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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5 - 센고쿠 시대에 처음으로 일본 중앙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
아시카가 (무로마치) 막부는 1467년 쇼군 후계를 두고 삼촌과 조카가 대립해 “오닌의 난(응인난)“ 으로
교토에서 10년간 시가전을 벌였음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 논공행상이 없으니..... 지방에서 올라온
무장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립하니 일본 200여개 나라로 갈라져 120년간을 싸우니 센고쿠 시대 입니다
.오와리국 (나고야) 의 지배자는 오다 노부나가인데 1560년에 시즈오카현의 태수 이마가와씨가 교토로 올라가
새 막부를 열기위해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3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니 5천 군세에 불과한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계곡에 본진을 차린 이마카와군을 기습해 요시모토를 죽이니 새로운 강자로 떠오릅니다.
미노국을 점령하고 비와호수 오미국의 롯가쿠씨를 쳐부수고 교토롤 올라가 미요시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의 중앙부를 차지했으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척을 지니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씨와 아자이씨, 다케다씨 와 미요시씨, 혼간지 와 엔랴쿠지등 반 오다파 연합군에 포위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셋쓰(오사카) 에서 미요시군 및 혼간지와 싸우는 중 동부 전선에서 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과 일진
일퇴를 벌이다가 1572년 아자이 나가마사의 본성 오다니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는데, 1572년 10월 일본
제일의 맹장이라는 가이국(야마나시현) 다케다 신겐이 스루가(시즈오카현) 를 점령하고 도토미국으로 침공합니다.
적군끼리도 이익이 되면 연합할수 있으니 혼자 먹을수 없으면 갈라먹는 것도 좋은데, 2차대전때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에서 갈라먹은 것처럼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케하자마 패전후 내리막길을 걷던
이마가와 가문을 협공해 시즈오카를 다케다씨는 동쪽 스루가를 차지하고 도쿠가와씨는 서쪽 도토미를 차지합니다.
그후 1572년에 다케다 신겐은 야마가타 마사카게, 아키야마 노부토모에게 5천씩을 주어 미카와와 오다
가문의 영지 미노(美濃) 를 침략하게 하고, 신겐 자신은 본대 2만 2천을 이끌고 진군하면서....
바바 노부후사 5천 별동대는 도토미 서쪽 다다라이성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후타마타 성으로 향합니다.
가이국의 다케다 신겐이 3만 2천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할수 있었던 이유는 관동의 호죠와는
동맹을 맺었고, 에치고 (越後 니가타현) 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은 엣추 (越中
도야마현) 의 일향종 신도들이 막아 주겠다는 밀서를 보내왔기 때문이었으니 이런게 외교라?
도쿠가와 가문의 총 병력은는 1만 5천인데, 반 이상을 미카와로 침공하는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막느라 파견했으니, 8천 밖에 없었던지라 다급해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급히
원병을 요청하지만 노부나가 또한 포위망을 막아내느라 여유가 없었으니 3천명만 보내 옵니다.
1572년 12월 신겐은 후타마타성을 낙성해 도토미 북부를 차지하고 서진하니 이에야스는
하마마쓰에서 농성했고, 이에 신겐은 하마마쓰성을 무시하고 호리에를 향해 서진하니
이에야스는 신겐의 배후를 치고자 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카타가하라로 출진합니다.
2만여명의 신겐은 어린진 (魚鱗陣) 을 친데 비해 1만여명의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은 학익진을 선택해
포위섬멸을 시도하니.... 신겐은 다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 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학익진의
측면을 공격해 무느뜨린후 전군이 쇄도하니 병력 수와 병사 질 모두 열세였던 연합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가신과 2천의 군사를 잃었는데 다케다 군 사망자는 불과 2백명이었다고 합니다.
