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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3파) 참판공파 26세 안상호(安商浩, 1872∼1927)
아래의 MBC 뉴스 기사가 있어 고종 황제의 당시 궁중전의가 누구있가 싶어 찾아본 자료입니다. 독살의 당사자인지 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은 있지만, 고종의 사망원인이 독살이라는 이야기는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고, 이로인해 3.1운동이 촉발된 것은 확실합니다.
출처 : imbc "고종 황제, 일본 지시로 궁중전의가 독살"
MBC | 이남호 기자 | 입력 2010.08.25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고종 황제의 죽음이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근거가 제시됐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별다른 지병이 없던 고종황제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뇌출혈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 정부가 독살했다는 소문은 국민적 분노로 이어져 3.1운동이 일어납니다. 서울대학교 이태진 명예교수는 오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의 수기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고종 황제 독살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는 뇌일혈이 아니라 독살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방자 여사의 수기 내용입니다. 「궁중 전의인 안 모 씨가 일본 정부관리로부터 뇌물과 협박을 받고 태황제를 독살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태황제를 독살한 것은 마마께서 또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대신을 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 등을 돌리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서 고종을 막아야했다."
당시 일본의 궁내청 장관이었던 구라부미 유자부로도 일기를 통해 독살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종 황제 부부는 모두 일제에 암살당한 것이 됩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고종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데 보다 많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남호 기자 namo@mbc.co.kr)
안상호(安商浩, 1872∼1927) 조선 후기의 의사.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해강(海岡). 일제 강점기인 1902년 6월에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東京慈惠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의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1904년에 귀국하여 순종(純宗)의 전의(典醫)로 있으면서 지석영(池錫永)이 세운 의학교(醫學校)와 동담한의학교(東憺漢醫學校)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 또 한편으로 서울의 종로 3가에 개인 진료소를 마련하여 의료 활동을 벌였고, 일본인 의사들의 단체인 경성의사회(京城醫師會)에 