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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14
구자근 사모(광주 화평교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됨의 의미를 생각하며
A : "여자의 일생"은 다 읽었수? 그 쥘리앙은 도대체 어떤 남자여?
B : 이 남자가 하녀 로잘리의 말대로 '퍽도 잘 나신' 사람이여. 멋있고, 깔끔하고, 친절하고, 매력있는 신사로 잔느 앞에 나타났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확 바뀐 거예요. 그렇게 친절하고 점잖았던 사랑 대신 돈 만 알고, 일 만 알고, 구두쇠고 인정머리가 하나도 없는 건조하고 냉정한 인간으로 서술되어 있구만? 자연 속의 생물 하나하나에 꿈을 담고 생명을 느끼며 환희에 찬 미래를 기대하며 결국에는 사랑의 대상을 찾은 설레임과 기쁨이 송두리째 인간에 대한 충격으로 바뀌면서 속앓이를 시작한 잔느가 되었어. 게다가 하녀 로잘리와 남편과의 관계로 인하여 잔느의 남편에 대한 모든 인식은 무시와 멸시, 아니 완전히 인간 이하의 무관심한 존재로 바뀐 채 태어난 아기한테만 온갖 정성을 퍼부으며 살아가지. 남편 쥘리앙은 이후에도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바꾸어가며 놀아나다가 관련된 백작의 음모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죽게 되지. 그 이후 잔느는 끔찍히도 정성을 다해 키운 아들에게 배신 당하는 내용이네. 참, 여자의 허무한 일생을 그려놓았구만?
A: 남녀의 사랑과 선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구. 잔느 같이 순결하고 고고한 여자가 왜 쥘리앙이라는 남자를 선택했을까? 남자가 없었나? 아니, 그럴 줄 몰랐겠지.
B: "퍽도 잘났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A: 그렇지, 바로 그거야.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상대방에 대해서 '이 남자가 퍽도 못난 것이 분명한데 내가 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이 생각으로 결혼하면 딱 맞어. 결혼 잘하는 거여. 그런데 그런 관계로 결혼하는 예가 거의 드물지.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는 벌써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거든. 빈구석이 있는 것이여. 그래서 그 순간에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남자가, 한 쪽이 구멍나게 보이고 불안정하게 보인다니까? 호감이 안가고 안심되지 않고 시원찮게 보이는거여. 자기 인생이 손해나는 것같고 왠지 도망치고 싶고. 내가 과거에 연애 좀 할라고 시도해보면 이상하게 여자들이 나를 안보는 것이여. 마음 주는 여자가 한 명도 없더라 그것이여. 내가 못생긴 건 사실이지만 한결같이 그럴 수가 있는 거냐고... 그러니까 한가지라도, 그 이상으로 "퍽도 잘났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더 많이 포함하여 결혼상대를 찾으려고 하거든. 그래서 양쪽 다 거의 완벽한 '잘난 자'를 찾았어. 그만하면 만족스러워. 그런데 결혼 이후... 갈수록 왠지 공허해지는 것이여. 왜냐? 둘의 간격이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거든. 아니, 애초에 원래부터 관계가 없는 상태였음을, 분리된 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이지. 다시 말혀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공허감인 것이여. 그러니까 여자 앞에 이상적이며 완벽하고 안정감을 주던 쥘리앙 같은 이런 남자는 사실은 여자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거든. 이런 남자는 자아충족적이어서 자기 혼자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거든.
B: 쳇! 그러면 이런 남자들이 뭐하러 여자와 결혼하나?
A: 아니지, 액세서리 모르슈? 액세서리는 그 자체를 감추고 오히려 더 빛나게 해주거든. 여자를 자신의 액세서리로 여기는거지. 자신의 만족스러움에 가세를 더해주는 존재인 것이여. 그런데 그 액세서리가 끊임없이 한 몸 되기를 원하는거여. 자기를 도와주고 든든하게 해달라는 거여. 왜 날 완벽하게 사랑해주지 않냐... 등으로 요구해올 때 그때부터 남자는 힘들어지는 것이지.
