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겐 “반의 상징”… 누구에겐 “소파”… 누구에겐 “친구”
한순간에 우리 반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은 너, 어쩌면 좋니?
그날 소파는 느닷없이 등장했다. 지난 12일 서울 강북구 삼양초등학교 6학년 4반. 교실 뒤편에 있던 적갈색 소파에 갑자기 시선이 집중됐다. 이날 선생님과 학생들은 ‘생활 속 유해화학물질’에 관한 특별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 소파는 PVC(폴리염화비닐) 재질이고요. 납 안전기준이 300PPM인데 250PPM 나왔어요. 그런데 브롬이라는 물질이 1200PPM 정도 나왔어요. 브롬계 난연제라는 물질이 있는데 불이 났을 때 불길이 확 번지지 않도록 물건에 화학처리를 하는 거예요. 더 정확한 건 연구소에 가져가봐야 알겠지만, 브롬이 1000PPM 이상 함유되면 보통 브롬계 난연제가 사용됐다고 볼 수 있어요.”
이날 특별강사로 초빙된 박수미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 국민행동 사무국장이 소파에서 브롬이 검출됐다고 말하자, 선생님과 아이들의 입에선 “아…” 하는 탄식과 함께 한숨이 나왔다. 박 국장은 이날 휴대용 XRF(X선 형광분석기)로 교실 곳곳의 물건들에서 유해화학물질이 검출되는지 점검했다.
“브롬이 뭐예요?”
“음… 브롬계 난연제는 발암물질로 알려져 있는데요. 여러분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선 어린이제품에 브롬계 난연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물질로 지정했거든요.”
“헉….” 다시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일단 이런 제품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요. 갑자기 소파를 바꿀 수 없다면, 면으로 된 천이라도 덧대서 여러분 피부에는 직접 닿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소파는 원래 이날 수업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생활 속에서, 교실 안에서 쓰는 물건들이 어떤 화학성분으로 구성돼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었다. 플라스틱 지우개, 화장품, 교실 뒤 게시판 시설 등 화학성분이 들어갔을 것 같은 제품들을 따져봤다. 그런데 갑자기, 소파에서 유해화학물질이 검출됐다. 이 소파는 담임인 배성호 교사가 아이들이 교실을 좀 더 편하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 교사휴게실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동안 소파가 있어서 좋았죠?” 배 교사가 물었다. “네!” “우리 반만의 상징이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갖다 버려요!” “천을 씌워요!” “중고나라에 팔아서 다른 걸로 사요!” “다른 반에 줘요!”
“우리에게 좋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 건데,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줘도 될까요?” 배 교사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곧 깨졌다. “그럼 계속 써요!”(모두 웃음)
배 교사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파를 버리면 더 안전한 제품을 살 수 있을까요? 안전한 제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엔 더 긴 침묵이 흘렀다. 한 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소파랑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요.”
이 반의 자랑이자, 쉬는 시간마다 편하게 눕거나 앉아 쉴 수 있는 특별한 애장품이던 적갈색 소파는 불과 몇분 만에 처치 곤란한 물건이 됐다.
◆우리 반 소파에 발암물질? 그럼 버려요, 누굴 줘요? 지우개·틴트에는요?
생활 속 유해화학물질 수업시간
방금 앉아 놀던 교실 뒤 소파에서
‘브롬’이라는 물질이 검출됐단다
버릴 수도 없고 누굴 줄 수도 없고
일단 안전한 천을 씌워 놓기로 한다
유지파·제거파·보완파 나눠 조사
모의법정서 소파 운명을 정하기로
삼양초등학교 6학년 4반 학생들이 소파를 두고 빠진 고민은 한국 사회가 화학물질을 대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우리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을 채우고 있는 많은 화학물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모두 폐기?). 새로운 대안을 찾을 것인가(안전한 제품 개발?). 누군가에게 넘길 것인가(저소득 국가로 떠넘기기?). 당장 체감되는 위험만 없다면 그냥 두고 쓸 것인가(모르는 게 약이다?).
이날 수업을 지켜본 또 한 명의 특별강사,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소파에 던지는 질문처럼 저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소파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이 우리 사회의 화학물질에 대한 판단과 같을지도 몰라요. 지금 인류가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우리가 안전하게 화학물질을 쓰는 방법.”
