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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침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가이드
성경을 던져 죽어가면서 전도한 토마스 선교사 이야기 행 7:51-60, 행 12:1-2
순교는 어느 종교에서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한 구약의 선지자들, 예수의 12제자들, 그 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로서 믿음을 지켰고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순교한 성도들과 6.25한국전쟁에서 북한의 공산당에 의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역사가 자랑스럽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교회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마지막 주일을 순교자 주일로 지킨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에 가면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은 1984년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세워졌고 1989년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1884년 이땅에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이가 약 2,600명으로 추산된다고 기록하였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 3000명 정도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다.
순교자의 80%는 6.25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산당들에 의해 순교를 당한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김일성왕조는 태양아래 신이 둘 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보니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야 말로 척결의 1순위일 수 밖에 없다. 초창기에는 혹세무민의 죄로, 일제 강점기에는 천황숭배를 거역했다는 죄로, 그리고 6.25전쟁중 3개월간 공산치하에 있던 곳에서는 기독교가 친미 세력이고 반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서 후퇴하면서 까지 교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등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오늘 말씀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논하면서 우리자신들을 연관시켜 보았다. 그러면 기독교 2000년 동안 성경에 나온 순교자들부터 알아보자.
1. 교회시대의 첫 순교자 스데반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말씀만을 온전히 전하는데 전념하고자 교회는 정직하고 평판이 있고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안수하여 집사로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이다. 예루살렘교회의 집사직에 임명된 스데반은 특히 그리스말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히브리말하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구제에 있어서 불만이 없도록 연보가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직임을 맡고 있었는데 스데반은 그의 직임을 잘 감당해서 사도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교회는 더욱 더 든든하게 세워져 가고 있었다.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까지 맡았는데 그는 큰 능력으로 백성들 가운데서 이적들과 기적들도 행하였으니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 초창기에 가장 유능한 일꾼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스데반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제일 먼저 박해받는 표적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평신도인 스데반은 주의 군대의 최일선에 서게 되었는데, 그만큼 그에게는 마귀사탄의 공격 표적이 되었으니 그가 받는 고난은 목숨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스데반은 어더서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집사인데 이런 일로 인하여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스데반과 성경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되었었다. 유대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스데반의 말에 대해 반박할 수 없게 되니 그들은 능히 스데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을 때 처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가서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는 말을 한 것을 들었다고 하여 스데반을 잡아 공회로 데려다 놓고 거짓증인을 세워 스데반이 신성모독하는 말을 그치지 않는다고 거짓증언을 하였다. 그래서 스데반은 회당에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앞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론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사도행전 7장이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논리적으로 말하니 그를 붙잡아온 사람들도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아무 흠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스데반은 본론으로 들어가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다고 믿으므로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으셨는데 어떻게 성전 안에만 계시겠느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계시고 그런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들으려면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만 가야한다고 하면서 오로지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 스데반은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이 말은 성전 안에다 하나님을 가두어버린 조상들이 잘못한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스데반의 말을 듣고 있는 그들도 조상들처럼 따라서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 한 것이다. 이제 스데반이 가장 핵심적인 말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말한다.
이스라엘의 조상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스라엘 선지자들 가운데서 박해를 받지 않은 선지자가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은 말들만 골라서 듣는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싫어한다. 이스라엘의 참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참선지자들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뉘우치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문제는 그들은 참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참선지자들을 죽임으로 내 몰았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말하기를 지금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도 이런 일들을 똑 같이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아가면서까지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의인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당신들이 그 의인을 죽였다고 가슴을 찌르는 설교를 하였다.
행7:52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보여 준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53 너희가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하신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말인데 이 말을 듣고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세요. 54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고 하잖아요. 자기들 스스로도 스데반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하였지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57 귀를 막으면서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악에 완전히 점령당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은 말로 들립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을 양심이 화인 받았다고 말합니다. 양심이 화인받은 사람들에 대해 스데반의 말을 다시 봅시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는 것은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뜻인데 몸에 할례를 받았지만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으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자들의 말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으니 목이 뻣뻣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자기들의 잘못이 들어나 스스로 죄인이란 것을 알고 겸손해 질수 있는데 목이 곧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말아닙니까?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교만은 패망하는 데 앞잡이라고 했겠어요? 스데반은 분노한 무리 앞에서 겁내지 않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돕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옆에 서 계신 것을 보고(55절) 그는 그들에게 오히려 회개할 기회를 주는 듯한 어조로 그 명백한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는데 보통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여기에서는 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교의 자리에 서 있는 스데반을 도우려 힘을 보태고 계신 것입니다.