학익진으로 어린진을 쳐부수려면 한산도 해전 처럼 돌격에 맞서지 말고 뒤로 후퇴하면서 양날개로 강력한 원거리
공격(대포)을 펼쳐 적을 부수는 것이지만 육상전에 쉽게 적용하기는 어려운데.... 양 날개에서 강력한 원거리
공격(활)을 퍼부어 공세를 저지하고, 과도한 밀집 상태에 빠트려 돌진을 저지시킨 푸아티에 전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는 영국군이 고지대를 선점한 상태였고, 울타리와 가시덤불 때문에 프랑스군
이 영국군에 접근할수 있는 진로가 한정되었으니,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병들은 프랑스군
의 측면에서 화살을 퍼부어 압박할수 있었고, 프랑스군은 축차투입 되다가 차례로 격퇴되었습니다.
로마 남쪽 칸나이 전투는 한니발의 카르타고군 5만에 로마군은 8만 6천 4백명인데 서로 기병끼리 한번
싸운후 보병전이 벌어지자 카르타고군 중앙이 빨리 전진해 로마군과 붙자 측면의 로마군이
원거리를 달려와 지친 상태에서 카르티고군과 붙으니 카르타고 중앙군은 서서히 물러나면서
초승달 모양이 되니 이른바 학익진으로 로마군은 밀집된 상태라 숨쉬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죽어나가니 카르타고군은 사망 6천에 부상 2만 4천인데 비해 로마군은 사망 5만에 포로 2만 이었습니다.
학익진은 종심이 얇고 접전면이 넓으니 집중공격의 대상이된 중앙이 물러난다면 전열에 틈이 생기거나 종심이
더욱 얇아져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기 쉬우니 상대방이 중앙돌파를 노린다면 적은 수의 아군은 파생공세로
밀고 들어올 숫적으로 더 많은 적 부대들의 강력한 공세를 카르타고군 처럼 진영을 유지하며 버텨내야 합니다.
돌파를 노리는 상대방 충격력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면서 뒤로 물러날수 있는 군대는 자체로 우수한 정예병이어야
하고, 또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면서 후퇴가 패주로 바뀌지 않게 전열을 유지해야 하며 지휘관은 적절한
시기에 상대방의 공세를 둔화시킬 카드도 준비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병사들이 질과 양에서 적을 압도해야 합니다.
5호 16국 시대에 중국 북부를 통일한 저족 전진 (前秦) 의 부견은 100만 대군을 동원해 383년에 양자강
이남의 동진 (東晋) 을 침공했는데 동진은 최대 병력이 18만으로 형주를 공격한 모용수
(선비족의 연나라) 를 막고 수도를 방어할 병력을 빼니 사석은 8만 정도로 비수에 이르러 서로 대치합니다.
그러자 사석은 부견에게 동진군이 강을 건너가서 싸울 예정이니 우리가 강을 건너도록 강변에 배치된 전진군을
뒤로 조금 물려달라고 하니, 몇번 전투에서 패한데다가 보급문제도 있는지라 6배나 많은 대군이니 승낙합니다.
전진 (前秦) 군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는중 간자들이 “우리가 패했다! 도망쳐라” 라고 소리 지르니 후미에
있던 병사들은 앞쪽 사정을 모르는지라 일부러 물러나는줄 몰랐기 때문에 진짜 패한줄 알고 그대로
달아나니 대패해서 망했는데..... 이처럼 학익진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자칫 패배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해전에 대승을 거둔 이유는 조선의 판옥선은 대포 20문 이상을 장비하고 150명이 타는 크고
높으며 튼튼한 군함인데 비해, 일본 세키부네는 대포가 없이 70명(조총수 20여명) 이 타는 작고 낮으며
약한 수송선인데.... 조선 대포는 사거리가 600 미터~ 1천미터 인데 비해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 입니다.