■ 학교를 구하라
삼양초는 지난해 10월 노동환경연구소에 체육관에서 사용하는 용품들에 대해 중금속 측정을 의뢰했다. 분석 결과 총 58개 제품 중 절반에 가까운 27개 제품이 PVC(폴리염화비닐) 재질로 나타났다. PVC는 열가소성 플라스틱의 하나로 원래 딱딱한 물질인데, 화학처리를 통해 유연성과 탄력성을 높인 뒤 제품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PVC가 사용됐다는 것은 환경호르몬이 발생하는 프탈레이트(phthalate) 가소제가 함유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학생들이 많이 쓰는 농구공에선 카드뮴이 기준치(75PPM)를 2배 이상 넘는 165PPM이나 검출됐다. 뜀틀매트에선 기준치(300PPM)를 26배 초과한 납성분이 7939PPM 검출됐다. 라켓, 공바구니, 원목뜀틀, 투호 등에서도 기준치를 뛰어넘는 납과 브롬 등이 검출됐다.
학교는 우선 학생들과 임신 중인 교사들이 체육교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뒤, 예산을 투입해 유해화학물질이 검출된 교구들을 안전한 제품들로 교체했다. 그러나 매트리스와 뜀틀 등 교구 중 20%는 안전한 대체재가 없어서 아예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삼양초가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장 선생님부터 새내기 선생님까지 유해화학물질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김신범 부소장의 책 <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를 읽은 배성호 교사가 교사 연수에 김 부소장과 박수미 사무국장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교사들은 학습 자료를 만들기 위해 거의 매일 쓰는 커팅매트(물건을 자르는 받침대)에까지 발암물질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 교사는 “30년 동안 교직에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몰랐다”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겠다”고 했다.
교사들은 뜻을 모아 학생들이 쓰는 체육교구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고, 결과를 본 교장 선생님은 추가 예산 투입을 결정했다. 최현섭 삼양초 교장은 “갑자기 추가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 처음 조사결과를 보고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당장 우리 아이들이 쓰는 물건이기 때문에 망설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삼양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이런 문제를 왜 개별 학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가. 수은이 나온 인조잔디, 납이 든 우레탄 트랙 등 이미 10여년 전부터 학교공간의 유해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됐다. 완구, 문구용품이 납범벅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2015년에는 어린이들이 쓰는 제품의 안전기준을 만든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이 제정됐다. 민주당 김민기의원실이 2016년 발표한 ‘안전한 학교만들기 학교 유해물질 실태보고서’를 보면 학교에서 사용 중인 체육교구와 학습교구 총 35종을 조사한 결과 제품 중 74.3%에 PVC 재질이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학교의 경우 교실과 학교도서관만 환경안전관리기준 대상에 해당될 뿐, 그 외 공간은 기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학교운동장은 법률상 어린이활동 공간이 아니다”라며 법의 맹점도 지적했다. 아이들이 거의 매일 쓰는 체육교구와 학습교구 역시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품목이 많다.
그렇다면 교육부나 환경부, 보건복지부가 나서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 공간의 안전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 현재까지 이런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부가 만든 ‘학교 안전교육 7대 표준안’에도 생활 속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관심 있는 학교들만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진행하고 대체용품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이 안전점검을 해주겠다고 해도, 조사결과가 학교장의 책임으로 돌아올까 봐 점검을 반대하고 발암물질을 끌어안고 사는 학교들도 많다.