56 스데반은 말하기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증인들이 사형 집행관에게 자신들의 옷을 맡깁니다. 두 증인이 사울에게 옷을 맡긴 것은 사울이 스데반의 처형의 집행관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처형하는 책임자로 사울이 등장하는데 후에 이 사람은 초대교회에 가장 큰 일을 한 바울이 됩니다.
스데반은 이번이 그의 마지막 설교인 줄을 알았던 그는 양날 가진 검 같은 말로 청중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분노하건, 이를 갈건, 그는 상관치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하니 그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칠 때도 스데반은 침착하게 마지막 기도했습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유일하게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 이외에도 순교한 성도들에 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곳처럼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아마 모든 성도들이 원수와의 싸움에서 임종시에 꼭 필요한 교훈이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에는 애통하는 벗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죽지 못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가는 원수들 앞에서 죽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그의 평온을 잃거나, 적들에게 자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춘 돌이 그를 땅에 쓰러트리자 그는 다시 일어나 앉아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서 하고 긴 여름날 놀이에 지친 아기가 어머니 품에서 잠이 들듯이 잠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스데반이 날아드는 돌 앞에서 스데반의 임종의 순간은 고요와 평화, 확신,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침상에 둘러선 벗들의 고별 앞에서 더욱 평화스럽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면,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옆 사람들은 울어도 우리는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늘로 떠나는 임종의 자리에서는 죽는 당사자는 그 누구보다도 침착합니다. 그는 그가 지금 누리는 평안과 앞으로 그가 기대하는 바를 벗들에게 말하면서 고요히, 영광 속으로 옮겨집니다.
스데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요, 스데반의 믿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으며, 장차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스데반에게 함께하시던 성령님이 우리들과도 함께 할 것이니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스데반과 동일한 영혼의 안면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은 승리자로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 '스데반'의 뜻은 '왕관'인데, 과연 그는 그날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받고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됨으로써 교회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그날의 승리자는 그의 원수들이 아니라 원수들이 죽였던 스데반이였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성문 밖에서 죽었고, 기도하면서 죽었고, 그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주께 맡깁니다" 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죽는 순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재연한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정거장에서 열차의 출발 신호가 울릴 즈음에야 허겁지겁 차에 오르는 식의 죽음 준비는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속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출발시간을 예비해야 합니다. 신랑이 올 시간이 가까우므로 신부는 등불을 밝히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종이 경황스럽지 않은, 단순한 일상사와 같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모두 후회함 없는 임종을 준비합시다.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을 임종 이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도 죽기 전에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죽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죽는 것처럼 복된 죽음은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 중 첫순교자 야고보 (행 12:1-2)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복음전파와 함께 교회가 성장하자 이번에는 헤롯 왕이 핍박에 가세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핍박했다면 이제는 정치지도자 헤롯 왕은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부흥하는 것을 보고 교회 핍박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 순교 후 10여년 지나서 헤롯은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야고보가 두 번째 순교하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자 베드로까지 없앨 계획을 가지고 베드로를 투옥시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핍박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승리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제자중의 하나로서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과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교회를 이끈 사람이며 신학적으로는 유대교의 율법을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한 제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바울과 함께 초대기독교의 3대 기둥이었다. 야고보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야고보의 성장 환경
갈릴리 지방에 배도 소유하고 종을 두고 살만한 부자 세베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막1:19-20). 세베데는 일을 돕는 두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던 어느날 베드로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된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정도로 적게 기록 되어 있으나(막 5:37, 13:3) 그는 훌륭했으므로 주님의 특별한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하나가 되었다. )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사람인데 갈릴리사람들은 비교적 억세고 호전적이고 정열적인 뱃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좆았으며(막1:19-20) 예수님께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신앙적인 면에서도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2 야고보는 어떤 사람인가?
