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연중 29주일 설교
마르 10:135-45, 이사 53:4-12 히브 5:1-10
함께 나눌 쓴잔, 세례
예수님께서 제자 두 명의 청탁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시면 자신들도 양옆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되물으십니다. 기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할 점을 알려 주는 장면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을 살며 바라고 원하는 소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는 그저 주님께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나열하거나 쏟아붓는 일이 허다합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의 반응은 생각을 잘 안 한다는(못한다는) 것인데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바라는 것을 말하고 나면 이제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를 성찰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고 원하는 것을 구하면,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물으실 겁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주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당장의 문제 해결? 우리 노력을 넘어서는 큰 소원성취? 기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가르치고 정의를 내리는데도, 아주 자주 이 사실을 잊습니다.
우리의 기도 습관과 패턴을 늘 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이유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대답을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픈 이에게는 병이 낫는 것, 가족의 문제는 해결하는 것 등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사는 이들에게는 바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픔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래서 아픈 이들, 고통받는 이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 역시 아픔과 고통을 지닌 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우리의 아픈 곳, 고통과 근심을 아뢰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고단함을 올바로 고백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 가운데 함께 해 주심을 확신하고 아뢰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 순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마실 쓴잔과 세례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과 주님의 대답입니다. 두 사람만의 청탁을 듣고 엄청 화를 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무한한 경쟁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질서에 맞게 살아야 하지만, 세상과는 조금 다른 시선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눈과 귀를 막고 살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도 시대의 요구와 이 지역의 정서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하는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일종의 선도적 실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까지 버려가며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도 늘 성찰하며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세상의 한 중심에서 교회가 어떻게 서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건지, 무엇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하는 것인지, 더 좁게는 우리 교우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정말 지혜로움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건축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어머니 교회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신앙과 성공회의 좋은 점을 널리 알리며 선교하여 확장하고, 기후 위기 시대를 지나며 녹색교회 그리고 차별과 배척을 넘은 안전한 교회를 비전으로 삼은 이유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용기 있게 우리에게 익숙한 그 많은 ‘습’을 버리고 용기 있게 결단하여, 가지 않는 길을 함께 가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와 다른 조금 더 험난한 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반응도 묵상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주님께서 감당하실 아픔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큰 통치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저 희망일 뿐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을 비로소 이해하고 깨달았을 때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고난 없이 영광은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며 그래서는 안 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순간순간의 인간적 유혹에서 주님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는 판단의 근거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나열의 기도가 아닌 주님의 뜻을 묻는 기도 말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우리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그분이 마실 쓴잔이 무엇인지, 그분이 받을 세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독서와 같이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자신의 허물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대사제마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허물을 함께 이해하고 기도하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쓴잔을 함께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혼자로는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대답이 ‘서로 섬김’입니다. 섬김은 우리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벗어나게 하고, 주님께 우리의 바라는 것을 올바로 고백하며,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지금 모습을 성찰하는 실천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같은 모양으로 살기를 청합시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쓴잔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거두어 달라던 그 고난의 쓴잔을 우리도 쓰라린 경험과 좌절을 가진 채 살지만 함께 마실 수 있다고 다짐합시다.
주님의 세례 역시 죽음을 상징합니다. 깊은 물에 잠긴 후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도 두려움 가운데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보다 선교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새로운 틀을 만들고 있습니다. 책임을 맡게 된 분들이 사양하지 않고 감당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우리의 미래가 짐작이 가는 장면입니다. 그분이 당하신 그 고난의 세례와 그분이 마신 쓴잔은 이제 주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눌 도전이고, 희망이 되었음을 깊이 새기며 서로 섬기며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