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의 삶이 기뻤든지, 슬펐든지, 행복했든지, 고통스러웠든지, 승리했든지, 실패했든지 그리고 얻었든지, 잃어버렸든지, 그 모든 생애의 순간들은 과거 라는 무덤 속에 묻혀 버리고, 이제 이렇게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모두 비장한 각오로 새하얀 페이지를 엽니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당신의 눈동자가, 그리고 기록하는 펜이 들려진 배려 깊은 당신의 손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시작되는 새해의 페이지에는 아름다운 기록들만 쓰이기를, 그래서 당신의 순결한 마음을 졸이게 하는 일이 더는 없기를 바라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이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순간들로 채워졌었는가를,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이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늘지게 하였는가를&.그렇다고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요? 말해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얼굴에 미소 띠게 하였던 순간들이 그리 적지는 않았다고&.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해에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슬픔과 고통과 환희를 함께 나눈, 그리고 하늘의 뜻과 사랑을 전해 주려고 끊임없이 애쓴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유혹과 시험 속에서
아직도 기억합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선 듯 흔들리던 그 순간, 세찬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처럼 떨며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던 그 순간을&. 인간의 욕망이 꽈리를 틀며 머리를 내밀고, 내 뜻대로 들이대고 싶은 격정이 휘몰아쳐, 뼈처럼 남아 있는 뾰족한 자존심이 겸허한 굴복을 거절하려고 싸우던 순간, 화살처럼 쏘아 올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응답으로 보내진 당신은 유혹의 갈등 속에서 우리를 빼어 내는 일에 넉넉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울의 추가 흔들리듯 세상을 향한 욕망의 추가 더 무거워지고, 그래서 하늘의 뜻이 우리 마음속에서 흔들리려던 순간마다 당신은 어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분주히 행해 주었습니다. 늘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얻는 겸손한 당신은&.그러면 갑자기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이 가져온 하늘의 빛과 힘이 우리를 감싸고, 호수의 파문이 멈추듯 조용히 가라앉은 마음속에 하늘의 멜로디가 은은하게 흘러넘쳤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상기시켜 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라 성령의 감화와 평화로움에 잠겨 들며 영적인 힘을 얻곤 했습니다.
외로웠을 때
그냥 그런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의기소침해지고, 지속되는 실패로 낙심되고, 그리고 모두 떠나버린 것 같은 소외감으로, 또 자신의 쓸모없는 존재감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가을 이슬처럼 적셔지는 외로운 순간들이 있지요. 낙심의 감정과 우울한 그늘을 두르는 어둠의 세력은, 곧잘 연약한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여 구름 위에 늘 빛나는 태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의 마음속에 환희의 빛으로 임하고, 그리하여 세상의 어떤 슬픔도, 어떤 재난과 고통도 이겨내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지 않도록, 당신은 늘 우리가 영의 눈을 더 크게 뜨기를 원했습니다. 섭섭함과 서운함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아무런 억제나 훈련 없이 원망의 쓴 뿌리가 마음대로 뻗어가도록 상상의 날개를 펴는 대신, 당신은 우리가 암흑의 구름 너머 아름다운 하늘의 빛을 보기를 무던히도 바랐습니다.
십자가 주위를 덮은 암흑에서 숨 가쁘게 헐떡이며 운명하실 때, 하나님의 모습도, 하늘 아버지가 자신을 가납하셨다는 증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자신을 부탁하시며,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끝까지 고난을 견디시던 예수님처럼, 당신은 우리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아내기를 원했습니다. 외로움과 서운한 감정에 휩싸인다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부주의한 순간이며,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영적 생활을 경험하지 못하는 증거라는 것을 잘 압니다. 바라기보다는 먼저 주고 베풀며, 나 자신의 부족보다는 다른 사람의 부족을 메워 줌으로 기쁨을 얻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한 해를 열어 봅니다. 하나님과 당신을 무척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열망과 함께&.
기록하던 손이 떨렸을 때
부끄러운 기억들이지만 그래도 한번 이야기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당신의 기록하던 손이 떨렸을 때의 이야기를&.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그때 더 주의했어야 하고,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의 지배력에 더 단단히 붙들어 맸어야 했음을, 그리고 어떤 땐 침묵이 백 마디의 말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음을&.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순간의 소홀함과 부주의함 때문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과 행동을 한 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성령을 근심시킨 그 일을 뉘우치던 그 밤이 얼마나 길었던가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당신이 차마 듣기 힘들어하던 우리의 모난 말과 당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게 만들던 우리의 덜 성숙한 행동들이 기록하는 당신의 손가락을 얼마나 떨리게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생애의 빛에서
우리가 종말에 살고 있다는 여러 가지의 이유들이 있겠으나 제일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인내하시기가 힘든 형편으로 이 지구가 치닫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다니엘서는 말세에 인간들의 지식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의 교통수단의 발달로 빨리 왕래하게 될 것이라고 에언하였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예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 과학의 발달을 붙잡아 오셨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빠른 시일 내에 인간들이 스스로 자멸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간들이 먼저 지구의 자멸과 파괴를 가져오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약 100여 년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과학 문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과학이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고, 기술이란 그 발견한 지식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간들은 이제 하나님께 속한 영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고, 인간의 뜻대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공 유전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무기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막아 오셨던 일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세대 동안에 온 세상에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여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났습니다.
인공 위성과 인터넷, 전화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의 죄악의 역사를 끝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의 때&. 이번 호는 여러분들을 영적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가정과 영성: 양자의 영을 받아야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2,1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한 종류는 종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종류는 양자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양자의 영 을 받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받는다고 역설하고 있는데, 과연 양자의 영 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사람은 육신의 정욕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는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벌이 두려워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간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종의 영 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무서워서 순종하고, 주인이 주는 대가를 노리고 일을 하는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살았고, 사도 바울 역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으로 살 때에 그렇게 살았다.
유대인들은 전혀 빚진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함과 헌신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렸고 희생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세운 공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구원까지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내가 이렇게 많은 봉사와 헌금을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갚아 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자신이 드린 헌신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따라다니고, 형벌을 받기 무서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된 부자지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순종하고, 아버지께 먹을 것을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종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15절에 기록한 양자의 영 이다.
진짜 아들이 되는 경험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게 된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순종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 앞에 설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은혜에 억눌려서 자신이 아버지께 놀라운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는 빚진 자의 심령이 샘솟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사도 바울이 말한 양자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빚진 자의 심령으로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의 양심 속에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좇아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2-13) 빚진 자의 심령으로 영을 좇아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 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나 양심의 가책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 속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4-15) 온 마음 가득 감격을 하고 소리 높이 아버지를 부르짖(cry) 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늘 원치 않는 죄에 끌려다녔기 때문에 눈치만 살피던 무서운 하나님이 이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아버지로서 느껴지게 된다. 우리의 경험이 여기까지 오면 그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너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날마다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이런 확신을 주신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놀랍게 달라질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 몰래 숨어서 나쁜 짓을 하면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다. 왜 그런가? 아버지가 계명으로 금해 놓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달려가서 죄를 고백하면 될 텐데 그 죄를 포기하기는 싫고, 또한포기할 수도 없어서 죄를 꼭 붙잡은 채 아버지 눈치만 살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죄를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것이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린 상태이고, 종의 영 을 받은 상태이다.
탕자와 양자의 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심령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양자의 영 을 받게 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 양자의 영을 받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양자의 영을 받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탕자의 비유 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와 있는데, 이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인도하고 구원하시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좋아서 집을 떠나는 동생을 구원하는 섭리가 나타나 있고, 아버지의 집안에서 영적으로 죽어 가는 형의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이다. 아버지는 둘째아들 탕자가 자기 몫으로 받을 유산을 챙겨서 집을 떠나려고 할 때, 가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강제로 막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면 막아 주세요. 라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그것은 이미 자신의 뜻을 세운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강제로 막지 않으신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다른 것을 추구한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의 뜻과 목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세속과 자아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오려면 돼지우리 에 떨어지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치면 아버지 내 것을 주세요! 라고 주장하는 사람에서 아버지, 나로 하여금 당신의 품꾼 중 하나가 되게 하소서. 라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과하여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8) 돼지우리가 좋은 사람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돼지우리의 생활이 싫은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께 평생 갚을 수 없는 빚, 즉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께 돌아가기 원한다. 이것이 빚진 자의 심령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9) 아버지께 너무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스스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사랑과 자비가 많은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이 집의 종으로 받아달라고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양자의 영 을 받은 상태이다. 탕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런데 탕자 자신은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될까? 자신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탕자의 마음속에는 무서워 떠는 종의 정신 이 전혀 없다. 의도적으로 죄를 품거나 붙잡고자 하는 정신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다만,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간다.