삼양초 교장부터 새내기 선생까지
화학물질 없애는 데 앞장서지만…
교육부도, 환경부도, 복지부도
왜 정부에서는 나서지 않는 걸까
정부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교사들이 움직이고 있다. 현장 교사들이 모인 실천교육교사모임(회원 1500명)은 학교 공간의 유해화학물질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사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실천교육교사모임의 한희정 서울대표(서울 정릉초)는 “적어도 성장기 아이들이 매일 생활하는 학교에 반입되는 물품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다 강력한 안전기준을 만들고, 기준에 미달하는 제품은 반입을 금지해야 한다”며 “교사들 중에도 불임과 유산, 아이의 아토피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일 학습교구나 체육교구를 만지고 정리하는 교사들도 유해물질 피해자들”이라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오는 5월2일 아동건강권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강신만 전교조 부위원장은 “초·중·고교생들의 건강을 학교 안에서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아동들의 생활·학습공간에서 유해화학물질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를 두고 시민단체와 정부, 교육·환경·복지전문가들이 모이는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은 22일 정책안전기획관 주재로 유치원과 초·중등학교 체육교구·학교시설 내장재 담당자, 유해물질 전문가, 현장 교사 등이 모여 ‘학습교구와 학교시설 내장재 유해물질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서울시 친환경급식센터처럼, 교육청이나 지자체가 안전한 학습교구들을 구비한 ‘안전교구센터’를 만들고, 각 학교는 센터를 통해 학습교구들을 구입하는 방안도 교사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 현재는 책걸상 등 덩치가 큰 교구는 학교가 조달청을 통해 구입하지만, 각 학급에서 수업에 활용하는 학습교구들은 교사들이 직접 문구점이나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 유해화학물질과 이별하는 법
삼양초 6학년 4반의 소파는 아직 교실에 있다. 아이들은 소파를 버리지 못했다. 대신 면으로 된 천을 씌워 사용하고 있다. 소파와 작별하고 싶다던 아이들은 당장 새 소파를 사거나 버리는 대신 유해화학물질을 공부하고 있다. 23명의 학생들이 ‘소파 유지파’ ‘소파 제거파’ ‘소파 보완파’로 나뉘어 각각 자료 조사를 하고 있다. 한 달 뒤 ‘모의 법정’을 열어 소파의 운명을 결정할 예정이다. 달라지고 있는 것은 소파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프탈레이트 지우개’와 천연성분으로 만들었다고 광고하지만 입술에 바르면 따가운 틴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교실 뒤 과제물을 전시한 초록색 게시판에 압정을 꽂을 때마다 유해물질이 뿜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더 나아가 ‘왜 성분 표시는 어른도 아이도 알아볼 수 없도록 깨알처럼 표기돼 있는지’ ‘왜 4000만원이나 되는 기계(XRF)를 쓰지 않고서는 나쁜 성분이 들어갔는지 아닌지 제대로 알 수 없는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고민의 과정을 노래와 책으로 만드는 것도 논의하고 있다.
반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는 배성호 교사는 “학교라고 하면 안전한 공간이라고 믿게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속상하다”고 말했다. 배 교사는 “저 역시 학교 안의 유해화학물질을 공부하며 많이 놀랐지만, 아이들이 쉽게 소파를 버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며 “아이들처럼 함께 지혜를 모으고 기준을 만들어나간다면 좀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어린이가 안전해야 ‘안전 사회’…낯설어도 화학물질 알고 바꿔가
‘안전한 학교 만들기’ 운동하는 전문가들, 김신범·박수미씨
유공(현 SK케미칼)이 세계 최초로 가습기살균제를 개발한 것은 1994년. 첫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1995년이었다.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의 유독성을 공식 확인하고 판매금지 조치를 내린 것은 2011년. 이미 10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아이에게 안심”이라는 포장지에 덮인 독성물질을 사용한 후였다. 2018년 8월까지 접수된 피해사망자만 1335명이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습기살균제가 10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무려 17년이 걸린 것은 그만큼 우리가 화학물질에 무지하고 안이했기 때문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조금 안전해졌을까. 지난 19일 서울 중랑구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두 전문가를 만났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49)은 직업병 연구와 함께 유해화학물질 알권리 정책을 연구하고 있으며 2016년 국회 가습기살균제특별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박수미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 국민행동 사무국장(50)은 2011년 어린이 제품 분석을 시작으로 유해화학물질 현장점검과 정책제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두 사람은 “화학물질은 모두에게 불편하고 낯선 문제”라며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함께 힘을 모으면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유해물질 없는 건강한 학교 만들기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김신범(이하 김) =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주로 공장노동자를 보호하는 일을 해왔는데, 공장에서 발암물질을 아무리 찾아내도 없애질 않는 거예요. 