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미 외무장관 회담 1965년 오늘 한일 국교수립 문제로 국내의 반대여론에 직면하고 있던 이동원 외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을 잇따라 만났다. 존슨 대통령은 한일 국교 수립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러스크 장관과의 외무장관 회담에서 이동원 장관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우리나라는 이 외무장관 회담이 있기 한 달 전 베트남 파병을 시작했다. 러스크 장관은 한일 국교가 수립돼도 미국의 군사, 경제적 원조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협상 중이던 한미행정협정의 빠른 체결도 다짐했다. 이동원 장관은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를 방문해 우탄트 사무총장과 면담도 가졌다.
[1992년] 경국대전 최고본 발견 조선왕조 5백년의 기본헌법이었던 경국대전 초간본이 1992년 3월 18일 발견됐다. 이는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1470년 10월 간행된 이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신묘대전 이란 명칭으로 기록돼 있으며,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져 온 경국대전(1484년 간행 을미대전)보다 간행연도가 14년 앞서는 국보급이다. 이날 발견된 신묘대전은 가로 17.4㎝,세로 25.3㎝ 크기에 초주갑인자로 제작됐으며 1책 2권의 1백76쪽 분량에 서문과 목차, 편찬자 명단, 이전, 호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경국대전의 발행은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통치의 기초인 규범체계가 확립 된 점, 조선왕조의 고유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중국법의 무제한적 침투에 방파제가 됐다는 점 등의 의의를 가진 것으로, 조선 법제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됐다.
[1962년] 프랑스, 알제리 휴전협정 조인 ←알제리인들이 `민족해방전선(FLN)만세` 포스터를 가리키며 기뻐하고 있다. 1962년 3월 7일 시작된 프랑스-알제리간의 에비앙 평화회담에서 3월 18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로써 7년 동안에 걸친 프랑스-알제리 전쟁은 종식됐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하는 비밀군사조직(OSA)을 이끌고 있는 라울 살랑 장군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알제리 독립에 대항해 계속 싸울 것을 촉구했다. 살랑의 호소가 있은 지 수일 만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시와 오란에서 발생한 시가전에서 수십명이 사망했다.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알제리인들은 수개월 내에 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일부로 남을 것인지 더많은 자치권을 얻을 것이지 혹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알제리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99.72%의 찬성으로 독립을 결의, 7월 3일 드골 대통령이 특별메세지를 통해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환희에 들뜬 수천명의 알제리인들이 수도 알제 거리를 메우고 공항에 도착하는 드골의 새 내각을 환영했다. 드골의 독립선포로 132년 간에 걸친 프랑스 식민통치의 막이 내려졌다.
[1980년]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 사망 신프로이트학파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리히 프롬이 1980년 3월 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00년 유대인 태생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프롬은 어린 시절 유대교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후 사춘기 때 경험한 ‘전쟁’이라는 사건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또한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맹목적인 증오와 광적인 폭력에 열중하는 모습에 인간과 그 인간이 모인 집단인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하이텔베르크 등지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한 뒤, 베를린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탐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4년부터 콜롬비아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한편, 계속해서 저술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스도의 도그마’ ‘소유냐 삶이냐’ 등이 있다. 한때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과 사회학자, 특히 마르크스 이론을 연구하며 이 이론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프롬의 대부분의 이론적 근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두고 있다. 프롬은 인간과 사회 문화 및 종교의 넓은 영역을 종횡무진 섭렵했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인간’에 있었다. 프롬은 비단 사회조직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종교도 다 인간중심의 것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프롬은 한때 동양의 불교에도 심취한 바 있으며 끝까지 이상적인 인간상 즉, ‘자유인’을 부르짖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없인 살 수가 없다.”(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中).