독자 여러분은 양자의 영을 받았는가? 아니면 두려워 떠는 종의 영을 받았는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양자의 영을 받아야만 그때부터 제대로 된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부둥켜안는 사이가 된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 아들을 안아 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해야만 아들도 용기를 내서 아버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탕자는 아들이 되고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먼저 안아 주지 않으면 탕자는 도저히 아버지를 안을 수 없다. 이것이 참된 빚진 자의 태도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측은해서 껴안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해서 품에 안기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철저하게 빚진 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대가로 하늘 아버지께 복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15:21) 탕자의 비유 속에는 참된 양자의 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 이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감당치 못하겠 다고 대답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탕자의 이런 모습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이다. 부활의 경험이고 생명을 얻는 경험이다.
맏아들과 종의 영
그러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어떤가? 누가복음 15:24에는 집 떠난 동생이 돌아오던 날에도 맏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반기를 든 적도 없고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완벽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너무나 좋아서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아들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맏아들은 그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 맏아들의 불만은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죽어라고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이 없었다. 는 것이다. 이 말씀 어디에 양자의 영 이 있는가? 이 말씀 어디에 빚진 자 의 태도가 있는가? 아버지의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부자의 정이, 형제의 정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아들인데 속으로는 그 영혼이 썩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누가복음 15:29이 한국어 성경에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처럼 일했는데 라고 번역되어 있다. 맏아들은 양자의 영 이 아니라 무서워 떠는 노예의 정신 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 벌을 받으니까 노예처럼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환심을 얻고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원했던 것이다. 맏아들은 자신이 일한 양에 비례해서 아버지가 대가를 지불해 주길 기대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삯꾼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행한 헌신과 희생의 대가를 기대하지는 않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또는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이만큼 자비와 친절을 베풀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대가와 공로를 기대하는 마음은 양자의 영 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맏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눅 15:24) 아버지에게 있어서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이 돌아온 것은 죽었던 아들이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것이다. 생명이 없던 아들이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얻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빚진 자의 심령으로 서게 되어서 양자의 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송아지가 아니라 더한 것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탕자가 돌아오면 온 하늘이 기뻐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사실상 맏아들도 탕자였다. 몸은 집안에 있었지만, 마음이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집안 사람 아무도 그가 탕자인지 몰랐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림을 당했는지 몰랐다. 맏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성장하는 아이는 빗나가기 쉽다. 바리새인처럼 이기적이고 뒤틀어진 성격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늘 옆에 있었지만, 그에게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집안에서 그는 외로움을 느꼈고 깊은 감사를 느끼지 못했다. 둘째아들은 육신의 배가 고픈 고난을 겪었지만, 맏아들은 그 영혼이 굶주리고 메말라 갔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아버지가 필요했다. 둘 다 아버지에게 돌아와야만 했다.
우리는 어떤 때는 맏아들로, 어떤 때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모습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어떤 때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멀어지고, 어떤 때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멀어진다.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깊은 허무를 맛보게 된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빨면서 웃는다. 그러나 그 달콤한 사탕도 엄마 품에 있을 때 좋은 것이지,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의 사탕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사탕을 붙잡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두려움과 허탈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야만 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맏아들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동생이 심한 고생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형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동생이 돌아왔는데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늘. (눅 15:28) 맏아들의 내면에는 깊은 외로움과 분노와 자기 연민이 있었다. 평생 아버지 집에서 편하게 살았음에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충만한 감사가 없었다. 그래서 늘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웠는데, 몇 년 만에 돌아온 동생이 온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께 부복하여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에게는 저런 감사가 없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대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동생에게는 맨발로 달려가 끌어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아버지를 보면서 왜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동생)이 돌아오매. (눅 15:30) 이 말씀에서 우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마음에 커다란 가시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 집안에 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맏아들의 마음은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를 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길 수도 없다.
우리의 자녀가 가장 사랑스러울 때는 그 아이가 아버지를 위해서 힘겹게 일을 할 때가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앉아서 부자의 정을 나누면서 대화할 때이다. 그 아이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사랑과 성숙함을 느낄 때,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기쁘고 행복해진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좋니? 장난감이 좋니? 라고 물으면 아이는 주저함 없이 장난감이요. 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아빠만 있으면 장난감은 언제든지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있으면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이 덤으로 주어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장난감만을 달라고 보채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철부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일하지도 않고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세속적으로 살았던 둘째아들(자유주의)이나, 아버지 곁에서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일한 공로를 주장하는 맏아들(율법주의)이나 둘 다 철부지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는 고난을 통해서 다시 돌아오도록 섭리하였지만, 맏아들에게는 끝까지 고난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맏아들에게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맏아들에게는 고난이 별 효과가 없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노예의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별다른 효용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원망을 더 크게 만든다. 아버지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둘째아들은 고난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한 맏아들은 고난받지 못한 채 구원도 받지 못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이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심한 고난의 삶을 살고 계신 분이 있는가? 고난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감사의 심령을 갖게 되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고난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지 못한 고난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다. 좁은 길을 걷기 때문에 고단하고 피곤한가? 자꾸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지는가? 빚진 자의 심령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늘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바이블 맨: 예수께서 바다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인가요? 신성인가요?
질문: 예수께서 바다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인가요? 신성인가요?
예수님은 어떻게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원하시면 언제든지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 번도 당신 자신의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의 모본을 보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분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이 되셔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만일 스스로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시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물 위를 걸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물 위를 걸으셨기 때문에 베드로도 예수께서 오라! 고 말씀하셨을 때 성령의 능력을 힙입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물 위를 걷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오라! 는 그분의 명령이 있으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홍해를 건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믿음으로 받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애굽 사람들에게 홍해를 건너라고 명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 중에 죽은 자를 살린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제자들 중 죽은 자를 살린 제자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뜻과 자신의 힘으로 죽은 자를 살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자를 살린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였을 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 신종플루에 대해서 정말 잘 아시나요?
신종플루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신종플루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신종플루는 지구 전체에 거대한 재앙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큰 질병이기 때문이다.
신종인플루엔자 A(H1N1)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사람, 조류, 돼지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이 혼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이다. 새롭게 나타난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른 이유는 대부분 사람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규모 재앙의 형태로 번져 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계 각국과 WHO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종인플루엔자 확진 환자는 발열, 오한, 두통, 상기도 증상(기침, 인후통, 콧물, 호흡 곤란), 근육통, 관절통, 피로감, 구토 혹은 설사 등의 증상을 나타냈다.
신종인플루엔자 환자는 계절인플루엔자와는 다르게 약 25%의 환자에서 구토 또는 설사 등의 소화기 증상을 동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발생한 신종인플루엔자 환자 6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발열(94%), 기침(92%) 그리고 인후통(66%)이 가장 주된 증상이었다. 신형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몇 개의 유전자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한 개체 내에 이중 감염을 유발하고, 그 과정 중에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나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신형 바이러스가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형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없는 사람들에서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을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대유행은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게 된다. 과거에도 돼지에서 기원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사람 사이의 감염증은 보고된 바가 있었으나 소규모의 감염만 일으켰다. 그러나 2009년에 새로 발생한 신종인플루엔자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계절인플루엔자에서 만성 질환자나 임산부에서 사망률이 높은 것처럼 신종인플루엔자에서도 만성 질환자나 임산부가 위험하다.
음식물 섭취로는 신종인플루엔자 A(H1N1)에 감염되지 않으며, 신종인플루엔자 A(H1N1) 바이러스는 70 이상 가열하면 사멸된다. 신형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하여 타미플루와 같은 약들이 개발되어 있지만, 바이러스가 다시 변형되어 또 다른 변종으로 나타날 경우 또는 타미플루와 같은 약들에 내성이 생긴 바이러스가 출현할 경우에는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질병 과학자들이 두려워하는 점이다.
