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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사진자료 / 부록
아마 이 책을 보는 독자 여러분들 중에 전쟁을 찍도록 요구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사용한 사진 촬영 기법이나 사진을 촬영한 기기들은 사진 촬영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나 전문가인 사람들 대부분이 휴가 때나 직무로써 사진 촬영에 사용하는 기술이나 기기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독자 여러분의 추가적인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당신이 전문 사진가라면 더욱 큰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6.25전쟁을 찍는데 사용된 장비의 일부는 이미 미국과 유럽의 소형 카메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작은 혁명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라이카 IIIC, 35mm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두 대의 라이카 사진기를 휴대했는데 목을 둘러싸는 가죽 끈으로 탄약띠처럼 내 가슴 앞에서 X자로 교차시켜 몸의 양쪽에 하나씩 찼다.
모든 필름 통들은 칫솔, 비누, 방충제, 담요, 양말, 방수 판초 등과 함께 배낭 안에 있었고, 두 개의 수통을 망으로 된 벨트에 달고 있었다. 숟가락은 손목 나침반과 함께 밤낮으로 늘 입고 있었던 야전상의 앞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그것이 전부였고 또 이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령부의 어딘가로 돌아올 필요 없이 해병대원들과 함께 계속 해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해병대원들은 항상 그들의 음식을 나눠주었다.
두 카메라의 원래 가죽케이스는 야전에서 필름을 바꾸는 것을 더디게 했기 때문에 도쿄에 남겨두었다. 적의 사격 아래에서 사진들을 찍을 때마다 안전이 확보된 1분 1초가 정말로 소중 했었다.
다시 필름을 갈아 끼울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두 대의 라이카 카메라는 기본 적인 용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한 대는 50mm 표준형 렌즈에 맞춰놓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망원사진용이었다.
초점거리가 다른 두 대의 카메라를 휴대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장면 이든 즉각 찍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라이카 카메라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가진 한국의 전장에서 내내 사용되어졌다.
축축하고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한 여름 부터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추웠던 장진호 부근의 겨울까지 이 카메라들은 추위 때문에 필름을 감는 동안 필름이 끊어지기 시작했던 순간 이후에도 늘 완벽하게 작동되었다.
" This is War ! "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은 라이카 사진기로 촬영되었다. 그러나 렌즈는 점령지 일본에서 생산된 니콜렌즈를 장착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과거 '라이프 앤 포츈"지의 기자였고 지금은 도쿄에 살고 있는 호레이스 브리스톨과 나는 도쿄의 일본광학회사에서 새로 만든 일련의 니콜렌즈를 시험 삼아 장착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5mm 카메라를 위한 일제 니콜의 3개 표준형 렌즈들이 우리 판단으로는 매우 놀랍게도 현재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영국제 미국제-독일제 등 그 어떤 35mm 표준형 렌즈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까지는 독일제품이 좋다고 생각한 135mm 이상의 광각 초망원렌즈를 제외하고는 우리 카메라의 모든 렌즈를 팔고, 니콜렌즈로 갈아끼웠다.
우리가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한 니콜렌즈는 지금은 F1.4, 클릭스톱 50mm 렌즈로 대체된 F1.5, 50mm 렌즈, F2.85mm 렌즈, F3.5. 135mm 렌즈 등이었다. 모든 일련의 니콜렌즈는 완전히 일본 물자들로 도로에서
생산되었다.
유리부터 세부 장치까지 그들의 렌즈나 카메라 모두 일제였다. 단 한 가지 일본 회사에서 생산되지 않은 부품은 니콘카메라의 '초점 개폐 장치(포컬플레인 셔터)'에 있는 용수철
뿐이었다. 그것은 스웨덴제였는데 일본의 사진기 제조사들이 아직까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어떤 용수철보다도 품질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진행됨에 따라서 여러 다른 신문이나 잡지사의 사진기자들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사진기 렌즈의 명성이 퍼지기까지는 채 3개월이 걸리지 않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일하는 사진기자 중에 자기 카메라에 니콜렌즈를 쓰지 않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진기자는 라이프지의 칼마이단스와 핸크 워커였다. 그들은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곧 그들의 독일제 카메라를 버리고 니콘카메라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연합통신의 톱뉴스 사진기자인 맥스 데스포는 그의 일을 더 많이 지원하기 위해 니콘카메라에 니콜렌즈를 조합한 장비를 가지고 다녔고, 아주 작은 음화에 대한 제한적인 경우 외에는 자기 일을 위해 더 많이 그것들을 활용했다.