왜냐?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부족과 허물을 들키우는 것이거든. 사랑은 속성상 자기 몸의 일부분 이상을, 급기야는 전부 다 내어주기까지 해야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때부터 자기 몸의 완벽에서 떠나는 것이고 안정감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을 뜻하거든. 그러니까 모자란 부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여. 이게 싫은 것이지. 짜증나는 것이고, 자존심 상하는 거여. 자기가 귀한 몸인데 왜 내가 그걸 허물어야 되냐 이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몸버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여. 자기의 못난 부분, 수치스러움이 뽀록나게 되어 있거든. 이건 생각을 깊이해서가 아니고 그냥 본능적으로 자기를 들키우는게 싫어서 나오게 되는 거부 반응인 셈이지. 어쨌든 이때쯤 되면 남자의 끝없는 방황이 시작된 거여. 쥘리앙의 죽기 전까지의 혐오스런 행동들이 이 극적인 방황의 연속인 것이여. 아내에게서 인정을 못받으니 일에 매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자기를 어머니같이 무조건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는 상대를 찾아 다니는 것이지. 즉 남자는 자기가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 상태를 원하는 것이여. 그래서 바람을 피워도 자기 아내보다 못난 여자를 찾아나서는 것이 관례여. 자기를 신처럼 받들어주거든. 편안하게 사랑만 해주거든.
여자는 뭐냐...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어있어요. 자기를 안정감있게 지배해주는, 완벽하게 한 몸 되어줄 수 있는 남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불안한 존재예요. 진정 자기를 안정되게 보호해주는 현실의 남편, 아니면 그 어떤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잔느가 자기를 기쁘게 해주고 안정감있게 해주는 대상으로 그 아들을 정했듯이 말이지.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한 몸 되었던 흔적은, 양심 속에서나마 막연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어서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끊임없이 한 몸 됨을 원하게 되는 거요. 그러나 남자의 본능과 이처럼 맞서게 되니 이 둘이 만날 길이 전혀 없네... 결국 여자는 간음한 상태, 우물가의 여인처럼 늘(결혼 후에도) 버려지는 운명에 처해 있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온전한 남성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남자는 끝없이 상대(여자든 돈이든 일이든...)를 갈아치우면서도 만족 없는 방황을 계속하고... 이것이 인생의 비극인 것이여.
이렇게 해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서로가 타인처럼 느껴지는 몸의 분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분리 자체가 벗은 몸을 의식하는 상태가 아니겄어? 따라서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것이여. 여기에서 사람들은 뭔가 수치를 덮으려는 시도를 꾀하게 되고, 그것들은 100% 모두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어있지. 그 쪽으로는 둘이서 동의가 쉽게 이뤄지거든. 남편의 출세가도에 끼어들고 아이들 교육에 열성으로 몸 바치며 자신들의 경건함을 키워줄 듯한 그런 종교를 취하면서 더욱더 수치를 가리우는 행위가 따르게 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사실은 그 유익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 자녀, 자기가 속한 조직 등을 세상기준에 끊임없이 맞춰나가는 집중들이 따르고, 교회부흥에 대한 가지가지 행사와 인간적인 도전들, 육신의 노력들을 화려하게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지. 사랑, 사랑 하면서 사명 감당하는 행위인양 드러내지만은, 이미 받은 사랑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러한 세상 방식들에 대하여 담담하고 담대한 것이 특징이요.