유일한 치료 방법
제약 회사의 연구소에서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바이러스가 변이되어 새로운 변종으로 진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제약 회사에서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수년간에 걸친 임상 실험 끝에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를 만들어 냈는데, 얼마 후에 그 치료제로는 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가 출현하면, 제약 회사는 투자된 자금을 회수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회사가 새로운 바이러스의 치료제에 대한 연구 개발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나올 것을 기다리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멕시코에서 한창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에 멕시코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비행기에 수백 명이 탑승했는데, 어떤 사람은 신종플루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신종플루에 감염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낼까? 동일한 장소에서 먹고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고 암에 걸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증세를 나타내지 않은 채 지나간다. 이러한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몸이 가진 면역 시스템, 즉 저항력이다.
숨 쉴 때마다 수백 종류의 바이러스가 체내로 들어오게 되지만, 면역 시스템이 충분히 강하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저항력이 약해지면 바이러스나 암균이 빠른 속도로 번식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바이러스와 암세포를 가지고 있지만, 저항력이 강할 경우 번식하지 못하고 확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종플루에 대한 대비책은 우리 몸의 저항력을 높이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현대 의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질병과 난치병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왜 그런가? 현대 의학이 질병의 원인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통이 심할 경우 머리의 통증을 완화해 주는 약을 먹고, 감기에 걸리면 해열과 오한을 완화해 주는 약을 먹는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병의 증세를 완화해 줄 뿐이지 결코 그 원인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질병의 증세를 끝없이 쫓아다니든지, 아니면 저항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질병 자체가 몸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병의 증세를 치료하는 것은 질병의 원인을 더 깊이 키울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저항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계속해서 변이되어 새로운 변종을 만들어 내는 신종플루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저항력을 향상시키는 12가지 방법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을 2잔 마시는 것은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또한, 이것은 매일 아침에 정기적으로 화장실에 가는 좋은 습관을 유지해 준다. 각 개인에 따라서 다르지만, 위장이 비어 있을 때에 하루에 6-10잔의 물을 마시는 것은 굉장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찬물과 뜨거운 물로 번갈아서 샤워를 하는 것은 면역 시스템을 자극하여 활력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루에 두 번씩, 식사와 함께 신선한 마늘 두 쪽을 먹는 것은 유익을 가져온다. 가볍게 땀을 흘릴 정도로 산보하거나, 유익한 노동(정원 가꾸기, 채소밭 가꾸기, 장작 쪼개기 등등)을 하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올바른 수면법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저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습관인데, 특히 밤 12시 이전에 취하는 깊은 수면은 우리 몸에 매우 귀중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하루에 20분 내지 30분의 일광욕은 건강에 유익을 가져다주는데, 얼굴과 팔만 노출되는 것이 좋으며, 오전 10시와 오후 4시 사이의 강렬한 햇빛은 오히려 면역 시스템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절제하라! 과식과 간식은 절대적으로 건강에 해로우며, 커피, 담배, 술, 콜라와 같이 카페인이나 니코틴이 함유되어 있는 것들은 저항력을 심각할 만큼 약화시키는 것들이다. 채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또한, 저녁 식사를 매우 가볍게 하는 것도 매우 좋은 식생활 습관이다. 동물성 기름이나 지방은 면역 세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지방이 많이 포함된 음식은 면역 세포들의 기능을 심각하게 저하시킴으로써, 각종 암에 대한 저항력이 저하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한, 설탕이 많이 포함된 음식도 면역 세포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채식을 하면 힘이 없고 약해진다는 잘못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초식 동물 중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는 태어날 때에 150파운드이지만 4살이 되면 2,000파운드까지 성장한다. 코끼리는 강할 뿐 아니라 장수하기로 유명한 초식 동물이다.
야외나 천연계 속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준다. 특히 옥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하루에 20번 이상 심호흡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소나무나 전나무 숲 속에서 오전 10시경에 들여 마시는 산소는 신체에 커다란 활력을 가져다준다. 충분한 휴식, 단순한 생활, 단순한 사고방식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의복은 깨끗하며, 면으로 된 것이 가장 좋으며, 팔과 다리를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의복을 착용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을 주는 의복이다. 배와 가슴을 조이거나 압박하는 의복은 혈액 순환과 소화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다주므로 피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과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저항력의 향상을 위하여 가장 좋은 약이 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18,29)
창조 교실: 비둘기의 “테크노 부리”
비둘기(pigeons)들은 어떻게 멀리서도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과학자들은 그 답을 Springer Publications (2007. 3. 14.) 지에 발표했습니다. 비둘기는 매우 특별한 부리를 가졌는데, 테크노 부리(techno-beak) 라고 불리는 이 부리에는 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HASYLAB 와 협력하여 시행된 생리화학적 검사에서도, 철을 함유하는 자적철석(maghemite) 과 자철광(magnetite) 의 입자(subcellular particles)들이 비둘기 부리의 피부 안쪽에 있는 감각 신경 세포에서 발견됐답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비둘기 신경 세포의 수상 돌기들이 지구의 자기장 에 대해 매우 민감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반응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둘기들이 그들의 움직임이나 자세와 무관하게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으며, 자기의 지리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것은 아마도 비둘기에만 유일하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최첨단 방향 탐지 장비는 항해하는 모든 새, 심지어 다른 동물들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정말 많은 동물은 지구 자기장(Earth s magnetic field)에 의해서 조절되고 방향을 수정하는 행동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다거북(sea turtles), 바닷가재(lobsters), 나비(butterflies) 등과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을 찾아 돌아오는 비둘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고,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비둘기들의 항해 능력에 경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어떤 장치가 그 안에 내재하여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리에 철을 포함한 이 구조는 비둘기 몸의 전체 시스템 내에서 단지 하나의 구조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비둘기의 눈, 귀, 뇌 등은 지속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들을 빨리 처리하고 해독하여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비둘기 사육을 좋아했던 찰스 다윈은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랬다면 이 세상에 진화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요.
신앙: 1부 - 왜 세상에 홍수가 왔는가?
구약의 홍수와 노아의 방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흥미로운 연구거리를 제공합니다. 이 연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문제 그리고 성경의 역사적인 사실과 고증들을 함께 살펴볼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며, 노아가 물로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방주를 지었듯이, 불로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방주를 지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홍수와 노아의 방주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함께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현대의 노아 방주는 무엇이며, 이 현대판 노아 방주는 어떻게 짓는 것일까요? 재미있는 연구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 편집실-
홍수를 보내어 이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자비가 많으시며 인간을 구원하기를 즐기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압축되어 표현된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절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세상의 상황이 어떠하였기에 세상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1. 홍수를 부른 세상의 죄악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5~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 6:3)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창조 받은 최초의 인류로부터 수세대가 지났을 뿐이어서 초기의 활력 대부분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수명은 백 년의 단위를 헤아렸고, 현 세대의 인류들과 달리 건장한 체력과 신장, 지력을 가졌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 6:4)는 구절을 보아서 그것을 알 수 있는데, 네피림 은 거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히브리어 원어의 뿌리는 포악함, 잔인함. 이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민수기 13장에 거인으로 표현된 가나안의 아낙 자손들도 네피림의 후예들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활력과 체력 그리고 지력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사용했으면 축복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랑 법칙으로 운영되어 오던 아름다운 세상은, 그분을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심을 한탄하게 만들만큼 악하고 비참한 죄악 세상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긴 수명과 건장함으로 인하여 짓는 죄악이 점점 더 대담하고 악해졌다. 그리하여 죄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그다음 세대로 한없이 지속되었다. 그 당시는 여러 세대가 함께 모여 지식과 지혜를 나누며 살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러 시대에 걸쳐 발전한 죄악이 다음 세대로 물려졌으며,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고 도전하는 그들의 죄악은 그들의 건강과 재능과 정신적 능력에 비례하여 더하여졌다. 이제 성령께서 더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성령님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판이 오기 전 이 세상에는 120년 동안이라는 은혜의 기간이 주어졌다.