니콘카메라와 니콜렌즈의 우수성은 뉴욕 타임즈의 마이클 제임스, NBC의 존 리치, CBS의 죠지 허먼, 그리고 특파원으로서 자신의 보도를 늘리기 위해 카메라와 렌즈를 사용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실이 되었다.
이 니콜렌즈를 사용한 아주 작은 음화를 원본으로 한 인쇄물들은 주목할 만한 이미지의 퍼짐이 없이 뉴욕 현대미술관의 에드워드 슈타이컨 사진 전시회에서 30인치×40인치로 확대되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촬영된 사진들 대상의 친숙하고 적나라한 모습은 촬영에 대부분 사용한 소형카메라에 대한 사진기자의 선택에 주로 기인했다고 캡틴 슈타이겐이 의견을 냈는데 한국 전쟁을 보도했던 우리들 대부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우리 대부분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진을 찍는데 사용한 렌즈에게도 역시 많은 신뢰가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었다. 라이프지의 사진기자에 의해 촬영된 필름 대부분은 신속히 수송되어졌다. 그것들은 급 항공편으로 뉴욕에 보내져서 수온과 기온이 조절되는 라이프지 본사의 암실작업장에서 인화 되어졌다.
모든 작은 필름들이 이스트만코닥 K20 인화기에서 현상되었다. 각 필름들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야전에서 특별한 표시를 한 경우 -우리가 노출을 잘못해 만들어진 실수를 보호해줄 특별한 암살을 요구하거나 우리가 셔터 속도나 조리개 열기 등을 변경할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던 전투상황으로 인해 노출 정도를 간과했음 우리의 음화를 그들에게 균형을 맞춰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 등- 를 제외하고는 현상 시간과 현상 온도 등 동일한 처리를 거쳤다.
이 책(원서 This is War!)은 구성방식 관계로 페이지 번호를 매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각 사진의 노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은 다소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어느 정도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노출은 F1에 기본적인 1/200초 였기 때문이다.
필름은 항상 이스트만 슈퍼XX 35mm 카트리지에 장착되었다. 몇몇 경우, 특히 해병대원이 적의 기관총 사격에 의해 전사하는 The Hill(고전)의 장면 사진에서 노출은 전혀 정상이 아니었다. 이 장면 사진은 비가 퍼붓는 칠흑 같은 늦은 오후였기 때문에 노출은 F2.2에 1/100초였다.
역시 The Hill(고전)에 수록된 레오날드 헤이워스 상병의 사진은 F1.5광각렌즈에 1/100초 노출로 촬영되었다. Retreat, Hell(후퇴라니, 말도 안돼!)에 포함 된 전사했거나 기습당한 동료들을 지나 행군하는 해병대원들을 찍은 사진의 노출은 1.4에 1/100초였다. 그때는 겨울의 거의 어두워진 늦은 오후였기 때문이다.
The Hill (고전)과 The City(시가전)에 포함된 사진들은 모두 F1.5. 니콜 50mm 렌즈로 촬영되었고, Retreat. Hell! (후퇴라니, 말도 안돼!)에 수록된 사진들은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FL.4. 니콜 50mm 렌즈로 촬영되었다. 그 하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공군 병사의 초상이었는데 F3.5. 니콜 135mm 렌즈를 사용했다.
이 책을 만드는 데 사용된 모든 사진은 라이프지 암실 담당자인 다니엘 버지가 인화했다. 원판 인화 본은 2면 도반용은 14인치×30인치로 확대되었고, 세로 -전면 도판용은 10인지×14인치로 확대되었다. 이 원판 사진들을 책으로 다시 제작하기 위해 출판사는 사진의 크기를 축소했다.
