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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숭리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문숭리
마라톤과 인생! ----------------------------------------------------- 문숭리
필자는 지난 4월 충남 논산에서 생업을 이어가던 날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내집처럼 들락거리던 어느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신문을 뒤적거리게 되었다. 그냥 전체적인 내용만 살펴보다가 내 시선이 머무르게 하던 두 기사와 더불어 사진 한장이 있었다. 사진이 두 장임에 불구하고 이 글에 인용하는 마라톤에 나오는 실제 인물이 필자에게는 세상 사람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 뿐이었고 기사내용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나오는 인물은 내 인생에서 한 번쯤은 다시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기에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잠시 멈추게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두 번째 글과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특별히 다시 글이 완성되는 대로 소개하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그날 이미 시간이 다 흐르고 있는 신문이기에 한장만 가지고 나와서 조선일보 몇일자 신문인지는 모르지만 4. 10일 전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라톤 이야기 실제 인물이 2009. 4.19. 충북 음성 반기문 마라톤 대회에 참가를 하는 마라토너 이야기 였기 때문입니다.)
반기문 마라톤 대회가 이번에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대충 알고 있는데 필자가 꼭 한번 참가하고 싶은 그런 마라톤 대회다. 그 이유인즉 반기문 유엔사무 총장을 직접 한번 만나본 적도 없지만 필자하고 한 다리 건너 인연이 깊은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생가가 필자의 본가에서 지척이고 이미 그분의 존재를 오래전 부터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딸이 그 분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 시절에 통역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중국/일본 유학과 더불어 미국 유학은 아직 다녀오지 않았는데 한국말과 더불어 일본어/영어는 동시 통역이, 중국어/프랑스어는 일상 소통 정도)
이래 저래 내 고향 사람이거니와(충주고등학교 출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고등학교 시절에 미국을 지도로만 보고도 영어 웅변대회에서 전국 1등을 해서 미국 케네디가 초청을 해서 처음에 미국과 인연을 맺었고 유엔에서 근무하게 되는 첫 디딤돌이 된 것이라고 했음. 그후 서울대를 졸업하고 당시 외교부/오늘날 외교통상부에 들어갔음) 내 딸이 인연이 있었던 지라 그 분의 명의로 된 마라톤에 한 번 선수로 뛰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할 것은 아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충청도에서는 김종필 이라는 인물이래 대통령을 출마할 인재도 인재지만 당선 가능성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듯이 김종필씨와 같이 영원한 2인자 신세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지역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이 이인제 국회의원인데 어느 당인지는 잘 모르겠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갈지자를 하며 한, 두번 모자라는 열번의 당적을 옮겨다녔던 정치인이라 그 분이 소속해 있는 당을 알기란 지금도 퍼즐게임보다 어렵다. 그런데 반기환 유엔사무 총장이야말로 한국에서는 충청도에서 대통령이 당선된 적이 없지만 실질적인 것을 차지하고라도 명목상으로는 세계 대통령이나 다름이 없으니 필자가 그 분의 이름이 걸린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충청인- 그것도 충청북도-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기에 기필코 2009년인 금년에는 마라톤을 참가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신문을 읽고 있던 순간에는 이미 접수 마감 이후인지라 그렇게 필부의 망상으로 끝났다 하는데 이 신문의 기사를 읽고 난 후 또 다른 기회가 필자를 자극했다. 금년에 졸업한 방송대 마라톤이 6월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마라톤 축제도 이제 한, 두번 시작에 불과 한지라 초기로 금년이 세번째라 한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참가접수를 했다. 졸업생이 아닌 동문으로 가입하고 동문회비와 더불어 소정의 마라톤 참가비를 내고 6월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시간이 나면 평소에 몇 번은 실제 연습을 통해서 마라톤에 대한 진정한 의미도 한번 느껴 보기로 했다. 하지만 필자가 연습을 한 번도 하지 않고 거의 6월이 다 되어 딱 한번 연습삼아 현지에서 생업차 휴무를 하던 날에 천안 목천에 있는 독립기념관 코스를 잡아 5Km 실전으로 뛰어 보았다.(일주일 동안 허벅지에 근육통을 느끼면서 지냈고 더 연습을 하기가 겁이 났다. 그냥 대회 당일날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연습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기어가도 한 시간 안에 5km 단거리는 할 수 있으라는 생각으로 -여자도 10km를 달린다-말이다.)
(젊은 학창시절 이후 지천명을 넘어 30년 만에 다시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연습 코스를 실전처럼 달려 보았다. 5km -대략 45분 정도 소요) : 충남 천안시 목천읍에 있는 전국 새마을 금고 연합회 수련원을 반환점을 잡고 독립기념관에서 왕복 거리를 측정했다.) - 운동화는 34,000원 중저가에 하의 조깅 반바지가 14,000원/그냥 반바지는 5천원~1만원이면 충분한데-필자 생업이 옷장사 인지라- 조깅 반바지는 내부가 남자들 것은 남자들의 자존심을 좌우로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주는 망사가 이중으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그 부분이 없어도 흔들 거릴 것이 없기에 다소 가격이 약간 저렴하지 않을까? ㅎㅎㅎ -)
드리어 신록의 계절의 마지막 한주는 한국사의 비극이자 세계인에게 한국 정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여실이 보여주었던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6월 첫째 일요일에 서울 상암동 월드컵 축구장이 있는 상암월드컵공원에 모여 강변북로에서 펼쳐지는 방송대 마라톤 대회에 보무도 당당하게 초보 마라토너로 처음 가슴에 배번호를 달고 일반인들 조차 5km 도 마라톤이라냐고 비아냥 거릴지 모르지만 참가하는데 의미를 부여했다.