조선함대 중앙이 뒤로 물러나면서 학익진이 되어 적선을 좁은 수로에서 넓은 바다로 끌어낸 다음 400미터
정도 거리에서 빽빽하게 밀집된 배에 포격하니 조준하지 않아도 밀집된 상태라 어느 배라도
명중되며, 사거리 100미터 왜군 조총은 무용지물이니 적군을 전멸시켰음에도 조선군 사망자는
단 3명이며.... 그후 명량 해전의 조선군 사망자도 2명에 불과하니 원거리에서 대포로 박살낸 것 입니다!
주군 이에야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쓰메 요시노부가 기병 25기를 이끌고 다케다군에 돌격하여 전사하니,
이에야스는 목숨만 겨우 보존해 하마마쓰성에 도착했는데 이에야스는 신겐의 추격이 두려운 나머지 패주
하면서 말 위에서 똠을 지렸다고 하며... 입성 후 패주를 잊지 않기 위해 화공을 불러 그렸다는 그림이 전해 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다케다군의 추격을 염려해 성문을 닫을려고 하자 이에야스는 그냥 열어두고 횃불을 환하게 밝힌후
병사들은 보이지 않게 숨으라고 말한 다음 지쳐서 잠이 들었다는데, 추격해온 다케다군은 성문이 굳게 닫히고
적군이 성루에서 활을 겨누고 있을거라고 예상했는데... 텅빈 성문을 보고는 복병이 있다고 의심해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런 예는 임진왜란때 2번 정도 있었는데..... 한번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에 이르니 한성(서울)
과 개성 및 전주와 공주에 충주 처럼 조선군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지 않고 도주
하는 바람에 무혈입성했는데,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5천명 (3천명?) 을 이끌고 평양성에 도착합니다.
하마마쓰성 처럼 성문이 열려 있는지라 조승훈은 대국 군대가 오니 왜군이 겁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해 열려
있는 성문 안으로 기병들이 돌진해 들어갔는데, 평양 시내 마을의 골목길이 좁고 미로 같은지라 병사들이
골목 마다 흩어지니.... 지붕 위에 숨어있던 왜군이 총과 활을 쏘는 바람에 전멸하고 조승훈만 간신히 도주합니다.
두번째는 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수도 한성(서울) 을 점령하려고 경쟁하니 금속행군
하는데, 조선군은 부산진성이 두세시간, 동래성이 서너시간, 충주성이 1시간만에 함락당하고 신립의 1만 6천
조선군도 탄금대에서 서너시간에 전멸했고 한강 수비군도 왜군 기마병 서너명이 한강에 뛰어들자 놀라 도주합니다.
그후 가토 기요마사는 남대문(숭례문) 에 도착했는데 성문이 열려있고 조선군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
들도 일체 보이지 않으니 성문 안에 복병을 숨겨둔줄 알고 두려워 반나절이나 머뭇거리다가.... 아무래도
이상해 절찰병 몇명을 들여 보내니 임금은 물론 대신과 백성들까지 모두 다 도주하고 서울이 텅텅 비어 있더라는?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에서 학익진을 펼친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을 일거에 쳐부수고 서진하는 중에 다케다
신겐은 아사쿠라군에게 출동을 요청해 함께 오다 노부나가군을 쳐부수자고 했지만..... 큰 야심이
없이 수성을 중시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적설(눈) 을 핑계로 군을 후퇴시켜버리니 신겐은 장탄식을 합니다!
1573년 2월이 되자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악화된 관계는 표면화되어 세간에 알려졌고 쇼군 요시아키
는 3월에 거병해 노부나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으며..... 기나이에서 반오다파 연합군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오다군이 미카와를 침공하니 이제 오다 노부나가는 사면초가에 처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형편에 처합니다.
그런데 1573년 5월에 하늘의 도우심인지 도토미를 지나 미카와 (아이치현) 로 서진하던 가이국
(야마나시현) 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이 진중에서 병사하면서 다케다 군이
퇴각하니 이제 살아나서 한시름 놓은 노부나가는 재빨리 반 오다 세력들을 일소하기 시작합니다.
