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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바이러스
박 완 서
외딴 시골길은 앞뒤가 확 뚫려 있는데도 나는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멈칫대며 차를 몰았다. 저만치 시골 버스정류장 지붕 밑에 모여 있는 세 여자 때문이었다. 버스정류장은 차도로부터 안전한 길가에 위치해 있기 마련이고, 더군다나 내가 가고 있는 방향과는 반대편 차선의 정류장이었는데도 나는 편안한 산책길에서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 양양 시내로 가는 시외버스는 이미 끊긴 뒤였다. 평상시 같으면 아직 끊길 시간이 아니었다. 이 인근 주민들은 마을회관 스피커를 통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이 고장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버스를 놓쳤다는 것 말고는 세 여자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 사람이 각각 딴 데를 보며 우두망찰해 있는 폼이 처음부터 일행은 아닌 듯했다. 왜 그들에게 끌렸을까. 군중 속에서 얼굴을 잊은 지 오랜 고향 사람이나 초등학교 동창에게 끌려서 괜히 가까이 가보고 싶기도 하고, 모른 척 외면하고 싶기도 한, 신경쓰이는 동질감 같은 거였을까. 망설이느라 그들 앞을 조금 지나쳐서 차를 멈추고 유리까지 내렸는데도 그들이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 방향과 반대로 가고 있는 내 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팔을 내밀고 큰 소리로 말을 결자 일행 중 가장 젊어보이는 여자가 뭐라고요? 하면서 길을 건너 나에게로 왔다. 그 여자를 멀리서도 젊게 봤던 것은 다른 두 여자의 평퍼짐한 옷차림에 비해 아직도 몸매에 자신이 있다고 과시하고픈 듯 꼭 끼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온 여자는 젊지 않았고, 다리까지 절고 있었다. 그 여자는 마치 다리 저는 걸 즐기듯이 애교스럽 게 결어왔다. 십대들이나 걸칠 것 같은 짧은 재킷 밑에 받쳐입은 나시는 가슴을 반도 안 가려서 희고 풍만한 가슴이 내 눈앞에서 그 깊은 골짜기를 드러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을 것이다. 육십년대 초 예방접종의 혜택도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을 때 소아마비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미처 걸음마도 하기 전의 젖먹이가 둘이나 걸린 적이 있었다. 씨족마을이었으니까 친척뻘 되는 아이였을 것이다. 공포분위기 끝에 두 아이 다 살아나긴 했지만 후유증은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심했다. 가벼운 아이가 힘없는 한쪽 다리를 얘처롭게 끌며 결음마를 배울 때, 두 발이 다 낙지처럼 흐느적대는 딴 아이 생각은 안 하고 큰 소리로 박수치며 격려하던 생각이 났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소식을 모르는 먼 친척들 얘기다. 새삼스럽게 먼 친척들이 그립거나 궁금해진 건 아니고 그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면 이 여자가 아무리 젊은 척해도 쉰은 넘었으려니,, 나이를 탐색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머머, 할머니가 운전을 다 하시네, ‘소아마비’ 도 내가 왜 차를 세웠나보다는 내 나이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저 나이라면 나에게 아줌마라고 해도 좋으련만 똑 떨어지게 할머니라니, 그 싹수머리 없는 말본새로 봐서는 쉰은 아직 멀었는지도 모르겠다.
“버스 기다리는 것 같은데, 끊겼는데.”
나는 어정쩡하게 존댓말을 생략했다. 이유 없이 깔보고 싶은 여자였다.
“그럴 리가요. 나 여기 처음 아니거든요.”
“여기 사람 아닌 건 알겠는데, 설마 엊그저께 여기 쏟아진 엄청난 폭우에 대해 모르고 온 건 아니겠지.”
“그걸 어떻게 몰라요. 양동이로 쏟아붓는 것처럼 몇 시간을 내리퍼붓는 거 TV로 다 봤어요. 사람도 많이 떠내려가고, 그렇지만 그게 언젯적인데…….”
저 화상은 설마 여기까지 공중으로 날아왔을 리는 없고, 이쪽으로 올 때까지 조약돌처럼 흘러내린 엄청난 바윗덩이와 뿌리 뽑혀 거꾸로 선 거목들로 미증유의 폭우가 지나간 자리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골짜기골짜기를 눈깔은 어따 두고 못 본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무서운 일을 잊어버려도 좋을 만큼 오래전 일처럼 말하는 ‘소아마비’ 에게 말도 섞고 싶지 않은 혐오감을 느꼈다. 어느 틈에 나머지 두 여자도 길을 건너와 ‘소아마비’ 뒤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우리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이 찻길 한가운데 서 있는데도 오는 차도 가는 차도 없어서 신경쓰이지 않았다.
“시외버스 노선이 몇 군데 유실됐다는군요. 외진 데 있는 종점 근처가 더 엉망이래요. 그래서 매시간 한 번씩 운행하던 버스를 당분간 하루 세 번씩만 운행하기로 했다나봐요. 승객도 별로 없고요.”
“올 때는 승용차로 와서 잘 몰랐어요.”
스님들과 흡사한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여자가 말하자 다들 나도요, 나도요, 하고 승용차로 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바위나 토사는 중장비차로 치우면 차가 다니는 데 불편이 없지만 유실된 도로는 지리를 잘 아는 기사가 요령껏 우회할 수밖에 없어요. 위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답니다.”
저 보살님은 아마 고개 너머 회심암(庵) 신도일 것이다. 그렇게 넘겨짚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큰 절에 있던 비구니 한 분이 비어 있던 헌 집을 개수해서 작은 암자를 만든 지 몇 년 된다. 내가 시골집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올 때마다 가본 것도 아니지만, 어쩌다 산책 삼아 가봤기 때문에 그 암자의 변
화랄까 발전이 더 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비구니 한 분의 힘으로 곧 쓰러질 듯이 퇴락한 헌 집이 날로 튼실해지고, 고풍스러워지고, 둘레의 땅들이 아기자기한 꽃밭도 되고 온갖 채소가 고루 자라는 채마밭도 되는 것만 신기하더니 불탄일 둥 무슨 날만 되면 연등 달러 오는 신도, 치성 들이러 오는 신도들이 제법 쏠쏠했고, 위패를 모셔놓고 제를 지내러 오는 신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기웃대다가 절밥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나이든 신도들 중에는 불심이 돈독하다는 표시인지 이 절의 단골 신도라는 걸 나타내려고 그러는지 스님들의 가사를 닮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는 신도들이 많았다. 그들은 천주교도들이 서로 자매님이라 부르듯이 보살님 이라고 불렀다. 나도 회색 두루마기를 속으로 ‘보살님’이라고 명명했다. 여름의 끝자락에 불어온 태풍의 영향으로 엄청난 비 피해를 당한 끝이라 초가을답지 않게 날씨가 을씨년스러웠다. ‘보살님’ 의 회색 두루마키는 바바리처럼 맞춤해 보였다. 그러나 그 밑으로 드러난 쫄바지와 산길에 어울리지 않는 뾰족하고 반짝이는 남색 구두와의 언밸런스 때문에 보살님의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잠잘 곳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오늘 해 안에 서울 가긴 틀린 것 같은데.”
여태까지 암할 안 하고 있던 여자가 처음으로 말했다. 세 사람 중 제일 젊은 것 같은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마 신병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까부터 그 여자의 손등과 팔목에 난 뜸자국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칠부 소매 윗도리를 입고 있는 그 여자의 드러난 뜸자쿡은 불규칙하고도 생생했다. 안 보이는 속살에는 더 많은 뜸자국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젊은 여자가 무슨 몹쓸 병이 들었기에. 나는 얼마 전 TV로 본, 유명한 뜸선생 집 앞에 줄을 선 병자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저요·…· 이 근처에 어디 민박할 집 없을까요. 펜션도 괜찮고요.”
‘소아마비’가 말했다. 다른 두 사람은 그냥 난감한 얼굴을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민박집은 잘 모르겠고, 바로 요 너머 최근에 들어선 펜션이 있긴 있는데. 여기 촌사람들은 펜션이라고 안 그러고 러브 호텔이라고들 하는 데긴 하지만.”