[1858년] 디젤 Rudolf Christian Karl Diesel 출생 1858년 3월 18일 태어남 / 1913년 9월 29일 죽음 디젤은 디젤 기관을 발명한 독일의 열(熱)공학자이다. 185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1870년 독일로 건너가, 숙부가 교사로 있는 아우크스부르크공업학교를 마치고 1875년 뮌헨공과대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기존의 내연기관에서는 전환된 에너지의 극히 적은 부분만이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열효율이 높은 내연기관 개발에 힘썼다. 1892년 자신의 이름이 붙은 내연기관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크루프사의 지원을 받아 1894년 더 안정되고 값싼 디젤 기관의 운전에 성공했다. 1913년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하던 중, 갑판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1908년] 백철 (한국 문학평론가) [白鐵] 출생 1908. 3. 18 평북 의주~1985. 10. 13 서울. 개요 프롤레타리아 문학기를 거쳐 8·15해방 이후 신비평 이론을 소개하는 등 한국 문학비평에 있어서 대들보 역할을 했다. 본명은 세철(世哲). 생애와 활동 소지주인 무근(茂根)의 아들로 태어나 13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 신의주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1922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27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무렵 〈지상낙원〉·〈전위시인〉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NAPF)에 가입했다. 1931년 귀국해 개벽사에 입사하면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중앙위원이 되었고, 이때 해외문학파와 논쟁을 벌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전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수감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동아일보〉에 〈비애의 성사(城舍)〉라는 제목의 출옥소감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문학이 과거와 같은 의미에서 정치주의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를 버리는 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찬하해야 할 현상"이라면서 전향을 선언했다. 즉 인간탐구의 문학을 내세우면서 유형화된 이념적 인간보다는 소극적일지라도 양심적인 인간을 그릴 것을 주장한 것이다. 1939년 〈매일신보〉 문화부장을 지냈고, 1942년 중국 북부지방 특파원으로 있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했다. 8·15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신문학사조사〉의 집필에만 전념했다.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대학 학장, 1957년 미국 예일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 교환교수로 다녀왔고, 1963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위원장, 1970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회장을 지냈고, 1972년 일본문화연구 국제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문학의 국제적 이해를 도모했다.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평론세계 1931년 평론 〈농민문학문제〉(조선일보, 1931. 10. 1~20)를 통해 안함광이 농민문학의 목표는 빈농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이라고 한 것은 기계주의적인 좌익편향에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뒤 〈창작방법문제〉(조선일보, 1932. 3. 9~10)와 프루스트의 신심리주의 문학을 비판한 리얼리즘 문학론인 〈현대문학의 신심리주의적 경향〉(중앙, 1933. 11)·〈비평의 신임무〉(동아일보, 1933. 11. 15~17) 등을 발표했다. 1933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도식성을 비판한 〈문단시평-인간묘사시대〉(조선일보, 1933. 8. 29~9. 1)를 발표해 카프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인간탐구가 문학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작가가 개성을 버리고 서구의 문예사조에 휩쓸리는 것을 비판한 〈문예시평-금일창작의 음미-낭만인가? 진실인가?〉(조선일보, 1936. 3. 18~28),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현실에 굴복한 지식인을 옹호한 〈고민과 문학〉(조선일보, 1936. 4. 23~24),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론인 〈인간탐구의 문학〉(사해공론, 1936. 6), 인간성을 존중한 〈휴머니즘의 본격적 경향〉(청색지, 1938. 8), 보편적 개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성과 보편성〉(조광, 1938. 10) 등을 발표했다. 나아가 웰렉 등의 신비평 이론을 소개하는 〈뉴크리티시즘에 대하여〉(문학예술, 1956. 11)를 발표해 기존의 작품해석이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에 근거한 점을 비판했다. 그뒤 〈다시 행동적 휴머니즘의 시대〉(새벽, 1960. 12)·〈세계문학과 한국문학〉(사상계, 1962. 11)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 1948년 〈조선신문학사조사〉를 펴낸 뒤, 〈문학개론〉(1954)·〈문학의 개조〉(1958)·〈비평의 이해〉(1968)·〈백철문학전집〉(1972)·〈국문학전사〉(이병기 공저, 1985) 등을 펴냈다. 1963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발생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유혈진압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이유로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한 데 이어 방화범 3명과 전단 살포범 3명, 의식화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다음날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한 김현장이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권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되었으나 투쟁의 성격이 격렬하고 대담해 국민과 재야운동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996년] 무궁화위성 방송서비스 개시 무궁화위성(KOREASAT) 1호는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곶(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맥도넬더글러스의 델타 Ⅱ 로켓에 의해 1995년 8월 5일 주위성을 발사하였으나 정지궤도에는 8월 30일에 진입하였다. 예비위성은 12월에 발사하였다. 적도 상공 약 3만 6000km, 동경 116°의 지구정지궤도상에 발사되어 국내 위성통신 및 운행차량, 선박의 위치 등 각종 위성 데이터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 위성이 발사하는 전파빔은 그 중심점을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 두고 한국 전역과 일본, 연변 일대를 대상으로 한다. 위성관제소는 경기도 용인시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있다. 무궁화 2호은 1996년 1월에 발사, 궤도진입에 성공하였다. 또한 1999년 9월 5일에 무궁화 3호를 발사함으로써 초고속 위성 멀티미디어 인터넷, 다채널 디지털 위성방송, 기업 통신 네트워크 등에 다목적으로 할수 있게 되었다.