반 오다 세력에 포위 되어 운신이 어려웠던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제일의 무장이라는 다케다
신겐이 오와리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다가 신겐이 급사
했다는 소식을 듣자 비로소 안심하고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3일동안 내리 잠만 잤다고 합니다?
1573년 8월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요도성의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전사시켰고, 11월에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카와치 (오사카) 와카에성의 공격을 명해 요시츠구를 자결시키는 것에 성공했으니 이로써
5년간 노부나가의 뒷통수를 노리던 미요시 가문의 수뇌부는 기나이 (교토 지방) 에서 대부분 축출 되었습니다.
전황이 불리하자 미요시 나가하루는 4월에 동생 소고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요시츠구
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고..... 주전파인 나가후사를 축출하며 내부
세력을 추스렀다고 생각해 노부나가와 친선을 맺으려 시도했지만 노부나가는 거절합니다.
1573년 8월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사촌형 아사쿠라 카게아키라의 배반으로 그리고
아자이 나가마사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오다니성이 함락되어 붕괴
했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테루모토에 의지해 주고쿠로 달아났습니다.
노부나가는 여동생 오이치를 주어 혼인동맹을 맺은 매제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신하지 아자이 히사마사
와 요시카게, 나가마사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술잔으로 만들고, 히사마사의 아내이자 나가마사의
어머니로 안 사돈인 오노도노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가며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반 노부나가 포위망을 일소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완전히 기나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움직이니, 1574년 4월
이 되자 강화로 물러나 있던 혼간지 (오사카성) 의 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움직임에 맞춰 다시 거병합니다.
1575년에 들어서자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 이즈미에서 할거하던 소고 가문이, 4월에 니이보리성이 함락
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으니 미요시 가문의 세력이 쇠하자 카와치(오사카) 에서 할거하던
미요시 야스나가 또한 1575년 4월 8일 타카야성에서 항복을 표명하게 되니 노부나가는
미요시 야스나가를 자신의 세력으로 맞이함으로써 기나이에서 활동하는 미요시 세력을 완전히 평정합니다.
1576년 2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를 의지해 빈고(효고현) 토모로 내려갔는데,
요시아키와 적대관계를 명확히 한 노부나가 또한 이 일을 들었기 때문에,
에이로쿠 말년에서 이어진 오다 가문과 모리 가문의 친선 관계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노부나가에게 다케다, 우에스기, 롯카쿠, 아사쿠라, 엔랴쿠지, 혼간지, 미요시 등의 적대세력에
의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던 것 처럼, 모리 가문 또한 오토모, 아마고, 우라가미, 미요시
등이 연합한 포위망으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골머리를 썩였으니..... 이에 양 세력은
미요시 가문 공통의 적을 상대하고 배후를 안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친선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570년부터 꾸준히 노부나가에게 적대해온 혼간지 세력 또한 두번의 강화를 맺었음에도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서의 거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요시아키 또한 자신의 곁을 떠나 데루모토에게 떠난후
혼간지 세력을 예의주시하던 노부나가는 1576년이 되자 혼간지 (오사카성) 를 공격하기 시작 합니다.
이에 모리 가문이 혼간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며 서쪽의 구도는 모리 대 오다로 흘러가는데, 세토내해를 이용해
혼간지에 병량미를 가져다 주는 모리 가문에게 대적하기 위해, 5월 23일 아와지섬에서 수군 세력을
가진 아타기 진고로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모리 가문의 해상전력을 막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노부나가는 혼간지 (오사카성) 세력을 지원해주는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국의 수교인 모리
가문을 막기 위해....... 7월 키즈가와구치에서 이들 혼간지 및 모리군과 전투를 벌이기에 이릅니다.
노부나가는 시코쿠 동부( 아와 (도쿠시마현) 에 본거를 두고 계속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온 미요시
나가하루를 토벌하기 위해, 미요시의 후방을 쳐 줄수 있는 시코쿠의 다른 우군을 찾습니다.
