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루아양(Royan)의 추억
한돈희
1976년과 1977년 사이에 나는 루아양에 있는 카렐(CAREL)이라는 어학훈련소에서 몇 개월간 공부한 일이 있다.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하려면 어학훈련을 받아야한다. 루아양은 프랑스의 관광도시이다. 망망한 대서양의 바다가 보인다. 갈매기가 울고 파도가 모래사장을 몰려왔다가 나간다. 그림처럼 깨끗하고 아름답다. 여름철 사람들이 몰려오면 돈을 버는 도시이다. 그 이외의 계절에는 어학훈련 학교가 개설되어 학생들이 모여들어 주민들은 학생들에게 방을 빌려주고 돈을 번다. 여름철이 시작되면 관광객이 몰려오고 비산 값에 방을 빌려주고 수입을 올린다. 시내는 아주 작고 야외는 넓은 들이다. 작은 상점들이 있고, 극장, 큰 슈퍼마켓이 몇 군데 있다. 카페가 여러 군데 있다. 해안가와 모래사장이 명물이다.
카렐 학교는 3-4층의 건물이다. 불어, 영어, 스페인어 등 여러 나라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이다. 나는 고등학교 불어교사이어서 이런 학교에 와서 배우게 되어 감사하였다. 한국대학에서 배운 어학실력으로는 프랑스대학에 와서 공부하기란 턱 없이 모자란다. 처음 배정된 A반은 한국 학생과 타일랜드 학생들이다. 모두가 불어교사들이다. 타일랜드 학생들은 대개가 여자들이고 20대들이었다. 그들은 나보다는 불어 실력이 나은 듯하였다. 그들은 국교가 불교라는데 여학생들은 대개 경건하고 얌전해 보이었다. 몇 개월 후 B반으로 갔을 때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학생들과 공부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로 나이가 20전후 이였으나 머리가 우수한 학생들이다. 우리나라 과학고등학교 출신들 같다. 어학을 배워서 프랑스 이공계 대학을 가서 석사, 박사를 할 학생들이다. 말레이시아 학생들도 장학금을 받고 석사, 박사 공부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에 영어를 쓰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불어 실력은 없었으나 듣는 것이 빠르고 한, 두 달이 무섭게 불어 실력이 발달하였다. A반에서 배울 때의 불어선생은 할머니였는데 대단히 열성적인 분으로 공부를 못하면 면박을 주고 핏대를 잘 냈다. 졸면 야단맞는다. B반에서는 쎄렐 선생을 만났는데 젊은 여성이다. 기혼녀로 예의가 있고 급하지 않았다. 화내는 일도 없었다. 착실하게 공부를 가르치는 분이다. 이 학교에는 도서실이 있었는데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시간이 나면 가서 잡지도 보고 책도 읽었다. 타임 등 잡지에 한국에 대한 뉴스가 나면 읽었다. 불한사전을 도서관에 놓고 온 일이 있었는데 다음 날 가니 여자 사서가 보관하였다가 주어서 감사하였다.
내가 루아양에 있을 때 몇 개월은 장드르의 집에 살았고 몇 개월은 세실 네 집에서 살았다. 장드르의 집은 교외, 변두리에 있었다. 작은 도시라 학교 가는데 15분 정도 걸린다. 공부는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오후 3시, 4시에 끝난다. 나를 위한 공부지만 하루 몇 시간씩 공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토요일, 일요일은 쉬기 때문에 한결 여유가 있다. 장드르 부부는 아주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장드르는 목수로써 키가 작고 친절하였다. 그의 부인은 잘 웃고 친절하였다. 몇 달 같이 살았는데 식구처럼 살았다. 명절 때는 그의 집 식구들과 같이 식사하였다. 방도 넓고 샤워장도 있고 부엌도 넓고 냉장고, 가스불 등이 있어서 식생활에 불편이 없었다. 아들 둘, 딸이 셋인데 재미나게 열심히 사는 가족이었다. 그 집 둘째 아들이 결혼을 해서 프랑스 사람들이 결혼식 하는 모습을 잘 보았다. 일차로 성당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었다. 나는 병에 담은 꿀을 사가지고 갔다. 장드르 부인이 자기에게 주는 것이냐, 신랑에게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달리 축의금을 받는 것 같지는 않고 성당에서 연보 채를 돌리면 돈을 넣었다. 예식이 끝나면 간단한 파티 식사가 있었다. 오후에는 각자 자가용을 타고 야외 파티 장으로 갔다. 식탁에는 각기 이름표가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코스 요리가 나온다. 재미난 게임이 있었다. 연보 채처럼 돈을 걷는 행사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낸다. 보아하니 친척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서 비용을 내는 듯 보였다. 밤 12시부터는 식탁을 치우고 춤추는 홀로 만든다. 날이 밝도록 춤을 춘다. 사돈끼리 짝을 바꾸어 춤을 추었다.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누구도 즐겁게 춤을 추었다. 나중에 장드르 부인이 결혼사진을 나에게 팔았다. 30 프랑인가 주고 샀는데 지금은 소중한 추억사진이다.
