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힘은 비록 작을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여전히 문제와 위기가 남아 있는 유다로 가서 믿음으로 맞서 싸워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골리앗과 싸워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믿음으로 맞서 싸워 승리하시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한 없는 영역
삼상 22장 3~4절 / 김우영목사
기독교인들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희생하며 훌륭하게 교육시켜야할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날 낳으시어 사랑으로 양육하시고, 희생하며 교육해 주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할 의무와 책임도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을 피하여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다가 아둘람 굴로 도망합니다. 이때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 다윗에게로 이르렀고, 다윗은 부모님의 안전을 위하여 모압왕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모압왕과 함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고,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십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본이 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피난길에서도 부모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지극한 효자로서 후대인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는 어떤 환경, 조건, 상황, 처지 상태에서도 제외, 제한 될 수 없습니다. 자녀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부모님께 효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나' 로서의 생활인입니다. 그래서 ‘효'는 제한없는 영역입니다.
효(孝)Ⅰ : 누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될 하나님의 명령이십니다. 다시말하면 효도는 높아진 자, 부자된 자, 가난한 자, 실패한 자, 슬픈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온 인류가 준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효도'함에서 제외된 인간은 없습니다. ‘부모'라는 위치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 받은 자리이며, 권위를 부여받은 직위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불순종, 불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효'가 하나님을 섬기는 첫걸음입니다. 지금 내가 부모가 되었을지라도 나는 과거에 자식이었고 지금도 자식으로서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 효도하면 가문을 복되게 하시고, 복이 아름답게 계대 되어 내려가게 하십니다. 효자, 효녀 치고 악한 사람 없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하신 계명은 꼭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이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국이 필리핀을 공략하기 위해 한 척의 군함을 출항시키려는 순간, 한 수병이 갑자기 바다로 뛰어 들려고 했습니다. 함장인 드웨이 제독이 수병에게 까닭을 물으니 상의가 바다에 떨어져 건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드웨이 제독은 그가 탈영하려는 것이라고 생각, 상의를 건져오지 못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수병은 제독의 명령에 불복종, 바다에 뛰어들어 겉옷을 건져 왔고, 군기를 문란케 한 죄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드웨이 제독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귀관은 하찮은 상의 때문에 군기를 거스를 수 있는가?" "낡은 사진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보이며 제가 바다에 뛰어듦은 겉옷 때문에가 아니라 겉옷 주머니에 있는 제 어머님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수병의 말에 크게 감동한 드웨이 제독이 수병을 용서하며 한 말입니다. "어머니의 사진 한 장 때문에 생명의 위험도 불사한 이 사람은 부모와 같은 조국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 할 군인이다" 요셉, 모진 고난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늘 아버지를 생각했으며(창43, 47장), 결국 아버지를 바로에게 안내하여 기름진 고센 땅에서 편안히 사시게 한 효자였습니다. 룻, 남편도 죽고,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기어코 좇아가서 지극히 모셨고,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룻1-4장).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도 어머니께 ‘효'를 행하셨습니다(요19:25-27). 요즈음 우리나라에 ‘아들이 하나면 뒷방에서 죽고, 아들이 둘이면 길바닥에서 죽는다' 라는 말이 돌고 있답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많건만 어찌 이러한 세상이 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준행하고, 본이 되어, 이를 모르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내 행동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믿음의 사람은 부모님께 효도를 아니치 못합니다.
효(孝)Ⅱ : 언제나
‘효'는 누구나 해야할 의무요, 책임인 동시에 언제나 행해야 할 의무요, 책임입니다. ‘효'란 효도할 수 있는 형편에서는 하고 ‘효도'치 못할 형편에서는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 는 내가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든지 무조건 이해해야만 합니다. 다시말하면 ‘효'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천 되어야 할 전천후에 속한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평생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만약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사랑없이, 사명없이, 억지로, 부모를 모시려고 하면 위선자가 될 것이며, 부모를 증오, 학대, 상처를 주는 불효자가 되기 쉽습니다. 부모가 병들었다고, 내게 잘 못했다고, 부모를 등지려 한다면 좋은 미래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자식된 ‘나'는 부모를 섬겨야 할 ‘나'입니다. 지금 내가 부모님을 대하는 행위는 훗날 내가 자녀들에게 받을 모습입니다. 지금의 내가 ‘효도'하냐 '불효'냐 는 미래의 내가 받게 될 결과입니다. 분명 내 자녀들은 내가 내 부모님께 행한 그대로 내게 할 것입니다. 지금 나의 화살은 어느 쪽 과녁을 향하여 있습니까? ‘효'쪽입니까? 불효 쪽입니까? 내가 쏘는 쪽을 따라 내 자녀도 똑같이 쏩니다. 힘들어서 도저히 부모를 못 모시겠다구요? 십자가의 삶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희생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인들이 아닙니다. 보통사람은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들, 보통인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부모님께 지금 효도하십시오. 지난 날에 불효 했을지라도 지금 돌이키면 됩니다. ‘효도'란 내일, 내 주일, 내년으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바로 입니다. 지식도, 돈도, 부부도, 생명도, 늙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50대가 되면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가 같아지고, 60대가 되면 잘생긴 자나 못생긴 자가 같아지며, 70대가 되면 부부가 있으나 없으나 같고, 80대가 되면 돈있는 자나 없는 자가 같고, 90대가 되면 산 자나 죽은 자가 같답니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모두 마찬가지랍니다. 1988년 러시아에 갔을 때 모스크바 박물관에서 늙은 남자가 쇠창살름으로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이상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사연인즉, 노인은 정치범으로 굶어 죽는 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는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굶어 죽을 때가 되었음에도 그 죄수는 죽지를 않더랍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간수가 그를 주시해 보았더니 젖먹이 자식을 둔 딸이 매일 아버지를 면회와 젖을 먹이더랍니다. 이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었고, 딸의 지극한 사랑은 아버지를 풀려나게 했답니다.