2. 무법 시대와 일부다처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2) 이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로서, 그 당시 사회 도덕의 타락상을 압축하여 반영해 주고 있다. 혹자는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을 천사로 해석하지만, 정확한 성서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 이란, 그 당시 하나님의 뜻을 펴고 진리를 이행하기 위해 택함을 받았던 신실했던 셋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이 곧 하나님의 아들 (롬 8:14 참조)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무튼, 여기서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행위는 도덕적인 엄청난 타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 당시의 성행하던 죄악 중의 하나였던 일부다처제를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창세기 4장 23절에 일부다처제의 조상이 된 라멕 에 대한 언급을 보아 그렇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 제도의 규칙에 반하여 성행되던 일부다처제는 타락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적인 욕망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생활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범죄와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신속하게 증가하였다. 그 당시는 결혼 관계나 재산의 소유권이 존중되지 않았던 무법천지였다. 이웃의 아내나 소유물이 탐이 나면 누구든지 폭력으로 빼앗았으며, 라멕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난폭한 행위를 자랑했다. 그들은 동물을 죽이는 일을 낙으로 삼았으며, 육식과 폭식으로 인하여 더욱더 잔인하고 피에 굶주리게 된 그들은 마침내 인간의 생명을 놀랍도록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세계는 그 초기에 있었으나, 죄악은 매우 깊고 널리 퍼져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죄악들을 참으실 수 없을 만큼 편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마침내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 (창 6:7)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이 땅에 홍수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와 그 가족과 생물들을 보호하셔서 그분의 뜻을 새롭게 펴시려는 소망을 가지고 계셨다.
신앙: 2부 - 노아 홍수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성경의 비판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이 성경의 사실성과 영감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때, 가장 많이 이슈로 삼는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비판할 때 노아의 홍수와 방주 사건을 제일 먼저 들고 나와 비판해 왔으며, 무신론자, 이성주의자, 인본주의자, 과학주의자, 진화론자들이 성경을 비지성적이며, 비과학적인 책으로 폄하할 때 가장 먼저 인용하였던 부분이 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 사건이다. 성경 창세기에 무려 6, 7, 8, 9장에 걸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사건과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이 사실이 한낱 설화나 후세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홍수를 증명할 수 있는 사실들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연구이다. 함께 탐구해 보자.
구약의 홍수를 증거해 주는 것들
증거 1.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홍수 전설들
지구 전체를 휩쓸었던 대홍수에 대하여 이 세상에는 8만여 개의 기록과 책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 원주민들의 역사나 전설에 전 지구적인 홍수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벨라미(H.S. Bellamy)는 달과 신화 그리고 사람(Moons, Myths and Men) 이라는 책에서, 전 세계적으로 500여 개의 홍수 전설들이 있다고 추정했다. 중국, 바빌로니아, 웨일스, 러시아, 인도, 미국, 하와이, 스칸디나비아, 수마트라, 페루, 폴리네시아 등에 존재하던 고대 문명들은 모두 대홍수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들에는 종종 다가올 홍수에 대한 경고, 사전에 배를 만드는 것, 동물들을 싣는 일, 가족들을 모음, 물이 감퇴한 정도를 알아보려고 새를 보내는 것 등과 같이 성경적 내용과 일치하는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 홍수에 관한 일관된 견해가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기원(the Bible's record)에서 나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두로 전해졌을 내용들은 조금씩 바뀌어졌다. 몇 나라의 홍수 전설을 살펴보자.
중국(China)의 홍수 전설:
누아 라는 사람과 그의 가족 8명이 큰 배를 짓고 큰 홍수의 멸망을 피했다는 BC 2300년경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히킹(Hihking) 이라 불리는 중국 고전은 대홍수로부터 살아난 후히 가족(The family of Fuhi)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고대 이야기는 산과 모든 것을 포함한 전 대륙이 홍수에 잠겼으나, 배를 탄 한 가족만이 생존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 사람을 그들 문명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이 기록은 후히, 그의 아내, 세 명의 아들 그리고 세 명의 딸들이 대홍수로부터 살아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후히와 그의 가족은 지구 상에서 살아난 유일한 가족이고, 세상에 다시 퍼졌다고 이야기한다.
아프리카 남서 탄자니아(Southwest Tanzania): 옛날에 강에서 홍수가 시작되었다. 신이 두 사람에게 배에 오르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많은 씨앗과 많은 동물을 실으라고 하셨다. 홍수의 물은 마침내 산을 덮었고, 결국 홍수가 그쳤다. 그리고 한 남자가 물이 다 말랐는지 알아보려고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비둘기는 돌아왔다. 다음번엔 매를 보냈는데, 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동물들과 씨를 가지고 배에서 나왔다.
멕시코(Mexico): 톨텍(Toltec) 원주민들은 최초의 창조가 1716년 동안 지속되다가, 한 번의 홍수로 멸망했으며, 유일하게 한 가족만이 살아남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즈텍(Aztec): 타이피(Tapi)라는 한 남자가 오래전에 살았다. 타이피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창조주는 타이피에게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배를 지으라고 말했다. 창조주는 그에게 부인과 각 동물의 한 쌍씩을 배 안으로 태울 것을 말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홍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과 동물들은 산 위로 올라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산들도 마찬가지로 홍수로 잠겨 버렸다. 마침내 비가 멈췄다. 타이피는 비둘기를 내어 보냈을 때 돌아오지 않자, 물이 말랐음을 알았다.
미국(United States): 오지브웨(Ojibwe) 원주민들은 대략 AD 1400년 이래로 미국 미네소타에 살아왔던 종족으로, 성경의 내용과 매우 비슷한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협력하는 삶들이 지속되지 않는 시기가 도래했다.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존경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다퉜고, 곧 마을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며 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창조주인 기치 마니도(Gitchie Manido)를 매우 슬프게 했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마침내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창조주는 물을 사용하여 땅을 정화하기로 결정했다. 물이 일어났고, 세상은 홍수로 덮여서, 모든 창조물을 쓸어버렸다. 그러나 소수의 생물체가 살아남았다.
증거 2. 지질학적 증거들 창세기 7, 8장을 읽어 보면, 큰 깊음의 샘들 이 터졌고 40주야 동안 격렬하게 비가 쏟아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표현들을 미루어보면 전 지구적으로 온 땅이 물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홍수는 화석들, 특히 남아프리카, 브라질 등지에서 발견되는 수십억의 물고기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이 한꺼번에 묻혀 만들어진 화석들만으로도 증명되기에 충분하다. 화석에 있는 어떤 식물들은 그 색깔과 엽록소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물고기들은 놀라서 충격을 받고 갑자기 죽은 것 같은 모습들, 즉 지느러미들을 다 펴고 몸을 구부리고 몸부림치는 갑자기 죽은 듯한 모습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땅이 갑자기 뒤엎어져 묻혀서 공기가 차단되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독일에서는, 각종 다른 지역과 다른 기후에서 사는 물고기와 곤충들과 동물들이 한곳에 모여 몰사하여 함께 묻혀 있는 곳도 있다. 또한, 석탄은 홍수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다. 석탄 10피트가 생기려면 100피트의 나무나 식물이 썩어야 가능하다. 곧, 땅에 묻혀 압력과 열이 오랫동안 가해져야만 한다.
현재 지구에 있는 석유와 기름의 매장량을 계산하면 엄청난 동물과 식물들의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최근 지질학의 발달로 지층과 지형의 모습들이 자세히 조사되면서, 지구는 과거에 대홍수와 같은 엄청난 격변을 겪었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 지구 대부분에 수백 미터에서 수백 킬로미터 깊이로 쌓여 있는 퇴적 지층들, 수조 개의 화석으로 멸종된 생물들, 세계 곳곳에서 강같이 흘렀던 용암들, 구부러지고 휘어져 있는 산들, 바다 속에 깊게 파인 해저 협곡들, 지구를 휘감은 해저 산맥들, 엄청난 넓이로 평행하게 쌓여 있는 지층들, 히말라야나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발견되는 바다, 생물의 화석들, 극지방에서 발견되는 두터운 석탄층들, 온대 지역의 풀을 먹다 얼어 죽은 시베리아 매머드들, 지층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사람의 유물들, 오늘날의 모습과 똑같은 채로 발견되는 고생대, 중생대의 화석들 등등. 그러므로 최근 지구의 지층과 지형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정설과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지질학적 증거 5가지
해수면보다 높은 곳에 있는 바다 생물의 화석들: 이 화석들은 바닷물이 대륙들 위로 침범했음을 가리키는 정확한 증거가 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모든 대륙을 덮은 암석 지층들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의 양 벽들(해발 1.6km 이상의 높이에 있는)에 있는 대부분의 암석층은 바다 생물의 화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화석화된 조개류들은 히말라야 산맥에서도 발견된다.