(1) 성격은 급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
갈릴리 지방과 높은산 변화가 있는지 얼마 안되어 주님은 제자들과 여행을 하셨다. 먼지 투성이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피로가 겹쳐서 쉬고 싶은 때, 사마리아인들에게 쉴 곳을 간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 당하였다. 시장하고 피로에 겹친 제자들은 불친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분노한다.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거늘.(눅9: 54)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혼혈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번역한 성경에 따라서 생활을 하며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 나가서 경배하기 때문에 주님과 제자들이 나타난 것을 반가와하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을 냉대한다고 생각하고 그의 마음엔 사마리아인들을 모두 불 속으로 쓸어넣고 싶어하는 복수심이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만한 자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눅9:56)" 그러나 야고보는 위대한 사도이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증인이 되라(행1:8)" 하셨을 때,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행8:25). 실수한 일을 지적하여 주신 주님의 교훈을 곧 바로 실천하는 사도였다. 옛날 자기를 거절했던 사마리아까지 복음을 전했다.
(2) 질투를 모르는 휼륭한 신앙가
안드레가 형 베드로의 그늘에서 일한것 같이, 유명한 형 밑에서 일하기도 어렵지만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유명한 동생밑에서 일하기는 더 어렵다. 야고보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요한과 야고보'라고 호칭,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기 까지한다(마10:2).
야고보는 유명한 동생밑에서 일한 것이다. 혼자 기록한 곳은 유일하게(Acts12-2)에만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고보는 12사도의 명단 중에 모두 요한보다 앞에 기록되어 있다.또 야고보는 거부인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을 많은 유산을 포기한채 예수를 따랐다. 내일 아침걱정 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많던 그 당시에 이 거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제자들은 남쪽 출신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가난했다. 그래서 내버릴 것이 별로 없어서 어려움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있었으나 특히 야고보는 모든 재산을 물려 받을 수 있었던 형이던 그의 결단은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요한과 함께 "우뢰의 아들" (The sons ofThunder, Boaneqe)라는 별명도 지어 주셨다. 이 열성을 초지일관 식지 않고 활약하여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야고보이다.
3. 위대한 첫 사도 순교자
우리는 헤롯이 왜 먼저 야고보를 체포하였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열성과 야망이 있는 야고보는 격하기 쉽고 확실하며 뛰어난 지도자이기 때문에 힘찬 소리로 외치는 야고보의 입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예수님을 죽이고자 베들레헴 주변에서 태어난 어린생명들을 죽인 폭군 헤롯왕의 손자이다.
예루살렘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대해 독립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또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저지른 인기 장난이었다고 생각한다.
야고보 사도는 헤롯왕에 의해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에 처해진다. 순교는 '남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타살이지만 그러나 배교하면 안죽을 수도 있다. 스스로 부득부득 우겨서 죽는 것이기에, 순교는 원해서 죽는 자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순교는 확고한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간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간 야고보는 분명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형제들이여! 우리도 '죽느냐, 사느냐'하는 갈림길에서 설때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비굴하게 배신하면서 살기보다는 나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하늘 나라에서의 상은 순교의 상이 가장 크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순교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을 재촉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들도 순교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고 있으라 말씀하십니다(계6:11). 주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순교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차기까지. 두렵고 떨리지만 한편 위로의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계6:11).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고 하십니다. 주께서 친히 먼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음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은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9)”
헤롯은 이제 죽이기로 결단을 하고 가장 먼저 야고보를 칼로 쳐 죽입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야고보가 당시 교회의 지도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서 구출하시면서도 야고보는 죽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고보의 죽음을 허락하신 이유는 먼저는 야고보의 유익이고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진보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야고보의 죽음이 야고보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진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유익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야고보를 죽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을 면하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복음의 진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가로막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서라도 반드시 우리를 환난과 고난에서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해서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사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야고보의 순교의 피가 기독교 2000년 동안의 기독교를 지키게 한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디가도 교회가 구석 구석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음을 전해주었던 토마스선교사도 순교하므로써 그 피가 지금의 한국기독교를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이었습니다.