<부록: 전투지원국 및 의료지원국>
01 미국: 한국도착 1950. 6. 27.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곧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UN회원국의 군사원조를 UN 안전보장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하며 UN군 파병에 앞장섰다.
6.25전쟁 초기에는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열세에 있던 국군과 함께 낙동강까지 후퇴했지만 이후 적극적으로 UN군을 이끌면서 낙동강방어선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평양진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UN군의 핵심 축으로서 정전협정을 조율하고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총 1,789,000명을 한국으로 보냈
으며 전사·부상·실종·포로를 포함하여 13만 명이 넘는 인원이 6.25전쟁에서 희생되었다.
02 영국: 한국도착 1950, 7, 1.
영국은 6·25전쟁 발발 이후 UN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군사원조 제안에 즉각 동의하면서 관련 결의안 통과에 큰 힘이 되었다. 또한 두 번째로 많은 규모의 병력을 한국으로 파병하였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UN군의 일원으로 미국과 함께 6.25전쟁을 주도하였다.
영국군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오르내리며 낙동강방어선전투를 비롯하여 설마리 전투, 성주전투, 가평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전선의 안정화를 위해 휴전선 경계 등의 임무를 계속하다가 전선이 안정되면서 1954~1957년 사이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03 호주: 한국도착 1950. 7. 1
호주는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나라로서, 6.25전쟁을 치르는 한반도 곳곳에서 그 역할을 다했다. 해군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군수물자 수송선단 호위부터 해상초계 봉쇄, 유격대 상륙지원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공군은 폭격기 엄호비행. 초계임무, 공중전투, 항공폭격 등을 지원하였다.
육군은 UN군의 북진단계부터 참여하여 사리원전투 영유전투, 박천전투, 가평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줬다.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줬던 호주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선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956년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04 네덜란드: 한국도착 1950, 7, 19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정박하고 있던 구축함 에베르선호 (Evertsen)를 우선 파견했다가 네덜란드의 국민과 언론의 강력한 지상군 파병 요구를 수용하여 646명이 속한 네덜란드 대대를 추가 파병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군은 한국의 바다와 육지에서 맹렬히 싸웠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1척의 구축함과 지상군 1개 대대의 병력을 유지하였다.
해상에서는 초계임무, 특별정찰, 상륙군 선단 호송 등의 중요 임무에 투입되었고, 지상에서도 횡성, 원주 등지에서 투혼을 발휘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차후 전투 발생 예상 지역을 사전에 점령하고 벙커 및 전술 철조망을 설치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05 캐나다: 한국도착 1950, 7, 28.
캐나다는 UN의 결정을 강력히 지지하며 6.25전쟁 파병의사 밝혔다. 캐나다는 우선적으로 해군과 공군을 먼저 파견하고 육군은 지원병을 모집한 뒤 파병했다. 해군과 공군은 각각 미 극동해군 사령부와 미 공군에 배속되었으며 육군은 영연방 제1사단에 배속되어 사단의 주축 부대로 활동하였다.
캐나다군은 1951년 4월 중공군이 총공세를 펼치는 가평을 사수하여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를 하였으며 이후 자일리전투, 고왕선전투, 나부리전투 등에서 큰 활약을 했다. 정전협정체결 후 지속적인 정찰 및 경계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선이 안정화되자 1957년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6.25전쟁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끝냈다.
06 뉴질랜드: 한국도착 1950, 7, 30,
뉴질랜드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결의안이 통과되자 참전의사를 표명하고 먼저 해군 함정을 파견하였다. 뉴질랜드는 총 8척의 함정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수송선단 엄호, 기뢰 제거 작업 지원, 지상군 함포사격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000여 명으로 구성된 육군 포병부대를 코리안 포스(Korean Force, 약칭 Kayforce) 로 명명하고 파병하였다. 아들은 영국군 제27여단에 배속되어 마량산전투, 제임스타운선 방어 작전, 가평전투 등에서 효과적인 화력을 지원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난 이후 1954년 해군, 1955년 육군이 귀국하면서 뉴질랜드의 6·25전쟁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07 프랑스: 한국도착 1950, 7. 29.