급격하게 묻혀 있는 동식물들: 종종 대규모적인 화석 뭉치들과 정교하게 잘 보존된 화석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수십억 개의 나우틸로이드(nautiloid, 고대 오징어) 화석들이 그랜드 캐년의 레드월 석회암(Redwall Limestone)의 한 층(layer)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층은 대규모의 퇴적물(대부분이 석회 모래)의 흐름에 의해 격변적으로 퇴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나 유럽의 백악(白堊, chalk)과 석탄층(coal beds)들, 물고기들, 어룡(ichthyosaurs)들, 곤충들의 화석들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다른 화석들은 과거에 한 번 땅이 격변적으로 파괴되었고 묻혔음이 입증되고 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급속하게 퇴적된 퇴적 지층들: 전 대륙에 걸쳐 있는 암석 지층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런 지층의 물리적 특징들은 그것들이 갑작스럽게 퇴적되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그랜드 캐년의 타핏 사암층(Tapeats Sandstone)과 레드월 석회암층(Redwall Limestone)은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까지 이르고 있고, 심지어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 영국의 백악층(도버 해협의 백색 절벽)은 유럽을 횡단하여 중동까지 추적되고 있고, 또한 미국의 중서부와 서부 호주에서도 발견된다. 그랜드 캐년의 코코니노 사암층(Coconino Sandstone) 안에 있는 경사층(사층리)은 10,000입방 마일의 엄청난 모래가 수일 동안의 거대한 물 흐름에 의해 퇴적되었음을 가리키는 증거판이 되고 있다.
먼 거리까지 운반된 퇴적물들: 급속히 퇴적된 암석 지층들을 구성하는 퇴적암들은 먼 근원 장소들로부터 침식되어 빠르게 흐르는 물에 의해서 장거리를 이동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랜드 캐년(애리조나 주)의 코코니노 사암층(Coconino Sandstone)을 구성하는 모래는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인 북부 지역에서 침식되고 그곳에서부터 운반돼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빠르게 연속적으로 퇴적된 많은 지층: 암석들은 정상적으로는 휘어지지 않는다. 딱딱하고 부서지기 쉬워서 깨져 버린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러지지 않고 휘어져 있는 전체 지층의 층들은, 모든 암석 지층이 급격히 퇴적되었고, 암석으로 굳어지기 전에, 즉 아직 젖어 있어 휘어지기 쉬운 상태에서 습곡 되었음을 말해 준다. 예를 들면, 그랜드 캐년의 타핏 사암층(Tapeats Sandstone)은 깨어진 증거 없이 직각으로 접혀져 있다.
증거 3. 홍수가 남겨 둔 흔적, 잔류 지형
잔류 지형 이란 오늘날의 자연적인 과정으로는 결코 형성될 수 없는 지형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지금의 환경과는 다른 상태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언더핏류(Underfit Streams): 언더핏류는 하상(Channel), 계곡 또는 준평원과 같이 현재의 과정으로는 형성이 불가능한 하천을 가리킨다. 이들은 현재 흐르는 물의 양으로는 현재 보여 주는 경사와 넓이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는 한때 엄청난 양의 물 유입이 있었던 환경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건조 지역에서 발견되는 하계망(Drainage system): 잘 짜인 하계망은 비가 오는 지역에서 보여 주는 지형학적 특징이다. 그러나 건조 지역에서도 이러한 하계망이 잔류 지형으로 잘 발견된다. 미국의 모하비(Mojave) 사막에서는,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과거에 물이 흘렀던 흔적이 있는 건천(Dry Wash)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막의 잘 짜인 하계망으로는 페루의 아타카마(Atacama)와 캘리포니아의 데스벨리 사막(Death Valley Desert)이 잘 알려져 있다.
내륙 해안 절벽(Inland Sea Cliff): 잔류 해안 절벽은 과거에 해수면이 한때 육지보다 훨씬 높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러 곳에 많지만, 특히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 멕시코의 파자 캘리포니아, 뉴질랜드의 와이루 계곡에서 잘 발달한 해안 절벽을 관찰할 수가 있다.
빙하 지형: 빙하는 캐나다의 대부분, 북아메리카의 일부, 북유럽의 대부분, 뉴질랜드의 전 지역, 아프리카의 많은 부분을 덮었었다고 믿어진다. 오늘날의 조건에서 이러한 빙하의 잔류 지형을 형성시키는 예는 발견된 적이 없다.
토양(Soil): 토양은 지형이라기보다는 단지 잔류 흔적(Relics)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잘 알려진 것 중에 보옥사이트(bauxite)와 래터라이트(laterite)가 있는데, 이들은 아주 특이한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들로서, 알루미늄과 도자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현재의 강우에 의해 이런 토양이 형성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신앙: 3부 - 노아 방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13~15,17)
하나님께서 홍수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기록이 창세기 6장에 나온다. 전 지구를 덮은 홍수에서 노아의 가족을 구한, 산꼭대기에 지어졌던 방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하고 있다. 방주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1) 노아 대홍수의 증거물인 방주는 존재하는가?
성경의 많은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랏 산(Mt. Ararat)에 방주가 안착 되었다는 기록은 단순한 우화나 일화가 아니며, 방주는 지금까지도 실존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방주가 아라랏 산 의 산상에 안착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기독교 세계에서는 2천 년 가깝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보다 몇 세기 이전부터 헤브라이, 아르메니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을 포함한 문화 지역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성경학자들이나 탐험가들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시도된 아라랏 산의 방주에 대한 탐사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보고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종종 그 산에 올라가 방주를 보고 만졌으며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체험담과 또 아라랏 산정 부근을 비행 중에 그것을 보았다는 조종사들의 보고들이 흘려지곤 하는 중, 1972년 미국의 지구 자원 인공위성(ERTS) 이 포착한 것이나, 정찰기인 U-2기에 촬영되었다고 하는 사진도 있어, 방주가 아라랏 산상에 존재할 가능성을 가일층 높여 주고 있다.
1. 아라랏 산 - 아라랏 산은 터키와 러시아 경계에 놓여 있다. 아라랏 산의 높이는 17,000피트(5,165m 정도)라고 한다. 터키족은 이 산을 방주의 산(Mountain of the Ark) 혹은 고통의 산(Mountain of Pain) 이라고 부르고, 쿠르드족은 이 산을 오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재앙이 따르기 때문에 재난의 산(Mountain of Evil) 으로 부르며, 미국인들은 세계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World) , 페르시아인들은 노아의 산(Mountain of Noah) 으로 부른다.
창조과학연구소의 존 모리스 박사(Dr. John Morris)는 아라랏 산을 13번에 걸쳐 탐험했으며, 오르기 매우 어려운 산이었다고 설명한다. 암석과 눈사태의 위험, 독뱀과 늑대개가 있으며, 보호를 위한 나무와 물은 없다. 그 산은 빙하로 덮여 있기 때문에, 수증기가 응결하여 매일 오후에 맹렬한 번개를 동반한 뇌우가 발생한다. 아라랏 산에 있는 방주의 정확한 탐사를 위하여는 터키 정부의 협조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방주 탐험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산 위의 얼음 덩어리들은 강설량이 적은 해에, 그것도 짧은 기간만 녹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은 올라가기가 매우 어렵고, 그 지역은 터키-러시아-이란의 접경 지역으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위험한 지역이다. 산을 돌아다니는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위험성을 더하고 있으며, 지난 수년 동안 탐사를 희망하는 다른 여러 탐사대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번복하는 변덕스러운 지방 관청의 허가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2. 고대와 중세 사람들이 보았던 방주 -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들은 아라랏 산의 방주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그 존재 사실을 일반 상식과 같이 당연하게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누구라도 산에 올라가 볼 수가 있었으며, 때로는 평지에서도 빙하의 눈과 얼음을 배경으로 방주가 새까맣게 보였기 때문이다.