“거긴 안 돼요. 나 거기서 나오는 길인걸요. 낮잠 자다가요.”
“난 암자로 도루 가서 하룻밤 드새죠, 뭐.”
누가 러브호텔로 끌기라도 한 것처럼 ‘보살님’이 질색을 하며 말했다.
“회심암이죠? 여기서 한 시간도 더 걸릴 텐데. 오르마하고 내리막은 또 달라요. 날도 벌써 '어둑어 둑해지구.”
나는 그 스리를 ‘보살님’이 아니라 ‘뜸’ 쪽을 보면서 말했다. ‘뜸’ 은 잘 데가 있나 해서였다.
“전 아무래도 괜찮아요. 이분들 중 아무냐 따라가서 하룻밤 드새도 되고 재활원으로 되돌아가도 되고요.”
“재활원이라면 저 솔뫼골에 있는 ‘천사들의 집’ 말인가요?”
“네, 제가 거기 봉사 다녀요.”
“좋은 일 하시네. 서울서 이 먼 데까지 보통 정성이 아니네요. 자주 오세요?”
“아뇨. 심심할 때만요.”
‘뜸’ 이 필요 이상 강하게 부인했다. 나는 ‘뜸’ 이 전혀 심심하지 않은 얼굴로 이까지 악무는 결 보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내 안의 상처가 남의 상처와 만나 하나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걸 느꼈다. 고약한 느낌이었다. 이들에게 끌리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괜찮으시다면 세 분 다 우리 집에 가서 묵으실래요. 아침에 터미널까지 모셔다드릴 수도 있구요.”
“거저요?”
‘소아마비’가 촉새처럼 나섰다. 다른 두 여자가 아이고 무슨 실례야, 저분이 어디가 장사할 사람으로 보여, 하면서 ‘소아마비’의 옆구리를 찌르는 게 보였다. ‘소아마비’가 운전석 옆에 앉고 ‘보살님’과 ‘뜸’ 이 뒤에 앉았다.
집에 가는 동안 나도 내일 서울 가니까 그들을 다 서울까지 데려다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내일 일찍 떠날 수가 없다고, 어쩌면 모레까지도 여기 있어야 될지도 모르는 사정을 설명했다.
나는 어제 왔다. 여기서 태어나서 중학교 마칠 때까지 태어난 집을 떠나보지 못하다가 고둥학교 들어갈 때 비로소 강릉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대관령을 넘어본 건 대학교 때문이었다. 집안 형편 생각하지 않은 채 기를 쓰고 대학에 간 건 공부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관령을 넘고 싶어서였다. 대관령만 넘으면 안전해질 것 같은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이 안 되면 생략하고…… 그때 대관령을 같이 넘은 친구가 있었다. 여기서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강릉 진출도 같이 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 보수적인 마을에서 아들도 아닌 딸이 언감생심 대관령을 넘을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 친구네는 우리 동네하고 사돈을 맺은 집이 많은 이웃동네였다. 사정이 빤했다. 그 친구 아니었으면 내가 감히 대관령을 넘을 엄두를 못 냈을 테고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둘 다 대학도 마치고 서울 남자 만나 서울 사람이 됐다. 그러나 고향땅엔 친구의 친정집도 나의 친정집도 아직 남아 있다. 친구의 남편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남편은 아내의 시골집을 좋아해 해마다 보수도 해서 옛날의 골격은 그대로 지닌 채 정정하게 늙어가고 있다. 우리 마을에 그렇게 오래된 집은 우리 집밖에 없다. 몇 집 안 남은 농가는 날림 티 나는 조립식 주택으로 바뀌었고 근사하게 보이는 통나무집도 한 채 있는데 그건 강릉 사는 지방대학 교수의 별장이다. 우리 집도 마을 사람들은 별장집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이라야 상주인구는 대여섯 명밖에 안 된다. 옛날엔 씨족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성이 다르다. 그러니까 정체 모를 떠돌이들 차지가 된 것이다. 사실은 그래 싸다.
그래 싼 까닭도 생략하고…… 친구네는 집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아흔 가까운 노모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가 제 식솔만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안 모셔가려서가 아니라 노인이 막무가내 안 가려고 해서이다. 서울 딸네 집에 와서도 사흘을 못 견디는 노인이니 미국이 아랑곳인가. 당신 고집 때문에 혼자 사는 거라고 해도 딸에게는 모시는 것보다 더 큰 부담이었다. 그 아흔 노모가 이번 폭우에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산사태로 마을이 통째로 파묻혀버렸다. 우리 마을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도 이번 수해 중 최대의 비극이었다. TV에도 나왔다. 그 마을에 사람 사는 집이 몇 집 더 있긴 해도 상주인구가 아니어서 다들 부재중이었다. 더 기막힌 일은 집을 덮친 토사 밑에서 집의 잔해를 샅샅이 뒤져도 노인의 시신을 못 찾은 거였다. 현재는 발굴작업을 일단락짓고 주변 하천을 수색중이었다. 곳곳에 범람한 하천이 지금 겨우 제 본류를 찾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른 유속은 마치 토악질하듯이 뿌리 뽑힌 나무와 농기구와 가재도구의 파편을 실어나르고 있다. 집이 통째로 떠내려오는가 하면 가짜 기와지붕이다. 어디 먼바다로 가서 용궁의 지붕을 이어도 될 만큼 플라스틱의 힘은 막강하다. 친구의 남편은 외국 출장 중이고 혼자서 유해 수색작업을 지켜보고 있을 친구가 안돼 달려오긴 했어도 나도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못 떠나고 있을 뿐이다. 친구는 밤에도 현장에 있어야 한다며 우리 집에 안 오고, 수재를 면해 성하게 남아 있는 그 마을의 빈집에 머물고 있다. 낮에 그 친구 곁에 머물다가 집에 오는 길이었다.
세 여자를 만나 나의 시골집까지 오는 동안은 간략하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알맞은 거리이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는 우리 마을은 앞벌만 빼고는 삼면이 짙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녹색도 극에 달하니까 지쳐 보인다. 힘겹게 저장하고 있는 과중한 수분을 언제 토해낼지 모르게 둔중한 빛을 하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 유해야 찾건 말건 내일은 나도 떠나리라, 망설이던 마음을 별안간 굳힌다.
앞벌 논배미 사이를 흐르는 도랑들도 격류로 변해 물소리가 요란한데도 이 음팍한 마을에 고인 적막은 어쩌지 못한다. 적막이라기보다는 온 세상의 침묵이 다 모여서 짜고 짠 것 같은 건고한 침묵이다. 세 여자들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늑한 동네와 나의 시골집을 찬양하고 선망하느라 떠들썩하지만, 철통같은 침묵의 겉껍질을 흐르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집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서 슬쩍 비켜나 대문도 사립문도 없는 넓은 흙바닥의 앞마당에서 사람 키 높이로 축대를 쌓고 지은 집이라 규모에 비해 덩그렇게 보인다. 기역자집이지만 나무광을 겸해 필요 이상으로 넓은 부엌이 안방 머리에서 남향으로 삐져나와서 그렇게 보일 뿐 내용적으로는 일자집이다. 두 개의 널찍한 온돌방과 그 사이에 낀 마루가 다 같이 남향으로 나란히 배치돼 있고, 서까래와 기둥목이 아직 든든한 툇마루가 길게 처마 밑으로 노출돼 있다. 단순하지만 옹색한 집은 아니다. 여자들은 댓돌을 올라 툇마루에 걸터앉아 나의 시골집을 칭찬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댓돌을 오르기 전에 쳐다본 기와지붕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요즘 보기 드문 조천기와 지붕이라느니 아니 양기와일 거라느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품위 있어 보이는 데 비해 유지하기가 힘들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다 틀린 말이다. 원래 있던 초가 지붕을 걷어내고 올린 지붕은 조선기와도 양기와도 아닌 합성수지로 만든 가짜 기와이다. 공장에서 지붕 형태로 통째로 찍어나온다. 합성수지는 가볍고 힘이 세다. 이번 수해에 집이 형체도 없이 유실됐다 해도 지붕만은 끄떡 없이 먼바다까지 떠내려갔을 것이다. 나는 마모도 소멸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병적이고도 비밀스러운 혐오감을 갖고 있었지만 관리하기에 편하고 저렴한 것을 선호하는 남편을 말리지 못했다.