며칠전 TV에서 사랑하는 남녀의 대화를 보았습니다. 여자가 '00씨 내일 나한테 시간좀 내줄 수 있어?' 라고 하니 남자가 '이 바보야 내 것은 몽땅 네것이야' 라고 하더군요. 나의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위로는 모두 하나님 것이요. 아래로는 부모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효도할 수 없을까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6)"
효(孝)Ⅲ : 결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어떤 결과는 어떤 원인으로부터 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명령 속에는 하나님의 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심은 약속의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나는 ‘부모를 공경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이행하면서 어찌 내 자녀의 복을 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행복 뿌리는 하나님을 섬김이요, 부모께 효도하는 삶입니다. ‘효의 복'은 만인에게 공개된 비밀입니다. 제한 없는 영역의 의무와 책임 이행자는 제한 없는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효'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들에게 주신 과제입니다. 인생최대의 사업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입니다. 이 사업을 잘하면 인간들이 가장 원하는 소원인 장수의 복, 잘 됨의 복을 소유케 됩니다. 영육사업의 성공 비결은 먼저 하나님을 섬김은 물론이요 ‘부모를 공경함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함은 결국 내 복이요. 나의 유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목적이 하나님나라 확장이요, 하나님 영광이 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등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가치는 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 책임, 사명을 다하는 삶입니다. 내 미래는 쉬지 아니하고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어떻게 만드시렵니까? 내 미래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미래를 복의 미래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민정 시찰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진 숙종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겨울밤 숙종이 민정 시찰을 나갔답니다. 헌데 어떤 사람이 그 추운 겨울 밤에 꽁꽁 얼은 강을 깨고 낚시를 하고 있더랍니다. 숙종은 신하에게 그 사연을 알아 오게 했습니다. 까닭은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답니다. 숙종은 궁으로 돌아가서 그 효자에게 큰칭찬과 상금을 하사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망난이 불효자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효자가 숙종대왕으로부터 큰칭찬과 상금 받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매일 밤 고기를 낚으러 강으로 갔습니다. 숙종이 또 민정 시찰을 나와 보니 또 어떤 사람이 한 밤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숙종이 신하를 시켜 그를 가만히 따라가서 사정을 살피도록 했습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께 어머니 잡수시라고 물고기를 잡아왔다고 하니 그의 어머니가 "야 이놈의 새끼야! 물고기 잡아올 생각 말고 제발 내 속이나 썩이지 말아라"라고 하더랍니다. 신하는 그대로 왕에게 보고 했지요. 헌데 신하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숙종은 불효자식에게 벌대신 상금을 하사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폐하, 어찌 그런 ! 못된 자식에게 상을 내리시옵니까?" 라고 아뢰었습니다. 숙종대왕의 말입니다. "아니다. 효자는 아니지만 효자를 흉내라도 내려고 한것도 대단한 거다" 지금까지 효도하지 못하셨습니까? 효자 효녀 되기를 기도하며 흉내라도 내 보십시오. 어느사이 효도하는 '나'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닮고 싶어 그 사람을 흉내내면 흉내 내다가 그 사람처럼 됩니다. 효도? 제한 없는 영역. 대상? 누구나. 때? 언제나. 효도함에 있어 이유, 핑계, 변명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안전한 요새를 떠나라
삼상 22장 1~5절 / 조상호목사
어느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봐라! 이 우물의 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라.”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임금의 명령대로 쉬지 않고 물을 길어 밑 빠진 독에 부었습니다. 얼마동안 물을 길었는지 모르지만, 결국에 우물의 밑바닥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다 퍼낸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옵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밑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의 명을 받들어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려고 우물이 바닥이 날 때까지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그러니까 임금은 신하에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고, 신하는 이상한 명령을 내린 임금의 테스트에 합격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연의 이치에 도무지 맞지 않고, 경험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볼 때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배낭이나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조차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전도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돈도 있어야 하고 옷도 챙겨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러한 것들을 가지지 말고 떠나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손을 내밀어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한 명령입니다. 뱀을 잡으려면 머리를 잡아야 뱀을 제압할 수 있는데, 꼬리를 잡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여리고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7번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강력한 여리고성을 공략하는 전략치고는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작전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사 기드온에게 32,000명의 군인 중에서 남들 눈치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왔던 22,000명이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남은 10,000명의 군인 중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은 돌려보내고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300명을 최종 선발하게 하셨습니다. 전쟁에 나갈 군인을 선발하려면 ‘체력 테스트’를 하던지 ‘전쟁이론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물 마시기 테스트‘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 이상한 명령을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다윗에게 대해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다윗은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사울왕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홀홀 단신으로 무작정 도망을 쳐서 사울 왕이 죽을 때까지 끝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인접한 ‘놉(Nob)'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놉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 사울 왕을 피하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국경을 넘어 블레셋의 ‘가드(Gath)’라는 성읍으로 도망을 갑니다. 아마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드라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십니까? 다윗이 죽였던 거인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한다는 것이 그만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가드 성의 아기스 왕에게 망명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곁에 섰던 신하들이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미친 사람 흉내를 냅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문짝을 두드리며 발작 증세를 연출한 끝에 위기를 벗어납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다윗은 다시 이스라엘 지경 안에 있는 ‘아둘람(Adullam)’이라는 곳의 한 동굴에 숨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 ‘아둘람 굴’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을 모이게 하라