BC 3세기 바빌로니아의 신관(神官)이며 저술가인 베롯소스에 의하면, 방주까지 올라간 사람은 언제나 배의 측면에서 송진을 깎아 내서 귀신을 몰아내는 부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명한 아르메니아의 왕자로 나중에 프랑스의 수도승이 된 제한 하이슨은 13세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랏 산의 정상에는 언제나 거대한 검은 물체가 보인다. & 사람들은 그것을 노아의 방주 라고 말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저명한 탐험가 마르코 폴로(AD 1234~1324)는 그의 여행 도중 아라랏 산을 지나칠 무렵에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산봉우리, 만년설로 뒤덮인 이곳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
3. 영국의 조사위원이 보았던 방주 - 1883년 5월에 지진으로 아라랏 산 일부가 입을 벌리고 목조의 배로 보이는 것이 노출된 것이, 지진의 피해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온 터키 관리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관리들은 빙하에 돌출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면서, 높이는 12m~15m라고 추정하였는데, 물체의 나머지 부분은 빙하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길이인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영국의 조사위원이 포함된 조사대는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그 일부는 높이 4.6m 구획이 된 칸막이를 한 것같이 보였다. 산중에서 뜻밖에 얼어붙은 배를 본 조사위원회는 노아의 방주를 드디어 발견했다. 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아라랏 산에서 터키의 관리들에게 발견된 물체는 얼마 뒤에 다시 얼음에 덮여 밑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고, 20세기 과학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최초로 이 산의 상공을 비행한 조종사에 의해 얼음의 위와 아래에 배 모양의 물체가 사진에 찍히게 될 때까지 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만 했다.
4. 수차례 목격된 방주 - 프랑스의 등산가 훼루난 나바라 는 아라랏 산상의 눈 밑에서 파낸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흔적이 있는 대들보용 목재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후에 이것을 엄밀한 방사선 탄소측정법(C14)에 의해 측정해 본 결과, BC 5000년이라고 하는 연대 측정이 나왔다. 나바라 이후로 또 다른 탐험대들과 2차대전 후 비약적으로 신장한 첨단 항공 기구에 의해 방주는 수차례나 목격되었다.
2) 90년대 초 미국 백악관에까지 보고된 방주 탐사
인사이트 매거진(Insight Magazine)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CIA는 백악관까지 보고되었던 노아의 방주 탐색을 가리키는 2종의 새로운 문서를 공개했다. Insight 지와 한팀이었던 우주 촬영팀이 IKONOS 위성의 줌 렌즈를 사용하여 촬영한 사진에는 터키 지역의 북위 39도 42분, 동경 44도 16분에 있는 비정상적인 물체가 찍혔다. 이것이 몇몇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라고 말하는 물체의 고해상도의 사진 중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첫 번째 모습이었다.
Insight는 의문의 물체가 인공 구조물인지 자연의 바위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아라랏 산의 사진들을 검사하기 위한 한 팀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고용했었다. 전문가 중 4명은 그것이 인공 구조물이라고 주장하였고, 2명은 바위라고 하였으며, 1명은 증거가 결정적이지 않다고 하였다. 최근에 공개된 CIA의 문서에는 미스터리에 관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탐색 작업에 어느 정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3) 고해상도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아라랏 산의 비정상적 물체
터키의 아라랏 산 4,600m 고도에 있는 아라랏 산의 비정상적 물체(Ararat anomaly) 가 2007년부터 고해상도의 위성 영상으로 자세히 조사되고 있는 중이다. Satellite Imaging Corporation 의 포쳐 테일러 씨는 이코노스 인공위성 자료로부터 그 장소에 대한 3-D 항공 영상을 만들고 있다고 Live Science에서 보도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 발사된 Geo-Eye I 위성은 픽셀 당 0.4m로 그 장소의 해상도를 두 배 증가시킬 것이다.
4) 노아의 방주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봤거나, 가서 본 많은 사람의 목격 증언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거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700년에, 터키인들은 성스러운 징조로 신성시되는 노아의 배에서 타르를 벗겨 내기 위해서 산 위로 순례 여행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위험해지자 이러한 관습을 그만두게 되었다.
기원전 300년에, 한 바벨론 제사장은 부적으로 방주 일부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말했다. 상형문자로 써 놓은 것으로부터 판독된 한 이야기는 기원전 30년에 노아의 방주와 그것의 나무 조각들을 본 헤로니무스(Heronimus)에 대해 들려준다. 또한, 기원전 30년에, 헤롯 대왕의 전기 작가였던 다마스쿠스(Damascus)의 니콜라스의 기록도 방주와 그 유물에 대해 들려준다. AD 380년에, 에피포누스(Epiphonus)라고 불리던 한 남자는 방주의 나무를 보여 줬다. AD 1254년에, 하이폰(Hyphon)은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1269년에 방주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1829년에, 프랑스인인 프레드릭 패럿 박사(Dr. Fredrich Parrot)는 방주의 성스러운 나무로 만든 아르메니아 십자가를 봤다. 패럿 박사는 암적색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노아의 많은 고대 유물과 심지어 사본(manuscripts)까지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1840년 6월에, 거대한 지진으로 수도원과 그 주변 마을이 파괴되자, 터키 정부는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한 사태 보호대를 세우려고 산 위로 원정대를 보냈다. 한 팀이 빙하 밖으로 돌출한 매우 오래된 배 의 앞부분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고도 약 14,000피트(4,200m)에 있었다. 그들은 그 배를 많은 마구간과 새장을 가진 3층으로 묘사했다. 이 발견은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다른 원정대들도 보내졌다.
1883년에, 터키의 위원회는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그 보고서에는 빙하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매우 짙은 색의 나무로 된 거대한 구조물 을 봤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비웃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후속적인 탐험을 하지 않았다.
1902년에, 1937년에서 1947년까지, 러시아에서는 매년 방주의 사진을 촬영하고 스케치를 하도록 탐험대들을 보냈다. 그들은 약 80피트(24m) 되는 앞부분이 노출된 채, 해발 고도 14,000피트에 자리한 방주를 보여 주는 스케치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미국의 파이프라인 기술자인 조지 제퍼슨 그린(George Jefferson Greene)은 헬리콥터로 방주 위를 날아갈 때 6장의 사진을 찍은 것이 남아 있다. 1972년 7월에, 랜드샛(LANDSAT) 위성도 또한 아라랏 산 위에 있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증거를 사진상으로 보여 줬다. <1974년 9월에, 텍사스에서 온 한 탐험대는 15,000피트에 있는 방주 사진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 사진들 가운데는 배의 측면에 있는 판자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지진으로 방주가 부서졌을 때, 위쪽에 남아 있었던 방주 일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터키 정부는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아라랏 산으로의 모든 탐험을 금지하고 있다.