나는 툇마루의 손님들에게 주스를 병째로 종이컵과 함께 내주고 냉장고를 점검한다. 먹다 남은 밑반찬이 넉넉하다. 다음에 언제 올지 모르지만 다시 올 때는 십중괄구 내다버리지 싶은 탐탁잖은 반찬들이다. 저 세 사람과 함께라면 개운하게 냉장고 청소가 될 것 같다. 내가 쌀을 씻는 기척에 ‘소아마비’가 부엌문을 기웃대더니 어머머, 어머머 재워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저녁까지 주시려나봐, 호들갑을 떠니까 다들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들 채비를 한다. 나는 요새 그까짓 밥하기가 뭐 어려우냐고, 냉장고 청소를 겸해 저녁 먹이려는 거니 고마워할 거 없다고 솔직한 속내를 말하고 부엌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부엌은 마당처럼 흙바닥이어서 혼자나 둘이서 먹을 수 있는 작은 식탁과 의자는 놓여 있지만, 시집 식구들이나 남편의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쓰는 큰 식탁은 마루방에 있다. 이왕 부러움을 산 끝이니 그들도 버젓한 식탁도 있고 그림까지
걸려 있는 마루방에서 대접해야 할 것 같다.
밥통은 플러그를 빼고 김치와 몇 가지 반찬은 밀폐용기째로 주섬주섬 쟁반에 받쳐놓고 가장 어린 사람을 부른다는 게, 어이 ‘소아마비’ 나 좀 도와줘, 라고 말했다. ‘소아마비’ 가 방긋 웃으면서 얼른 와서 쟁반올 받아가지고 내가 일러주는 마루방으로 갔다. 나는 밥공기와 수저통, 물주전자 등 그밖의 것을 챙겨가지고 뒤따랐다. 마루방에도 작은 냉장고가 있고 음료수와 남편이 먹다 만 와인병 등이 들어 있었다. 와인 하실래요? 나는 술을 잘 못하지만 한번 딴 와인을 오래 두면 안 좋다는 남편 말이 생각나서 해본 소리였다. 어머머 와인씩이나, 부티난다, 나는 부티 나는 건 뭐든지 좋아하는데, 제일 먼저 ‘소아마비’가 반색을 했다. 몇 개 안 되는 와인잔도 마루방 수납장에 있어서 모두에게 권하고 나니 병이 비었다. 못 마신다고 사양하는 사람들 것까지 홀짝홀짝 비워주고 난 ‘소아마비’가 밥을 몇 숟갈 뜨다 말고 뜬금없이 저 소아마비 아닌데요, 하는 것이었다. 당신들 놀랐지롱 하는 것처럼 장난기 어린 표정이었다. 시종 우울해 보이던 ‘뜸’이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그럼 배냇병신이었단 말인가? 하고 듣기 거북한 과민반응을 보였다. 아뇨, 아파트 삼층에서 뛰어내려서 엉치뼈가 왕창 나갔거들랑요. ‘소아마비’가 비음을 내며 몸까지 비틀었
다. 내 눈엔 우선 그게 이상하게 비치는데 보살님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쯧쯧, 무슨 일로 그런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삼 층 정도에서 뛰어내려봤댔자 안 죽을걸. 적어도 육층 이상은 돼야 완전하게 목숨 끊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지 뭐야, 머리나 척추를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앞으로라도 딴마음 먹지 말고 악착같이 살아야 돼. 업보란 죽는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야. 또다른 악업을 지을 뿐이지. 나무관세음, 나무관세음…… 알아들었수?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구.”
‘보살님 ’의 설교가 길어지려고 하자 ‘소아마비’가 저 그런 사람 아니걸랑요, 하면서 아무도 못 끼어들게 빠른 소리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소아마비’ 의 고백
남편이 의처증이 심했어요. 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죠. 저를 어떻게 때려요.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결혼도 그 사람이 하도 따라다녀서 동네 창피하기도 하고, 딴 데로 시집가도 편히 살게 놔줄 것 같지 않다고 부모님이 먼저 손을 들고 허락하셔서 하게 된 거였죠. 저도 싫지는 않았어요. 다니는 회사도 튼튼하고 그 사람도 키만 좀 작다 뿐이지 얼굴 번듯하고 건강하고. 결혼할 때도 우리 부모님은 한 푼도 못 쓰게 하고 싸데려가다시피 했으니까요. 우리 집도 부자는 아니지만 딸자식 맨몸으로 내줄 정도로 형편없는 집도 아닌데 일전도 못 쓰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저를 데려가는 것만 감지덕지하니까 저도 제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우쭐하게 되더라구요. 신혼여행 갔다 와서 출근할 때는 회사 가기 싫다고 몇 번 떼를 쓰다 나가고, 회사 가서는 하루 몇 번씩 아무 일 없냐고 전화를 해쌓고, 신혼 시절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권태기가 와도 좋을 만큼 살았는데도 똑같이 그러니까 점점 짜증이 나다가, 아, 이 사람이 정상이 아니다 싶어서 친정엄마한테 하소연하면 야, 넌 엄마 아빠가 서로 소닭 보듯이 사는 것만 봐서 뭘 몰라, 연속극도 못 봤냐, 다들 그렇게 깨가 쏟아지게 사는걸, 난 세상 헛살았다 싶더라, 이런 식이에요. 이게 깨가 쏟아지는 거라면 그렇게 알고 참자, 참자, 하면서도 내가 온종일 뭐하고 살았나 시간별로 알고 싶어 하고, 자기가 칼같이 퇴근해서 들어오는 시간 맞춰 나는 오뚝이처럼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제가 힘든 건 그 사람이 전화걸 때 없었다면 그동안 어디 가서 뭐했고, 누굴 만났고 몇 시에 돌아왔고, 그 정도의 외출에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을 리 없다고 추궁을 당하면 아 참, 오다가 동창 누굴 만나서 차를 한잔 마셨다고, 마치 초등학생이 방학만 되면 실행도 못 할 일정표 짜듯이 저하고 같이 있지 않은 시간을 시간별로, 분별로 아귀를 맞춰서 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예요. 점점 미칠 것 같아지더라구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결혼 잘못했구나, 이게 감옥이지 감옥이 따로 있나, 혼자서 가슴을 쳤조. 처갓집에도 여전히 잘하니까 엄마한테는 하소연해 봐야 통하지 않고, 친구에게도 내가 이러고 산다는 걸 털어놓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혼자서 시들시들 마르고 그러는 사이에 덜커덕 애가 생기고 만 거예요. 그후 한 해 걸러로 애가 둘이나 더 생기는 사이에 내 새끼를 같이 예뻐하고 같이 걱정하고 책임져줄 가장인데 그 정도의 횡포는 참아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체념이 스스로 생기더라구요. 엄마는 이제야 철들었다고 안심하고. 사실 저는 살림 알뜰하게 하고 내 몸치장하는 데는 도가 텄지만 어디 가서 돈 한 푼 벌 자신은 없거든요. 뭐니 뭐니 해도 여자 기죽이는 데는 경제력이 제일이잖아요. 그 사람도 그걸 느꼈나봐요. 여자를 제 손아귀에 꽉 쥐고 싶은 사람이 왜 그걸 모르겠어요. 월급쟁이 해서는 애들 잘 기를 자신 없다고 다니던 회사 제품 대리점을 하나 따가지고 회사를 그만둔 거예요. 훨씬 더 바빠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리점을 바로 우리 아파트 상가에 얻은 거 있죠. 점심은 거의 집에 와서 먹고, 그이가 가게를 비울 수 없을 때는 가게까지 한상 차려서, 마치 음식점 종업원처럼 이고 나가야 하고.