첫째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다윗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지도자로 나누어집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지도자’와 ‘사람들이 떠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아둘람은 베들레헴에서 서남쪽으로 2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동굴이 많았습니다. 아둘람은 유다 땅이었지만, 사울 왕의 정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블레셋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사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형제와 그의 온 가족들은 사울의 칼을 피하기 위해 다윗이 숨어있는 이곳에 모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무려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울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다윗에게로 온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나중에는 교만하여 악을 행하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다스렸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16절에 보면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19절에 보면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울왕은 다윗을 도왔던 놉 땅의 제사장들을 살육할 만큼 잔인하게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사울 왕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반역자로 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걸고 다윗에게로 모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들은 다윗이 사울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다윗왕국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처럼 사울은 ‘사람들이 떠나는 지도자’였고, 다윗은 ‘사람들이 모이는 지도자’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종종 병사들 사이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사병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잔뜩 풀이 죽은 한 병사가 그의 눈에 띄었습니다. “자네, 기분이 어떤가?” “장군님, 저는 무척 긴장이 됩니다. 두 달 전에 부상당해서 어제 겨우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보통 장군이라면, “아니,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네가 정말 미합중국 군인이 맞나?”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겁먹을 필요 없네. 자네 뒤에는 세계 최고의 부대가 버티고 있으니까”라고 말하면서 겁에 질린 병사의 기운을 돋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그런가? 자네와 나는 통하는 데가 있구먼, 나도 걱정이 되거든...., 우리 함께 저 강 쪽으로 걸어가면서 얘기 좀 하세. 그러면 서로 힘이 될거야.”
아이젠하워 장군은 부하의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걱정하는 부하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일반병사들이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그의 주위로 모이게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떠나는 지도자보다, 사람들이 모이는 지도자가 더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카네기공대에서 각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술적인 능력이나 뛰어난 두뇌는 성공요인의 15%에 불과한 반면, 뛰어난 대인관계의 능력이 성공요인의 85%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버드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사람들 중, 일을 잘못해서 쫓겨난 사람보다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해고된 사람이 2배나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통계일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인간관계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부담을 주고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녀들도 아버지가 부담스러우면 슬슬 눈치만 보며 피합니다. 아무리 밥을 자주 사줘도 스트레스를 팍팍 주는 사람을 친구 삼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밥을 사주지 않아도 위로와 격려를 하는 사람은 일부러라도 만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들을 한 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사울처럼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사람’입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며 멀리 떠납니까? 아니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있습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사울처럼 주위 사람들을 떠나게 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주위 사람들을 모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주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안전한 요새를 떠나라
둘째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안전한 요새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유다 땅 아둘람의 한 굴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4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기에는 굴이 너무 좁았습니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둘람 굴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같이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세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다윗은 400명을 거느리고 아둘람을 떠나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모압 땅 미스베(Mizpeh)로 이동했습니다. 