프랑스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초기에 파견한 해군 함정 1척을 제외하고는 자국 내 군사 상황을 이유로 지상군 파병에 미온적인 입장이었으나, 참전의 여론이 높아지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집단안보체계 확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순수 지원병으로 구성된 보병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프랑스 보병대대는 해병대, 공수부대, 외인부대 출신으로 경험 많은 병사들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원주 쌍터널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화살머리고지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프랑스군의 용맹함과 전투력을 입증하였다. 특히 1951년 2월 미군과 함께 중공군의 공세를 막는 지평리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진지를 고수해내며 중공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후 프랑스군은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1953년 10월 철수하였다.
08 필리핀: 한국도착 1950. 9. 19.
필리핀은 6.25전쟁 참전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명예로운 일로 여기며 아시아에서 최초로 한국 파병을 결정하였다. 총 1,400여명의 전투 병력으로 구성된 제10대대를 파병하여 1950년 9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필리핀은 한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시작으로 많은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율동전투에서는 중공군 제34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철수하는 아군을 엄호하며 적 2명을 생포하고 500여 명을 사살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런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은 필리핀군의 전투력은 새롭게 조명되었고 부대의 책임감과 용맹성은 당시 UN군의 귀감이 되었다.
09 터키: 한국도착 1950, 10, 17.
터키는 UN의 군사원조 결의가 통과하자 이에 적극 동의하며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터키 제1여단으로 명명된 터키 지상군은 10월17일 부산항에 도착한 뒤, 대구로 이동하여 훈련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터키군은 외원리전투. 군우리전투, 네바다전초전 등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으며 군우리전투에서는 중공군에 의해 총 병력의 15%와 주요 장비 70%를 잃었지만 부대의 강한 투지와 결속력으로 1951년 1월 김량장(현 용인)과 151고지전투에서 총검으로 싸우는 백병전을 치루며 중공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백병전하면 터키군을 연상시키게 되었으며, 참전국들은 '인류역사상 길이 빛날 터키군의 전공' 이라고 극찬하였다. 6.25전쟁 이후 오랫동안 한국에 주둔하다가 1971년 의장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함으로써 한국에서 임무를 종료하였다.
10 태국: 한국도착 1950. 11. 7.
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UN의 한국 지원에 호응해 지원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후, 황태자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전투부대 파병을 준비한 태국은 1950년 11월 해군을 시작으로 한국에 상륙하였다.
태국군은 곳곳에서 용맹스럽게 싸웠는데, 특히 지상군은 1950년 겨울에 평양으로 진출한 이후 제임스타운선 진출. 방어 전투와 김화 351 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또한 철의 삼각지의 포크칩 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3차에 걸친 공세를 백병전으로 격퇴함으로서 작은 호랑이 (The Little Tigers)'라는 별칭을 얻었다.
11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도착 1950, 11, 12
남아프리카공화국은 UN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군만 참전한 국가이다. 1950년 7월 1일 대한민국 군사원조를 결의한 UN에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그해 11월 한국으로 제2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였다. 한국에 상륙한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군으로부터 F-51 전투기를 지원받고 미제18전투비행단에 배속되어 일본과 한국의 기지에서 근접항공지원, 차단폭격작전 등에 투입되었다.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오산, 횡성, 여의도, 평양 등 치열한 전쟁이 진행되는 최전방 기지에 배치되어 주요 작전을 수행하면서 참전 기간 동안 총 12,405회라는 놀라운 비행 출격 기록을 수립하였다.
12 그리스: 한국도착 1950 12 01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내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며 정세가 어려웠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참전 의사를 표명하고 한국으로 군대를 보냈다.
내전으로 인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그리스군은 한국으로 오자마자 김해에 설치된 UN군수용소로 이동해 현지 적응훈련을 마치고 1951년 1월부터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후 이천 381고지전투, 연천 313고지전투, 북정령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인정받았다.
