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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4월 13일<임인> 임진왜란 발발>> 임진년(1592)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음. 삼도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임진년(1592) 5월 3일 [양력 6월 12일]<임술> (...)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 원균이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임진년(1592) 5월 29일 [양력 7월 8일]<무자> - (노량, 사천해전) (...) 맑음.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또한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활을 쏘는 군인과 육탄전을 벌인 군인 중에서도 총알 맞은 자가 많았다. 적의 배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계사년(1593) 2월 초8일 [양력 3월 10일]<계사>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 원균이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약속 시간에 늦은 잘못을 크게 말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다고 했다. 내가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안으로는 도착할 것이다." 라고 약속했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나부끼면서 들어왔다. (...) 계사년(1593) 2월 22일 [양력 3월 24일]<정미> - (웅천해전: 2월 15 ~ 22일) (...)바람이 조금 멎는 듯하기에 다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두 명의 승장(삼혜,의능)과 의병(성웅지)을 제포로 보내서 상륙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우도의 여러 장수의 배 중에서 변변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왜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를 타서 전선을 모두 모아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 당하였다.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마음이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냈다.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은 못 본 체하며 끝내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 통분했다. 이 때문에 원균에게 질문도 했는데 실로 한심한 일이었다. 오늘의 억울함을 무슨 말로 다 하랴. 이 모두가 원균 때문이다.(...) 계사년(1593) 2월 28일 [양력 3월 30일]<계축> (...) 우리 배가 김해강(낙동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했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둘러쌌다.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참사의 사후선 등 2척이 섬에 출몰하여 들락날락하면서 태도가 엉뚱하기에 2대를 묶어서 원균에게 보냈다. 고기 잡는 어부들의 머리를 베어 오자고 군관을 보낸 것인데 화를 냈다한다. (...) (어부라면 조선인 어부를 말하는 것 같음) 계사년(1593) 2월 23일 [양력 3월 25일]<무신> (...) 아침 식사 후에는 원균이 왔으며, 순천, 광양, 가덕, 방답 등도 왔다. 이른 아침에는 소비포, 와량 등이 방문했는데, 원균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은 이를 데가 없었다.(...) 계사년(1593) 3월 초2일 [양력 4월 3일]<정사> (...) 이영남과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마음의 한탄이 되었다.(...) 계사년(1593) 5월 초8일 [양력 6월 6일]<신유> (...) 새벽에 떠나 사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만호 이여념이 나오기에 우수사(원균) 있는 곳을 물었다. 창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방문해서 수사 원균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계사년(1593) 5월 14일 [양력 6월 12일]<정묘> 맑음. 선전관 박진종과 선전과 영산령 예윤이 임금의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그들에게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장수들의 하는 짓을 들었다.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나는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잔 나누었다. 영남 수사원 평중(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 계사년(1593) 5월 15일 [양력 6월 13일]<무진> (...)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임금께 올리려는 문서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내용의 고약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계사년(1593) 5월 21일 [양력 6월 19일]<갑술> (...) 이영남이 다녀갔다. 원 수사(원균)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부대를 크게 동요시켰다. 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계사년(1593) 5월 27일 [양력 6월 25일]<경진> (...) 경상도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다. 내용을 보면, 원 수사(원균)는 송경략(송응창)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습다.(...) 계사년(1593) 5월 30일 [양력 6월 28일]<계미> (...) 이홍명이 방문했다. 원 수사(원균)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던 중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였을 때, 공문서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이더라고 한다. 가소롭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다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 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 그러하니 어찌하랴.(...) 계사년(1593) 6월 5일 [양력 7월 3일]<무자> (...)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들어가 공격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계사년(1593) 6월 10일 [양력 7월 8일]<계사> (...) 