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장보러 그이 가게 앞을 지나가야 하고. 우리 집에서 지하 슈퍼까지 가려면 꼭 그이 가게 앞을 통과해야 하거든요. 한번은 그이 가게에서 보이는 길가에서 지나가던 어떤 남자하고 같이 하늘을 쳐다본 일이 있었어요. 그럼요, 전혀 모르는 남자다마다요. 길 가던 웬 남자가 하늘을 쳐다보고 빙긋빙긋 웃기에 무심히 나도 쳐다봤죠. 꼬리 달린 연 두 개가 하늘에서 엉켜서 싸우고 있는 거에요. 나도 그 남자처럼 빙긋빙긋 웃으면서 쳐다봤죠.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고수부지에 연날리기장이 있거든요. 단지 외간남자하고 같이 하늘을 쳐다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잡혀가지고 집으로 끌고왔다니까요. 맞아요. 의처증도 이쯤 되면 중증이죠. 저도 그날만은 순순히 당하기만 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대들고 보따리까지 쌌더랬죠. 하도 세게 나오니까 실토를 하는데 자기도 어쩔 수가 없대요. 제 계집이 남자만 보면 꼬리를 치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냐는 거예요. 제발 꼬리만 치지 않으면 자기 병은 저절로 나을 테니 이번 일은 용서해달라고 비니 어쩌겠어요. 내 꽁무니에 정말 꼬리가 달린 걸까. 내가 너무 엉덩이를 흔들면서 걷는 결까. 항상 뒷모습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어떤 때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평상시처럼 내 멋대로 걷다가 혹시 누가 뒤에서 따라오나 돌아봐도 섭섭하게 아무도 안 따라오는 거 있죠. 그이도 참고 나도 참으면서 겨우 겨우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 일이 난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요?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 말예요. 아파트 현관문을 안 잠그고 있었나봐요. 우리 아파트는 옛날에 지은 거라 저절로 잠기지 않아요.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쇠가 있어야 되니까 수시로 들락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안 잠겨 있을 때가 많아요. 내가 워낙 문단속 같은 데는 신경 안 쓰는 편이거든요. 남편도 마누라 단속에 비해 문단속엔 허술한 편이에요. 밤에도 안 잠그고 잘 적이 많은걸요. 막 슈퍼에 가려고, 그날따라 살 게 많아서 식탁에서 메모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만 나고 인기척이 없는 거예요. 고개를 들었더니 웬 남자가 징그럽게 웃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지 뭐예요. 소름이 쫙 끼쳤어요. 얼굴만 보고도 알겠더라구요. 그 남자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도망치려고 일어서자 내 팔목을 꽉 잡더군요. 나는 우선 남자의 팔목을 사정 없이 물어뜯고 나서 사람 살리라고 목청껏 악을 쓰면서 뒷베란다로 달려가서 뛰어내렸어요. 완전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후엔 당연히 정신을 잃었죠. 엉덩이만 나간 게 아니라 뇌진탕 증세도 있어서 며칠 만에 깨어났어요. 남편이 울면서 기도하고 있더군요. 종교는 무슨 종교요. 하느님 부처님 다 불렀겠죠. 그후 전 열녀가 된 거예요. 아무한테나 열녀났다고 풍기고 자랑했으니까요. 하마터면 아파트 진입로에 열녀문 설 뻔했다니까요. 그후 제 신상이 이렇게 편해진 거죠. 마음대로 놀러 다니래요. 묻지마관광도 두말 않고 보내준다니까요. 근데 참 이상한 거 있죠. 남편 입에서 꼬리친다는 말버릇이 쑥 들어가고 나서 비로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내가 유혹하고 싶은 남자는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과 소질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 었어요. 정말 그래요. 내가 꼬시고 싶은 남자 못 꼬신 적 없어요. 불쌍한 우리 남편은 마누라 열녀 만들고 나서 여자 보는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거구요. 어제도 외간남자하고 놀러 와서 펜션에 묵었어요. 벼룩이도 낯짝이 있으니까 그 남잔 아침 나절 먼저 가고 난 실컷 낮잠 잔 다음에 저녁때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그런 눈으로들 보지 마세요. 가끔 이렇게 스트레스 해소하는 것 말고는 저 살림 잘해요. 제 돈 절대 외간남자한테 쓰지도 않고요. 남자도 바람둥이가 아내한테 더 잘한단 말 있잖아요.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홈 스위트 홈, 콧노래가 나올 만큼 즐거운 우리 집이라니까요.
소아마비가 말을 마치자 ‘보살님’은 나무관세음, 나무관세음 중얼거렸고 ‘뜸’은 겁먹은 얼굴로 먼저 들어가 쉬겠다고 했다.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우리의 숟갈질은 끝난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뜸’은 표정만이 아니라 몸까지 떨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불쾌한 걸로 치면 내가 더할 것이다. 남편은 나에게 결벽증을 넘어 도덕적인 강박관념이 있다고 할 정도로 요즈음 흔해빠진 혼외정사 따위 도덕적 문란에 대해 듣는 것도 즐기지 않았고 입에 담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는 성미였다. 어떻게 저런 망측한 소리를 점잖은 어른들 앞에서 얼굴 하나 안 붉히고 나불대는 걸까. 속으로 ×만도 못한 년, 하는 쌍욕이 저절로 나왔다. 우린 다들 ‘소아마비’ 쪽으로 시선과 몸을 집중하고 너무 붙어앉아 있었다. 그의 고백을 솔깃하게 즐긴 게 아니었을까. 이 탁한 공기를 바꾸고 싶었다. 다들 피곤할 것이다. 들어가 자야 할 시간이라 해도 뭐라지 않을 것이다. 여자끼리였다. 넷이 묵기엔 방도 넉넉하고 이부자리도 충분했다. 둘씩 둘씩 방을 써도 되는데 나는 ‘뜸’이 건강한 몸이 아니라는 걸 감안해서 마치 여관집 주인처럼 독방을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왜요? 하고 ‘뜸’ 이 되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여서요. 뜸 뜨는 데도 체력 소모가 많다면서요. 어디가 안 좋으신지는 모르지만 효험은 좀 보셨나요?”
처음 볼 때보다 병색이 더 완연해지는 ‘뜸’에게 동정심과 부담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소아마비’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아까부터 가르쳐드리고 싶었어요. 용한 침쟁이를 알고 있거든요. 뜸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은 침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해요. 뜸 뜬 데를 보아하니 생판 돌팔이지, 그렇게 용한 뜸쟁이도 아니구먼 뭐. 그냥 놔두면 사람 잠을 것 같아서 내 하는 얘긴데…….”
바야흐로 ‘보살님’이 용한 침쟁이를 소개해주려는 순간 ‘뜸’의 표정이 결연해지면서 말했다. 입술이 애처롭게 씰룩댔다.