어쨌든 이러한 중에도 사실은 자신에게 속한 몸의 분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어서 애쓴 자식에게, 정성 다한 사람, 조직의 누구 누구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 계속적인 몸의 분리가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여. 악순환이랄까... 생각해 보라구. 각자 각자 이미 분리된 몸이, 자기 몸 하나 감당 못하는 몸이, 죽음 가운데 들어있는 생명없는 몸이, 서로서로 요구한다고, 또 애쓴다고 뭐가 나오겠냐고... 예수 만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는 애쓰면 애쓸수록 공허함만 더 크게 남을 뿐이여. 이것들은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하나됨의 관계에서 깨어진 죄의 증상들일 뿐이며 하나님의 인생들에 대한 죄의 고발인 셈이지. 한 몸 됨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꾀해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거요. 우리 인간끼리는 안되게 되어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들 스스로 한 몸 되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요. 조직을 꾀해서 하나가 되어 강하게 키우고자 하고, 그러자니 그 회사나 학교가 유명해지고 잘 나가게 하기위해 가정의 에너지를 퍼올 수밖에 없고 말이지. 그래서 가정이 연쇄적으로 상처받고 오히려 점점 더 몸의 분리를 경험해야 되는 것이 아니겄소?
이것이 다 뭐냐--- 최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들의 죄의 실상인 것이여. 예수로만 되는 한 몸 됨을 거부하고 정해진 멸망길로 가고 있는 것이지. 이러한 죄로 뭉쳐있는 한 몸을 끊어서 예수몸에 접붙임시켜준 것이 구원인 것이여. 곧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통일되게 하셔서 한 몸됨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살아볼려고 출발하는, 최대로 화려한 결혼조차도 죄를 깨닫는 도구로 쓰셔서 그 죄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세우는 것이여.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15,16)
성도자체가 주의 이름을 기념하는 현장이고 그래서 성전이라는 것이지.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 완벽하게 나타난 곳이여. 그러니까 '성전으로 지어져간다'의 의미는, 아직 부족한 성전이기 때문에 인간이 무언가를 더 채워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는 한 점이라도 불순물이 섞여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자녀 가운데 성전 청결사건을 일으키시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스스로 거룩한 성전으로 지켜가시고 세워나가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고 분리가 없는 것이요. 한 몸 됐기 때문이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몸이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한 몸이고, 부모와 자식간에, 성도와 성도간에도 마찬가지가 적용되는 것이요. 물론 분리되는 것같은 사건 앞에 서있곤 하지. 그러나 간교한 마귀의 속임수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한 몸 됨에서 끊을 수 있는 세력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점점 더 확인해 갈 뿐이여. 성도의 가정은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몸의 분리를 의식하고 인정하는 아픈 고백이 따르게 되나, 오히려 그 죄를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은혜의 현장으로 새롭게 되는 역사가 이뤄지는 곳이요.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되어 있거든.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2) 그랬어요.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바 되셨거든? 성도인 남편은 아내 때문에 죽은 바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있지. 죽음처럼 깜깜한 절망과 낙심의 구렁텅이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맛보게 되는 것이요. 그 때, 나 때문에 희생되는 아내가 보이는 것이여. 내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고... 이때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모습 속에서 인생의 곤고한 실상과 연약함을 보게 되는 것이지. 나 때문에 죽은 예수의 형상, 그 똑같은 예수의 형상이 보이는 것이여. 이제 평행선이었던 남편과 아내는 각자 자기요구에서 떠나, 서로의 필요를 위해 애쓰는 희생의 모습 속에 기쁨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말이요. 그러니 육신은 점점 더 후패해가나 그렇게도 아내가 귀하고 소중하고 점점 더 사랑스러운 것이여.
결국 이러한 몸의 분리 속에서 잃어버려진 경험과 마주한 남편은, 아내는, 본능적으로 자기 몸만 위하는 자기자신에게서는 도무지 사랑이 나올 수 없음을 그리스도 앞에서 인정하게 되지. 이때가 비로서 성도가, 목사가, 남편이, 아내가 각자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앉게되는 순간이 되는 것이요. 교만에서 떠나 겸손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현장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한 몸이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몸이여! 여전히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는 것이여---
B : '그러니까 성도인 부부에게는 한 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기의 필요를 위해 요구해대는 그래서 자기방식대로 한 몸 되기를 애쓰는 정과 욕심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이 개입된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하고 '여자의 일생'은 그토록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보다...... (*)
시 127 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