새벽 2시 경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적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의 흉계와 시기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 6월 11일 [양력 7월 9일]<갑오>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왜적을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 원균에게 보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대답이 없었다.(...) 계사년(1593) 7월 21일 [양력 8월 17일]<계유> 맑음. 경상 우수사(원균)와 충청수사 정걸이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균이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도 거짓스러워 말할 수 없다. 이러고서도 일을 같이 한다면 어찌 뒷걱정이 없을까? (...) 계사년(1593) 7월 25일 [양력 8월 21일]<정축> (...) 조붕이 와서, "제찰사의 공문 중에 원균을 문책하는 말이 많았다"고 한다. 계사년(1593) 7월 28일 [양력 8월 24일]<경진> 맑음.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썼다. (...) 원균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 갔다. (...) 사도 첨사 김완이 복병했을 때 잡은 포작 10명이 왜복을 바꿔 입는 등 하는 짓이 이상해서 추궁했다. 어떤 근거가 있는 듯하더니, 원균이 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족장을 10여 대씩 때린 후 놓아주었다. (전공에 눈이 먼 XX) <<계사년(1593) 8월 1일: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 통제사 임명됨>> 계사년(1593) 8월 초2일 [양력 8월 27일]<계미> (...) 해질녘에 우수사 이억기가 내 배로 와서 (...) 원 수사(원균)가 망령된 말을 하며 내게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더라고 전했다. 모두 망령된 짓이라 상관할 필요가 없다. (...) 계사년(1593) 8월 초6일 [양력 8월 31일]<정해> (...) 저녁에 원균이 오고, 이경수, 영공 이억기,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하였다. 원균의 말에 번번이 모순이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 계사년(1593) 8월 7일 [양력 9월 1일]<무자> (...) 저녁에 경상 수사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했지만, 원균과 그 군관은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계사년(1593) 8월 9일 [양력 9월 3일]<경인> (...) 오후에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갔더니 충청 영공도 왔다. 원균은 복병을 일제히 보내기로 약속해 놓고, 혼자서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계사년(1593) 8월 18일 [양력 9월 12일]<기해> (...) 조붕이와서 말하기를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 갔다"고 했다. (이순신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에 원균의 노골적 반발) 계사년(1593) 8월 19일 [양력 9월 13일]<경자> 맑음. 아침 식사 후 원균에게 가서 내 배로 옮아 타자고 청했다. 우수사와 정수사도 왔다. 원연도 함께 이야기했다. 말 가운데 원균의 음흉하고 고약한 일이 많으니, 허무 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계사년(1593) 8월 26일 [양력 9월 20일]<정미> (...) 흥양 배홍립이 와서 명절 제사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청하기에 약간 주었다.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가소로웠다.(...) 계사년(1593) 8월 28일 [양력 9월 22일]<기유> 맑음. 원균이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심히 해괴하다. 계사년(1593) 8월 30일 [양력 9월 24일]<신해> 맑음. 원균이 또 와서 영등으로 가기를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겨우 7, 8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 그의 마음 쓰고 행사함이 이 따위다. 계사년(1593) 9월 초6일 [양력 9월 30일]<정사> (...) 이억기의 배에 가서 하루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원균의 음흉한 일을 듣고, 정담수가 근거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꼴을 들었다.(...) 갑오년(1594) 2월 11일 [양력 4월 1일]<경신> (...) 아침 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갔는데, 원균이 왔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미친 말이 많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 갑오년(1594) 3월 초3일 [양력 4월 22일]<신사> (...) 경상 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되, "수군을 많이 잡아오지 못했다고 원균에게 매 맞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 하더라"고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갑오년(1594) 3월 13일 [양력 5월 2일]<신묘> (...) 오후에 원균이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고백하므로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사진과 이응원 등이 왜군 복장을 한 자를 목 잘라 바친 일은 고쳐 보냈다. (전과를 높이기 위해 조선인의 시체에 왜군의 옷을 입혀 목을 잘라 거짓 보고한 짓) 갑오년(1594) 4월 12일 [양력 5월 31일]<경신> 맑음. 순무 어사(임금의 특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원균, 충청 수사도 함께 와서 술을 세 순배했다. 원균은 짐짓 취한 체하며 함부로 무리한 말을 했다. 순무 어사도 괴이함을 이기지 못했다. 하는 짓이 극히 흉악했다. (...) 갑오년(1594) 5월 13일 [양력 6월 30일]<경인> 맑음. 이날 금모포 만호의 보고에 "경상 우수사 관할의 바다에 들어가 포작(천민 신분의 어부)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지에서 붙들렸는데, 보자기(천민 신분의 어부)들은 원균이 있는 곳에 숨어 있다고 하므로 사복들을 보내어 붙들어 오려는데, 원균이 크게 성내면서 도리어 사복들을 결박했다"고 한다.(...) 갑오년(1594) 6월 4일 [양력 7월 21일]<신해> (...)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 여러 장수들 및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 는 내용이었다. 송구하고도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균이 술 취해서 망발을 부린 때문이었다. 