이 어학 학교에는 식당이 없었다. 그것이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우유와 빵, 과일 등으로 점심을 준비해서 학교에 간다. 점심시간은 2시간이 됨으로 한국인 학생들을 만나면 한적한 공터로 가서 같이 먹기도 하고, 학교 휴게실에서 먹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한다. 해안가로 가서 먹고 해변을 걷기도 한다. 우유는 장드르가 생우유를 사다주었는데 그것을 끓여서 병에 넣어 담아가지고 가서 마시었다. 사과, 파인애플 등 과실을 실컷 먹었다. 저녁에는 밥하고 고기 국을 끓여서 먹었다. 프랑스 사람은 보신탕으로 말고기를 먹는다. 장드르씨는 폐병에 걸려 죽을 번 하였는데 계속 말 피를 사다 마시고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말고기만 파는 푸주간이 있다. 이때 학교에서 옷값으로 600프랑의 보너스가 나왔다. 나뿐 아니라 받은 학생들은 다 좋아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는 이웃집에서 나를 초대하였다. 집 주인은 운전사였는데 뚱뚱하고 건장하고 서글서글하였다. 그의 부인은 날씬하고 착한 미인 형 이였다. 아이들은 초등, 중등 다닐 아이들이 4-5명 되었다. 앞집에 살기 때문에 지나다니다 보면 “봉주르”하고 인사하게 되고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 친숙하게 된다. 하루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그를 만났다. 그는 말한다. “오래전부터 한선생을 초대해서 저녁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어요. 내 근일 연락 할 터이니 그 때에는 꼭 오도록 해요.” 서로 왕래하고 사귀어야 우정을 잊지 않게 된다고 한다. 초대하는 날 그의 집으로 갔다. 손님은 그 집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음악선생하고 나하고 이다. 없는 살림에 만찬을 차리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하다 11시에 헤어졌다. 외국 사람에게 이러한 호의를 보인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한 두 달이 지나서 나는 그들 부부를 나의 집에 초대하였다. 신세를 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 동양의 윤리가 아닌가. 물론 밥하고 국하고 과일, 빵들과 술 등이었다. 그분 온가족과 음악선생이 왔다. 운전사 부인은 예쁜 여자 인형을 사다 주면서 “이런 예쁜 여자한테 장가드세요.”했다. 모두가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였다. 음악선생은 나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다. 음악도 잘 하고 미술도 잘 하는 분이다. 어느 날 운전사는 자가용으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나를 데리고 갔다. 사람도 상당히 왔다. 음악선생이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운전사의 두 딸도 악사로서 거기에 나왔다. 이들 부부의 호의를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나의 집에 프랑스인 젊은 부부가 한국인 입양아를 데리고 찾아왔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라는데 남자 아이인데 몸에 헌데가 나고 하였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친딸은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인데 예쁘고 깨끗하였다. 한국 아이는 몇 달이 되었다는 데 “빠빠, 마망” 불어로 한다.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어 사랑을 받고 대우 받고 자라고 있었다. 한국 사람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2월 초에는 나는 장드르의 집을 떠나 뽕따이락 근처의 후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 한 달에 400프랑씩 하는 집인데 내 생애에 가장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다. 방이 크고 밝았다. 방에는 목욕실이 있다. 침대도 양족으로 두 개다. 천정에는 둥근 불빛이 밝았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었다. 식구는 셋이다. 할머니, 할머니 딸 후리부인, 고등학교 다니는 딸 세실이다. 80대 할머니는 노환으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할머니는 화가였다는데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 여러 장 응접실에 걸려있다. 후리부인은 키도 크고 후덕하게 생긴 인상이다. 귀족 집 부인처럼 우아하고 어딘가 위엄이 있었다. 같이 생활하다 보니 아주 신사이었다. 부엌도 같이 쓰고 냉장고도 같이 쓴다. 냉장고 1층, 2층을 가려 나누어 쓴다. 그 부인은 할머니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병원에서 간호하다가 밤 12시가 되어서야 딸 세실하고 돌아왔다. 딸 공부에도 관심이 많아 텔레비전을 놓지 않았다. 딸 생일날에는 학급 남녀 친구들을 초대해서 대접하였다. 할머니가 집에 와 있을 때는 후리 부인은 할머니의 친구들을 모셔다가 말벗이 되게 하였다. 할아버지들도 모셔왔다. 후리 부인은 아들도 둘인데 결혼해서 먼 해외에 나가 산다고 한다. 이 집에 사는 동안 후리 부인은 나를 동반하고 자가용차로 할머니를 위해 꽃을 따기 위해 먼 야외로 나가 야생 꽃을 따러가고 아는 집을 둘러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였다. 늙은 개인 쌍바가 없어지면 차를 타고 같이 시내를 돌며 찾아다니었다. 개도 남자가 그리워 밖을 나갔던 것이다. 루아양의 추억은 많다. 사소한 것은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쉽게 루아양에 다시 가서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가지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나갔다.
(한돈희 시조시인 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부천문인협회 회원, 전 서울고 교사)
서울문학 20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