대항하여 한국인 의사로 구성된 한성의사회(漢城醫師會)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高宗)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자 당시 전의였던 그는 일본인 모리야스와 함께 진료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인의 사주로 고종에게 독약을 올렸다는 무고를 입어 한동안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아직까지 불충분한 자료 때문에 그 시시비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묘는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 있다.
1898년 10월 24일 황성신문(皇城新聞) ⊙ 졸업성례(卒業盛禮) 日前에 교동일어학교(校洞日語學校)에셔 卒業禮式을 行하는데 기제창(其濟蹌)한 儀節아 可히 영인관광(令人觀光)할만하고 其卒業한 學員은 조덕(曹德) 성류태(成劉泰) ▣ 박응준(朴應俊), 최호원(崔鎬元), 박승원(朴承源), 박용구(朴蓉九), 조원규(趙元奎), 강필우(康弼祐), 안상호(安商浩), 최린순(崔麟淳), 박정선(朴正善), 諸氏오 証書授與式節目은 左와 如하니 一은 學員着席二는 來賓着席三은 開式四는 卒業狀授與와 賞品授與五는 本校主任敎師報告六은 外國語學校長演說七은 大臣演說八은 來賓演說九는 學徒의 答辭十은 閉式十一은 來賓及學員就宴이더라 本日에 內外國縉士가 多會하였는데 本學校敎師長島氏와 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 홍우관(洪禹觀)氏와 학부대신(學部大臣) 이도재(李道宰)氏와 日本外交官水野氏와 독립협회회장(獨立協會會長) 윤치호(尹致昊)氏와 日本官立小學校敎師早川氏더라 우리는 卒業한 學員들을 對하야 致賀도하려니와 또 勸勉할말이 有하니 男子가 世上에 生함에 志가 四於에 在한지라 一技의 成就함을 能事로 知치말고 他學을 更究하야 其才를 擴充하면 後日國家의 棟梁이될지니엿지 豫賀치아니리오
1901년 01월 21일 황성신문(皇城新聞) ●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 通信司電話課主事 高用冕 仝 鄭一鍵 仝 朴大根 仝 鄭秉鏞 永陵參奉 金煕玉 英陵參奉 李有永 順陵參奉 朴定復 章陵參奉 權斗夏 依願免本官 ○任通信司電話課主事敍判任官八等 宋鍾大 ○任英陵參奉敍判任官八等 姜鎔 ○任順陵參奉敍判任官八等 金聖模 ○任章陵參奉敍判任官八等 九品 李鵬增 ○任永陵參奉敍判任官八等 崔允植 ○任廣州府公立小學校敎員敍判任官六等 沈承悳 ○진학신(秦學新) 안상호(安商浩) 박응준(朴應俊) 강필우(康弼祐) 박정선(朴正善) 이각(李珏) 정우흥(鄭雨興) 오극선(吳克善) 조재승(趙在升) 任 외국어학교부교관(外國語學校副敎官)서판임관6등(敍判任官六等) 以上一月十七日
1902년 06월 28일 황성신문(皇城新聞) ⊙개업의권(開業醫權) 일본 동경 자혜의원 의학교(日本東京慈惠醫院醫學校) 4년생 안상호(安商浩)氏가 외무성 의술 개업시험(外務省醫術開業試驗)을 行하야 前後兩期를 皆一次에 及第하얏는데 日本에셔 개업의(開業醫)의 權利를 得한 韓人은 同氏가 효시(嚆矢)라더라
1906년 08월 24일『 태극학보(太極學報)』제1호 醫師 安商浩氏의 來歷 (의사 안상호씨의 래력) 現今 日本 東京 芝區 자혜병원(慈惠病院)에셔 主醫로 잇는 안상호(安商浩) 氏를 內國同胞에게 紹介하노라. 氏는 京城人이니 관립일어학교(官立日語學校)에셔 刻勤勉勵하야 業을 卒한 後에 光武 二年(1898) 十一月에 奮然이 志를 決하고 日本에 渡來하야 동경 자혜전문의학교(東京慈惠專門醫學校)에 入學하여스나 本是 學資에 艱乏함으로 千幸萬苦한 事는 일일이 記述키 難하도다. 然이나 氏의 百折不屈고 勇進하는 精神이 能히 四年間을 繼做하야 光武 六年(1902) 九月에 優等의 成績으로 業을 卒하고 日本 內務省 의사검정시험(醫師檢定試驗)에 受驗登第하야 의사면허장(醫師免許狀)을 受하고 其後로 자혜병원(慈惠病院)에셔 實習을 視하뫼 氏의 眞實하고 高明한 實力이 遠近에 表彰하고 該 병원장(病院長)에 欽讚信用하믈 被하야 드듸여 該院의 주의(主醫)로 被任하고 至今까지 수백망중(雖百忙中)이라도 一時를 不怠하고 孜孜勤勉하야 學理의 精蘊을 益益硏讚 不已하니 氏는 我國斯界의 斗泰요 我學生界의 模範이라 할만 하도다.<49>