갑오년(1594) 6월 14일 [양력 7월 31일]<신유> (...) 충청 영공 이순신과 사도, 여도, 녹도와 함께 활 20순(1순:화살 다섯 발 쏘는 것)을 연습했는데, 충청이 아주 잘 맞혔다. 이날 경상 수사 원균이 활을 잘 쏘는 부하를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의 처소에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 갑오년(1594) 7월 21일 [양력 9월 5일]<정유> (...) 늦게 소비포가 방문해서 말하기를 "기한에 대지 못했다고 해서 원균에게 곤장 30대를 맞았다"고 한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 갑오년(1594) 8월 17일 [양력 9월 30일]<임술> (...) 원수 권율이 정오에 사천으로 와서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해서 곤양 말을 빌려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수령의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 공사간 인사를 마쳤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균을 몹시 책망하니 원균은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다. 가소로웠다.(...) 갑오년(1594) 8월 30일 [양력 10월 13일]<을해> (...) 김걍간이 서울로부터 영의정과 병조판서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원균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 갑오년(1594)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 늦게 원균이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기에 사정에 나가 앉았다. 활을 쏘았는데 원균이 9분을 지고, 술이 취해서 갔다. 갑오년(1594)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 소비포는 원균이 모함하려고 하는 까닭에 달밤을 이용해서 본포로 돌아갔다. 갑오년(1594)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 늦게 우수사와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던 중에 원균의 속이고 무고하는 짓이 많이 논의되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나중에 원균도 왔다. 그 흉패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을미년(1595) 2월 20일 [양력 3월 30일]<계해> 맑음. 우수사, 장흥, 조방장 신호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을미년(1595) 2월 27일 [양력 4월 6일]<경오> 맑음. 한식.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게 했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두세 번 거듭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 너무도 무식한 것이 가소로웠다. (이순신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데 반발하다 195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 얼마 뒤에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신년(1596) 윤8월 24일 [양력 10월 15일]<무자> 부사와 함께 가리포(완도읍)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었다. (...)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의 흉악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정유년(1597) 1월 14일 - 정유재란>> <<정유년(1597) 2월 25일 - 이순신 장군 해임>> <<정유년(1597) 3월 4일 - 이순신 장군 하옥>> <<정유년(1597) 4월 1일 - 이순신 장군 사면>> <<정유년(1597) 4월 13일 - 이순신 장군 모친상>> 정유년(1597) 4월 27일 [양력 6월 11일]<정해> 맑음. 일찍 떠나 송치(순천 서면 학구리) 밑에 이르니, 구례 수령이 점심을 지어 보냈다. 순천 송원에 이르자 이득종 등이 문안했다. 저녁 때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상하고 또 안부를 물었는데, 위문하는 말이 자못 간곡했다. 정사준도 방문해서 원균의 망령되고 패악한 짓을 말했다. 정유년(1597) 4월 30일 [양력 6월 14일]<경인> (...) 병사 이복남이 식사 전에 방문해서 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5월 5일 [양력 6월 19일]<을미> (...)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으로부터 와서 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배반하므로 장차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정유년(1597) 5월 7일 [양력 6월 21일]<정유> (...) 서산 군수 안괄이 한산으로부터 와서 음흉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5월 8일 [양력 6월 22일]<무술> (...)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상하니, 이것은 원수의 명령이었다.(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원균이 문상을 보낸 일조차, 권율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경신이 한산에서 온 뒤 음흉한 원균의 말을 많이 했는데, 원가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사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사통(私通)하려고 하였는데,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악을 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드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정유년(1597) 5월 11일 [양력 6월 25일]<신축> (...) 광양의 전 현감 김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어서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다가 방문해서 근래의 소문을 많이 전하였다. 그 소문이란 모두 흉인(원균)의 일이었다.(...) 정유년(1597) 5월 20일 [양력 7월 4일]<경술> (...)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기다렸다.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않았다.(...)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원균)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라 일을 어찌할고"하는 것이었다. (...) 정유년(1597) 5월 23일 [양력 7월 7일]<계축> 아침에 정사룡, 이사순이 방문해서 원균의 말을 많이 전했다. (...) 정유년(1597) 5월 28일 [양력 7월 12일]<무오> (...)