다윗이 모압으로 피난을 간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과 6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모압은 증조 할머니의 고향으로 자기와 혈연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사무엘상 14장 47절에서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압은 사울 왕과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모압 왕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기대대로 모압 왕은 그의 망명 요청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놉’을 거쳐 블레셋의 ‘가드’로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 지경 안에 있는 ‘아둘람’ 굴에 숨었다가, 이제는 이방 나라인 모압의 ‘미스베’로 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가 숨어 있었던 어느 지역보다도 모압은 숨어 있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400명과 함께 모압의 어느 요새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한 도망을 하지 않고도 안정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상한 명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안전한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압 땅에 머무르려는 다윗을 막으시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안전하게 모압에서 살고 있는 다윗에게 ‘안전한 요새를 떠나 위험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도울 힘이 없는 세상의 모압 왕을 의지하지 말고,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경비견으로 사용되는 독일산 ‘세퍼드’를 훈련할 때 제일 먼저 사육사가 주는 것 외에 다른 먹이는 절대로 먹지 못하게 하는 훈련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 있어도 도둑이 주는, 독약과 같은 것을 넣은 먹이를 먹고 죽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육사는 맛있는 먹이 속에 바늘을 숨겨놓은 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배고픈 세퍼드에게 던져주게 합니다. 그러면 세퍼드는 정신없이 그 먹이를 먹다가 그 안에 들어있는 바늘에 찔려 피를 흘리며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 사육사가 와서 다친 부위에 약을 발라주며 “내가 주는 것을 먹어야지. 왜 남이 주는 것을 먹니?”라고 말을 합니다. 1주일이 지난 후 세퍼드가 배고플 때, 또 낯선 사람이 약이 든 고기를 던져 줍니다. 세퍼드는 먹고 싶지만 혹시 지난번처럼 그 안에 바늘이 들어 있으면 다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먼저 그 먹이를 눌러 봅니다. 바늘이 없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것을 먹다가 이번에는 그 속에 든 약을 먹고 토합니다. 결국 세퍼드는 사육사가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을 때까지 훈련을 계속합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도 세퍼드를 훈련시키는 사욕사와 비슷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지도자로 삼기 위해서, 먼저 안전한 애굽 왕궁을 떠나 물설고 낯 설은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수많은 환난과 고난 가운데로 인도하신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안전한 요새를 떠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전한 요새를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 두려워하지 말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안전한 요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이 모압 땅에 머무르면 안 되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다윗 일행을 어떻게 보호해주시고 어떻게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무작정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안전한 요새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울이 있는 유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했고, 사울 왕에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그가 안전한 요새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잘 해야 수백 명의 부하를 둔 조폭 두목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안전한 요새를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만, 프랑스의 시인 길라움 아폴리네어(Guillaume Apollinaire)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그들은 벼랑 끝까지 갔다. 그가 밀었고, 그들은 날았다.” 그러니까 벼랑 끝에서 날 수 있는 날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동안 몰랐던 날 수 있는 힘을 벼랑 끝에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벼랑 끝이 시작입니다. 여러분, 홍해바다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앞에는 홍해바다가 넘실거리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벼랑 끝에 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함으로 홍해 바다를 갈라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또한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주님이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배에서 나왔기 때문에 물위를 걷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안전지대에서 나옴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전지대를 떠나면 죽을 것 같지만, 오히려 안전지대를 떠나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요새를 떠나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벼랑 끝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전지대를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전한 요새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어느 글에서 읽은 거미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지하실이나 집 안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흔히 거미줄을 보게 됩니다. 거미는 비단실 같은 가는 줄을 내어 8개의 다리로 이 구석 저 구석을 연결하여 집을 짓습니다. 거미줄은 거미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 됩니다. 거미는 이것을 집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먹이를 잡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거미는 자기에게 위험한 일이 닥치면 재빨리 비단실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땅이나 마루에 몸을 숨깁니다. 또한 새로운 가정을 꾸밀 때에 거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보금자리로 사용하기 위해 나뭇잎을 비단실로 두릅니다. 그러나 거미줄의 가장 큰 사용 목적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날아드는 파리나 곤충을 기다리는 데에 있습니다. 적을 공격하거나 먹이를 덮칠 때에도 이 줄을 사용합니다. 거미줄에 걸린 희생물은 독이든 이빨로 물어 죽여 그것으로 아주 맛있는 식사를 즐깁니다. 이처럼 거미줄은 거미에게는 아주 유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곤충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가늘어서 잘 보이지 않으며, 거미가 자기의 일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붙들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 등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가치들은 어떻게 보면 거미줄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거미줄에 의지하는 것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이미 뉴스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노무현 전(前)대통령이 한국 시간으로 어제(2009년 5월23일) 아침 봉화마을의 뒷산 부엉이 바위라는 곳에서 밑으로 뛰어 내려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에는 고향인 김해 봉화마을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재임 때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 재직 시 미화 640만 불인가(?)의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과 가족들이 검찰조사를 받는 가운데, 견디다 못해 자살을 택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시 한 번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우리의 요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