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영화감독 노동주 씨
-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고 싶어요”
프랑스의 행동주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말했다. 이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 영화감독 노동주 씨다. 그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해 중도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나 영화감독의 꿈을 놓지 않았고, 2008년 광주인권영상공모전에서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로 우수상을 받으며 감독으로의 첫발을 뗐다. 지난해 11월에는 노동주 감독의 삶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영화감독 노동주’가 개봉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영화감독이자 문화콘텐츠 회사 허니펀치프로젝트 부대표로 활동 중인 노동주입니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자택 출장 안마사, 복지관 영어 강사,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및 인권 강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장애인 고용 현실을 반영한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를 시작으로 시각장애 여고생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한나의 하루’, 아일랜드에서 온 신부와 지적장애인들의 풋살 활동을 그린 ‘6명의 슈퍼맨’ 등을 제작했습니다. 현재는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Q.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감독 노동주’의 주인공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A. 데뷔작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를 인상 깊게 보았다며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제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장애인 인식개선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걸어온 여정과 단편영화 ‘그냥 걸었어’의 촬영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임찬익 감독님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상당히 즐거웠어요. 자연스러운 연출 스타일을 많이 배울 수 있었고요. 영화를 매개로 비장애인들과 상생하는 저의 일상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Q. 영화감독이 된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A.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영화광이셨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영화를 접했고 자연스레 “나도 저런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요. 하지만 제작비가 많이 드니,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직업을 갖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사물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이더니 의식을 잃었어요. 시각을 포함한 중추신경계통의 이상으로 인해 생기는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지요. 2년여의 치료 끝에 일상생활이 가능할 만큼 회복되어 검정고시를 거쳐 조선대학교 환경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잔존 시력이 있었기에 연극 동아리, 스킨스쿠버 동아리 등에 적극 참여했죠. 돌이켜 생각하면 ‘시각장애 때문에 움츠리고 싶지는 않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 같아요. 여느 대학생처럼 자격증을 많이 따고 높은 토익 점수도 획득하고, 장학생에도 선정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취업 전선에 뛰어드니 위축될 수밖에 없더군요. 면접은커녕 이력서를 넣는 족족 고배를 마셨거든요. 더욱이 잔존 시력마저 감퇴해 명암만 분간할 정도가 되니 무력감이 커졌어요. “장애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는 어머니의 다독임이 없었다면 마음잡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각장애 적응 및 안마사 자격 취득을 위해 특수학교인 광주 세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영화감독의 꿈도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죠.
Q. 하지만 꿈을 꿈으로만 묻어두지 않기로 결심하셨군요.
A. 맞습니다. 영화감독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건 광주 세광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예요. 어느 날 친구들에게 꿈을 물어보았더니, 성우, 소설가, 교사, 요리사, 엔지니어, 가수 등 다양한 꿈을 말하더군요. 그때 ‘꿈 꾸는 것에는 시각장애가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하고 고용이 안정적인 직업은 안마사였지만요. 물론 안마사도 좋은 직업입니다. 다만 본래 가지고 있는 꿈을 포기하게 되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양한 매체 중 영상을 택한 것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됐어요. 시각장애인이 가장 시각적인 매체에 도전한다는 것, 불가능할 것 같은 꿈으로의 도전이 서로 교집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길로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를 찾아가 영상 제작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센터에서는 열정만 앞선 초보 감독 지망생에게 촬영 장비와 기술 노하우 등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어요.
Q. 영화감독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A.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찍더라도 어떤 구도와 어떤 순서로 화면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저는 시나리오를 직접 집필하면서 머릿속으로 시각화하는데, 막상 촬영이나 편집에 들어가면 화면 전개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더라고요. 그래서 현장 소통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특정 장면에 대한 느낌, 연출 방향 등 세부적인 콘티를 설명한 뒤 촬영감독과 함께 영상으로 담아내요. 스태프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촬영 영상을 확인하고 재촬영 여부를 검토하지요. 촬영보다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더 많이 듭니다. 단편영화의 경우 보통 두세 달이면 제작이 끝나는데, 저는 조금 더 걸려요. 다른 사람보다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거죠. 영화란 본래 공동의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저는 그 부분을 극대화한 기법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Q. 아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기획한 부분을 다 구현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아쉬움이겠지요. ‘영화감독 노동주’를 촬영하면서 자연스레 ‘그냥 걸었어’를 찍을 수 있었던 것도 제작사의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로맨스나 서스펜스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은데, 제작비 확보가 어려워 주춤하고 있어요. 좋은 인연을 만나 영화의 지평을 넓히고 싶습니다.
Q.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A. 제 영화가 ‘장애인을 주역으로 주제 의식을 살렸다’는 평가를 주로 받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 평범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담았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단지 그 주인공이 장애인일 뿐인 거죠. 특별한 성과를 낸 장애인,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저 장애를 가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저는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찍고 싶고, 영화를 통해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장애 유무를 떠나 사랑하고, 싸우고, 꿈을 꾸는 사람이고 이웃이니까요. 이와 더불어 저의 사례가 각자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각장애인에게 격려가 되면 좋겠습니다.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마세요!
김수정·신혜령 기자
* 2023년 <손끝으로 읽는 국정> 01월호 통권 제183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