신앙: 4부 - 노아 방주는 어떻게 지어졌는가?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창 6:14,15)
1) 방주의 크기
세계 조선공학사상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배를 손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노아의 방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이고,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제2기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방주의 크기는 1규빗을 45cm로 가정했을 때, 길이가 135m, 폭이 22.5m, 높이가 13.5m에 해당한다. 창세기 6장 14~16절에 나와 있는 치수대로의 방주 크기는, 길이가 삼백 규빗(135m), 폭이 오십 규빗(22.5m), 높이가 삼십 규빗(13.5m)으로, 43,200m³ 정도의 부피를 가지는데, 이는 한 량에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는 화차 522량에 해당하는 용량과 같다. 방주는 농구 코트 20개를 10개씩 2열로 배열한 넓이로서, 현재 축구장보다 길이는 더 길고 폭은 약간 좁은 넓이의 상중하 3층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방주는 통상적인 배가 아니라 바지선 형태의 거대한 선박이었다. 물론 규빗이라는 길이가 다소 유동적이라 할지라도 그 규모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2) 방주에 대한 기록
방주에 대한 고대의 기록으로는, 비록 성서상의 방주와는 동떨어진 치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점토판이 있는데 이 점토판에는 길이, 넓이, 높이가 다 같이 140규빗(63m)으로 6층의 방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방주는 단지 물 위에 그냥 띄워 두기 위한 개념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된다. 방주는 격심한 풍랑을 견딜 수 있도록 밑바닥이 평평하게 만들어졌고, 파도를 헤치고 속력을 낼 수 있도록 뱃머리가 날렵한 선박의 형태와는 달리, 적재 용량을 최대한으로 하기 위한 거대한 장방형의 평저선(平底船)으로서, 엄청난 홍수를 견디며 물 위에 안정되게 떠 있을 수 있는 구조물이었다. 방주는 속도를 낼 필요도 없었으며, 단지 튼튼하게 떠 있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3) 노아의 방주, 그 과학성을 밝힌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의 과학적 설계에 의해 건조되었을까? 창세기가 쓰인 이래 수천 년 동안 사실적이면서도 면밀한 고증과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된 방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었지만, 근래에 노아의 방주를 현대 선박 공학적인 측면에서 조사해 본 결과, 매우 견고하고 안전한 선박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방주가 매우 현실성이 있는 배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1. 한국 국가공인기관에 의한 노아 방주 실험
대한민국의 국가출연기관인 해사기술연구소가 노아의 방주를 조선 공학적 입장으로 접근, 이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1993년 2월 17일 자 국민일보, 1993년 3월 4일 한국주간에 발표됨). 해사기술연구소는 창조학회의 의뢰를 받아 선박의 안정성 연구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인 홍석원 박사를 팀장으로 한 9명의 전문 연구팀에게 맡겨 선박의 안전 성능을 실험하게 되었다. 연구에 앞서 우선 해결할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턱없는 기초 자료의 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창세기에 나와있는 노아 방주의 규격(길이 135m, 너비 22.5m, 높이 13.5m)과 아라랏 산에서 목격된 방주의 형상을 토대로 제작한 노아 방주 복원도를 바탕으로 하여 실험용 방주를 건조할 수 있었다.
2. 현대의 최첨단 선박보다 우수함이 증명됨
1950년대 미국에서도 일찍이 방주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박 공학의 수준이나 기타 여건들은 90년대보다 모든 면에 있어서 뒤처져 있었다. 한국의 홍 박사 팀은 테스트에 쓰인 실험용 방주로 길이를 50분의 1로 축소(길이 2.7m) 제작하였고, 해사기술연구소의 대형 수조(길이 200m, 폭 16m, 수심 7m)에서 인공적으로 다양한 높이, 강도, 속도의 조류, 파도, 풍랑, 바람을 만들고 역시 축소된 내부 선체, 선원을 실은 상태, 내부 화물을 적재한 상태 등 다각적으로 실험을 수행했다. 그 결과 노아의 방주가 현대의 최첨단 조선 공학적 기법으로 제작된 그 어느 선박보다 뛰어난 안정성을 가진 배였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4) 방주를 모방한 미국의 군함
길이와 폭의 비율이 6:1이었던 방주는 매우 뛰어난 선박 안정성을 보이는 비율임이 선박 공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노아 방주의 규모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의 저명한 조선 건축가 디키 씨는 미국 전함 U.S.S.오레건 호를 설계할 때 노아가 방주를 건조할 때 이용했던 것과 같은 설계 비율을 사용했다. 미국 해군에서는 U.S.S.오레건 호를 지금까지 건조된 것 중 가장 견고한 군함으로 간주하고 있다.
5) 노아는 역청(pitch)을 어디서 구했을까?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은 역청은 석유나 석탄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노아의 시대에는 석유나 석탄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노아는 역청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청은 콜타르를 가열 증류할 때 남는 끈적끈적한 물질로서 아스팔트와 유사한 물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유나 석탄 외에 역청의 다른 출처를 대부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청은 나무를 가열하거나 증류할 때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석유와 석탄 산업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역청을 만드는 방법이 존재했다. 적어도 천 년 동안은 유럽에서 역청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거대한 목조 선박들을 만드는 데 역청 제조는 반드시 필요했고, 유럽 역사에 여러 번 이 사실에 대해 기록되고 있다.
역청은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송진(resin)을 채취하면서 시작된다. 비스듬히 홈을 파 송진이 흘러내리게 한 후 나무 밑에 용기를 두어 채취한다. 송진 채취가 끝나고 나서 나무를 잘게 잘라 흙으로 덮고 천천히 태워 숯(charcoal)을 만든다. 역청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는 송진을 끓이면서 숯가루를 배합하는 것이다. 숯가루의 배합률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지는 역청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청은 대양을 항해하는 목조 선박의 방수를 위해 칠해졌던 것이다. 노아가 이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역청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석유와 석탄이 없어도 역청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이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신앙: 5부 - 왜 방주를 지어야 했는가?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14,22)
많은 사람이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의아심을 가진다. 능력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노아에게 굳이 방주를 짓게 하셨을까? 그냥 그분의 전능하신 손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덮어서 가리시면 홍수에서 무사히 구원을 받지 않았을까? 아니, 노아가 머무르는 땅에만 비가 오지 않도록 살짝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힘들게 그냥 물 위도 아닌, 높은 산꼭대기 위에 배를 짓게 하시고, 그리고 더 힘들게 역청까지 구해 그 큰 배에 칠을 하게 하셨을까? 왜 인간의 역사를 필요로 하셨을까?
1) 방주의 뜻과 의미는?
방주의 모양은 배라기보다는 나무궤짝이나 상자 같은 직사각형의 모양이었다. 방주는 영어로 Ark 인데, 궤, 상자 (chest)라는 뜻이 있으며, 또한 평저선 (平底船, flatboat), 피난처, 안전한 장소 라는 뜻이 있다. 성경에 방주 (ark)와 같은 의미의 단어는 성소에 있던 법궤 (ark of the covenant)와 아기 모세를 담았던 갈대 바구니를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였다. 노아의 방주는 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담는 기구였다. 또한, 노아의 방주는 심판을 피하게 한 구원의 상자였고,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창 7:3) 하기 위하여 선택된 모든 종류의 동물과 새롭게 인류의 조상이 될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2)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노아를 보호하지 않으셨다. 노아에게 방주를 직접 그의 손으로 짓게 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홍수에서 그냥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로 방주를 짓고, 동물들을 모으고, 음식을 준비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직접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이 들어 있다. 믿음의 장인 성경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방주를 지은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히 7:11)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신뢰하는 노아의 믿음은, 지금까지 비를 본 적도 없고, 비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던 그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를 짓게 하였다. 곧,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방주를 짓는 행동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 단순해 보이는 행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순종 을 의미한다. 만일, 노아가 홍수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믿기만 하고 방주를 건조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생명을 물속에서 보존할 수 있었을까? 참된 믿음은 순종을 수반한다. 즉, 반드시 행함을 동반해야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항상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즉,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이 영적인 의미로 순종 을 상징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을 믿는 참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의 유명한 믿음과 행함의 장인 야고보서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라고 외치고 있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순종 을 가리킨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순종하여 방주를 짓는가, 아니면 불순종하여 방주를 짓지 않는가 하는 것은 구원이 달린 문제였다. 방주를 짓는 일은, 순종하므로 구원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므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3) 홍수와 폭풍을 견딘 방주의 힘?
성경 창세기는 그 당시 온 세상을 덮었던 홍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창 7:14~24) 창세기의 기록을 보아,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 산을 포함한 그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산들이 물에 150일 동안이나 잠겨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창 7:17~8:5).