3. 한국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1840-1866)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렀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신도 8,000여명이 학살되는 병인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병인양요의 원인이 됩니다. 같은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는 미국의 무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로버트 토마스는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8월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의 갑작스런 병사로 또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하고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1865년 9월 세관을 사임하고 9월에 1차 한국선교여행을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중국으로 왔다가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중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1866년 2차로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 된 셔먼호는 조선군이 쏜 불화살에 의해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다가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으며 처단은 즉시 집행되는데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는 두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땅을 밞아보지도 못한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권 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신앙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던져 죽어가면서 전도한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
학교를 찾아 온 선교사의 말을 듣던 토마스의 마음은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제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길을 열어주세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런던선교회를 찾아가 중국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1863년 5월 토마스씨, 런던선교회는 당신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을 드렸다. 캐롤라인 드디어 내가 중국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소! 우리 함께 가는 것이오. 그는 약혼자인 캐롤라인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나야 하는 토마스는 캐롤라인과 결혼한 후 그의 나이 24살이었을 때 목사안수를 받았다. 드디어 토마스 부부는 1863년 7월 21일 그래이부센드 부두에서 출발하는 폴메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토마스부부의 선교활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보, 맛이 없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좀 먹어봐요. 남편인 토마스의 염려하는 말에 임신하여 입덧에 시달리던 캐롤라인은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먹히지가 않네요.
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선임선교사인 무어헤드와의 불화로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토마스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중국사역을 진행하던 토마스는 1864년 3월에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토마스의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곁에서 본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다.
출장을 떠났던 토마스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태중에 있을 아기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떠나 있는 동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순간 토마스는 섬짓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면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마음으로 캐롤라인! 캐롤라인!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자고 있는거요? 이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아-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 내가 왔소! 눈을 떠 봐요 내가 왔단 말이오. 그러나 싸늘한 몸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이미 일주일 전에 혼자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캐롤라인! 나를 두고 당신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하오. 하나님 캐롤라인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를 유산시키고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당신이 내게 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내 아내와 자식을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구요?
저와 캐롤라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선교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왜 저 혼자만 이렇게 남겨두셨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시라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이 사랑이신 분이 맞아요? 그런 분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편지를 썼다.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 '동지사' 즉, 조선시대에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갖고 보내던 사신 일행을 만나서 조선 내에서의 카톨릭교도들에 관한 수난을 듣게 되었다.
동지사로부터 카톨릭교도들이 참수당하는 소식을 듣게 된 토마스의 마음에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동지사의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어! 토마스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복음전하기 위해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윌리암슨, 사실은 얼마 전에 조선의 동지사를 만나 그곳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선에는 많은 카톨릭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오작통이라고 하여 한 가족이 예수를 믿으면 다섯가족이 죽음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제 마음은 어떻게 하면 제가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저는 중국에 복음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조선에 복음전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 당장 조선에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리지요. 윌리암슨의 말에 토마스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윌리암슨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두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분은 토마스목사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윌리암슨의 말을 들은 두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는 김좌평입니다. 저는 최선일입니다. 하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토마스 목사입니다.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예수)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조선에 가서 야소교를 전하겠다는 토마스의 말에 놀란 두 젊은이는 예-예-- 안 됩니다. 조선은 지금 박해가 심해서 야소를 믿던 우리도 목숨을 걸고 피해 왔습니다. 조선에 있다간 칼날에 맞아 죽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젊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칼날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갑시다. 하는 말에 글쎄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니까요. 두 젊은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그건 다시 사는 겁니다. 거듭나는 거지요. 젊은이들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태복음 16장 21절보면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하고 토마스목사가 말을 꺼내자 마태복음--? 