근데 2009년 베이비파우더에서 석면이 검출되니까, 소비자들이 화들짝 놀라 석면 없는 제품을 찾겠다고 나서더라고요. 몇 년을 싸운 ‘나쁜 접착제’ 문제도 ‘새차증후군’이 이슈가 되니 없어졌어요.(웃음) 노동자를 보호하면 소비자도 당연히 보호된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맨 끝단에 있는 소비자들만 대책을 찾으려 하니 근본적인 대책이 안 나오는구나 싶었어요. 한편으론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공장도 바뀔 수 있겠구나, 생각한 거죠. 석면베이비파우더 사건 이후로 여러 시민사회단체, 노조, 연구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박수미(이하 박) = 2011년에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 국민행동’을 결성하면서 안전의 포커스를 어디에 맞출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어요. 우선 ‘어린이가 안전해야 사회가 안전하다’는 합의를 했고요. 그럼 어린이들의 생활환경부터 점검해 보자고 해서 2011년에 처음으로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어린이용 문구와 완구, 장신구 등을 분석했는데 유해화학물질이 엄청나게 나온 거죠. 이후 학교교육현장으로 옮겨 2013년 ‘PVC(폴리염화비닐) 없는 학교 만들기’를 진행했고, 2015년부터는 서울시 녹색서울실천공모사업으로 ‘유해물질없는 건강한 학교 만들기’ 사업을 하고 있어요.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문구, 완구에서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는 환경호르몬 프탈레이트와 납, 카드뮴 등이 검출되자 여론이 들끓었고, 2015년 만 13세 이하 어린이들이 쓰는 제품의 유해물질 안전기준을 정한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2016년 6월4일부터 발효됐고, 이후 만들어진 어린이용 제품은 이 기준을 통과해야만 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 만들어진 ‘발암물질 덩어리’ 제품들도 여전히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별법상 ‘어린이용 제품’의 기준과 범위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 2016년부터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이 적용되고 있죠. 좀 나아졌나요.
김 = 저는 어린이특별법이 아니라 ‘어린이품공법(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이라고 불러요. 예방적으로 문제를 찾아내 관리하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 이미 심각하게 문제가 확인된 몇 가지만 관리하는 식이거든요. 기업은 이 법을 ‘정부가 제시한 안전기준만 지키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해석해요. 어린이특별법인데 왜 산업통상자원부가 관리하고 있을까요. 기업에 가는 영향이 최소한이 되도록 산업부가 길목을 지키고 있는 거죠.
‘발암’ 지적에도 없애지 않던 석면
베이비파우더에서 검출되자 파장
소비자 관심이 세상 바꿀 수 있어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시행 4년
2016년 이후 출시 제품에 한정돼
KC마크 있다 해도 문구 확인해야
- 정부가 최소한의 시험을 만들어서 그것만 지키면 넘어가도록 하고 있다는 거군요.
김 = ‘프탈레이트’라는 물질이 종류가 굉장히 많아요. 정부는 그중 여섯 종류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3개만 완전 금지, 나머지는 함량 정도를 관리해요. 그럼 기업들은 조금만 구조를 바꿔서 똑같은 독성을 가진 물질을 개발합니다. 새 독성물질은 저촉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죠. 기업이 ‘우리가 어떤 원료를 사용해서 만들었고, 어린이들은 이렇게 사용하면 안전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밝히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게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정부가 만들어놓은 기준 몇 개만 지키면 기업을 처벌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과연 기업이 지금보다 안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까요.
박 = 법 적용대상이 너무 협소해요. 필통의 경우, 누가 봐도 아이들만 쓸 것 같은 캐릭터 제품만 대상으로 정했어요.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에서도 어른도 좋아할 것 같은 품목은 제외했고요. (무채색, 민무늬 필통은 무조건 성인제품으로 보는 건가요) 네. 요즘 애들은 눈높이가 있어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계속 항의하니까 그 지침이 없어졌어요. 한 학교 선생님이 농구공에서 다량의 화학물질이 검출됐다고 항의하니까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왜 성인이 쓰라고 만든 농구공을 가져다 애들 수업시간에 썼느냐’고 했대요. 지금 지침대로라면 초등학교 체육시간에도 유치원에서 쓰는 완구 공을 써야 돼요.
- 어린이들이 꼭 어린이전용제품만 쓰는 건 아니잖아요. 발육 정도에 따라 성인제품이 맞는 경우도 있고요.