1904년 12월 30일 황성신문(皇城新聞) ●고대졸업(姑待卒業) 駐日公使趙氏▣氏가 昨日學部이 電報하의 의학교 교관(醫學校敎官) 안상호(安商浩)를 出去하라한 則 안상호(安商浩) 언내(言內)에 의자(醫者)는 인명소관(人命所關)이라 工夫가 未或하얏스니 불가출거(不可出去)라 하얏다더라
1907년 04월 07일 황성신문(皇城新聞) 醫士 安商浩氏 歸國 (의사 안상호씨 귀국) 東京 慈惠病院醫學校에셔 修學卒業하고 仍히 該院에 滯在하야 學理를 硏鑽하던 의사(醫士) 안상호(安商浩)氏는 三月卄一日에 出發歸國하얏는데 氏는 本是京城人으로 決心渡日한 後, 學資支辦할 道가 全無홈을 不拘하고 오 血誠과 熱心을 信賴하야 千辛萬苦中 孜孜히 勤學하야 드듸여 자혜병원의학교(慈惠病院醫學校)를 卒業한 後, 該院長의 知遇를 感하야 該院에셔 幾年間施術하고 兼하야 更히 深邃한 學理를 討究하더니 今에야 成業歸國하얏는지라 吾人은 我國刀圭界에 一國手가 加함을 賀하는 同時에 多年留學生界에<95>對하야 煥心理腦하신 것을 謝하노라. 삼가 健康을 祝하노라.<96>
1908년 01월 14일 황성신문(皇城新聞) ●兩氏陪從 한응리(韓應履) 안상호(安商浩) 兩氏가 금번(今番)에 의친왕(義親王) 전하(殿下)를 배종(陪從)하고 日本에 도거(渡去)하얏다더라
1908년 11월 15일 황성신문(皇城新聞) ●의회임원(醫會任員) 의사연구회(醫事研究會)에셔 任員을 定하얏는데 會長은 김익남(金益南)氏로 副會長은 안상호(安商浩)氏로 総務는 劉秉필 氏로 幹事는 최국현(崔國鉉) 장기무(張基茂)兩氏가 被選되얏다더라
1909년 11월 23일 황성신문(皇城新聞) ●친왕림문(親王臨問) 의친왕(義親王) 전하(殿下)게옵셔 3작일(三昨日) 하오 4시(下午四時)에 포병하(布屛下)에 在 안상호 진찰소(安商浩診察所) 에 친림(親臨)하셧다가 즉시(卽時) 귀저(歸邸)하셧다더라
1910년 04월 10일 황성신문(皇城新聞) ●하사진의(下賜診醫) 의사(醫師) 안상호(安商浩)氏 昨年七月붓터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의 소명(召命)을 봉승(奉承)고 덕수궁(德壽宮)에 참입(叅入)하야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 及 엄귀비 전하(嚴貴妃殿下)를 배진(拜診)함에 대(對)하야 태황제(太皇帝)게옵셔 再昨日에 금화 3백환(金貨三百圜)을 하사(下賜)하옵셧다더라
1910년 08월 02일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의사의안(大韓醫士議案) 한의사총합소(韓醫士総合所)에셔 일작 임원회(日昨任員會)를 開하고 각기금전(各其金錢)을 갹집(醵集)하야 교사(校舍)를 買入한 후한성내의사(後漢城內醫士)를 소집(召集)하야 동서의학(東西醫學)을 강의(講義)케하랴는데 동의학강사(東醫學講師)는 박준성(朴準成) 서병효(徐丙孝) 兩氏로 서의학강사(西醫學講師)는 안상호(安商浩) 류병필(劉秉泌) 兩氏를 추선(推選)하기로 결의(决議)하얏다더라
1919년 12월 25일 독립신문 광무제(光武帝)의 붕어(崩御)는 확실(確實)히 일인(日人)의 독시(毒弑) 김가진(金嘉鎭)옹 談
三日에 記者는 의친왕(義親王)에 關한 위세(委細)한 사정(事情)을 알기 爲하야 김가진(金嘉鎭)先生을 그 교우(僑寓)에 방문(訪問)하다 백발동안(白髮童顔)의 노선생(老先生)은 마츰 내방(來訪)한 박은식(朴殷植) 先生과 간담중(懇談中)이라 記者는 日人의 新聞에 先生이 의친왕(義親王)의 내호사건(來滬事件)에 對하야 關係가 깁다는 말과 또 義親王이 上海로 來하려 함은 대동단간부(大同團幹部)의 위협(威脅)을 因홈이라는 報道가 잇슴을 告하엿더니 先生은 「日人이 한 말이면 의례(依例)히 거즛말이지오」 하고 當身이 數十年來 日本政治家와의 交際에 아즉 誠實한 者를 보지 못한 것과 當身의 一生이 배일(排日)의 一生인 것을 말슴한 後에 義親王의 決心한 動機에 關하야 如左히 說明하다 義親王은 一般國民보다도 日本의게 對하야 怨恨이 깁풀 것이라 그의 親書(本報二十九號所載)에도 말한 바와 갓치 그의 母后와 父皇이 다 日本의 독수(毒手)에 시(弑)한 배 되엿고 또 合倂 以來十年間 그는 유폐(幽閉)의 몸이 되여 