방주는 물이 줄어 다른 산봉우리들이 나타나 보이기 전에, 높이가 5,100미터인 아라랏 산에 두 달 반 동안이나 놓여 있었고, 또 방주 안에 있던 생물체들이 뭍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줄어들기까지도 넉 달 반이 더 걸렸다. 홍수는 일 년 동안 지속했으며, 시작된 지 150일 후 최고 높이에 도달한 후에, 감소하기 시작했다(창 7:11, 8:3,4). 그렇다면, 성경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 하늘의 창들이 열려 라는 기록처럼, 전 지구적이고 엄청났던 그 홍수와 폭풍을 견딜 만큼 노아의 방주가 위대했는가? 아무리 커야 고작 큰 축구장만큼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방주로 노아의 가족과 그 많은 동물이 온 세상을 뒤덮었던 전 지구적인 홍수와 폭풍을 피하기에 넉넉하였던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물 위에 부서지지 않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으리만큼 방주가 튼튼하였던가? 정말 방주 때문에,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지은 자체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할 만한 힘이 없었다. 방주를 짓는 행위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신뢰를 보이는, 인간의 편에서 행사해야 할 가장 적은 의무인 순종, 곧 믿음을 행사하는 미력한 행위인 순종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행위가 그렇게 위대한 것은, 구원은 항상 99%, 아니 100%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받지만, 1%의 인간의 노력과 협력, 순종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신앙: 6부 - 현대 노아 방주
1) 현대판 노아 방주가 떠오를 시간이 되었다
최근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 흥행에 성공한 한 재난 영화는, 마지막 이 세상에 다가올 재난과 마지막 종말의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소수의 선택된(?) 그룹의 사람들이 방주를 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흥미롭게도 그 영화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큰 배를 등장하게 하고, 그 배에 탄 사람들만이 생존하여 살아남는다는 줄거리로 결말을 장식한다. 물론, 그것은 허황한 공상의 이야기이다. 이 세상은 재난 때문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이 가까웠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성경 베드로후서에는 전 하늘과 땅에 곧 다가올 멸망과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6, 10~12) 베드로는 노아 홍수 때 물로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머지않아 세상은 불로 멸망될 것이라고, 최후의 날에 서도록 준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노아가 순종하므로 방주를 짓고 그 방주가 물 위에 떠올라 구원을 받은 것같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순종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하여 묘사하실 때도 홍수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17:27) 마지막 시기가 가까운 지금은 열심히 방주를 지을 때이다. 모든 진리와 말씀에 순종하는 대개혁의 삶을 살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방주가 떠오를 때가 되었다. 다가오는 심판과 재림을 위하여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2)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세상에 애착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소식 듣기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사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의 소식을 기뻐하지 않으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조차 세상의 끝이 가까웠음과 지구의 수명이 다해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곧 지구의 역사를 끝마치려고 하신다. 아니,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 없는, 세상을 끝마치시고 예수께서 꼭 재림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옛날에 세상에 홍수를 불러왔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 이루신 창조의 자연법칙과 질서에 인간이 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노아 홍수 못지않게, 아니, 그때보다 더 자연법칙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예수님 재림의 필요성이 얼마나 절실한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1.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
근래에 들어 현대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인간이 생명의 창조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복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일이라고 극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엄연하게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이제는 미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DNA의 조작을 통해서 엄마나 아빠 없이 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유전자들만 뽑아서 주문형, 맞춤형 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를 섞어서 이상한 유형의 종(種)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몸만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이나 개인적 성격이 유전자로 말미암아 유전된다면, 복제되어 만들어지는 인간의 개성은 인간의 성향을 띨까? 아니면 동물의 성향을 띨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이어받고, 그 성품을 개발시켜야 하는 인성적인 면에서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는 일 속에서 야기될 혼란이 두렵기만 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끝내실 시간이 되었다.
2. 과학 발달로 지구가 스스로 자멸할 위기에 처함
과학과 문명의 이기는 인간 삶의 질을 높여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그 과학과 문명의 산물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동차 및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르는 가스와 공해의 증가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고, 그로 말미암은 자연 질서와 법칙의 파괴로 무서운 천연재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지구는 과학 발달로 인해 스스로 자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님께서 속히 재림하셔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3) 현대판 노아 방주를만들자
당신은 방주를 짓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의 믿음은 참된 것이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게 하고 행위에 열매를 맺게 하고 있는가? 말로만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에 비례해서 행동이 변하고, 삶이 완전히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경이 가리키는 모든 진리에 순복하고 따르며,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생애를 사는 것이 마지막 시대에 방주를 짓는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겠는냐고. 그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함께 생각해 보자.
노아는 다만 목재로 배를 건조하였다. 강철도 아니고, 어떤 철재도 아닌, 보잘것없는 나무로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힘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고안하신 법을 순종하여 지은 인간이 만든 방주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실 때 온 세상을 뒤엎은 폭풍과 홍수를 넉넉히 견디고도 남는 강한 배가 되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기만 하고 방주를 짓지 않고 그냥 밖에 있었다면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을까? 순종하지 않은 노아를 하나님께서 그냥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셔서 홍수가 지날 때까지 손바닥에 가리고 계셨을까?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행위는 보잘것없고 공로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우리로 그 큰 구원을 얻기에 넉넉하게 하시는 것이다.
1. 행함은 율법주의?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행위 나 행함 이란 단어만 들어도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구원은 믿음 으로만 받는 것이며, 예수를 믿고 입으로 주를 시인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율법주의이다.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옳으며 진리이다. 인류가 범죄한 이래로 인간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에 있다. 왜 그런가?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르쳐지는 믿음 과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벧전 1:9)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기독교를 장악하고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가르침은 반쪽 복음이다. 완전한 복음, 균형진 복음을 알고 믿어야 한다. 참된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 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온전한 복음이란 바로 믿음과 행함이 병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순종과 행함에 대하여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또 행함을 강조하시며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0,21)
2.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머리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동반한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적으로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며, 이런 참된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어기기를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2,13)라고 하였다. 또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킨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지킨다. 는 표현을 매우 율법주의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며, 또 아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계명을 지킨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을 가리킨다 육신의 정욕과 자신의 모든 뜻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사는 것이다. 곧, 생애에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다. 마음속에 예수께서 매일 거하시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 능력으로 매일 악한 것을 이기고,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그 대신 주님의 뜻을 따르므로 계명을 지키는 생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예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 거하므로 그 사랑은 그 사람의 생애에서 율법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신앙: 7부 - 마지막 백성들이 받는 초청 “방주로 들어오라”
창세기 6장 17~18절을 보면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여기서 방주로 들어가고 라고 번역된 원어의 표현은 Come into the ark. 로서, 방주로 들어오라. 이다. 방주로 들어가라. 가 아니고, 방주로 들어오라. 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있는 곳으로 네가 들어오라. 라는 뜻으로서, 방주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시기 전, 심판을 피하게 하려고 방주 안으로 노아를 초청하셨다. 방주 안에, 곧 하나님의 품 안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성경 이사야서에 이와 비슷한 초청이 나온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사 26:20,21) 여기서 내 백성아, 갈지어다. 라는 표현도 원어는 올지어다. 라는 Come. 이다.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 주님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다. 짐승의 표 환난과 경제적인 몰락과 천연재해로 말미암은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대의 방주를 짓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방주를 짓기를 원하신다. 방주를 짓는 것은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온전한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행함이 따르는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 환난이 오기 전, 주님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 방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계신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숨는 것, 곧 밀실의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죄의 일을 끊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던 일을 멈추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던 삶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안에 온전히 굴복하고 안식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 밀실에 거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 늘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방주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세계 각처에서 현대의 노아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준비되고 있다. 당신도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짓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심판과 멸망이 다가올 때,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구원을 받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질문과 답변: 무엇이 성경적인 방언인가요?
현대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거의 모든 기독교에 퍼지고 있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아프리카 토착 종교, 불교, 천주교&. 등 거의 모든 종교계 안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는 방언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능력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초인간적인 말을 중얼거린다는 공통성이 있다. 모든 종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만약 현재 기독교회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누군가가 거짓으로 조작하고 있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은사는 반드시 진리 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내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오류에 상관없이, 또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상관없이 방언의 은사가 내려질 수 있다면,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복음도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방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받지도 않은 방언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받아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방언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어떠한 힘이 그들을 제압하게 되고 그들이 생각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그들의 마음은 평화를 느끼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 말씀하신다(살전 5:19~22).
거의 모든 기독교 안에 퍼지고 있는 방언,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우리는 이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실을 증명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4:22~23)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진리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에 복음의 전파를 위한 언어이어야 한다. 제자들이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허락된 은사가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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