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5단계
요즈음 계속 비가 내려 실내에만 있다보니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기타도 꺼내어 튕겨보고
책장을 훑어 보게도 됩니다.
문득 <죽음에 이르는 5단계> 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은
비슷한 심리적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단계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도 인생에서
어렵고 견디기 힘든 시절은 오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때 이 5단계를 생각하며 극복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여러 차례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물론 신앙인들은 신앙인답게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이겨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1969년 퀴블러 로스 박사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죽음에 대한 책을 쓸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쓰면 좋을까?'
죽어가는 사람들과 계속 교류해 온 그녀에게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은 비슷한 심리적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원인과 경과,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지만,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비슷한
마음의 변화를 밟아 죽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하고
5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기 암으로
'앞으로 3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제 1 단계 : 부정 (否定)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은 '부정'입니다.
강렬한 충격을 받아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내가 죽는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하며
사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정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기제에서 나오는 것이고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비운에 대처하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반응이다.
부정함으로써 자기 인생이 끝난다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그 전과 변함 없는 인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제 2 단계 : 분노 (忿怒)
필사적으로 부정해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
이번에는 '분노'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 나만 이런 가혹한 운명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왜 하필이면 내가?'에서
'왜 그 사람이 아닐까?' 로 변화되어 갑니다.
나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교활하고 못된 짓만 골라하는 그 녀석은 잘 살고 있는데,
왜 그 녀석이 아니고 내가 이런 병에 걸려서
고통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이런 생각은 점점 깊어져 갑니다.
가족, 의사, 간호사, 친구 등 누구든 간에
'왜 그 녀석이 아니고 나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역정을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그것은 '나는 살아 있어.
모두들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하는 외침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분노를 터뜨려도 좋다는 자각입니다.
주위에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풀 수 없는 분노를 신뢰하는 사람에게 퍼붓고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거래' 단계입니다.
제 3 단계 : 거래 (去來),타협
많은 경우, 인간을 초월한 신(God)과의 거래입니다.
"제 버릇없는 성격을 고칠테니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 주세요."
"시어머니를 잘 섬길 테니,
이 아이가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매우 고통스러운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노력의 댓가로 완전히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거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일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
'내가 환갑을 맞을 때까지...' 하고
점점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게 되겠지요.
제 4 단계 : 억울함(절망)
이러한 제안이 무리한 주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억울함'의 시기로 들어갑니다.
슬픔에 잠기고 길게 낙심합니다.
시간이 경과하면 증상은 더욱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이므로 더욱 낙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느낀 나머지
어떤 위안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 5 단계 : 수용 (受容)
그러나 '억울함'의 단계를 잘 넘기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지막에는 '수용'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행복감까지는 아니지만 억울함이나 분노가 사라지고
온화한 체념과 함께 죽음에 대해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용' 단계에서는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멋진 성품이
표면에 나타나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감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이 마지막 단계(수용)를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순간]에서 -
긴 여행을 앞둔 최후의 휴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91년10월 말 나이 40이 다되어 뒤늦게 2개월 간의 영어연수를 다녀왔다.
장소는 보스턴. 하버드 대학이 있고 MIT공대가 있는 그 곳.
학교가 끝나면 자주 대학교정을 거닐면서
그 곳 대학생이 된 듯한 환상에 젖어보고,
대학가에 있는 맥주 집에 들러 대학생 분위기에 동참하기도 했다.
공부가 끝나고는 1주일간 뉴욕, 시카고, L.A지사를 방문해
지사장들과 함께 느긋한 마음으로 관광하고
저녁에는 맛있는 식사와 음주를 즐겼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자 마자
연이어 즐거운 소식을 접했는데
그토록 원했던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마케팅에서 올림픽을 치르고 신제품 출시하느라
5년 정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영업현장에 다시 나가보고 싶었기에
지점장으로 현장영업 발령을 받은 나는
너무 기쁘고 희망에 부푼시절이었다.
