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다문화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일까? 한국 자본주의는 저임금과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규율을 통해 고도성장으로 진입한 경험이 있다. 두 요인은 서로 맞물려 있다. 경쟁이 치열할 때 자본이 이익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저임금노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엄격한 규율이 저임금노동을 강제하기 위해 도입된다.
민주화의 진행과 더불어 저임금도 강한 규율도 점차 어렵게 되었다. 직접적 규율이 힘들 때 간접적 방법이 도입된다. 한국인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 외국인노동자가 대규모로 들어오게 된다. 외국인으로 노동자의 공급이 많아지면 한국인 노동자의 발언권은 더욱 낮아지게 된다. 지불능력을 갖춘 대기업,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의 임금은 올라가도 외국인 유입에 노출된 건설, 요식업 등 부문에서는 임금이 낮게 고착된다. 외국인노동자의 공급은 사실상 거의 무한정에 가까우므로 내국인의 자본에 대한 대항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노동자가 내부노동자와 외부노동자로 분할되는 데에는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노동자가 분열될 때 정치세력이라면 당연히 분열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꾸려야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의 보수세력은 외국인노동자의 확대만을 주장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외국인노동자 천만명 도입 주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의 수가 적은 것일까? 인터넷언론 ‘이슈타임’의 이호연 논설위원의 글을 보자.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체류외국인 통계는 금년 3월 기준 225만명이다. 전체 인구의 4%가 넘는다. 금년 6월 말 기준 취업비자를 받은 외국인 근로자는 101만8419명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불법체류자 32만명을 합하면 130만명이 넘는다. 작년에 비해 13만 명이상 증가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공식적인 실업자 수보다 많다. 우리나라의 2014년 외국인 근로자 수는 91만명이었는데,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동년기준 외국인 근로자수는 78만명이다. 인구수를 감안하면 우리가 일본에 비해 3배 가까이 많은 셈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우리보다 일본이 먼저 경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책 변화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이럼에도 중소기업중앙회를 비롯한 다수의 단체들은 외국인 근로자 쿼터를 늘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외국인노동자를 불법 고용한 고용주에 대한 처벌이야 과태료 500만원이 전부다. 게다가 외국인고용허가제를 도입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시행하는 ‘외국인고용부담금’제도조차 한국에는 없다. 한국인을 구하려 해도 못 구하는 곳은 사실 농촌일손 등 특수한 경우밖에는 없다. 대부분은 너무 열악하거나 노동강도가 임금에 비해 너무 세서 한국인들이 취업을 기피하는 경우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기득권세력은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을 조장, 묵인하는 것에 다름없다.
저임금노동자가 일하는 노동시장에 너무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유입되면서 저소득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뜨렸다. 이론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개진할 형편이 아니기에 거친 소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한국인노동자의 불만이 증폭될 때 이를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문화주의가 화려하게 등장한 시기가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으로 노동시장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인 저임금노동자들이 타격을 받을 때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문화주의에는 저임금노동자들의 생존권적 불만을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덮으려는 기득권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강미옥이 지적하듯이 한국에서 다문화주의는 주로 보수기득권세력의 주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다문화주의가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기 어려워진다.
외국인노동자 천만명을 받아들이자던 삼성경제연구소의 주장이 정말 자가당착적인 것이 미국의 경우 보수적인 학자까지 다른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 사무엘 헌팅턴은 자신의 책에서 분열국이 처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해서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내부가 여러 문화권으로 분열되어 있는 분열국은 국가통합에 많은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유고 분열에는 종족과 종교가 리비아 시리아 등 중동국가의 분열에는 부족 및 종파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분열국은 외부로부터의 사소한 자극에도 내부가 반응해서 긴장상태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바른 마음’의 저자 조너선 화이트(Jonathan Haidt)는 테드(TED) 강연 ‘분열된 미국은 치유될 수 있는가’ (can a divided America heal)에서 중요한 발언을 한다. 윤리심리학자인 하이트는 한 국가내부의 종족적 다양성은 사회적 자본과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하이트는 ‘나홀로 볼링’의 저자 로버트 퍼트남의 연구데이터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은 서로가 비슷하다고 생각할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이 신뢰는 부를 재분배하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쉽다”고 주장한다. 하이트는 강연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스웨덴이 만일 미국 같은 분열국가라면 현재 수준의 복지가 가능했을 지를 묻고 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국가의 복지는 작은 단일민족국가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에서 다문화에 대한 위로부터의 일방적 옹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하다. 인종적으로, 소득수준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있는 미국을 가까스로 접합시키는 힘은 수정헌법에서 나온다. 정서적으로 통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기에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수정헌법을 되뇐다. 미국에서 수정헌법에 대한 충성은 현존하는 갈등이 증폭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힘이다. 그런데 단일민족이라는 장점 하나로 수많은 갈등의 연쇄를 버텨온 한국 사회가 유일한 장점을 놓아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문화주의가 일방적이었던 만큼 아마 앞으로 터져 나올 다문화반대의 목소리도 거칠 것이다. 거친 페미니즘을 부인하는 ‘착한 페미니즘론’이 지식인의 오만이듯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외국인까지 포용하는 ‘착한 저소득노동자론’도 지식인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일방적 다문화주의 이제 다시 바라보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