하면서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경을 안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젊은이가 합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책을요? 저를 조선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성경책을 갖다 주겠습니다. 결국 두 젊은이는 토마스목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조선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윌리암슨목사는 토마스목사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865년 9월 4일에 토마스목사는 두 젊은이와 함께 다량의 한문성경을 실은 목선을 타고 제1차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중국의 지포를 출발한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본 토마스는 안녕하세요. 저는 야소교 목사입니다. 이 책은 야소교 책입니다. 받으세요 외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에그머니나,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하지? 주민들은 토마스목사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가르쳤다. 토마스목사는 동시에 섬주민들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토마스목사가 돌아간 후 관가에서는 성경책이 법으로 금하는 천주학쟁이들의 책이라고 하여 백령도 참사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회수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거두어 들인 책이 99권이나 되었다. 토마스목사 일행은 서울로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하였으나 난데없는 폭풍으로 접근치 못하고 표류하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던 토마스목사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지사인 평양감사 박규수대감을 만나 저는 야소교목사 토마스입니다. 오-오 어떻게 조선말을 잘 하시오? 놀랍소이다. 작년에 조선에 가서 배웠습니다. 난 박규수라 하오. 지난 번에 조선에 가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소이다. 저는 또 조선에 갈 생각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좋더이까?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를 전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대감에게 제가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이다. 토마스목사가 박규수대감에게 선물한 책은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이었다. 그가 조선동지사인 박규수대감을 만나고 나올 때 누군가 따라나와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토마스목사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던 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듯이 뛰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받은 종이쪽지를 읽던 토마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토마스목사의 두 손이 가슴에 모아졌다. 그곳에는 백령도에서 뿌렸던 야소교 책을 꼭 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후로 조선선교에 대한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고 어떻게든지 조선에 갈 방법을 찾아 나셨다. 그때 조선에는 천주교인들이 핍박을 당하여 강산이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군함이 원산에 들어와 통상압력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압력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천주교도였던 승지 남종상이 대원군을 찾아가 한가지 방도를 제안하였다. 러시아를 격퇴시키려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것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러시아 함대만 격퇴시키면 천주교의 포교를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서야 나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남승상의 속셈을 알게 된 대원군은 분노하여 천주교를 사교로 간주하고 책을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만 천주교를 믿어도 다섯 가구 모두 처형되는 오작통을 실시하였다.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서양인과 만나는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고, 천주교도를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사람들에겐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8,000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병인년 박해의 발단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자국인의 신부를 학살한 것을 항의하고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를 조선에 원정을 가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수락한 토마스는 조선에 가져갈 성경과 전도지를 준비하여 소식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토마스목사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소. 윌리암슨 목사님, 왜 프랑스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거죠? 프랑스 배는 오지 않는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반도지나에 변란이 일어나서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 합니다.
때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던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많은 상품을 선적하고 조선으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합류하는 것이 어떻소?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다시 월리암슨 선교사로부터 많은 성서를 얻어 가지고 동승하게 되었다.
드디어 1866년 8월 9일 중국을 떠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 상류인 평양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평양이 가까워지면서 제너럴셔먼 호와 조선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 측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제법 조선말에도 능통했던 듯, 그들의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토마스는 조선의 문정관에게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으며, 그들의 목적이 야소교를 전파하려는 데 있음도 밝혔다.
어느덧 제너럴셔먼 호는 대동강 하구 보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산은 조그만 어촌이었지만 군사 기지로는 대단한 곳이었다. 이때 이상한 배를 보았던 조선 군인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자 그 배에 승선해 있던 한 중국인이 순수한 상업을 위해 온 배니까 안심하라고 손짓하자 활을 멈추었다. 한편 대동강 강변에 살고 있던 천주교 교인들은 프랑스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있던 중 그 배가 온 줄로 알고 지달해(池達海) 등 10여명이 배에 승선하였다. 토마스는 이들을 환대하고 성경책을 나누어주었다. 다시 배는 북상하여 포리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성경을 배포하였다.
후에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이 마을 사람들 중에 홍신길은 성경을 받고 열심히 읽어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연구가였던 오문환은 1928년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서 홍신길을 만났는데 그때 홍신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는 을미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종자를 받기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병인년 포리에 있었을 때 토마스 목사에게서 성경을 받았을 때입니다. 81세의 늙은 것을 아직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 두신 것은 아마도 토마스 목사의 전도 사적을 증거하라 하심인가 보외다."
포리에 배가 정박했을 때에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자그마치 500여 권이나 배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훗날 기독교인들이 되었으며, 한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배는 점점 북상하면서 만경대에까지 진입을 하게 되었다. 만경대는 평양성에서 10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계속해서 열심히 성경을 전달하면서, 북경에서 만났던 박규수를 생각하며 한국 선교의 꿈을 부풀렸다.