김 = 그렇죠. 우선은 기어 다니고 여러 제품을 물고 빠는 아이들이 유해화학물질에 훨씬 더 심각하게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유아·어린이들이 쓰는 제품부터 관리하자고 하는 것은 옳다고 봐요. 그런데 그 수준의 법으로 모든 어린이가 보호된다고 착각해선 안 되는 거죠. 아이들 몸속에 환경호르몬이 들어가는 경로는 아주 많으니까요.
박 = 욕실 슬리퍼의 경우 아빠, 엄마 것과 아이 것을 따로 쓸까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죠. 변기매트도 유아용을 따로 쓰지 않잖아요.
- 어린이제품을 살 때 보통 ‘KC마크(국가통합인증마크)’가 있는 제품을 사면 안전하다고 믿는데 맞나요.
박 = 우선 어린이제품 관리제도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관리품목이 세 가지로 구분돼요. 첫째는 안전인증대상 품목인데 물놀이기구처럼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당장 생명과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제품이에요. 둘째는 안전확인대상 품목인데 학용품이나 유아용 침대, 보행기 등이죠. 첫 번째와 두 번째 품목은 정부에 시험성적서를 내고 인증번호와 확인번호를 받아요. 그런데 세 번째 품목인 공급자적합성확인대상(어린이용 롤러스케이트, 어린이용 면봉, 어린이용 섬유제품 등)은 시험성적서를 정부에 내지 않아도 돼요. 자체적으로 인증기관에서 시험성적서를 받고 국가기술표준원 홈페이지에서 KC마크를 다운받아서 붙이면 되는 거죠. 품공법에 따른 KC마크와 특별법에 따른 KC마크가 다르기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실 때는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KC인증’ 여부를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김 = 포장만 있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지금 정부는 ‘이런 안전기준이면 된다’는 헛된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주고 있는 겁니다.
박 = 단적인 예가 ‘액괴(액체괴물 장난감)’인 것 같아요. 어린이제품인데 가습기살균제 원료였던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와 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가 검출되니까 부랴부랴 사용 규제를 했어요. 근데 그다음엔 붕소가 검출됐죠. 이 제품에 어떤 성분들이 사용되는지 모르니까, 그때그때 땜질식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안전한 제품을 만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가요.
박 = 굉장히 노력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2013년에 악기 케이스에서 납농도가 높게 나와서 지적했더니, 해당 제조업체 사장님이 “안전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며 찾아오셨어요. 그 업체는 결국 납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 천케이스를 제작했어요. 한 줄넘기 업체는 자발적으로 보급용과 전문가용 모두 줄넘기와 케이스까지 안전한 제품으로 제작했어요. 그 제품은 아이쿱(협동조합) 온라인매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저희가 연결해드렸어요.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 국민행동은 자체 분석을 거쳐 홈페이지(www.nocancer.kr
김 = 사실 기업들도 힘들어요. 안전한 제품,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했던 업체들이 많이 망했어요. 소비자들이 알아봐 줘야 되는데, 여전히 시장에선 브랜드만 보고 사죠.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믿고 지켜주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어요. 좋은 예로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작은 문구업체들이 많이 도산했는데, 유해물질 문제가 확산되며 문구협동조합들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 환경호르몬, 유해화학물질의 문제는 알면 불편하기만 하다는 인식도 많습니다. 괜히 공포를 조장한다는 시선도 있죠.
김 = 생활 속 화학물질은 만들어진 지 몇십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낯설고 어려운 문제죠. 이제 막 답을 찾는 단계고요. 이 문제는 물건을 대하는 마음과도 연결돼요. 주변의 많은 물건들이 (값싸고 편리해 보여도) 위험한 물질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화학물질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유럽도 여러 불행한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씩 고쳐나간 거예요. 우리도 힘을 모으면 바꿀 수 있어요.
박 = 초등학생들을 만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저희가 5년 동안 학교 유해물질 관련 사업을 해왔는데 과연 아이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에 귀를 기울였었나 싶더라고요. 초등학생들이 화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다양한 제품을 사용하는 줄은 몰랐거든요. 누구나 자신의 생활과 밀접해야 관심을 갖는 거잖아요. 아이들 입장이 아니라,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것만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소통이 너무 적었구나 싶었어요. 유해화학물질은 세대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니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목적이 아니에요. 학교든 정부든 당장 내 업무영역이 아니라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떠넘기지 말고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