작은 울산지점이지만 지점장은 지점장이니까.
울산지점관할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하지만
또한 모든 권한을 갖기에
영업사원의 꿈이 지점장이지요.
아직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셋방살이 형편이지만
작년에 자동차도 새로 구입했고, 사택도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다.
결혼한 지도 벌써 11년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전세금을 빼어 일부는 가구(장롱, 피아노)도 장만했다.
지점장으로 근무하니 너무나 좋았다.
지역 사령관으로서 거래처에서 대접해 주고
직원들도 지점장으로 대우하니 정말 꿈 같은 세월이었다.
주말이면 주위에 있는 명소로 가족과 나들이도 나가도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녔다.
시장도 평온한 상태로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 딸 아이도 학교에 적응을 잘하여 가야금을 배우기도 하였고,
울산 MBC합창단에 2등으로 합격하여
연습하며 일본연수를 기다리는 등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1년 후 마케팅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발령이 있기 전 고교 선배인 인사팀장이
곧 소주를 담당할 새로운 팀장으로 발령이 있을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귀뜸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천벽력과 같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다시 서울로 오라고 하다니...
하며 부정하려고 애를 쓰면서 동시에, 분노의 마음도 일었다.
일본 공연을 앞둔 딸 유나의 절망감,
게다가 지점장이 되면 사택에 살 수 있기에
울산에 내려오면서 뺀 전세금으로 피아노, 장롱 등을 장만했기에
서울에서 살 전세금도 부족한 상태였다.
내용을 알아보니 진로가 맥주시장에 진출을 앞두고 있기에
오비도 소주시장에서 진로에 대항해야 하는 소주 사업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원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막강한 진로에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뜨거운 감자’ 라고나 할까?
먹고는 싶은데 뜨거워 자기가 까기는 싫고
누가 까서 입에 넣어 주기를 바라는…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며칠 고민한 끝에
퀴불러의 죽음에 이르는 5단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제 3 단계인 거래 (去來),타협을 시도했다.
나의 상사에게 소주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고
당장 서울에서 살 집을 얻을 전세금도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구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내가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직 이동할 때가 안된 나를 지명한 것이며
회사측에선 절대 번복할 수 없는 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인 인사팀장이 말하길,
중역회의에 나의 발령에 대한 안건을
나의 상사인 상무가 내 사정을 말하며 부의했지만
그 동안 신제품 개발의 경험이 풍부한 내가 적격이라며,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발령을 내라 했다면서
오늘 중으로 텔렉스로 발령이 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타협의 단계로 들어갔다.
울산에 올때는 2년 이상 지방근무를 계획하고 왔기 때문에
지금 올라가면 전세금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아이의 문제를 거론하며 버티자
인사과에서 연락이 오기를
내 문제로 비상중역회의가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번복되지는 않은 것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라는 전갈이었다.
사실 위의 두 가지 이유 외에도
막강한 진로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주개발팀장으로 가는 데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절망감에 가족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처음에는 나와 같이 회사조치에 거부(부정)하고 분노했지만
의외로 가족은 곧 수용했다.
특히 가장 절망할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울산에 남아 합창단으로 있기 보다는
아빠를 따라 서울로 가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회사의 조치에 응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비밀리에 전세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렇게 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지점장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 5명으로 팀원을 구성하고
이름을 진로 두꺼비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꺼비를 잡아먹는 '코브라 팀'으로 정하고
소주개발을 한 추억이 있다.
처음 이동발령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었기에
흡사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차분히 5단계를 생각하면서
현재의 나는 어떤 단계인가? 생각하면서
차분히 대처할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일 말고도 여러 번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5단계를 생각하며
도움을 받아 잘 버텨온 것 같다.
갑작스런 상황에 부딪쳤을 때는
당황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자신을 다독이면서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수용해가는 자세가
닥친 상황을 잘 견디는 힘이 되겠지요.^^
첫댓글 글씨요~~
저는 이미 감히 수용의 단계에 와 있다고 확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