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도부에서는 1968년 7월27일부터 31일까지 4박5일간 대천합숙훈련을 갔다.이 훈련은 역도부의 매년있는 정기훈련이다.나는 기차로 광주에서 정읍을 거쳐 장항으로 갔다.장항에서 군산까지 조그마한 연락선을 타고 건넜다.배위에서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대천해수욕장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옆에 서있던 한 여학생이 "아저씨!제가 알으켜 드릴께요"해서 나는 그녀를 따라 기차역으로 갔다.그 여학생은 고3이었는데 방학이라 장항 언니집에 놀러왔다가 어린 조카들 둘을 데리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이 여학생이 지금의 나의 아내다.인연은 이렇게 뜻하지 않게 맺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모를 따라 왔던 두조카는 당시 국민학교 2~3학년생이었는데 경숙이와 유근이었다.그 남자조카가 바로 그제(8월21일) 암으로 세상을 달리했다.벌써 48년의 세월이흘렀다.
나는 그 여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서울가면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그녀는 서울로 가고 ,나는 대천역에서 내려 고대 합숙훈련장으로 갔다.당시 합숙훈련장은 아주 낡은 볼품없는 시설이었다.후일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 지금은 아주 편리하다고 한다.
4박 5일간의 합숙훈련은 혹독했다.그때까지 청산은 이런 단체훈련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산책도 하고 수영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이런 정도로 낭만적으로 생각했다.그렇지만 실제로 아침 6시기상,4키로 모래밭 달리기.아침식사후 잠시휴식,오전 두시간 역도훈련.중식후 잠시 휴식후 오후 단체 경기.즉 해수욕장 수구 등 그리고 석식. 석식 후 명상그리고 밤 열시가 되면 취침이었다.
그런데 낮에 수구시합때는 청산이 완도 섬놈이라 수영덕을 톡톡히 보았다.
대부분이 서울 태생이라 수영이라고는 겨우 개구리 수영정도였다.
나는 섬에서 어렸을 때부터 여름이면 집앞바다에 나가서 그냥 물놀이 하던 수준으로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못했는데 이곳 역도부윈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그래서 항상 우리편이 우승했다.나중에는 나만 빼고 경기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주장이 "오늘 저녁식사후 8시 반부터 캠프 파이어를 한다.그러니,너희들 각자 능력대로 여자 한명씩 데리고 와라.못데리고 온사람은 빳따 20대씩!알겠니?"
"네,알겠습니다."
나도 아가씨 한명을 데리고 왔다.우리 친구들 거의 대부분은 한명씩 데리고 왔다.우리는 신나게 캠프파어어를 즐겼다.
밤11시에 캠프파이어가 끝나고 자유시간이 되었다.우리는 그간 몸이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에 어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찾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민박집도 방이 없었다.할 수 없이
그아가씨를 데리고 해변가 오른쪽끝으로 데리고 갔다.그리고는 누가 보건말건 사랑을 나누었다.그런 사람이 비단 나뿐이 아니였다.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났다.그렇게 해수욕장의 밤은 남녀의 사랑으로 뜨거운 열기속으로 빠져 들어갔다.이날의 추억을 1969년초 고대신문에'파도소리'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로 연재했다.이렇게 바카스 베이비가 생겨난다.
그 고대신문을 얼마전까지도 보관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없어졌다.
집에 와서 외숙모께 이이야기를 했더니,"조카!내넌 이맘때쯤이면 여자들이 애안고 와서 이애가 당신애요 하면 어쩔건가?"했지만 아무도 오지않았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전화번호를 교환했지만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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