이때 4 일간 머물면서 100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주었다. 셔먼호가 석호정에서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셔어먼호에서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그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 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선장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틈에 박춘권이라는 부교가 이익현을 셔먼호에서 구출하였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셔어먼호 선장은 조선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다. 이 순간을 놓칠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야소 야소 믿으시오! 야소!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항복하면 돌려보내주겠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는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셔어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누군가 한손에 백기를 들고는 야소, 야소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다. 야 저러다가 저 사람 불타 죽겠다. 야소교 목사라고 했던 사람이지 않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옷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는 야소! 큰 소리로 외치더니 강물에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토마스목사 외에도 3명의 사람이 생포되었다. 평양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모두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참수토록 명하였다. 죄수로 묶여 있는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을 찾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동강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 되었다. 선장과 중국서기인 조능봉, 이팔행이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다음 영국 야소교목사 토마스차례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칼을 잡은 박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부교는 토마스목사가 내미는 작은 보따리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1866년 9월 3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토마스가 죽고난 다음 33년이 지난 1899년의 일이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이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마펫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토마스목사를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보다마다요. 제가 토마스목사를 죽였다니까요? 하나님께서는 토마스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영감님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영감님도 예수를 믿고 전하면 됩니다. 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그때 셔어먼호가 불타는 가운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던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어느 여관에 갔을 때 방안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관주인을 불러서 연유를 알아보니 토마스목사가 포리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배포할 때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다가 도배를 했답니다. 그것을 여관주인인 최치량이 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관에 묵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제게 들려주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토마스목사에게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교인이 되어 장로가 되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목사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뿌렸던 성경은 살아서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
당시 사형을 집행한 박춘권은 후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1899년 세례를 받고 평양에서 초대 교인이 되는 회심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토마스 선교사를 보내고 순교한 파송교회 목사님은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 였다. 이런 조선을 위해서 평생 기도했다고 한다.
한편 제너럴셔먼 호의 사건과 관련해서 북경 주재 미국 대리공사는 청국 정부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으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북 장로교 소속 콜벳 선교사는 황해도 장련에 한 주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기도 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난 후에도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으며 이일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4. 북한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행복침례교회 목사인 저는 1992년경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비디오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그 비디오를 보여준 목사님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북한에 10번 정도 다녀온 분으로서 언론에는 일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본인이 비디오를 찍어 온 것을 교회에 다니면서 북한 지하교회실태를 알려주었다. 그 비디오에서 본 것은 북한 개성에 있는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모습을 보았는데 우리네 보통 구역예배보는 것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교제하는 것으로 어느 가정에서 10여명 정도가 비밀히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만약 발각되면 수용소로 가던 순교를 당하던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해서 확신을 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하교회 실상은 감추어져 있다. 그런 가운데 ‘북한구원운동(대표회장 이종윤 목사)’이 지원하는 중국의 한 선교단체는 지하교회 리더로서 북한인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북한으로 파송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많은 목회자들이 부정하지만, 이것이 북한에 지하교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지난 7월 26일자 본지가 보도한 남포 지하교인 102명의 처형사건만 보더라도 북한 지하교회는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몇 년 전 공개돼 충격을 준 북한의 공개처형인데 발각된 102인 중 40인이 처형을 당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사건내용은 이렇다.
북한 남포 지역에서 지난 2005년 102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북한 최대의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며,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래한국신문이 보도했던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더욱이 이 102명의 북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송출되는 극동방송(AM 1188Khz, 1566Khz)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이러한 사실은 지난 10일 미래한국신문 김창범 편집위원을 만난 북한 안전부 출신의 한 탈북자에 의해 알려지게 됐는데, 그는 기밀문건으로 분류된 이 사건 보고서를 직접 열람한 적이 있으며, 상부에 업무보고차 출장 왔던 남포 출신 한 보안서 요원으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을 중심으로 생겨난 지하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한 대학생이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된 남포시 보안서 소속 한 안전소조원이 이를 고발했고, 이 사건은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에게까지 보고됐다. 이후 북한은 정치책임자까지 파견해 1년간 비밀수사를 벌였고, 전모를 밝혀내 결국 관련자 102명이 모두 체포됐다.