이 밖에도 수송 편대를 구성해 장진호전투 지원 전사자 후송, 병력 및 물자 수송 등의 후방 지원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리스군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전쟁방지를 위해 노력하다가 1955년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13 벨기에: 한국도착 1951. 1.31.
벨기에는 즉각적으로 파병할 수 있는 상비군이 없었지만 지원병 모집을 통해 2,000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 700여 명을 선발하여 제1벨기에 대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파병하였다. 1951년 1월 한국에 도착한 벨기에 대대는 적응훈련과 경계임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특히 금귤산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2일간 막아내며 아군이 고립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퇴로를 확보하는 등 수많은 전투에서 벨기에군의 전문적인 전술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김화지역에서 마지막까지 경계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5년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14 룩셈부르크: 한국도착 1951, 1.31.
룩셈부르크는 전체 인구가 20여만 명에 불과하여 파병이 곤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벨기에 정부와 협의하여 벨기에 대대의 1개 소대로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따라서 룩셈부르크 소대는 6.25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 대대와 함께 금산전투, 학당리전투, 잣골전투 등에서 맹렬히 싸우며 자유수호의 의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었다.
15 에티오피아: 한국도착 1951, 5. 6.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지상군을 보낸 유일한 나라로 집단안보의 중요성을 지지하며 황실근위대 중 1개 대대를 새로이 편성하여 황제로부터 강뉴(Kagnew) 대대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로 격파한다' 라는 뜻이었다.
강뉴대대는 1951년 4월 14일 에티오피아를 떠나 5월 6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화천지구 전투, 양구부근 전투 등 무려 250여 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수행하면서 대부분 승리하는 전과를 이루며 그 용맹성을 인정받았다. 한반도 각지에서 전투를 수행하다가 정전협정 체결 후 1965년 1월에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임무를 종료하였다.
16 콜롬비아: 한국도착 1951, 5. 8.
콜롬비아는 극도로 불안정한 국내 정세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파병을 결정하였다. 1951년 5월, 콜롬비아 해군이 한국 해역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지상군이 UN군 중 제일 마지막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콜롬비아군은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흑운토령에서 첫 전투를 수행하고 금성전투, 인제전투, 연천 불모고지 전투 등 다수의 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1954년 지상군이 철수하였고 1955년 해군이 한국 해역에서 활동을 종료하고 귀국하였다.
17 스웨덴: 한국도착 1950, 9, 23
스웨덴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결의에 호응하여 7월 14일 자국이 경비를 부담하는 적십자병원을 지원할 뜻을 전하였다. 이후 스웨덴 각지에서 600여 명이 지원했고 최종적으로 그루트(Carl-Erik Groth) 대령과 170여 명이 파견됐다. 이렇게 구성된 스웨덴 의료지원부대는 스웨덴적십자병원(The Swedish Red Cross Hospital: SRCH)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적십자병원은 1950년 9월 25일부터 수많은 UN군과 한국군, 민간인들을 치료하였다. 휴전 이후에도 1년 가까이 전상자처리업무를 계속 실시하였고, 1954년 7월에 한국을 떠나 귀국하였다. 스웨덴은 1957년 4월까지 덴마크, 노르웨이와 협조하여 서울에 의료센터(국립의료원의 전신)를 설립·운영하며 한국의 의료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8 인도; 한국도착 1950, 11, 20.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독립한 이후 네루(Jawaharlal Nehru) 수상 이래 중립 또는 비동맹노선을 지켜오며, UN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활동과 역할을 수행하였다.
6.25전쟁 발발이후 인도는 란가라지 (Rangaraj) 중령과 341명으로 구성된 60공정야전병원부대를 한국으로 보냈는데, 야전병원에는 외과의사. 마취의사, 일반의사, 치과의사 등이 포함되어있었다.1950년 11월 20일 한국에 도착한 60공정야전병원부대는 1953년 8월까지 연인원 627명이 총 1,400회에 달하는 부상자를 치료하였다.
60공정야전병원부대는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인도 포로송환 관리단(Custodian Force)과 합류하여 포로송환 업무를 지원하다가 1951년 2월 23일 포로송환관리단과 함께 인천항을 떠나 본국으로 향하였다.