시코쿠 각지의 슈고 (守護)를 맡았던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통해, 미요시 가문에
항전하는 카가와 노부카게 등 사누키(카가와현) 호족들에게 미요시 가문의 영지인 사누키
동부나 아와 서부를 수여해 준다는 서장을 1574년에 보내며 지방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노부나가가 눈독을 들이던 무장은 호소카와 가문에 사관했던 무사 집안의 당주이자, 호소카와 가문의 통자인
모토 (元) 를 쓰며, 1575년에 토사 (고치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쵸소카베 모토치카 였습니다.
이러한 노부나가는 아와(도쿠시마현) 로 출병을 결의하는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아와에서의
군사활동을 보증해주며 아케치 미츠히데를 전담 외교관으로 붙여주었고, 그의
장남에겐 자신의 통자인 노부(信)를 주어 노부치카(信親) 로 이름을 정할 것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1575년 다케다 신겐을 계승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충돌하자, 지난번에 노부나가
포위망이 조여들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이제는 아사쿠라- 아자이 세력도 정리
되었으니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서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다케다 가문에 큰 패배를 안깁니다.
이로부터 후지산 북쪽 가이국(야마나시현) 다케다군은 서서히 약해졌고 1582년 아들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다케다 토벌군이 편성되어 도쿠가와군과 함께 모리 나가요시에게 북시나노 방면,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코즈케 방면으로 진공하여 다케다를 멸망시키니 이는 에치고국 (니가타현) 우에스기 세력에게 커다란 압박이 됩니다.
나가시노 전투에 승리한 노부나가는 호쿠리쿠(북륙, 越國) 방면 진출에 나서니, 호쿠리쿠의 주인 우에스기 겐신
은 1576년 잇코잇키와 손을 잡고, 오다와 우에스기 사이에 있던 엣추(도야마현), 노토 반도를 침공하는
데... 노토 영주가 결사항전해 시간을 끌었고 간토 전선에서 원군 요청이 오니 우에스기 겐신은 일단 철군합니다.
1577년 10월, 노부나가는 엣추(도야마현), 노토(이시카와현) 지방에 오다군을 파견하나,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시바타 카츠이에가 지휘하는 5만 오다군을 우에스기 겐신은 더 적은 3만 5천 병력으로 크게 격파합니다.
일본에서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하천 테도리가와의 물이 불어났고, 겐신은 퇴로를
이 강으로 막아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싸운 신립의 탄금대 전투의 탄천과 금강
처럼.... 적군에게 죽은 병사 보다도 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노부나가에게 큰 위협이 될 상황이었지만, 과거 천우신조로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죽는 행운이
찾아왔던 것 처럼, 1578년 4월 우에스기 겐신 마저 급사하니 이제 노부나가를 막을 무장은 사라
졌는데,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자신에 반대하는 영주들을 차례로 멸하여 맹위를 떨칩니다.
1582년, 시바타 카츠이에로 하여금 우에스기 씨를 밀어붙이게 하여 호쿠리쿠의 도야마 성 ·
우오즈성 (魚津城) 을 치게 하고, 여기에 에치고국(니가타현) 우에스기씨 내부에서
시바타 시게이에가 반란을 일으켜 우에스기씨는 안팎의 적을 막느라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집니다.
한편 키즈가와구치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아와지섬의 아타기
진고로가 1577년이 되자 노부나가 세력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578년 3월에는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1차 키즈가와 해전에서는 시코쿠섬과 혼슈 사이 세토내해의 무라카미 해적등 모리군의 수군이 오다군의 수군
에게 이겼지만 1578년 11월 6일 제2차 키즈가와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수군이 철갑선을 만들어
모리 수군을 격멸하니 제해권을 장악한 오다 수군은 혼간지 (오사카성) 로의 보급을 끊어버리는데 성공합니다.