‘뜸’ 의 고백
이건 뜸 뜬 자국 아니라 남편이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에요. 그인 툭하면 나를 이렇게 담뱃불로 고문한답니다. 저 같은 년은 고문당해 싸구요. 나도 바람을 피웠냐고요? 바람은 아무나 피우나요. 내 주제에 무슨 바람이에요. 난 서른 넘어 선봐서 결혼했어요. 수수하지만 착한 남자하고요. 이 세상에 흔한 보통 부부였어요. 아이가 안 생겨 걱정하고 기다리다가 삼 년 만에 임신이 되고 첫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보통 아이하고 달랐어요. 뇌성마비라나, 머리통도 보통 신생아답지 않게 작고 눈동자도 두 눈이 각각 딴 데를 보고 손발이 뒤틀리고, 우리 눈에도 사람 되긴 틀렸더라구요. 그래도 사람 만들어보려고 애쓸 만큼은 써보았어요. 의사라도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든지 최선의 방법을 일러줬더라면 그대로 했을 텐데 무작정 있는 그대로의 그애를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다는 거예요.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 납편은 제발 그애를 어디 고아원 앞에 내다버리라는 거예요. 외국 사람들은 불구도 잘만 입 양해간다더랑 하면서요. 술 먹고 들어오면 오늘도 안 내다버렸냐코 생지랄을 하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정말 내다버렸어요. 전부터 점찍어두었던 입양기관 앞에다요. 남편은 아이 어디 갔냐고 묻지도 않고 마치 우리에게 그 아이가 없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굴더군요. 그래도 불안해서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려고 이사까지 갔죠. 사람이 짐승만도 못 하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 와중에도 또 아이를 만들었으니까요. 제발 이번만은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은 그이도 마찬가지였겠죠. 기도가 헛되지 않아 둘째는 정말이지 예쁜 천사 같은 딸이었어요. 그이도 그때부터 마음을 잡고, 툭하면 그만두던 직장을 착실하게 다니게 됐죠. 사람 사는 행복이 이런 거로구나 싶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고맙고 달기만 하더라구요. 또 아이가 생겼어요. 이번엔 아들이었고 그애 또한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면서 집 안에 웃음꽃이 피자 우리 같은 죄인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자다가도 소스라쳐 깨어나질 않나, 낯에도 문득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해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방정맞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안절부절 아무것도 못 하고 재롱 피우는 새끼들도 다 귀찮고, 이런 증세를 견디다견디다 못해 순전히 나 살자고 내가 버린 아이를 찾아나선 거예요. 찾는 데 좀 시간은 걸렸어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그애는 주로 중증 장애인만 돌보는 데로 보내졌더군요. 그게 바로 요 너머에 있는 ‘천사들의 집’이에요. 나만 아는 그애의 신체적 특징도 있고 해서 난 어렵지 않게 그애를 알아볼 수 있었죠. 그 기관이 가톨릭 계통에서 운영하는 데라 나는 가톨릭 영세까지 받고 봉사자가 돼서 그 집을 수시로 드나들게 됐죠.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내가 안정을 찾자 무슨 눈치를 챘는지 남편의 생지랄이 도진 거 있죠. 내 자식 어따 갖다버렸나 대라고, 술만 먹고 들어오면 이렇게 내 살을 지진답니다. 술 안 먹을 때는 멀쩡해요. 아이들하고 놀아주기도 잘하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저를 위해주고 지진 자국이 덧나지 않게 연고도 사다가 정성스레 발라주고. 그럴 때 보면 눈물까지 글썽해요. 내 상처는 몸 밖에 있지만 그의 상처는 몸속에 있다는 걸 느끼죠. 우리 둘 다 견디기 위해선 상처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그까짓 거 말하지 그러냐고요? 못 해요. 아니, 절대로 말 안 할 거예요. 나한테는 그애를 버리고 얻은 두 아이가 그애 못지않게 중요하거든요. 두 아이는 상처 없이 키우고 싶어요. 내가 버린 아이는 잘 지내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지만 천사 대접 받으면서 살고 있죠. 나는 그애를 편애하지만, 순전히 편애하는 재미로 살지만 그애는 어떤 봉사자에게나 공평하게 천사의 웃음을 웃죠. 그래서 그애하고 같이 있는 동안은 나도 천사가 돼요. 나에게는 그런 효자가 없답니다. 만약 그애가 어디 있다는 걸 남
편이 알아보세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돼버릴걸요. 그인 나처럼 강하지 못해요. 나는 우리 네 식구의 가정도 지켜내야 하고 내가 버린 아이의 행복도 지켜야 해요.
우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버거울 때를 맞추어 보살님이 나무관세음, 나무관세음……. 하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소아마비’가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하고 보살님의 회색 옷자락을 장난스럽게 붙잡고 늘어졌다.
“졸려서 그러는데 그냥 가찮으면?”
“듣기만 하셨잖아요. 보살님도 한마디 하셔야죠. 전 아까부터 보살님이 할 말이 제일 많은 분이라고 여겼는데…… 해보세요. 듣고 싶어요. 사람들 마음속엔 참 겹이 많거든요. 나도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보살님도 한 겹쯤 벗어봐요. 어서요. 그래도 나체(裸體) 안 나올 테니, 안심하고.”
“무슨 실례야. 점잖은 분한테.”
내가 나무라자 뜻밖에도 보살님이 나도 점잖은 사람 아닙니다,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
‘보살님' 의 고백
그래요. 사람은 참 겹이 많지요. 맨몸뚱이가 나올 때까지 벗으려면 이 밤이 모자랄 테니 이 승복 한 겹만 벗어볼게요. 저 수리산 골짜기에 있는 암자는 죽은 영감님이 퇴직금으로 사놓은 집이었어요. 딸린 텃밭과 임야도 좀 되고요. 그때 남편하고 친분이 있는 이 고장 군수가 그 근처에 뭐가 들어선다는 정보를 주어서 산 것 같은데 우리 영감은 그 땅이 마음에 들어서 산 거지 뭐가 들어서서 땅값이 오르지 않아도 타격받지 않을 만큼 노후 준비가 돼 있는 양반이었어요. 여름에는 거기 와서 농사 흉내도 내면서 우리도 이만하면 잘 늙었다고 만족해하는 재미만 해도 들인 돈이 안 아까웠죠. 성수기엔 우리 식구 말고도 와서 놀다 가겠다는 친구들이 줄을 서서 비어 있을 틈이 거의 없었죠. 영감님 친구나 내 친구들이나 그까짓 별장은 있어 무엇하나, 이렇게 별장 가진 친구가 있는데, 하면서 만족해하는 선량하고 욕심 없는 친구가 대부분이었어요. 우린 별장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산장이라고 불러주길 바랐죠. 그게 그거지만 각자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 집에 딸린 산에서 송이도 좀 났기 때문에 재주껏 송이를 채취해서 생으로도 먹고, 재래식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때다가 사윈 불에 얹어 구워서 왕소금에 찍어 먹는 맛에 재미를 붙이면 다들 좋아 죽고 못 살더라구요. 겨우내 때고도 남을 장작을 들여놔주는 친구도 있고, 내가 신경쓸 새 없이 어느 틈에 대형 냉장고에 고기랑 과일을 채워주는 친구도 있고, 우리 아는 사람들은 죄다 큰 부자는 없어도 남에게 신세지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다 영감님 인복이었죠. 그 집을 좋아하는 모임까지 만들어가지고 영감님 칠순도 거기서 할 거라고 벼르더니 칠순을 못 넘기고 영감님이 먼저 가셨어요. 그분과 함께 그 집의 전성기도 가버렸죠. 아들네도 딸네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그집에 제 식구들을 데리고 왔지만 어딘지 의무적이었어요. 손자들은 산보다 바다를 더 좋아한다나봐요. 큰아들이 인도네시아 지사로 발령이 나서 제 식구 데리고 삼 년 예정으로 그쪽에 나가 살게 되었어요. 내가 봐줘도 되는데 그 더운 나라에 어린 것들을 다 데리고 가는 게 좀 그렇더라구요. 몸이 약한 큰손자는 내가 데리고 있고 싶었어요. 우리 같은 구닥다리 세대에겐 맏손자의 의미가 각별하잖아요. 그 녀석도 저를 유난히 따랐구요. 반년 만에 그애만 즈이 애비가 도루 데리고 왔더라구요. 그애 밑의 두 애는 그애들은 쌍둥이였어요. 현지 학교에 잘 적응을 하는데 그애는 학교 가기 싫어하고 할머니만 찾는다고. 나한테 맡기면서도 제발 오냐오냐 끼고돌지 말고 엄하게 키우라고 설교까지 하더라구요. 나도 오기가 있는지라 삼 년 후에 가족이 합쳤을 때, 제 동생들은 영어를 자유로 나불대는데 걔반 못하면 기죽을 것 같아서 딴 과목은 학원만 보내고 영어는 입주하는 독선생을 붙였답니다. 선생은 어려서 이민가서 영어는 원어민 수준인데 한국에서 취업하고 싶어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은 여기저기 학원강사로 돌 뿐 제대로 된 직장을 못 잡았으니 숙식을 제공하고 용돈 수준의 사례만 하면 될 거라는 게 소개한 사람한테서 들은 조건이었어요. 제 새끼가 늙은이하고만 있게 된 걸 걱정하던 자카르타의 아들 내외도 대찬성이었죠. 졸지에 세 식구가 됐죠. 젊은 남자가 집에 있으니까 좋더라구요. 집에선 한 끼만 먹겠다고 해서 저녁 반찬에 신경쓰는 것도 처음엔 부담스럽더니, 저 사람 덕에 우리 식구가 반찬 없는 밥 안 먹고 챙겨먹는다고 돌려 생각하니 그 또한 좋더라구요. 여름에 우리 산장으로 피서만 안 왔어도 좋았을 것을. 명색만 방학이지 손자도 선생도 쉴 틈이 너무 없어서 뭔 놈
