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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로마서 주석',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서문
로마서는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들여서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 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묵상할 가치도 있다. 이 서신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며 아무리 자주 읽거나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신이 이 서신을 더 많이 탐구하면 할수록 이 서신은 보다 더 귀하게 되며 그 향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이 서신은 그 핵심에 있어서 성경 전체를 조명하기에 거의 충분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등불이다.
먼저 용어를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1) “율법”은 믿음으로 성령으로 성취하고 굳게 세운다.
“율법”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즉 어떤 행위들이 허용되어 있거나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내면의 확신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도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지키지 못한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22).
당신이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율법을 지킨다고 한다면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과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강제 아래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되고 만약 율법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논리적 결론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당신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며
율법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7장(:14)에서 바울이 율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율법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은 두려움이나 강제 아래에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요구사항들을 기쁘고 사랑스럽게 충족시켜야 한다.
마치 율법이나 그 형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율법에 대한 속박감을 느끼지 않고 덕스럽고 올바른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기쁨, 이 속박받지 않는 사랑은 바울이 5장(:5)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주어진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
우리는 믿음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정죄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는 3장(:31)의 의미이다.
(2) “죄”는 외적 행위들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유인하거나 촉발시키는 모든 상황들을 말한다. 외적으로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특히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모든 죄의 뿌리이자 근원, 즉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신앙을 바라본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영과 소원을 주듯이 불신앙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6:8에서 영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다.
선행 또는 악행이 행해지기 전에, 그것들이 선한 열매 또는 악한 열매로 드러나기 전에
신앙 또는 불신앙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모든 죄의 뿌리, 수액, 주요한 동력이 있다.
(3)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다.
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주신다고 할 때 은혜와 은사는 서로 다르다. 바울은 5:15에서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은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많은 은사들처럼 파편으로 나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며 은사들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육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와 선의를 보여주신다.
(4)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믿음은 꿈꾸는 그 무엇,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요한복음 1: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흔들림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당신 안에 믿음을 창조해주시도록 간구하라.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속이려고 할지라도 또는 당신의 노력과 능력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 마르틴 루터, 『로마서 주석』, pp 15-21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 마틴 루터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우리에게 오는 환난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오는 환난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오는 환난에서 좋지 않은 부산물이 생겨나는 것은 환난 자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을 이겨내는 자의 연약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환난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경외함으로 떠받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환난에 관하여 잘못 생각해서, 환난의 본질, 힘, 작용(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그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때에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난다.
환난을 통해서 그들은 최고도로 연단되고 정화된다. 환난은 우리 안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더 온전히 계발시킨다. 어떤 사람이 육적이고, 연약하고, 눈멀고, 악하고, 화를 잘 내고, 콧대가 높다면, 환난은 그를 더 육적이고, 연약하고, 눈멀고, 악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반면에 “곤란 중에 나를 크게(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시편 4:1의 말씀처럼, 어떤 사람이 영적이고, 강하고, 지혜롭고, 경건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그는 더 영적이고 힘있고 지혜롭고 경건하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환난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짜증이 많다는 사실을 드러내서 입증해 줄 뿐이다. 따라서 누구나 환난을 통해서 자기 마음이 본래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겉으로 거룩한 성물인 십자가를 숭배하면서도 환난과 시련을 싫어하고 거기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은 무지하고, 유치하며, 위선적인 자들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는 마태복음 10:38의 말씀처럼, 성경에서는 환난을 일종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이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회교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을 누구나 명심해야 한다. 사도행전 14:22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 주님을 ‘구주’, ‘환난 중에 돕는자’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환난을 견디고자 하지 않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영예로운 직함들과 명칭들을 빼앗는 것이 됨을 의미한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결코 구주가 되시지 않을 것이다.
