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등(燈)이 일천 등을 켜니(1)
때는 가을, 하늘 아래 땅에 뿌리 박고 선 것들은 몸에 품었던 물기가 마르면서 푸르던 잎은 누런 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는 풍경이 풍요롭고 사람들의 한미했던 마음이 함께 가멸어지는 것은, 그 쇠잔해지는 몸이 품기 시작한 열매 때문이다. 초목은 제가 받은 햇빛만큼, 비만큼, 그리고 그것을 뿌리로부터 길어올린 물기로 버무려 쟁인 만큼, 또는 제가 견딘 어둠과 서리만큼, 그저 꼭 그만큼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해 아래 몸 내맡기고 서 있다. 풀이 제 갈피 속으로 땅을 향해 떨구는 무수한 씨앗, 사소하고도 분명한 기미, 가을은 그렇게 이미 와 있었다. 이러한 때에, 눈 밝은 이라면, “사철이 운행되는 근원에서 무형 무상이라는 불심의 ‘본체’를 보고, 만물이 유전 변화하는 곳에서 불심의 ‘작용’을 보아야 할 일”(<벽암록>)이었다. 황금색 다랑논 다랑다랑, 온몸으로 산비얄을 되짚어 오르고 있는 산길 지난다. 어느 곳에 쉬임없이 흘러드는 물길이 있는지, 이마로 떠받치는 하늘은 다른 것일 리 없건만, 이 편과 저 편의 물빛이 다른 주암호 너른 물도 지나, 전강식을 축하하려는 하객들은 팔도에서 조계산으로 모여들었다.
오늘은 지효 노스님의 기일이나 무비 스님은 부득이 궐참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뜰팡을 오가는 일에서조차 행동거지에 달뜬 바 있어서는 안 될 터인즉, 일이 그러한데도 들켜 버렸다! 그의 입가에 떠도는 미소를 놓치지 않은 이가 덕담을 건네오고야 만다. “오늘은 해산을 하시는 날이로군요!” 과연 그러했다. 임오년 양력 시월 초닷새, 오늘 조계산 송광사에서는 전강식이 열린다. 그의 강맥을 잇는 제자들이 무려 아홉이나 배출되는 날인 것이다.
‘봉축 여천 무비 대강백 전등 강맥 전수 법회’라는 글귀가 적힌 흰 천이 대웅전 앞에 내걸렸다. 11시에 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도량은 법당을 가득 메우고 들어앉은 사부대중이 소리 모아 외는 ‘석가모니불’로써 터가 닦이었다. 종정을 비롯한 종단의 어른들과 전국의 본사 및 인연 도량, 그리고 삼장을 연찬하는 현장인 강원과 전문학림 등에서 보내 온 화환들이 이미 법당 앞에 빼곡하니 늘어 놓였다. 화엄 보살님은 이 도량을 삼매의 힘으로 온갖 꽃들로 채워 놓으시는고나. 시간이 되자 법당 앞에는 스티로폼 자리까지 깔리어 밀려 드는 사람들을 앉힌다. 맞은편 박물관 앞에서도 돌확 속에서 자라고 있는 물클로버, 물신검초, 물양귀비, 각시수련 따위가 전두리 위로 목을 빼고 도량을 넘본다.
삼귀의가 끝나고 반야심경이 외어진 다음, 오늘 전법게를 받는 아홉 스님들이 약력과 함께 소개되었다. 능허, 현진, 원철, 용학, 지상, 현석, 상현, 정한, 지성, 이름을 불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일 배 절했다. 오늘 이 향기로운 도량에 저희가 마련한 법석의 뜻을 고불문(告佛文)으로써 부처께 아뢰나이다.
“진여에 합해 있으면도 크지 아니하여 낱낱 털 끝에 빠짐없이 계시옵고, 미진(微塵)에 처해 있으면서도 넓은 법계에 두루하옵신 부처님! 오늘 저희들은 법등이 밝게 빛나고 법향이 온 도량에 가득한 송광사에서 보성 큰스님의 증명 아래 무비 강백을 법강사로 모시고 전강식을 올리게 되었음을 고하나이다. 하늘에 해는 하나이나 사물에 응하면 사물마다 그림자가 나타나듯, 하늘에 하나인 달이 뜨면 일천 강에 일천 달이 나타나듯, 무비 스님이 계셨기에 오늘 저희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의 지혜에 비하면 보름밤의 한낱 반딧불에 지나지않으나, 오늘을 계기로 삼아 저희는 쉼없이 정진할 것입니다. 적멸 보리를 증득하여 환화(幻化) 같은 함식(含識)들을 모두 제도하는 날까지 물러서지 않으리니, 상서로운 자비를 드리워 저희를 지켜 주소서. 나무 시아본사(是我本師) 석가모니불!”
향 한 대 이마 위로 들어올렸다 불 당겨 바치고, 한 팔 장삼 자락 고이 거두어 쥐고 맑은 차 한 잔도 바쳐 올린다. 그리고 종단의 어른 스님과 교학의 현장에 몸 담고 있는 여러 스님들이 불단 앞에 줄 지어 나와 꽃 공양을 올렸다. 오늘 전강식이 열리는 곳, 보조 이후 열다섯 국사가 배출되었던 송광사의 보성 방장 스님께 여쭙는다. 이 법석은 법다운 것인가. 큰 지팡이 하나 들고, 좌우로 부축을 받으며 법상에 오른 증명 법사 스님이 이 법회가 여법하면서도 유효함을 증명하신다.
여래의 교해(敎海)를 아난에게 전함이여!
뿔이 부러진 진흙소가 다시 마옹(馬翁)을 잃어 버렸도다.
무비의 한 등(燈)이 일천 등을 켰으니
촌부(村夫)는 샘에 비친 달을 짊어지고 돌아가는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중들이여! 망령되이 선과 교를 분별하지 마라.
푸른 사자와 흰 코끼리가 함께 전단나무 숲 속에서 사는구나.
전단나무 숲을 알고자 하는가.
하늘 위에는 달 그림자가 없고, 인간은 물에 젖지 않는구나.
억!
증명 법사 보성 스님은 어깨에 비스듬히 괴어 놓고 있던 지팡이를 곧게 세워 법상을 쿵, 치는 일로써 법문을 마무리했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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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법사님의 법회는 다이해하기 어렵사오나 무비스님의 강맥을 잇는 아홉스님의 설법듣기를 발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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