의 세상이 이런가,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어렵게 아이하고 선생하고 같이 쉴 수 있는 날을 뽑아내어 겨우 마련한 여름휴가였죠. 여긴 그때부터도 서울보다 비가 많은 고장이었나봐요. 오던 날 밤부터 쏟아지던 폭우가 그 다음날까지 계속돼서 계곡에 나가 놀 수도 없고 등산도 할 수 없고 집에 틀어박혀 TV나 볼밖에 할 일이 없더군요. 손자는 제 방에서 혼자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고, 난 선생하고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데 밖에서는 천둥번개가 무섭게 치더군요. 천등번개 때문인지 선생하고 나하고의 거리는 차츰 좁혀져 거의 붙어 앉다시피 했어요. 처음엔 홈드라만 줄 알았어요. 미국의 한적한 교외의 중산층 동네가 나오고 황금색으로 물든 가로수 길을 매끈한 차가 미끄러지듯이 지나가고 그림 같은 집 앞에 파티에서 돌아오는 다정한 중년 부부가 내려서 명랑하고 들뜬 목소리로 집에 남아 있는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참하게 살해된 딸의 시신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거예요. 나는 그들의 비명소리보다 더 큰 비명을 치르며 선생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죠. 선생의 상체가 나를 감싸고 부드럽게 다둑거리는 게 느껴져 눈을 뜨니 화면은 경찰이 도착한 장면으로 바뀌었더군요. 나는 내 경솔이 민망스러워서 변명처럼 한다는 소리가, 아이고 놀라라, 이것 좀 봐요, 하고 선생의 손을 끌어다가 나의 가슴에다 대고 내 심장이 얼마나 벌렁거리는지 느끼게 했죠. 선생이 먼저 손을 빼더군요. 내 얼굴이 불같이 화끈댔는데 그건 아쉬움이었어요. 그때 내 나이 이미 육십대 중반이었는데 어쩌자고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접촉에 그런 황홀한 기쁨이 숨겨져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것처럼 느꼈을까요. 죽은 영감하고 연애결혼은 아니었어도 의좋은 부부였고 부부 생활에도 아무 문제없이 아들딸 잘 생산했는데 그게 다 헛산 것처럼 무의미해지더라니까요. 미쳤지요. 그 나이에 내 인생의 전부를 부인해도 그만인 사건을 만들었으니까요. 그후엔 세상이 다 달라졌죠. 양양까지 장도 같이 보러 가고 반찬도 같이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그전에도 선생은 미국서 자란 티 나게 그런 일들을 자연스럽게 도와줬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일을 핑계로 그의 몸과 닿을 때마다 떨리는 쾌감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이 오락처럼 즐겁기만 했죠. 같이 자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냐고요? 아뇨, 전혀 안 했어요. 남편과 살을 섞었던 일까지 불결하게 느껴진걸요. 그때 나는 완전히 어른의 세계가 열리기 전의 이팔(二八)로 돌아갔으니까요. 꿀 같은 여름휴가가 끝나고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그 전낱 밤, 양양으로 장을 보러 가자고 선생을 꼬셨죠. 건어물이 서울보다 싸다는 이유였지만 내 속셈은 따로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한번 더 안겨보고 싶었을 거예요. 번쩍번쩍 야한 조명이 빙글빙글 도는 나이트클럽 앞애서 구경삼아 한번 들어가보자고 했죠. 좁은 공간에서 비비적대며 광란하는 젊은이들 사이로 용감하게 섞여보았지만 리듬감이 부족한 나는 어색하게 겉돌다가 그를 잃어버렸죠. 그는 젊은이답게 능숙했죠. 블루스를 출 때는 젊은이들이 많이 줄어서 홀이 한결 헐렁해졌어요. 선생이 나더러 같이 추자고 하데요. 블루스는 더군다나 못 춘다고 했더니 신발 벗고 자기 발등에 올라타라는 거였어요. 하라는 대로 했죠. 선생도 나도 몸무게에 신경 안 썼어요. 마치 내 몸이 그네를 굴려 허공으로 치솟은 이팔의 춘향이가 된 것처럼 치마폭에 바람이 잔뜩 들어서 봉봉 떠다녔으니까요. 너무 즐거워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더럭 겁이 나더군요. 낮에 한바탕 폭우가 지나간 날이었어요. 건어물은 샀는지 말았는지 생각도 안 나네요. 무도회에서 돌아오는 젊은 한 쌍처럼 상기된 뺨을 밤바람에 식히며 산장에 돌아왔을 때 집이 비어 있는 거예요. 손자의 이름을 소리소리 부르며 찾아 헤매다가 불길한 생각에 경찰에 신고해 도움을 청했지만 다음날 찾은 건 개울 하류 바위틈에 걸려 있는 그 아이의 시체였죠. 우리가 밤늦게까지 안 오니까 아마 마중을 나갔겠죠. 그 기막힌 소식을 듣고 인도네시아에서 아들만 오고 며느리는 안 왔더라구요. 누가 보기에도 내가 그닥 큰 잘못을 한 걸로 보이진 않았나봐요. 아들이 오히려 미친 듯이 울부짖는 저를 위로하더군요. 그 지경까지 가서도 난 선생이 나를 옆에서 지켜주고 다둑거려주는 게 기분이 좋았어요, 그 맛에 더 난동을 부렸는지도 모르지요. 선생도 아마 그걸 눈치챘을 거예요. 손자 장례 치르고 나서도 한동안 우리 집에 더 머물렀으니까요. 언제 어떻게 그 꿈에서 깬 줄 알아요? 어느 날 선생이 정색하고 나에게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아이가 죽고 나서도 그애 선생이었을 때 주던 만큼의 사례를 했는데도 그러지 뭐예요. 취직이 뜻대로 안 되니 사업을 해보고 싶다나, 하면서요. 적지 않은 거액이었어요. 비로소 정신이 퍼뜩 들면서 발바닥이 땅에 닿더군요. 순식간에 내 안에서 정욕과 물욕이 비기고 텅 비는 걸 느꼈죠. 거절하고 적당한 퇴직금을 줘서 그를 내보냈죠. 도대체 사람이라는 건 뭘까. 정욕과 물욕을 현세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한가. 그런 오죽잖은 고뇌 끝에 산장을 큰 절에 기증해서 암자를 이룩한 후에는 거기다 손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수시로 드나들며 명복을 빌죠. 이러다 머리 깎고 중이 된다고 해도 내 죗값이야 어디 가겠어요. 사실은 그러지도 못해요. 아직도 가진 게 꽤 되니까요.
‘보살님’의 고백이 끝나자 다들 나를 쳐다봤다. 이번엔 네 차례라는 채근 같기도 하고, 저 여자도 설마 입을 열겠지, 지켜보려는 짓궂은 호기심 같기도 했다. 인간이기에 인간이 아니었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은 정욕보다도 물욕보다도 강하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그 욕망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여태까지도 잘 방어해왔다. 이러한 나를 야유하듯이 ‘소아마비’가 말했다.
“내가 아까 말한 거 여태까지 아무한테 말하지 않던 거예요. 눈치채고 있는 사람도 없어요. 완전범죄였는데 말해버리니까 되게 개운하네요. 살 것 같아요.”
다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줄 안 걸 말해버리고 나니까 이렇게도 살 것 같다는 데 동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말대로 나는 도덕적인 강박증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 고백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측한 스캔들인 건 분명하다. 내 보기에 그들은 그런 망측한 이야기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과장까지 해가며 털여놓았다. 필시 소문날 걸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터. 어디 사는 누구인지 주소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데 누가 어떻게 소문을 내겠는가. 그들의 보안은 이렇듯 완벽하지만 나는 다로다. 나는 천년 묵은 고목처럼 한자리에 뿌리박고 누대를 살아온 이 고가의 주인이다. 상속녀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존재증명 은 충분할 것이다.