체포된 102명 중 40명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를 숨긴 채 남조선 녹화물을 불법 시청했다는 죄목으로 비공개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62명은 정치범수용소인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져 현재는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지난 2003년 남포시 주민인 50대 한 남성에 의해 시작됐다. 김씨 성을 가진 것으로만 알려진 이 남성은 우연히 극동방송 설교를 듣게 됐고, 마음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내용들이라 호기심을 갖고 경청하던 그는 점차 믿음을 갖게 됐고, 넉 달간 청취한 방송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무려 7백 쪽에 이르는 양이었다. 그는 이후 성경을 구해 기록한 내용과 비교하며 5개월간 연구한 끝에 성경 대부분을 이해하게 됐고, 깊은 영적인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의 은혜를 느낀 그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아내와 두 아들, 가까운 친척과 친구, 이웃들에게도 성경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부담없는 접근을 통해 복음에 감동한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이 다시 그 감동을 전하면서 몇달 새 기독교인은 무려 50명을 넘어섰다. 이 무렵 그는 이 내용이 성경에 써 있음을 실토했다. 그러나 이미 깊은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공개 총살형이라는 위협 속에서도 신앙을 떠나지 않고 사도행전 속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서로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지난 8일 ‘모퉁이돌선교회’를 방문하여 북한선교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두 분의 선교사를 만났다. 이들이 북한인들을 만나서 들었던 지하교회의 생생한 현실을 손전등으로 비쳐보듯 소개한다.
‘모퉁이돌선교회’는 지난 60년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선교라인을 통해 확인된 지하교회 성도들의 수가 모두 1만6,000여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물론 이들 외에 확인되지 않은 교인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최근 ‘오픈도어즈’가 밝힌 북한 기독교 인구는 적어도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북한 지하교회의 실상을 전한 두 분의 선교사는 증언을 마치며 “한국교회는 매년 북한 땅에 뿌려지는 거룩한 순교의 피를 기억해야 한다”며 “북한에서는 매년 한 번도 순교의 맥이 끊어진 적이 없음을 기억하고 북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순교 피 뿌려지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북한인들을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킨 뒤, 다시 북한으로 재투입하는 특수선교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이인석 선교사(가명)를 만났다. 그는 북한 교회를 이해하려면 지난 60년에 걸친 북한 기독교의 수난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북한의 목회자 대다수는 북의 남침 전날인 1950년 6월 23, 24일 양일에 걸쳐 모두 학살되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기독교인들은 1958년 사회주의 정립을 위한 대규모 지식인 숙청 때 다시 학살당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이만화 목사와 2,000명의 성도순교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기독교인들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었다. 순교자의 자녀와 가족들, 일부 성도들이 살아남아 국경지역 변경에서 생존할 수 있었고 이들이 지하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그후 1958년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처형사건들을 분석해 보면 1년에 한번 이상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40명까지 지하교인 처형이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북한 땅에서 순교의 피가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지하교회의 생명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목할 대목이라고 이 선교사는 주장한다.
북한은 토마스 선교사가 처음으로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27세로 대동강가에 와서 땅을 밟지도 못하고 목베임을 당하였던 지역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때에도 평양에는 교회부흥이 뜨거웠던 곳이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고,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한국 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이 평양이다. 초기에는 선교사 하디(R. A. Hardie)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한국인 길선주가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에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평양에는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였던 산정현 교회가 있었고 해방 전만하여도 평양신학교가 있었다. 그 평양신학교가 이전해 와서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이 되었다. 이런 북한에 김씨 왕조가 들어선지 70년이 되어 지난날의 교회는 다 없어졌지만 평양에는 평양이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던 아주 놀랄만한 흔적을 갖고 있다.
평양시 행정구역중에는 선교구가 있다. 서울에 종로구 용산구가 있듯이 서울에도 없는 선교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평양지하철 역중에는 그 선교구 안에 부흥역이라는 전철역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 지역이 얼마나 예수믿는 사람들로 부흥하였던 가를 증거해 주는 징표이다. 남한 어디에도 없는 선교구라는 행정구와 부흥역이란 전철역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장차 하늘나라 갔을 때 북한에서 올라온 성도들이 남한에서 온 성도들보다 많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지금 이시간에도 김일성 동상이 3000개나 있는 북한에 성령의 강력하고 놀라운 인도로 지하교인들의 신앙 활동이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이 북한에서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를 보여주며 남한교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와 내용으로 북한교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그 증거들은 남한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감동적인 순교의 신앙을 보여준다. 우리들도 고난에 굴하지 않는 북한 지하교회를 본받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