1579년 10월 아리오카성이 함락되고 미즈키성의 정세가 악화되자 혼간지 세력은 강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협상이 시작돼 강화가 이뤄진후 1580년 3월에 혼간지
세력이 오사카에서 퇴거하니..... 훗날 히데요시가 이 성을 허물고 새로 쌓은게 오사카성 입니다.
1580년 8월에는 혼간지 켄뇨를 이어 오사카에서 잔존세력과 노부나가에게 항전을 계속하던 혼간지
쿄뇨도 오사카에서 물러나니, 혼간지 세력을 평정했으며 8월 20일에는 규슈 사쓰마
(가고시마현) 의 시마즈 가문과 동부 규슈인 붕고 (오이타현) 의 오토모 가문 모두에게 강화를 명합니다.
1580년 음력 3월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리 가문을 공격하기 위한 주고쿠 원정을 명령하는데,
이 시점을 전후로 노부나가는 혼간지 세력과 강화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와 우키타 나오이에, 사누키와 이요(카가와현) 세력을 이용해 모리 포위망을 구상했다고 여겨집니다.
1580년 9월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요시 가문의 시노하라 사네나가 등의 구원 요청에 응해, 구로다 요시타카,
센고쿠 히데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통해 아와(도쿠시마현) 와 아와지섬에도 영향을 넓
히기 시작하며, 1581년 11월에는 아와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이와야성을 공략하여 아와지를 세력하에 둡니다.
노부나가가 용서하지 않을 것을 표명한 미요시 나가하루는 1576년 12월, 상관격인 호소카와 사네유키
에게 패해 사망하니 이에 미요시 가문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지만, 소고 마사야스가
1578년 1월 사카이에서 내려와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당주가 되어 미요시 가문의 혼란은을 수습합니다.
1578년, 시코쿠의 아와(도쿠시마현)에서 미요시 가문의 미요시 시키부노쇼 가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항복하니 노부나가는 “시키부노쇼와의 일은
그쪽에서 처리하길" 이라는 주인장을 모토치카의 동생 치카야스에게 보냅니다.
노부나가는 도사국(고치현) 의 쵸소카베 가문을 우군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이 아와를 공략
하는데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으니..... 신장공기에 따르면
1580년 6월 26일 쵸소카베씨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중개로 매와 설탕을 진상해왔다고 합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노부나가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일련
의 사건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서장을 1580년 11월 24일에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보내게 되며
불협화음을 내던 관계는 곧 파탄에 이르니 노부나가는 시코쿠 원정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합니다.
즉 시코쿠섬 동부의 미요시씨가 교토와 오사카로 진출해 세력을 이루어 오다 노부나가에 저항하니 미요시
씨를 쳐부수기 위해 시코쿠 남부 쵸소카베씨와 연합했지만 이제 미요시 세력을 격멸한 후에 보니
쵸소카베씨 세력이 너무 커져버린지라, 오다는 어제의 동맹인 쵸소카베씨를 치니 "토사구팽" 인가 합니다.
1582년 2월이 되자 시코쿠섬의 3분지 2를 점령한 도사국(고치현)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토벌하기 위해
미요시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파견했고, 3월 가이국(야마나시현)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5월 7일 이세국 칸베 가문의 양자로 가있는 자신의 삼남 노부타카에게 주인장을 보냅니다.
내용은 시코쿠의 국분에 대한 것으로, 시코쿠로의 원정이 마무리되면 "사누키를 노부타카에게",
"아와를 야스나가에게", "남은 양국은 노부나가 자신이 아와지섬에 도착하면 정할 것",
"야마시로노카미 (야스나가) 에 대해선 군신,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 이 주된 것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시코쿠를 자신의 세력으로 삼킬 심산이니, 도사국의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아와의 마사야스는
국분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또한 "우노몬도닛키" 6월 1일 조에 "산시치(노부타카)공이
야마시로노카미의 양자가 되었다" 는 구절이 있으니.... 노부나가는 아들 노부타카를 미요시
가문의 야스나가와 연결지어 동시코쿠를 자신의 친족들로 지배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옛 동맹인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통한 시코쿠 계획을 파기하고, 야스나가를
중심으로 한 미요시 가문을 통해 시코쿠를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었으니 야스나가에게는 시코쿠 원정이라는 일생일대의 대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새 없는 섬의 박쥐 (鳥無き里の蝙蝠) 에 비유하며, 우에스기나 다케다,
호조 같은 강자들이 즐비한 동일본에 비하면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수 있었을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평했다는데 물론 시코쿠에서는 가장 낫다고 생각 했습니다.