“난 보시다시피 세상물정 모르는 꽉 막힌 여자랍니다. 살림 밖에 몰라요. 여러분처럼 화려한 아니지 참, ‘뜸’씨에겐 미안 ― 과거가 없어서 미안해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하품을 하고, 부엌하고 붙은 안방에다 그들 세 사람의 자리를 나란히 깔었다. 이부자리를 따로따로 깔고도 여유가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나는 혼자 자고 싶었다. 마루를 사이에 둔 건넌방은 안방보다 훨씬 좁다. 그러나 침대가 있어서 남편하고 함께가 아닐 때는 거기서 혼자 자버릇한 방이다. 금방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서 툇마루 밑에서 고무신을 찾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휘영청하다. 준수한 산봉우리들에 안긴 동네이다. 안방에서 자는 세 여자의 편안한 숨소리가 들릴 듯이 고요한 밤이다. 당신들은 왜 나에게 그런 무섭고 천박한 비밀을 털어놓은 거죠? 날 언제 봤다고, 날더러 어쩌라고? 마치 유도심문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처럼 아찔하다.
그날 밤도 저 산봉우리들은 저러했을까. 그날 밤의 산봉우리는 저렇게 무심하지 않았다. 암벽은 곤두서 있었고 숲은 선혈이 낭자해서 몸을 뒤틀었다. 단풍철이었다고 해도 밤중에 붉은빛이 그렇게 드러나 보였을 리 없건만 내 심상엔 그렇게 남아 있다. 그날 밤 내 마음에 인화된 산이 진짜고, 여기 올 때마다 대하는 현실의 산이 가짜 같다. 마치 화집이나 미술관에서 세잔이나 고흐가 그린 풍경화를 보고 깊이 감동받은 일이 있다면 그후 그 그림에 영감을 준 현실의 경치 앞에 설 기회가 생겼을 때, 현실이 가짜고 그림이 진짜인 것 같은 착란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의 이 집은 사랑채와 부속건물을 합해 남아 있는 안채의 세 곱은 되는 규모였다고 한다. 소유하고 있는 땅도 많아 식량난이 극심했던 일제 말기에도 굶주림은 몰랐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남들이 배고플 때 우리만 배를 채운 벌을 톡톡히 받았다. 그때 이 고장은 삼팔선 이북의 땅이어서 김일성이 통치했다. 토지는 소작인들 차지가 되었고 집은 머슴들이 차지했다. 그때만 해도 삼팔선이 허술해서 산을 타고 남으로 야반도주하는 집이 몇 집 걸러로 생겨나곤 했다. 지주 아니라도 일제 때 면 서기만 했어도 반동으로 모는 세상이었다. 옹색하고 남루한 집에서 겨우 비바람이나 피하게 된 신세는 집안의 최고 어른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멸문지화(滅門之禍)로다, 멸문지화로다’ 라는 중얼거림을 줄곧 입에 달고 살았다. 그나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시냐는 구박이나 받기 십상이었다. 역사의 소용몰이도, 위대한 혁명도 우리 할아버지에겐 한낱 가문에 미치는 재앙으로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그나마 우리 식구가 굶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때 서울 가서 전문학교까지 나온 삼촌이 고향에 와서 야학을 하면서 가르친 청년 중에 그 체제에 잘 적응하고 득세까지 한 이가 생겨난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식구들이 다 죽상이 되어 전전긍긍할 때 그 삼촌 홀로 희망을 잃지 않고 씩씩했으니까. 그 와중에 삼촌은 결혼까지 했다. 솔가해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만 엿보던 소심한 아버지는 그 꿈을 단념했다. 식구가 다 없어진다면 모를까, 남아 있는 식구가 있다면 고초를 각오해야 했다. 가까운 친척이나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가족보다 더 모진 닦달질을 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번성하던 마을이 인구로나 인심으로나 삭막해 지기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후에 닥친 6·25 전쟁 때만이야 했겠는가.
우리 식구는 인민공화국에서 6·25를 맞았다. 인민군이 승승장구한다고 했다. 신혼의 삼촌도 인민군으로 나갔다. 대구, 부산 함락은 시간문제고 남한 전 국토를 해방시킬 날도 머지 않았다고 했다.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길 참 잘했다고 아버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기세대로라면 제주도까지 해방시켰을 무렵에, 패잔한 인민군이 야밤을 틈타 북으로 향해 마을을 통과하고 나서 며칠 동안 마을이 텅 비었다. 우리 식구 말고도 사람 사는 집은 여럿 됐지만 누가 통치하는지 모르는 세상은 빈 거나 마찬가지였다. 빈 세상이 학정(虐政)보다 더 두려워 사람들은 집 안에 꼭꼭 숨어살았다. 국군은 외국 군대의 지원을 받고 그렇게 승승장구한다고 했지만 소문이었을 뿐 이 마을에서 외국 군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사람은 없었다. 압록강가까지 몰린 인민군은 중공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산골이지만 농지도 넉넉해 살기 좋은 마을이었지만 대처로 통하는 교통이 불편해선지 중공군 또한 소문이었을 뿐 볼 기회는 없었다. 내 평생 이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 봤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외부와의 소통 부재 때문에도 그해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졌을 것이다. 예년보다 봄도 늦게 왔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땅을 놀릴 수는 없는 농사꾼들이 기지
개를 펴며 밭 갈고 씨 뿌릴 엄두를 낼 무렵, 이 마을은 인민군 세상이 됐다가 국군 세상이 됐다가를 반복하는 격전지가 됐다. 양민의 희생을 원치 않기는 국군 쪽이나 인민군 쪽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민들이 남이나 북으로 피난가주기를 바랐지만 할아버지 통솔하에 있던 우리 집은 그동안도 집을 떠나지 않고 똘똘 뭉쳐 굳건히 버티었다. 그 덕에 우리 집은 휴전 후엔 저절로 남한 사람이 됐고 집과 땅도 찾았다. 우리를 내쫓고 인민위원회로 쓰던 사랑채는 불을 지르고 떠나서 없어졌지만 덩그렇게 높이 지은 안채는 성하게 남아 있었다. 요즘 설악산 쪽으로 놀러 가는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치는 삼팔선이었다는 표지판 이북, 휴전선 이남의 남한 땅은, 오십여 년 전 그런 자반 뒤집기 전란을 견뎌낸 국토인 것이다.