방송대 국문과를 3학년에 편입하여 2년 과정을 10년 동안 징검다리로 졸업을 하면서 실제 방송대에 지인도 후배도 없이 나홀로 학생이었다. 대부분 방송대 학우들이 필자와 대동소이 할 것이다. 학생회에 가입하여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한 자신만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렇게 졸업을 하는 것이 대다수다.
(상의와 배번호는 방송대 마라톤 참가자에게 주최측에서 제공한 것이다. 행사에 앞서 집으로 배달되어 이날 입고 나왔다. -- 상암동 월드컵 축구장 인근에는 처음 발을 디뎌본 날이었다. -)
(방송대에도 외국에서 교환학생이 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드리어 방송대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준비운동과 식전 공연이 여러팀 실시 된 다음에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은 1만명 전후였고 가족과 더불어 2만여명 전후 정도로 공원에 발 디딜틈이 없었다. 마라톤 대회 규모가 전국에서 5대 마라톤 대회안에 속한다고 한다. 그 의미를 단상에 참석한 내외 인사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한국 정치에서 내노라 하는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스포츠 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체육공단 관계자들... 그리고 국회의원 경호인력이 무대 좌우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름을 확실히 아는 국회읜원 한나라당 박진의원/민주당 송영길 의원이고 그 외에도 십 여명이 거론 되는 듯 싶은데 얼굴이 눈에 익숙치 않았다.- 이 분들도 이미 방송대 동문자격으로 단상에 앉아 있는 것이다.물론 젊은 시절에는 또 한번의 대학을 나온 분들이 대다수 이지만 국회의원 중에 수 십명이 방송대에서 사회적인 신분/나이를 떠나 다시 학생 신분이기도 하다.)
장거리인 20Km 하프코스, 10km, 5km 순서로 시간차를 두고 1만여 남녀노소 늦깍이 학생들이 열의에 차서 저마다 폼을 잡으며 마라톤이 장관을 이루었다.
(사진상으로 필자가 1등으로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5km - 39분에 완주를 했습니다. 5km 참가자 4000명 중에 필자는 분명 3500등 안에는 들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뒤에는 500명이 필자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 노병은 죽지 않았다는 맥아더 장군의 어록을 상기하면서 ...ㅎㅎㅎ )
그리고 처음으로 이미 방송대를 졸업한 동문이자 선배이지만 후배 학우들과 캔맥주와 수박등 과일과 음식으로 회포를 나누고 좋은 추억으로 하루를 남기게 되었던 날입니다.
다음날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말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졸업장을 찾으러 성수동에 있는 방송대 서울 제1지역 대학을 다녀왔습니다.
(이미 30년 전 군 복무시절에 전우신문에 시와 수필로 등단을 했는데 젊은 시절에 나온 대학-법대/행정학과-이 아닌 문학도로서 국문학을 전공했느냐고 묻기에 2년 과정을 10년에 걸쳐 소설/시/수필 습작을 병행하면서 지천명을 한, 두해 넘기고 학위 2개를 소유한 사람이 대한민국 인구 5000 만명 중에 1%도 안 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1~2개월 전후로 그동안 30년 동안 아마추어 문학도로서의 졸작을 모아서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편집을 마치고 인쇄 대기 중입니다.)
사람들이 왜 마라톤을 하느냐?
사람마다 각자 그 분들만이 마라톤을 해야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위 신문 스크랩 첫 글에 나오듯이 77세 된 할아버지조차도 건강과 더불어 자신의 의지와 싸우며 마라톤을 하고 있듯이 필자 또한 그런 이유가 한 두가지가 있다면 최종적으로 문숭리라는 필명을 걸고 완성해야 할 단 한편의 불후의 명작 -대통령의 아들- 이라는 이름의 농민소설을 위한 인생 마라톤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소설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10년 이상 전국 농촌을 주유하면서 소재을 모으면서 구상을 한지는 오래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필자의 아버지와 큰형님을 대역으로 등장시켜 다른 사람들이 아닌 농민들이 자신의 이야기일지라도 그들이 이 소설을 읽고 농부로서의 기쁨이나 자부심이 아닌 세상 끝날까지 대한민국 농촌에 단 한명의 농부만 남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농부로서의 희망을 심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쉰 다섯살 전후(3년후)로 그 소설-대통령의 아들-의 첫장을 써 나가기 시작할 생각입니다.
문숭리 필명을 걸고 그 소설이 마지막 징검다리라면 그 전에 나오는 여러 책들은 그 한편을 위한 전주곡입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미 고대에 이름도 없는 한 병사가 조국의 승리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죽어갔듯이 그런 마음으로 필자는 글을 쓰고자 마라톤에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이랍니다. 매일은 아닐지라도 매주 토요일 일몰 전후로 마라톤으로 한 주를 마감해 보기로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특별한 부담이 없기에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 끝날까지 인생을 달려 보고자 합니다.
그럼 다음에는 당신이 달리고 싶은 마라톤에 대해서 들려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2009.6.9. 내 고향 충청도 충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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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같은 선배님 글 솜씨에 한 번 더 놀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시작하면 할 수 있다는 도전의 용기가 젊은(?) 후배에게 꿈을 갖게합니다, 늦었다 할 때 시작하는 용기와 실천의 행동이 자아의 발전을 얻을 수 있겠지요 ,선배님의 대단한 열정, 이동근선배님 존경합니다,
이제 시작인데 그 어느 것보다 방송대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 소중한 학교라오. 여생동안 마라톤을 하는 심정으로 함께 하고 싶어 첫 발을 내 디딘 것인데... 동문이 아닌 언제나 영원한 학생으로 말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