에치고국(니가타현) 우에스기씨 공격이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던 무렵인 5월 15일, 코슈 원정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성을 방문했으니,
이에야스를 대접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접대역을 맡겨 사흘에 걸쳐 대접하게 합니다.
빗츄(오카야마현) 타카마츠성을 공략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즈치성으로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자
노부나가는 돌연 미츠히데의 접대 담당역을 해제하고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이끌고 가도록 명합니다.
5월 29일 오다군이 북륙에서 우에스기군과 또 빗츄에서 모리군과 전투 중이며 셋쓰(오사카) 에서는 시코쿠섬
원정군이 대기하던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가 맡은 서방 원정을 위해 교토에 상락하여 혼노지
라는 절에 본진을 차리고 머물렀으며 노부나가의 장자 노부타다의 군대 또한 함께 상경해서 교토에 주둔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 노부나가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본진을 차리기 사흘 전인 5월 26일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한 것이니,
아케치 미츠히데는 영지 탄바 (효고현 북부) 카메야마성에서 1만 3천명을 이끌고 출진해 수도 교토로 향합니다.
밤을 지나 다음날 새벽에 교토 경계인 카츠라가와 앞에 다다르자, 1만 3천 중에 3천 명만 데리고
카츠라가와를 건너 교토로 입성했는데... 6월 1일 (양력 6월 20일) 밤, 미츠히데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노부나가는 잠자리에 들었고, 미츠히데는 그 시각 교토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 절에서 불 속에 갇히자 연소되기를 기다려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노부나가의 죽음을 확인한
미츠히데는 니조신고쇼(二条新御所)로 피신해 싸우던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와 무라이 사다카츠를 공격
했으니 노부타다는 세번에 걸쳐 진입한 아케치군을 물리쳤으나, 측근들이 전사하자 자결하니 “혼노지의 변” 입니다.
그 이후 노부나가의 복수전을 대의로 내세운 하시바 히데요시가 빗츄에서 급속행군해 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군을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사실상 노부나가의 차기
권력자로 자리매김하는데 패한 미츠히데는 도망가다가 부하들과 함께 농민들에게 살해당합니다.
120년간의 센고쿠시대 전쟁은 다이묘나 고쿠닌이라 불린 호족 세력들이 끼리 벌이는 것이고 농민은 제3자로 승리한
쪽에 세금을 내고 섬기면 그만인데, 병력이 모자라면 농민을 끌고가 아시가루로 삼기도 했으며 가난한 농민들은
밤에 전투 현장에서 군장이나 병장기를 챙겨 호구지책으로 삼았으며 패해 도망치는 병사를 공격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지 한달후 후계자 지명을 위한 회의가 열리는데, '키요스 회의' 니,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
였던 오다 노부타다는 이미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던터라...... 새로운 후계자를 급히 뽑아야만 했습니다.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의 후원을, 3남인 오다 노부타카는 가신 시바타 카츠이에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러던 도중에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의 편에 섰던 니와
나가히데와 협상을 벌여서 장남 노부타다의 3살짜리 어린 아들인 산보시로 후보를 바꿉니다.
결국 산보시가 후계자로 채택되었으며 4남인 히데카츠 (秀勝) 는 이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가
있어서 후계자 후보에선 논외였으며, 이로써 후계자 어린 히데노부의
후견인이 된 히데요시가 권력을 틀어쥐게 되고 오다 가문은 권력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