인민군에 나가 싸운 삼촌은 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미리 약속이 돼 있었는지 삼촌댁도 시집 식구와 행동을 같이하지 않고 원산의 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삼츤을 좋아했는데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삼촌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고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삼촌을 좋아했다는 게 생각만 해도 쓸쓸해지는 상처가 되었다. 삼촌에게선 우리 식구들에게는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옷자락에서 풍기는 냄새까지 향긋했고 무뚝뚝한 식구들에게는 없는, 연민을 숨기지 못하는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삼촌을 통해 막연히 동경하게 된 교양인의 냄새가 사라진 우리 집은 어린 나에게 무지렁이들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왕년에 한학 좀 했다고 문자 쓰기 좋아하는 할아버지도 무지렁 이의 우두머리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가 또 그 어려운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집을 찾았다고는 하나 사랑채를 복원한 것은 아니어서 안방에서 우리 사남매 중 셋이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고, 건넌방은 아버지하고 엄마가 막내를 데리고 잘 때였다. 한 밤중에 밖의 어둠이 술렁거리고, 자는 막내를 엄마가 안방에 데려다 뉘고 나면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또 그 소리 ‘쇠문지화로다, 쇠문지화로다’를 주문처럼 떨리는 소리로 외곤 했다. 나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서도 싫고 무서워서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날도 또 그 소리에 잠이 깬 것도 같고, 요줌이 마려워서 잠이 깬 것도 같았다. 벌떡 일어나보니 할아버지는 평상시처럼 주무시는 것 같은데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막냇동생이 누워 있었다. 쇠문지화 소리 없이도 바깥의 공기가 심상찮게 술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뒷간에 가기 무서웠지만 오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일어나 나가는 걸 보고 할아버지가 요강에 누거라, 맹숭한 소리로 명령했다. 엄마 방 요강에 누고 올게요. 건넌방으로 건너가려고 툇마루로 나갔다가 나는 아버지와 엄마와 삼촌이 마당에 있는 결 보았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름다운 달밤에 그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하고 엄마와 삼촌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실은 다투고 있는 건 삼촌과 아버지고 엄마는 두 사람 주위에서 고사 지낼 때처럼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제발제발 그만하라고 말리다가 돌변해서 죽여버려, 저런 동기간은 없는 게 나아, 차라리 죽여버려, 내가 아는 엄마는 그런 모진 저주의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들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겨우 열 살이었다. 아버지가 삽을 높이 쳐들었다. 계획적이었는지 위협용이었는지 그때까지 아버지는 삽을 땅에 꽂고 거기 의지해 서 있었다. 죽여버리라는 모진 말을 하던 엄마가 기겁을 하고 아버지의 허리에 매달렸다. 거구인 아버지의 힘찬 뿌리침에 엄마가 땅으로 나자빠진 것과 삽이 삼촌의 어깨를 후려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순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삼켰다. 그러나 삼촌의 몸이 사선으로 번갯불 같은 균열을 일으키며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걸 여실히 본 것처럼 느꼈다. 안방으로 돌아온 나는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고도 아버지가 동생을 쳐 죽인 그 삽으로 땅을 파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인 악몽 속에서도 그 광경은 여실하게 재현돼 먼 훗날까지도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별이 잘 안 됐다. 다음날 아침에도 늦도록 이불 속에서 남몰래 떨고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시골의 바람 소리,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 마당에서 동생들이 장난치다 아버지에게 야단맞는 소리가 평상시와 다름아 없어서 살금살금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어디쯤에 삼촌을 파묻었는지 흔적도 없이 우리 마당은 고루 평평하고 단단했다. 아버지는 동생을 쳐 죽인 삽 등으로 밤새도록 지경 다지기 까지 해놓은 모양이다.
그후부터 우리 집엔 기이한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 집만의 평화여서 그렇게 기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유지해온 마을 사람들 사이엔 거의 숨기는 게 없었다. 숨기려도 숨겨지지 않게 사는 내막이 단순했다. 복잡해지기 시작한 건 해방이 되고 이 땅이 이북에 속하고부터 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대결구도여서 단순한 사람들도 이해하기 복잡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북 땅이었다가 이남 땅이 되고부터는 사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 집도 온전한 식구들이 없었다. 인민군에 나갔거나 혹은 그쪽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경력 때문에 겁을 먹고 제 집 제 땅뙈기보다는 체제를 택해 이북에 남은 식구나 친척이 없는 집이 없었다. 그런 식구들이 우리 삼촌처럼 야밤을 틈타 다녀가는 건 남한 당국에선 간첩으로 간주돼 반드시 신고를 하기로 돼 있었다. 도무지 간첩질 같은 걸 할 것 같지 않은 자식이나 동기간이 돈이나 식량 등 물질을 요구하는 걸 거절하거나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분명히 아무 눈에도 안 띄게 감쪽같이 다녀갔건만 다음날 경찰에 잡혀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오는 일도 심심찮게 생겼다. 너무 얻어맞아서 병신이 되고 만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일러바쳤을까 서로 의심하고 넘겨짚어 다투기도 하면서 마을의 인심은 점차 예전 같지 않아졌다. 패가망신한 집도 생겨나고 가산을 정리해 가까운 도시로 나가 장사꾼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간첩을 신고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런 일루 돈을 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마을은 피폐해지고 인심만 흉흉해졌다.
아버지가 삼촌을 삽으로 쳐 죽였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후엔 한 번도 삼촌이 찾아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촌이 찾아올까봐 늘 마음 졸이고 살던 불안한 분위기는 기이한 평화로 변했다. 그후에는 한 번도 할아버지 입에서. 별문지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기이한 평화 속에서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우리 사남매도 차례로 마을을 등지고 인근의 소도시로, 맨 나중엔 서울에 정착했다. 그동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과 산은 선산만 남기고 우리들의 학비로 변했다. 남동생이 서울서 직장을 갖게 된 뒤에도 아버지와 엄마는 그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텃밭과 송이가 나는 선산을 어떻게 버리고 떠나냐는 부모님의 말씀을 나는 시신을 숨긴 마당을 떠날 수 없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골육상잔의 기억은 돌파구를 찾지 못해 나하고 한 몸이 되었다. 내 몸은 툭하면 떨리고 아팠다. 떨고 있는 내 몸을 보호하고 힘이 되어줄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건 권력이었다. 출세의 야망에 불타는 고시생을 애인으로 만들고 그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 같은 시골뜨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권력의 산하로 들어갈 수 있는 최선의 지름길이었다. 지금의 남편이 몇 번씩이나 낙방을 하는 바람에 그 길도 지름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을 견디게 한 나의 지구력은 그의 신뢰감을 돈독히 해서 그가 고시에 붙은 후에 무난히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곧잘 하던 내 바로 밑의 남동생한테 미국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기간이 그쪽에 많이 가서 자리잡은 처가의 영향일 것이다. 마침내 이민에 성공한 남동생이 그쪽에서 자리잡으면서 차례차례 동생들을 불러들였고 부모님까지 모셔갔다. 그 시골집은 내 차지가 되었다. 팔면 얼마간의 목돈을 쥐고 아들한테로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딸한테 넘겨주고 떠났다. 말씀인즉슨 시집갈 때 아무것도 못 해준 게 걸려서 마지막 남은 재산을 주고 싶다는 거였다. 그 듣기 좋은 말이 나에겐 마치 시한폭탄을 넘겨주면서 하는 감언이설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필 내가 그 최종적인 소유자가 되다니. 그러나 장인 장모가 차지하고 있을 때부터 그 집을 좋아해서 자주 찾아뵙던 남편이 좋아하는 걸 보면서 나도 그 선물을 고맙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소유가 되자마자 남편은 낡고 불편한 집을 헐고 별장풍의 멋진 집을 짓고 싶어했지만 내가 한사코 말렸다. 보나 마나 새집을 지으려면 불도저가 마당 먼저 파헤치게 될 것이다. 삼촌의 몸은 썩었을지라도 유골에는 타살된 흔적이 명백히 남아 있을 것이다. 몇천 년 전의 유골에서도 별의별 것들을 다 발견해내는 발달한 현대의학은 DNA인가 뭔가 하는 검사를 통해 그가 나의 삼촌이라는 것쯤
문제없이 밝혀낼 것이다.
만일 땅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실은 내가 더 무서워하는 건 삼촌이 그날 살해되지 않고 북쪽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삼촌의 성품이나 행적으로 봐서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남편이 법조계에 몸담고 승진도 순조로울 때는 세상이 요새보다 훨씬 경직돼 있을 때여서, 처가라도 이북과 연관이 있는 가족이 있으면 승진이나 출세는 물론 해외여행에도 지장을 받을 때였다. 남편은 나에게 그런 삼톤이 있는 것도 몰랐다. 나는 그 살해 현장을 단지 목격만 한 게 아니라 공범자였던 것이다. 나의 시골집 마당은 아직도 흙바닥이지만 양회 바닥처럼 단단하다. 내 친구의 어머니 시신까지 하룻밤 사이에 동해바다로 토해낸 폭우도 우리 마당의 견고함을 범하진 못했다.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아침상에 앉은 세 사람은 모처럼 잘 잤다며 집터가 좋은가 보다고 덕담까지 해주었다. 내 보기에도 그들은 어제보다 훨씬 밝고 개운해 보인다. 어디로 보나 망측하고 지저분한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나고 샘도 났다.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툭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풍기면 어쩌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들을 했죠?”
“어떻게 풍겨요. 우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끼리도 어제 같이 잤지만 서로 그런 거 안 물어봤거들랑요.”
용용 죽겠지 하는 투의 ‘소아마비’의 대답은 옳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왜 물어봤을까.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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