19 덴마크: 한국도착 1951, 3. 7.
덴마크는 UN이 1950년 6월 27일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의료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하고 UN회원국 중에서 제일 먼저 지원의사를 통보하였다.
하머리히(Kai Hammerich) 준장과 100명으로 구성된 덴마크 적십자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는 1951년부터 1953년 8월까지 총 3차례에 걸쳐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참전기간 중 유틀란디아호에서 근무한 연인원은 630여 명이었고, 이들이 진료한 부상자의 총수는 6,000여 명이었다.
유틀란디아호는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자 귀국에 앞서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약품과 의료 기자재들을 UN한국재건단을 통하여 여러 민간병원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1953년 8월 16일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인천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면서 인천항을 떠났다.
20 노르웨이: 한국도착 1951, 6, 22.
노르웨이는 UN의 요청에 따라 적십자사를 통한 의료지원부대 파견을 계획하였다. 6개월마다 파견 인원을 교대시킨다는 방침 아래 램스테드(Herman Ramstad) 대령과 83명으로 구성된 노르웨이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51년 7월 19일부터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한 후 1954년 11월 10일까지 자신들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연인원 623명을 투입하여 90,000명 이상의 부상병들을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진 수술은 9600회에 이르렀다. 휴전 이후에는 민간인 치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1 이탈리아: 한국도착 1951, 11, 16.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UN회원국이 아니었으나 적십자사를 통해 의료부대를 파병하였다. 코이아(Luigi Coin) 대위와 67명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은 1951년 11월 16일 부산항에 도착해 12월 6일 서울 우신초등학교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한 후 철수 전까지 연인원 128명이 파견되어 입원환자 7,250명과 외래환자 222,885명 등을 치료하였다.
휴전 이후에도 의료봉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병원에 입원했던 부상병들이 귀국하자 민간인 진료와 구호업무에 전념하다가 1954년 12월 30일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의료 장비와 시설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UN군, 한국군, 일반 민간인들의 치료와 구호에 공헌을 남기고 1955년 1월 2일 철수하였다.
22 독일: 한국도착 1954, 1.
독일은 1953년 4월 야전병원 파견 의사를 미국과 UN에 제의한 후 이듬해인 1954년 한국민사원조사령부로부터 공식 구호기관으로 승인받아 적십자병원을 설립·운영하였다.
1954년 5월 17일 정식 개원한 이후 1959년 3월 14일까지 환자진료 30만여 명 및 출산지원 6,000여 명 등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UN군 산하 주한의료기관으로서 가난 때문에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한국인 환자들에게 인도적 이념을 실현하였으며, 한국 의료진 양성사업을 실시하는 등의 지원활동을 펼쳤다.
This is War! 이것이 전쟁이다!
초판 발행 : 2018. 11. 11.
증보판 발행 : 2021.6.25
지은이(writer):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 옮긴이(translator) : 박종왕(Park Jong Wang)
발행일: 2021.6.25.
발행처: 유엔평화기념관 UNPMSDI(유엔평화지속발전연구소) 부산 남구 홍곡로 320번길 106
발행인 : 박종왕
이것이 전쟁이 는 종군기자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이 6·25전쟁 당시 촬영 한 사진 30점을 유엔평화기념관에 기증해 준 것을 기념하여 「David Douglas Duncan, Harrison E. Salisbury. This Is War!: A Photo-Narrative of the Korean War(1951)』을 토대로 국문번역과 기증사진을 추가하여 발간한 것입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원고(국문)와 사진의 저작권은 (사)국제평화기념사업 (유엔평화 기념관)에 있으며,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
This book is published to commemorate David Douglas Duncan's donation for 30 photographs he took during the Korean War. We, at United Nations Peace Memorial Hall, added his donated photographs and a Korean translation to his book David Douglas Duncan, Harrison E. Salisbury, This Is War!: A Photo-Narrative of the Korean War(1951)』.
ⓒ The Commemorative Organization for Woid Peace(UN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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