연단은 환난의 목적 또는 환난이 가져다주는 미덕이라는 좋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연단시키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의로운 자로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여호와는 의인을 연단하시고(‘감찰하시고’)”라는 시편 11:5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의 불을 통하여 연단하신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을 그 자체로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환난은 사람에게서 그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서, 사람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또한 환난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선한 행위들 속에서 도움과 구원을 찾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는 시편 3:3의 말씀처럼, 환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절망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만들고 자기 자신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게 만들어서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만을 찾게 만든다. 이것이 “소망”이 의미하는 것인데,
환난에 의한 연단을 통해서 그러한 소망이 우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미덕들에 의지하고 환난을 인내하지 않고 연단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자들은 최후의 시련이 닥쳐와서 그들의 모든 미덕들과 공로들이 사라져 버리고, 영원한 절망 속으로 가라앉는 그 날이 오면,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눅23:30)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이 소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전혀 소망이 아니었고, 단지 그들 자신의 행위들과 의에 대한 잘못되고 오만한 신뢰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 『로마서 주석』, pp 115-117
원죄란 무엇인가? /루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5:12)
원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자범죄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온다.
사실 자범죄는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의 자범죄들은 그 범죄자의 머리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자범죄들을 범하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죽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은 분명히 단지 그들이 개인적인 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 어떤 구체적인 자범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죄”라고 말함으로써 단수로 된 하나의 죄, 즉 원죄를 가리킨다. 어떤 사람의 자범죄가 다른 사람의 죄로 되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으로’ 되는 일은 없다. 자범죄는 모세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죄인의 책임으로 돌려져서, 처벌되었다. 그러나 원죄는 모세가 율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기까지는 사람들이 몰랐다.
원죄는 의지 속에 선한 성질이 결여되어 있는 것, 인간의 의 및 선행의 능력의 상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죄는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모든 능력들, 인간의 외적, 내적 모든 완전들의 상실이다.
이와 아울러 원죄는 악한 모든 것에 이끌리는 성향, 선한 것에 대한 혐오, 영적인 빛과 지혜에 대한 반감, 잘못과 어둠에 대한 사랑, 선행들의 회피와 혐오, 죄악된 것에 대한 추구 등이다.
따라서 시편 14:3에서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 하고, 창세기 8:21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말씀한다.
본질적으로 자범죄들은 마태복음 15:19에서 주님께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라고 말씀하시듯이 우리로부터 나오는 죄들이다.
그러나 원죄는 우리에게 들어온다. 우리는 원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에 의해 고통을 겪는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한 죄인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자기와 닮은 죄인만을 낳을 수 있다.
- 『로마서 주석』, PP 119-12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6:14)/ 마틴 루터
이것은 땅에 속한 것들과 현세적인 소유물들을 탐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시련과 역경을 회피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아무리 심하게 유혹을 받는다 하여도 이 세상의 것들을 탐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죄를 지으면서까지 원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그 어떤 심한 공포가 그에게 덮쳐 와도 그 어떤 환난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서서, 즐거운 것을 구하지도 않고, 역경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포와 맞서기를 두려워하게 하고, 자신의 정욕들에 굴복하게 하고, 마음을 호리는 유혹들에 넘어가게 하는 시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이라는 베드로전서 4:18의 말씀처럼, 그는 비록 고군분투와 고뇌를 통해 승리를 얻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 정욕과 유혹들에 굴복하지 않게 된다. 금이 불 속에서 연단되듯이, 주님의 허락 하에서 그는 인내의 극한까지 연단과 시험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보다 생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죄는 여전히 그를 지배하고, 그는 율법 아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2:25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마태복음 10:37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마태복음 10:38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죄의 홍수는 우리를 삼켜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전10:13).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시험을 받아 넘어지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믿음에 서서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신실하시다.
우리를 유혹해서 우리를 지배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죄는 성도들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롬8:28). 이렇게 죄가 믿는 자를 공격하여 부도덕한 행위들로 유혹할수록 믿는 자의 영혼은 더욱더 고결하게 단련된다. 교만의 유혹을 당하면 신자의 영혼은 더욱더 겸손해진다. 나태하고자 하는 유혹은 신자의 영혼을 더욱더 부지런하게 만든다. 분노의 유혹은 신자의 영혼을 더욱더 온유하게 만든다. 폭식의 유혹은 신자의 영혼을 더욱더 순종적으로 만든다. 이런 식으로 유혹은 결국 커다란 축복이 되어 버린다. 사실 우리가 죄에 굴복한다면,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물리쳐서 방금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선을 위한 종으로 삼아야 한다.
- 『로마서 주석』, pp 13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