一步도 門外에 出함을 不得하엿스며 或 出入한다 하면 반다시 日警이 同行하다 余도 屢次 會面할 機會를 求하엿스나 마참내 엇지 못하고 余가 京城을 出發하기 얼마 前예 겨오 간접(間接)으로 ꡔ만나기는 만나야겟는데 엇더케 만나나ꡕ 하는 傳言을 들엇슬 뿐이라 近侍者를 介하야 探問한 바에 依햐면 그는 恒常 外遊의 意가 잇섯다 하며 特히 광무제 시역사건(光武帝弑逆事件) 以來로는 日本의 不義와 暴虐을 世界의 公論에 訴함이 아니면 死하야 부황모후(父皇母后)와 對할 面目이 업다 하엿다 하다 그러나 그는 單獨으로 決行할 處地난 안인즉 大同團幹部의 주선(周旋)이 有力한 것은 事實이라 하더라도 決코 위협(威脅)을 못 이김이라 함은 넘어 義親王을 모욕(侮辱)함이라 余와도 屢次 間接으로 同行을 相議하엿슴을 보더라도 그 決心이 오래된 것과 또 自發的임을 알지라 또 림시정부(臨時政府)에셔 殿下를 招請하엿다 함은 全혀 虛言이며 하물며 殿下를 臨時政府의 首領으로 삼넌다 함은 實로 無知한 者의 言이라 先生은 다시 광무제(光武帝) 붕어(崩御)에 關하야 확언(確言)호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붕어(崩御)는 독시(毒弑)가 분명(分明)하오 나는 붕어(崩御) 5일 전(五日前)에 폐견(陛見)하엿거니와 극(極)히 건강(健康)하시고 유쾌(愉快)하시게 담화(談話)하심을 보와슨즉 아모리 인생(人生)이 무상(無常)이라 하더라도 그러케 속(速)히 도라가실 리(理)도 업고 또 옥체(玉體)에 기중(其中)에도 흉복부(胸腹部)와 면부(面部)에 청반적반(靑班赤班)이 잇고 구공비공(口孔鼻孔) 기타(其他)로 부(腐)한 피가 흘넛슬 뿐더러 폐하(陛下)께셔 임종(臨終)에 「내가 무엇을 먹어서 이러나 이것을 고칠 수 업나냐」 하섯스며 또 일인(日人)의 교사(敎唆)를 수(受)하야 폐하(陛下)께 독(毒)을 진(進)한 주모자(主謀者)가 한상룡(韓相龍)의 형(兄) 한상학(韓相學)인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事實)이오 영친왕(英親王)끠서 독시사건(毒弑事件)을 탐지(探知)하시고 덕수궁(德壽宮)에서 척신(戚臣)과 귀족(貴族)을 불러 조사(調査)하섯스며 그 익일(翌日)에 일인(日人)들이 비밀리(祕密裏)에 블치듯 정하(殿下)를 동경(東京)으로 모서간 것도 사실(事實)이오 시의(侍醫) 안상호(安商浩)가 모청년(某靑年)의게 대(對)하야 광무제(光武帝)의 붕어(崩御)는 분명(分明) 독시(毒弑)라고 증언(證言)하엿다는 설(說)도 잇거니와 독시(毒弑)인 것은 사실(事實)이오ꡕ 하야 비분(悲憤)을 못 이긔여 하시며 「그러면 의친왕(義親王) 전하(殿下)게서 부황(父皇)과 모후(母后)와 조국(祖國)의 원수(怨讎)들 보(報)키 위(爲)하야 본국(本國)을 탈출(脫出)하려 함이 인정(人情)의●●이 아니겟소」 할 때에 노안(老眼)에 눈물이 빗날 때에 기자(記者)도 암연(暗然)함을 금(禁)치 못하다 최후(最後)에 적(敵)이 의친왕(義親王)끠 대(對)하야 엇더한 태도(態度)를 취(取)할가 하는 기자(記者)의 질문(質問)에 대(對)하야 선생(先生)은 「아마 형벌(刑罰)까지는 아니하겟지오 그러나 사건(事件)의 진상(眞相)을 알기 위(爲)하야 육혈포(六穴砲)나 군도(軍刀)로 위협(威脅)까지는 하리다 이것은 일인(日人)의 긍용(恆用)하던 수단(手段)이닛가요 그러고는 아마 은거(隱居)라는 명의(名義)로 유폐(幽閉)할 터이지오 현금(現今)까지도 유폐(幽閉)엇지마는」 과연(果然) 적(敵)의 신문지(新聞紙)에 전(傳)하는 수야(水野)라는 자(者)의 언(言)을 거(據)하건대 장차(將次) 전하(殿下)를 유폐(幽閉)하리라 하며 또 전하(殿下)에 관(關)한 모든 비밀(祕密)이 탄로(誕露)된 것을 보건댄 적(敵)은 전하(殿下) 기타(其他)에 대(對)하야 흉악(凶惡)한 위협(威脅)과 악형(惡刑)을 가(加)한 듯하다 |
첫댓글 백범 김구 선생을 시해한 것도 우리 안문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안문의 수치군요!!!!
아직은 논란 중인 일이지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의 의견이 그러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