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의 수령 신진이 만나 보기를 반갑게 여기며, 성안 별사로 맞아들여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원균의 미친 짓을 많이 말했다. (...) 정유년(1597) 6월 12일 [양력 7월 25일]<신미> (...) 늦게 승장 처영이 방문해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 갚아 보냈다. 그는 적의 정세도 잉야기하고, 원균의 일도 이야기했다.(...) 정유년(1597) 6월 17일 [양력 7월 30일]<병자> (...) 아침 식사 후에 원수에게로 갔더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고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의 적을 무찌른 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지 않고, 오직 안골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만 말하며, 수군 여러 장수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했다.(...) (1월에 조정에 올린 원균의 장계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수군으로 무위를 떨치고,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정유년(1597) 6월 25일 [양력 8월 7일]<갑신> (...) 저녁에 종 경이 한산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놀라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다니 통탄함을 어찌 말하랴.(...) 정유년(1597) 7월 14일 [양력 8월 26일]<계사> (...) 오후 10시경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고, 또 김해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김억의 고목을 보여 주었다. 이에 의하면 '초7에 왜선 500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초9일에 왜선 1000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두모포에 표류해 대었고, 또 7척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곧 황 종사관이 군대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가 일을 의논하고 (...) 정유년(1597) 7월 15일 [양력 8월 27일]<갑오> 아주 늦게 중군 이덕필이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 편에 들이니,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저 통분하고 통분할 뿐이다. 막을 방책이 없음에 한스럽다.(...)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투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곤장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을 명한다) 정유년(1597)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 (칠천량 해전) (...)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 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대강대강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탄스런 일이다. (...) 저녁때 영암 송진면 사는 노비 세남이 서생포로부터 발가벗은 알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의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초6일 옥포로 들어갔다가 초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서 다대포에 이르러 왜선 8척이 정박해 있음을 보고 여러 배들이 바로 돌격했더니, 왜인들은 남김 없이 육지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어 불 지르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였다. 그때 적선 1000여 척이 대마도로부터 건너오는데, 싸우려고 했더니 왜선들은 흩어져 회피하므로 끝내 잡아 초멸할 수도 없었다.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포 앞바다까지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려고 하자 거의 다 살육을 당하고, 세남만 혼자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건져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을 힘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거듭거듭 생각할수록 분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이 적에게 포박되었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고 탄식할 뿐이다.(...) 정유년(1597)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밤 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곡이 터짐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곧 원수는 그 이상 더 좋아할 수 없었다.(...) 정유년(1597) 7월 21일 [양력 9월 2일]<경자> (...) 점심 식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수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방문했기에, 패하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와 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차마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했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수령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정유년(1597)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음. 아침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방문해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 (이순신 장군 재임명)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는데, 내용인즉 겸삼도통제사의 명령이었다(....) |
첫댓글 원균은 시기심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산수군을 몰살 당합.....열등감... 노장군생각나네여.. 난중일기 후반부는 초서로 써서..아직 해독이불가합니다..
이런넘을 케이비에스에서는 재조명 어쩌구하면서 은근히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생양아치 같은 원균노무세키을...사사건건 시기,질투로 이순신장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의 그때 속이 어떠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