[1927년] 이화여전, 제1회 졸업식 치름 이화여자대학교 :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M.F.스크랜턴 부인에 의하여 창설, 이듬해 명성황후가 교명을 이화학당이라고 이름하였다. 교훈은 '진, 선, 미'이다. 1910년 4년제 대학과정을 신설하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다시 개칭하였다. 1945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한림원·예림원·행림원 등 3원에 문과·의학예과·교육과·약학과·체육과·미술과의 8개 학과를 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김활란(金活蘭)이 취임하였다.
[1890년]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실각 1890년 3월 18일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1862년 9월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빌헬름 1세의 후원으로 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신생 독일 건설에 힘쓴 결과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을 이루면서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888년 3월 빌헬름 1세의 죽음으로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1890년 의회가 사회주의자 진압 법안을 부결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에 이은 총선거에서 그가 주도한 여러 정당들이 패배했다. 그는 황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내각 총사퇴를 호소했지만 모두 외면했고, 결국 빌헬름 2세의 요구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64년] 한국-라이베리아 국교 수립
한국은 1964년 3월 라이베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 1973년 7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라이베리아도 1983년 11월 아프리카에서는 가봉 다음으로 주한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82년 5월 도 국가원수의 방한으로 친한정책이 견고해짐에 따라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1984년 한국 건설업체가 도로건설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 1982년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 뒤 주로 농업분야 종사자에 대하여 기술공여를 해 왔다. 또한 의복·차량·의약품 등 한국산 기자재의 무상공여와 의료단 파견 등으로 실질경제협력관계를 증진시켜 왔다. 2003년 현재 교민수 26명, 무역량은 2002년 대한수입액 14만 2664달러, 대한수출액 117만 달러이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하였으나 1988년 KAL기 테러사건 뒤 단교하였다.
[2000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선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1951~ ] 후보가 2000년 3월 18일 중국의 위협 속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39.30%의 지지로 승리,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의 통치를 종결시켰다. 1951년 남부 타이난현에서 출생한 천수이볜은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중학교 수석 졸업, 대만대 법과 수석 입학, 대학재학중 사법시험 수석합격 등을 통해 `가난한 수재`에서 변호사가 됐다. 1994년 타이베이시 첫 직선시장이 됐으나 1998년 연임에 실패했다. 대만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이 시장 재임시 추진한 강력한 개혁을 기억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그를 지지했고 공직사회를 정화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부인 우수전은 정치테러로 15년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과학기술개발촉진을 위한 과학백화제방 선언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뜻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은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 중국의 정치구호이다. 1956년 당시 중국공산당 선전부장인 루딩이[陸定一]가 한 연설에서 쓴 말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사상과 경쟁하는 속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처음부터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상으로 강요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획기적인 사회주의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문학대혁명 때는 이 정책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라고 규탄당하면서 루딩이도 비판당하였다. 1976년 4인방이 체포·실각된 후 문예·학술 분야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한 때 장려되었고, 1978년 3월 채택된 중국 헌법에서는 "국가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실천함으로써 예술발전과 과학발전을 촉진하고, 사회주의 문화번영을 촉진한다"(제14조)고 명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그때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였다. 1978년 이 정책을 명문화시킨 것은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이 문혁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혁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하였으나, 실권을 장악한 후인 1982년 12월 채택한 헌법에서는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코스타리카 방문 - 미국-중미 6개국 정상, 진보를 위한 동맹회담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